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서걱이는 갈대… 늦가을 정취를 느끼다
벌써 11월 하순이니 계절도 깊이 익었다. 시간의 흐름을 `익었다`고 표현해 놓고 보니 어딘가 이상한데, 익었다는 것은 `깊어간다`는 의미로 그만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늦가을 등산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다. 이제 가을 등산이 끝나가고 눈이라도 올 양이면 겨울등산 시즌에 접어들 것이다.
전문 등산가에게는 동절기 등산이 신이 나겠지만, 취미 클럽 수준의 등산 애호가들은 그래서 깊어가는 계절이 서운할지도 모른다.
매달 네 번째 일요일 등산은 테마 등산이다. 대구지역 문인들 중에서 산을 좋아하는 지인들의 모임인 대문트레킹(카페 : cafe.daum.net/dmschi/)에서 갖는 51번째 행사는 색다른 트레킹이다.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함백산, 정암사 등을 둘러보는 코스인데, 버스를 이용하여 봉화 춘양으로 가서 그곳에서 강원도 태백시 철암까지는 백두대간 무궁화열차를 이용한다.
태백 구문소-용연동굴-정암사-만항재-봉화 현불사 코스중함백 오르면 백두대간 한눈에… 억새풀·일출장면 유명
아침 6시 출발한 관광버스는 55번 고속도로를 달린 후 봉화로 빠져나와 9시 조금 지나서 춘양역에 도착했다. 일행은 9시22분발 철암행 기차를 갈아타야하는데 시간이 남아 농촌의 조그만 역을 구경했다. 작은 역이지만 아름답게 꾸며져 정감이 가는 시골역이다.
이 철로 구간은 1963년부터 영암선에서 영동선(영주-강릉)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철로구간 가운데 봉화군 관내의 기차역은 모두 13개이다. 그 가운데 춘양역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말이 있어 잠시 소개해본다. `억지 춘양`에 관한 내용이다.
사람들은 흔히 `억지춘향`이란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억지춘양`의 잘못된 내용이다. 자유당 시절 영암선 철도를 가설할 당시에는 춘양은 빠져 있었고, 춘양 직전역인 법전역에서 녹동역으로 직선으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 당시 봉화지역 국회의원이 춘양 출신으로서 자유당의 원내총무(현재로 치면 원내대표)를 맡고 있던지라 권력이 막강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소나무(춘양목)를 반출하는데 기차가 필요하다고 하여 춘양이 있는 지역까지 철로를 변경하여 마치 오메가(Ω)처럼 위로 볼록하게 돌아져나가게 했다. 그런 사실에서 연유되어 억지로 춘양역을 만들었다 하여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으로 필자는 들은바 있다.
경북 영주와 강원도 철암 사이를 잇는 영암선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최초로 놓은 철도이다.
1949년에 착공하여 6·25전쟁기간 중 공사중단기를 거쳐 1955년도에 개통된 영암선은 착공당시에는 해방이후 최대의 국책공사였던 것이다.
시간이 되어 백두대간 무궁화 열차가 들어왔고 일행은 신속히 기차에 올라 1호차에 마련된 좌석에 앉았는데, 한 칸을 전세낸 것과 다름없다. 이내 기차가 출발했고 깊은 계곡을 굽이굽이 돌면서 승부역을과 석포역을 지나 강원도를 땅에 진입하여 동점을 지나 철암역에서 내렸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특이한 것은 30개 정도의 터널을 통과한 것인데, 그 거리가 무려 8km다. 이 거리는 구간 길이 88km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데 깊은 산 중의 굴속과 계곡과 산 중턱을 따라 1시간가량 객실 안에서 즐기다보니 기차로 수학여행 가는 색다른 맛을 가져다준다.
철암역에서 내린 일행들은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첫 코스인 구문소로 향한다. 이번 트레킹은 본격적인 등산이라기보다 늦가을 자연 풍경을 마음에 스케치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일정은 태백의 구문소 탐방 자연사박물관- 용연동굴 탐사- 정암사- 함백산 만항재- 봉화 현불사를 거쳐 귀가하도록 계획되어 있다.
필자는 계획을 일부 바꾸어 태백의 박물관과 동굴을 관람하는 대신에 함백산과 중함백산을 등산을 마치고 난 뒤에 함백산 자락 끝에 있는 정암사에서 일행들과 합류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태백에서 일행과 떨어져 나와 필자는 차를 갈아타고 함백산 밑 기슭에서 도착하여 잠시 몸을 풀고서 단독 등산을 시작했다. 들머리 주변 등산길에서 서걱이는 갈대를 보면서 함백산 정상으로 부지런히 걷는다.
한참 걷다보니 함백산으로 올라가는 평탄한 시멘트 포장길인 지방도로가 나타났는데 출입구가 봉쇄되어있다. 그 길로 곧장 올라가면 평탄한 길로 정상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 출입통제가 되었으니 가파른 등산로를 이용해야 한다.
이곳은 자전거타기 산악회원들이 즐겨 찾는 곳인데, 등산로가 통제되다보니 지금은 자전거동호회나 일반 등산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호젓한 늦가을 등산길을 홀로 걷는다.
1시간 10분동안 산등성이를 치고 올라가니 함백산 정상이 나타났다. 정상표지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서 주변 경관을 살펴본다. 단풍은 멀리로 물러갔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산세들이다. 지대가 높아 그런지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의 맛은 이미 겨울을 예고하고 있는 기분이다.
함백산은 그 높이가 1,573m으로 강원 동부지역에서는 최고봉이다. 우리나라 산 가운데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0m), 덕유산(1614m), 계방산(1,577m에 이어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인근에 있는 태백산(1567m)보다 함백산이 6m 가량 더 높다. 함백산이 유명한 것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인데, 억새풀 등과 함께 일출장면이 유명하다.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떠오르는 일출 장면은 바다에서 맛보는 일출장면에 비교될 수 있으리라.
정상에서 잠시 쉬다가 중함백 쪽으로 산행을 계속한다. 야트막한 능선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늦가을의 호젓한 산길을 걷는 마음이 편안하기까지 하다. 멀리 보이는 백두대간들의 늠연한 산세들을 눈여겨보면서 우리나라의 어느 산을 타더라도 명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함백산에 다다랐다. 중함백도 함백산에 속한 산이다. 삼국유사 척주본에서 “금대봉 남쪽에 상함백산(지금은 은대봉), 중함백산(본적산), 하함백산(지금의 함백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바, 함백산은 이 세 개의 산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방이 확 트여 백두대간의 산들을 잘 볼 수 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백두대간의 모습이 산줄기 줄기마다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전망대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산으로 막혀져 있지만 가까이에 지나온 함백산과 멀리로 매봉산 풍력단지가 보이고 경관도 좋다.
여기저기에 펼쳐지는 멋진 장면들을 사진 찍으면서 주변 경치에 감탄도 하면서 잠시 휴식을 갖는다. 백두대간에 서서 힘찬 정기를 대하고 있으니 심신이 상쾌해진다.
복잡한 일상을 벗어나서 산을 오르는 등산의 맛은 각자 느끼기 나름이다. 여럿이하는 등산은 함께한다는 동행에서 마음에 들지만 어쩌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걷는 산길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오는 하산 길은 가을 나들이 길 같아 행복하다. 삼거리 안부를 지나 왼쪽 편의 양지촌 쪽으로 빠져 나와서는 함백산의 단독 산행을 마치고서 정암사로 내려와서 대문 트레킹 일행들과 반가운 해후를 했다. 시계는 벌써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강원도 정선군에 자리잡고 있는 정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때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진신사리를 받아 귀국하여 건립한 절이다. 이 절이 유명한 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은 정암사를 비롯하여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 등이다. 필자는 경내를 둘러보고서는 절이 주는 느낌은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사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찰 뒤편 높은 산비탈에 자리한 수마노탑에 오른다. 이 탑은 자장율사가 귀국시에 가져온 마노석을 쌓아 만든 높이 7m의 칠층 모전 석탑이다. 용왕의 도움으로 이곳까지 마노석을 옮겼다 하여 수(水)자를 붙여 수마노탑이라 불리어지는데 현재 보물 제4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마노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데, 대웅전을 대신해 불상이 없는 적멸보궁이 있다. 한번 찾은 불교 신도나 관광객들이 이 절의 정갈함으로 인해 매년 새해나 입시철에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늦가을 단풍이 진 산 중턱의 도로변에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정암사에서 자연의 풍경과 함께 인생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다음 코스로 가기 위해 4시 50분경 버스에 탑승했다. 인근에 우리나라에서 포장된 도로 중 가장 높은 해발 1330m의 만항재가 있지만 다른 도로를 이용해 봉화 쪽으로 향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귀가하면서 늦가을의 의미있는 여행을 새겨본다. 이번 산행은 거리가 멀고, 또 가벼운 등산의 트레킹이라 산은 함백산 한 곳에 집중됐다. 그렇지만 오고가면서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방의 산들과 계곡들을 바라보면서 느낀 점들은 많다.
마치 도화지 속의 스케치처럼 그려지는 여행코스를 한 바퀴 도는 듯 느껴진다. 기차 이동로 속에서 차창을 통해 바깥 풍경은 여러 차례 구비치면서 끝에 보이는 객차는 여정을 더한층 북돋우는데, 시골지역을 지나니 만큼 촌사람들의 말소리에서도 정감이 묻어난다.
여럿이 함께하면서 저마다 색다른 감흥을 얻지만 자연 속의 동행으로 인한 기쁨을 공유하는 등산은 정말 즐겁다. 함백산을 등산한 사람들은 산세가 밋밋하여 묘미가 별로 없다고 평들도 하지만, 산을 내려와서 차를 타고 지나는 만항재의 드라이브 코스가 환상적이라고 한다.
이번 대문트레킹에서 함백산 일대를 둘러본 자연 탐방은 가을이 지나가는 계절 속에서 자연의 운치를 보며 진솔한 삶의 모습을 다시금 그려보게 한 정감 넘치는 행사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