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내지에 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이다. 섬사람들이 뭍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뭍에 사는 사람은 섬사람만큼 뭍이 그립지 않으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언제나 바다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함은 타성과 습관의 나락에 떨어져 망각과 상실과 만나는 법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주장한다.
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아시스를 찾는 목마른 나그네처럼 집착한다. 대상을 소유하겠다는 열망에 그는 온몸과 마음을 불사른다. 바라던 대상이 마침내 손에 들어오면, 그의 성취감은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의 내면에는 싫증과 권태가 슬며시 똬리를 튼다. 익숙함이 주는 진부함과 새로움을 향한 열망이 그를 다시 찾아온다.
세상과 인간을 염세한 쇼펜하우어의 놀라운 통찰이다. 짧은 문장 하나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 하지만 이런 명제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예외 때문이다. 주어진 관계와 물질과 인식의 범위 안에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소유’라는 어마어마한 수양과 깨우침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담고 마주한 구룡포의 풍경은 따사로웠다. 주말을 맞아 인파로 넘쳐나는 포구에서 오랜만에 흠뻑 마시는 갯내음과 바닷바람이 내장을 서늘하게 뚫고 지나간다. 오래 잊고 지냈던 시간이었군, 하는 잔상이 스치듯 지나간다. 생선회와 대게를 파는 가게의 번다함과 왁자지껄한 소음은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하다. 일상에 지칠 때 항구에 펼쳐지는 어물전을 찾으면 영혼과 정신이 일신되지 않는가?!
정겨운 대화와 주고받는 술잔과 활발한 저작(咀嚼)과 웃음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어느새 찾아든 저녁이 짙은 그림자로 사위를 감싼 후에야 술자리가 막을 내린다.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를 어린애들처럼 걸으며 마주한 등댓불이 눈과 마음을 대낮처럼 비춘다. 등대지기의 고단한 일상에 의지하는 고기잡이배며 여객선이며 화물선의 일꾼들이 떠오른다. 밤을 다퉈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선의 경적! 그들은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
밤하늘의 별과 선잠에서 깨어나 우짖는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삼삼오오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밤에는 과업과 관계와 일상에서 놓여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혹부리영감. 오래전 수련원 옆에 점방을 냈던 혹부리영감의 자랑스러운 딸의 얼굴이 설핏 떠오른다. 어렵게 공부시킨 딸의 성적표를 보여주며 이것저것 묻던 영감은 그사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 무참한 세월이여!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다는 관자재보살의 논리를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얘기가 늦도록 우리 주위를 떠돈다. 장엄한 아침 해와 더불어 깊은 깨달음에 도달할 것인가?! 하늘의 별이 바람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포구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