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앞마당에 보리가 누렇다. 작물이 자라서 약간의 곡식이 여무는 때인 소만이다. 낮에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줄기마다 꽃을 준비하고, 밤에는 소쩍새가 ‘너그 집에는 모내기했나?’하고 인사를 건넨다. 논에 물이 그득하고 어린 모가 바람에 허리를 흔들며 여름이 오는지 내다본다.
소만은 24절기의 여덟 번째 절기로 입하와 망종 사이다. 양력 5월 21일께부터 보름간으로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뜻이다. 이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진다. 보리 베기에 이어 밭농사의 김매기들이 줄을 잇는다. 초후에는 씀바귀가 뻗어 오르고, 중후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 가며, 말후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다.
진아씨와 점심 먹기로 하고 죽도시장에서 만났다. 이밥 반 보리밥 반 섞어서, 딸려 나온 나물 반찬 넣고 된장찌개 두어 숟갈 흩뿌려 비벼 먹는 집이다. 비빈 밥을 상추에 싸서 입안 가득 우물거리다 보면 요 며칠 시름 정도는 잊기도 한다. 속이 허할 때 늘 찾아가는 단골 식당이다.
골목이 헷갈려서 내 나름의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 우회전을 하다 보면 나타난다. 정오 즈음엔 줄을 서는 집이니 아점을 먹으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예전엔 가자미를 껍질이 바싹하게 구워 주더니 최근엔 고등어가 자주 상에 오른다. 집안에 비린내 베는 게 싫어서 생선을 거의 굽지 않는 나에게 주는 과자 선물 같기도 하다. 밥 인심이 좋아 대접에 가득 나와 우리는 늘 조금만 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그래도 넉넉히 담아 내온다. 철 따라 반찬이 바뀐다. 오늘은 쪄서 양념을 입힌 꽈리고추 무침이 맛있어서 한 접시 더 달라고 하니 처음 보다 두 배로 담았다. 성의가 고마워 꼭꼭 씹어 비우고 풋고추도 리필 했다.
나와 친구들은 보릿고개를 넘어보지 않은 세대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만 먹어서 질릴 일도 없었다. 부모님 세대까지는 보리를 추수하기 전까지 소나무 속껍질 벗겨서 만든 송기떡과 개떡으로 배고픈 봄을 이어갔다. 보리등겨를 섞으면 보리개떡, 곤드레를 추가하면 곤드레개떡, 쑥을 넣으면 쑥개떡이었다. 지금은 건강식이자 별미 음식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때,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매일은 아니어도 가끔 선생님은 도시락 검사를 했다.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하얀 쌀밥 사이에 콩이나 배에 줄이 선명한 보리가 뜨문뜨문 섞여야 통과였다. 깜빡하고 이밥만 싸 온 날엔 친구에게 보리 알 몇 개 빌려 박아넣었다. 분단과 분단 사이를 오가며 살피거나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열어 들게 한 후 앞에 서서 휙 둘러보기도 했다. 장려라기보다 강요였다.
그땐 도시락 검사만 한 게 아니다. 용의 검사라고 손등에 때가 있는지 손톱은 짧게 깎았는지 보고 혼을 내고 까마귀가 형님 하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월요일에 할 거라고 예고를 하면, 주말에 가마솥에 군불 지펴 데워서 커다란 다라이에 찬물 섞어서 씻었다. 오래 묵은 때를 한참이나 불려 돌로 문질러 때를 억지로 벗겨내야만 했다. 참, 여러 검사가 우리의 학창 시절을 지나갔다.
학교에서 집까지 한 시간이 더 걸리는 친구들은 도시락을 반만 먹었다고 한다. 반은 남겨서 중간에 고추장 한 숟갈 넣어 도시락을 흔들면, 서로 달라붙어서 섞이지 않는 쌀밥과 달리 보리는 미끌미끌해서 금방 빨갛게 간이 스며 먹기 좋았다. 먹거리가 귀한 시절 주식이자 간식이었던 보리밥이었다. 지금은 압력밥솥으로 간단하게 익히지만, 예전에는 보리를 먼저 삶아 시렁 위에 두었다가 쌀 위에 앉혔다. 번거로운 과정을 매일 했을 어머니들의 수고가 우리 도시락을 채웠었다.
그제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보리 순을 키우고 계셨다. 가위로 슥슥 잘라 주며 가져가서 샐러드나 전을 부쳐 먹으란다. 엄마는 보리 순을 키우고 나는 보리를 키운다. 종일 노란 털을 고르느라 바쁜 우리 집 막둥이다. 2년 전 보리누름에 우연히 찾아온 녀석이라 보리라고 불렀다. 코로나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올 때 문 앞에 마중 나오는 보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보리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는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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