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날카로운 칼과 / 가장 날카로운 告白은 / 다르지 않다. // 가장 날카로운 칼은 / 그 칼날에 / 그리하여 저의 낯을 비춰 본다. // 그리하여 / 가장 날카로은 칼은 / 꽃잎 앞에도 무릎을 꿇고, / 그 꽃잎은 / 그 칼을 쥔 손목에 / 입을 맞춘다.”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고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의 시집 ‘김현승시전집’(관동출판사, 1974)에 수록된 시 ‘무기의 의미 Ⅱ’의 처음 세 연이다. 칼은 전통적으로 무기를 대표하고 시대를 아울러서 전쟁을 상징한다. 시인은 이 칼이 꽃잎 앞에 무릎을 꿇고, 꽃잎은 칼을 쥔 손목에 입을 맞추게 함으로써 평화의 도래를 희구하였다.
망종(芒種)이자 현충일인 6월 6일 전후로 우리나라 전역에 비가 제법 내렸다. 한자 ‘망’은 벼나 보리 따위의 깔끄러운 수염인 까끄라기를 뜻한다는데, 비가 수염있는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에 좋은 때인 망종에 마춤하여 내려주었다. 이 비는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순국한 이들과 함께 나라 곳곳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잠들어 있는 전국의 현충원과 호국원 땅을 적셔주었고, 우리들 마음도 촉촉하게 해주었다.
‘산화’라는 말이 있다. ‘흩어질 散’에 ‘꽃 花’ 자를 쓰기도 하고‘빛날 華’ 자를 쓰기도 하는데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이라고 한 가지로 풀이하고 있다. 호국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만 쓰이는 말이 아니다, 전쟁을 대비하고 막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에서 동료와 부하를 구하려 몸을 바친 이들에게도 우리는 호국을 위해 산화했다고 말한다.
산화한 군인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여럿 있다. 강재구 소령은 베트남전 파병을 앞둔 강원도 홍천의 수류탄 투척 훈련장에서 이등병이 실수로 놓친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막아 훈련 중인 중대원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하였다. 고공강하 훈련을 받던 교육생의 낙하산을 펼쳐주고 자신은 그대로 한강 얼음판 위로 떨어진 이원등 상사의 경우도 꽃으로 뿌려진 죽음이다.
정갑진 중위를 아는가? 강재구 소령에 버금가는 산화의 주인공이다. 1946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그는 경북사대부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2월 학군(ROTC) 제7기 소위로 임관하였다. 연천 20사단의 소대장으로 부임한 지 일년이 안 된 1970년 5월, 정갑진 중위는 전방 초소에서 부하 사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 위에 몸을 던졌고 소대원들의 인명 피해를 막아낸 그의 온몸은 꽃잎처럼 흩어졌다. 별 탈 없이 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면 엘리트로서 나라를 위해 더 크게 공헌할 수 있었을 서울대 출신의 젊은 장교가 그렇게 스러졌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그를 기려 1970년 6월에 군에서는 산화한 그의 희생정신을 널리 알리고 후손들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일깨워 줄 수 있도록 추모비를 건립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나라와 국민과 동료를 위해 꽃으로 뿌려지고 빛으로 흩어져 간 이들이 이 땅 곳곳에 있다. 이 빛을 모아 세상을 밝히고 평화의 꽃을 피우는 일은 이제 우리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