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문정영 시인의 시집 ‘그만큼’(시산맥사)에 수록된 시 ‘그만큼’의 1행부터 7행까지다.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함께 삶의 원형질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의 정서는 이 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비가 왔지만 돌멩이가 덮고 있었던 땅은 돌멩이를 들어내자 뽀송한 마른 자리를 드러낸다. 시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발 크기의 자국이 났고, 발이 가려주어 비를 덜 맞은 땅 또한 빨리 말라간다. 무생물인 돌멩이는 생명체가 디딘 것보다 더 분명한 자국을 남기며 젖음을 해소시켜 준다. 아마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온통 말리려 했다면 움직이는 발밑보다 돌멩이 아래의 땅이 습기를 더욱 많이 머금고 생명들을 품었을 것이다.
자리는 중요하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자(孟子)가 범(范)이라는 곳에서 제나라 임금이 있는 곳에 갔다가 왕자의 당당함을 보고 감탄하며 “있는 위치에 따라 기운이 바뀌고, 먹는 것에 따라 몸이 달라지니 위대하구나, 지위여!(居移氣 養移體 大哉居乎, 거이기 양이체 대대거호)”라고 말하였다고 맹자 진심편(盡心篇)은 기록하고 있다. 왕자도 역시 사람의 자식이지만 귀한 곳에 살고 따라서 좋은 음식으로 몸을 만들고 다스림으로써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기운과 풍채가 위엄이 깃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맹자의 ‘거이기 양이체’라는 말은 우리 속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과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특정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과는 다른 노력을 하여야겠지만, 그 지위에 올라서면 자리가 주는 혜택을 누리면서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위치에 따라 얻게 되는 정보의 질과 양이 다르며, 높이 올라갈수록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정보가 무슨 소용이랴. 그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책무를 온전히 수행하지는 못하면서 자리가 주는 이익만 쏙쏙 챙긴다면 차라리 묵지근히 자리를 지키면서 비올 때는 마른 자리를 만들고, 태양 아래서는 습기를 유지시켜주는 돌멩이가 더 나은 존재가 아닐까.
미국에서 혼잣말 비슷하게 했다고 하는 우리 대통령의 욕설 파문은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정쟁거리로 등장했다가 잠잠해졌던 야당 대표의 욕설 파문까지 다시 불러오고 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라는 직위는 둘 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자질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 최고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위치다.
누가 어떤 자리에 앉고 서느냐도 중요하지만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면서 자리를 온전히 지켜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리에 오른 자, 그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무조건 무조건이야”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