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한 노송, 가을 담긴 호수… 하늘도 감춰둔 비경
10월 이때쯤이면 누구든지 단풍이 곱게 물드는 산을 찾게 마련이다. 정기적으로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도 가을산을 많이 가봤을 테지만 멀지 않아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아무래도 등산이 불편하기에 가을등산을 자주 간다.
여름 무더위 속의 등산은 얕은 산이나 계곡 또는 바다와 붙어있는 곳을 즐겨 찾게 마련이지만 등산하기 좋은 시기라 해도, 높은 산이나 장거리 시간을 요하는 먼 길을 다녀오고서는 때로는 가벼운 등산이나 트레킹코스를 생각해본다.
지난번 연속하여 서울 북한산과 강원도 춘천의 오봉산을 다녀오는 등 장거리 등산을 했고, 다음번에는 강원도 설악산을 계획하고 있어 이번에는 비교적 가까운 코스를 택했다.
충북 괴산에 있는 얕은 산과 호수를 끼고 잘 만들어진 트레킹코스, 산막이옛길로 가을여행을 다녀왔다.
450m 두개 산봉우리 거쳐 괴산댐 호수길 따라 걷는 코스한반도 전망대 올라 산 아래 내려다 보면 호수·마을풍경 한눈에
산행을 하면서 여행이라 하니 어색할 것 같지만 산행도 일종의 멋진 여행인 것이다. 산을 타고 오르면서 자연을 이해하고 삶의 지치거나 혼돈된 자세를 다시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등산은 사람들에게 영혼과 육체의 건강을 가져다주는 자연의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산행은 450m 남짓한 두 개의 산봉우리를 거쳐 괴산댐 호수가에 잘 조성된 길을 따라 아름다운 가을풍경을 느끼는 여유 있는 코스다. 아침에 떠나온 버스는 2시간 채 못되어 괴산댐 호수가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간단히 준비하고서 10시경 본격적인 등산 행로에 올랐다.
참고로 괴산은 등산하기 좋은 산들이 35개소나 있는데 그 중에서 1천m를 넘는 산은 연풍면의 백화산(1천63m)와 조령산(1천25m)이며, 나머지 산들은 해발 500m에서 900m에 이르는 산들이다. 이번에 오르는 등잔봉과 천장봉은 400m 높이의 산이라서 명산 등산코스에는 없지만 산막이옛길과 연계하여 등산하기에는 안성맞춤 코스다.
이번에 오르는 산 등산로 가운데 일부가 산막이 옛길과 일부 겹치는데, 요즘 등산하는 사람들에게나 관광객들에게 괴산 산막이옛길 트레킹 코스는 소문이 나 있다. 등산 초보들도 인근에 있는 400m대의 산봉에 올랐다가 내려와서는 옛길을 걷는 코스가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산막이 옛길은 2009년 괴산군이 13억원을 들어 괴산댐 호수 수변을 따라 칠성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됐던 4km 길을 옛 흔적을 그대로 살려 복원한 산책길이다. 지금은 입소문이 퍼져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사시사철이 좋지만 특히 10월말의 이곳이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주변의 괴산댐은 지난 1957년 초 순수한 우리 기술로 최초로 준공한 댐이기에 괴산군민들은 상징적인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 지금은 산막이옛길은 괴산댐 호수와 어우러지며 한국의 자연미를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산막이 옛길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 반하게 된다.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소나무동산과 정사목, 노루샘까지는 옛길코스와 같다. 초입 길부터가 산과 호수, 그리고 소나무숲길이 어우러진 길인데 소나무동산이란 말처럼 이 길가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숲길가에는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 등산을 시작하는 마음부터 편안해져 온다.
들어서는 길 초입에는 출렁다리가 만들어져 등산인이나 관광객들이 그 출렁다리에 올라 소나무밭 상공을 걷기마련인데, 높이 4m로 길이가 60m정도 이어지니 붕 뜨는 기분이 들고 출렁거리는 반동 때문에 아찔한 생각도 들지만 기분이 좋다.
산짐승들이 내려와 물을 마셨다는 노루샘을 지나 등잔봉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어느 산과는 달리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하고 그 높이가 해발 400m대라 힘이 들지 않는다. 일행들은 노루샘에서 900m 거리에 있는 등잔봉 정봉을 힘들지 않게 오른다.
등잔봉에 오른 길 가운데 힘들고 위험한 등산로도 있지만 편안하고 완만한 길도 있으니 그 길로 올라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어느 산보다 쉽게 산 정봉(450m)에 올랐다. 등잔봉이란 명칭에서 직감적으로 등잔불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맞았다.
등잔봉은 옛날 한양으로 과거 보러간 아들의 장원 급제를 위해 등잔불을 켜놓고 100일 기도를 올렸다고 하여 등잔봉이라 불리어진다. 지금도 효험이 있어 자식들을 위해 정성을 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봉우리라고 하니 온 김에 필자도 딸아이의 정진을 빌어보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호수나 마을 모습들이 가을 풍경처럼 넉넉해 보인다. 등잔봉에서 내려다보니 호수를 사이에 두고 서편은 산막이 마을이고, 동편은 갈론 마을이다.
이 두마을은 옛길 트레킹 코스가 명소로 자리잡기 전까지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인데 지금은 형편없는 촌의 분위기를 떨쳤다. 일행들은 잠시 쉬면서 사진도 찍고 10월의 나들이를 즐기다가 다시 행장을 메고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하산을 하다가 조금 더 올라가면서 걷다보니 한반도 전망대가 나온다. 여기서는 우리가 가끔씩 사진이나 TV에서 보아왔던 우리나라 국토지형을 닮은 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물굽이 흘러가는 저편으로 산세가 이어지면서 흡사 한반도 모양과 비슷하다.
조금 오른쪽에서 봤다면 한반도 모양이 더 잘 나왔을 것인데 생각하면서 완만한 산길을 걸어서 천잔봉으로 향한다. 산길이라 평길을 걷는 것보다는 힘이 들 테지만 그런대로 등산로가 정비되어 있다. 300m 정도 산을 타고 오르니 천장봉 정상이다.
천장봉(天藏峰)은 “하늘 아래 펼쳐진 자연경관이 울창한 노송과 더불어 장관을 이뤄 그 풍광의 수려함에 하늘도 감탄하여 숨겨놓은 봉우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그만큼 이곳에서 바라보는 괴산호수나 산야들의 모습들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일찍이 하늘도 감춰놓은 비경의 산 정상 위에서 일행들은 자리를 깔고 점심식사를 하고서는 휴식을 취하면서 산 아래의 풍경 이쪽저쪽을 둘러본다. 가을 날씨 속의 아름다운 풍광이 가히 천장봉이라 부를만하다.
하산을 시작하여 부지런히 걷는다. 한참 내려오다가 삼거리 길을 만나는데 계속 직진을 하면 삼성봉으로 가는 길이고, 좌회전을 하면 진달래 동산이 있는 진달래능선을 거쳐 바로 산막이 마을로 내려가는 길인데 심한 내리막길이다.
산 아래 있는 산막이 마을은 이름 그대로 산에 막혔다는 오지마을이다. 그 마을 윗쪽엔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노수신(1515~1590)이 을사사화때 이곳으로 유배와서 살은 수월정이 있다. 노수신은 명종2년에 진도로 귀양가 19년 살다가 이곳 산막이 마을로 옮겨온 지 2년 만에 선조가 즉위하면서 복원됐고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이다.
산막이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노수신의 10대손인 조선후기 선비 노성도(1819~1893) 덕분이다. 그는 조상의 자취를 따라 산막이 마을을 찾았다가 마을을 둘러싼 달천의 비경에 반해 `연하구곡`이라 이름지었다. 괴산댐이 생기면서 연하구곡은 모두 물에 잠겼지만 노수신이 유배생활하던 적소 주변은 빼어난 절경으로 오늘날 관광명소로 변했다.
일행들은 산막이마을길을 택해 내려와 잘 정리된 옛길을 따라 걷는다. 이 길은 이제 괴산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명소로 자리 잡았고,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고 번져 지난해만해도 130만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 옛길 트레킹 코스가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트레킹코스로 불리고 있는데, 혹자는 이 길 대신에 부산 이기대 길을 꼽기도 한다.
옛길로 접어들어 나무로 된 테크에서 풍경을 구경하고는 올레길을 계속 내려서면서 일행들은 주변의 풍경들을 조망하면서 잠시 쉰다. 이제 편한 길 몇 군데만 거치면 아침에 출발했던 주차장이 나온다.
산막이 마을에서 주차장까지는 24개의 명소가 있다. 앉은뱅이가 샘물을 먹고 말끔히 나았다는 앉은뱅이약수가 있고, 참나무가 마치 옷벗은 미녀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붙인 `옷벗은 미녀참나무`가 있으며, 1960년대까지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호랑이굴이 산책로 옆에 재현되어 있다.
호수전망대에서 그림같은 호수를 보면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사진을 찍거나 여행의 여유를 즐긴다. 필자도 호숫가를 배경으로 산길 옆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가을의 대표적인 꽃 코스모스를 보면서 감회에 젖는다.
이번 등산은 400m 남짓되는 비교적 낮은 산봉우리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지만, 등잔봉에 오르는 두 개의 길, `힘들고 위험한 길`과 `편안하고 완만한 길`은 마치 인생 길처럼 생각된다. 누구든 힘든 여정보다는 편안한 길을 선택할 것이지만 힘든 길을 완주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은 그만큼 클 것이다.
청정자연 속의 `신 산책로 1번지`로 이름난 이번 괴산 산막이옛길 등산이 필자에게 마치 가을동화처럼 잔잔히 파고드는 것은 가을이라는 아름다운 계절에 행차했다는 것이고, 옛길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정말 마음에 쏙 들었다는 흡족함에서 이리라.
글·사진= 손경찬/수필가·예술소비운동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