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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서답

등록일 2021-11-07 19:51 게재일 2021-11-0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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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태수필가
조현태​​​​​​​수필가

그저께는 잡채와 닭죽을 얻어와 이틀이나 맛나게 먹었다.

빈 그릇을 돌려주기보다 뭔가를 채워 줘야지 싶었다. 여름에 수확하여 빻아놓은 고춧가루를 통에 가득 채웠다. 역시 얻어오는 고마움보다 나눠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평범한 이치를 또 한 번 느끼며.

맛있게 잘 먹었노라고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적고 있는데 김씨가 도착했다. 그의 작품을 논의하기 위해서 미리 연락하고 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중에 한 아름 가져온 물건을 불쑥 내밀었다. 호박죽 한 통과 음료수 한 박스. 뭘 또 이렇게 가져오시나 하고 받으려니 도서관 이씨 심부름이나 하게 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게 김씨의 심부름을 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나는 속으로 ‘그래 이씨가 호박죽을 참 좋아하지’했다.

심부름이야 조금 후에 해도 되니 일단 호박죽은 냉장고에 보관했다. 나는 음료수라도 하나씩 마시고 논의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방금 점심 먹었으니 끝내고 커피나 한 잔씩 마시자고 했다. 서로 바쁘게 살고 있으니 얼른 마치고 가야하나보다 생각했다. 작품은 이메일로 받았고 미리 출력해 검토했으니 일사천리로 논의를 마쳤다.

약간의 환담 후에 일어서는 김씨를 전송하고는 곧바로 자전거를 준비했다. 어차피 지금은 자전거 운동을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자전거 코스가 남쪽이지만 오늘은 북쪽으로 가도 운동은 마찬가지 아닌가. 후다닥 냉장고에 두었던 호박죽을 자전거에 싣고 바로 페달을 밟았다.

이씨를 본 지도 오래고 가을 날씨까지 무척이나 상쾌해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신나게 달려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호박죽을 책상 위에 놓고는 전화를 했다. 이씨가 남편의 일터에 나가 있다는 대답이었다. 김씨가 가져온 호박죽을 전해주러 왔는데 아무도 없어 책상 위에 두고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얼굴 보면 좋으련만 아쉽다는 인사를 교환하며 돌아온 것까지는 괜찮았다.

몇 시간 지난 후 이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호박죽과 음료수는 이씨가 나 먹으라고 김씨에게 들려 보낸 건데 왜 도로 가져왔느냐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김씨가 갖다 주라고 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아니면 김씨가 농담했나?

또 한참 후에 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김씨는 먼저 이씨 집으로 가서 호박죽을 먹고 내게도 갖다 주라는 이씨의 부탁을 김씨가 심부름했던 것이다. 문우의 설명을 듣고 머리가 띵해졌다. 김씨가 음료수와 호박죽을 가져와 음료수는 내가 마시고 호박죽은 이씨에게 갖다 주라는 심부름으로 들었으니 말이다.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이씨에게 가서 호박죽을 가져와야 했다. 말을 잘못 이해하면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되니까 내가 감당해야 할 당연한 수고다.

상대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거나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사람.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골라서 듣는 사람. 자신의 생각은 틀려도 옳고 상대의 생각은 옳아도 틀리다고 억지 부리는 사람.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말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 남의 말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 이미 뱉은 말에 책임지지 않으려 드는 사람….

우리가 살면서 말만 정확하게 소통해도 훨씬 더 경제적이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터이다. 오랜 옛날부터 세 치 혀를 강조해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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