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린다.
이런 날이면 할아버지는 들에 나가 논둑을 한다. 겨우내 얼었다 녹아 금이 가거나 쥐구멍으로 허물어진 둑을 진흙으로 매끄럽게 새로 바르는 것을 논둑 한다고 했다. 삽으로 빗물에 젖은 흙을 떠서 둑에 발라 탁탁 치며 논에 물을 가두는 것이다. 할머니는 얼마 전 씨를 뿌려서 오종종 붙어 자란 모종을 속아 사이를 성글게 아주심기를 하셨다. 촉촉해진 밭에서 무럭 자라길 소원하시며 자신의 몸이 젖는 걸 감수하셨다.
어린 나는 따뜻한 방바닥에 엎드려 빌려온 만화 한 질을 다 읽었다. 창가에 속살거리는 빗소리에 맞춰 책장을 넘기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되게 가물었다가 소나기 쏟아질 때 마당에 날리던 흙냄새가 아직 어린 나이에도 반가웠다. 연추 끝 물받이에서 모인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 소리 같았다.
어른이 된 나는 이런 날 숲에 간다. 매월 둘째 주말에 언니들과 모임을 한다. 아침부터 회색빛으로 낮게 내려온 구름이 만나기로 한 12시가 되자 보슬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멀리 소풍을 가려고 한 계획을 비가 오니 취소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언니, 비 오는 수목원에 가 본 적 있나. 얼마나 좋은 줄 모르죠?” 내 말에 빗길 운전도 익숙하다는 순혜언니 차에 올라 구불구불한 길을 더듬어 경북 수목원으로 향했다.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중턱 즈음부터 길도 안개에 묻혀버렸다. 산을 산답게 만드는 나무들도 가지마다 물안개를 머금었는지 차분히 어깨가 내려왔다. 날이 좋은 날에는 산 아래 동네가 개미처럼 보였겠지만 안개 커튼이 드리운 탓에 사방이 온통 뿌옜다.
푸르른 5월 수목원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하지만 오늘은 비요일이라 아무도 찾지 않아 그 넓은 곳이 다 우리 차지다. 산책로를 따라 언니들 웃음소리만 가득하다. 뜨거운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서 들고 갔다. 처음 나타난 벤치에 앉아 따뜻함을 나눠 마셨다.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한 산 기운을 커피에 섞어 마시니 언니들의 입에서 한목소리로 ‘좋다’ 하고 탄성이 터졌다. 숲이 곧 분위기 좋은 카페로 변했다.
다시 조금 걷자 부슬거리는 비를 뚫고 달콤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흠흠, 이게 무슨 향일까 두리번거리니 삼엽으름덩굴이 아기 손톱만 한 꽃을 피워 터널을 이루었다. 그 아래 서니 향이 더 진하다. 으름의 꽃 향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이전엔 알지 못했다. 안개에 갇혀 향이 달아나지 못하고 더 오래 머무르는 듯했다. 비에 꽃잎이 떨어진 바닥이 붉다. 햇살에 금방 말라 사라질 것도 봄비에 더 오래 별처럼 발밑을 밝힌다.
전망대를 향해 올랐다. 저기 분홍 꽃잔디 사이에 무언가 움직인다고 언니들이 발길을 멈췄다. 산토끼였다. 갈색 털이 비에 젖어 춥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한발 다가가니 풀쩍 달아난다. 살금살금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어느새 숲 저쪽으로 얼른 몸을 감춰버렸다. 비 오는 날엔 사람들이 찾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토끼의 산책을 우리가 훼방 놓았구나 싶어 미안했다.
전망대에 앉았다. 우리 사이로 물안개가 지나는 게 보였다. 손에 잡힐 것 같다. 하지만 바람에 올라탄 안개에 붙잡혀버려 오히려 우리 볼이 촉촉해지고 말았다. 한참 산을 오르는 물안개에 갇혀 모두 말없이 비멍을 때렸다.
내려오는 길, 빗물 머금은 불두화에 넋을 잃고, 비에 젖어 보랏빛이 더 진한 팥꽃나무에 한눈팔고, 천천히 걷다 보니 잎새 뒤에 숨어 핀 은방울꽃도 덤으로 발견했다. 팥배나무, 등대꽃나무 같은 처음 듣는 나무의 이름표도 확인하며 걸었다. 그러다 숲속 갤러리에 들러 연구원들이 수목원에 자생하는 꽃을 말려서 만든 액자 구경도 하고, 도서관에서는 서랍 속에 진열된 씨앗 구경도 하고 숲에 어울리는 책도 펼쳐서 읽었다.
맑은 날이었으면 한 시간이면 돌아보았을 거리였다. 문 닫을 시간이라는 방송을 듣고 네 시간이 흐른 걸 알았다. 한나절 비 덕분에 숲에서 한 그루의 나무처럼 손끝까지 봄을 퍼 올렸다. /김순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