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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모시적삼

등록일 2023-06-25 19:58 게재일 2023-06-2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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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혜 수필가
이순혜 수필가

오전 10시, 추모 묵념 사이렌이 울린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위해 머리 숙여 감사하는 마음을 새기자는 뜻을 담는다. 묵념 이후에는 현충탑 앞에서 헌화와 분향을 하고 추모 공연, 국가유공자 표창 등 순서로 추념식이 진행된다.

모처럼 휴일이라 느긋한 아침을 먹고 형산강변을 걸었다. 10시, 묵념 사이렌 소리에 빛바랜 기억 한 부분이 푸시시 일어난다. 생각이 완전히 여물지 않은 터에 새겨진 기억이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고, 너무 앞서간 꿈은 알록달록하거나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넘어져 상처가 많았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새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자주 넘어져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다 가신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톺아보다 아버지를 위한 헌시를 바쳤다.

 

‘유월의 모시적삼’

- 충혼탑 앞에서 -

 

천둥소리 한 귀퉁이 찧어내다

천지에 놀란 찔레향이 아리도록 매운 날입니다

무더기무더기로

아까시 마저 떨어지는데

유월의 하얀 모시적삼은 충혼탑 앞에 서 있습니다

 

시퍼렇다 못해 먹빛이 되었던

60년, 다 받아냈기에

아버지,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국화입니다

 

아니, 그 먹빛의 한(恨)

한숨으로 쌓아

한 겹 무심이 되었기에

유월의 끓는 햇살에 서 있는 흰 모시적삼은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한 송이 국화입니다

 

아홉 번 밀리고 밀린 싸움

그날의 *형산강은

검붉은 울음을 토악질하고

포성에 묻혀버렸습니다

 

여기 이 산 어디쯤일까

저기 저 강 어디쯤일까

아버지,

당신이 썼던

학도의용군의 삐뚤어진 모자를

하얀 이 드러내며 고쳐주었던

 

옛 친구의

선한 눈망울이

파편처럼 찢어져 묻힌 자리에는

오늘도 말이 없습니다

 

불러도 보고

쓸어안아 보아도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아득한 날의 안부일 뿐

저 질긴 세월을 낱장으로 뜯어

다 놓아버렸습니다

 

살아 있다고 마음껏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속울음 삼켰을

아버지

 

묵념 사이렌 소리에

바람도 나무도 잠시 눈을 감고

이제야 학도의용군 이름아래

어깨동무하고 있을 생각에

칠 벗겨진 한 줄 비문처럼 저도 눈을 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도 가벼운

아버지

그 주름진 국화위에

6월이 글썽입니다

 

*형산강 · 625 당시인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44일간 2천300명이 넘는 국군과 학도병이 전사한 치열한 격전지

 

형산강은 아직도 말이 없다. 말을 안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이 쏟았던 피와 땀을 모두 받아들였을 강이다. 그러고는 말없이 흘려보냈다. 역사의 현장에서 어떤 이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고, 어떤 이는 짧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이도 있겠다. 좀 더 적극적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이도 있다.

아버지 생각을 깊게 했다. 아주 조금은 아버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안한 게 많아 마음껏 일하지 못한 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 쌀독은 자주 바닥을 드러냈다. 넓고 편하고 좋은 집을 찾지 않아 우리 집 서까래는 거무튀튀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다 어린 자식들 생각에 화려한 세상의 것을 좇다가도 금방 접어버렸다.

이제 아버지 생각을 떨쳐 보냅니다. 더는 봄 앓이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훨훨 날아간 저 학도병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내 몸을 주고 정신을 주었던 아버지. 이제는 밥벌이에 힘들었던 일과 생각의 뒷골목에서 평생을 움츠렸던 그 무엇에도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삼 남매를 내보내고 한 번씩 보내주었던 따스한 눈길만을 기억하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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