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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모기보다도 간담 서늘한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맹호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 / 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고 /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 있어도 / 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 / 모기 한 마리 왱 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구나 / 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려 있는 한시 ‘증문’(憎蚊, 얄미운 모기)의 첫 8행이다. 조선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73세라는 나이로 장수를 하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 유학의 한 학풍인 실학을 기반으로 하여 천문, 지리에서부터 수학, 의학, 동물학에까지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사회, 경제, 사상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500여 권이라는 엄청난 저서를 남긴 정약용은 2012년의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물론 이 시에서의 모기는 호랑이나 뱀과 같은 거대 권력 권력이 아닌 말단 관리의 횡포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위대한 학자인 정약용에게도 모기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존재였음은 분명하다.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3년째 겨울을 맞고 있다. 11월 22일 현재 전 세계의 확진자 수는 6억4천160여만 명에 사망자는 662만 명에 이르고, 한국 역시 인구 절반 가까운 2천658만여 명의 확진자에 사망자는 3만 명이 넘었다. 하도 코로나가 입에 오르내리다 보니 마치 코로나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전염병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그러나, 역사상 사람을 가장 많이 해친 전염병은 말라리아이다. 그리고 이 말라리아 전염병을 인간에게 퍼뜨린 것이 바로 모기이다.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에서는 호박에 갇혀 화석이 된 모기가 빨아 먹은 공룡의 피에서 DNA를 복제하여 공룡을 부활시킨다. 이처럼 모기는 인류보다 훨씬 전에 지구상에 등장하였다고 한다. 그 생명의 연원이 오랜 만큼 모기는 지속적으로 인간을 괴롭혀 왔고 엄청난 해를 끼쳤다. 2019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티모시 C. 와인가드가 쓴 ‘모기 : 인류 역사를 결정지은 치명적인 살인자’라는 책에 따르면, 모기가 유발한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연간 100만 명에서 300만 명에 이르고,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약 20만 년 동안 존재했던 1천80억 명의 사람 중에서 약 520억 명의 목숨을 모기가 앗아갔다고 한다.이쯤 되면 코로나는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나라의 확진자 수는 아직도 매일 1만 명에서 5만 명대를 오르내리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 숫자의 많고 적음에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나는 한국에서 돌고 있는 색깔 덧씌우기라는 전염병이 코로나보다도 모기를 매개로 한 전염병보다도 더 우려스럽다. 단순히 색깔 덧씌우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색깔이 다르다고 생각되면 서로를 비난하고 그러다가 급기야는 상대를 향한 눈과 귀를 막고 문을 닫아 버리는 지금의 한국사회의 모습이 모기보다도 모질고 간담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2022-11-22

이제 그들에게 서른 즈음은 없다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십대에는 / 서른이 두려웠다 /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 마흔이 되니 /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박우현 시인의 시집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작은숲, 2014)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시 1연이다. 겪어보지 않은 앞날은 늘 두렵고 떨리지만 지나온 날들은 아름답게 기억되게 마련이다. 그때는 좋은 줄 몰랐어도, 어쩌면 힘들고 괴롭고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돌아보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날들이 옛날의 그때 그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죽음 앞에서 /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라고 삶을 관조한다.모든 날들이 절정이고 모든 나이가 아름답다고는 해도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 라 벨르 에포크(La Belle 00E9poque)’는 역시 이삼십 대 아닐까? 삼사십 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 누구에게나 스무 살의 추억과 아프건 슬프건 스물을 건너간 흔적을 지니고 있다. 이십 대와 삼십 대를 거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마흔도 쉰도 예순도 될 수 없다. 나이가 들고 설령 치매가 와서 기억이 소멸해 간다 해도 젊은 날 그 시절은 가슴 속 어디엔가는 향기 짙은 꽃으로 피어 있을 것이다.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브리핑에 따르면 11월 7일 기준으로 10·29참사 희생자는 외국인 26명을 포함하여 모두 156명이다.(나는 ‘이태원’이라는 땅이름보다 사고가 난 날짜를 쓰는 것이 더 낫고, 객관적인 용어라는 ‘사고’와 ‘사망자’보다 ‘참사’와 ‘희생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심정적으로도 그렇고, 사고의 상황과 언어적 맥락으로 보아도 그렇다.) 희생자 중 이십 대가 104명으로 정확히 2/3이다. 십 대 희생자 12명과 삼십 대 희생자 31명을 포함하면 그야말로 꽃다운 나이에, 그리고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나이에 세상을 뜬 젊은이들이 희생자의 94%가 넘는다. 외국인 희생자 역시 대부분이 이삼십 대이다. 이들은 한국이 좋아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고 한국에서 일하다가 자신들이 좋아하던 이 땅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음유시인으로 불리웠던 1964년 1월생 김광석은 갓 서른이 된 1994년 6월에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로 알았는데 멀어지고 잊혀지고 이별하는 젊음을 허탄해 하였다. 그리고는 서른 즈음 젊은 날을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1996년 1월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젊음을 누리러 이태원에 갔던 우리의 어리고 젊은 벗 백여 명에게 서른 즈음이라는 시간은 영원히 없다. 다만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한 스물 즈음만이 버려진 가방과 신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십 대와 오십 대의 안타까운 희생자들에게도 이제 서른 즈음이 없기는 마찬가지. 살아 있어야 서른 즈음 젊었던 날을 돌아보고 때로는 후회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이들이 가져보지 못한 서른, 돌아보지 못할 서른을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은 채 대한민국은 스산한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2022-11-08

자리와 사람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문정영 시인의 시집 ‘그만큼’(시산맥사)에 수록된 시 ‘그만큼’의 1행부터 7행까지다.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함께 삶의 원형질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의 정서는 이 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비가 왔지만 돌멩이가 덮고 있었던 땅은 돌멩이를 들어내자 뽀송한 마른 자리를 드러낸다. 시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발 크기의 자국이 났고, 발이 가려주어 비를 덜 맞은 땅 또한 빨리 말라간다. 무생물인 돌멩이는 생명체가 디딘 것보다 더 분명한 자국을 남기며 젖음을 해소시켜 준다. 아마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온통 말리려 했다면 움직이는 발밑보다 돌멩이 아래의 땅이 습기를 더욱 많이 머금고 생명들을 품었을 것이다.자리는 중요하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자(孟子)가 범(范)이라는 곳에서 제나라 임금이 있는 곳에 갔다가 왕자의 당당함을 보고 감탄하며 “있는 위치에 따라 기운이 바뀌고, 먹는 것에 따라 몸이 달라지니 위대하구나, 지위여!(居移氣 養移體 大哉居乎, 거이기 양이체 대대거호)”라고 말하였다고 맹자 진심편(盡心篇)은 기록하고 있다. 왕자도 역시 사람의 자식이지만 귀한 곳에 살고 따라서 좋은 음식으로 몸을 만들고 다스림으로써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기운과 풍채가 위엄이 깃들게 되었다는 말이다.맹자의 ‘거이기 양이체’라는 말은 우리 속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과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특정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과는 다른 노력을 하여야겠지만, 그 지위에 올라서면 자리가 주는 혜택을 누리면서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위치에 따라 얻게 되는 정보의 질과 양이 다르며, 높이 올라갈수록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많은 정보가 무슨 소용이랴. 그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책무를 온전히 수행하지는 못하면서 자리가 주는 이익만 쏙쏙 챙긴다면 차라리 묵지근히 자리를 지키면서 비올 때는 마른 자리를 만들고, 태양 아래서는 습기를 유지시켜주는 돌멩이가 더 나은 존재가 아닐까.미국에서 혼잣말 비슷하게 했다고 하는 우리 대통령의 욕설 파문은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정쟁거리로 등장했다가 잠잠해졌던 야당 대표의 욕설 파문까지 다시 불러오고 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라는 직위는 둘 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자질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 최고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위치다.누가 어떤 자리에 앉고 서느냐도 중요하지만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면서 자리를 온전히 지켜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리에 오른 자, 그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무조건 무조건이야”가 아니다.

2022-10-11

아름답게 오래되기 위하여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바람 / 젊은 미인의 살결도 젊은 열정의 가슴도 / 무자비하게 쓸어내리는 심판자이지만 //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 오랜 시간을 순명하게 살아나온 것 /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노동자 시인이라고 불리는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에 수록된 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1연에서 4연까지이다. 인용이 좀 길지만 모두 8연으로 된 시의 앞 절반을 가져와 보았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시간이 흐르면 늙고 낡아지고 때론 썩고 부패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스러지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오래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였고,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선언한다.지난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가 세상을 떴다. 1952년 25살의 젊은 나이에 영국의 여왕이 된 그녀는 영국을 포함한 열여섯 개 나라(영 연방)의 군주로서 70년을 통치하였다. 물론 영국의 왕은 정치적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형식상의 최고통치자이기에 엘리자베스 2세 또한 영국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영연방의 수장이면서 영국 성공회의 최고 치리자로서(세계 성공회 전체의 수장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일찍 왕위에 올랐고 오래 산 만큼 오랫동안 영국의 왕으로 재위한 까닭에 엘리자베스 2세는 2022년 기준으로 입헌군주제의 나라와 절대군주제의 나라를 모두 포함한 세계의 왕들 가운데서 최고령의 왕이었고, 최장기간 재위한 군주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오래됨이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영국의 왕이 된 찰스 3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였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비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남편 필립공을 먼저 보내는 슬픔도 겪어야 했다.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왕족을 거쳐 왕이 되었기에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제국주의 폭력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군주제 폐지론에 시달리며 왕권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자메이카와 앤티카바부다 등 카리브해의 섬나라들은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던 영국은 이제 많이 쪼그라든 것이 사실이다. 여왕의 시대가 저물면서 그 쇠퇴가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오래된 것이 빛을 발하고 가치가 높아지고 고전으로 명작으로 그 삶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시인의 말처럼 비바람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노회하게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낡아가고 늙어갈 때 오래된 것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2022-09-13

따사론 땅,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위해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 이어가는 전선은 새 나라의 신경 /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일망정 /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 / 골고루 돌아 다사론 땅이 되라 //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 가자”1946년 7월 15일에 조선문학가동맹이 펴낸 ‘문학’지 창간호에 실린 김기림의 시 ‘새나라송(頌)’의 1연과 3연이다. 이 시는 1948년 4월 아문각 출판사에서 간행된 시집 ‘새노래’에 다시 실렸다. 김기림은 광복으로 이 땅 구석구석까지 신경이 이어지고 피가 골고루 도는 따뜻한 나라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그리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의 건설을 주문하고 다짐하고 있다. 시 일부가 2019년 8월 15일 문재인 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인용되면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8월 24일. 현재 전쟁의 참화 속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기념일이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일원이었던 우크라이나는 1991년 오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독립선언으로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땅덩어리가 가장 큰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 큰 나라가 되었다. 두 번째라고는 하지만 러시아 국토 총면적의 3.5%에 불과하다.한때는 같은 나라였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지난 2월 24일 개전 이후 6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어른과 아이의 싸움에 비견될 수 있을까 한데, 대통령을 비롯한 국민들의 항전 의지에 더하여 미국과 나토의 직간접적인 지원으로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는 듯하다. 독립의 과정도 지난하지만, 독립 후 나라가 바로 서고 유지되고 발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크라이나 사태는 가르쳐 주고 있다.같은 8월 24일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1945년에는 한반도의 북쪽에 소련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물론 남쪽에도 같은 해 9월 9일에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이 세워진다. 독립의 기쁨을 만끽할 충분한 시간을 누리지도 못한 채 우리나라는 다시 외세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다행히 미군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약 3년 만에 마감되었지만, 그 이후 새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 또한 매우 어려웠음을 우리는 잘 안다.독립은 감격스럽고 기쁜 일임과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 것이다. 새롭게 홀로 서는 나라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미래 개척을 수행하려는 의지와 실행력을 갖추어야 한다.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기도 하고 ‘밤마다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는 수고와 먼동 트기 전에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는 수고도 해야 한다. 때로는 ‘서릿발 칼날 진 위’에 서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독립을 위해서도 새 나라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다.더 나아가 국민이 편안하고 따뜻하게 살아갈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위한 이러한 노력들은 앞으로도 쭉 계속되어야 한다.정부는, 그리고 우리 각자는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2022-08-23

슬픈 우승과 나가사키 팻맨, 그리고 진정한 광복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뒷장에 /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못할 감격에 떨린다! / 이역의 하늘아래서, 그대들의 심장속에 용소슴 치던 피가 / 이천삼백만의 한사람인 내혈관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 침울한 어둠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 올림픽의 거화를 켜든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한자만 한글로 바꾸고 원문 그대로 옮김)1936년 8월 11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심훈의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에게-’ 1연과 2연이다. 시가 실리기 이틀 전인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남승룡 선수가 동메달을 땄다. 이 소식은 신문 호외로 식민지 조선 전역에 바로 퍼져나갔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절망으로 내리닫던 조선 백성들에겐 가뭄의 단비 같은 기쁜 소식이었을 터. 소설 ‘상록수’와 시 ‘그날이 오면’을 쓴 심훈 역시 이날의 감격을 호외종이 뒷면에 시로 쏟아냈다.그러나 기쁨을 만끽해야 할 우승자 손기정은 정작 그러지 못했다.“나는 이기었습니다,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할 것이외다.” 우승 당시 그의 인터뷰 내용이다. ‘일장기의 응원, 일본 국민의 승리’를 말하는 목소리에서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듯한 슬픔이 역력히 느껴진다. 실제로 인터뷰 중간에 “크게 읽어.”라고 강요하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있다.우승 직후 손기정은 친구에게 엽서 한 장을 보낸다. 올림픽 마크가 그려진 엽서에는 “슬푸다!!?”라는 단 한마디 말이 느낌표 두 개, 물음표 하나와 함께 적혀 있을 뿐이다. 올림픽에서 우승했지만 한국(대한제국)인이 아닌 일본인 ‘기테이 손’으로,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 위에 서야 했던 심경이 이 엽서에 처연히 담겨 있다. “내 소원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억되는 것이다.”라고 한 손기정은 해방 후 올림픽 공식 기록의 국적과 이름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손기정의 ‘슬푼 우승’ 9년이 흐른 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팻맨(Fat Man)’이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된 지 사흘 뒤의 일이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다음 날인 8월 10일 일왕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표했다. 그리고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며칠 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그의 방한에 따른 대통령과 국회의 의전에 대해 말들이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놓인 우리의 미묘한 처지가 노정된다. 이제 일장기를 달 일은 없다. 태극기 아닌 그 어떤 것도 우리 가슴에 달려서는 안 된다.오늘 다시 진정한 광복을 생각한다.

2022-08-09

이상한가요?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버스를 기다리다가 /‘병신인가 베’하며 쳐다보는 눈길이 / 부담스러운 날은 / 길 위에 돌부리가 / 무진히도 많이 솟아났다 // 보이는 것은 / 어느 하나 다를 게 없다 / 세상이란 다 이런 건가 보다 / 눈멀고 귀먹어 살면 그만인 것을”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최명숙 시인의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들은 절로 떠난다’(미리내, 2001)에 수록된 시 ‘희망’의 첫 2연이다. 뭔가 ‘나’와는 다른 모습, 어쩔 수 없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움직임에 던져지는 타인의 시선에 시인은 눈을 떨궈 길 위에 솟아오른 돌부리를 본다. 일상적으로 오가는 길에 돌부리가 비 온 뒤 죽순처럼 갑자기 많이 솟아오를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유난히’ 더 부담스럽게 느껴진 날이어서 그랬을 것이다.우리가 무심결에 힐끗 바라보는 눈길이, 비하한다는 생각 없이 함부로 던지는 말이 장애를 가진 이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도 되고, 가슴 깊이 꽂히는 화살이 될 수도 있다. 안 보고 안 들으면 그만이겠지만, 보이고 들리는 것을 어떻게 할까. 눈멀고 귀먹어 살자고 장애 가진 이 스스로를 체념하게 만든다면 그것 또한 말 없는 폭언이요, 행동 없는 폭행이 아닐까?UN은 1981년에 세계 장애인의 해를 선포하고, 1992년 12월 3일부터 공식적으로 세계 장애인의 날을 시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 4월 20일에 제1회 장애인의 날 행사를 열고, 10년 뒤인 1991년 4월 20일에 장애인의 날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장애인의 날이 생긴 지 40년,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지 30년이 지났다. 사람으로 치면 기초가 세워지고 홀로 설 수 있게 된다는 이립(而立)이 지나고, 흔들리지 않고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不惑)도 지난 것이다. 그러나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도, 장애자를 돌보고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도 아직 제대로 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장애인이 연기자로 등장하고, 장애인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tvN 채널에서 지난 4월부터 6월까지 방영한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한지민 씨가 연기한 영옥의 쌍둥이 언니 영희의 역할을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캐리커처 작가이자 배우인 정은혜 씨가 맡아 연기했다.ENA 채널과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가 주인공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태국, 대만, 일본, 베트남,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에서 7월 9일 기준으로 넷플릭스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장애인이 주인공인 ‘아이 엠 샘’, ‘포레스트 검프’, ‘레인맨’, ‘나의 왼발’ 등의 외국 영화와 ‘말아톤’과 같은 한국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이 주인공이면서 더욱이 시청률 1위를 차지하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TV 드라마는 이 작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작품성에 대한 평가는 별개로 하고 이러한 드라마 또는 영화를 통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장애인들에게 돌부리나 화살이 아닌 쪽으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2022-07-12

가까이 있지만 가깝지 않은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담쟁이가 싫었다 / 무엇이든 엉망으로 휘감는 넝쿨식물이 싫었다 // 곁을 둔다는 말 / 곁은 조금 떨어진다는 말 / 시든 풀포기를 심어도 되살아 오를 것 같고 / 차 한 잔 놓아두고 싶은 곳 / 반쯤이나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배냇정서는 농촌이고 감각은 도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전영관 시인의 시집 ‘바람의 전입신고’(세계사, 2012)에 수록된 시 ‘곁’의 1연과 2연이다. 쌉사래하면서 달짝지근한 칡물처럼 그의 시구를 몇 번 곱씹으니 처음에는 갸우뚱하던 의미가 은근히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박힌다. 담쟁이는 곁을 두지 않는다. 무엇이든 그냥 휘감거나 붙어서 자라고 살아간다. 차 한 잔 놓아두고 싶은 정도로, 손 내밀면 닿을 정도로 조금은 떨어져 있는 것이 마음 편한데, 담쟁이는 그렇지 못하다. 시인은 여유 없이 휘감고 들러붙는 담쟁이 같은 존재들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곁’은 ‘어떤 대상의 옆 또는 공간적·심리적으로 가까운 데’를 뜻하기도 하고 ‘가까이에서 보살펴 주거나 도와줄 만한 사람’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로 중국과 일본이 있다. 이 두 나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나 우리에게 이들 나라는 시인이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했던 담쟁이와 같은 존재는 아닐까?1965년 6월 22일에 한일협정이라고도 불리는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의 조인과 함께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네 개의 부속 협정이 함께 체결되었다. 이로써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이후 20년 동안 단절된 상태에 있었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이 조약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일본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북한 접근을 견제한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안정적 정착에 기여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조약이 체결된 지 57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어떠한지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양국의 공통의 복지 및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평화 및 안전을 유지하는 데 양국이 국제연합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라는 조약의 문구가 과연 잘 이행 되고 있는가? 추상적 선언의 문구니 왈가왈부해서는 안되는 것인가?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나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도 그렇듯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는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적인 갈등과 긴장이 상존한다지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여느 나라들보다 더욱 복잡미묘하다. 부속협정인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1966년부터 10년에 걸쳐 도입된 5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으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강제 징용 피해자의 배상 등 전후 배상의 문제는 완결되지 못한 채 갈등 속에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가까이 있지만 결코 가깝지 않은 일본. 새 정부는 어떻게 한일 관계를 풀어갈지 궁금하다.

2022-06-21

빛을 뿌리고 꽃으로 흩어진 이들을 기리며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가장 날카로운 칼과 / 가장 날카로운 告白은 / 다르지 않다. // 가장 날카로운 칼은 / 그 칼날에 / 그리하여 저의 낯을 비춰 본다. // 그리하여 / 가장 날카로은 칼은 / 꽃잎 앞에도 무릎을 꿇고, / 그 꽃잎은 / 그 칼을 쥔 손목에 / 입을 맞춘다.”“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고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의 시집 ‘김현승시전집’(관동출판사, 1974)에 수록된 시 ‘무기의 의미 Ⅱ’의 처음 세 연이다. 칼은 전통적으로 무기를 대표하고 시대를 아울러서 전쟁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 칼이 꽃잎 앞에 무릎을 꿇고, 꽃잎은 칼을 쥔 손목에 입을 맞추게 함으로써 평화의 도래를 희구하였다.망종(芒種)이자 현충일인 6월 6일 전후로 우리나라 전역에 비가 제법 내렸다. 한자 ‘망’은 벼나 보리 따위의 깔끄러운 수염인 까끄라기를 뜻한다는데, 비가 수염있는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에 좋은 때인 망종에 마춤하여 내려주었다. 이 비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순국한 이들과 함께 나라 곳곳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잠들어 있는 전국의 현충원과 호국원 땅을 적셔주었고, 우리들 마음도 촉촉하게 해주었다.‘산화’라는 말이 있다. ‘흩어질 散’에 ‘꽃 花’ 자를 쓰기도 하고‘빛날 華’ 자를 쓰기도 하는데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이라고 한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호국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만 쓰이는 말이 아니다, 전쟁을 대비하고 막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에서 동료와 부하를 구하려 몸을 바친 이들에게도 우리는 호국을 위해 산화했다고 말한다.산화한 군인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여럿 있다. 강재구 소령은 베트남전 파병을 앞둔 강원도 홍천의 수류탄 투척 훈련장에서 이등병이 실수로 놓친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막아 훈련 중인 중대원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하였다. 고공강하 훈련을 받던 교육생의 낙하산을 펼쳐주고 자신은 그대로 한강 얼음판 위로 떨어진 이원등 상사의 경우도 꽃으로 뿌려진 죽음이다.정갑진 중위를 아는가? 강재구 소령에 버금가는 산화의 주인공이다. 194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사대부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2월 학군(ROTC) 제7기 소위로 임관하였다. 연천 20사단의 소대장으로 부임한 지 일년이 안 된 1970년 5월, 정갑진 중위는 전방 초소에서 부하 사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 위에 몸을 던졌고 소대원들의 인명 피해를 막아낸 그의 온몸은 꽃잎처럼 흩어졌다. 별 탈 없이 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면 엘리트로서 나라를 위해 더 크게 공헌할 수 있었을 서울대 출신의 젊은 장교가 그렇게 스러졌다.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그를 기려 1970년 6월에 군에서는 산화한 그의 희생정신을 널리 알리고 후손들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수 있도록 추모비를 건립했다.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나라와 국민과 동료를 위해 꽃으로 뿌려지고 빛으로 흩어져 간 이들이 이 땅 곳곳에 있다. 이 빛을 모아 세상을 밝히고 평화의 꽃을 피우는 일은 이제 우리 몫이다.

2022-06-07

5월은 가도 식구는 남는다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매일 함께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 삼시 세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 한 번에 먹자 하니 입속이 먼저 짜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 나머지 한 장을 떼 내어 주려고 /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창비청소년시선의 특별판으로 나온 시집 ‘너를 만나는 시 1’에 실린 유병록 시인의 시 ‘식구’의 1연과 2연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는 이 시는 시인이 고등학생 때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사춘기를 지나고 대학입시에 매몰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제 식구들이 얼마나 대단히 사랑스럽고 정겹게 다가오겠는가. 관심을 가져 주면 귀찮게 생각되고, 무심한 듯 대하면 또 서운한 나의 식구들. 고등학생 시인의 시선은 이 관계를 놀랍게도 정확히 포착하였다. 별생각 없이 각자 밥을 먹는 듯이 보이지만 밥상머리의 식구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깻잎을 떼어 주기 위해 젓가락을 내미는 손들의 주인, 시인은 “이런 게 식구이겠거니 /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하며 심드렁하니 시의 마지막 연을 끝맺는다.나는 ‘가족(家族)’이라는 말보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더 좋다. 원래의 한자 풀이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집(宀-움집 면) 안에서 기르는 돼지(豕-돼지 시) 무리(族)’라는 뜻을 가진, 일본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가족’이라는 말을 왠지 쓰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같이 살며 함께 먹는 입(그리고 여기서 더해 함께 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정겨운 말 ‘식구’를 더 즐겨 쓴다.유럽과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부부간, 부모자식간의 애정 표현이 참 깊고 짙어 보인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어떤가. 오죽하면 부부끼리 짙은 사랑의 표현을 하려 치면 식구끼리 그러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겠는가. 특별하지 않지만 매일 먹는 밥과 같이 늘 함께 있는 존재, 데면데면 지내는 듯 보이지만 희로애락을 끊임없이 솟아오르게 하는 샘과 같은 존재가 식구이다. 그래서 면전에서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내 삶의 원천이 되는 아내와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5월의 시간이 흐른다.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21일 부부의 날, 셋째 월요일 성년의 날, 게다가 스승의 날까지. 얇은 지갑을 더 얇게 만들고 괜히 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게 만드는, 어쩌면 가장들에게는 여느 달보다 조금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가정의 달 5월이 가고 있다.올 초에 한 연예인이 식구 앞에서 지인의 깻잎김치를 떼어 주는 친절에서 비롯된 이른바 ‘깻잎 논쟁’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과하지 않아도, 곰살맞지 않아도 좋다. 무심한 듯, 심드렁한 듯한 친절을 내 식구에게로 돌리자.시인 박인환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5월은 가지만 식구는 과거보다 더욱 진득하니 현재도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사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022-05-24

나의 권리, 그리고 배려와 나눔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나누어 가져야지요 // 하나의 막을 사이에 둔 / 농도가 다른 액체가 / 농도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듯 / 그렇게 나누어 맞춰야지요. // 그대의 새벽잠과 / 나의 저녁잠 / 혹은 그대의 휘파람과 / 나의 한숨 / 나누어 가져야지요 / 그대의 약냄새와 / 나의 술냄새 / 그대의 30시간과 나의 18시간.”삶의 존재론적 의미라는 주제를 다감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보듬는 박상천 시인의 시집 ‘말없이 보낸 겨울 하루’에 실린 시 ‘삼투압’의 일부이다. ‘그대’와 ‘나’는 삶의 패턴이 다르다. ‘그대’가 휘파람을 불며 넉넉한 삶을 즐길 때, ‘나’는 삶의 무게가 버거워 한숨을 내쉰다. ‘그대’가 약으로 몸의 질병을 다스릴 때, ‘나’는 술로 마음의 통증을 삭여낸다. 이런 그대와 내가 나누고 함께할 때 ‘우리’는 모두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평등한 세상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슬프지만 앞으로 오지도 않을 것이다. 공정한 세상의 실현 역시 의구심이 든다. 그대와 내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도 않고 평등을 원치도 않는 사람들이 꾸려가는 세상에서 공정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궁이와 굴뚝 청소를 하면서 재를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더 쉬울 듯하다.지난해 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운행 방해 시위를 시작했다. 평일 출근 시간대의 시위로 많은 시민들은 불편함을 겪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본권을 보장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이 시위를 비난했다.나의 지인도 “장애인 이동권 중요하다. 또한 내 출근할 권리도 중요하다.”라고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SNS에 올렸다. 불편과 불쾌함을 애써 누른 표현이었는데, 그 생각 속에 장애인의 이동권을 인정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래도 한마디를 해야 할 것 같아 “모든 사람의 권리는 중요하다. 그러기에 자신의 권리를 챙기기 어려운 이들-소수자, 약자-의 권리는 다수자, 덜 약한 이들이 챙겨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사회이고 민주 사회이다.”라고 댓글을 달았다.두 주 전쯤 어느 신문에 식당에서 ‘혼밥’ 점심을 즐기려다가 방해받은 경험을 한 기자의 기사가 올라왔다. 혼자 앉아있던 테이블에 공사 작업복을 입은 모르는 사람이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수저를 놓고 앉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내 돈 내고 내가 편하게 먹을 혼밥의 권리는 중요하다. 양해 없이 불쑥 남의 자리를 침범한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짧은 점심 시간에 넉넉지 않은 돈으로 좁은 식당에서 빨리 밥을 먹고 일어서야 하는 노동자의 어려움을 더 생각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권리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땀내 나고 피곤한 사람들이 좁은 식당에서 내 자리를 침범했을 때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는 배려와 관용이 더 아름다운 가치가 아닐까?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다. 권리를 함께 나누는 세상, 서로를 배려하는 세상을 그려보고 싶을 따름이다.

2022-05-11

냄비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냄비는 삿포로 라면을 끓여낸다 / 냄비는 동원 참치국을 끓여낸다 / 냄비는 오뚜기 옥수수 스프를 끓여낸다 / 냄비는 파 마늘 햄 미역 깨소금 담고 미역국 끓여낸다 / 냄비는 모든 것을 담고 모든 것을 끓여낸다”김응교 시인의 시집 ‘씨앗/통조림’(하늘연못, 1999)에 실린 두 연짜리 시 ‘냄비’의 첫 연이다. 식구를 한국에 남겨 두고 1996년에 도쿄외국어대학에 공부하러 가서 와세다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하다가 귀국하기까지 12년 동안 일본에서 혼자 생활해야 했던 시인에게 냄비는 소중한 살림살이 도구였을 것이다. 그러니 냄비밥, 냄비국깨나 먹었으리라는 추측은 추측도 아닐 터.라면 하면 냄비다. 그중에서도 포르르 빨리 끓는 양은 냄비가 그만이다. 양은은 구리에 아연과 니켈을 섞어 만든 은색의 합금이다. 우리가 흔히 양은 냄비라고 부르는 노란색 냄비는 양은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실제로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노란색을 내기 위해 알루미나라고 하는 노란 코팅제를 입힌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냄비에 물을 끓이면 알루미늄이 용해되어 나오고, 알루미늄이나 알루미나는 모두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때문인지 집집마다 한두 개씩은 있었던 양은 냄비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몇몇 분식집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값싸고 가벼운 양은 냄비의 자리를 이제는 스테인리스, 법랑(세라믹), 내열유리, 통주물 등 다양한 재질의 냄비들이 차지하고 있다. 유치한 노란색이 아닌 은은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려한 꽃무늬로 치장한 영국제, 독일제, 프랑스제 고급 냄비들이 주방 선반 위아래에서 한껏 그 자태를 뽐내기도 한다. 양은 냄비마냥 쉬이 식지 않고 보온성 좋은 국산 냄비도 쌔고 쌨다.우리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쓰는 말 가운데 냄비 근성이라는 게 있다. 빨리 끓기도 하지만 빨리 식어버리는 양은 냄비에 우리를 빗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성향은 우리나라 사람만이 아닌, 이슈에 확 관심을 가졌다가 곧바로 잊고 마는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성향이라는 주장도 있다.새 대통령 당선자(헌법에 따르면 ‘당선인’보다 ‘당선자’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한다.)는 당선된 지 10여 일만에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기로 확정하였다.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이는 것과 같은 속전속결 빠른 결정이었다. 광화문 시대 공약은 무색해졌다. 광화문이건 용산이건 ‘국민 속으로’라는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국민’의 여론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빠른 결정만큼 빠른 방향 전환이나 철회가 있을 수 있겠다. 반대론도 그렇다. 양은 냄비처럼 빨리 사그라들 수도 있고 뚝배기처럼 오래가거나 보온밥솥처럼 계속 뜨거울 수도 있겠다.내 머릿속에서도 말이 끓는다. 하여, “냄비는 늘 싱싱한 생선을 주는 깊은 바다 같다 / 냄비는 헉헉헉 뜨건 숨 뿜으면서도 / 냄비는 수명 다할 때까지 / 냄비는 군소리 없다”라는 시의 2연으로 ‘군소리’를 식혀 없애고 만다.그렇지만, “모든 것을 담고 모든 것을 끓여” 낼 맛깔난 정부를 정녕 바라면 안될 것인가?

2022-03-22

검은 산, 쓰러진 나무 속에도 생명의 봄이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쓰러진 나무를 보면 / 나도 쓰러진다 // 그 이파리와 더불어 우리는 / 숨쉬고 / 그 뿌리와 함께 우리는/ 땅에 뿌리박고 사니- // 산불이 난 걸 보면 / 내 몸도 탄다 // 초목이 살아야 / 우리가 살고 / 온갖 생물이 거기 있어야 / 우리도 살아갈 수 있으니”정현종 시인의 시집 ‘한 꽃송이’(1992, 문학과 지성사)에 실린 시 ‘나무여’의 일부이다. 이 시집을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 나무와 꽃과 흙과 산 등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사랑과 경외의 눈길을 마주치고 깊은 사색과 관조의 세계에 젖어든다. 그리고 어느 샌가 모르게 그 눈길을 따라 그대로 걸어가다가 시인의 사색 숲길 속으로 접어들고 있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떠들쳐 보지 않더라도 자연의 일부로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무와 숲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를 벗어나 나무와 풀들, 온갖 생명으로 어우러진 숲으로 들어서면 숨쉬기가 어쩌면 그렇게 달라지는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반대로 산촌과 농어촌에 살던 사람이 도시에 발을 디뎠을 때의 그 갑갑함 역시 자연의 한 존재인 사람으로서 당연한 느낌일 터.그런데, 인간의 무지와 폭력으로 인해 자연은 몹시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환경보호라는 거대 담론을 꺼내 놓지 않아도, 현재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발생한 산불은 우리의 자연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재앙이 되고 있다.매해 크고 작은 산불이 일어나지만, 지난 3월 4일 경상북도 울진의 한 야산에서 시작된 산불의 피해 상황은 여느 해의 산불과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3월 7일 오전 11시 현재 1만9천553ha의 산림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숫자만 보면 감이 잘 안 잡히는데, 서울 면적의 1/4 이상, 여의도 면적의 60배, 축구장으로 치면 2만3천여개 넓이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피해 규모를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이틀 전의 통계이고, 8일 오전까지도 완전히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9일 오늘까지 집계한다면 그 피해 규모는 더욱 늘어날 것이기에 마음이 무겁고 아프다.산불이 빨리 진화되기를 기도한다. 불이 꺼져도 산마다 화마의 자취는 검게 남을 것이고, 산속의 생명들은 다시 삶을 이어나가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이번 산불로 집이 타서 무너져 내리고, 한평생 삶의 흔적과 추억과 기록들까지 사라져 버린 많은 이들 역시 다시 일어서기에 몸과 마음 모두 힘든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쓰러진 나무를 보면 자신도 쓰러진다고 한 시인은 같은 시집에 실린 ‘봄에’라는 제목의 또 다른 시에서 “진달래꽃 불길에 / 나도 / 탄다…. / 숨막히게 피는 꽃들아 새싹들아”라고 하였다. 검은 흙 속에서도 푸른 새싹이 돋고, 진달래 개나리가 검은 산과 그 품 안에 사는 사람들을 보듬고 위무하는 따뜻한 봄을 소망한다.

2022-03-08

호랑이 기운으로, 호랑이 걸음으로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증명할 수 없어서 / 과연 영험한 짐승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게로군 /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 줄 알면서도 / 가슴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 떠오는 이들이 / 줄을 잇는다고 치자 눈과 함께 왔다 / 눈과 함께 사라지는, 가령 / 호랑이 발자국 같은 그런 사람이”손택수 시인의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에 실린, 같은 제목의 시 ‘호랑이 발자국’의 마지막 일곱 행이다. 현재 한반도 땅에서는 더 이상 야생의 호랑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의 조선얼 말살 정책으로 호랑이를 다 잡아 없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못났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은 참 몹쓸 짓을 많이도 했다. 존재하지 않는 호랑이의 발자국 본을 어떻게 뜰 수 있을까마는, 시인의 머릿속에는 영험하면서도 용맹한 한국 호랑이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고, 마음의 산하 한겨울 눈속을 발자국 선명히 남기며 웅자한 자태로 거닐고 있으리라.2022년 1월 1일이 되자마자 호랑이해를 운위하였지만 실은 음력 1월 1일인 설날부터가 임인년의 시작이다. 동양 철학에서 우주만물의 운행과 변화 모습을 설명하려는 이론이 오행(五行)론인데, 오행을 색깔로 나타내면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다섯이 되고 십간(十干) 중 갑을(甲乙)은 파랑, 병정(丙丁)은 빨강, 무기(戊己)는 노랑, 경신(庚辛)은 하양, 임계(壬癸)는 검정과 짝이 된다. 그러니까 신축년(辛丑年)이었던 작년은 흰 소의 해였고, 임인년(壬寅年) 올해는 검은 호랑이의 해가 되는 것이다. 설이 지나고 지난 밤에는 정월 대보름 달까지 보았으니 호랑이 걸음으로 보름길을 걸어 온 셈이다.음양오행은 동양 사상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인의 삶에 깊이 뿌리내리고 정신세계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오랜 세월을 거쳐 온 확률과 통계의 선험적·경험적 이론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기에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하고 현생이건 내세건 더 나은 삶을 위해 절대자나 그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는 믿음은 기성종교와 무속을 막론하고 이어져 왔다. 음양과 오행을 사주팔자와 연관 지어 인생사 길흉화복을 점치고 무속적으로 풀이하려는 시도들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대선 정국 정치권을 중심으로 속 뒤집힐 썩은내를 풍기며 무속 논란이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정신에 기반을 두고 합리적 이성으로 헤치고 풀어내야 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어려운 문제들을 미신과 무속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하는, 어쩌면 고민 없는 안이한 자세는 질타받아 마땅하다. 호랑이 걸음도 좋고 호시우보(虎視牛步)도 좋다. 정치권과 사회 곳곳에서 호랑이 기운과 냉철한 이성으로 앞서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혹, 현재가 어둡다 하더라도 절망할 일은 아니다. 칠흑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호랑이의 눈은 빛나고 단단한 네 발은 비탈도 골짜기도 마다하지 않음을 우리는 아니까.그리고 우리 각자는 ‘해마다 번연히 실패할’지언정 호랑이 발자국 하나쯤은 마음에 새기며 올해를 살아갈 일이다.

2022-02-15

나, 행복해도 돼?!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지난 해는 / 참 많이도 줄어들고 / 많이도 잠들었읍니다 하느님 / 심장은 줄어들고 / 머리는 잠들고 / 더 낮을 수 없는 난장이 되어 / 소리 없이 말 없이 / 행복도 줄었읍니다”(원문 그대로 옮김)정현종 시인의 시집 ‘나는 별아저씨’(1978,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시 ‘냉정하신 하느님께’의 1연이다. 44년 전 출간된 시집의 빛바랜 종이에 적힌 시구가 어쩌면 이렇게 올해 벽두의 상황을 그대로 그려주는지…. 2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는 지구별의 참 많은 사람들을 잠들게 했다. 우리들의 심장은 두려움과 긴장으로 쪼그라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들은 하릴없이 떨어져야 했고, 가게문은 강제로 닫혀야 했다. 행복의 총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코로나가 다시 확산되던 지난 12월 중순. 수도권과 비수도권 모두 사적 모임 허용 인원이 4인으로 제한되기 작전, 지인의 회사 사무실에서 벗 몇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무르익던 중 가장 연장자인 중견 기업 대표께서 둘째인 딸을 결혼시키고 난 뒤 한 달 동안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였다 한다. 100%의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데 바로 얼마 뒤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치매로 입원하셨고 형제 단톡방의 대화에서 어머님의 건강 문제로 인해 갑작스러운 불안감이 형제들에게 엄습하면서 자신의 행복감도 어느샌가 날아가 버렸단다.그 자리의 다른 벗이 말을 받았다. 행복하고 즐거운 상황에 놓여 있을 때조차도 군부 독재 체제에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던 1970-80년대 대학생들의 마음 한 켠에는 “나,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하는 자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행복할 때는 그냥 행복해 하는 것이 맞는데, 그러지 못했다고.여기저기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가 건네진다. 이 먹먹한 시대에 건네는 덕담이 공허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서로에게 전하는 희망을 감사히 받는다. 새로운 해가 뜨고 새 날이 밝았다. 새해 첫날만 그런 게 아니다. 매일 우리 앞에 해가 뜨고 날이 밝는다. 마냥 어두운 밤만의 날은 없다. 복은 하늘에 맡겨야 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행복은 다르다. 우리는 불행 속에서도 어떻게든 행복을 찾고 만들어내야 한다. 대책없는 긍정을, 속절없는 낙관을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다.정현종 시인은 앞 시집의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 노우트 1975’에 “행복은 행복의 부재(不在)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시작한다. 행복은 불행이 낳은 천사이며 이미지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지로서 존재한다.”라고 적었다.그렇다. 행복과 불행은 반대말이지만 꼭 붙어서 오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마냥 행복할 수도 없고, 마냥 불행한 채로 허덕이지도 않는다. 옛 중국 변방 늙은이의 말 이야기(塞翁之馬)를 꺼낼 필요도 없다. 시인의 말처럼 행복의 부재는 행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우리 앞의 불행이 행복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보자.새날 아침, 코로나로 힘들고 일상에 지친 당신과 내가 서로 묻고 답한다.“나, 행복해도 돼?”“응. 행복해도 돼!”

2022-01-04

열다섯, ‘오감도’와 오미크론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模型心臟(모형심장)에서붉은잉크가업즐러젓다.내가遲刻(지각)한내꿈에서나는極刑(극형)을바닷다.내꿈을支配(지배)하는者(자)는내가아니다.握手(악수)할수조차업는두사람을封鎖(봉쇄)한巨大(거대)한罪(죄)가잇다.”(한자만 한글로 병기하고 원문 그대로 옮김)26세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이 1934년 8월 8일자 조선중앙일보에 게재한 시 ‘오감도 시제15호’의 마지막 6연이다. 어절 사이는 물론 문장 사이의 띄어쓰기도 하고 있지 않은 이 시는 ‘오감도’ 연작시의 열다섯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원래 ‘오감도’ 연작시는 1934년 7월 24일에 실린 ‘시제1호’로부터 시작하여 30편까지를 계획하였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시15호’에서 결국 중단되었다.연작시 15편 모두에 대해 해석이 난분분한데, ‘시15호’에서 나는 전율을 느낀다. ‘악수조차 할 수 없는 두 사람’은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이겠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인사의 악수, 화해의 악수, 조약의 악수조차 할 수 없는, 시 창작 86년 뒤인 미래 세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듯해서이다.코로나19 바이러스는 계속 변이종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알파와 델타 그리고 지금 전 세계를 다시 긴장시키고 있는 오미크론 등 몇 개의 변이종만 아는 정도이지만 ‘오미크론’(Omicron)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열세 번째 변이종이다. 그런데 ‘오미크론’은 고대 그리스어 알파벳의 열다섯 번째 글자인 ‘O’의 이름이다. 열세 번째 이름인 ‘뉴’(nu)는 ‘뉴(new)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열네 번째 이름인 ‘크시’(xi)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의 영문 성(Xi)와 같아서 의도적으로 건너뛰었다고 한다.열세 번째 변이종에 열다섯 번째 글자 이름 ‘오미크론’을 붙인 것인데, 나는 ‘오감도 시1호‘의 첫 문장 ‘十三人(십삼인)의兒孩(아해)가道路(도로)로疾走(질주)하오.’를 떠올리며 다시 전율하였다. ‘십삼인의 아해’가 지금 열세 개의 바이러스로 돌변한 것은 아닐까? 이들이 세계의 길이란 길을 종횡무진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시 ‘오감도’가 새롭게 읽힌다. 이상의 난해한 연작시는 열다섯 번째 작품에서 멈추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변이종을 만들어 낼 것이 분명한데, 이 바이러스의 질주가 언제나 멈출 것인가.‘세상을 바꾸는 시간(세바시), 15분’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많은 강연자가 발굴되었고, 세바시 15분 남짓의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공자는 열다섯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吾十有五而志于學). 열다섯은 이렇게 좋게 풀어낼 수도 있는 숫자인데 코로나19는 이 숫자의 함의마저 혐오스러운 ‘변이’를 만들어 내었다.아, 어느덧 대학의 한 학기 수업 총 15주차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대학은 2년째 봉쇄 아닌 봉쇄를 당한 상태이다. 국경과 학교와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는 바이러스에게 있을까,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추악한 인간들에게 있을까?

2021-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