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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花石)

등록일 2022-05-08 20:06 게재일 2022-05-0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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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흥해향교.

오늘 아침 노래 하나가 입에 매달렸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어릴 적 이 노래를 들으면 왜 산에 메기가 산다는 거지 하다가 멜로디를 놓치곤 했다. ‘라디오에서 김창완 아저씨가 나와 똑같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아침에 떠오른 노래가 종일 따라다닌 것, 외국 사람 이름 매기가 물고기 이름 메기가 되어 뒤섞였던 기억이 같았다.

매기의 추억을 들으면 초등학교 시절이, 또 어떤 곡을 들으면 중학생 때가, 이 노랜 대학생이 되어 불렀었지. 노래가 지나간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화석(化石)이라고 읊조렸다. 지질학에서 화석이 발견되면 그곳이 고생대 땅이니 중생대 땅이니 나누는 시준화석이 있다고 한다. 시준화석이란 어떤 일정한 층에서만 발견되는 화석속 또는 화석종을 이르는 용어다. 생존 기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분포가 넓어야만 해서 예로부터 고생대의 삼엽충류, 중생대의 암모나이트류, 신생대의 포유류 등이 시준화석으로 이용된다.

내 추억의 시준화석으로는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이 풍금을 연주하며 알려준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임병수의 ‘약속’을 들으면 라디오 앞에 엎드린 중학교 3학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상은의 ‘담다디’를 들으면 교생 실습하던 가을이 내 몸 어딘가 저장돼 있다가 툭 튀어나와 가사 하나 잊히지 않고 따라부르게 한다.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 노래가 추억을 소환하는 화석이라는 김창완 아저씨 말이 딱 맞다.

이렇게 추억을 불러내는 시준화석이 또 있다. 꽃이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고 폭죽을 터뜨리는 산수유를 보면 비가 오는 날 함께 꽃내 골짜기에 산수유군락지를 함께 보러 갔던 현미씨가 생각나고, 통일전에 매화가 환하게 피면 꽃만큼 진한 향기가 입구부터 그득해 함께 코를 흠흠거렸던 은정씨 목소리가 들리고, 분홍빛 진달래를 보면 비슬산에 함께 올라 꽃길 사이를 누비던 경숙 순혜 언니가 생각난다. 꽃마다 데려다주는 사람이 다르다.

5월, 향교산에 이팝꽃이 뽀얗게 얹혔다.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마다 함박눈이 소복 쌓인듯하고, 늘어진 가지를 눈높이에서 마주하면 수북하던 이밥이 여러 개의 국수 가락으로 갈라져 흔들린다. 이래저래 보릿고개를 넘던 조상님들이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킬만하다.

오랜 시간 그곳에 잘 있어 주었다고 2020년 12월에 ‘포항 흥해 향교 이팝나무 군락’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561호(식물-군락)로 지정됐다. 옥성리 흥해 향교와 임허사 주변에 있는 군락지는 향교 건립을 기념해 심은 이팝나무의 씨가 떨어져 번식해 조성됐다. 예로부터 흰쌀밥 모양인 이팝꽃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등 선조들의 문화와 연관성도 높아 민속·문화적으로도 가치가 크다는 평가도 받는다.

십여 일 흥해 읍내 가로수부터 산까지 하얗게 뒤덮는다. 만개 하기 전에 민재씨와 같이 다니러 가 첫 눈맞춤을 했다. 며칠 뒤 선희씨와 도시락을 싸서 이팝꽃 그늘에서 점심을 먹었다. 삼 일 후 미정과 영희씨가 향교산을 모른다고 해서 가이드로 따라갔다.

갈 때마다 꽃그늘 아래에는 어제도 그제도 거기 머물렀다는 듯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신들이 가져다 놓은 의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이팝꽃이 그분들을 위로하고 그분들은 숲을 보전했다. 함께 같은 시간을 지나와서인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이다.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다들 어디서 들었는지 상춘객들이 몰린다. 커다란 렌즈를 단 카메라를 들고 꽃을 담느라 꿀벌처럼 나무 주위를 맴돈다. 우리도 계단을 따라 내려가 동네와 만나는 곳에 가지를 드리운 이팝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인증샷을 사진과 글을 나누는 SNS에 올리니 친구 주영이가 내가 선 곳이 자기 친정집 앞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친정집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니 반갑다고 했다. 흥해가 고향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내가 그 앞에 서서 꽃을 올려다볼 줄은 몰랐다. 이팝꽃이 피면 이제 소환될 친구가 하나 더 늘었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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