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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

등록일 2021-11-03 20:08 게재일 2021-11-0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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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영 수필가
정미영 수필가

립스틱을 바른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매끄럽게 덧발랐더니 색감이 선명해진다. 화장의 완성은 립스틱이라고 했던가? 그 순간 자신감으로 충만해져 거리로 나선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로 인해 립스틱 바른 입술을 드러내 보이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예뻐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립스틱은 신분이나 국적, 나이를 막론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보석을 갈아서 입술에 화장을 했고, 클레오파트라는 딱정벌레와 개미로 만든 붉은 색을 만들어 썼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피부 톤을 하얗게 하고 입술은 붉은 빛으로 표현하는 화장법을 유행시켰다.

립스틱 효과라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경기가 불황일 때, 저렴한 가격으로 여성 소비자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 나는 립스틱 효과의 수혜자였다. 취업의 벽에 가로막혀 앞길이 막막했다. 직장을 못 구해 힘들어 하고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심리적 압박과 우울한 기분이 밀려왔다.

도전과 좌절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꿈을 향한 목마름으로 굳게 닫힌 취업의 문을 열려고 애를 써도 현실은 냉정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주름지고 눈동자는 흔들렸다. 푸를 것 같던 젊음이 점점 시들해지고, 마음은 흔들다리 위를 건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학기 중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직장을 구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혼자서 긋고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취업 고민에 어깨가 처져 있던 날은 매서운 바람이 내 옷깃 속으로만 유독 몰려드는 것 같아, 잔뜩 긴장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런 탓에 자주 허방을 딛고 다녔다.

그 시절, 주머니가 얄팍해 다른 화장품은 못 샀어도 립스틱만은 발랐다. 마음이 팽팽하지 않고 느슨해질 때 입술 선을 따라 색을 입히면 정신적 허기가 채워졌다. 립스틱이 마치 심리적 대변자라도 된 듯, 내 가슴에 담긴 수많은 문장들이 입술 색으로 표현되었다.

립스틱을 바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맨얼굴에 립스틱만 바른 채 학교 도서관으로 향할 때면,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보이지 않는 실체지만 내가 꿈꾸는 이상향을 세밀하게 소묘하기를 반복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의 흔적은 어떤 무늬로 그려질까.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혹독한 마음의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내게도 봄이 찾아왔다. 마침 적성에 맞는 일자리에서의 까다로운 면접까지 무난히 합격했다. 다행이었다. 봄빛 머금은 발랄한 색상의 립스틱은 일터로 향하는, 생기 넘치는 발걸음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립스틱은 때때로 자국을 남긴다. 첫사랑을 심하게 앓은 남자 동창생은 상대를 떠올리면 분홍 빛깔의 입술이 선명하게 떠올라 아직도 마음이 달뜬다고 한다. 처음 소개팅 자리에서는 밋밋한 인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으면 수채화처럼 은은하게 그녀의 얼굴이 펼쳐졌다고 한다. 청순해 보이는 립스틱의 분홍 빛깔이 풍부한 사랑의 언어로 탈바꿈해 그녀의 입술 위에서 빛났을지도 모른다. 예쁜 빛으로 물들여진 사랑의 언어를 받고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헤어진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까지 그 빛깔을 잊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그럴 것이다.

가끔은 즐겨 바르는 색 대신에 붉은 립스틱을 발라본다. 일상의 변화를 바라는 내 시도가 익숙한 안일을 밀어내고 싶은 순간에 입술 색을 바꿔보는 것이다. 그럴 때면 무언가 도전하는 일도 잘 마무리될 것 같고 용기도 생기는 것 같다. 앞으로도 내 생활에 있어 당당함의 밀도가 느슨해져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 때 나는 립스틱을 짙게 바를 것이다.

나의 립스틱에 대한 관심은 멈추지 않는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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