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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

등록일 2022-04-24 19:48 게재일 2022-04-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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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제임스 루이스의 그림 ‘창가의 책읽는 소녀’.

혼자 묵독한다는 것은 19세기 중반까진 불가능했다. 그 이전엔 혼자서 책을 눈으로만 읽으며 사색에 잠기면 불온하며 위험한 자로 취급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말없이 읽어 부하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시저도 연애편지를 소리 내서 읽지 않은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니 지금은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조용히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집중이 안 되기 때문이다. 늦은 밤일수록 책 읽는 속도가 난다. 묵직한 책을 들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 쫙, 글쓴이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때론 내 생각은 다른데 하며 밑줄 옆에 메모를 남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 줄을 긋고 모서리를 접기도 해야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책 속에 있던 무심한 낱말이 그 순간 내게로 들어와 나만의 문장이 된다.

물건 사는 것 자체를 즐긴다. 눈으로 하는 쇼핑을 더 좋아하지만, 가끔 꼭 쓸모가 있지 않은 물건도 보기에 좋으면 그냥 사버린다. 볼펜, 수첩, 티셔츠.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많다. 물건뿐만 아니라 책도 충동구매를 한다. 신문에 광고를 보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책 소개하는 걸 보고 덜렁 주문해버린다.

또 좋아하는 작가의 새 책이란 이유로 내용도 보지 않고 사버리기도 한다. 고인이 된 작가의 단편집이 그랬다. 가격도 만만찮았는데 지금 아니면 못 살 것 같아서 저질렀다. 한정판이라는데 하면서. 다른 물건도 그렇지만, 책은 절판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음에 사야지 하다가 놓친 책이 여러 권이다. 그래서 눈에 들어올 때 사야 한다.

책이 배달되어 오는 날은 설렌다. 택배 상자를 뜯으며 연애편지를 볼 때 기분을 느낀다. 받은 책 겉장을 넘겨 그 책을 산 날짜와 이유와 그날의 기분 정도를 메모한다. 그래야 내 책이 된다. 오늘 도착한 택배는 상자가 아니라 비닐 포장만으로 우리 집까지 달려왔다. 명화가 많이 담겨 책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 걱정을 하며 뜯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배달 기사가 던졌는지 다른 상자에 눌린 것인지 뾰족한 책 모서리가 눌리고 찢겨 있었다.

받자마자 읽으려고 준비한 마음이 무색해졌다. 교환신청을 하니 다음날 새 책이 당도했다. 파란 표지를 조심히 넘겨 책을 두 번 받은 사연과 기분까지 적어, 내 책이라는 표시를 남겼다. 서문을 읽으며 작가의 손을 맞잡는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제 친구처럼 아는 책이 됐다. 그렇게 사 모은 것들이 한방 가득하다.

문제는 다 읽지 못한다는 점. 단행본이면 그날로 보았을 것을 전집은 방학 때 읽어야지, 주말에 봐야지, 미루다 몇 년이 흘렀다. 저렇게 묶여 있으니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못 읽은 상태다. 책꽂이를 볼 때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다. 다른 곳에 갔으면 사랑받으며 읽혔을 것을. 내 욕심에 갇혀 책꽂이에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기지개 한번 켜지 못했다. 집을 새로 단장하면서 먼저 정리한 것이 책장이다. 잡지류를 일 번으로, 색이 누렇게 변한 소설을 또 내놨다. 남편은 학창시절의 전공 서적도 버리려 했다. 안된다, 그건. 내가 그은 밑줄과 여백에 써놓은 글귀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느냐며 그 손에서 구해냈다. 두 권인 것과 죽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전집, 아이들 백과사전은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달 동안 반을 버렸다.

리모델링 후 새로 맞춘 책꽂이에 주제를 나눠서 꽂았다. 역사, 시, 수필, 소설, 그림책, 그 외의 책을 영역별로 꽂으며 또 3분의 1을 버렸다. 책 사이로 난 틈으로 여유가 들어앉으니 내 마음에도 또 살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공간이 생겨 허허로웠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낭랑한 책 읽는 소리는 여인이 담장을 넘게 했고,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한 계집아이가 귀동냥으로 천자문을 익힐 수 있게 했다. 글 읽는 소리는 비록 작지만,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도하며 오늘 밤도 펜을 들고 쓰윽쓰윽 읽는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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