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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도 식구는 남는다

등록일 2022-05-24 18:10 게재일 2022-05-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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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매일 함께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 삼시 세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 한 번에 먹자 하니 입속이 먼저 짜고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데 / 나머지 한 장을 떼 내어 주려고 /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창비청소년시선의 특별판으로 나온 시집 ‘너를 만나는 시 1’에 실린 유병록 시인의 시 ‘식구’의 1연과 2연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는 이 시는 시인이 고등학생 때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사춘기를 지나고 대학입시에 매몰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에게 제 식구들이 얼마나 대단히 사랑스럽고 정겹게 다가오겠는가. 관심을 가져 주면 귀찮게 생각되고, 무심한 듯 대하면 또 서운한 나의 식구들. 고등학생 시인의 시선은 이 관계를 놀랍게도 정확히 포착하였다. 별생각 없이 각자 밥을 먹는 듯이 보이지만 밥상머리의 식구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깻잎을 떼어 주기 위해 젓가락을 내미는 손들의 주인, 시인은 “이런 게 식구이겠거니 /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하며 심드렁하니 시의 마지막 연을 끝맺는다.

나는 ‘가족(家族)’이라는 말보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더 좋다. 원래의 한자 풀이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집(宀-움집 면) 안에서 기르는 돼지(豕-돼지 시) 무리(族)’라는 뜻을 가진, 일본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가족’이라는 말을 왠지 쓰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같이 살며 함께 먹는 입(그리고 여기서 더해 함께 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정겨운 말 ‘식구’를 더 즐겨 쓴다.

유럽과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부부간, 부모자식간의 애정 표현이 참 깊고 짙어 보인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어떤가. 오죽하면 부부끼리 짙은 사랑의 표현을 하려 치면 식구끼리 그러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겠는가. 특별하지 않지만 매일 먹는 밥과 같이 늘 함께 있는 존재, 데면데면 지내는 듯 보이지만 희로애락을 끊임없이 솟아오르게 하는 샘과 같은 존재가 식구이다. 그래서 면전에서는 말을 하지 못하지만 내 삶의 원천이 되는 아내와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5월의 시간이 흐른다.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21일 부부의 날, 셋째 월요일 성년의 날, 게다가 스승의 날까지. 얇은 지갑을 더 얇게 만들고 괜히 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게 만드는, 어쩌면 가장들에게는 여느 달보다 조금은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가정의 달 5월이 가고 있다.

올 초에 한 연예인이 식구 앞에서 지인의 깻잎김치를 떼어 주는 친절에서 비롯된 이른바 ‘깻잎 논쟁’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과하지 않아도, 곰살맞지 않아도 좋다. 무심한 듯, 심드렁한 듯한 친절을 내 식구에게로 돌리자.

시인 박인환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5월은 가지만 식구는 과거보다 더욱 진득하니 현재도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사랑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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