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란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인연이 있으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오는 일도, 세상과 작별하는 일도 모두 인연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달려있다는 말이니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7월 6일 한낮의 땡볕이 내리비치는 순천만 국가정원을 허위허위 걷다가 숨이 턱에 차는 느낌과 만난다. ‘인문 여행’이란 이름을 가진 전남대-경북대 교수들이 오랜만에 순천에서 만난 것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장 순천(順天)의 대표적인 명소 국가정원을 걷는 것은 고역이었으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그리고 여수로 옮긴 저녁 자리에서 가슴 서늘한 전화가 불쑥 나를 찾는다. 아끼던 대학 후배 교수가 세상을 등졌다는 비보(悲報)였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경북대 교수들에게 안타까운 상황을 말한다. 일순 아연실색하는 동료들의 표정이 어둡다. 지난 4월 초부터 몸과 마음의 고통을 호소했던 후배 교수의 부음에 망연자실한 얼굴이 역력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22년 봄 연구실에서다. 전화 통화로 미리 통성명은 했던 터였고, 따라서 낯설지 않은 대면이었다. 더욱이 그는 마주 대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남다른 능력의 소유자였다. 오랜 유학 생활을 경험한 그였기로, 나는 자연스레 이런저런 분야의 서책에 관한 이야기를 그와 함께했다. 넓고도 깊은 그의 독서 편력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만남으로 그와 자연스레 교분을 키울 수 있었다. 특히 전태일 열사 기념관 신축 기금 모집에 열렬하게 헌신하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뚝심 있게 추진하는 열정과 헌신적인 활동성은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실천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용기 있는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堅持)했다.
그의 열망은 한국 사회의 공적 인식과 실천적 지평을 도이칠란트 수준까지 고양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 주권자들의 앎과 실천의 영역을 더 넓고 깊게 확장-심화하는 것을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분단과 전쟁, 빈곤과 독재, 장기간에 걸친 군사 쿠데타로 얼룩진 우리나라를 멋진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 불탔던 인물이 그였다.
그 문제에 관해 그와 심도(深度) 있는 논의를 진척하지 못한 아쉬움이 내겐 남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각각의 개인이나 사회 혹은 국가는 나름의 역사적-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그에 따른 발전과 변화 양상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통일 도이칠란트는 우리의 참고서는 될지언정 교과서는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던 터다.
이런 이야기를 뒤로 미뤄야 하는 작별의 시각이 너무도 불시에 찾아왔다. 여수의 저녁놀이 아름다웠지만, 쓸쓸해진 마음에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눈길이 자꾸만 헛헛해진다. 이튿날 아침 소주로 그의 명복을 빌면서 작별 고한다. ‘안 선생, 부디 평안하게 영면(永眠)하시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