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정치인의 토론에서 무엇을 배울까

유영희 작가 지난 24일 1069회차 ‘100분 토론’ 주제는 “‘영부인 리스크’… 그 끝은?”이었다. 이번 방송에는 강승규,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 두 명과 박균택 더불어민주당 의원,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이 패널로 나왔다. 토론은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의 진실, 명태균 수사 필요성, 김건희 여사 주가 조작 기소, 특검법 통과, 마지막이 영부인 리스크 대처 방안이다. 사실 토론 방송을 보려면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패널들의 비신사적인 토론 태도를 보면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번 토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각자의 입장을 밝히는 시간이라 그런지 차분하게 발언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난투 상황이 벌어졌다. 김건희 여사와 명태균 씨의 텔레그램 소통이 공천 개입의 증거냐 아니냐 하는 대목에서 갑론을박이라고 할 수 없는 어지러운 입씨름이 벌어진 것이다.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기소 문제에서는 토론의 질이 더욱 떨어졌다. 특히 강승규 의원은 사실관계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발언은 물론, 상식에 맞지 않는 논리도 폈다. 예를 들면,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사건 관련은 결혼 전이었다고 한다든지, 주가 조작 사건에서 이익을 보았다고 해서 주가 조작을 직접 했다는 증거는 안 된다고 하는 식이다. 게다가 지난 추석에 직무 관련이 없으면 김건희 여사에게 300만 원까지 선물해도 된다고 국민권익위원회가 답변한 것을 두고 신장식 의원이 비판할 때 강승규 의원이 갑자기 중간에 끼어들어 엉뚱하게 공작이라고 소리 지르며 흐름을 깬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결국 사회자한테 발언권을 박탈하겠다는 경고를 받고서야 말을 줄였다. 이제 토론 막바지에 이르러 ‘영부인 리스크, 어떻게 대처할까?’에서 강승규, 홍석준 두 의원은 영부인 리스크 자체가 없다만 반복하고, 박태균 의원은 사죄하고 민생에 집중하라, 신장식 의원은 사람 가려서 등용하라고 한다. 국민의힘 두 의원의 불통도 답답하지만, 두 야당 의원은 왜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대안을 제시하는지 당황스러웠다. 대학생 토론을 지도하기도 했고, 청소년부터 대학생까지 토론대회 심사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토론의 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아는 편이다. 그런 경력이 없더라도 토론할 때는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해야 하고, 중간에 말을 끊거나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토론 주제가 잘못 정해졌기 때문이다. 토론은 본래 찬반으로 나눠질 수 있는 형식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그 끝은?’이라는 말은 의미도 분명하지 않고 부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무엇보다 찬반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처음부터 ‘영부인 리스크, 어떻게 대처할까?’로 했다면, 국민의힘 두 의원이 끝까지 리스크는 없다를 외치지 못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영부인의 행보는 리스크인가’로 하는 것도 좋다. 이렇게 해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성숙한 정치 토론을 보고 싶다.

2024-09-29

혁신 현장을 가다, 폴란드 PWPC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PWPC 법인은 고급 철강재 가공센터로 2007년에 동유럽 심장부인 폴란드 브로츠와프 인근에 준공해 LG전자,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에 LCD 모듈을 핵심으로 공급하고 있다. 필자는 이 법인을 2010년에 매달 1주일씩 혁신 활동을 전파했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300Km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폴란드 제4의 도시인 브로츠와프는 유럽 특유의 오래된 아름다운 건축물과 막달라마리아 대성당 등 역사와 전통이 있는 도시이다. 또한, 한국 가전 기업이 들어와 대규모 산업 클러스터(Cluster)를 만들어 가동하고 있다. 이 법인에 유럽의 혁신 벤치마킹 명소인 ‘혁신메카’를 만들고자 힘을 쏟았고, 우선 혁신을 이끌 개선리더를 선발하였다. 초기부터 입사해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 직원을 중심으로 8명의 1기 개선리더를 선발했고, 변화관리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추진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낯선 혁신구호 연습을 시키자니 직원의 거부감이 대단했다. 일단 제스처가 우스꽝스러운 것도 부담스러운데 구호를 외칠 때 손을 들어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에서 히틀러 시절 전쟁의 아픔이 연상된다는 것이었다. 강의가 한참 무르익은 오후 4시에 모두 일어나 퇴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퇴근 시간이 4시인 걸 모른 것은 강사의 잘못이지만, 말도 없이 일어나 집으로 가는 광경에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또한, 다음 날 소통을 위해서 저녁 회식을 잡았는데 모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구했고, 그중 반은 허락이 안 되어 회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순간 “잘 안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함이 앞섰고, 이는 몇 달간 현실로 다가왔다. 결국에는 그곳에 직원들의 존경을 받는 송 공장장의 도움으로 명소 만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곳 공장장에게는 가르치고, 지시하는 컨설턴트와는 다르게 직원 한 명을 케어하고, 소통하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혁신 컨설턴트 고생하는 거 안보입니까. 그까짓 거 한번 제대로 해 봅시다. 리더가 솔선수범하지 않는데 뭐가 되겠습니까. 나부터 할 테니 따라와 주세요”라고 열정적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필자는 느끼는 게 많았다. 한국인 공장장이 유럽 직원과 일과 혁신을 잘하는 것에 대해 정리해 본 바 첫째 그 역사와 문화를 존중해 주었다. 그 나라의 문화를 미리 학습하고 이해한 다음, 그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 남달랐다. 둘째 상호 협력하며 직원들과 신뢰가 두터웠다. “협력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신뢰는 시간과 일관된 행동을 통해서만 자라난다”라는스티븐 고비의 말처럼 신뢰를 쌓아온 시간이 길었고, 신뢰는 상호 협력의 바탕이 됐다는 걸 알았다. 셋째 시작과 끝을 명확히 하였다. 일을 시작할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목표가 선명했고, 완료 후에는 성과공유회를 통해 팀원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했다. 강압적인 지시보다는 그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함께 협력하는 리더십으로 성공 모델을 만든 송 공장장과 같은 인재가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길 기대해 본다.

2024-09-29

가을의 서가(書架)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늦도록 기승을 부리던 더위는 세찬 비바람에 쫓겨 가고 이제는 쾌청하고 삽상한 가을 날씨다. 창을 열고 멀리 내다보다가 문득 등화가친이란 말이 떠올라 서가에 꽂힌 책들을 훑어본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의 중앙 하단에는 동아출판사에서 발행한 세계대백과사전이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 휴대전화기로 거의 모든 지식과 정보의 검색이 가능한 지금은 별로 쓸모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세상의 온갖 지식을 망라한 엄청난 보고(寶庫)였다. 그 밖에도 월부로 산 전집으로는 세계고전문학, 세계현대문학, 한국현대문학, 한국고전문학, 세계사상전집, 한국사상전집, 세계역사, 한국사대계 등이고 문학·종교·과학·예술 관련 단행본들은 수시로 서점에 가서 구입한 것들이다. 내가 산 책들은 버리지를 못한다. 쪼들리는 살림에 그야말로 안 먹고 안 입고 구입한 것들이라 살과 피를 나눈 분신과 같기 때문이다. 아파트로 이사를 할 때 책 짐이 너무 많아 큰 맘 먹고 몇 십 년 쌓인 문예지들은 버리기로 했다. 따로 내놓다가 무심코 그 중 한 권을 펼쳐보는데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오십 년도 넘은 세월에 누렇게 변색이 된 책장의 군데군데 그어진 밑줄을 보노라니 마치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보는 것 같은 감회가 밀려온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은 문예지를 사러 버스를 타고 시내 서점으로 가곤 했다. 물론 간 김에 두어 시간 서점 곳곳을 둘러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책은 선 채로 대충이라도 훑어보았다.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같은 문예지는 거르지 않고 구입을 했지만, 시전문지와 계간지들은 내용과 형편에 따라 선택을 했다. 결국 나는 그 문예지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아파트로 가져와서 베란다에 쌓아 두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내 인생 여정의 길라잡이였다. 몸은 비록 고향을 떠나지 못한 붙박이지만, 동서고금을 두루 누비고 다닐 수 있었던 마음의 행로는 그 책들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고 도달한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빈손을 내 보일 수밖에 없다. 흔히들 책을 많이 읽으면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서 모르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듯이 독서는 할수록 자신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지식과 사상의 체계를 한 번 섭렵해보자는 것이 독서의 목표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무수한 문호·철학자·예술인 중 단 한사람의 연구에 평생을 보내는 학자들도 허다한데 내가 무슨 재주로 그 모두를 섭렵한단 말인가. 주마간산으로 일별하는 것만도 사뭇 벅찬 일이었다. 그나마 독서로 얻은 것이 있다면 섣불리 편견이나 독단에 치우치지 않고, 세상이 기울어졌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균형감각을 갖게 된 것이랄까. 남은 여정도 이 서가의 책들이 길동무가 되어 줄 것이다.

2024-09-26

바다환경 지킴이가 되자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태풍이 열대성 저기압으로 되어 우리나라 남부를 휩쓸고 지나간 후, 바닷가를 걷다 보면 많은 해양 쓰레기들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저께 밤에도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영일대 해수욕장을 걸었는데, 파도가 모래밭 끝까지 갈 듯이 밀려오면서 까만 해조류 뭉치들을 흩어놓고 있었다. 그것들을 피하고 걸으면서 ‘저걸 누가 어떻게 치우지?’하고 걱정했는데 다음 날 보면 해변은 말끔히 치워져 깨끗했다. 밤에는 해양쓰레기를 일일이 살펴볼 수 없지만 주로 해조류(海藻類) 무더기이고, 다음 날은 또 색깔이 다르다. 플라스틱 병과 어구 그물도 섞여 있고 나무토막도 보인다. 해조류들을 뒤적이며 줍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초록색은 파래이고 까만 것은 미역이나 모자반이며 누른 것은 꼬시래기라고 하며, 자기는 주로 청각을 고르고 있는데 살짝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맛있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걷기운동 준비를 하여 바닷가로 나갔다. 얕게 깔린 구름 사이로 9월의 맑은 햇살이 뚫고 나오는데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래밭을 걷고 있었고, 하얀 모래밭에는 검은 무더기들이 길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곳으로 갔더니 고둥과 조개 껍질이 무더기로 깔려있어 쓰레기라기보다는 예쁜 장난감처럼 보여서 몇 개 주웠다. 굴 껍데기가 몇 개씩 붙어있어 인공 작품 같은 것도 보이고 동글동글한 연한 갈색 고둥도 예쁘고 까만 키조개는 내 손바닥보다 크다. 죽어서 바다 밑에 있다가 조류에 쓸려온 것이다. 지나가며 ‘살아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무더기가 큰 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단복을 입고 쇠스랑 갈퀴 등을 가지고 쌓여있는 쓰레기들을 긁어모으고 있었고 트랙터가 다시 그것들을 한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참 고마운 분들이 봉사활동 하시는구나 하고 물어보니 두호동과 중앙동에서 일하러 나왔다고 한다. 아마 해양 환경미화원인 ‘바다 환경 지킴이’인 것 같다. 2팀 20여 명이 열심히 모래밭을 청소하고 있었다. 30여 년 전 대학에 있을 때, 당시 북부 해수욕장을 자주 지나면서 보니 쓰레기가 많이 보였던 터라 매주 한 번 정도 학생들을 동원해서 쓰레기를 줍게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즈음은 플러깅(plugging)이라 해서 운동 삼아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하곤 하는데, 몸을 구부렸다 펴거나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나는 작업이라 일석이조의 효과이니 홍보가 많이 되었으면 한다. ‘반려해변’ 활동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데 기업, 단체, 학교 등이 특정 해변을 맡아서 반려동물처럼 키우고 돌보는 ‘해양 입양’ 프로그램으로 1986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처음 시행하여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약 1만5000km 해변을 가진 우리나라에는 꼭 필요한 일일 것 같고 2년 전부터 80여 개 기관이 60여 개 해변을 맡아 자연보호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해양 쓰레기도 연간 14.5만 톤 이상이고 83%가 플라스틱이며 이로 인한 해양 사고도 매년 5백 건 이상이라 하니 각 지자체에서도 적극 추진해야 일이지만 민간 활동으로 해안을 지키자는 바다 환경 지킴이의 의식도 확대되었으면 한다.

2024-09-26

청소년에게 핫한 전자담배, 강력한 규제 필요

포항시내 한 슈퍼마켓에서 본지 기자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전자담배를 샀더니 가게주인이 신분증 요구없이 담배를 건넸다는 기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우리사회가 10대 청소년이 거리낌없이 담배를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기자가 24시 무인매장에도 들러 자판기에서 전자담배를 구매했더니, 본인 대조 절차 없이 타인 신분증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전자담배 구입이 이처럼 쉬워지니 청소년 흡연인구가 늘 수밖에 없다. 질병관리청 자료를 보면, 청소년(중1∼고3)들의 액상형 전자담배 흡연율이 2020년 1.9%에서 지난해 3.1%로 증가했다. 액상형 전자담배로 흡연을 시작한 청소년의 60%정도는 현재 궐련담배(일반담배)를 피운다는 통계가 있다. 액상형 전자담배는 과일 향을 첨가해 담배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고, 다양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부모들도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 담배사업법상 연초 잎이 들어간 담배는 온·오프라인 판매가 금지되지만, 액상형 전자담배는 ‘공산품’으로 분류돼 어디서든 판매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최근 청소년에게 액상형 전자담배를 판매하는 것을 강력하게 단속하는 추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온·오프라인에서 광고판촉을 해도 아무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에게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이 최근 조선일보 금연정책 콘퍼런스에서 “담배사업법상 담배정의를 모든 종류의 니코틴 포함 제품으로 개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 말에 공감이 간다. 액상형 전자담배 판매를 법적으로 규제하지 않고 현 상태로 두면 청소년 흡연인구는 급증할 수밖에 없다. 일반 담배처럼 액상형 전자담배도 상습 흡연하면 중독위험이 크고, 폐암을 비롯한 다양한 암의 발병 원인이 된다. 지난 6월에는 일주일에 액상 전자담배 4000개를 피워 폐절제술을 받은 영국 10대 소녀가 얼굴이 파랗게 변하고 심장마비 직전까지 갔다는 사연이 보도된 적도 있었다. 액상형 전자담배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이 필요한 때다.

2024-09-26

저출산 문제 해결 앞장서는 기업문화 조성을

윤석열 대통령은 제4차 인구비상대책회의에 참석해 “일·가정 양립에 앞장서는 우수 중소기업에 대해 세제 혜택을 검토하고 국세 세무조사 유예와 같은 방안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정책자금과 입찰사업 우대 등 기업이 체감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마련하겠다”고도 했다. 국가적 과제가 된 저출산 문제 해결에는 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정부가 엄청난 예산을 들여 저출산 대책을 펼쳤으나 실효적 성과를 못낸 이유 중 하나는 기업의 동참이 부족한 탓도 있다.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시대에 가임부부 대부분이 직장에서 일하고 있어 그들에 맞는 정책개발은 필수다. 물론 출산휴가나 남편이 아내의 출산과 육아를 돕는 배우자 출산휴가 등이 실시되나 기업이 앞장서는 출산문화 조성은 아직 미흡한 데가 많다. 특히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서는 출산에 따른 휴가조차도 직장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기업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대통령이 밝힌 세제지원 대책이 기업에게 얼마나 먹혀들지 알 수 없으나 출산기피 현상에 대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 처방하는 노력은 지속돼야 한다. 출산의 문제는 경제, 사회, 복지 등 국가 모든 정책의 중심에서 출발해 사회 전체를 가족친화적 문화로 승화 발전시켜야 한다. 윤 대통령의 말대로 출산과 육아가 행복한 경험이 되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지난 7월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혼인과 출생아 수가 깜짝 증가했다. 저출산 고민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매우 고무적 변화란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미뤄졌던 결혼이 증가한 것 등이 반영된 결과여서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니다. 통계청 장래인구 추계에 의하면 2072년에는 국내 인구의 47.7%가 65세 이상 고령인구로 추정된다고 한다. 암울한 예측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기업이 저출산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문화 조성은 효과 측면에서 기대해 볼만하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직장인이 일과 가정이 양립하는 워라밸 문화에 만족할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 개발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2024-09-26

기후 위기와 지각 단풍

우정구 논설위원 가을에 접어들어 기온이 낮아지면 나무는 녹색 색소인 엽록소를 분해해 체내에 보관한다. 물과 영양소를 체내로 흡수하면서 다가올 월동준비를 하는 과정이다. 대신에 물이 공급되지 않는 잎에는 남아 있던 안토시아닌과 같은 색소가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때 붉게 혹은 노란색으로 보이는 것이 단풍이다. 추석 연휴까지 이어지던 무더위로 올해는 단풍이 물드는 시기도 작년보다 조금 더 늦어질 것 같다는 소식이다. 산림청은 올가을 단풍은 10월 말이 절정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역별로 차이는 있으나 설악산 10월 22일, 지리산과 팔공산 10월 25일, 내장산 10월 27일, 한라산 11월 6일 등이 절정기다. 산 전체를 기준으로 나뭇잎의 20% 가량이 단풍으로 물들면 단풍의 시작 시기로 본다. 80% 이상이 물들면 절정기라 부른다. 단풍은 기온변화에 민감해 통상 기온이 1도 오르면 단풍나무는 4일, 은행나무는 5.7일씩 물드는 속도가 늦어진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로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올라가면서 우리나라도 단풍이 물드는 시기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다. 1990년대와 비교하면 지리산은 5일, 월악산은 2일 정도가 늦어졌다고 한다. 특히 폭우와 같은 극한기후 변화가 잦으면 단풍은 제 색깔을 가지기 힘들어진다. 급변하는 날씨로 단풍이 곱게 물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은 일종의 생태계 파괴 현상이다. 가을철 불타는 산을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 부른다. 지구촌의 기후변화가 시시각각 인류를 위협하는 속에서 지각 단풍에서도 기후 위기를 새삼 느끼게 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9-26

기후 위기 대응이 곧 민생이다

조지연 국회의원(국민의힘·경산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후 위기는 당장 체감하기 어려운 인류의 거시적인 과제나 담론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농가에도, 시장 상인들에게도, 궁극적으로 민생 물가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현안이 되었다. 필자는 이번 추석 명절에 이를 확연히 체감했다. 장을 보기 위해 지역 전통시장을 찾았더니 평소와 달리 이번엔 예상보다 지갑이 빨리 가벼워졌다. 시금치 등 각종 채소 가격이 오른 것은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기후 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시장에서 만난 상인과 농민들은 이구동성으로 폭염으로 인한 농산물 생산 차질에 우려를 표했다. 지역구인 경산시는 복숭아, 자두, 포도, 대추 등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작황을 우려하는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졌다. 유난히 덥고 습했던 날씨 탓에 과일의 당도를 걱정하거나 심지어 겉은 멀쩡한데 열어보면 속이 덜 익었다고 했다. 더운 날씨에 과일의 겉만 익어버린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서민의 생활 물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세계 유수 연구기관들이 기후변화가 물가 안정을 위협하는 핵심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국은행도 최근 월평균 기온이 1℃ 오르면 농산물가격과 전체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각각 최대 0.44%P와 0.07%P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미 ‘기후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기후 위기는 우리나라와 같이 곡물자급률이 낮고 무역의존도가 높은 국가에는 식량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줄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최근 3개년(2021~ 2023) 평균 곡물자급률은 19.5%로 나타났다. 모자라는 곡물은 수입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농축산물 무역수지 적자는 눈덩이처럼 커져 5년 전인 2017년에는 181억300만 달러 규모였으나 2022년에는 311억7800만 달러로 치솟았다. 현재 흐름이라면 농축산물로 인한 무역수지 적자는 향후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세계 주요국들은 기후 위기에 따른 식량안보 대비책을 앞다투어 마련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6월부터 ‘식량안보보장법’ 시행에 들어갔다. 일본은 지난 5월 ‘식료·농업·농촌 기본법’을 개정해 ‘식량안보 확보’를 추가했고, 관련 평가지표도 새로 도입할 예정이다. 인도는 기후 영향으로 자국 곡물 생산의 어려움을 겪은 뒤 옥수수와 쌀, 밀 등 곡물 수출량을 대폭 줄였다. 이제 국회가 나서야 할 때다. 기후 위기가 민생과 직결된다는 것을 직시하고, 제도적 대책 마련에 앞장서야 한다. 정부도 기후 위기 문제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고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정부가 발간하는 환경백서에 기후 위기와 물가, 그리고 식량 안보 문제를 면밀히 다루어야 하며 ‘기후변화 상황지도’에도 기후 위기에 농수산업을 비롯한 산업계가 구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맞춤형 기후지도 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논의해 볼 만하다. 추석 민심이 안겨준 과제가 한아름인데 국회는 계속해서 정쟁에 발목 잡혀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농민들과 상인들의 한숨에 담긴 기후 위기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실질적인 민생 대책 마련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첫 정기국회에 임하는 국회 환경노동위원으로서 필자에게 주어진 책무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2024-09-26

밥 딜런을 떠올리는 가을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끝이 보이지 않던 지긋지긋한 폭염이 마침내 꼬리를 감추며 사라졌다. 아침저녁으론 서늘한 공기가 창밖을 서성인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게 되는 새벽이 오고 있다.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이 새삼스럽다. 여름은 가고, 가을이 목전에서 서성인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지난 2016년. 미국의 포크송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스웨덴학술원이 “밥 딜런은 밀턴과 블레이크로 이어지는 영어권 문학 전통 속에 우뚝 자리한 위대한 시인”이라고 상찬하자 당장 반발이 일었다. “인류 보편이 인정할 수 있는 미학적 성취를 이룬 시인과 소설가가 적지 않은데, 무슨 딴따라 가수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단 말이냐”가 반발하고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천만에. 밥 딜런의 노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의 가사를 음미해보자. ‘얼마나 자주 올려다봐야/진정한 하늘을 볼 수 있을까/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이웃의 울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비극의 끝이 모습을 드러낼까…’ 선명한 메시지와 명쾌한 은유를 보자면 밥 딜런이 만든 노랫말은 이미 시원찮은 시(詩)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는 시인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밥 딜런은 어떻게 ‘시인의 마음’과 ‘시인의 태도’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직접 묻지 않아도 돌아올 답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 다독(多讀)은 그게 시건 가사건 좋은 글을 쓰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도 밥 딜런처럼 독서하는 가을을 살아보자.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9-25

관광과 평화

장규열 고문 세상은 넓다. 나라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느낌이 있고, 민족마다 고유한 품성과 자태가 있다. 먹거리와 볼거리로 채워진 세상을 낱낱이 가 살필 수 있을까. 문명이 만들어낸 산업들 가운데 관광만큼 이곳저곳을 다차원적으로 넘나드는 가닥도 흔하지 않다. 경제와 사회, 문화와 산업을 가로지르며 관광이 만들어내는 유익이 상상을 넘는다. 매년 9월 27일은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가 지정한 ‘세계 관광의 날(World Tourism Day)’이다. 관광은 우선 도시 및 국가의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산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관광은 모든 일자리의 약 10퍼센트를 만들면서 각국 총생산량(GDP)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정 도시와 국가의 경제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하며, 관광지로 유명한 지역은 관광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 관광객을 유치한다. 관광은 숙박과 유흥, 음식점, 가이드, 교통, 기념품 판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자리를 제공한다. 다른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되지 않은 노동력도 쉽게 고용할 수 있어 사회 전반의 일반 고용률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다. 관광산업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관광은 경제적 수익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교류를 통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국적, 인종, 문화의 관광객들이 특정 도시나 국가를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배우고, 또 그들 자신만의 문화를 전파하게 한다. 관광이 빚어내는 문화적 교류는 지역 주민과 관광객 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글로벌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데 한 몫을 한다. 관광으로 지역의 전통문화가 활성화된다. 전통 공예품이나 지역축제, 문화유산 등은 관광객의 관심을 받으면서 더욱 자라나고 발전한다. 문화적 자산이 보존되는 동시에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만들어낸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예술, 공연, 음식 등 문화개발 프로그램을 육성한다. 관광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려면 경제성장과 더불어 환경보호를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에코투어리즘을 통해 자연을 보존하면서 수익을 일으키거나 저탄소 교통수단을 장려하는 등의 방법으로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관광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보호하고 관광객이 환경을 존중하며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정책을 도입한다. 관광이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할 때, 도시와 국가 경제는 장기적으로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 관광은 글로벌 경제 협력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여러 나라와 도시들이 관광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유럽의 국가들은 관광으로 협력하며, 상호 간의 교류와 협업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 국가나 지역의 성장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상생과 외교적 협력을 도모하게 할 터이다. 관광은 나라들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치유하고 상생과 협력을 가져오기도 한다. 2024년 ‘세계 관광의 날’ 테마는 ‘관광과 평화’라고 한다. 긴장을 넘어 평화에 이르는 길을 관광으로 열어 가자는 다짐이자 권고가 아닐까. 관광은 세상을 향해 우리가 만드는 창틀이 아닌가.

2024-09-25

대구시내버스 노선 개편, 시민의견 경청하길

대구시가 10년 만에 시내버스 노선을 대대적으로 개편한다. 연말 대구권 광역철도와 도시철도 1호선 하양구간 개통, 그리고 군위군 대구편입, 서대구역 개통으로 시내버스 노선을 손봐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노선 개편은 주민설명회를 거친 후 내년 2월 말부터 시행된다. 대구시가 어제(25일) 발표한 시내버스 노선체계 개편안에 의하면, 전체 노선 중 절반이 넘는 58.2%가 폐지되거나 대폭조정, 또는 일부조정된다. 개편되면 급행 11개, 간선 61개, 지선 50개 등 122개 노선에서 직행 2개, 급행 11개, 간선 59개, 지선 51개, 총 123개 노선으로 바뀐다. 운행 버스 대수는 1566대 그대로다. 직행 및 장거리 급행노선 신설, 중복노선 통폐합, 경산·하양방면 노선 조정, 서대구역·도심 재개발 지역 접근성 강화 등이 이번 노선조정의 특징이다. 대구에서 첫선을 보이게 될 직행노선은 칠곡~영남대, 동대구역~테크노폴리스 국가산단 구간에 운행된다. 직행노선은 급행노선보다 경유지가 적다. 대곡∼가창∼범물∼반야월, 군위∼칠곡간 2개 급행 노선도 새로 만들어진다. 대신 도시철도 1·2호선과 중복되는 5개 노선은 폐지된다. 도시철도 노선과 겹치는 경산·하양간 노선도 대폭 조정된다. 도시철도 2호선(문양역~영남대역)의 경우, 많은 시내버스 노선과 중첩됨에 따라 대구시는 최근 경산시에 경산까지 운행되는 시내버스 대수를 줄이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시내버스 승객들이 갈수록 줄고 있음에도, 대구시가 시내버스 회사에 지급하는 재정지원금은 한 해 2000억원에 육박한다. 재정적으로나 효율성 측면에서 시내버스 노선개편은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노선 조정은 시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많은 민원을 야기하게 돼 있다. 지난 2015년 대구시가 80개 노선을 개편할 때도 대구와 인접 시·군 주민들의 민원이 쇄도했었다. 앞으로 주민설명회 절차 등이 남아있는 만큼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서 노선개편을 확정하길 바란다.

2024-09-25

이번엔 금배추, 농산물 기후위기 대책 급하다

배추값이 금값이다. 추석까지 이어진 늦더위와 가뭄 등의 영향으로 공급량이 줄면서 재래시장 등 일부 소매점에선 최근 포기당 2만2000원짜리 배추가 등장했다고 한다. 한우 1등급 200g 시세 1만7000원과 비교하면 배추값이 더 비싼 기현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배추값이 미쳤다”며 “올 김장은 포기해야겠다”는 글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배추값이 폭등하자 일부 식당에서는 김치 대신 오이김치로 대체하거나 셀프코너에 김치를 아예 빼버리는 일도 벌어진다고 한다. 배추값이 폭등한 것은 폭염과 가뭄에 따른 생육 부진과 재배면적이 줄어든 탓이다. 추석까지 이어진 늦더위로 강원도지역의 고냉지 배추의 작황이 타격을 입었고, 지난주 폭우로 전국 배추 재배지가 침수 피해를 입었던 것이 원인이다. 이번주 들어 기온이 떨어져 배추의 생육이 회복돼 수급 상황이 개선되면 가격도 하락할 것으로 보이나 10월 중순까지는 높은 가격대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이다. 정부가 중국산 배추 수입에 나섰으나 배추값이 진정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최근 로이터 통신은 “한국의 기후 변화로 배추의 품질과 생산량이 타격을 받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통신은 “고온현상이 이대로 지속되면 서늘한 기후에 자라는 배추는 한국에서 더이상 생산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도 했다. 기후 변화가 우리의 일상에 미치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역대급 폭염이나 가뭄 등이 새로운 질병의 원인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농산물 생산에도 심각한 타격을 준다. 지난해 사과값이 폭등한 것도 이상기후 탓이다. 사과값이 금값이 되면서 소비자 물가를 불안하게 흔든 것처럼 배추값 또한 소비자 물가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게 뻔하다. 특히 11월 김장철을 앞두고 있어 배추값 폭등을 걱정하는 주부들이 많다. 배추값 안정을 위해 정부가 수입물량 확보에 나서고 있지만 그것은 단기 처방에 불과하다. 사과와 달리 배추는 마침 중국산 수입으로 대체할 수는 있으나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 임기응변식 방법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농업기술의 개발에 속도를 내야 한다.

2024-09-25

무릎을 꿇다

피귀자 수필가 우윳빛 융단 위의 솜이불처럼 포근하고, 금방 낳은 달걀처럼 따스하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사랑하는 이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모습은. 빛을 향해 뻗어가는 새순처럼 풋풋한 두 사람 사이는 종달새의 밀어로 흐르는 시냇물 같다. 타닥!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일었고 사정없이 패대기쳐지는 사지를 수습할 여가가 없었다. 쫙 미끄러지면서 얼굴이라도 들어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운동화 끈이 풀어진 줄 모르고, 앞서 가던 친구들을 급히 뒤따르다가 반대쪽 발이 늘어진 다른 쪽 끈을 밟고 말았던 것이다. 스텝이 꼬인 발의 순간적인 위력은 엄청났다. 고속도로 휴게소 아스팔트를 찧은 턱의 쓰라림과 놀람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피가 나는 턱 주변과 터진 입술이 금방 부풀어 엉망이 된 모습을 본 친구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팔을 뻗으며 엎어지는 순간을 본 친구의 이야기로는 사람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그렇게 위력적으로 엎어질 수가 있는지, 마치 땅바닥이 끌어 당기기라도한 듯, 처음 본 모습이라고 했다. 흉해진 얼굴과 무릎이 까진 아픔에 이은 창피함과 자괴감에, 마른 나뭇잎 버석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지만 잠에서 깨어난 아침은 부스스했다. 집안에 갇혀 일상은 물기를 잃어갔고 안착한 것 같으면서 겉돌기 일쑤였다. 한자리에 눌러앉은 마음을 달래려 애썼지만 자꾸 발을 거는 머릿속도 쉼표가 필요했다. 잠시 나를 내려놓으면 여유가 생길 텐데. 별은 이미 늘 그 자리에 떠 있고 내 몸의 움직임과 환경, 내 시선에 따라 보였다 말았다 하는 것임에도 조급증이 마음 안에 바람을 부추겼다. 하루에도 수차례 수선한 마음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후 속으로 핀 꽃이 켜가 되어 신발 끈이 풀린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알려주게 된다.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웬 오지랖이냐는 듯 시큰둥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인사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일은, 알려주는 말을 들은 옆에 있던 앳된 소녀가 친구 앞에 말없이 살폿 앉으며 운동화 끈을 얌전히 묶어주던 모습이다. 말간 모습처럼 다소곳하게 앉던 소녀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동작은 누가 해도 하나 같이 해맑고 순한 모습일 것이다. 두 친구의 마음도 꼬투리 속의 콩알처럼 탱탱하게 익고 있었으리라. 지인의 아들은 남미의 여행지 순례 길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얻었다. 아가씨의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진 건실한 청년이 결혼을 하지 않아 부모 속을 무던히 끓이게 하던 중의 일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어주는 남자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아가씨가 있으랴. 퍼져나가는 순금 햇살 같은 마법의 시간 속, 한국 사람이라곤 단 둘 밖에 없었던 머나먼 남미의 여행지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이 싹텄던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여행자의 가슴에 쉼표 하나 던져주어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눈짓, 봄이 눈처럼 하얗게 내렸던 것이다. 신발 끈을 조이듯 나이 따라 느슨해진 순발력과 이해력, 해이해진 마음을 조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리학에는 ‘15’초의 법칙‘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감정이 치솟아 정점을 찍는 데 15초가 걸린다는 것이다. 화가 나면 화의 갈래로, 기쁨이 일면 기쁨의 갈래로 접어드는 데 3초가 걸리고, 그 감정의 정점은 15초면 도달한다나. 그러고 나면 이내 다른 감정으로 변한다고 한다. 고작해야 15초에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에랴. 오늘도 반성문 한 장 쓴다. 문제를 해학적으로 바라볼 수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매너리즘에 빠졌을 땐, 해이해진 감정의 끈을 다시 조이기 위하여, 토라진 감정에게 신발 끈을 묶어주듯 그때마다 순하게 무릎을 꿇어야 하리.

2024-09-25

AI로 여는 미래 혁신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인류사회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 왔다. 현대 문명은 4차 산업혁명을 통해 급속히 발전해 왔고, 다가올 미래 AI시대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측하기 어렵다. 챗 GPT는 시작에 불과하다. 정치, 사회, 환경, 기업, 생활 문화 등 AI가 가져올 사회적 변화가 사뭇 기대가 된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는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거나 이를 뛰어넘어 다양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AI 혁신 기술은 인공지능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산업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핵심 기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술들은 AI가 더욱 정교하게 학습하고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을 제공한다. 대표적인 AI 혁신 기술은 첫째,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이다. 머신 러닝은 컴퓨터가 명시적인 프로그래밍 없이 데이터를 분석해 학습하는 기술이다. 특히, 딥 러닝(Deep Learning)은 여러 층의 인공 신경망을 통해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복잡한 패턴을 인식하는 고급 형태의 머신 러닝이다. 둘째,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는 컴퓨터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생성하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기계는 텍스트와 음성을 분석하고, 번역, 요약, 질의응답 등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셋째,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이다. 컴퓨터 비전은 AI가 이미지나 비디오를 분석하여 객체를 인식하고 상황을 이해하는 기술이다. 자율주행자동차, 의료 영상 분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AI가 여는 미래 세상은 자동화 되고 효율적이며 개인화된 세상이 될 것이다. 주요 변화되는 세상은 제조업, 물류, 서비스 산업 등에서 단순 반복적인 작업을 자동화하고 인간은 창의적이거나 복잡한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AI는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 개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개인 취향에 맞춘 콘텐츠나 상품을 추천하거나 맞춤형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교통, 에너지, 환경관리를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고 자율주행자동차는 교통 사고를 줄이고 스마트 시티는 자원 관리와 공정 안전을 향상시킬 수 있다. 또한 질병 예측, 진단, 치료에 활용되어 의료의 정확성, 맞춤형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AI 혁신 기술은 다양한 산업에서 적용되고 있으며, 향후 더 많은 분야에서 혁신을 이끌어 낼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혁신은 인공지능이 이룰 성취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AI는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오늘날 문제가 되는 모든 한계를 돌파해버릴 것이다. 인공지능은 거의 모든 직업에서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과학혁명의 중심에 있다. 인류의 진보는 가속을 얻고 전 분야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 될 것이다. 특히, 인간의 지능을 보조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기술들이 점점 더 발전함에 따라 AI는 산업 전반에서 효율성, 생산성, 창의성을 극대화 할 것이다.

2024-09-24

세계유산 활용사업 ‘소수서원 필리아’의 매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길고도 지루하던 더위를 깡그리 밀어내기라도 하듯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간간이 산허리까지 안개가 내려와 비 오는 날의 운치를 더하고, 흠뻑 젖은 솔숲에서는 빗줄기와 어우러진 솔내음이 차분하게 깔리는 듯했다. 송림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서원(書院) 기와의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마냥 또렷하고 정겨운 해설사의 설명을 툇마루에 걸터앉아 듣고 끄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진지하게만 보였다. 이와 같은 장면은 국가유산청의 2024년 세계유산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열리는 ‘소수서원 필리아’의 한 부분이다. ‘세계유산 활용사업’은 국가대표 브랜드로서의 세계유산 가치의 보존 및 전승, 융복합적 활용을 통한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기획된 사업으로, 영주시에서는 국가유산청의 2024년 공모사업에 ‘소수서원 필리아’ 등 2건이 선정됐다. 동양대학교 한국선비연구원에서 주관하는 ‘소수서원 필리아’는 일상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의 심신을 힐링하면서 선조들의 지혜를 느끼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총 10회에 걸쳐 소수서원과 선비촌 일원에서 개최되고 있다. 해설사와 함께하는 소수서원 탐방을 시작으로 내 몸을 행복하게 하는 치유음식 특강과 청국장 영양식단이 나오고, 꿈결같이 달빛과 별빛이 쏟아지는 소수서원의 솔숲에서 해금과 거문고의 그윽한 선율이 흐르면 지나가던 바람조차 멈추고 풀벌레들의 청아한 합창이 추임새를 더하며 여흥을 돋우기도 한다. 그리고 여명 속에서 서광을 맞이하는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는 아침에 다향을 맡으며 차훈(茶熏)명상을 하고 나면, 그야말로 심신의 평온함과 안정감이 얼굴에 쓰여 질 정도로 개운하고 여유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필리아(Philia)는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는 행위나 증세’ 등을 뜻하는 영어 접미어로 우애 또는 형제애로 옮겨진다. 즉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한 바람이 쌍방적으로 상호 간에 인지하고 있는 품성상태’를 말한다. 예부터 강학과 제향기능이 있었던 서원이 현대교육의 도입으로 대중과 멀어지고 향사기능 위주로 축소되자, 정부에서는 2013년부터 ‘서원향교활용사업’을 기획, 지원하여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서원문화행사를 열어 왔다. 소수서원은 동양대 한국선비연구원의 협력으로 서원스테이, 사마(司馬)선비과정, 소수서원 필리아 등의 다양한 사업으로 서원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해왔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중에서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소수서원에서 옛 숨결을 느끼며 자연과 인문학으로 서원의 학맥을 계승하는 문화사업을 펼친다는 자체가 의미 있고 법고창신의 새로운 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를 통해 전국에 소재한 문화·자연·무형유산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며 다양한 아이템과 연계사업 추진으로 지역문화유산의 활용도를 높이고 고유한 문화전통으로 존속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리라고 본다. 세계문화유산과 함께 지역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적·물적 자원과 결합해 지역민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늘리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자 기획, 추진되는 문화사업이 지속되기를 기대해본다.

2024-09-24

낯선 곳에서 익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무심히 있을 때는 흘러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던 시간도,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하고, 무언가 해야할 일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실제로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여름이 한창일 때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그 계절도 뺨에 스치는 바람 한 줄기, 길가의 나무들의 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나서야 다음의 계절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래 시간이란 나와 관계 없이 규칙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을 느끼는 나의 감각이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늘 다니고 있는 이곳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공간이란 늘 그곳에 그렇게 나와 상관 없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그 공간을 어떻게 인지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따라 그 공간은 나에게 전혀 다른 대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공간의 형태,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구조물도 그렇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삶에 있어서의 사건들은 우리를 그 공간을 하나의 의미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는 데 주요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처음 가본 장소와, 추운 겨울날 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꽈당 넘어진 장소의 의미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계속 다녔던 그 거리 곳곳에는 그 공간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기억들이 켜켜히 쌓여 무언가 특별한 어떤 것이 된다. 우리가 옛날부터 살았던 동네에, 한참 어른이 되어 다시 갔을 때 느끼는 어떤 종류의 느낌은 바로 그 공간이 아직 나에게 특별한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시간도 공간도, 단지 무심하게 그곳에 놓여 천천히 풀리고 있는 태엽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과 만나게 되면, 좀 더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 타인이 보기에 별 것 없는 오후 4시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원이라도 그곳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은 쌓여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 공간을 장소로서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 장소를 사진으로 남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의 이야기를 담아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영화로 타인에게 전한다. 그렇게 어떤 공간에 담겨 있는 누군가의 특별한 기억은 단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으로 공유된다. 한국에서 이처럼 특별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특히 소설로 잘 구현했던 작가는 아마도 작가 이효석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짧디 짧은 단편은 장소 속에 담긴 인간의 특별한 기억을 타인에게 공감의 형태로 전했던 가장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메밀꽃밭이야 단지 이효석의 고향이었던 평창 봉평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칠흙 같은 밤 메밀꽃밭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남긴 몇 줄의 글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몇 줄의 글에 담긴 조선달과 동이의 미묘한 이야기와 메밀꽃밭을 비추는 달빛이 없었다면, 애초에 메밀꽃밭이라는 것이 특별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작가 이효석이 달밤과 메밀꽃밭에 대한 기억도 전혀 없이 이 작품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소학교를 평창에서 다닌 이후 계속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어린 시절 어딘가에는 분명 “부드러운 빛을 흐뭇히 흘리고” 있던 달빛과 흐드러진 메밀꽃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가 남긴 짧은 글을 통해 그의 극히 내밀한 기억을 훔쳐보고 있을 뿐이다. 낯설기 짝이 없는 그 시간과 장소를, 마치 내가 언젠가 경험했던 것 같은 익숙한 기억을 가지고.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4-09-24

대마에 거는 기대

60년대까지 청송엔 대마 농사가 성행했다. 집집마다 씨앗을 뿌려 대마를 길렀다. 대마 채취가 끝나면 마을 사람 모두가 나서서 삼굿을 했다. 삼 껍질이 잘 벗겨지도록 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장작을 깔고 그 위에 돌을 얹어 삼을 재고 풀과 흙을 덮은 후 불을 지폈다. 삼굿은 힘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마을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삼굿이 끝나면 푹 삼긴 삼을 꺼내 차가운 계곡물에 식혔다가 건져내어 껍질을 벗겼다. 삼에서 뽑아낸 실을 꼬아 삼을 삼고 베를 매고 짜는 일은 대부분 섬세한 아녀자들 몫이었다. 삼베가 완성되면 잘 짜진 베는 팔아 살림에 보탰고 올이 굵은 베로는 가족들 옷을 지어 입혔다. 밤이고 낮이고 베틀에 올라앉아 베를 짜던 아낙들이 이제는 텃밭 농사도 힘에 부쳐서 경로당에 모여 시간을 보낸다. 주왕산 마을 여든을 훌쩍 넘긴 어르신들이 삼 농사지어 베 짜던 시절 얘기를 주절주절 풀어놓는다. 삼굿이 끝나고 차갑게 식힌 삼 껍질을 벗길 때 집집이 해 온 밥을 펼쳐놓고 거랑가에 둘러앉아 먹던 때가 어제 일처럼 선하단다. 어느 댁은 계추리(황저포)를 잘 짰고 어느 댁은 열세로 치는 계추리는 아니라도 일곱세는 짰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그 시절을 지나오지 않은 내 귀에는 무슨 암호처럼 들린다. 눈치 빠른 어르신이 설명을 보탠다. 계추리는 삼의 겉껍질을 긁어버리고 만든 고운 실로 짜는데 부드러워서 삼베 중에 최고로 치고 올이 굵은 삼베는 다섯세, 여섯세도 있었단다. 어렴풋이 귀가 열린다. 한창 삼을 삼고 베를 짤 무렵 어르신들 손가락 끝이 얼마나 아렸을까 싶어 멀쩡한 내 손끝이 저려온다. 정작 직접 짠 고운 삼베를 오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는 어르신 얼굴엔 자부심만 한가득이다. 온몸으로 세월을 건너온 어르신들이 지구 생태에 건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고나 계실까. 어머니가 들려준 외조모 얘기도 주왕산 어르신들 못지않다. 외조모는 손이 매워서 삼베는 물론이고 무명이며 명주 짜는 솜씨가 유달리 좋았다고 한다. 마을의 부자로 통했던 외조부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다 날리게 되면서 외조모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집안이 망했다고 낙담할 사이도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웠다. 누에에서 실을 뽑아 몇 날 며칠 베를 짠 후 공인된 허가증을 목에 걸고 명주를 팔러 나섰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통에 아무리 먼 길도 걸어 다녔다. 가지고 간 베를 다 팔 때까지 남의 집 고방에서 묵는 일은 예사였고 끼니를 굶는 일도 숱했다. 무거운 명주를 이고 지고 발품을 팔아가며 번 돈으로 자식 공부를 시켰다. 쓰러졌던 외가는 억측이었던 외조모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외조모에게 뽕나무와 누에와 명주는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것이었고 그분은 몰랐으나 그로 인해 지구 한 귀퉁이는 맑았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값싼 화학섬유로 만든 의류가 시장을 지배했다. 경제개발이란 미명하에 품이 많이 드는 삼베며 무명이며 명주는 우리 주변에서 밀려났다. 경지 정리된 논에는 대마와 목화와 뽕나무 대신 소출이 많다는 벼가 심겼다. 사람들은 더 이상 비싼 값을 들여 몸에 좋은 천연 섬유로 짠 옷을 입지 않았다. 베틀은 쓸모가 없어졌고 대마는 아편처럼 중독성이 있다는 불명예마저 안게 되었다. 시골 구석구석 흔하게 자라던 대마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십여 년 전 청송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 빈 집 울타리 안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대마가 저절로 자라는 걸 본 적 있다. 이곳 토박이들의 오랜 역사를 만난 것 같아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얼마 안 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 뿌리라도 키우면 불법이라는 걸 마을 사람 누구나 모르는 이가 없게 된 까닭이었다. 안동은 안동포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요즘 들어 대마 농사를 짓는 농가도 늘고 있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주 작목인 고추 농사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반면 대마 농사는 수월함과 수익성을 모두 갖춘 때문이란다. 대마는 밭을 갈고 씨만 흩뿌려서 흙을 덮어주면 3개월 동안에 2미터 이상 자랄 정도로 잡초보다 성장이 빠른 작물이다. 비료 없이도 잘 자라고 1년에 2 모작이 가능하다. 병해충에 강해 농약을 칠 필요도 거의 없다. 이러한 이점 덕분에 최근엔 대마 농사를 짓기 위해 멀리서 알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단다. 섬유용 대마는 옷부터 건축자재, 자동차 내장재까지 다양한 산업분야에 활용될 정도로 미래 산업가치도 뛰어나다. 몸에 좋은 대마종자유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외국에서는 새롭게 떠오르는 작물이기도 하다. 박월수 수필가 나무는 온실 가스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성장이 빠른 대마를 심는 일은 뜨거워지는 지구별을 구할 수 있는 가장 값싼 방법이라고 생태환경 운동가들은 말한다. 자연분해가 가능하고 독성이 없는 대마를 이용해 플라스틱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니 석유화학물질에 대한 의존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대마가 합법적으로 재배되고 있다는 건 지구별의 입장에선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지구의 내일을 위해 중독성 없는 대마를 재배하는 일이 어디에서나 가능해지기를 바라본다. ◇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박월수 수필가

2024-09-24

정국현안 풀려면 尹·韓 자주 만나는 게 순리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요청한 독대를 거절함으로써 ‘윤·한 갈등’이 정점에 달한 모습이다. 의료위기가 심각한 시점에서 의·정 갈등을 주도적으로 풀어야 할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한 대표는 대통령에게 독대를 요청한 이유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중요한 현안이 있고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독대자리가 마련돼야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비롯한 정국현안에 대해 진솔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한 대표의 독대 요청이 공식 라인의 사전 조율 없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심한 불쾌감을 가졌다고 한다. 두사람간의 갈등은 한 대표 측과 친윤계의 대리전으로 이어져 국민의힘 내부분열도 심각하다. 한 대표 측은 “대통령이 여당 대표도 따로 안 만난다면 누구와 현안을 논의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제기했고, 친윤계 의원들은 한 대표가 ‘자기 정치’를 한다며 비판하고 있다. 현재 윤 대통령 지지율은 20~30%대 사이에서 널뛰기하고 있다. 리얼미터가 지난 19~20일 조사한 윤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를 보면, 전국적으로는 긍정적인 답변이 상승(30.3%)했지만 대구경북(TK)에서는 긍정평가 31.9%, 부정평가 61.8%로 직전조사에 비해 부정평가가 10% 포인트 정도 올라갔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 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윤·한 갈등에 대한 TK지역 민심이반 현상이 여실히 드러난 여론조사다. 지금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은 의·정갈등으로 인해 망가져 가고 있다. 윤 대통령은 하루빨리 여야의정 협의체가 가동될 수 있도록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 야당은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 기회를 이용해 대통령 탄핵까지 노리고 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대통령이 둘도 없는 동반자여야 할 여당 대표와 만나는 것을 왜 꺼리는지 국민 대부분은 의아해하고 있다. 가능한 한 자주 만나서 산적한 국정 현안에 대해 해법을 찾는 게 순리 아닌가.

2024-09-24

특권폐지 운동의 선봉자

우정구 논설위원 우리 정치가 국민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 이론을 달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국민 눈에 비치는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라고는 정쟁과 몸싸움, 방탄, 가짜뉴스 양산, 혈세낭비 등등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줄이자는 데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6명은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해 4월 16일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등 3명의 공동대표는 특권폐지 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켰다.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과 고위공직자의 전관 예우 등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에게 부여된 200가지의 특권 폐지를 목표로 1000만명 서명운동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한국의 정치는 특권집단화와 양극화의 심화로 국민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것이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밝히고 “정치가 국민의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특혜와 특권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권 폐지의 방안으로 국회의원의 월급을 근로자 월평균 임금으로 줄이며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 폐지 등 구체적 대안도 제시했다. 국민의 여론 지지만큼 특권폐지 운동이 활활 불붙진 않았으나 지금도 특권 폐지 정신을 지지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특권이란 나만 누리라는 특별한 권리가 아니다. 국회의원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라고 준 권한이다. 그 권한 뒤에는 국민의 혈세와 희생이 있는 것이다. 재야 시민운동가이자 정치인인 장기표 대표가 별세했으나 그가 말년에 힘을 쏟아부은 특권폐지운동의 정신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 이어져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9-24

의대생 집단유급되면 의료시스템 망가진다

심충택 논설위원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 2일 기준 전국 40개 의과대학에서 2학기 등록금을 낸 학생이 전체 1만9374명 중 653명(3.4%)에 불과하다. 의대생 대다수가 아예 등록 자체를 거부해 집단유급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재학생 중 일부는 다른 대학에 수시모집 원서를 내거나,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어렵게 자녀를 의대에 보낸 학부모들의 속이 어떨지는 짐작이 간다. 교육부는 지난 7월 의대생들의 유급 판단을 학기 말에서 학년 말로 미루고, F학점(낙제)을 주는 대신 추후 성적을 정정해주는 학점제도를 도입할 것을 대학에 권고했다. 통상의 학사운영 기준을 적용하면 대다수 의대생이 유급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부라고 해서 등록도 안 하고 수업도 안 듣는 학생을 진급시킬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은 없다. 법령과 학칙에서 예외를 두는 것은 다른 학과 학생들과의 형평성에도 어긋나 불가능하다. 만약 2학기에도 의대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유급이 확정된다면, 2025학년도에는 현재 1학년·신규 입학생(7500명)이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이들은 동시에 진급하기 때문에 6년 내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다. 현 의대 교육여건상 수업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이와함께 의대 본과 4학년들이 의사 국가시험 지원을 계속 거부하게 되면, 내년에는 신규의사도 배출되지 않는다. 진료와 교육, 임상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고 있는 한국 의료시스템이 대학교육이라는 첫 단계에서부터 망가지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지금은 대규모 의대증원을 둘러싼 의정갈등이 8개월째 지속되면서 환자와 수련병원, 의과대학 모두 패닉상태다. 중환자들은 수술일정을 잡지못해 생명을 위협받고, 병원과 학교를 떠난 전공의 1만2000명은 돌아올 기미가 없다. 지친 의대교수들도 병원을 떠나고 있다. 입원·외래환자가 반토막 난 수련병원들은 심각한 경영난에 처해 있다. 의료시스템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전공의들의 병원 복귀다. 의사는 전공의 시절이 가장 중요하다. 인턴은 레지던트 1년 차한테, 레지던트 1년 차는 2년 차한테 배운다. 한 해라도 레지던트 정원에 결원이 생기면 이런 ‘도제식 교육’에 후유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련병원에서 전공의가 사라지면 전문의와 의대교수들도 배출될 수 없다. 내년에는 전문의 배출이 평소의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2000년부터 8년간 삼성서울병원에서 4·5·6대 병원장을 지낸 이종철 서울 강남구 보건소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의료가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하는 전공의들의 노력 덕분에 열악한 환경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정부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전공의들이 하루빨리 제자리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의료대란으로 국가 의료시스템이 망가지고 국민이 생명을 잃으면, 의료개혁이 성공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한 여당 국회의원의 말에 공감이 간다.

2024-09-24

석포제련소 대표 구속, 중대재해 경종되길

작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회사 경영책임자가 안전체계를 제대로 구축했는지를 따져 위반이 있으면 1년 이상 징역, 10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산업재해를 줄이자는 목표로 처벌 수위를 높여 만든 법이다. 그러나 작년 한해 산재사고 사망자는 644명이나 됐다. 전년에 비해 크게 줄지 않은 수치다. 법 적용 대상인 50인 이상 사업장에선 256명이 사망해 오히려 8명이 늘었다. 법의 실효성 측면에서 보면 별로 효과가 없는 결과다. 그래서 기업들은 기업대로 중대재해법의 불명확한 의무와 과도한 처벌 수위로 혼란을 겪는다는 호소를 한다. 또 법을 집행하는 기관도 신중을 기하다 보니 처벌이 솜방망이에 그친다는 지적을 받는다.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은 경북 봉화군 소재 석포제련소 대표이사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죄로 구속 기소했다. 원청업체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은 “대표가 관리대상 유해물질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음에도 비소 누출 우려가 있는 탱크 교체작업과 관련한 위험성 평가를 충실히 하지 않았고, 또 하청업체 선정도 형식적으로 진행해 안전관리 체제 구축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구속 사유를 설명했다. 석포제련소는 작년 12월 탱크 수리작업을 하던 근로자가 누출된 비소에 중독,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상해를 입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석포제련소는 그 후에도 지난 3월 냉각탑 청소작업을 하던 하청업체 노동자 1명이 사망했고, 8월에는 하청업체 노동자 1명이 열사병으로 숨졌다. 석포제련소 대표이사 구속은 중대재해와 관련한 첫 구속이란 점에서 업계에 경종을 울렸다. 기업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도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업 현장에서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실질적 노력이 수반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사회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며 기업의 주장대로 법에 문제가 있으면 이를 고쳐 법의 실효성을 높이는 노력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2024-09-24

지구를 위해 손을 내밀자

김규인 수필가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이 지났다. 상인들은 불경기로 힘들다고 하지만, 골목마다 내어놓는 쓰레기 더미는 만만치 않다. 버려진 건 빈 상자, 플라스틱 포장 재료, 음료수병, 비닐봉지 등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이렇게 많은 물건이 다 어디로 갈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제대로 재활용하는 물건도 적거니와 버려진 상태도 제멋대로이다. 자세히 보면 음식물이 묻은 종이류, 먹다 남은 음식물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 양념이 묻은 종이와 비닐류가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몸으로 말한다. 쓰레기의 분리수거는 어려운 것인가. 버려진 양심을 가득 담은 쓰레기들이 거리를 뒹구는데 사람들은 누구 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추석인데도 한여름 날씨가 이어지니 사람들은 덥다고 난리를 친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우가 내리는가 하면 비가 내리지 않아 마실 물을 걱정하는 곳도 늘어난다. 곳곳에서 이상기후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계속되는 태풍에 물난리를 만난 이재민은 늘어나지만 정작 근본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은 적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한 번씩 특집으로 환경문제를 다루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한 행위처럼 느껴지는 건 무엇 때문일까. 환경문제는 밥을 먹듯이 매일 신문의 1면을 차지하거나 방송의 첫머리를 장식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실상은 환경오염의 실태조차 파악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다. 얼마나 더 지구가 망가져야 사람들은 진정으로 환경을 걱정할까. 아니 지구가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 매달릴까. 지구는 아프다고 앓는 소리를 내거나, 걸핏하면 자신을 태우며 고통을 호소하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는 듯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서는 물건보다 포장재에 많은 신경을 쓰고, 사용하지 않아도 될 물건을 채워 넣는다. 보기에 좋게 비닐로 코팅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화려한 장식을 더 한다. 물건보다 소비자의 관심을 받는 데만 신경 쓰는 모습이다. 어떻게 하든지 물건이 잘 팔리고 좋은 가격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인터넷 판매를 하는 업체에서는 조그만 물건을 부치는데 너무 큰 상자를 사용한다. 정작 택배 물건을 받아 상자를 뜯어보면 실제 물건은 외롭게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있다. 상자가 작으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렇게 보낸다. 운반비도 늘어날 텐데 원가관리 측면에서 보더라도 효율적인지 의문이 든다. 국가에서는 재활용을 권장하나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지 않고 공장에서는 물건을 팔기 위해 오늘도 포장에 공을 들인다. 차량은 더 무겁고 큰 상자를 싣고 힘들게 언덕을 오르느라 오염된 가스를 내뿜는다. 일회용품은 넘쳐나고 불어난 쓰레기는 산천을 뒤덮는다. 이대로 계속되어도 좋은 것인지 묻고 싶다. 이제라도 지구를 위해 무엇이든지 실천하자.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쓰레기와 오염 물질이 가득 찬 별이 될 것이다. 지구가 아파하고 몸부림치는 고통에 사람들도 죽어갈 것이다. 이제라도 스스로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절박한 몸부림이 필요하다.

2024-09-23

각개전투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곧 마무리될 것 같았던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의대 정원 증원을 둘러싸고 시작된 갈등이 어느 순간 자존심 싸움으로 치달으며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버렸다. 지난 추석을 앞두고는 응급실 진료를 받지 못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사례가 연이어 언론에 보도 되며 긴장감을 높였다. 정부에서는 구급대원의 입을 단속하고 군의관을 현장에 파견하며 문제에 대응하고자 했으며, 의료계는 이런 정부의 태도에 비판적 입장을 표했다. 동시에 정부는 전공의의 현장 복귀와 의대생의 학교 복귀를 꾸준히 설득하고 있다. 특히 의대생의 학교 복귀를 돕기 위해, 두 개의 학기로 구성된 연 단위 학사 일정을 변경하는 학칙 개정까지 각 대학에 요구하고 나섰다. 의대생들의 휴학 신청을 승인하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학사경고를 받아서 유급되는 상황을 막으려는 대책이지만 현장에서는 교수도 학생도 모두 반대하는 정책이다. 의대생들의 학교 복귀가 요원한 현실에서, 이번 학사일정 변경은 의대생을 위한 특별 혜택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더 이상 이번 사태의 책임을 어느 한쪽으로 돌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분명한 점은 이번 일로 아픈 국민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 아이가 두 살 때 자정이 다된 시간에 대형병원 응급실에 급하게 간 적이 있었다. 줄자의 예리한 칼날에 베인 아이 손가락의 피가 한 시간이 넘도록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 의사의 도움으로 베인 손가락을 꿰매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고 늦은 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응급실 밖에는 없다. 중증 환자가 아닌 경우 응급실을 자제하라는 권고에 따르면 이런 환자는 새벽에 어디서 치료를 받아야 할까? 국민은 국가를 믿고 일상을 살아간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근 추석을 앞두고 지인들과 나눈 인사는 추석 때 절대로 아프지 말자는 자조 섞인 말이었다. 의료 개혁이라는 명분은 눈앞의 불안과 고통을 감내하기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말이다. 의사들의 이기주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우리는 그 누구도 믿지 말고 각자 알아서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삶, 각개전투의 삶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20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8년째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다. 8년 동안 빠지지 않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크고 작은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반등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간 출산 장려금 등 부수적인 것에 정책이 집중되었으며, 그럴수록 근본적인 문제, 국가에 대한 믿음은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의료·교육·주거 문제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며 결국 나의 무능력을 탓하는 현실에서 누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각개전투의 시대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결국 국가 아닌가.

2024-09-23

유행 흐름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

슬럼프가 찾아왔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 원하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나는 좋게 말해 다소 개성 있는 시를 쓰는 시인이고, 다르게 말하면 조금 이상한 시를 쓰는 시인이다. 어떤 면에서는 구닥다리 같은 측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름 진정성 있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몇 차례 반복되니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지도교수이자 은사님이신 유성호 교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아무래도 지금 우리나라 시단이 원하는 방향이 제가 쓰고 있는 방향과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지.” “다음 원고는 좀 다른 방향으로 써 보려고 합니다.” 나름 생각을 많이 하고 드렸던 말씀인데 선생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지 마쇼. 쓰던 대로 쓰면 돼.” 전화를 끊고서 그 말씀을 한참동안 머릿속에 가두어 두었다.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어렴풋하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나가던 조씨’란 사내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의 본명은 조현철. 나와 함께 ‘백수와 조씨’라는 2인조 밴드로 활동한 적 있었던 악기 연주자이다. 그는 여러모로 희한한 사람인데 언제나 가장 눈길을 끈 것 중에 하나는 그의 패션이었다. 그는 내가 기억하기로 이미 15년이 넘는 세월동안 검정 계열의 아웃도어 의류를 주구장창 입고 다녔다. 간혹 체크 남방 같은 것을 함께 입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의 패션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는 등산복이었다.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패션을 비웃었는데, 최근 들어 뜻밖의 현상이 일어났다. 기능성 아웃도어 의류와 일상복을 믹스매치하는 고프코어(Gorpcore)룩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고프코어룩의 선두주자라 하면 모델 겸 방송인 주우재 씨를 많이 떠올린다. 그러나 나는 확언할 수 있다. 주우재 씨가 있기 전에 조현철이 있었노라고. 그가 무심코 입던 스타일이 어쩌다 보니 유행과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현대 축구의 반역자’ 후안 로만 리켈메 선수가 떠올랐다. 그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 중반은 전통적인 공격형 플레이메이커가 각광받는 시대가 아니었다. 다양한 선수가 공격을 조립하고 팀 전체가 유기적으로 전술을 수행하는 시대에서 리켈메는 여전히 전통적인 플레이메이커로 남았다. 모든 공격상황에서 공은 그를 거쳐야 했고, 공격의 템포는 빠르지 않았다. 대신 창조적이고 정확한 패스를 뿌릴 줄 알았고 때로는 직접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현대 축구의 흐름에 역행했지만 그는 스스로 하나의 전술이 되어 수많은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스페인 리그와 아르헨티나 리그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한 매체는 그를 200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 4위로 꼽았다. 선생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유행을 좇기보다는 뚝심 있게 내 영역을 개척하라는 말씀인 것 같다. 약간은 우스갯소리처럼 한 말이지만 지나가던 조씨라는 친구가 더 이상 옷차림으로 놀림받지 않게 된 것처럼, 그리고 리켈메가 결국 자신만의 축구로 역사를 이룬 것처럼 가던 길을 우직하게 가는 것이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가르침이셨을 것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소위 주류라고 하는 스타일을 흉내 내는 것 정도는 나도 할 줄 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스타일을 내면화하여 쓰는 사람보다 잘 쓸 자신은 없다. 아등바등 그들 꽁무니를 좇다가 드디어 그들과 나란히 설 수 있을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무렵 또 새로운 것들이 유행하기 시작할 것이다. 유행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그 유행의 선두에 서서 걷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스타일리시하고 멋지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끝없이 유행의 뒤를 좇지만 결국 유행을 따라잡지 못하는, 세상에서 제일 촌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차라리 유행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가는 사람들이 훨씬 멋져 보이는 때가 많다. 돌고 도는 유행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건 그들은 끝내 살아남는다. 유행을 창조하고 선도하던 이들이 지쳐서 끝내 뒤처지고 마는 순간에도 자기 길을 걷던 사람들은 거기 남아서 그들의 세계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시인이 되었을 때는 이십 대 초반이었다. 내가 제일 어렸고 그래서 내가 최첨단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나도 이제 곧 사십이고 나보다 어리고 잘 쓰고 반짝반짝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사라질 순 없다. 나는 계속 여기서 나만의 견고한 성을 쌓을 거다. 아무도 저런 성은 쌓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두고 보자.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2024-09-23

가족의 일

이번 추석은 평소의 추석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폭염의 가을이라니.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도 그러했지만, 개인적으론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은 것이 명절 분위기를 흐리는 데 한몫했다. 이번 추석은 여러 상황을 종합하여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는 방식을 택했고 형제들이 모여 간단히 식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만큼 온 가족이 모이는 북적북적한 모습은 연출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대체 언제 은강이의 신작 소설이 출간되는 거야?’ 혹은 ‘시집을 갈 생각이 있긴 하니?’ 같이 잔소리하는 친지들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뜻. 간소화된 식사 자리에서 은근히 느껴지는 부모님의 걱정의 눈빛을 묵묵하게 견디는 것으로, 비교적 조용하게 명절을 끝마쳤다. 온 가족이 모이는 일이 부담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가족들 앞에서 내 역할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은 꽤 오래되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방향이 미세하게 수정될 뿐이다. 나는 항상 나대로 살고 있는데, 어쩐지 내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평소에는 자부심을 가지고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한순간에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가족이 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인 것만 같다. 우리 사회는 관계 지향적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공동체의 존속을 위하여 개인의 돌발적인 행동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잘살아 보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삶의 강한 동력이었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선 다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면에서 그것은 훌륭한 문제 해결 방식이 된다. 그러나 사회 전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개인의 삶을 지워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보다 우선시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개인의 감정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취급된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우리 사회의 기조는 한 사람이 입을 다물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이는 우리가 가진 고유한 모양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자각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 가까운 사람에게까지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지나온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상대의 약한 부분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삶에서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관계로는 응당 가족 공동체를 들 수 있다. 김소연 시인의 저서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재하는 가족은 특별함을 일찌감치 지나쳐 온갖 문제가 산적한 집합체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내면에 간직된 상처의 가장 깊숙하고 거대한 상처는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며 “오래된 제도로서의 가족은 서로를 계속해서 희생해야만 존속”되어 왔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가족 공동체는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우리 개인은 국가로부터 받은 모종의 상처를 안고 있으며 대의라고 명명되는 것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곪아버리기 마련. 겉을 감싸는 화려한 포장지에 집중하느라 썩어버린 내부를 놓쳐서는 안 된다. 깊숙한 상처를 마주하고 계속해서 좋은 공동체란 무엇인지에 관해 골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명절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음에 슬퍼하는 이와 ‘가족 간에 정을 나누는 일’에 상처받는 영혼이 공존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안식을 찾지 못하고 밀폐된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중이다. 이것을 극단적 고립주의나 철저한 개인주의로 나아가려는 신호로 읽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건강한 형태의 집단을 만들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면 어떨까. 가까운 사람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은 사랑의 한 형태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어떠한 잣대를 두고 판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을 그려가고 거기에 완벽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족이란 함께 묶일 수도 있지만, 또 언제든 떨어져 존재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 곳을 바라보기보다 등을 맞대더라도 체온을 나누는 것.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2024-09-23

표준어 사이의 이정표, 충북 방언시

충청 방언은 흔히 양반 말이라고도 한다. 호서 방언 혹은 서남방언이라고도 하는데 충북과 충남 방언은 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충청 방언은 경기 방언과 억양, 음운, 문법 면에서 이질적인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따로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충북 방언은 경기 방언과 호남 방언의 중간점에 위치하여 둘 사이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해유’와 같이 말끝이 길게 늘어지고 말의 흐름 또한 느리고 온화하며, 억양이 차분한 것이 특징이다. 충북 방언은 단양, 제원군, 중원군, 괴산군의 연풍과 장연 지역의 동부 방언권과 중원군, 음성군, 진천군, 괴산군, 보은군 등지의 중부 방언권, 옥천군, 보은군, 영동군의 동부 지역 등 남부 방언권으로 나뉜다. 충청북도는 박완호, 서경은, 오탁번, 윤관영 등 이름난 시인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진천 출신의 박완호 시인은 ‘씨부럴’이라는 시에서 충청도 방언의 특유한 말투인 ‘~유’를 적절하게 섞어 충북 방언의 말맛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시팔이라구 쓰구는, 씨부럴이라구 했시유,/가 봐야 인자는 모냥새도 안 남은/구봉리 고향집, 푹석 자빠져부린/기둥이랑 들보 쓱어가는 새/여그저그 속 모르구 고개 쑥쑥 내민/풀잎사구 흔드는 바람만/괴사리손 빠져나가는 미꾸리들뫼양/눈그물 밖으로 내삐는디” 오랜만에 찾은 구봉리 고향집의 전경을 고향의 어법으로 구사한다. 충청도 방언에서 ‘ㅓ:’는 ‘ㅡ:’로 실현되며 말투 역시 느릿하게 ‘~유’라며 말꼬리가 축 드리워진다. 시의 말미에 “낫살에 안 맞게/엉엉 울어버리구 말았시유”라며 구봉리 고향을 나이들어 뒤늦게야 찾은 시인은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알싸한 고향의 그리움은 고향의 말씨와 뒤섞여 제 맛깔과 빛깔을 찾게 된다. 제천 출신 서경은 시인은 충청도의 낱말 가운데 ‘올뱅이(다슬기)’, ‘새뱅이(새우)’라는 단어로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제천과 인접한 경북 영주지역에서도 ‘올뱅이’, ‘올갱이’라는 방언이 나타난다. 옹솥에 펄펄 끓인 새뱅이국과 올뱅이국을 끓여 먹으며 강에서 물놀이하던 추억을 한편의 그림처럼 그리고 있다. 우리말에서 ‘ㅂ’과 ‘ㄱ’은 쉽게 교체된다. 소위 음운교체라고 한다. ‘올뱅이’와 ‘올갱이’는 ㅂ과 ㄱ의 교체형으로 ‘붚(붑)북(鼓)’의 변천과 같은 예이다. “물놀이에 함께 가지 못하고/혼자 집을 보고 있노라니/부아가 치밀었던가/옹솥 안에서 ‘새뱅이’들이/또 한 번 끓어오르며 왁자지끌하였으나/늦은 저녁으로 먹은 ‘새뱅이’국맛은/여전히 달랐다.”라며 충청도 제천의 대표적인 방언 어휘인 ‘올뱅이’와 ‘새뱅이’로 맛있는 한 상의 저녁상을 차려낸다. 오탁번의 산문집 ‘두루마리’(태학사, 2020)를 보면 그가 충북 제천 방언을 얼마나 아끼며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별별 오두방정을 떠는 철부지 시인’이라고 ‘자뻑’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방언으로 언어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는 참 아름다운 시인이다. 그의 시 ‘잘코사니’에 나오는 ‘잘코사니’는 얄미운 사람이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봉변당하는 것을 고소하게 여길 때 내뱉는 제천 방언이다. 경상도 방언으로는 ‘아방신이다’, 서울방언으로는 ‘고소하다’정도의 말맛을 가진 단어다. 탁월한 방언 시인이기도 했던 오탁번은 “쥐코밥상 앞에서/아점 몇 술 뜨다가 만다/저녁은 제대로 먹으려고/밥집 찾아 들랑날랑하지만/늙정이 입맛에 영 아니다/다 버리고 고향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을 찾아왔는데/입은 서울을 못 잊었나 보다/야젓하게 살고 싶지만/뭘 먹어야 살든 말든 하지!”에서 ‘쥐코밥상’, ‘늙정이’, ‘야젓하게’와 같은 제천 입말을 고급진 표준어 사이에 이정표처럼 끼워넣어 고향으로 간다. 오탁번 시인은 과연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던” 삶을 살았던 것일까. 마치 자신의 모어, 살가운 사투리에 살짝 갸울은 시인이었다. ‘눈부처’의 “이승 저승이/입술에 닿는 술잔만큼/너무 가까워/동네사람들은 함빡취했다/-잔 안 비우고 뭐해유?/한 씨에게 자꾸만 술을 권했다”에서처럼 쉬 이승을 떠난 고향사람들을 회상하듯 자신도 입술에 닿는 술잔만큼 가까운 저승으로 떠났다. 노루잠에 개꿈을 꾸듯 살았던 이승의 그리움을 뒤로 밀어두고. 필자는 오탁번 시인이 남긴 방언시를 매우 아끼고 사랑한다. 시어로 방언을 마구잡이로 노출시켜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시들은 오히려 방언을 오염되고 누추한 변종으로 추락시킨다. 이에 반해 오탁번은 방언 시어를 적절히 끼워넣어 시적 미의식을 감쇄시키지 않는 절대 균형을 이룬다. 섬세한 절제의 언어 수단으로만 방언을 시어에 사용했다. 방언시어로 언어의 원형을 복원하고 또 그 원형의 상징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표준어가 고급진 언어라면 방언은 그 고급진 언어로 향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4-09-23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연구년을 맞아 2025년 9월 1일부터 1년간 도쿄대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출국을 앞두고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지진에 대한 염려였는데요. 모두 알다시피, 노토 반도 대지진으로 2024년을 맞이한 일본에서는 지난 8월에 지진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8월 8일 미야지마 지진을 시작으로, 9일 가나가와현에서, 10일 홋카이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던 겁니다. 이로 인해 난카이 해곡에서 100~150년 간격으로 발생한다는 대형 지진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 8일 ‘난카이 해곡 지진 주의’를 발표하기까지 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저를 아끼는 많은 분들은 지진에 대한 걱정을 참 많이도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저도 나중에는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요. 한국인에게 일본과 지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아마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발생한 간토대지진의 참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일본에 입국한 날은 101년 전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9월 1일이었습니다. 간토대지진은 참으로 끔찍한 진재(震災, 지진에 의한 재해)였는데요.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도쿄를 비롯한 간토 일대를 강타한 지진은, 도쿄제대에 설치된 지진계가 고장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수십 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요. 더욱 끔찍했던 것은 이후 계엄령이 내려지고, 일본군과 경찰들의 직접적인 가담 내지는 방조에 의해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입니다. 학살은 주로 자경단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심지어 ‘임신부처럼 배에 폭탄을 넣고 다니며 일본인을 죽인다‘ 등의 유언비어를 빌미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던 겁니다. 시인 쓰보이 시게지는 시 ’15엔 50전(十五円五十錢)‘에서 그 날의 참상을 “나라를 빼앗기고/말을 빼앗기고/최후에 생명까지 빼앗긴 조선의 희생자여/나는 그 수를 셀 수가 없구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일본에서의 첫 번째 주말을 맞이한 제가 향한 곳은 스미다구에 있는 요코아미초 공원이었습니다. 요코아미초 공원은 간토대지진 당시 공터(본래는 일본 육군 피복창터)여서 많은 사람들이 피난했다가, 오히려 갑자기 닥쳐온 열폭풍으로 무려 3만8000명이 희생된 곳입니다. 여기에는 웅장한 일본풍의 도쿄도위령당이 있었는데요. 그 옆에 검은 색의 ’관동대지진조선인희생자추도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추도비 옆에는 ‘관동대진재 조선인희생자 추도행사 실행위원회‘가 1973년에 세운 비석이 하나 더 있었는데요, 그 비석에는 “1923년 9월 일어난 간토대진재의 혼란 속에서 그릇된 책동과 유언비어로 6000여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귀중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은 50주년을 맞아 조선인 희생자를 마음으로부터 추도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올해도 9월 1일에 추도식이 열렸으며, 제가 이곳을 찾은 9월 7일에도 여전히 꽃과 술병들이 억울한 넋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사이타마현 지사와 지바현 지사가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된 조선인 희생자 추도 행사에 처음으로 추도 메시지를 담은 조전을 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는 9월 1일 일본 도쿄 주일한국문화원에서 열린 ‘101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에 자민당 출신 전직 총리로는 처음 참석하기도 했는데요. 행사 이후 한국 기자들과 만나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은 “역사적인 사실”이라며 ‘한·일 공동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간토대지진 당시 6600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실을 흔쾌히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전직 총리가 이를 ‘사실’로 확인한 것은 의미 있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조선인 희생자를 위한 어떤 행보도 보이지 않았네요. 특히 2016년까지 도쿄도지사가 매년 추도문을 발표했던 것과 달리,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 취임 이후 올해까지 단 한 번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추도문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본래는 요코아미초 공원 근처의 스미다가와 강변도 걷고, 아사쿠사 관광지까지도 가볼 생각이었으나, 100년 전의 그 처참한 만행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부인의 폭력 때문인지 갑자기 너무나 큰 피로를 느꼈습니다. 급하게 연구실로 돌아왔지만, 토요일이어서 연구실 건물 자체가 출입불가였습니다. 할 수 없이 중앙도서관에 갔을 때, 놀랍게도 그곳의 1층 전시 코너에서는 ‘눈앞에서 펼쳐진 학살의 기록과 시민의 대처-관동 대지진 당시 살해당했거나 살해당할 뻔한 사람들을 애도한다’는 이름의 전시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진재발생, 그리고 사람들은…’, ‘일고생이 본 관동대진재’, ‘진재 당시의 조선인 유학생’, ‘학살의 실태를 조사하다-조선인 조사단과 요시노 사쿠조’, ‘진재에 대한 끊임없는 증언과 그 후’, ‘잊지 않기 위해-시민의 활동과 추도회’라는 여섯 개의 세부 코너에 총 34개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간토대지진과 관련한 역사적 증언들과 자료들을 살뜰하게 모아 놓은 전시였습니다. 그 전시를 보고 숙소로 걸어가면서, 어쩌면 절망도 그리고 희망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024-09-23

국회의원 특권,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세계 최고의 특권과 특혜를 누리고 있지만, 그들의 정치수준은 낙제점이다. ‘고비용·저효율의 정치’를 ‘저비용·고효율의 정치’로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없다. 극심한 정쟁을 하면서도 자기들 이익을 위해 야합하는 표리부동한 정치행태를 보라. 특권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국민의 공복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현실은 특권 폐지의 당위성을 말해준다. 국회의원 특권의 무엇이, 왜 문제인가? 그것은 첫째, 특권·특혜가 너무 많아서 권력이 봉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불체포특권·면책특권에다가 연봉 1억6000만원, 명절휴가비 850만원, 입법·특별활동비, 유류비·차량유지비, KTX 특실과 비행기 비즈니스석 제공, 연 2회 해외시찰, 9명의 보좌진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180여 가지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한국보다 부유한 프랑스·독일·스웨덴·일본 등 정치선진국들보다도 특혜가 더 많으니 어이가 없다. 정치선진국과 후진국 차이는 정치를 ‘봉사와 희생의 직업’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직업’으로 인식하느냐에 있다. 전자는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보좌관 없이 스스로 업무를 수행하지만, 후자는 보좌관이나 비서에게 시켜놓고 전용승용차로 경조사 다니면서 폼을 잡는다. 정치선진국은 의원 보수를 외부 독립기관에서 결정(영국·스웨덴·캐나다)하거나, 경제지수와 공무원 보수액에 연동해서 결정(미국·독일·프랑스)하는데 반해, 한국은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보수를 결정하고 있으니 코미디가 아닌가. 둘째, 특권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한국정치가 정상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권 자체가 반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특권·특혜가 많을수록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민의 공복이 되기 어렵다. 특권을 잡기 위해 정상배(政商輩)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고, 권력에 줄서는 정실주의 정치가 만연한다. 특권을 폐지해야 ‘잿밥에만 관심 있는 정치꾼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정치인들이 정도정치를 펼 수 있다. 국회의원들의 특권카르텔을 해체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한국정치발전의 길이다. 셋째, 국회의원들이 특권 폐지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수 없듯이,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그들에게 특권 폐지를 기대할 수는 없다.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가 2023년 국회의원들에게 등기우편으로 특권 폐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총 300명 중 6명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모두 응답을 거부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선거 때만 특권 폐지를 약속하는 그들에게 맡겨두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니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국민이 특권폐지운동을 주도하는 수밖에 없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권자인 국민이 깨어있지 않으면 특권에 취한 그들은 절대로 깨어나지 않는다. 주인(국민)이 언제까지 머슴(국회의원)에게 농락당하고 살 것인가. 주인이 현명해야 머슴을 잘 부릴 수 있다.

2024-09-23

멀리 있는 사람을 모이게 하는 정치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정치 실망의 시대’를 넘어 ‘정치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는 2024년 가을의 초입이다. 여당과 야당의 화합과 협치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고, 국회의원과 장관이 마주 서면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저 멀리 자취를 감춘다. 오직 서로에 대한 비난과 상대방을 향한 질타와 질책만이 신문과 방송의 정치 관련 뉴스 헤드라인에 횡행한다.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와 대정부질문을 보고 있으면 한숨부터 나온다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앞으로도 이 상황이 개선되거나 달라질 가능성이 낮다는 건 더 큰 문제다. ‘논어’ 자로편(子路篇)을 펼친다. 이런 문장이 나온다. ‘섭공문정 자왈 근자열 원자래(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 2500년 전 공자는 “바람직한 정치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 앞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자신 가까이 있는 이들에겐 기쁨을 주고, 멀리 있는 사람들을 곁으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서 기쁨을 선물하고, 멀리서 찾아가 들어볼 만한 고담준론을 해줄 수 있는 정치인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너나없이 참혹한 심경이 된다. 공자가 살아온다면 끌탕할 일이다. 정치에서 희망이 사라진 시대임을 알기에 사람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에게 ‘근자열 원자래’ 같은 현자(賢者)의 정치철학을 가지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만의 틀 안에서 자기편만을 보고 정치하지는 말라는 것, 한 번쯤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달라는 것, 그게 멀리 있는 사람을 모이게 하는 정치가 될 것이니. 이 정도 부탁도 들어주기 어렵다면 정말 심각한 일 아닌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