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치욕품은 옛 성곽 오르면 멀리 한강도 한눈에
연말이 되고 보니 마무리 등산을 함께 가자고 여기저기서 필자에게 연락이 왔지만 이번 행사는 매월 정기적으로 가는 문인들과의 산행이다.
대구문학인 산악회인 대문트레킹 회원들과 올해 마지막 등산으로 경기도 하남에 있는 남한산성을 다녀왔는 바 그 감회가 깊고 새롭다.
남한산성, 역사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자연에 둘러싸인 이점으로 산성이 안고 있는 영광보다는 침략의 고난으로 인한 상처가 더 깊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동·서·남·북 4개문 연결 산성길이 12km, 5개 등산로 있어
암문 빠져 나오면 2층짜리 목조건물 수어장대 유일하게 남아
이곳 산성은 백제 온조왕대의 성으로 알려져 왔고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이 이 위치라고 믿어져 내려오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산성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던 조선조 인조 때인 1624년인데 2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1626년에 완공됐다.
성이 축조되고 10년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으며, 주화파와 주전파의 지루한 정쟁의 결과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 수항단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항복했던 것이다.
그런 역사적 아픔을 담고 있는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니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 말에 대구의 문인들과 함께 비록 아기자기한 길이긴 했으나, 애환이 깃든 성벽을 따라 등산했던 마음은 산성 여기저기에 서 있는 잎이 떨어진 신갈나무처럼 쓸쓸한 기분이었다.
다시 새벽으로 돌아가서 본 산행의 첫머리부터 적는다. 언제나 그렇듯 신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고서는 오전 6시경 법원 앞에서 차를 탔다. 그곳에서 탑승하는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음 합류지를 거쳐 일행을 모두 태운 차량은 새벽길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새 아침을 맞는다.
목적지인 광주의 남한산성 주차장으로 가는 차 속에서 아침의 긴 시간동안 필자는 올해의 등산을 종합 정리해 본다. 그간 전국 산행을 하면서 지었던 짧은 시들을 모아서 만든 `산(山)사랑 시(詩)동산` 초안을 펼쳐들고 올랐던 산들을 회상해본다.
앞선 산행기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연이 닿아 산을 좋아하게 됐고, 이제는 정기적으로 등산을 하지 않으면 정신적인 공황에 빠질 만큼 매료됐으니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씩 산에 오르는 기쁨은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많은 유명한 등산가들이 남긴 말 가운데 프랑스 등산가인 폴베의 글을 자주 인용한다.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있는 오늘날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의 하나가 등산이다”는 말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큰 가르침을 주고 등산에 입문케 하는 교훈을 주게 되니까 말이다.
차안에서 자료를 보면서 지금까지 다녀온 전국의 산들과 그때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면서 온갖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 일행을 태운 차는 광주로 접어들고 어느덧 남한산성 주차장에 도착했다. 거리상으로는 길지만 잠시 잠깐에 온 것 같다.
주차장에 내려 준비운동을 하고 설명을 들으면서 계획된 일정에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주시·성남시·하남시에 속하는 남한산성은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 등 4개의 문이 있고, 그 문들을 연결하는 성벽이 있어 그 길이는 대략 12km 정도다.
남한산성에는 5개 등산로가 있다. 1,2,4코스는 산성종로(로타리)에서 출발하고, 3,4코스는 역사관에서 출발하리 된다. 1코스는 산성종로에서 출발해 북문, 서문을 거쳐 수어장대에 갔다가 영춘정, 남문으로 내려와 원점으로 오는 코스로 2.9km에 시간상으로는 1시간이 소요된다.
오전 10시40분경, 등산을 시작해 남문, 영춘정을 거쳐 수어장대에 올랐다가 서문, 연주봉, 북문과 벌봉을 보고 동문을 거쳐 남한산성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총 길이가 14km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다보니 산성의 남문은 현대 도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남문은 네 개의 문 가운데 일상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빈번한 곳이다. 지방도 342번이 나 있고, 버스가 동문과 남문을 지나 성남시로 가게 돼 있어 교통의 요충지다.
남한산성 등산은 대부분 남문부터 시작된다. 남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문루 위가 팔작지붕이다. 눈밭에 말없이 서 있는 비석군을 보고 영춘정이 위치한 쪽으로 걸어간다. 오르막길도 있고 성곽바깥쪽으로는 수목이 많이 우거져 있는 편안한 길이지만 군데군데 눈이 덮여있다.
성곽을 따라 난 길을 걸어올라 계단 길을 만난다. 언덕위에 자리한 영춘정을 지나니 자연의 좋은 풍경이 나타나는데, 저 멀리에 보이는 곳이 한강과 잠실벌이다.
특이하게 지은 암문이 있는데 암문은 성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한 곳에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작은 성문으로 비밀통로라 할 수 있다. 암문을 빠져 나와 계단에 올라서니 옛 건물이 딱 버티고 섰는데 수어장대다. 수어장대에서 단체사진을 찍고서는 주변을 둘러본다.
수어장대는 수어청의 장관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2층짜리 이 목조건물은 산성 축조 당시 지은 네 개의 수어장대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바깥 정면의 현판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써져 있지만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수어장대와 주위를 둘러보면서 슬픈 역사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국력이 약한 나라 임금이 당하는 수모나 수많은 백성들이 겪는 고초는 늘 상존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치욕의 역사를 들어보니 필자의 마음속에 불쑥불쑥 절규들이 솟구쳐 여기에 적어본다.
“남한산성에 올라/ 바라보는 하늘은/ 맑은 날에도 어이해/ 흐리게만 보이는지/ 이곳 수목들은 바람에도/ 왜 흔들리려 하지 않는가를/ 흘러간 시간들만이 알고 있다.// 슬픈 설화를 간직한/ 수어장대, 소나무 숲엔/ 사계절 무심한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러운데/ 풍경을 조망할 뿐/ 아무도 아픔은 말하지 않는다./ 다시 눈 비비고 하늘을 본다”(시 `남한산성에 오르면` 전문)
`무망`이란 글을 보면서 필자는 그 쓰라린 역사를 후세들이 소홀히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데 공감한다. 공감한다기보다는 소리 높여 부르고 싶은 절규를 한편의 시로 담아낸 것이다.
서문에 닿았다. 인조는 이 문을 걸어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으니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한 많은 문이다. 서문을 빠져나와 암문을 통과해 연주봉 옹성에 오른다. 능선을 따라 옹성이 설치돼 있는데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여기가 그 중 한 곳이다.
북문으로 가는 길에는 소나무 숲이 이어져 있다.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북장대터를 지나 북문에 도착했는데, 다른 문들과 거의 비슷해 잠시 보고서 벌봉을 거쳐 동문 쪽으로 내려오니 도중에 장경사란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
장경사는 인조 때 지어진 절이다. 그 당시 남한산성엔 모두 9개의 절이 지어졌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절은 장경사와 망월사뿐이다. 잠시 경내를 잠시 둘러보고 동문으로 걸음을 향했다.
동문은 산성에서 제일 낮은 곳에 있으며 남문과 형태가 비슷하다. 동문을 거쳐 남한산성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오후 4시가 됐다. 해발 498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산허리에 병풍을 친 것처럼 산 능선을 따라 장장 30리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고서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벌봉까지 다녀오는 것으로 올해의 등산계획 중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 했다.
남한산성은 최근에 역사 답사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더욱 관심을 끌게 한 계기는 작가 김훈의 `남한산성`이란 장편소설이 한 몫을 했다. 그 소설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왕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담겨져 있고 치욕스런 역사의 단면이 그려져 있다.
그렇듯 남한산성은 그 자체가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역사의 현장이다. 굴욕의 세월이 점철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산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던져주는 곳이다.
2013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올 한해 전국 산들을 순회하고 순조롭게 산행을 마친데 대해 모든 산행인들과 동행한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자연에게서 얻는 많은 교훈을 여럿이서 공유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필자에게도 큰 은혜다. 갑오년 한해도 산을 통해 건강한 만남을 하기로 등산인들과 경북매일 독자 여러분께 약속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