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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直指)

등록일 2021-10-31 18:20 게재일 2021-11-0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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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김천 직지사로 이사온 삼층석탑.

해가 뜨기 전 직지사로 향했다. 두 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라 새벽부터 서둘렀다. 어느 절이나 산사를 제대로 보려면 방문객이 적은 시간에 가야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 차를 세우니 서늘한 아침 공기만 일주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직지’라는 절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다. 지난해 이맘때 즈음, 구미의 도리사를 찾았더니 산책로 끝에 전망대에 오르니 아도화상이 태조산에 절을 짓고 난 후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며 저곳에도 좋은 절터가 있다 하여 직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한 가지이다. 또 다른 설은 능여가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붙여졌다 한다.

가람 배치가 다른 절과 좀 다르다. 오래된 향기가 물씬한 대웅전의 문살도 도톰했다. 거기다 꽃 문살이 아닌 반듯한 격자무늬다. 담백한 맛이 ‘나는 직지다’ 하는 듯했다. 마침 찾아간 시간이 예불 드리는 시간인지 전각마다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우렁차다. 절의 규모가 크다는 것을 염불 소리로 말해주었다.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선창하면 무릎 꿇고 앉은 신도들이 관세음보살 맞받는 것 같다. 골짜기 가득 목탁 소리로 가득 찼다. 직지사에서 처음 느낀 절 분위기다.

그보다 더 눈에 뜨이는 차이는 탑이 많다는 점이다. 보통은 일 금당 이 탑 형태이다. 불국사의 대웅전 앞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자리한 모양처럼. 처음 직지사가 세워질 때는 오층목탑이었다는데 지금은 대웅전 앞에 두 개의 삼층탑이 나란히 섰고, 비로전 앞에도 삼층탑이 성보 박물관인 청풍료 뒤에도 삼층석탑이 있다.

신라 초기 눌지왕 2년 아도 화상이 터를 잡을 때 만든 오층목탑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머리 깎고 출가한 절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전각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지금의 네 개의 탑은 제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터전을 옮겨왔다. 경북 문경군 산북면 옛 절터인 도천사에 쓰러져 있던 석탑 세 기는 1974년 이곳 직지사로 옮겨 복원되었다. 첫 집에서는 나란히 서 있었으나 직지사의 형편에 따라 떨어지게 됐다. 나머지 하나는 구미시 선산읍의 강락사 옛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선산 군청 앞마당으로 옮겼다가 다시 1980년 10월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원래 직지사가 낳은 탑은 없다. 다 데려온 자식인데도 늠름한 모습을 잃지 않도록 돌보고 있는 것을 보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님이 세 자녀를 다 키워 첫 딸은 시집 보내고 두 아들은 도시로 유학을 보낸 그즈음, 시동생이 어린 조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집안 어른들이 모여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에 대해 논하였지만, 선뜻 맡겠다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걸 어머님이 품으셨다.

새로 이사 온 곳이 낯설어 오줌을 싸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제는 육아를 벗어났다 싶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또다시 초등학교에 가는 아이의 준비물을 챙기고 학부모가 되어 담임과 상담도 여러 번이었다. 낳은 자식들과 다르게 자꾸만 어긋나가는 아이를 중학생이 될 때까지 돌보셨다. 대학 등록금도 모아서 따로 불러 주시는 걸 본 적도 있다. 지금은 결혼해 아들을 낳아 일가를 이루었다고 명절에 시댁을 찾아오곤 한다.

데려온 자식을 내 자식처럼 키우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내가 두 아들을 키우면서 더 깊이 깨달았다. 어진 어머니의 속이 녹아내리는 시간이 쌓인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다들 백수를 사는 인생인데 어머님은 암 투병을 하시다 여든 번째 생일을 하늘나라에서 맞으셨다.

직지를 말 그대로 해석하면 바르게 가리킨다는 뜻이다. 어머님이 며느리인 내게 말이 아닌 몸으로 가리킨 것은 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시집와 25년을 살면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신 적이 없다. 그저 몸소 앞서 걸어가셨다. 부족한 것뿐인 며느리지만 데려온 자식도 내 자식이다 ‘직지’ 하셨다. 옮겨온 곳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삼층탑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어머니를 기린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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