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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아있는 우스개

강길수 수필가 내 차례가 되었다.아주머니는 비닐봉지에 땅콩 한 됫박을 부어 넣었다. 앞서 샀던 여자분처럼 내게도 한 움큼 더 주기 위해 좌판의 땅콩을 집는 순간,“며칠 전 집사람이 사 왔었는데 무게가 모자라던데요.”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두말 안 하고 두 움큼을 더 주었다. 이에 먼저 샀던 여자분이,“왜 이분에겐 더 줘요?” 하고 불평했다. 단박에 아주머니는, ‘살아있는 우스개’를 한 방 날리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도, 여자분도 폭소가 터져 나왔다. 기분이 뛸 듯이 상쾌해졌다. 우스개의 요술에 빠졌나 보다. 발걸음 가볍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땅콩 봉지가 보무도 당당하게 갈바람에 나붓거렸다.우스개 한 마다가 이렇게 사람 기분을 좋게 하다니 신기했다. 서구인들이 유머를 기리며 사는 연유가 이해됐다. 일상에서 어떤 일로 좋아지는 기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론적 기쁨 혹은, 심연의 환희라고나 해야 할 즐거움이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늘을 날듯 기분 좋은 일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있어도, 사회적 분위기로 오늘 그 순간처럼 활짝 웃어보지 못했다.우리 사회는 ‘살아있는 우스개’를 잃어가는 게 아닐까. 대통령의 사적 우스개를 일부러 왜곡, 침소봉대 보도하여 국제적 물의를 일으켰던 언론과 같은 심보를 내가 가졌다면, 아주머니의 우스개를 어떻게 받아들여 처신했을까.“당신 꽃뱀이야? 언제 봤다고 날 좋다는 거야? 별 미친 여자 다 보겠네!” 하며 땅콩 봉지를 던지고, 난리 피우지 않았겠는가. 농담을 농담으로 듣지 않고, 우스개를 우스개로 주고받지 않는 자화상이 우리 사회라면, 중병이 든 게 분명하다. 나와 뜻이 다른 사람도, 이웃으로 함께 살아야 할 국가사회공동체의 한사람이다. 지난 수년간 우리는 이웃에게 ‘적폐란 올가미’를 씌워, 억지 단죄나 갈라치기를 일삼는 망국 정치를 경험했다.도대체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고, 정당이 뭐며, 좌파와 우파는 또 무엇들이란 말인가. 그것들이 함께 살고, 살아내야 할 가족과 이웃, 나라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정치 이데올로기 전에 아니, 모든 인위적 가치에 앞서 천부적이자 본원적인 양심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지 않은가. 창에 때가 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우리 사회의 창엔 지독한 때가 낀 게 분명하다. 나도, 너도, 그도 마음의 창에 덕지덕지 때가 붙어 있음이다.국본(國本)을 무너뜨릴 부정선거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송사에도, 우리 사회는 무심하다. 피부로 느끼는 현실과 동떨어진 여론조사 결과로 왜곡해도, 공정성을 따지자는 소리가 없다. 선관위와 여론조사기관이 신이란 말인가. 양심과 이성을 별주부전 토끼의 간처럼 꺼내 두고 사는 사회가 우리의 자화상일까. 하긴, 우스개를 삼류정치 도구로 만드는 희한한 사회이니까. 우스개를 우스개로 주고받는 참 사회가 그립다.입가에 웃음꽃이 다시 피어난다. 땅콩 덤 주기의 불평을 한마디로 훅 날려버린 아주머니의 ‘살아있는 우스개’가, 지금도 귓바퀴를 맴도니까.“내는 남자가 더 좋니더!…”

2022-10-16

사랑의 범위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나는 점차로 프랑수아즈의 상냥함이나 뉘우침 또 여러 미덕들이 부엌 뒤채의 비극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친척을 제외하고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만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당한 불행을 신문에서 읽을 때면 눈물을 펑펑 흘리다가도, 그 불행의 대상이 다소나마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면 눈물이 금방 말라 버리는 것이었다. 부엌 하녀가 출산한 후 어느 날 밤, 심한 복통으로 고생하는 하녀의 신음 소리를 듣다 못한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 프랑수아즈를 깨웠지만, 프랑수아즈는 냉담하게 그 비명이 연극에 불과하며 주인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프랑수아즈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 ‘나’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이다. 프랑수아즈는 손자가 약한 감기라도 걸리면 한밤중에 길을 떠나 사십 리 길을 가서 필요한 것을 물어보고 돌아올 정도로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신문에 나오는 불행한 사람에게도 동정심이 넘쳐흐르지만, 그 중간에 있는 자기 주변의 딱한 사람에게는 한치의 아량도 없다. 프랑수아즈는 부엌 하녀가 아스파라거스 냄새를 맡으면 천식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매일 아스파라거스 요리를 만들게 해서 집을 떠나게 한다.이런 프랑수아즈의 행동을 마음 놓고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이 마음 한구석에 이런 마음을 감춰두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족에 대한 애정은 문제가 없지만, 아프리카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후원금을 보내면서도 내 근처에 있는 불행한 사람들의 고통은 외면하기 쉽다.불현듯 프랑수아즈가 떠오른 것은 며칠 전 SNS에서 본 지인의 고민을 읽고 나서다. 지인은 지역의 의정감시단 활동을 비롯하여 독거 노인 도배 사업과 같은 봉사 활동도 많이 하고, 청년 주택 사업을 하며 지역 공동체 운동을 하며 살아왔는데 어쩌다가 몇 년 전부터 지방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다.그런데 보증금 100만원을 3개월 후에 내겠다는 입주 희망자를 받아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며 SNS에 올린 그의 글을 본 것이 석 달 전이다. 자기를 찾아온 현금 100만원이 없는 40대 남자의 처지를 내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든 것이다. 많은 페친이 반대했지만 지인은 결국 방을 내주었는데, 이제 또 보증금을 3개월 후로 미루니, 그동안 월세는 잘 내서 수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황스럽다는 글을 며칠 전 올린 것이다.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딱한 처지에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책임의 지속성과 광범위성 때문일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눈물을 흘리거나 월 몇 만원의 후원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면 감당하기 어렵거나 철회하기 어려워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나 역시 이런 비슷한 고민이 있는 터라 자신도 보호하고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불행에도 관심 갖는 현명한 공감법을 배우고 싶다.

2022-10-16

불감증 사회

홍석봉정치에디터 유례없는 난국이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고 불안하다. 북의 김정은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미사일을 쏘아댄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핵 도박을 하고 있다. 언제 우리 하늘에 불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 세계가 코로나19 충격파에 휘청대는 와중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 갈등으로 인한 경제난에 직면해 있다. 기업과 가계는 고물가·고환율·고금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작금의 엄중한 안보 및 경제상황은 자칫 온 국민을 혼란 속에 빠뜨릴 수 있다. 국민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형편이다.이런 판국에 국내 정치는 정쟁의 수렁에 빠진 채 헤어나질 못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마저 비속어 발언으로 체면을 심하게 구겼다. 야당은 옳다구나 싶어 때리고 있다. 국격을 실추시켰단다.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는 페이스북 글 때문에 역사관을 의심받으며 화살받이가 됐다. 해명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 달 대신 손가락 끝만 바라보는 저질 발목잡기에 다름 아니다. 본질을 왜곡한 흠집내기다.국정감사장은 호통과 고함만 난무한다. 서로 헐뜯기 바쁘다. 상대 실수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일이 본업이 됐다.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하고, 법위에 군림한다. 서로 옳다고 우기고 자기편만 감싸고 돈다. 제 눈 속 들보에는 눈감고, 상대방의 티끌은 죽어라고 공격한다. 품격 있는 의연한 모습은 애당초 기대난이다. 국정을 질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본인들만 모른다. 국민들은 이를 혐오하면서도 정작 흐려진 물을 쏟으려 않는다.우리 사회에 위기 불감증이 만연해 있다. 국민은 너무 둔감하다.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주전자 속의 개구리’가 된다. 곳곳에서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하지만 수십년동안 계속된 남침 도발에 피로도가 누적된 때문인지 북의 위태위태한 도발에도 무감각하다.경제 한파가 닥쳐도 ‘험난한 IMF 파고도 넘었는데’라며 무심하다. 속이 곪는데도 모른다. 나라잃은 설움을 당하고 전쟁으로 국토가 만신창이가 된 아픈 기억조차 잊은 것 같다. 방심했다가는 언제 당하는지도 모르고 당한다. 남북간 전쟁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다시 IMF에 구걸하는 치욕도 되풀이 할 수는 없다.정부가 미국에 핵 공유를 요청했다고 한다. 핵을 머리에 이고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만은 없다. 국정의 최우선 순위는 국가 안보다.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무한 책임이 있다. 핵 공유가 안 되면 자체 보유라도 해야 한다. 경제난 타개를 위해 선제적이고 총체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오이 심은 곳에 오이가 나고 콩 심은 곳에 콩이 난다. 심은 대로 거둔다. 정치 싸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회 곳곳의 경고음을 외면하다가는 언제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대통령부터 서민까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할 때만이 이 위기 국면을 탈 없이 넘길 수 있을 터이다. 죽는 줄도 모른 채 죽어가는‘주전자 속의 개구리’신세는 되지 않아야 한다.

2022-10-13

아마겟돈 상황

우정구 논설위원 아마겟돈은 기독교에서 쓰는 종교용어다. 선과 악의 세력 승부가 결정되는 최후의 싸움터를 의미한다. 소행성 충돌로 인한 지구의 종말을 뜻하기도 하나 전쟁사태 등으로 인류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에 비유적으로 쓰이기도 한다.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전쟁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크림대교 폭발 븡괴로 러시아의 반격이 격화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비롯 전역에 80여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일각에서는 러시아의 핵 사용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지금처럼 아마겟돈 위기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고 말하며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아마겟돈을 ‘인류의 최후 전쟁’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세계는 말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 셈이다.이런 가운데 한반도에서도 전술핵 배치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여당 내에서도 “우리도 우리를 지키기 위한 자위적 수단이 강구돼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실어가고 있다. “핵에는 핵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공포의 균형’ 논리가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상황이다.최근 강도를 높이고 있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남한에 대한 핵 공격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불안감도 여느 때보다 높다. 북한 핵에 대한 우리의 대응방법이 “핵 보유가 유일하다”는 주장에 대해 국민들의 생각이 어떻게 모아질 지도 궁금하다.아마겟돈 위기를 논할 만큼 긴장감이 감도는 한반도 상황이라는 데 국민적 공감대와 경각심이 높아져야 할 때다./우정구(논설위원)

2022-10-13

표현의 자유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주최한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카툰 부문 고등부 금상을 받은 ‘윤석열차’란 작품이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해당 작품을 시상한 것은 정치 편향적’이란 이유로 ‘엄중경고’를 하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발이 일었다.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을 한 열차의 운전석에는 김건희 여사가 앉았고, 객실 창밖으로 법복을 입고 칼을 쳐든 검사들이 상체를 내밀고 있다. 기찻길 뒤로는 부서져가는 건물들이 보이고 열차 앞에는 노인, 아동, 군인, 여성들이 열차를 피해 도망치고 있다. 그림의 내용인즉,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들을 동원하여 국민들을 무차별 탄압하는데 그것을 김건희 여사가 조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우파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사실에 근거한 풍자가 아니라 좌파들의 사악한 모함의 프레임을 대변한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다른 작품보다 스토리, 연출, 창의성,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 심사의원들의 판정 이유라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불쾌감을 지울 수가 없다.표현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에 속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헌법 제22조 1항)와 문화적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갖는다.(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 제4조)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과정에 타인의 명예나 권리, 공중도덕, 사회윤리를 침해해서는 안 되며(헌법 제21조 4항)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헌법 제37조2항)표현의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을 악용하여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인격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형법 307조에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형법 제311조에는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조항도 있다.위 사건의 경우 해당 학생의 예술적 재능은 인정할지라도, 아직 미성년인 학생들이 기성사회의 왜곡되고 편향된 정치적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혐오나 증오의 정서를 퍼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악영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의 신장이란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임에는 틀림없지만, 국가나 사회가 온전하지 않을 때는 최소한의 자유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실상에 대한 인식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기타 자유(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는 그것을 강제할 권력을 필요로 하며, 그 권력이 바로 국가다. 국가는 법과 경찰이라는 모습으로 그 질서를 강제하고, 그 질서를 방해하는 것은 범죄라 칭한다. 이러한 질서에서는 자유의 수호자인 국가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시민만이 자유로운 인간이며, 거역하는 이는 무법자라는 역설이 탄생한다.”독일의 철학자 막스 슈티르너의 말이다.

2022-10-13

사라진 사람, 잊혀진 사람

윤영대 수필가 지난 태풍 힌남노 폭우 때 아파트 지하에서 실종된 9명을 구조했는데 생존 2명, 심정지 추정 7명이라는 보도를 보고 ‘실종(失踪)’이란 말을 되새겨본다. 실종은 첫째, 보호자 이탈, 납치, 가출 등 자의나 타의로 잠적한 경우로 살아있을 확률은 높지만 둘째, 재난에 의한 경우는 생사여부가 불분명하고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면 남겨진 가족들 마음에 상처가 크다.작년 실종자는 경찰서 신고 기준으로 하루 180명이나 된다고 하며, 지난 5년간 매년 4만여 명이 실종되어 아동 2만, 지적 자폐 정신장애자 8천, 치매가 1만2천이라 하는데 시민 제보와 경찰 당국의 추적 관리로 거의 다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미해제 인원은 3~15명 정도 남는다고 하니 놀랐던 마음이 풀린다. 어린이는 약취, 유인, 유기, 가출 등으로 미아 신고되거나 해외입양, 인신매매되는 일도 있고, 범죄 관련 사건도 일어나고 있다.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에 이러한 악조건도 발생하고 있어서 각 지자체는 2013년 ‘실종아동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그 범위를 14세에서 18세 미만으로 확대했고, ‘모바일 안전 드림 앱’ 등으로 보완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어린이 실종 사건으로는 대구의 ‘개구리 소년들’이 옛 기억 속에 남아있다.한국전력 요금청구서 뒷면에는 매달 2명씩 실종아동의 사진과 함께 나이, 실종 일자와 장소, 키, 체중, 피부색, 심지어 흉터 등 신체 특징과 당시 입었던 옷, 신발 등도 알리고 있다. 보통 10세 미만의 아동들인데 0세 아이는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80년에 실종된 3세 아이는 지금 40세가 넘었을 텐데 어디 무엇을 하고 있을까? 17세 여학생은 성범죄에 연루된 건 아닐까? 다 예쁘고 착해 보이는데 잃어버린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64년 3세였던 아이는 지금 살아있다면 60세가 넘은 할머니뻘인데, 가족이 아직도 찾고 있는 모양이니 안타깝다. 전국적으로 수천 개가 넘는 아동 보호시설은 사회 취약 계층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월 30만 원 보장비를 받고 있고 해외 입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들도 잘 관리하여 아동의 안정적 자립을 도와주고 사라지는 아이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요즈음 휴대폰의 ‘안전안내 문자’에는 코로나 확진자 수와 함께 실종자를 찾는 알림도 뜬다. 주로 60세 이상의 노인들이다. 외모와 인적 사항을 알리고 있지만 궁금하여 들어가 보면 거의 1주일 이내에 실종경보 해제가 되고 있음이 다행이다.노인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무연고 사망과 자살 등 고독사가 증가하고 있다. 급격한 고령화와 가족해체 등으로 1인 가구와 독거노인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 901만 명 중 독거노인은 176만 명이며, 이 중에서 고독사가 3천600 명으로 4년 전보다 47% 증가했다고 한다. 22년 8월부터 ‘고독사 예방 및 관리 시범사업’을 경북을 비롯한 9개 시·도에서 시작하여 ‘따뜻한 동행,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한 첫걸음을 떼고 있다.세계적인 나라로 성장하고 있는 지금, 외롭게 잊혀진 사람과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후원으로 밝은 사회를 이루었으면 한다.

2022-10-13

친족상도례

홍석봉정치에디터 친족 간에 발생한 재산 범죄의 처벌을 면해주는 형법의 ‘친족상도례’ 규정이 존폐 논란이 일고 있다. 방송인 ‘박수홍씨’ 사건이 계기가 됐다. 박씨의 친형이 박수홍이 번 돈을 관리하면서 횡령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에 박씨 부친이 돈을 횡령한 장본인은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친족상도례’ 규정이 주목받고 있다. 횡령 주체가 부친이면 ‘친족상도례’ 규정이 적용된다.형법상 ‘친족상도례’는 직계혈족이나 배우자, 동거친족, 동거가족 등 사이의 절도·사기·횡령 등 재산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한다. 그 외 친족의 재산 범죄는 고소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로 규정한다.이 규정은 1953년 형법 제정시 가까운 친족 사이에 발생하는 재산범죄에 대해 가족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친족 인식이 변하고 친족 간의 재산범죄가 늘면서 현실에 맞게 손질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국회에서도 여러 차례 법개정이 시도됐다. 하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이번 국회에도 개정 법안이 상정돼 있다. 법무부 장관도 국감에서 개정에 동의하기도 했다.법 개정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일각에서 이 제도가 가정 문제의 공권력 개입을 막는 순기능을 인정하면서도 가정문제에 대한 과도한 국가 개입은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 같은 규정으로 대체하자는 제안도 있다. 헌법재판소는 “가정의 평온이 형사처벌로 깨지는 걸 막는 데 입법 취지가 있다”며 합헌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 많은 시대다. 소송할 정도면 가정은 이미 파탄난 상황이다. 현실에 맞는 개정이 필요하다./홍석봉(정치에디터)

2022-10-12

가을에 거둘 게 없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멋진 시월이 약속이나 한 듯 불현듯 싸늘하다. 추수를 앞둔 들판과 함께 올해의 결실을 생각한다. 무엇을 거두었는가. 연초에 다짐하였던 생각을 얼마나 건져올렸는가. 허비한 지난 시간이 아까와 무엇인가 새롭게 쌓겠다던 우리는 이 한 해 무엇을 하였는가. 온 백성이 고심하며 바꿔낸 정치판은 국민들에게 어떤 세상이 돌아왔는가. 나라와 민족은 앞으로 가고 있는지, 보통 사람들 삶은 나아졌는지 돌아보는 생각이 한가득이다. 가을에 되짚어 보람보다 의문만 쏟아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할까.우선 순위가 잘못 설정되지 않았을까. 하루하루의 일상이 힘이 든 판에 뉴스는 전혀 다른 걱정을 전하는 게 아닌지. 고물가, 고환율, 고유가…. 높아서 어려워진 경제수치를 누구라도 적확하게 분석하고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위기를 자아내는 북쪽 소식은 평화를 기대하는 민심과 얼마나 먼 것인지, 통일은 고사하고 대화와 협상을 이제는 잊어야 하는지.안에서도 밖에서도 자랑스런 나라가 되어야 할 터에, 유엔 인권이사국 선임에 실패한 경우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나라는 무엇으로 존재이유를 증명해야 하는지, 정권은 국민의 표심에 무엇으로 답을 해야 하는지, 국민은 어느 장단에 호흡을 같이 할 것인지.진심이 안 보인다. 문제를 지적하면 진정을 담아 그 문제를 고심해야 한다. 이전에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답이 아니다. 같은 문제가 켜켜이 반복되므로 이제는 해결해야 하는 게 아닌가.국민에게 문제로 발견된 사안은 모든 국민에게 문제가 아닐까. 여와 야가 따로 없고 보수와 진보를 겨룰 일이 아니다. 문제를 바로 보아 함께 지혜를 쏟아부어 해결에 이르는 용기와 강단을 만나고 싶다. 본질과 상관없이 말로 때우려 하거나 거짓으로 들통나는 일이 거푸 발생하면 국민은 금방 알아채 버린다. 진심이 빠지면, 금세 보인다.함께 넘으려는 생각이 없다. 가파른 언덕은 함께 넘어야 한다. 외교와 국방은 특히 그렇다. 국익으로만 똘똘 뭉친 상대국들 앞에 우리 안의 전선이 흩어지면 이길 수가 없다. 바깥에서 적이 닥치면 보수와 진보 가운데 누가 살아남을까. 나뉘어 이길 방법은 처음부터 없다.하나로 모아 송곳처럼 뚫어야 한다. 다른 생각을 모두 쏟아 좋은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비난과 반대만으로 해결책은 찾아지지 않는다. 슬기로운 대안을 함께 찾겠다는 태도부터 정돈해야 한다. 날마다 다른 소리만 외치고 있으면 남들과 적들은 얼마나 좋을까. 말싸움에 이겨봤자 나라의 기둥이 흔들리면 어찌할 터인가.가을이 묻는다. 우리는 무엇으로 소중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지. 약속처럼 결실로 다가오는 계절 앞에 우리는 어떤 답을 내어놓을 것인지. 우선순위를 다시 보아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국민을 위한 진심을 회복해야 하며, 어려운 언덕을 함께 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한다. 가을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겨레가 되어야 한다.

2022-10-12

임오(壬午)

육십갑자 중 열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임오(壬午)다.천간(天干)은 임수(壬水)이요, 지지(地支)는 오화(午火)다. 천간 임수(壬水)는 바다 또는 큰 호수를 나타낸다. 오화(午火)는 말(馬)을 상징한다.임오일주는 착할 때는 한없이 베풀고, 마음이 여려서 남의 말에 흔들리는 편이다. 하지만 한 번 한다고 마음먹으면 고집을 부리고 죽어도 타협하지 않는다.거짓이 없으면서도 지혜로운 성품이다. 책임과 의무에 관한 한 비교적 명확하게 경계를 지을 줄 아는 인물이다.온순하고 겁 많고 예민한 말(馬)은 항상 무리를 지어 생활을 한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항상 서서 생활을 하고, 아주 정숙하고 깨끗하다. 생활반경이 넓고 질주본능이 있다.소처럼 되새김질을 하지 않고, 소화기관이 직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맑은 풀만 먹어야지 아무 것이나 먹었다가는 소화 장애를 일으킨다. 생활도,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엄격하다. 그리고 항상 달릴 준비가 되어있는 동물이다.임오일주는 ‘태양 아래 푸른 바다’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그 바다에는 천기(天氣)가 농축되어 있으며, 태양의 기운을 받아 그 무엇인가를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감수성이 풍부하며, 감각이 뛰어나다. 부드럽고 온유하면서도 은근한 고집과 끈기가 있다. 한 번 정한 목표는 반드시 달성하려고 노력한다.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은 바다와 물, 땅, 말(馬)의 신이다. 그는 바다의 지배자이며, 바다를 제외한 강이나 호수 등의 모든 물이 그의 지배 하에 있었다. 포세이돈의 상징물은 삼지창이다. 상징하는 동물은 말, 돌고래, 황소, 물고기 등이다.미국 작가 허먼 멜빌(1819∼1891)의 소설 ‘모비딕’, 일명 ‘백경’은 1851년 쓰여진 해양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소설이다.거대한 흰고래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은 에이허브선장은 마치 신에게 도전하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끝내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적인 운명을 눈앞에 그리면서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집요하게 백경을 추격한다.그는 태양을 질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물리치고, 마침내 인간성의 흔적조차 지워버리면서 자신의 운명을 신의 운명과 일치시키려는 듯 바다를 헤매고 다닌다. 결국에는 백경과 사흘 동안 사투를 벌린 끝에 에이허브 선장과 포경선 비쿼드호는 장열하게 전몰(戰歿)하고, 이슈마일만이 홀로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전해준다.멜빌이 죽은 지 30년 후에 재평가된 이 소설은 굉장히 큰 감동을 준다.흰고래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착한 선장은 죽게 되지만, 그래도 선장의 야망은 높이 살 만하다고 본다. 사람은 역시 한 가지 일을 하려면 거기에 몰두할 줄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비쿼드호의 선원들은 세상 누구보다 가장 큰 열정과 야망을 품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 해 본다.그는 인간과 인생에 비극적 통찰을 한 상징주의 작가로, 19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등 항해사 스타벅의 이름 뒤에 에스(s)가 붙어 세계 최대의 커피체인점인 스타벅스의 이름이 되었다.임오년(壬午年)인 1882년에 큰일이 일어났다. 조선의 실권을 잡은 민비와 민씨일가는 1881년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했다.이는 양반 자제들로 이뤄져 있었고, 그들의 사병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구식군대들은 극심한 차별을 받게 된다.대량 해고사태를 겪기도 하고, 13개월이나 밀린 월급 중에서 겨우 한 달 치를 받았지만 그마저 모래와 썩은 쌀이 섞여 있었다.이에 분노한 구식군인들이 흥선대원군과 함께 민비와 그의 일가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이것이 바로 임오군란이다.이때 재빨리 궁녀로 변장한 민비는 궁궐을 탈출했고, 아쉽게도 그녀의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그렇게 그녀는 충주로 피신가게 된다. 공포에 떨며 숨죽이고 있던 민비를 낯선 무녀가 찾아왔다. 무녀는 중전께서 이곳에 있다고 신령님께 들었다고 말했다. 저와 만난 날로부터 50일 이내에 환궁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자신감을 얻은 민비는 청나라의 원조까지 요청하게 된다.물론 청나라는 마다할 리가 없었다. 청나라는 조선에 상륙해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구식군대를 진압한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무당의 말처럼 50일만에 궁궐로 복귀한다. 민비는 환궁할 때 그녀에게 ‘진실로 영험하다’는 의미의 진령군(眞靈君)이라는 군호를 내려주고, ‘언니’라 부르며 궁궐에서 함께 살았다. 매천 황현(1855∼1910)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이 사실을 기록했다.이때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 끝까지 그 무녀의 말을 듣고 정치하다가 결국에는 을미년(1895년)에 민비시해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망국의 길로 갔던 우리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이 시기에 이용익(1854∼1907)은 가난한 서민의 아들로 함경북도 명천에서 출생했고, 물장수를 하던 사람이다.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이 궁궐을 습격한 후 민영익의 집을 습격 했다. 이때 이용익이 민영익을 업고 담을 타고 도망갔는데, 어찌나 빠르게 이동했는지 민영익을 죽이려던 군사들이 놀라서 그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고 한다.이후 이용익의 도움으로 살아난 민영익은 그를 고종에서 천거했고, 장호원에 피신 한 고종의 정보통 역할을 했다.이때 그의 발은 말보다 빨랐다고 한다. 발이 빠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종과 민비의 눈에 띄었고 그 계기로 탁지부대신 자리에까지 올랐다. 구한말 관리 임용실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19세기 말까지 동양의 한 모퉁이에서 소중화(小中華)의 강박관념에 빠져 우물 안 개구리 신세로 지내다가 외세의 물결에 휩쓸려 나라를 익사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간 그들은 바다 위에 넘실되는 파도만 보고, 깊은 심연을 보지 못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된다.

2022-10-12

스마일치즈김치

배문경 수필가 천년의 미소라고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본다. 천 년 전의 미소가 저랬을까. 넉넉하고 평화롭다. 일부분이 달아나고 없어도 미소는 온화한 할머니 같다.지난 7일은 세계 미소의 날이었다.‘세계 미소의 날’은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과 사람들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와 친절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자는 뜻에서 제정되었다. 매년 10월 첫 번 째 금요일이다.재즈보컬가수 넷킹콜의 ‘Smile’을 카카오 톡으로 지인에게 아침인사로 보냈다. 몇 해 전 아카데미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Joker)’ 예고편에 사용된 곡이다. 그러고 보니 이모티콘에 다양한 미소가 있다. 하나 혹은 두세 개를 인사말과 함께 보냈다. 우리 일상이 미소로 시작된다면 좋지 않을까싶은 마음에서였다.어느 순간 자고 일어나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휴대폰 알람소리에 일어나 씻고 거울을 보고 다듬고 옷을 입고 출근하는 일이 그렇다. 그래서 사는 일이 지겹고 행복하지 않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매일 매일, 일상의 지겨움에 지칠 때 즈음해서 주말이 있고 명절이 있고 국공일이 있다. 미소 짓는 날이라고 하니 웃음이라도 한 번 날려본다. 실없다싶어도 세상은 나비효과라는 것도 있으니 하루가 즐거울 수도 있지 않을까.얼마 전, 리어카에 뻥튀기를 담아서 끌고 다니며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리어카의 전부를 팔아도 삼사만원이 될 듯 말 듯 했다. 간호사회에서 나오는 연말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할머니는 “나는 이렇게 살아도 자식들이 객지에서 먹고 살만하고 집에서 무료하게 있기 싫어서 리어카를 끌고 나온 사람이다. 날 도와주기 보다는 다른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고 얘기했다. 치아가 다 썩어 내려앉아 앞니가 몇 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큰돈은 아니지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서서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미안함과 민망함을 느꼈다.가끔 주머니에 있는 몇 천원으로 뻥튀기를 사드리곤 했는데 그 후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리어카에 뻥튀기를 파는 그분이 나보다 마음부자였다. 미소부자였다. 뻥튀기를 살 때 그분의 행복도 함께 샀어야했는데 어설픈 눈으로 내가 더 미소가 많다고 착각했다. 뵐 때마다 웃으며 담소라도 나눴더라면, 하시는 일이 값진 일이라 여겼다면 발길이 이어졌을텐데 후회가 밀려온다.‘세계 미소의 날’을 제안한 인물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마일 아이콘을 고안한 미국의 디자이너 하비 볼(Harvey Ball)이다.그는 그가 1963년 고안한 스마일 아이콘의 본질적인 의미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기념일을 만들어 진정한 미소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비 볼의 고향 우스터에서 매년 세계 미소의 날 기념행사가 진행된다. 기념행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의 웃는 얼굴 풍선, 길바닥 그림, 아카펠라 콘서트, 서커스 공연, 파이 먹기 대회 등이 펼쳐진다.하지만 세계 미소의 날이 있는지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많으리라. 아직 코로나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하다보면 상대로 저절로 웃음을 띠게 된다. 리어카를 끌며 뻥튀기를 팔던 할머니도 리어카에 폐휴지를 담아 끌고 가시는 노인도 오늘 하루는 편안했으면 좋겠다. 노을 지는 하늘 보며 편안하게 허리를 펴며, 살아있어 행복하다고 주름진 얼굴에 웃음 가득했으면 좋겠다.그 날 이후 서툰 동정을 보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짓지 못하고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가난에 대한 무시는 혹여 없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할머니는 어쩌면 미소가 가난한 나를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행동을 반성하며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나 염화미소를 떠올리며 연습했다. 간혹 사진을 찍을 때처럼 ‘스마일, 치즈, 김치’를 반복했다.덕택일까. 방송에서 세계 미소의 날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2022-10-12

오직 기술만이 살길이다

김규인 수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미국의 금리상승으로 세계 경제는 끝 모를 터널 속에서 헤맨다. 전쟁 와중에도 각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살아남아야 하기에 국가가 가진 역량을 총집결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나라는 나라대로 살아남기에 바쁘다.미국은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가파른 속도로 금리를 올린다. 달러를 빌려 쓴 개발도상 국가나 달러에 의존하는 세계 경제는 심한 경제적 압박을 받는다. 돈이 없고 경제 규모가 적은 나라들은 물가 폭등으로 어려움이 늘어난다.환율이 높아져 수입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돈을 빌려 쓴 서민은 이자를 내느라 가난에 허덕인다. 이 시대의 절대 명제는 살아남는 것이다. 개인도 기업도 국가도 살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지금의 세계는 경제도 전쟁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국 우선주의만을 고집한다.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만을 챙긴다. IRA에 따라 전기차 세액공제를 받기 위해서는 전기차를 미국에서 최종 조립해야 하고, 배터리의 핵심 광물과 배터리 부품에도 조건을 붙인다. 이 관련 규정을 충족해야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 생산하여 미국에서 인기리에 판매하는 현대와 기아의 전기차는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칩4를 말하고 삼성전자 공장을 유치하더니 실제적인 혜택은 미국 국적의 기업에만 준다. 미국은 철저히 자기 나라의 이익만을 챙길 뿐 자유로운 무역 질서나 동맹을 위해 혜택을 주는 것은 없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시든 것이 미국이 한국과 대만으로 구매처를 바꾸었기 때문이다.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하는 업체에도 불똥이 튀었다. IRA 조건을 충족하기 위하여 구매처와 원재료인 리튬과 니켈을 수급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동안 중국에서 50% 이상을 구매하던 리튬의 공급처를 바꾸어야 한다. 미국이라는 큰 시장을 놓칠 수 없는 기업은 조건을 충족할 수밖에 없고, 충족해야만 한다.리튬은 금속으로 배터리에서는 양이온의 상태로 음이온으로 이동함으로써 전기를 발생하며 다른 금속에 비해 효율이 매우 높다. 리튬은 배터리 양극재로 성능이 우수한 필수 원재료다. 채굴이나 정제도 우수한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 세계는 리튬 확보와 정제 후 배터리의 성능을 높이는 전쟁 중이다.포항공과대학과 울산과학기술원의 공동연구로 한 번 충전으로 600㎞를 달리는 배터리를 개발했다. 음극재 없이 음극 집전체만으로 충전과 방전이 가능하다. 대단한 연구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가야 할 방향을 말해준다. 살아남아야만 하는 전쟁에서 우리나라가 사는 방법은 우수한 한국인의 두뇌로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다.IRA 같은 무역장벽은 우수한 기술만이 뚫을 수 있다. 대한민국이 살길은 원재료 구입선을 다변화하고 시장을 확대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을 개발하는 방법밖에 없다. 대단한 대한민국 기업체에 박수를 보낸다.

2022-10-12

인플레이션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올해 2월 시작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8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다. 애초의 예상과 다르게 우크라이나의 선전이 이어지며, 러시아의 핵 사용에 대한 공포까지 감지되는 상황이다. 한편 지난 8개월 우리는 유례없는 인플레이션을 맞이해야만 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8%를 상회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 연준은 올해 기준금리를 연속해서 3번이나 0.75%를 올렸다. 유럽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에너지 대란의 영향으로 마침내 10%를 넘겼고, 한국의 물가도 30년 만의 최고치를 달성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은행도 전례 없는 금리 인상을 했다. 전 세계가 역사적인 고물가, 고금리 시대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전쟁은 경제 위기를 가져온다. 지금의 경제 위기는 전 세계가 펼친 ‘코로나19’와의 전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겹치며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가 자국 중심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의 광기는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미국은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는 과정에서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은 자국 기업이 해외에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제한하고 반도체 등 주요 산업의 제품을 중국으로 판매하지 못하는 법안을 공표했다.글로벌 시대에 자국 중심주의가 회귀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변화는 자산 가격의 급락으로 표현된다. 불과 2년 전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가 살포한 현금으로 우리는 유동성 잔치를 즐겼다. 잔치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벼락거지’라는 말이 유행처럼 떠돌기도 했다. 이제는 다시 주식에서 예금으로 자금이 이동하고 있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 하락 뉴스가 매일 들려오며 개미 투자자들의 미래도 암흑 속에 쌓여있다.자국 중심주의로의 회귀는 경제 위기를 유동성으로 해소하려는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과 2017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펼친 미국 중심의 정책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다는 목적을 공유했다. 처음부터 ‘공동의 이익’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미국이 살포한 달러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발등에 떨어진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위기가 닥치면 막대한 유동성으로 극복하려는 정책이 어떤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막대한 유동성이 곧 현금 살포를 의미하는 상황에서 달러 패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는 곧 다른 국가들의 더 큰 위기를 초래한다. 이런 점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UN이 미국의 금리 인상 자제를 촉구한 것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그리고 세계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차분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2-10-12

막말 정치인

우정구 논설위원 어떤 대상물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 한자(漢字) 글의 출발이다. 날 일(日)은 해의 모양을, 달 월(月)은 달의 모양이며 불 화(火)는 불이 활활타는 모양을 묘사한 글이다. 입 구(口)는 입의 모양을 본떴다. 혀 설(舌)은 입에서 혀가 튀어나온 모양을 표현한 글자다.품성의 품(品)자는 입 구(口)자를 세 개 모아 완성했다. 품위를 지키려면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랜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어느 작가는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고 했다. 온기가 있는 따뜻한 말은 상대의 슬픔을 감싸주는 대신 차가운 말은 상대의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는 뜻이다.말은 내 생각을 전하는 단순한 언어 전달의 수단을 넘어 그 사람이 가진 사상과 인격을 대표한다. 공자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들을만한 말을 한다. 그러나 말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言)라고 말했다.누군가 말은 생각의 집이라 했다. 사랑을 생각하면 사랑이 나오고 악마를 생각하면 악마가 튀어나오는 법이다. 생각이 망가지면 말도 망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을 경계한 금언은 수도 없이 많다. 말이 우리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 속담은 말이 가지는 참다운 의미를 잘 표현한 금언이라 하겠다.국정감사를 벌이던 국회의원 입에서 막말이 터져 또다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정치인 막말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나 걸핏하면 터져나오는 막말로 정치의 격이 엉망이 된다. 세련되고 품위있는 말로 관료나 상대 정치인을 압도하는 달변의 정치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우정구(논설위원)

2022-10-11

실력으로 작동되는 TK사회 만들자

심충택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주(7일) 울산시청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중앙지방협력회의를 주재하면서 중요한 말을 했다.‘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할 경우 정부가 모든 역량을 결집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한 발언이다. 이 말을 곱씹어 보면, 각 지방정부가 먼저 정책 아이디어를 내면 중앙정부가 평가해서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지역발전을 위한 정책이나 사업기획 역량을 쌓으라는 말과 다름없다.나는 윤 대통령의 이 발언에 백번 공감이 간다. 대부분 지방정부가 마찬가지지만, 과거 대구·경북(TK)은 공동체 전체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이나 사업 아이디어(예를들어 대구경북통합신공항)를 공론화 한 적이 별로 없다. 대신 일부 기득권 그룹의 이익에 맞는 사업을 사회현안으로 포장해 연줄로 국비를 따내는데 익숙해 있었다. 자연적 공직사회의 정책발굴이나 사업기획과 관련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TK가 온갖 모욕과 설움을 당한 것도 자업자득인 측면이 강하다.윤 대통령이 주재한 중앙지방협력회의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이 모여 국가균형 발전에 대한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여서, 앞으로 국정운영 플랫폼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회의에는 주요 국무위원들과 민선 8기 광역단체장,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장, 시도의회의장협의회장, 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장이 정규멤버로 참석했다. 향후 분기별로 열리게 될 이 회의체는 지방정부간의 정책·사업 기획력을 둘러싼 경쟁의 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TK는 특히 새로운 자세로 무장하지 않으면 지방정부끼리의 대결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지난 6일 시청출입기자들과 만나 “연말이나 신년이 되면 국비 몇 푼 더 받아왔다고 신문 1면 톱기사로 나오고 그런 것, 나는 ‘천수답 행정’이라고 생각한다. (지방정부 스스로) 사업과 정책을 확보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도 TK의 자생력 강화를 주문한 것으로 짐작된다.역대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TK 주류그룹은 중앙정부 실세들과 전화 한 통화로 줄이 닿아 웬만한 인허가는 쉽게 해결했다. 아마 주요사업도 이런 식으로 해결했을 가능성이 있다. 역량은 기획력이 아니라 평소 연줄을 얼마나 잘 잡았느냐가 판가름했다. 공직자들이 외연을 넓히고 실력을 쌓거나 밤새워 사업과 정책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TK라는 용어가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TK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방정부간 평가에서 선두권에 랭크되려면 정치인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정책발굴이나 사업기획에 대한 역량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타지역 공직자들이 전략적으로 지역 이익을 극대화하던 기법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TK의 위계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은 디지털 세상과도 맞지 않다. 사이버 세상에서도 TK는 타지역에 뒤떨어지는 퍼스낼리티를 가진 것이다. TK는 이제 실력으로 작동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2022-10-11

자리와 사람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문정영 시인의 시집 ‘그만큼’(시산맥사)에 수록된 시 ‘그만큼’의 1행부터 7행까지다.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함께 삶의 원형질을 잘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의 정서는 이 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비가 왔지만 돌멩이가 덮고 있었던 땅은 돌멩이를 들어내자 뽀송한 마른 자리를 드러낸다. 시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발 크기의 자국이 났고, 발이 가려주어 비를 덜 맞은 땅 또한 빨리 말라간다. 무생물인 돌멩이는 생명체가 디딘 것보다 더 분명한 자국을 남기며 젖음을 해소시켜 준다. 아마 뜨거운 햇볕이 대지를 온통 말리려 했다면 움직이는 발밑보다 돌멩이 아래의 땅이 습기를 더욱 많이 머금고 생명들을 품었을 것이다.자리는 중요하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한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자(孟子)가 범(范)이라는 곳에서 제나라 임금이 있는 곳에 갔다가 왕자의 당당함을 보고 감탄하며 “있는 위치에 따라 기운이 바뀌고, 먹는 것에 따라 몸이 달라지니 위대하구나, 지위여!(居移氣 養移體 大哉居乎, 거이기 양이체 대대거호)”라고 말하였다고 맹자 진심편(盡心篇)은 기록하고 있다. 왕자도 역시 사람의 자식이지만 귀한 곳에 살고 따라서 좋은 음식으로 몸을 만들고 다스림으로써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기운과 풍채가 위엄이 깃들게 되었다는 말이다.맹자의 ‘거이기 양이체’라는 말은 우리 속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과 서로 통한다고 하겠다. 특정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과는 다른 노력을 하여야겠지만, 그 지위에 올라서면 자리가 주는 혜택을 누리면서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위치에 따라 얻게 되는 정보의 질과 양이 다르며, 높이 올라갈수록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더 멀리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많은 정보가 무슨 소용이랴. 그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책무를 온전히 수행하지는 못하면서 자리가 주는 이익만 쏙쏙 챙긴다면 차라리 묵지근히 자리를 지키면서 비올 때는 마른 자리를 만들고, 태양 아래서는 습기를 유지시켜주는 돌멩이가 더 나은 존재가 아닐까.미국에서 혼잣말 비슷하게 했다고 하는 우리 대통령의 욕설 파문은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정쟁거리로 등장했다가 잠잠해졌던 야당 대표의 욕설 파문까지 다시 불러오고 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라는 직위는 둘 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자질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 최고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위치다.누가 어떤 자리에 앉고 서느냐도 중요하지만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면서 자리를 온전히 지켜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리에 오른 자, 그 자리에 걸맞게 행동하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무조건 무조건이야”가 아니다.

2022-10-11

맹인이 사는 방법

조현태수필가 조금씩 시력이 나빠지다가 마침내 완전히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래도 조금 어둔하고 느리지만 별 지장을 느끼지 않고 살았다. 왜냐면 지금껏 살면서 세상의 여러 가지 경험을 토대로 꾸준히 연습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으로 보이는 것만 없을 뿐 신체의 다른 기능은 여전하여 본인이 느끼는 불편함은 크게 없는 듯 했다. 다만 조심스럽고 느릴 정도였다.1급 시각장애 때문에 결혼은 포기하고 혼자 살기로 작정했는데 어느 날 좋은 남자를 만났다. 장님 아가씨의 눈이 되어줄 요량으로 결혼을 제안한 남자가 있었다. 여자 쪽에서야 평생을 도움만 받고 살아야 할 상태라서 많이 망설였다. 한 남자의 장래에 자신이 끼칠 피해가 어떨지 손바닥 보듯 했겠지. 하지만 남자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남편 입장으로는 항상 아내와 함께 행동하며 세심하게 배려하겠다고 다짐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불안하여 매우 신경을 썼다. 하지만 함께 생활해 보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외출이든 집안 청소든 아니면 음식을 조리하든 아내 혼자 거침없이 해냈다. 이를테면 시장 갈 때 지팡이 하나만 들면 해결되었고 식재료를 구입하여 냉장고에 보관하여도 어떤 것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슨 요리를 하면 어떤 재료가 있어야 하고 어디에 두었는지 훤하게 알고 있는 터라 조금도 어색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도록 부단하게 노력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제 남편은 직장에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고 아내 혼자 외출을 해도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당연히 아내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며 두터운 믿음으로 용기가 되어주었다.아내가 이렇게 된 연유는 간단했다. 혼자서도 살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야채 썰기, 갖은 양념하기, 끓이기, 그릇에 덜어 상차리기, 그리고 남편과 함께 식사하고 설거지하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척척 잘 해야 하는 것이 목표인지라 눈물겨운 연습과 훈련을 거듭했다. 더러는 실수하여 부엌칼에 손을 다치기도 했고 손에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다시 도전하여 끝내 성공하기를 반복하고 또 했다. 그 결과 나중에는 두 눈이 멀쩡한 사람에 버금가는 전업주부의 고유한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길에 사랑하는 빛이 반짝반짝 했다. 이러한 사연에 필자도 그 남편에 못지않은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남다른 연습과 훈련으로 없어진 눈도 있게 하는 상황에 최근의 정치가 겹쳐진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해당 학위도 취득하여 수십 년 동안 정치 현장에 몰두한 사람이 아닌가. 장님도 귀머거리도 아니요, 사지가 멀쩡하고 명석한 두뇌까지 갖추었으면 그 많은 훈련과 경험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조금도 전문 정치가로 여겨지지 않는 까닭은 뭔가. 전혀 정치를 모르는 농부나 어부보다 더 어설프고 교활하게 보이니 이게 웬일인가.필자는 외치고 싶다. 장님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심혈을 기울여 관찰하고 배울 용의는 없느냐고.

2022-10-11

말하는 마음, 듣는 마음

세상에 발화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어딜 가도 조용히 사색하는 사람 보다 지치지 않고 떠드는 사람만 보인다. 나부터 그렇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일기장은 물론이고 지면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들이 가득하다. 여기저기에 끼적여놓은 문장을 보면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운 감정까지 든다. 이것이 필요한 이야기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나이브하지 않은가? 매일매일 비슷비슷한 문장을 적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쓰는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은 작아질 대로 작아져서 반쯤 베어 문 땅콩보다 더 조그매지는 기분이다.글을 쓸 때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나는 굉장히 수다스러운 성격이다. 대화를 주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정적을 참지 못하며 침묵과 함께 찾아오는 엄숙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어려운 일을 위트 있게 넘기고 싶어서 상대에게 무례한 언사를 행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책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다음에는 입을 열지 않을 거야. 침묵을 견디는 사람이 될 거야. 다짐해보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그러한 결심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다시 시끄럽게 떠드는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것도 없었던 때,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 주변을 왜곡시켜 보거나 마냥 숨어 있고 싶어 했던 시절, 나는 어떤 고립감을 느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의미한 행동은 세상에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잘못되었어. 그러니까 이 세계가 망할 수밖에 없는 거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의 말을 가로막고 상대가 얼마나 편협한 관념에 갇혀 있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너는 왜 본질을 못 봐? 나는 선명하고 자신감 있는 척했지만 끝끝내 어떤 것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어리석음을 인지하면서도 발화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굳이 이해해보려는 태도야말로 내가 존립할 수 있는 이유였으니까. 그때의 나는 이상한 결연함이 있었다. 입을 다무는 것은 비겁한 것이라고. 끓어오르는 언어를 숨기지 말고, 밖으로 모두 드러내 보이자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말하는 양은 더욱 늘어났고 발화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의 거친 언어는 정제되었고 강의의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불안이 들었다. 뭔가를 선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위험한 방식인 것 같은 기분. 이것은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하고 강조하는 말은 원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스스로가 선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주입하려 했다. 나는 말하는 것을 멈추고 물었다. 너희의 생각은 어때? 그들의 입에서 놀라운 언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내가 들여다보지 못한 지점과 알지 못한 세계를 전달받았다. 끝끝내 장악할 수 없는, 아니 장악할 필요가 없던 그들의 역사였다. 비로소 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어렵다. 발화보다 경청이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다정한 마음과 체력이다. 상대의 말을 하릴없이 듣다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불쑥 끼어들어 이런저런 것들을 정정하고 싶다. 그러나 상대의 말 뒤에 숨은 마음을 느끼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순간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세계로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건 굉장히 근사한 일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소설을 쓰는 내내 나는 발화하는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어딘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독자를 상상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내뱉는다. 그러나 한 쪽에서 나는 듣는 사람의 역할을 한다. 소설 속 인물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활자로 옮기는 일을 한다. 말하는 마음과 듣는 마음은 맞닿아 있다.이제는 알 것 같다.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뭔가를 바꾸겠다고 말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불안과 불만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세상에는 계속해서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외롭고 어려운 투쟁을 지속하며 누군가에게 가닿으려 애쓰는 마음이 있다. 그것에 대해 한 마디를 더 보태는 것보다 이야기를 듣고 곱씹고 생각해보는 태도. 거기서 기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말하는 마음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듣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다정한 마음의 시작이 될 것이다.

2022-10-11

사과라도 잘 하고 싶어

말하기 수업 첫 시간에는 항상 실수를 겁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대신 실수를 했을 때에는 반드시 사과하라고 덧붙인다. 그게 작은 실수든, 혹은 큰 실수든.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아이들은 이 부분에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사과라는 말이 무겁게 들리는 까닭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틀린 것을 인정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꾸만 꾀를 낸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당하게 들릴 논리를 찾는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지만, 틀려선 안 되기에 자신을 끝없이 합리화시킨다.다음부터 조심하겠다는 말 한 마디면 해결될 일도 그러다보면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다란 거짓말을 동반한다. 과외를 할 때부터 그런 상황을 몇 번쯤 겪다 보니, 이제는 아예 수업 첫 시간에 사과에 대해 가르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그건, 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혹은 나의 마음이 너와 다를 때에도 쓸 수 있는 표현이라고. 사소한 실수에서부터 누군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을 때에까지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거라고. 그 정도의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목숨을 건 사죄나 영어에서의 ‘Apologize’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건 그냥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끼리의 최소한의 성의 표시 같은 거라고.종종 그런 아이들이 있다. 그럼 그런 사과는 가식이고 거짓말인 거 아니냐고. 자신은 진심이 아니면 사과하기 싫고, 진심이 아닌 사과는 받고 싶지 않다고. ‘진심’이라는 말이 무겁게 들리기보다는 귀찮은 무언가를 처리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진심. 그걸 어떻게 확인하지? 어떻게 믿을 수 있지? 타인의 진심을? 자신의 진심조차 믿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고작 인간이? 지나고 나서야 늘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유약하디 유약한 인간에게, 나는 종종 진심이라는 말은 너무 해로운 말장난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라서 뭘 그런 걸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냐고 할 수도 있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시기가 언제든 좋으니 빨리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서로의 실수에 대해 잘 사과하고, 그래서 내가 가르치는 내용이 수준 낮은 이야기처럼 들리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하지만 아마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또 어른이 되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에게서 배우며 자랄 테니까. 그래, 어디 이게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어른들이 그랬으니 아이들 또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자란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유감이라는 간단한 말조차 하지 못해서 더 큰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타인을 욕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실수는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실수에는 죽일 듯이 달려드는 정의 중독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그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으면서, 자신이 그 자리에 서는 것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고,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는 사람들이란.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사과를 잘 하지 않는 사람들만큼이나 무서운 건, 사과를 잘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토록 진심과 진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면서, 이 사회는 누군가의 진심과 진정성을 결코 믿지 않는다. 아는 것이다. 자신 또한 어떠한 진심도, 어떠한 진정성도 없이 단지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자신 또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생존’하고 있을 따름이며, 정의나 대의보다는 돈과 안락함에 얼마든 쉽게 유혹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가 타인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건 오직 그것이 자신의 돈과 안락함에 도움이 될 때뿐이다. 그 모든 악순환을 가리기 위해, 우리는 진심이라거나 진정성 같은 말들을 만들고 치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나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도 없고, 사람 없이는 살아갈 자신도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투박하게 구르고 실수하며 끝없이 사과하며 사는 수밖에. 나는 말하고 싶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그러다보면 무수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사과하는 수밖에. 끝없이 사과하고, 끝없이 실수하며, 그렇다하더라도 끝없이 시도하며 살아갈 수밖에. 내가 지쳐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투박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2022-10-11

교회건축과 바실리카

서양미술사는 서유럽지역에서 나타난 미술을 주로 다룬다. 시기적으로는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서양미술사가 시작된다. 유럽문화의 뿌리가 되는 그리스와 로마시대 미술은 여러 시대에 걸쳐 서양미술의 모범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인용되기는 하지만 서양미술사의 직접적인 연구영역은 아니다.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내린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도들의 종교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밀라노칙령 이전 기독교도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해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무덤이나 가정에 숨어서 몰래 예배를 드렸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인정하게 된 것과 관련해 설화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후기 로마제국은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네 명의 황제가 구역을 나누어 다스리는 사두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사두정치는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황제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로마 근교 밀비우스 다리에서 결전을 벌였다.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신비한 체험을 한다. 막사에서 잠을 청하던 콘스탄티누스에게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십자가를 보여주며 ‘이 표식 아래 승리를 얻을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어찌할 바를 몰랐던 콘스탄티누스는 십자가 모양을 깃발과 방패에 새긴 후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승리를 거두 얻다. 십자가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믿은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인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인정했고 이로써 서양미술사의 첫 단추가 끼워졌다.종교 활동이 허용된 기독교도들이 마주한 첫 번째 문제는 예배드릴 적절한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신전을 개조해 교회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교도들이 우상을 모신 곳이라는 종교적 거부감 외에도 신전의 내부 공간이 협소했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군중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기독교도들의 눈에 들어 온 것이 바실리카였다. 공공건물이었던 바실리카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건축구조를 가졌다. 장방형(長方形)의 바실리카는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어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팔던 실내시장의 기능을 했으며 재판이 진행되기도 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군집할 수 있을 정도로 실내 공간은 충분히 넓었다. 출입구 반대편 끝 쪽에 재판장의 자리가 무대처럼 조성되어 있었던 것도 교회로 쓰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건축적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그곳에 기독교도들은 예배의 중심인 제단을 모셨다.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교회를 짓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건축된 것이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이들은 모두 바실리카 형식으로 지어졌다. 콘스탄티누스 때 건축된 이 교회들 중에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재건축된 것이고 옛 모습은 추측해 재구성한 도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장방형의 평면도를 보이는 옛 성베드로 대성당 내부는 모두 다섯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앙에는 넓고 높은 공간 신랑(身郞)이 위치해 있고 좌우에 각각 두 개씩 낮고 좁은 통로 측랑(側廊)이 마련되어 있다. 신랑과 측랑 사이에는 줄지어 서 있는 기둥들이 공간의 경계를 이루고 천장은 열려 있어 대들보와 지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바실리카에서 교회건축의 모범을 발견한 기독교도들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에 부딪혔다. 교회를 어떻게 장식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기독교가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는 우상숭배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 내에서의 성화상 사용에 대한 입장차는 이후에 벌어질 동서 교회의 분열은 물론이고 미술사 전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2-10-10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Ⅳ>

그게 다 살기가 팍팍해져서 그래.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다 일을 해야 되니까. 이런 것 듣고 다닐 여유가 없어진 거지. 우리 아들 내외만 해도 그래. 둘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점점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아. 얼마나 딱해 보이는지. 그렇다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라고 해봐야 아파트 하나, 고향에 조그만 언덕 하나 있는 것을. 그렇다고 덜컥 걔들한테 줘버릴 수도 없잖아. 나도 죽을 때까지 쥐고 있을 것이 필요하니까.아니 지금, 아파트 하나, 산도 하나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은근히.니들은 왜 말만 섞으면 꼭 그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거야?어쨌든 젊은 사람들이 불쌍해. 나는 사실 요즘 버스 타는 것도 미안해. 젊은 사람들한테. 우리가 하는 게 뭐 있나? 맨날 먹고 놀면서 시간 보내는 거잖아. 다들 뒤늦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내가 냅네.’ 하고 있잖아. 돈 한 푼 안 내면서 버스도 타고, 강의도 듣고, 놀러 다니고, 매달 통장에 돈도 들어오고. 그거 다 젊은 사람들이 벌어서 낸 세금이잖아. 염치없이 받아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영 맘이 편치 않아. 이러자고 늙은 것은 아닌데 말이야.우리가 왜 하는 게 없어. 이렇게 모였다가 수업 끝나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하면서 돈 쓰잖아. 몰려다니면서 여행도 하고. 옷도 사 입고. 식당, 커피숍, 여행사, 옷가게까지 다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건데? 우리가 공짜만 쫓아다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기분 나빠. 우리도 젊었을 때 열심히 일했거든. 세금도 많이 냈고.그 식당이랑 커피숍에서 월세 받아먹잖아. 자네가. 자네가 건물주잖아.또 왜 이래. 그러면 월세를 받지 말라는 말이야? 그리고 월세 보다 더 한 것이 그, 그 뭐냐,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받아가는 돈이라던데.내 말이 그 말이야. 그 프렌차이즈 회장도 대부분 우리 같은 노인이잖아. 이리저리 젊은 사람들만 불쌍한 거지. 그러니 생각 좀 하자고. 누가 일하고 누가 세금 내서 우리가 사는지. 이 답답한 양반아.그럼 어떡하라고. 때 되고 나이 들면 알아서 죽으라고? 목을 매달기라도 하란 말이야?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젊은 사람 찾는다는 인호의 말이 시작이었다. 매해, 매번 비슷한 대화들이 반복되었다.어르신! 어르신들! 이러지 마시고요.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팥빙수라도 드시러 가시지요.중간에 말을 끊거나 중재를 해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인호의 몫이었다.20년 전 영권이 인호에게 자기 대신 지역구를 관리해 볼 것을 권했다. 인호는 실습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지역구를 물려받을 것이고 머지않아 국회의원이 되리라, 그렇게 여겼다. 어느 분야든 십 년 정도면 관록이 생기고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났다. 영권의 나이가 육십 대 후반, 곧 칠십 대에 접어들 때였다. 이제 쉬셔도 될 만하다 생각했다.너는 네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느냐?인호가 3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히자 영권이 물었다.아버님이 보시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그동안 지역구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가 영산시를 위해, 또 우리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저의 정치를 해보고 싶습니다.인호은 영권의 질문이 형식적인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그동안 지역구를 관리하며 쌓아온 것을 영권이 모를 리 없었다.넌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지역구에서 노인들과 웃으며 노닥거린다고 그게 정치라 생각하느냐. 복지를 위해 몇 가지 정책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행시킨 것이 정치라 생각하느냐. 그건 공무원도 할 수 있고, 네가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거라.인호가 아닌 영권이 3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했고, 영산시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었다. 영권이 인호에게 너는 정치를 모른다, 말했지만 영산시에서 얻은 영권의 표는 인호가 만들어내고 지킨 표였다.내가 어디 자네 아버지가 좋아서 찍은 줄 아는가? 얼굴 못 본 지 오래된 양반인데. 자네가 워낙 잘하니까 찍었지. 자네 정말 효자야. 효자.선거가 끝난 후 만난 유권자들이 인호에게 한 말이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인호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아쉬움은 더욱 컸다. 자네가 워낙 잘하니까, 라는 말만 인호의 귀에서 맴돌았다. 인호에게 자신감과 확신을 주는 말이었다. 인호의 자신감과 확신이 커져갈수록 영권에 대한 섭섭함도 같이 커졌다.다음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사람들이 영권과 인호에 대해 말했다.김 의원도 좀 그래.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지 않나? 이제 아들에게 내려주어도 되지 않아?무슨 말이 그래? 국회의원 자리가 세습하는 자리인가? 자기가 물려주고 싶다 하면 우리가 뽑아줘야 하는 거야? 그리고 김영권이나 김인호나. 그게 그거 아니야? 새로울 것도 없겠구만.영산시에서 인호는 이미 신선한 존재가 아니었다. 영권만큼 익숙한 사람이었다. 영산시에서 인호는 인호가 아니기도 했다. 인호가 나타나면 의례히 영권의 대리인이라 생각했다.

2022-10-10

‘메타버스성장’

남광현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영화 ‘아바타’는 2009년 공개된 미국영화로 판도라라는 외계 위성을 배경으로 하는 SF영화인데,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전세계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를 보면, 서기 2154년에 지구는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성 판도라에서 대체자원을 채굴해야 했는데, 판도라 토착민 나비(Na’vi)족이 거주하는 곳에 언놉타눔이라는 대체자원이 가득했다. 산소가 희박한 환경에서 살 수가 있고 인간보다 신체적 조건이 월등히 좋은 나비족의 거주지에 묻혀있는 대체자원을 탈취하기 위해 지구인은 나비족의 외형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 원격 조정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탄생시켜 나비족으로 보내게 되면서 일어나는 SF판타지 영화이다.이 ‘아바타’ 영화는 내가 뽑는 최고의 영화 순위 3위안에 꼭 드는데, 제임스 카메론 감독을 비롯한 영화 ‘아바타’ 제작진의 엄청난 상상력과 표현기술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가 거둔 2021년 기준 전세계 수익은 28억4천724만달러(4조386억원)로 지금까지 개봉된 모든 영화 중 1위이다. 당초 이 영화 주인공 출연 조건으로 수익의 10%를 제안 받았지만, ‘본’시리즈를 위해 거절한 영화배우 맷 데이먼은 이 일이 배우 활동 중 가장 후회된다고 했다. 여기에다 맷데이먼이 경악할 일이 생긴 것이 금년 12월 16일 ‘아바타2:물의길’이 개봉된다는 것인데,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영화 ‘아바타’는 실제 세계의 우주(Universe)에 부합하는 인터넷 기반 3D 가상세계로 표현하는 ‘메타(가상, 초월)버스(세계)’ 기술의 대표적 산물이다. 지난 5월 발표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는 ‘메타버스’가 직접 언급된 국정과제가 7개나 되며, 연관된 과제를 포함하면 무려 15개다. 이 중에서 77번 과제 “민관 협력을 통한 디지털 경제 패권국가 실현”을 보면, AI·데이터·클라우드 등 핵심기반을 강화해 메타버스·디지털플랫폼 등 신산업을 육성, 디지털 경제 패권국가 도약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메타버스특별법 제정, 일상·경제활동을 지원하는 메타버스 서비스 발굴 등 생태계 활성화, 블록체인을 통한 신뢰 기반 조성 등 메타버스 경제 활성화 계획을 포함했다.지난 4월 문형남 숙명여대 주임교수는 한 칼럼에서 성장모토로 이명박 정부는 녹색경제·녹색성장을,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강조했는데, 윤석열 정부는 ‘ESG성장’과 ‘메타버스성장’을 강조하고 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인지 대구시는 8월말 수성알파시티에서 과기정통부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약 5천억원 규모의 전국 1호 SW진흥단지 조성 등 총 2조2천억원 규모의 ‘8대 ABB 혁신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예비타당성조사를 진행한다.경북도는 최근 ‘디지털 기회의 땅! 메타버스 수도 경북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벌써 국비 481억원을 포함한 총 769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한류 메타버스 월드’, ‘메타버스 노마드’, ‘신라왕경 디지털복원’ 등 사업추진 통한 ‘메타인구 가상도민 1천만명’을 기대하고 있다.

2022-10-10

홍준표와 즐풍목우(櫛風沐雨)

홍석봉정치에디터 즐풍목우(櫛風沐雨)란 일신의 안위를 잊고 천하를 위해 온몸을 바쳐 일하느라 시간이 없어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목욕을 한다는 뜻이다.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요순시대 황하의 물길을 다스리는 치수(治水)는 국가 사업이었다.순 임금이 신하인 우(禹)로 하여금 홍수를 막도록 황하의 치수사업을 맡겼다. 우는 물길을 터서 사방의 땅과 온 나라에 흐르게 했다. 뒤에 임금이 된 우는 당시 몸소 삼태기와 삽을 들고 물길을 정비했다.우는 치수 책임자로 일하는 13년 동안 집에도 가지 않고 인부들과 함께 물 속에서 생활했다. 장딴지에 살이 안보이고 정강이 털이 몽땅 빠졌다고 한다.그는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비로 목욕하면서(즐풍목우) 나라의 안정을 꾀했다. 우 임금이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몸을 힘들게 한 것이 이러했다고 한다.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編)에 나오는 이야기다.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 6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즐풍목우의 심정으로 대구를 바꾸고, 대구 재건을 담대하게 밀고 나가겠다!”고 밝혔다. 대구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그는 기득권 카르텔을 깨지 않고서는 대구의 미래가 없다며 대구의 변화를 위해 시정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고 있다.‘즐풍목우’는 홍 시장의 대표적인 정치적인 수사다. 중요한 고비마다 즐풍목우를 되뇌이며 자신을 채찍질했다.2017년 탄핵사태로 위기를 맞은 자유한국당의 대표에 취임하면서, 또 지난해 8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후보 때 ‘즐풍목우’심경으로 국민을 위한 희생을 다짐했었다. 즐풍목우의 다짐이 빛을 발하길 바란다./홍석봉(정치에디터)

2022-10-10

꿈결 같은 설악산 단풍산행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모처럼 가을채비를 나서는 발길이 가뿐하기만 하다. 계절의 수레는 어김없이 빛과 색과 열매를 드러내며 부지런히 굴러가고 있는데, 너무 바쁘거나 궁색(?)하게 계절의 변화와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아집에 사로잡혀 외곬스럽게 살아갈 수 있으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고 이웃과 사회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인데, 좀 더 열리고 트인 가슴으로 자연과 교감하고 만상(萬象)과 공감하는 여유와 감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하루는 연휴 내내 이불 속에서 뒹굴어도, 바깥에서 활기차게 움직여도 어김없이 지나가게 마련이다.그래서 떠났을까? 근 5년만에 설악산에 다시 올랐다. 1990년 초에 처음으로 대청봉을 오르고 그 풍광에 매료되어 자주 찾아야지 해놓고는 쉽사리 가지 못해 아쉬움이 컸었는데, 그나마 5년만에 다시 오를 수 있어서 다행스럽기만 했다. 톱니바퀴같이 돌아가는 일상을 벗어나서 마음이 끌리고 몸이 향하는대로 누구라도 홀가분히 떠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현실의 짜인 일들과 주어진 역할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낡은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아직은 가슴이 뛰고 심신의 건재함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나름의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과연 설악산은 명산답게 새벽부터 등산객들로 붐볐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시작되는 본격적인 새벽 등산코스는 초입부터 상당히 가팔랐다. 랜턴을 비추며 수많은 계단과 비탈길을 오르면서 조금씩 나아가는 발길은, 어쩌면 살아가면서 차근차근 밟고 지나가야 하는 삶의 단계적인 수순과 절차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힘들면 쉬엄쉬엄 숨을 고르며 완급을 조절하고, 갈증과 허기를 달래는 물과 주전부리는 등반의 추동력을 유지시키는 연료 같은 것이었다. 마침 서녘하늘에서 반기던 새벽달이 넌지시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아서 산행의 발걸음이 한결 수월해진 것 같았다.“구름이 넘나드는 숨막힐 듯 우뚝 솟은/암봉(巖峰)에 달라붙어 기는 듯 줄을 타고/각고의 끈덕짐으로 한 걸음씩 옮긴다//쭈뼛쭈뼛 칼날바위 안간힘으로 오르고/위태위태 바위부리 부여잡고 지나며/아찔한 공룡의 등짝 곡예하듯 밟는다//험난함이 커질수록 비경(秘境) 외려 빛나던가/추색(秋色) 짙은 천화대 하늘에 핀 꽃송이들/골골이 뼈대같은 기암 염주처럼 얽혔네//한시름 넘기면 또 한고비 다가오듯/시련의 마루터기 악착같이 넘고 나니/마등령 갈림길에서 들려오는 산의 말씀” -拙시조 ‘설악산을 오르며’운무가 수시로 끼고 걷히는 선경(仙境)같은 능선을 타면서 더해지는 감흥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부터 오른다(登高自卑)는 것을 보여주며 지위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낮춰야 함을 새삼 일러준다. 또한 정상에 오래 머물지 못하듯이 높은 곳에 거처하면 떨어질 것을 생각한다(居高思墜)는 평범한 가르침이 떠오르기도 했다. 새벽안개가 피어나는 서북능선의 몽환적인 단풍숲에 꿈결처럼 파고드는 아침햇살은 그야말로 절정과 찬탄의 서정시를 쓰고 있었다.

2022-10-10

혁신진화원리와 성공하는 기업

정상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혁신을 도입하는 것은 건강한 조직, 제조 수준을 높여 수익성 확보 및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만들어 가기 위함이다. 기업에 혁신을 잘못 도입하거나 자사에 맞게 진화발전시켜 문화로 가지 못하면 중도에 멈추게 되고 고급 낭비가 된다. 미국 GE(General Electric)는 젝웰치 회장이 6시그마를 도입해 성공시켜 세계 선도기업이 되자 국내에서도 1995년부터 L사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여러 기업이 도입했으나 성공한 기업은 드물다. 기업이 혁신을 도입해 실패를 하게 되는 원인은 혁신기법을 이해하지 않고 유행따라 도입하거나 진화발전하지 않아서다.혁신진화원리관점에서 보면 도입, 모방, 응용, 창조 등의 4단계를 거치게 된다. 도입단계에서는 혁신기법의 수행원리와 기능을 학습하고, 필요성, 적용성, 효과성 및 전략과 연계성이 있는지 검토 후 도입해야 한다. 모방단계에서 모델라인을 선정해 혁신기법의 수행원리대로 따라하며 그 과정과 결과에서 장단점과 특징을 분석한다. 응용단계에서 혁신의 토양, 즉 기업문화, 조직 특성, 일의 속성과 생산프로세스의 특징에 맞게 응용, 진화시켜 혁신기법 최적화를 만들어 간다. 창조단계에서는 전 생산라인에 확산적용하며 필요 기능과 융합을 통한 진화로 종합체계화시켜 기업의 고유 혁신문화로 재정립시켜가는 것이다.일하는 사고와 일하는 방법이 기업 조직과 경영전반에 스며들어 제품생산방식으로 정착이 되는 단계를 기업혁신활동 성공으로 정의한다. 필자가 컨설팅 하고 있는 포스코는 국내 여타 기업처럼 6시그마를 도입하여 적용했으나 3년 반만에 기업혁신 전문컨설팅 ‘부즈앨런해밀턴’의 진단을 받고 ‘도입은 합격, 체질화는 미흡’이란 결과를 받았다. 6시그마 혁신기법의 특징은 데이터로 시작해서 데이터로 끝난다는 말을 할 정도로 통계 분석을 통한 문제해결 방법론인데 포스코의 생산조건 문제본질을 보면 통계적 전문 Tools인 미니탭, 데이터마이닝 등을 사용해야 하는 대상은 적은 편이고 기본 데이터만 분석하면 문제해결이 7~80% 되는 속성이 있었다.포스코가 6시그마를 자사의 문제 본질과 해결 필요요건에 맞춰 진화시킨 것이 현재 활발히 활동중인 QSS(Quick Six Sigma)활동이라 할 수 있다. QSS활동은 6시그마의 기법을 응용해 진화시킨 것 뿐만 아니라 제철소 특성상 TPM을 도입해 설비의 최적 생산조건을 만들어 가고 TPS의 낭비제거 사상과 IE기법의 인체공학적 일의 효율성을 추구해 종합 혁신방법론으로 최적화해 17년째 큰 성과를 내며 지속되고 있다.하지만, 기업의 성장발전과 미래를 위한 경영전략에 맞는 혁신기법으로 지속적으로 진화발전하지 않으면 달리는 자전거처럼 멈추면 넘어지는 속성이 있다. 경영 흐름이 쉴새없이 변해가듯이 혁신의 기법도 기업의 생산전략에 부응하는 기법 고도화를 끊임없이 추구해나가야 한다. 예를들면, 철강업의 미래 경쟁력은 자동차를 넘어 비행기, 우주산업 등 새로운 강종을 개발해 생산해내려면 혁신기법도 끊임없이 고도화, 최적화 되어야 지속 가능한 기능을 다 하는 것이고 기업은 성공적인 월드 클래스로 가는 것이다.

2022-10-10

비분강개(悲憤慷慨)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대한민국은 지금 내전(內戰) 중이다. 북쪽의 김정은 세습독재체제와의 대결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남한 내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들과의 전쟁이다. 물론 무력으로 적을 살상하는 전쟁은 아니다. 언론매체를 이용한 선전선동이나 집단시위 등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여론전이다. 그 여론전의 목표는 선거의 승리로 정권을 잡고 국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하는데 있다. 일견해서는 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정치행위로 보이지만, 그 한쪽이 나라의 체제를 부정하는 집단일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이제 가까스로 자유우파가 정권을 잡긴 했지만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국회의 다수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법원과 헌법재판소, 선거관리위원회 등 국가 핵심적인 기구의 요직에 좌파정권 인사들이 포진해 있는가 하면 정부조직에조차 좌파정권이 ‘알박기’해놓은 인물들이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언론매체까지 좌파노조가 장악하고 있는 것은 치명적이다. 여론전의 주무기가 언론인데, 그 중에서도 공영방송은 핵폭탄급 위력을 가진다. 언론이 편파, 왜곡, 조작하면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걸 우리 모두가 똑똑히 보아온 바이다.내전 장기화의 결말은 망국이다. 전쟁은 어느 한쪽이 확실히 이겨야 끝이 난다. 지유우파가 승리하면 자유대한민국은 존속할 것이고, 종북 좌파가 이기면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붕괴의 길을 갈 것이다. 전쟁판에 중도가 설 자리는 없다. 방관자의 무책임한 태도나 회색분자들의 양비론 따위는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이다. 원하든 싫어하든 승리한 세력의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면 누구나 체제전복을 꾀하는 반역의 무리들로부터 국가를 수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윤석열 정권이 가진 것이라고는 수사권 완전박탈을 앞두고 한동훈 법무장관이 고군분투하는 검찰권뿐이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지난 정권 불법·비리의 정점을 향해 수사의 칼날이 다가가자 좌파세력들은 발작적으로 전면전을 선포하고 나섰다. 그들의 유전자엔 잘못의 반성이나 패배의 승복이란 없다.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것이 좌파들의 전략이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 침소봉대하기 위해 혈안이고,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적반하장으로 뒤집어씌우기가 먹힌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여론전을 이기기 위해서는 중도를 얼마나 끌어오느냐가 관건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좌파들의 불의와 비리, 무능과 후안무치를 낱낱이 파헤쳐 폭로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들의 실체를 확실히 알아야 중도가 돌아설 터이니.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북핵의 위협과 경제난국에 대처해도 모자랄 판에 내란으로 국력을 소진하다니, 나라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비분강개를 금할 수가 없다. 그나마 윤석열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다. 우국충정을 가진 국민들이 모두 나서서 나라를 구할 때이다.

2022-10-06

새로운 하늘을 열자

윤영대수필가 ‘하늘이 열린 날’ 개천절에 태극기를 달며 생각을 해봤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지 4355년, 우리 민족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반만년의 역사를 써왔다. 최근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가고 있음을 느끼며 위대한 나라의 자긍심으로 새로운 세상의 하늘을 열고 이 지구상에 우뚝 서기를 다짐해 본다.1970년대 경제건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최빈국에서 세계 10위 권의 경제 강국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을 가슴 펼쳐 자랑하고 싶다. 세계 최고 수출국으로 OECD의 무대에 같이 섰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이제 이웃 나라를 돕는 나라가 됐다. 불과 반백 년, 우리 문화의 세계화에도 밝은 빛이 보인다. 가장 아름다운 나라, 그 문화의 힘을 보여주는 일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지금, 바람직한 민족문화를 더욱더 가꾸고 닦아서 세계의 넓은 하늘로 날려 보아야 한다.국제 음악콩쿠르에서 들려오는 찬사와 영화계에 이어지는 낭보에 우리는 자랑스럽다. 아카데미상과 칸 영화제, 그리고 에미상의 연이은 수상 소식, BTS 등 K-pop과 함께 K-드라마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각종 올림픽에서 보여준 메달 소식과 과녁을 명중시키는 양궁 전사들의 의지는 활 잘 쏘는 동이족 후예임을 알렸다. 축구 야구 등에서도 힘껏 그라운드를 누비며 ‘코리아’를 외치게 만든다. 반만년 역사 속에 언제 이렇게 우리 민족의 슬기와 용기를 보여주었던가.한글 덕분에 문맹률 1% 미만의 유일한 나라, 이제 세계인들도 이를 알고 많은 나라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하고, 더 나아가 나라 글로 채택한 민족도 있다고 하니 이 또한 세계를 열게 하는 자랑이 된다.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유럽에서는 상표에 한글 병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의 맛을 세계로’의 기치를 앞세운 음식문화, 한복의 아름다움을 매료시키는 공연과 전시회 등 그동안 꽃피우지 못했던 한류가 세계 곳곳으로 흐르며 맑고 아름다운 우리 문화를 알리고 있다. 가전제품은 이미 세계인의 생활환경에 스며들었다.어디 이뿐이랴. 과학, 기술, 산업 분야에서도 새 하늘이 열리고 있다. 세계 8번째로 개발된 초음속 KF21 ‘보라매’가 하늘을 날았고 T50 고등훈련기 ‘블랙이글스’는 하늘에 태극기를 그리며 박수를 받았다. 우주로의 비행도 시작됐다. 순수 우리기술로 제작된 ‘누리호’가 우주로의 길을 뚫으며 암흑의 하늘을 열었다. K2 전차와 K9 자주포도 열강의 기술을 넘어 합리적 가격과 신속한 생산력으로 세계의 지킴이가 되고 있다. 근래 몇 년간 잠들었던 ‘탈원전’을 깨워서 그간 잃어버렸던 에너지를 되찾고, 두려움을 벗어나 더 안전한 생활의 기반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역사는 흐른다. 그동안 물적 성장에만 쏟았던 마음을 사랑과 배려, 질서를 가르치는 교육으로 민주 국민양성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렇듯 세계로의 길을 뛰어 하늘 높이 솟구치게 할 우리 민족의 힘을 모아야 할 지금, 소소한 집안일들로 온갖 분탕질에 집착하는 정치계를 볼 때 한심한 생각이 든다.자! 하늘이 열리고 오천 년, 다시 한번 더 새로운 하늘을 열어보자.

2022-10-06

정치와 국격

홍석봉정치에디터 우리나라의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K팝, K드라마, K영화가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손흥민과 김민재가 축구변방 한국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한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 배터리와 자동차가 선전하고 있고 조선은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거기에 국산무기까지 힘을 보탰다. ‘K방산’이 최근 잇단 해외 수출 낭보를 전하며 우리나라의 위상을 잔뜩 높였다. 폴란드 대박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방산 수출액이 올해 200억 달러를 넘어서 빅4가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당분간은 수주 호황이 이어질 전망이다.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으로서 우뚝 섰다.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부러워하고 시샘할 정도의 발전을 이뤘다.하지만 진흙탕 국내 정치가 자랑스러운 성취를 여지없이 깎아 내리고 있다. 이병철 전 삼성회장이 4류로 평가했던 우리 정치는 이젠 5류가 됐다. 막장에 빠진 채 허우적대고 있다.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국운 융성의 상승 기운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호를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순방 외교와 관련, 비속어 공방이 꼬리를 물면서 국민을 위한 정치는 ‘실종’됐다. 극렬지지층을 위한 ‘정쟁’만 판을 친다. 민주당은 국회 다수 의석을 등에 업고 윤석열 정부에 계속 다리를 걸고 있다. 좌파 세력도 가세해 어깃장을 놓는다. ‘이xx’ 발언은 더 없는 호재가 됐다. 내홍으로 몸살을 앓는 여당도 이에 질세라 이재명 대표의 각종 의혹을 꺼내들고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여야가 서로 국격 훼손에 책임을 묻겠다며 아귀다툼을 한다. 국민은 경제난으로 고통 받고 북한은 연일 미사일을 쏘아대며 위협하는 마당이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대응책을 강구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기대하는 국민이 어리석을 따름이다. 정치가 국민의 기를 살려주기는커녕 피로도만 높여주고 있다. 국민들이 되레 나라를 걱정하는 판국이다.거기에 한 언론이 기름을 부었다. 국익은 도외시한 채 대통령의 말실수를 세계에 까발렸다. 그것도 모자라 해당 정부에 확인사살까지 했다. 한국 언론의 행태를 꼬집은 외교관의 SNS 유머글에 헛웃음만 나온다.예수의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발언을 한국언론은 ‘예수, 매춘부 옹호 발언 파장.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 던지라고 사주’라고 보도했다. 석가가 구도의 길을 떠나자, 한국 언론은 ‘국민의 고통 외면, 저 혼자만 살 길 찾아나서’라고 보도했다. 위인들의 언행을 우리 언론은 이렇게 왜곡 보도했을 것이라는 비아냥 글이다. 언론이 쓰레기 취급을 당하는 때다. 정치와 한 통속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언론이 정론직필의 본령만 제대로 지켰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말 실수가 잦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도는 30%대를 오르내리며 두 달째 바닥권이다. 대통령부터 바뀌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제된 언어와 행동으로 품격을 갖춰야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 민심을 살펴야 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하지만 국격 훼손의 주범인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나.

2022-10-06

축제의 계절

우정구 논설위원 10월은 축제의 계절이다. 10월 한달만 전국적으로 수 백개의 축제가 열린다. 코로나 이후 모처럼 만에 폭발한 축제로 많은 사람이 축제의 장으로 빠져들고 있다.특히 민선 단체장이 등장한 이후 지역의 특성을 살린 축제가 붐을 일으켜 한해동안 1천개가 넘는 축제가 벌어져 축제 홍수에 대한 비판론도 나온다. 그러나 일본은 2만개가 넘는 축제가 열려 축제 없으면 쓰러질 나라라 할 정도이고, 프랑스는 약 10만개의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우리나라 축제 개최 수를 두고 많다 할 수도 없다.축제의 본질은 즐기는 것이다. 억눌렸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잠시의 일탈을 통해 본능적 쾌감을 느끼는 일이다. 지역과 문화와 연고성을 엮어 지역민이 함께 즐기는 축제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페스티벌이나 카니벌을 즐기는 서구인의 축제도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르지 않다.동질의 문화감을 느끼며 지역주민간 유대와 화합을 지속시키는 축제의 효과는 긍정적이다. 또 지역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상승 작용시켜 일체감을 이끌어내는 것은 축제의 장점이다.그러나 수많은 축제가 양산되는 과정에서 축제가 상업적으로 흐르거나 단체장의 성과물로 전락되는 일도 적지 않다.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는 비생산적 축제란 비난도 나온다. 지금 대구·경북 10월도 축제로 물들고 있다. 어느 축제가 볼만하고 어떤 축제가 축제의 본질에 잘 부합하는지 축제의 장으로 들어가 즐겨볼 좋은 기회다.대구에서는 오페라, 재즈, K-팝, 한방문화 등을 묶은 판타지아 대구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고, 경북은 안동탈춤, 신라문화제, 영주인삼축제와 울진송이, 경산포도, 의성마늘축제 등 손꼽을 수 없을만큼의 축제가 한창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2-10-06

고구마를 캐며

양태순 수필가 가을볕이 흐뭇한 미소를 흩뿌리는 오후다. 나는 찐 옥수수를 들고 고구마 밭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저 혼자 깨춤을 추던 발이 조붓한 둑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남우세스럽게 고꾸라지지는 않았지만 생채기가 난 발가락이 시원한 것이 운동화가 달아났나 보다. 신발을 찾으려고 풀숲을 헤치자 놀란 풀무치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날갯짓에 빠져든다.눈에 익은 느낌은 과거로 이어지는 때가 많다. 열두 살 무렵의 나는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캐는 대신 메뚜기 잡느라 바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한 고랑씩 맡아 줄기를 걷어내고 고구마 수확하느라 열심이었지만 뒤처져 따라가는 내 호미질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 밭에는 굼벵이가 더러 있었다. 어머니가 땅심을 키운다고 수시로 퇴비를 내고 분뇨를 뿌린 탓이었다. 크고 잘 생긴 고구마를 캐서 손에 들고 자랑하려고 하면 굼벵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인물 훤한 고구마에만 흠집을 내놓기 일쑤였다.우리 집은 물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그 때는 대부분 물고구마를 심었다. 모양과 색깔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크고 많이 생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굵기는 해도 모양이 볼품없고 굼벵이가 파먹어 얽은 고구마가 많았다. 지나치게 굵은 것보다 배가 살짝 나오고 아담하면서 몸매가 매끈한 것이 상품 가치가 좋은데 말이다. 형제들이 먹은 것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려난 것들이었다. 별다른 요리법이 없던 때라 삶아 먹는 것이 다였지만 그 맛을 어디에 비할까.우연히 텃밭이 생겼다. 농사는 질색인 나지만 집과 가까워 텃밭을 가꾸어볼 마음을 내었다. 어머니의 훈수로 밭을 갈고 고구마를 심었다. 유기농 거름도 사서 주고, 잡초를 뽑고, 때맞춰 물을 주며 정성을 들였다. 그 덕인지 줄기가 곧잘 뻗어나가며 잎이 진녹색을 띄어 땅 속에서 알이 쑥쑥 자라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형제들과 같이 먹을 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가을을 기다렸다.오늘은 형제들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한 고랑씩 맡아서 캐기 시작했다. 호미가 흙 속을 부드럽게 파고들어야 하는데 텅텅 튕겨져 나오는 듯 한 소리가 났다. 그래도 묻혀 있는 고구마에 대한 기대로 팔에 힘을 주어 호미질을 했다. 처음 드러난 실체는 엄지손가락 굵기였다. 낙심하지 않고 반 고랑을 캐어 봐도 씨알은 형편없다. 거의가 손가락 크기이고 간혹 먹을 만한 크기가 있었다. 게다가 땅 깊은 것만 안 고구마 때문에 다들 손에 물집이 생겼다. 형제들은 캐낸 고구마를 들고 난리다. 이걸 어떻게 먹느냐고. 아무래도 내년 농사 위해 빡시게 일 하는 것 같으니 저녁은 격하게 차려야 한단다.나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누어 먹을 생각에 몹시 설렜다. 이토록 부실한 놈을 숨기느라 잎들이 그리 무성한 줄 상상도 못했다. 나는 민망한 속내를 숨기고 내가 지은 것이니 가져가서 잘 먹으라고 했다. 밭둑에 앉아있는 어머니는 우리가 하는 양을 보며 웃으시지만 아쉬운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는지 고랑에 둔 눈길을 차마 거두지 못한다.이번에도 겉모습에 속은 듯하다. 무성한 줄기 아래에 토실한 고구마가 있으려니 믿었는데 헛꿈이었다. 겉이 번드르르할수록 실속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주 속는다. 거침없는 입담에 속아 물건을 사기도 하고 꼼꼼히 살펴보고 들어야 하는 보험도 상대의 말솜씨에 넘어가 후회하기도 했다. 아마도 마음보다 눈이 먼저 반응하는 모양이다.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데는 다양한 요소가 있다. 외적인 것에는 빼어난 말솜씨와 다양한 표정, 몸에 배어있는 움직임이 있고 내적인 것에는 스며 나오는 인품과 말투, 상대를 향한 따뜻한 시선,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다. 한 면만을 보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는다.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고구마를 캐면서 또 배운다. 눈만 믿지 말고 여러 요소를 두루 참작하여야 한다는 것을.언제쯤이면 마음창이 맑아질까. 한 꺼풀 아래에 숨어있는 보석을 알아보려면 구름과 바람을 부지런히 키질하여 깜깜한 하늘에서 빛이 나는 별, 그 별의 키질을 배우면 될까.

2022-10-05

친환경 ‘해양기술’의 세계

기후변화에 대응하자는 논리는 이제 일상이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많은 변화들이 생활 전반으로 퍼지고, 많은 이들이 텀블러 이용과 빨대 사용 중지, 자전거 타기 등 일상의 소소한 변화에 동참한다. 소비도 마찬가지다. ESG경영으로 기후 변화 등 사회적 책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기업에 관심이 쏟아진다. 지속가능성에 방점을 두고, 기업의 경영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 해양수산부가 개최한 ‘2022 해양수산 창업 콘테스트’ 수상자들의 아이디어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아이디어의 사업화와 상용화의 의미를 넘어 현재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 체계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자세한 이유를 되짚어보자.해양수산부는 지난 6월 30일부터 약 3달에 걸쳐 ‘2022 해양수산 창업 콘테스트’를 진행했다. 유망 아이디어를 발굴해 사업화할 목적으로 2015년부터 시작된 창업 콘테스트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해양 기술의 소개장으로 활용되어왔다. 올해는 ‘배양생선(Clean Fish)’ 생산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벤처기업)인, ‘바오밥헬스케어 주식회사’가 영예의 대상을 차지했다. ‘배양생선’이라는 낯선 단어가 들린 지 몇 년 만에 한국에서도 대량생산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배양생선은 배양육, 즉 대체육의 시장이 커지면서 덩달아 주목받았다. 남획과 기후변화 등으로 어족자원 고갈이 현실화되자 이에 대안으로, 어육으로만 이뤄진 생선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배양생선은 실제 물고기의 근육조직에서 줄기세포를 채취해 배양액에서 키워낸다. 배양액에서 늘어난 세포 중 농축 세포만 뽑아내 3D프린터로 생선살을 찍어내고, 이 과정에서 바이오잉크를 섞어 물고기의 형태를 살린다. 3D바이오프린팅을 이용한 조직재생 전문기업인 ‘바오밥헬스케어’가 배양생선의 대량생산 기술을 갖춘 것도 우연이 아니다.2020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 대체육 가공 기업은 20여개 가량이라고 한다. 그 중 세포배양방식의 해산물을 생산하는 기업은 6개 정도다. 참치 대체육에 집중하고 있는 핀리스 푸드(Finless Foods)가 대표적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참치는 2022년 현재 멸종 위기 종이다. 2015년 세계자연기금은(WWF)은 전 세계 참치 개체수가 과거에 비해 70%가량이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각 국가별 쿼터를 정해 잡을 수 있는 양이 제한된 대표적인 어종이다. 참치가 배양생선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배양생선의 대량생산은 어족자원 고갈의 대안이 될 뿐만 아니라 깨끗한 생선(Clean Fish)이라는 이미지도 갖추고 있다. 미세플라스틱과 중금속 축적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배양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전자 변형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후변화의 시대, 단백질 공급원으로 배양생선의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이 외에도 해양기술을 통해 진일보한 현실을 마주한 경우는 꽤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의료용 홍합접착제와 혈액동결보존제다.홍합이 강한 파도가 치는 바닷가 갯바위에 붙어있는 이유는 홍합에서 분비되는 강력한 접착성분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홍합의 이런 접착성분을 인체에 활용하는 홍합 단백질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접착 강도가 세고 생채 적합성이 높아서 인체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고, 최근에는 방광에 생긴 누공(구멍)까지 치료할 수 있게 됐다. 일반적으로 방광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해 치료가 쉽지 않다고 한다. 더욱이 화학접착제의 경우 인체 내 부작용이 많아 사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홍합단백질의 접착제는 자연유래성분으로 생체 내 부작용과 거부반응이 적어 치료가 어렵기로 유명한 방광 누공까지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혈액동결보존제 역시 해양 기술의 대표적인 경우다. 극지연구소는 2018년 남극 로스해에 서식하는 해양미생물에서 얼음성장억제물질(항동결 바이오폴리머)을 발견했다. 이를 혈액 동결에 적용해 보존제를 만들었다. 항동결 성분이 영하의 온도에서도 혈액 내 수분 동결을 막아 혈액동결보존을 가능하게 했다. 혈액이 동결되면 혈액 내 적혈구 세포가 파괴돼 그동안 혈액동결보존에 어려움이 있다. 정현미 작가 한편, 항동결 물질은 화장품 분야에서도 활용될 예정이다. 극지연구소는 남극에서 발견한 해양미생물의 얼음성장억제물질과 북극 효모에서 발견한 결빙방지단백질을 활용한 노화방지화장품을 개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결빙으로 화장품 효능이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결빙방지단백질의 세포막 보호 기능을 활용해 주름 개선 및 노화방지 화장품을 개발한 것이다.홍합접착제와 혈액동결보존제는 당장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기술은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해양기술의 무궁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해양기술은 해양미생물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양생물에서 착안한 기술을 연구·개발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인다.오염되지 않은 배양생선을 먹고 홍합접착제로 상처를 치료하며, 항동결 물질이 포함된 화장품을 쓰는 시대다. 동시에 기술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기술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기후변화를 늦추는 일상의 소소한 실천과 함께 기술의 도약에도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이 두 가지가 양립해야 기후변화 속 우리네 일상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22-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