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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 십자가

등록일 2021-11-02 19:19 게재일 2021-11-0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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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한 시대의 어둠을 지탱하기 위해 / 저리도 많은 십자가가 필요한 줄은 /오늘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 이천 년 전 한 사내를 / 못박아 세운 것만으로는 / 모자랐던 것일까”

오성호 시인이 1994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시집 ‘가시나무 그늘 아래서’에 들어있는 시 ‘십자가’의 첫 6연이다. 시인은 도시 곳곳에서 빛을 비추는 교회당 십자가를 보며 시대의 어둠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또 십자가가 ‘도회지의 거리마다 창부처럼 짙게 화장’을 한 채 내걸리고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은총이 값싼 만병통치약처럼 팔려나’가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노래하였다. 어디 도시뿐이랴. 도시 농어촌 가릴 것 없이 우리나라 교회들은 유독 붉은 십자가를 내건 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알리고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목걸이로, 귀고리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 일각에서는 십자가를 교회의 거룩한 상징으로 여기며 소중히 다루는 행위를 우상 숭배로 치부하며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건물에 붙이거나 장신구로 몸에 거는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형상의 물건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 담긴 예수의 희생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굳이 우상 숭배라는 붉은 줄로 동여맬 필요는 없을 듯하다.

기독교는 교인 여부를 떠나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총 인구수 대비 2005년 18%, 2015년 20%를 차지했고, 가톨릭을 포함하면 2005년 29%, 2015년 28%로 21세기에 들어 기독교 인구는 총인구 대비 30% 가까운 교세를 보였다. 요즈음 기독교가 이런저런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교세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지난 5월 보고에 따르면 2021년 현재의 기독교 인구는 23%(개신교 17%, 천주교 6%)로 한국인 네 사람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인 셈이다.

한국뿐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개신교가, 유럽에서는 가톨릭이 사회와 문화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가톨릭 수장인 교황의 영향력은 비기독교 국가를 포함한 지구촌 전체에 미치고 있다. 10월 28일부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및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참석 등을 위해 유럽을 순방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철조망 십자가’를 선물하였다. 로마 산티냐시오 성당에서는 ‘철조망, 평화가 되다’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에는 DMZ의 녹슨 철조망을 녹여 만든 136개의 십자가가 전시되어 있다. 136이라는 숫자는 남과 북이 서로 떨어져 살아온 각각의 68년을 합친 것이다.

성경 이사야서에는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철조망 십자가’가 남과 북의 전쟁과 대결을 그치게 하자는 소망의 상징을 넘어서서 열쇠가 되었으면,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갈등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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