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 치는 용소… 태초의 신비 간직한 `계곡 트레킹 1번지`
처서가 지나서 더위가 한풀 꺾였지만 아직은 늦더위가 유세를 부린다. 그렇다 해도 여름 막바지에 주말마다 하는 등산이니 포기할 수는 없다. 이번 등산은 늦더위 여름 산행에 맞추기 위해 울진 근남면에 있는 왕피천 계곡을 따라 걷는 계곡 트레킹이다.
왕피천 트레킹 코스를 보면, 첫째 방향은 계곡 하류에서 계속 계곡을 따라 4km지점인 용소까지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둘째는 용소 쪽에서 내려오는 방법으로 쉬운 편이다.
둘째코스로 진행하려면 굴구지마을로 가서 상천동- 용발자국- 용소- 부원농장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부터 왕피천 계곡을 따라 원점까지 되돌아오는 것인데, 이번 등산은 그 코스를 택했다.
하천 총 길이 60여Km, 깊은 골짜기·수려한 경관 자랑바윗돌·솟아난 금강송 조화… 자연이 만든 작품 감탄
알다시피 울진은 산과 바다와 계곡이 있는 동해안 산촌지역이다. 온천으로 이름나 있는 백암온천과 덕구온천이 워낙 유명해 전국에서도 웬만하면 다 알고 있다. 또한 왕피천의 계곡도 풍광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전국 1~2위를 다툴 정도니 꽤나 유명함을 익히 들은 바인데, 이제야 계곡을 트레킹하며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산행의 시작은 굴구지 마을이다. 그러나 그 마을까지는 관광버스가 들어가지 않는 관계로 타고온 버스는 길가에 세워두고 시골 도로에 맞게끔 개조한 트럭을 타고 10분쯤 가야한다.
물론 보행으로 갈 수 있지만 등산 들머리까지 1시간 이상을 구불구불한 시골도로를 걸어가는 게 시간상으로 낭비인 것 같아 주최 측에서 트럭을 이용한다고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왕피천 계곡을 정해진 시간 내에 완주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트럭 뒷칸에 타니 등산 전부터 제법 재밌는 광경이다. 일행들은 나누어서 트럭을 타고 고갯길을 몇 번 오르고 내리면서 10분 정도를 가니 굴구지 마을이 나타난다.
구고동으로도 불리는 굴구지는 산촌이다. 왕피천 하류의 성류굴에서 아홉 구비 산자락을 돌아가야 굴구지 마을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전형적인 두메산골이나 근래에 왕피천 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마을에는 펜션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산촌 속에서 이국의 멋스런 펜션을 보는 것 같다.
일행은 굴구지 마을회관 앞에서 오른쪽 길을 택해 상천으로 걷는다. 생태탐방로를 따라서 용소로 가는 길이다. 마을 뒷산에서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한 일행은 상천동을 향해 걷는다. 초입길은 여느 산길과 같은 등산로 오솔길로 이어져 있다. 용발자국이 있다는 지점을 대강 둘러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등산로 초입 길에서 부일농장까지 오면서 생태탐방로를 조금 걷다보면 계곡이 숲 나무 사이에서 군데군데 자연의 속살처럼 신비롭게 나타난다. 드디어 부일농장 앞까지 도착했다. 오지 산촌으로 산농사 밖에 경작할 수 없는 이곳이 왕피천 계곡이 유명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고, 여름철에는 계곡트레킹을 하러오는 등산객 덕분에 부대적인 농외소득이 짭짤한 편이다.
`부원농원`이란 사자성어를 읽어보니 재미가 있다. `부`귀영화를 쫒지 않고 `원`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농`사를 근본으로 살다보면 `장`차 부귀영화는 따라 오게 되어 있다. 맞는 말이다. 순리를 따르라는 지엄한 명이 아닌가.
드디어 왕피천 계곡 속의 물가에 도착했다. 일행은 그사이에 8월 중순, 염천의 태양을 안고 도로를 걸어오느라 온 몸이 땀으로 배어있다. 물가에 도착하자마자 물속으로 풍덩 뛰어든다. 흠뻑 땀 흘린 뒤에 전신으로 맛보는 입수의 맛, 산행을 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아마 이 맛에 고난의 행군 같은 등산을 계속하는 것이리라.
왕피천은 태백산 수비분지에서 발원해 울진의 동해바다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이 하천은 총 길이가 60.95km가 되는 산간계곡을 굽이굽이 도는 150리 길이다. 그런 만큼 골짜기도 깊고, 태초의 모습을 닮아 있어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왕피천(王避川)의 지명을 직역하면 왕이 피난한 하천이란 뜻이다.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까지 들어와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에서 따온 지명인데, 지금도 울진군 서면에는 왕피리라는 마을이 있다.
시원한 물맛을 몸체로 느끼며 물가로 나와서는 주변을 살펴본다. 잠시 쉬면서 물가 가득한 바윗돌과 수직절벽위에 솟아나 있는 금강송들의 조화를 보면서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감상한다. 이제 본격적인 왕피천 계곡트레킹이다. 산기슭으로는 길도 없고, 잡목과 잡풀이 무성히 우거져 걷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어렵기는 하지만 계곡을 내려서서 걷는 게 편하다. 물론 길이 없다. 낮은 물에는 들어가서 걷고 조금 깊은 곳에서는 바위를 이용해 조심조심 걷는다. 산굽이와 계곡 모퉁이 사이를 빠져 나오면서 하천의 속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맑은 물을 보면서 때로는 수면위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는 순간도 좋은 기억이다.
일렬로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서 몇 차례 반복하다보니 용소에 도착했다. 이곳 용소는 굴구지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 가운데 좁은 협곡 사이에 움푹 패인 못이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의해 용소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있는데, 전국 어느 지역의 계곡을 가든 깊은 곳은 `용소`라 부르고 있다. 계곡 깊은 곳에 용이 살았다는 것이 아닌가.
이곳 용소는 왕피천의 으뜸 절경이라고 한다. 한 눈에 신비한 힘에 이끌리는데, 용소 주변의 바위가 대단히 희다. 왕피천 가운데 이곳의 물 깊이가 가장 깊은데, 5m쯤 된다고 한다. 깊은 곳의 물빛이 검은색을 띄우는 게 전설 속의 용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날 정도다.
용소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얕은 곳에서 물맛을 실컷 보고서 일행들은 다시 하류를 향해 물가 여행을 계속한다. 한 여름의 시원함을 맛보며 여유를 향해 떠나는 사색여행이라 해도 좋을만하다. 계곡을 타고 내려오면서 물이 깊은 곳에서는 밧줄을 타고 건너고, 얕은 곳에서는 물기 묻은 신발로 미끄러질까 조심하는 모습이 꽤나 신중하다. 등산길에서 오르고 내리기를 잘하는 자도 여기서는 초보와 같으니 또 다른 맛이다.
걷다가 때로 덥다 싶으면 물속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또 나와서 따가운 여름 햇살을 이고서 걷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여기서 들리는 것은 자연의 소리뿐이다. 물 흐르는 소리에 간간히 지나가는 바람소리, 게다가 보이는 것은 하늘과 산, 그리고 물이니 정말 천지가 자연 그대로다.
작은 물길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물길을 따라 왕피천 하류로 내려오는 재미는 일반 산행에서 느끼는 점보다 더 재밌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발목을 적시며 걷고, 물이 많이 고여 있는 곳에서는 자멱질을 하는 왕피천 트레킹 코스가 옛 추억과 더불어 여름철의 산행 또는 계곡 따라 걷기 트레킹에서 만점이다.
온갖 모양의 돌을 보면서, 계곡을 따라 전개되는 숲의 아름다움이나 절벽과 소나무 등 비경을 가슴에 안으며 여유의 시간을 만들고, 사색의 순간을 맞는다. 그러던 중 갑자기 고래가 나타났다. 고향 앞바다에 무리지어 지나는 밍크 고래가 아니라 숫제 돌고래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인 사시사철 변함이 없는 바위 고래다.
150리길을 흘러 도는 왕피천 계곡의 물길이 끝나는 곳은 망향 해수욕장이 있는 동해바다지만 우리 일행들의 오늘의 여정은 시작한 원점에서 끝을 맺는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0분이다. 본격적인 트레킹의 발걸음을 내 디딘지 6시간이 된다.
왜 많은 사람들이 한 여름의 왕피천 계곡 트레킹이 최고의 코스라 하는지 알겠다. 가장 덥다는 8월 중순, 염천의 시간에 왕피천 계곡 트레킹을 떠난 우리 일행들은 멋진 경험을 했다. 산길을 걸으며 원시림 같은 금강송의 모습을 보았고, 계곡의 맑은 물과 햇살 속에서 반짝이는 바윗돌, 곳곳에서 태초의 신비감으로 우러나는 자연의 속살들을 마음에 담은 멋진 여행이었다.
글·사진= 손경찬/수필가·예술소비운동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