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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불효자 방지법

우정구 논설위원 불효자 방지법이란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상대로 패륜적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이다. 2015년 우리 국회에서 처음 발의됐지만 아직까지 법 제정에 이르지 못했다. 싱가포르에서는 경제력이 있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 부모나 국가가 고소할 수 있고, 위반한 자식에게는 징역형과 벌금형을 주는 불효자처벌법이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이와 같은 법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산 증여와 관련해 로펌을 찾는 부모들 가운데 상당수가 효도계약서 작성을 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효도계약서란 재산을 증여할 때 효도 관련 조항을 문서화하는 것을 뜻한다. 상속에 대한 부모들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나타난 사회 현상이다.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한 뒤 노후에 돌아올 경제적 불안감을 미리 대비하겠다는 의미다. 최근 보건복지부의 2023년 노인실태 조사에 의하면 “재산을 상속하기 보다 재산을 자신과 배우자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여론이 24.2%가 나왔다. 복지부가 노인실태 조사를 처음 시작한 2008년 같은 질문과 비교할 때 보다 15% 포인트가 더 높아졌다. 상속에 관한 부모세대의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 결과다. 불효자 방지법 제정이 시대 흐름에 따른 대세로 가고 있으나 효와 불효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없지 않다. 효자의 효(孝)는 노인(老)을 자식(子)이 섬긴다는 뜻을 가진 한자 글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부모 공경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책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2

본격 논의되는 정년연장, 경제발전 동력으로

우리나라 정년연장의 논의는 저출산 고령화에서 출발한다. 정년만 두고보면 경영계와 노동계가 입장이 같을 수 없지만 지금 우리 사정을 보면 노사 모두가 정년연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50년 우리나라 총인구는 1550만명 가량이 줄어든 3600만명 선에 머물 것으로 예측됐다. 멀리 볼 것도 없이 2025년에 가면 전체 인구의 20%가 65세이상 고령자로 구성된다고 한다. 노동인력의 급격한 감소로 우리 경제의 활력은 갈수록 떨어질 것이 뻔한 일이다. 정년연장은 각계에서 꾸준히 문제 제기해 왔으나 최근 행정안전부가 공무직에 한해 정년을 최대 65세까지 연장한다고 밝히면서 정년연장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행안부는 현재 60세인 1964년생은 63세까지, 1969년생부터는 65세로 정년을 각각 연장한다고 밝혔다. 시설관리와 경비 등을 맡는 공무직에 한해 정년연장이 실시되나 정부 주도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정부의 다른 부처나 지방자치단체서도 공무직의 정년연장이 추가로 이어질 것이 예상된다. 국민의힘도 정년을 63세로 높이는 논의를 시작했다. 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이 정년연장을 주제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보았더니 찬성 여론이 50%를 넘어 정년연장 논의 자체에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저출생 고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는 우리나라에선 지금의 사회경제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년연장이 가장 좋은 선택의 길이다. 현 정부가 국민연금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연금 가입 상한 연령을 64세로 늦추고, 정년과 수급개시기가 맞지 않아 발생하는 소득공백 문제를 생각하면 정년연장은 더 미룰 수 없다. 정년연장 문제는 이제부터라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공공부문은 정년연장을 추진하고 민간부문에서는 기업의 부담이 적게 드는 쪽으로 검토돼야 한다. 정년을 조정하는 고용의 유연성을 기업에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본 등 정년연장을 이미 실시한 선진국의 사례를 잘 살펴 정년연장이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전기로 삼아야 한다.

2024-10-22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I가 명주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만 명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주는 소파 반대편 벽면을 차지한 스크린을 쳐다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I도 명주를 따라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스크린 속에 있었다.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었다. I는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명주에게 묻지 않았다. 명주가 DVD방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명주는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고 I는 그런 명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방에서 나온 명주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DVD방 주인이 음료수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명주는 I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좌우로 돌리며 비볐다. I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명주가 왜 이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명주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서로의 숨결을 잡아당겼다 불어 넣었다. 숨결은 체온 그대로를 서로에게 전했고 전해진 체온은 몸과 마음을 덥혔다. I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겨 담배 끝이 빨갛게, 회색으로 타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명주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새 담배를 꺼내어 다시 불을 붙였다. 영사기에서 나오는 불빛이 연기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사내의 모자와 얼굴만이 흔들리는 연기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했다. 사내는 아직 길 위에 서 있었다. 명주는 A 그리고 B와 함께 술을 마시고 오는 길이라 했다. 이것저것 말을 하다 보니 I이야기가 나왔다고. 명주, 네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야 해. B가 말했고 A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야. A가 다시 한 번 강조했고 A와 B는 I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해 명주가 마음을 정해야 한다고 명주를 몰아붙였다고 했다. 아니 니들이 왜 그래? 명주가 다시 물었고 A와 B가 우리는 동기니까, 명주 너를 아니까, 하고 대답했다. 지들이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좀 웃기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해? DVD방에 가기 전 I와 만났던 찻집에서 명주는 A와 B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I에게 물었다. I는 명주가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A와 B가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마음을 정했고 그 마음을 지금 말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이미 2주 전, I가 명주에게 고백을 한 그날 명주는 I에게 답을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인 건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I는 글쎄, 하고 대답을 했고, 명주는 I의 컵에 담긴 물을 자신의 컵에 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내 말만으론 네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겠지. 어두운 찻집 안이었지만 명주는 얼굴이 붉었다. 그런데 나 왜 불렀어? I는 애써 차분한 척 명주에게 물었다. 아니 걔들이 그러니까 살짝 화가 나는 거야. 이상하게. 그런데 걔들한테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그냥 니 생각이 나더라고. 우리는 뭘까 싶기도 하고. 명주는 I의 얼굴을 지나쳐 I 뒤로 보이는 창밖을 살피며 대답을 했다. 명주는 자기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째 나왔다는 사실을 알까? I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두고 있는 명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I는 들뜬 마음으로 나왔다. 명주가 먼저 연락을 해왔고, 찻집에서 만나자 했으니까.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너랑 나는 아닌 것 같다, 말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학생 회관 옆 벤치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이, 딱딱거리며 부딪혔던 앞니와 달고 따듯했던 명주의 타액이, 너 처음이구나 하고 웃으며 I의 뺨을 꼬집던 명주의 손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던 그날 밤이 I의 구애에 대한 명주의 성의 표시와 I의 객기가 만들어낸 한 차례 우연한 밤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영화보고 싶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놓으며 명주가 말했다. 영화? 지금 시내로 나가자고? I가 물었고 아니 그냥 DVD방에나 가자, 하고 명주가 대답을 했다. 좀 전에 마신 술이 깨버렸어. I, 네가 한 잔하고 싶다면 옆에 앉아 있어주기는 할게. 내가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런데 술이 깨고 나니 머리가 아프네. 어디든 들어가서 쉬고 싶어서 그래. I와 명주는 찻집을 나와 DVD방으로 올라갔다. 카운터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DVD와 영화 포스터를 번갈아 살피고, 인기 대여순위 1위부터 30위까지 제목을 읽어 내려가던 I 뒤에 서 있던 명주가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시작은 I가 집을 나오면서부터였다. 축제가 한창인 봄이었다. 학교 후문 가까이 방을 구했다. 시장에 가서 싸구려 레이온 이불을 샀다. 가스버너와 양은 냄비, 수저를 구했고, 라면 박스에 포장지를 입혀 책상과 밥상을 대신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축제와 같은 밤은 계속되었다. I는 낮에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학회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만났고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들, 새벽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끼어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다 흩어지는 모든 자리에 I가 있었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말들이 남아 있는 밤이면 자취방을 지나쳐 후문으로 들어갔다. 학회실로 들어가 책상위에 놓인 모둠일기에 그 말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괜한 짓을 했어, 다음 날이면 후회를 하곤 했지만 써놓았던 글을 지우거나 일기장을 찢지는 않았다. 뭐, 어쩌라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모둠일기가 네 일기장이냐? 선배들이 가끔 I에게 던지듯 말을 했다. 그렇게 많은 답 글이 달리는 일기장 보셨습니까? I는 선배들이 던지는 말을 그렇게 받아쳤다. I가 써놓은 글 아래로 여러 말들이 달렸다. 밤새 써놓고 방으로 내려간 뒤 아침에 등교를 하면 답 글이 쓰여 있었고, 거기에 답 글을 쓰고 수업을 듣고 오면 다시 답이 달려 있었다. 몇 번을 그렇게 주고받다 보면 격한 단어가 오고 가기도 했고, 때로는 동지를 만난 듯 서로를 향한 밝은 마음이 전해지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마무리는 술자리였다. I는 하루하루가 좋았다. 그 하루들 중 하루였다. 학생회관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I 앞에 명주가 와 섰다. 앉아도 돼? 명주가 물었고 I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와 크림빵 하나를 들고 앉은 명주가 무국에 말은 밥을 떠먹는 I를 바라보다 말했다. “참 단아해.” 하마터면 I의 입안에 있던 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네 글들 말이야. 글들이 단아하다고. 우연히 들른 학회실에서 책상에 놓인 I의 글들을 읽었다고 했다. 지난 1년간의 모둠일기를 모두 꺼내어 I 글만 찾아 읽었다고 명주가 말했다. I는 무어라 대답을 할지 고민했고 그러다 시간이 지났고 결국은 답을 하지 못했다. 크림빵을 다 먹은 명주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갔다. 명주는 약간은 허술해 보이는 듯한 행동들-이를 테면 강의실에 들어오다 강의실 문턱에 걸려 넘어지거나, 시험시간을 잘못 알고 들어와 앉아 있다든지, 종종 백팩의 지퍼를 열고 돌아다녀 동기들이 장난삼아 휴지나 빈 종이컵을 넣어도 모른 채 깡총거리며 달린다든지·로 인해 간혹 화젯거리가 되는 동기였다. 나사가 하나 정도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명주는 비웃음이나 비아냥보다는 재밌다는 이야기, 유쾌하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아이였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과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는 시원한 대답들이 어우러진 탓이었다. 모두들 명주와 함께 있는 시간들을 즐거워했다. I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학생 회관에서 만난 이후로 I는 명주와 이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거나, 강의실에서 마주쳐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은 이전과 같았지만 어감도 표정도 달랐다. 학회실 모둠일기에 글을 쓸 때에도 최대한 단아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잘 읽었어, 역시, 하고 명주가 답 글이라도 달아 놓는 날이면 I는 자신이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해 초여름, 햇볕 쨍쨍 내리쬐는 안동에 가본 적 있니? 라고 명주가 물었다. I는 대답 없이 명주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명주는 I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내일 안동 가자. 내가 도시락 싸올게. 다음날 둘은 기차를 타고 안동에 갔고, 버스를 갈아타고 햇볕 쨍쨍 내리쬐는 하회마을에 들렀다. 조용했다. 낮은 담을 양쪽으로 한 좁은 골목길에서 둘은 어깨를 스치며 걸었다. I는 명주의 손을 잡아볼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명주에게 들키기 싫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의 하얀 모래밭에 ‘명주와 I, 20세기가 끝나가는 더운 여름날 안동에 왔다 가다.’라는 글귀를 남겨둔 채 둘은 돌아왔다. 뒤풀이를 해야 한다고 명주가 고집을 부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 말해야 했지만 I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명주와 I가 들어간 곳은 I가 즐겨 들르던 호프집이었다. 여기 계란말이가 정말 푸짐해. I는 먼저 나온 생맥주잔을 명주의 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명주는 그래? 하하핫, 하며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학과 이야기, 책 이야기, 안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동아리 이야기도 했다. 명주의 동아리는 봉사 동아리였다. 봉사라는 것이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아주 세련되거나 아주 지독한 자기애의 산물이 아닌가 하고. 물론 애초에 동기가 무엇이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살기 좋게 만드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지.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야. 그냥 그 근원에는 자기애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지.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 숨어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자기만족, 뭐 그런 것이 근원적인 욕구가 아닐까. I는 뭔가 심오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했고, 명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I의 이야기를 들었고 I는 명주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건 서비스. 마른안주를 가지고 나온 호프집 사장이 보기 참 좋다, 라는 말을 테이블위에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I였다. 우리 사귈까? 명주는 생맥주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생맥주잔 바깥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다 이내 무거워져 아래로 흘렀다. 달싹거리는 명주의 입술을 쳐다보던 I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명주가 입을 열었다. 하하핫, 너 긴장하는 구나. 땀 좀 봐. 명주는 냅킨으로 I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생맥주잔을 들어 I의 잔에 부딪히고는 맥주를 마셨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친구지. 좋은 친구. “웃기네.” 그날, 명주는 수박씨를 뱉어 내듯 말을 뱉었다. 그때 I는 고개를 숙여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는 명주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I는 무엇이라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고, 고민을 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나가버렸고 어떤 답을 하든지 우습게 되어버렸다. 결국 I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있었다. 지하철 끊긴다며 명주가 일어났고 둘은 영화가 계속 비춰지는 스크린을 둔 채 그냥 나왔다. 둘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그해 가을 I는 휴학을 했다. 겨울에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명주는 학교에 없었다. I는 명주와 함께 갔던 DVD방을 찾아가 그해 가장 길었던 영화를 찾아 달라 말했다. 주인은 알 수 없다는 말과 거기에 딱 맞는 표정을 지었다. I가 영화 속 한 장면을 주인에게 설명했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한 명 있어요. 그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는데,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어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하니 그 사내가 서 있는 곳은 길의 끝이었던 것 같아요.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고 있었네요. 맞아요. 그랬어요.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0-22

“제주의 새들은 제주어로 울까”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최근 아르코에서 방언시 웹진을 만드는 ‘미디어 TEAT’을 지원하여 방언으로 작품을 쓰는 작가나 시인들에게 예산을 대폭 지원해 주고 있다. 지역 문인협회에서도 방언 시 공모와 시화전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2019년 제주도의 시인이자 작가인 현택훈이 쓴 ‘제주어 마음사전’(걷는사람)이 ‘아르코 문학나눔(2019)’에 선정되었다. 진솔한 제주어를 소재로 한 산문과 제주어를 소재로 한 시를 간곡히 담아낸 ‘제주어 마음사전’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 ‘우리는 가매기 새끼들이었다’에는 “가매기(까마귀), 간세등이(게르름뱅이), 강셍이(강아지), 고장(꽃), 곤밥(흰밥), 곰세기/곰수기(돌고래), 곱을락(숨바꼭질), 구젱기(소라), 귓것(쉬신), 굴룬각시(내연여), 궨당(친척), 깅이(게), ㄱ·대(조릿대), 내창(하천), 넉둥베기(윷놀이)”와 같은 뭍의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제주어를 섞어 시와 산문을 소개하고 있다. 제2부 ‘엄마는 한라산 용강에 묻혔다’에서는 “뉭끼리다(미끌어지다), 도댓불(등댓불), 돌킹이(부채게), 동카름(동쪽 마을), 두리다(어리다), ㄸㆍㄹ르다(따돌리다), 랑마랑(~하기는커녕), 막은창(막다른 골목), 모살(모래), 몰멩지다(숫기가 없다), 물보라(서귀포시 지역 지명), 물웨(물외), 버렝이(벌레)”와 같은 자연과 지명 이름 등을 소개한다. 제3부 ‘제주의 새들은 제주어로 울까’에서는 “베지근ㅎㆍ다(궁물이 맛있다), 보그락이(잘 부풀러 오름), 본치(상처가 낫은 흔적), 부에(화), 벤줄(벤귤), 생이(새), 솔라니(옥돔), 숙대낭(삼나무), 숨비소리(해녀들의 가쁘게 물속에서 쉬는 숨소리), 아ㄲㆍㅂ다(귀엽다), 아시아시날(그끄저께), 얼다(춥다), 엥그리다(낙서하다), 오몽ㅎㆍ다(열심히 몸을 움직이다), 오소록ㅎㆍ다(으슥하다)”와 같이 제주사람들의 심성과 마음의 울림이 담긴 제주어를 소개한다. 제4부 ‘오늘 밤에 나는 또 누군가의 꿈에 가서’에서는 “요자기(요전), 우치다(흐리고 비가 내리다), 웨삼춘(외삼촌), 이루후제(이후에), 조케(조카), 창도름(막창자), 출람생이(총랑거리는 이), 카다(붕이 붙어 타다), ㅋㆍ찡ㅎㆍ다(가지른히 고르다), 타글락타글락(터덜터덜), 퉤끼(토끼), 폭낭(팽나무), 할락산(한라산), 할망바당(수심이 얕은 바다), 허운데기(머리털), ㅎㆍ끌락(아주 작다)”과 같이 제주 토박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제주어를 소개한다. 이 책의 방언 자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웨(물외), 퉤끼(토끼), 할락산(한라산)”과 같은 음운론적 변이형들은 제주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뜻의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환산 이윤재 선생은 예측 가능한 음운론적 변이형인 전등어는 사전에 싣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허운데기(머리털), ㅎㆍ끌락(아주 작다)”과 같이 표준어와 형태나 조어 자체가 다른 형태론적 병인형인 각립어는 가능한 한 큰사전에 실어 표준어를 풍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표준어가 아닌 방언이지만 지역의 정서나 삶의 체험과 경험의 무늬가 남아 있는 방언은 매우 중요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AI 시대, 대형 클라우드 정보 저장과 처리가 가능한 시대인 지금이야말로 이처럼 소중한 문화유산을 일일이 조사하여 저장해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택훈의 제주 지명을 소재로 한 ‘솜반천길’이라는 시를 한편 보자.“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제주도 내창(內川)은 대부분 건천인데 흘러가는 내가 아닌 중간 중간 물이 고인 소(沼)도 있다.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에 이름 붙인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는 제주 자연이 남기고 제주 사람들이 명명한 제주어다. 제주사람들의 깊은 애정과 심성이 맑게 흐르는 물처럼 담겨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역 방언은 독특한 지역의 지식정보와 사람들의 마음이 새겨진 디지털 정보뭉치이다.

2024-10-21

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합스부르크 적통이자 오스트리아와 이베리아반도를 오롯이 손 안에 넣은 억세게 운 좋은 카를 5세지만 그는 전쟁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는 황금도 바닥을 드러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석양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 제국은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예수회를 만들어 반개혁을 단행하면서 원론적 신앙에 깊게 파고들어 개신교에 대항하는 수단을 병행했다. 로마교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매형이다. 어린 시절 카를과 폴로 경기를 함께한 친구이기도 했다. 카를 5세의 가톨릭 교권이 강성해지자 이를 우려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카를 5세가 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를은 그를 지원하는 자들의 부(富)를 마음껏 활용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금융가 큰손들과 고모 마르가레테의 힘을 이용해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카를 5세는 1520년 10월 22일, 그들의 지원을 받아 도이칠란트 황제 카를 5세로 아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마친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았다. 누나의 남편을 차마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적 프랑스를 도와준 로마는 그냥 둘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불만이 가득했던 3만명의 가톨릭 군사는 격렬한 기세로 로마로 진격했다. 스위스 교황 근위대 5000명이 하늘을 믿고 목숨을 건 방어에 임했으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일부 근위병만이 교황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톨릭 점령군은 3일간 로마를 약탈했다.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으며, 금은보화를 찾아 고문하고, 여자들은 강간했으며, 건물은 불태웠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간에 의해 로마가 폐허가 되는, 가톨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세계는 카를 5세의 기세를 꺾을 자가 없었다. 그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튀니지를 함락하고 서부 지중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이슬람이 서구 유럽으로의 진출을 차단한다. 프랑수아 1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선 역부족임을 실감해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두 앙숙 간의 오랜 갈등은 막을 내린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프랑수아 1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찬사를 받는다. 그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세상에 선보이게 했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모아 지금의 프랑스 루브르 재산으로 만든, 문예부흥에 앞장선 왕으로 찬사가 따른다. 카를 5세는 유럽을 호령하는 전대미문의 제왕이 되었지만, 또 다른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한 두 제국의 황제답게 종교개혁의 물살을 타는 개신교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하면서 이에 맞서는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농민반란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제국의 에너지는 소진되고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오랜 전쟁에 애국자 없다. 결국 1555년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휴전을 맺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해’로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면서 타협했다. 카를 5세, 매부리코에 길쭉한 턱과 아래턱이 튀어나온 합죽이인 까닭에 사람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입을 온전히 다물 수 없어 파리가 입속으로 들락거리자 콧수염을 길러야 했고, 턱으로 인해 늘 침을 흘려 소화기에 문제가 많았으며, 말년엔 통풍마저 찾아왔다. 그도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회의가 일었고, 결국 56세가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한 여생을 택한다. 아들 펠리페 2세(당시 식민지 필리핀은 펠리페에서 붙인 이름이다)에게 플랑드르 부르군트 공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식민지 통치권을 넘기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를 넘겨준다. 그리고 2년 뒤 억세게 운이 좋은 카를 5세도 1558년 9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끊임없이 진출을 노리는 오스만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치열하게 전쟁을 해야 했다. 헝가리로 진군하는 오스만제국군을 맞아 패하면서 도나우강 동쪽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온전하게 가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이로써 중부유럽의 기독교세계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역에 그들의 정통 가톨릭을 굳건하게 뿌리내림으로써 훗날 갈등의 씨를 뿌려놓았다. 악을 행하면서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파탄에 빠지면서 새로운 질서로 회복하는 악순환은 역사 이래 이어져왔다. 영혼의 부작용으로 태어나는 ‘악으로부터 도덕’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10-21

문학이 온다

21년 전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예창작과에 왔다. 원태연, 용혜원의 글과 판타지 소설 몇 권이 문학인줄 알았다. 첫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너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살면서 아무것도 되어본 적 없는 너는 시 안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너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동기들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도 학교 옥상으로 도망가 노을과 별의 시간까지 홀로 시를 썼다. 그러면 교수님도 너를 기다렸다. 어둑한 복도에 홀로 불 밝힌 연구실에 가 시를 보여드리면 애써 쓴 문장들에 빨간 줄이 사정없이 그어졌다. 할퀸 상처처럼 아팠지만 너는 그 상처가 좋았다. 그렇게 찢어진 마음에서 돋은 새살이 시가 됐다. 매년 겨울이면 ‘신춘병’을 앓았다. 우체국도 믿을 수 없어 원고를 품에 안고 추운 광화문 거리를 돌아다니며 신문사에 직접 투고했다. 원고를 내고 나면 가슴에 품어 키우던 새가 날아간 것 같았다. 새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엔 뼛속까지 아린 추위가 파고들었다. 심사평과 본심진출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건 너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면 눈물이 흘렀다. 너는 그걸 10년 넘게 했다. 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다. 사랑하면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공부를 더 하면 혹시 시를 잘 쓸까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외롭게 쓰면 결국 손에서 시를 놓칠까봐.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 재주가 없는데도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문예지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시를 잘 쓰고 싶어 평론을 썼더니 운 좋게 평론으로도 등단했다. 이십대에는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왕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서른 살이 되자 너는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어 달아났다. 달아날수록 시는 너를 더 잡아당겼다.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돈보다 시가 좋았다. 그래서 결국 돌아왔다. 집안 어른이 네게 말했다. 요리학원에 가서 음식을 배워 장사라도 하라고. 친구가 말했다. 문학이 돈이 되냐고, 너도 이제 네 앞가림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후배가 말했다. 형도 하상욱처럼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선배가 말했다. 시는 아무도 안 읽으니까 맛집 소개하는 글이나 쓰라고. 시인이라고 하니 모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환호하며 요청했다. 시 한 수 읊어달라고, 삼행시 좀 지어달라고. 그때마다 너는 문학을 한다는 게 괜히 죄스럽게 느껴졌다. 문학을 무용한 일이나 음풍농월쯤으로 여기는 세상의 무지와 폄하, 냉대와 오해에 마음을 다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너는 문학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졌다. 뭘 이룰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뭐라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 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시집과 평론집 등 열 권의 책을 낸 너는 문학연구자이자 시인, 평론가로서 쌓은 나름의 경력보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문학을 향유하는 삶이 훨씬, 확실히 ‘이룬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비전임 계약직 교원이지만 상관없다. 문학이라는 캄캄한 동굴 안에서 네가 더듬거리며 지나 온 시간들이 이제야 조금씩 환해진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이 걸어 나갈 길을 밝히면서, 네가 걸어 온 길에도 빛을 비춰주는 까닭이다. 세대는 달라도 문학이라는 영원 안에서 모두 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수업 시간을 너는 사랑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날, 오전에 너는 한 고등학교에서 윤동주의 시와 삶에 대해 강연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저녁에 너는 네가 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한강 작가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마음의 균형이 무너져 어쩔 줄 몰랐다.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너도 모른다. 고작 삼류 시인이자 무명 평론가지만 지금껏 문학을 놓지 않고 해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붙들고 온몸으로 나아가리라는 것, 너보다 더 문학을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문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뭉클했겠지. 감격에 겨운 너는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에서 구사한 독특한 2인칭 화법을 빌려 이 글을 쓴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문학’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오해 받지 않고 무시당하지도 않는 문학이 온다. 이미 왔다.

2024-10-21

고단함을 잊는 법

현생의 고단함을 느낄 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어릴 적 걱정 없이 즐거웠던 때로 잠시나마 돌아가 본다. 모래밭에 손을 묻고 두꺼비집 노래를 부를 때나 꽃이나 풀을 돌맹이로 짓이기며 소꿉놀이에 쓸 저녁 반찬을 만들 때, 나는 힘껏 내려가 있던 입꼬리를 다시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옅게 웃어 보일 수 있다. 삭막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현생이 괴로울 땐 이렇게 작은 구멍 하나를 만들어 잠시나마 어린 시절 추억 속으로 빠져본다. 그리고 퇴근 후나 주말이 되면 어린 시절 만끽했던 자유로운 일상을 꼭 즐기리라 다짐하며 다시금 타자기에 손을 올린다. 주말이 되면 어릴 적 즐겨 먹었던 불량식품들을 찾아 일부러 초등학교 앞 작은 문방구에 들린다거나, 계절마다 엄마가 조각조각 잘라주던 제철 과일들을 먹기 위해 마트로 장을 보러 간다. 어린 시절 사소한 습관부터 작은 기억까지 다 복기해보며 따라하다보면 삶의 지루함과 어려움에서 조금이나마 멀리 벗어나 볼 수 있다. 이렇게 나처럼 어린 시절의 향수로 물건을 구매하는 키덜트 족은 대략 십년 전부터 주요 소비자층으로 자리 잡았다. 키덜트족이란 키드(kid:아이)와 어덜트(adult:어른)의 합성어로 어른이 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분위기와 감성을 추구하는 성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퇴근길에 뽑기 기계 앞에서 동전을 한 가득 손에 쥐고 인형 뽑기에 열중하다 집에 가는 길에 작은 인형 하나 손에 들려 있다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기쁨과 만족감이 든다. 돈을 얼마를 썼거나 인형에 큰 의미가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기거나 철이 없다고 느끼진 않는다. 그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늘 나의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만족하다면 되는 것이다. 나와 같은 키덜트 족은 옷이나 특정 상품을 구매할 때에 물건의 사용 가치를 재고하는 것이 아닌 어린 시절 즐겨 보던 만화나 기억속 함께 커왔던 캐릭터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심리적 만족감을 채운다.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인 가심비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상품의 가격이나 쓸모, 가치 보단 주관적 마음의 만족감을 더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fun(재미)과 consumer(소비자)를 결합한 펀슈머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닌, 물건을 구매할 때에 재미를 추구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MZ세대 중심에서 시작된 펀슈머는 가격 대비 재미를 쫒는 이른바 ‘가잼비’를 추구하며 소비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의 경험을 중시한다. SPC 삼립의 대표 스터디셀러 제품인 정통 크림빵은 60주년 기념으로 기존 사이즈 대비 약 7배 정도 큰 사이즈로 ‘크림대빵’을 출시한 바 있다. 성인 두명의 얼굴을 가릴 정도로 점보 사이즈로 출시되었던 대왕 크림빵은 보자마자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커다란 사이즈에 이색적이었고 처음 출시됐을 때엔 품귀 현상까지 생겨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출시가 대비 약 2배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었을 정도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어 대왕 시리즈라 불리는 8인분의 양이 담긴 세숫대야 냉면, 팔도 도시락 8인분이 합쳐진 대왕 팔도 점보 도시락, 공간춘 대왕 짬짜면 등이 출시되어 가잼비와 가심비를 더한 상품들을 마트나 편의점에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상품들 모두 출시 전부터 화제성이 있었으며 출시되자마자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웃돈이 붙어 거래되었을 정도라니 익숙한 상품에 웃음 요소를 더한 상품이 현재까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덕분에 나는 더욱 즐겁게 마트나 편의점, 문방구 등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재미를 찾고 추억에 젖어 현실의 고단함을 조금 잊어볼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소비 습관을 보며 철없어 보인다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이 단순한 행위로도 작은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생의 즐거운 면을 조금이나마 추구할 수 있다면 다시금 어린 시절 반짝였던 두 눈과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이곳 저곳 쏘다녀볼 수 있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롭고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고단함을 잊는 법은 이렇게 단순하고 쉽다. 덕분에 새로운 한 주를 다시금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시원해진 가을 바람을 맞으며 운동화 끈을 꽉 매고 다시금 뚜벅뚜벅 걸어가본다. 이렇게 걷다 보면 고단함보다는 일상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2024-10-21

‘원전+재생e’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상청 기후통계분석 결과를 보면 지난 8월에 이어 9월도 기상 관측이래 가장 무더웠던 9월로 기록되었다. 1973년 기상관측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된 이후 올해 9월이 가장 높은 월 평균기온(24.7℃), 폭염일수(6일), 열대야 일수(4.3일)로 기록된 것이다. 더욱이 1973년 이후 9월에 폭염일수 자체가 기록된 연도는 올해가 유일하다. 이런 최악의 폭염을 겪고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말보다는 ‘올해가 어쩌면 앞으로의 여름 중 가장 시원했던 때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말이 더 와닿는다. 폭염이 한창이던 8월 29일 헌법재판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약칭,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1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조항에서 2030년까지만 감축목표(2018년 대비 35% 이상 감축)를 규정하고 이후 2050년 탄소중립 목표 시점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감축목표가 없어 미래세대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11.4% 감축율로 타 전환(45.9%), 건물(32.8%), 수송(37.8%), 농축수산(27.1%), 폐기물(46.8%) 부문보다 매우 낮았던 ‘산업부문’도 이제 급격히 높여야 한다. 이에 정부는 기존의 주력 에너지인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를 급격히 줄이면서도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위해 원자력발전과 재생에너지의 혼합을 약칭한 ‘원전+재생e’ 전략을 전환(발전)분야 핵심 감축대책으로 제시했다. 전환분야의 ‘원전+재생e’ 대책은 산업분야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온실가스 감축으로 글로벌 경쟁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고 새로운 감축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상당한 시간을 벌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 미래모빌리티, 디지털헬스케어, 반도체, ABB 등 전력 수요량이 매우 높은 5대 미래신산업을 집중 육성하고자 하는 대구시도 ‘원전+재생e’ 대책은 필수불가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30년까지 전력의 50%를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하는 목표를 세우고 태양광 발전을 대폭 확대해 왔다. 2020년 여름, 캘리포니아는 극심한 폭염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했지만, 태양광 발전이 저녁 시간대가 되면서 급격히 감소했고 ‘캘리포니아 롤링 블랙아웃’이라는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태양광 발전의 변동성 때문에 전력 수요를 충족하지 못했고, 예비 전력이 부족해 일부 지역에서 계획적인 정전을 해야만 했다. 이후 이런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해 태양광 발전에서 잉여 전력을 배터리에 저장해 부족 시 공급하고 원자력으로 전력수급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있다. 이렇게 원자력이 기저부하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신재생에너지가 추가적으로 탄소 배출 감소와 에너지 다각화에 기여하는 효율적인 ‘에너지 믹스 모델’ 즉 ‘원전+재생e’ 대책은 프랑스, 캐나다, 일본 등 많은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다. TK신공항조성과 반도체, ABB 등 첨단기업을 유치하여 ‘미래신산업 혁신’을 이루면서 ‘2050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대구는 ‘원전+재생e’라는 ‘에너지 믹스 모델’이 필요하다.

2024-10-21

비정상 소리

강길수 수필가 차의 타이어나 하체에 무엇이 끼었는지 살펴본다. 이상 없다. 엔진룸에도 달라진 건 없다. 한데, 달릴 때 뒤쪽에서 ‘웅….’하고 나던 비정상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유 램프가 들어와 주유하고 나니 상태가 나아진 듯했다. 집에 와 주차하려 후진하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왠지 뒤에서 뭔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도 났다. 평지여서 사이드 브레이크는 안 채웠다. 다시 차 쓸 날이 왔다. 불안해 뒤 트렁크를 또 열어, 차가 서면 관성으로 부딪힐 게 있는지 살폈다. 없다. 보닛을 열고 엔진룸을 더 자세히 보아도 정상이다. 부족해 보이는 부동액만 보충했다. 나갈 시간이 되어 시동 걸려고 키 1단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계기판에 빨간 사이드 브레이크 등이 들어왔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저께 텃밭에서 돌아오는 길 십여 킬로를, 그걸 건 채 차를 몰았다는 결론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출발할 때, 빨간 표시등을 본 기억이 없다. 운행 중 노란 주유등이 들어오는 건 보면서도, 옆 빨간등은 못 봤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조수석에 앉았던 아내에게 물어도 못 본 것 같다 했다. 추론을 해본다. 만약 표시등이 출발 때나 운행 시 안 들어왔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덜 푼 것이다. 뒷바퀴에 브레이크가 약하게 걸리니까, 주행 시 뒤쪽에서 ‘웅….’ 소리가 났을 테고. 또, 달리면서 마찰열로 브레이크 디스크와 패드 온도가 오르니 밀착도가 높아져 사이드 브레이크 등이 들어온 것이 된다. 그러고 보니, 그제 집으로 출발하려 사이드 브레이크를 왼발로 풀 때 뭔가 달랐던 느낌이 떠올랐다. ‘맞아. 그랬어! 덜 푼 거야’하고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귀납적, 연역적으로도 내 추론이 어긋나 보이지 않으니,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서 찜찜함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헷갈린다. 지금, 우리나라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치지 않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국의 대선 같은 국제정세와 북한의 한반도 2국 선언과 대남 전쟁 위협, 러시아 파병 등 시시각각 나라 상황이 변하고 있다. 따라서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의 살길과 나아갈 길을 찾아내야 할 정치권은 ‘방탄 국회’와 ‘대통령 탄핵’이란 비정상 소리만 붕붕거린다. 정상 국민이면 누가 봐도 ‘야당 대표 방탄 국회’가 국정을 볼모 잡고 있다. 또, 터무니없는 ‘대통령 탄핵’이란 괴질에 걸려 혹세무민하는 정치판이다. 부정선거란 망국적 괴물이 나라를 삼켜가도, 해결에 나서는 현역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달 4곳 보궐선거 역시, 대수의 법칙을 부순 부정선거란 통계적 증거를 G 박사는 제시하고 있다. 도대체 정치꾼들에게 나라, 국민, 정의, 진실, 사랑 같은 개념들이 있기나 한가. 국민은 부정 당선된 가짜일지도 모르는 정치꾼들의 거들먹거림에 헷갈리고, 분노하며, 절망한다. 부디 정치권이 스스로 나라 문제를 찾아 해결해 나가는 길,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는 길로 회심(回心)하여 제 몫을 다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4-10-21

누구를 위한 ‘방탄 정치’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여야의 ‘방탄 정치’가 격돌하고 있다. 여당은 야당의 ‘이재명 방탄’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의 ‘윤석열·김건희 방탄’을 공격한다. 양자의 공통점은 상대의 잘못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데 있다.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잘 본다.”는 점에서 똑같은 ‘바보들의 행진’이다. 방탄 정치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입법권력을, 그리고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집행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상대를 비판,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덮으려고 한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방탄이 아니라, 권력자의 개인적·당파적 이익을 위한 방탄이라는 점에서 후진적 정치의 전형이다. 이재명 방탄을 위한 민주당의 정치행태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협한다. 수사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와 재판담당 판사에 대한 탄핵겁박은 보통이고, 대통령 탄핵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청문회까지 열었다. 검찰수사 조작방지법·표적수사금지법·법 왜곡죄법 등을 입법하겠다면서 판·검사들을 협박한다. 특히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특검법 및 채 상병 특검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관계없이 계속 밀어붙여서 탄핵분위기를 고조시키고자 한다. 민생을 챙겨야 할 국정감사까지도 이재명 방탄과 대통령 부부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정부·여당의 방탄 정치는 검찰의 수사·기소권과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이 그 핵심수단이다. 야당의 ‘쌍특검법’에 대한 여당의 방탄 정치는 국민여론과 배치된다.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주가조작 및 공천개입 의혹 등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법에 대한 국민여론(전국지표조사, 9월 25일)은 찬성 65%, 반대 24%이며, 특히 보수의 텃밭인 TK에서도 찬성 58%, 반대 36%이다. 또한 채 상병 특검도 찬성 69%, 반대 21%(엠브레인퍼블릭, 7월 8일)로서 찬성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부인의 방탄을 위해 검찰수사팀을 교체하고 김건희 특검법에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자신이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서도 세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게다가 검찰은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와 주가조작 의혹에 무혐의처분 함으로써 공정성을 의심받고 있고, 청탁금지법은 있으나마나하는 법이 되었다. 공정과 상식을 역설한 대통령이 자신과 부인의 방탄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해충돌’이 아닌가. YS와 DJ는 정치9단이었음에도 대통령 재임 중 권력으로 자녀들을 방탄하지 않고 모두 구속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정치지도자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이미 지은 죄가 방탄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죄가 없다면 무죄판결을 받을 것이요, 죄가 있다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쪽팔리게 방탄하지 말고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라.

2024-10-21

제2의 서울 ‘TK특별시’ 출범절차 시작됐다

대구시와 경북도, 행정안전부, 지방시대위는 어제(2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구경북(TK)행정통합 합의문에 서명하고 본격적인 출범 준비절차에 들어갔다. 통합시는 2026년 6월 지방선거 직후 출범시키는 게 목표다. 합의문에는 행안부가 최근 대구시·경북도에 제시한 6개 중재안이 포함됐으며, 경북도가 지속적으로 요청한 ‘북부권 발전 대책’도 명시됐다. 경북도는 행정통합이 성사되면 북부권에 정부 행정기관과 공공기관 등을 유치해 새로운 행정타운을 형성시킨다는 구상이다. 쟁점이 돼 온 통합자치단체(대구경북특별시) 법적 지위는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위상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행정통합 성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TK특별시의 기능(경제·산업육성, 균형발전, 광역행정 종합계획 수립 및 총괄·조정·집행 등)을 강화했다. 시·군 자치권은 통합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특별시 청사는 기존 대구시청, 경북도청(안동), 포항청사를 그대로 활용하기로 했다. 청사 소재지에 따른 관할 범위는 별도로 설정하지 않았으며, 소재지별 지역 특성을 고려해 기능을 적절하게 배분할 예정이다. 특별시를 설치하기 위한 주민동의 절차와 관련해서는 충분한 의견 수렴을 전제로 대구시의회와 경북도의회가 찬반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범정부추진단과 함께 특별시 출범을 위한 후속 절차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대구경북 권역별 설명회와 토론회 등을 거쳐 특별법안이 완성되면, 시·도의회 동의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투표를 선호하는 상당수 경북도의원들에 대한 설득작업이 필요하다. 더 큰 고비는 특별법안의 국회통과다. TK지역이 서울특별시와 같은 법적지위를 가지는 데 대해 타지역 국회의원들이 흔쾌히 손을 들어줄지는 의문이다. 다만, TK행정통합이 소멸위기를 겪는 비수도권 지방정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고, 부산·경남과 호남권, 충청권에서도 통합논의가 있는 만큼 특별법 국회통과가 그렇게 비관적이진 않다.

2024-10-21

‘우주 패권’ 향해 달리는 중국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2028년에 시작해 7년간 우주정거장 운영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사람을 태운 탐사선을 달에 보낼 것이다. 이 프로젝트와 더불어 국제 달 연구기지도 건설할 계획이다.” 중국과학원 부원장 딩치뱌오의 호언장담이다. 미국과 ‘우주 패권’을 다투는 중국의 천문학적 투자와 인력 집중이 주목된다. 중국은 다가올 2050년엔 미국에 앞서는 우주 강국을 만들겠다는 장기 계획을 공공연히 말한다. 실제로 중국은 1주일에 한 번씩 우주를 향해 위성을 발사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효율적인 위성 통신망 구축을 위해 추진 중인 ‘천범성좌 계획’에 의하면 중국은 올해 108개의 위성을 쏘아 올린다. 향후 2025년에는 648개, 2030년까지는 총 1만5000개 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G60 성좌계획으로도 지칭되는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 광대역 네트워크 범위를 제공하고, 6G 연결로 전환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지구를 넘어 우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은 두 나라의 미래 경쟁력에 주목하는 여타 국가들의 주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태양과 지구의 상호 역학작용을 풀고, 외계 생물체 탐색에 나설 예정이다. 10년 안에 세계 최고의 우주 망원경을 궤도로 내보낼 것”이라는 중국의 발표는 당연지사 우주 패권을 두고 다투는 미국을 긴장시킬 듯하다. 현재 미국은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트럼프건, 해리스건 미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설 사람은 ‘누가 우주의 주인인가?’를 놓고 중국과 다퉈야 하는 숙제까지 안을 게 분명해 보인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0-21

고령자 근로시대에 맞는 고용정책 나와야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는 이미 5명 중 1명은 60대 이상 고령자다. 60세 이상 고령자가 늘면서 그들의 취업도 자연스레 증가세에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60세 이상 취업자는 최근 5년간 30% 이상 증가했고, 비중도 22%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년 기준으로 제조업에 근무하는 60세 이상 근로자 수가 20대 제조업 취업자 수를 앞질렀다. 60세 이상 근로자가 20대보다 앞선 것은 지난해 처음 있었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면서 고용시장도 급변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청년층의 제조업 기피 현상 등이 지속되면서 60세 이상 고령자 취업은 앞으로 더 증가할 것으로 전망이 된다. 또 산업계 역시 실질적 고용가치가 있는 60세 이상 고령자 채용을 선호하는 조사 결과도 많이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대한상의가 설문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정년퇴직한 고령 인력채용 이유”에 대해 응답한 기업의 59%가 “기술과 경험이 풍부해 뽑는다”는 대답을 했다. 이는 청장년 인력을 채용할 수 없어서(27%) 보다 높은 응답률이어서 기업들의 고용관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또 최근 대구상의가 40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60세 이상 근로자 고용현황 및 인식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제조업, 비제조업 구분없이 응답 기업의 80%가 60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대답했다. 또 고용 이유에 대해서도 “숙련된 기술과 풍부한 경험”을 가장 많이 꼽았다. 60세 이상 근로자 채용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지금도 60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한 기업에 대해 고용지원금 등의 특혜를 주고 있으나 좀 더 다각적이고 큰폭의 지원책 마련이 필요하다. 특히 중소기업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주어 부족한 제조인력을 고령자로 대체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대구상의 조사에서도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을 확대해 달라”는 요구가 가장 많이 나왔다. 60세 이상 근로자의 계속 고용이 중소기업의 인력운용의 실질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정부가 고령자 근로시대에 맞는 지원책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2024-10-21

여론조사가 항상 민심은 아니다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진 여론조사가 나왔다. ‘여론조사 꽃’의 10월 둘째주 조사에서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가 19.2%였다. ‘잘못하고 있다’는 무려 4배가 더 많은 80%였다. 지난주 한국갤럽조사에서는 지지율이 22%로 나왔으니, 큰 차이가 없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여론조사꽃’ 발표는 표본오차가 ±3.1%다. 6% 정도 차이는 차이도 아니다. 그렇지만 ‘10%대’라는 상징이 주는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여당에서조차 “10%대면 심리적 탄핵 상태”라는 말이 나온다. 여론조사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차 범위를 명시해 놓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그게 ‘여론조사 꽃’이어서 뒷말이 나온다. ‘여론조사꽃’은 김어준 씨가 TBS(교통방송) 뉴스 진행을 그만두고,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면서 만든 여론조사 업체다.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총선 때 부산 해운대 갑 여론조사를 해 민주당 홍순헌 후보가 50.9%, 국민의힘 주진우 후보가 41.8% 나왔다며, 홍 후보와 전화를 연결해 응원했다. 일주일 뒤 선거 결과는 주 후보 53.7%, 홍 후보 44.61%였다. 일주일만에 뒤집힌 걸까. 지난 16일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여론조사꽃’은 민주당 김경지 후보가 40.9%로 국민의힘 윤일현 후보(37.7%)를 오차범위 안에서 앞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윤 후보가 61%를 얻어 김 후보를 무려 22%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열흘 사이에 이렇게 뒤집혔을까. 영부인 김건희 여사와 주고받은 문자를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명태균 씨도 여론조사를 무기로 삼았다. 그가 여직원에게 전화로 여론조사 수치 조작을 지시하는 듯한 녹음이 공개됐다. 그는 선거 때 수시로 윤 대통령 부부와 전화와 문자를 했다고 주장했다. “(나를 구속하면) 한 달이면 (윤 대통령이) 하야하고 탄핵일 텐데 감당되겠나. 감당되면 하라고 할 것”이라고 큰 소리쳤다.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이 구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김 여사가 보낸 문자를 공개했다. “우리 오빠 용서해 줘, 무식하면 원래 그래, 지가 뭘 안다고”. 그러면서 김 최고위원이 방송에 나오면 매일 새로운 문자를 공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 최고위원은 바로 방송출연을 중단했다. 이 명 씨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 접근하고, 귀를 잡은 수단도 여론조사다. 여론조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오늘 만난다. 가장 큰 논점이 김건희 여사 특검이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63%가 찬성했다. 이게 여론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원전을 할 건지 말건지, 국민연금을 몇 %나 올릴 건지, 온갖 사회적 이슈를 여론조사로 물어본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조사한 여론인가. 심지어 명 씨는 “나한테오면 3개월이면 대통령 만든다”라고 큰소리쳤다. 정당 공천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 다른 요소가 있어도 여론조사가 결정적 힘이다. 오차 범위 안의 차이라도 승패가 갈라진다. 총선 때 여론조사는커녕 가장 정확하다는 출구조사도 맞힌 적이 없다. 그런데도 정확한지 여부는 불문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는 여론조사로 단일화했다. 국회의원 후보는 물론 대통령 후보까지 여론조사가 결정하는 세상이다. 후보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 사람은 다수에 잘 휩쓸린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다른 사람이 하는 건 나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명품 가방을 다른 나라보다 비싸게 팔아도 오픈런 하는 이유다. 선거 때는 여론조사에만 관심이다. 여론조사에서 우세를 보이면 ‘밴드웨건 효과’가 나타난다. 열세 후보 지지자는 지레 투표를 포기하기도 한다. 사표(死票)를 만들지 않으려는 심리다. 그럴수록 여론조사가 엄정해야 한다. 낮은 응답률, 균형이 맞지 않은 표본은 가중치를 조정한다. 이걸 ‘마사지’라고 부른다. ‘마사지’가 조작의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석 달이면 대통령을 만드는 바람몰이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조작술에 민주주의를, 나라의 운명을 맡겨놓을 수는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10-20

세금 먹는 하마된 과기부 산하 국립과학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관리 운영하고 있는 대구, 부산, 대전 등 전국의 5개 국립과학관이 제구실을 못하면서 예산만 까먹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국정감사에서 제기됐다. 국민의힘 이상휘 국회의원(포항 남·울릉)이 과기부로부터 제출받은 국감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소재한 5개 국립과학관의 방문객 수가 최근 5년새 30.4%가 감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중앙과학관이 42%로 가장 많이 감소했고, 국립대구과학관도 40%나 감소했다. 국립대구과학관의 경우 2019년 44만명이던 방문객 수가 작년은 26만여명으로 줄었고 올 현재는 17만여명 선에 그치고 있다. 부산과 광주 등도 비슷하다. 반면에 5개 과학관의 인건비 지출은 같은기간 평균 19%가 늘어났다. 또 과학관의 전체 예산 1270억원 중 자체수입 비중은 10.4%에 불과하고 대부분 예산을 정부 출연금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립중앙과학관은 자체 수입 비중이 겨우 5.8%다. 과기부가 지역에 과학관을 설립한 것은 국민의 과학적 소양을 높이고 과학문화 확산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지역에 설립된 과학관은 방문객 수가 줄고 인건비는 증가하면서 자체 수입은 늘지 않는 비효율적 구조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과기부는 포항, 울산, 원주 등에도 신규 국립과학관 설립을 추진 중이다. 이 의원은 “과학관 스스로가 차별화된 콘텐츠를 갖추지 못하면서 또 하나의 과학관 설립은 나랏돈을 먹는 하마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했다. 국민의 과학기술 보급에 관한 인식을 높이고자 설립한 과학관을 목적에 맞게 운영하기 위해선 과기부와 지자체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 특히 지역에서 운영되는 과학관은 지역 미래산업과 교감하는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해 전시 운영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과학관 스스로가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많은 예산을 들여 과학관을 설립한 취지가 반감한다. 포항에 추진될 국립과학관은 타 지역과는 차별화된 과학관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국립과학관은 국민의 세금에 의존하는 비효율적이고 구태한 방식의 운영 체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바란다.

2024-10-20

기록의 힘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지난 10월 10일 목요일 저녁 경북대 교수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큰 경사가 났음을 안다. 한강 소설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놀라운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몇몇 단톡방이 그 소식으로 시끌벅적하고, 나도 늦게나마 축하 대열에 합류한다. 오래 살다 보니 정말 좋은 일이 생기는구나, 하는 소회(素懷)가 절로 일어난다. 한강의 수상을 축하하는 많은 댓글 가운데 “노벨 문학상을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다니 참 기쁩니다!” 하는 문구가 인상적이고 유쾌하게 다가온다. 내가 진행하는 청도 인문학 화요(火曜) 강연회에 오랜만에 얼굴을 내보인 참가자는 환한 얼굴로 말한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함께 기뻐하고 싶은데, 여기가 제일 좋은 곳 같아서 왔어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인문학 강연 초기에 빠지지 않고 나오다가 영어 회화 공부 시간과 겹친다는 이유로 장기간 결석한 인물이다. 그날은 영어 회화 수업도 빠진 채 우리와 동석한 것이었다. ‘21세기 한국 대학의 문제점과 대응 방안’에 관한 강연을 마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던 차 어느 날인가 한국 교육 방송(EBS) 유튜브에 반가운 얼굴이 나온다. 1996년 만 26세 앳된 얼굴의 한강 소설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과 청바지 차림의 청춘 한강이 ‘문학기행-한강의 여수의 사랑’이란 제목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나는 ‘그래, 역시 기록은 대단한 거야!’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1994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한강은 1995년 3년 정도 여수에 머물면서 창작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 당시 나온 한강의 첫 번째 소설집 제목이 ‘여수의 사랑’이며, 표제작의 제목 역시 ‘여수의 사랑’이다. 한강은 ‘여수’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포착한다. 문자 그대로 물이 아름다운 고장 ‘여수(麗水)’와 여행자의 우수인 ‘여수(旅愁)’를 떠올렸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여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두 여인 가운데 ‘자흔’이란 이름에 한강이 부여한 자취와 흔적이란 의미도 단순하지 않다.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인간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이름 자흔. 이미 이 지점에서 스물댓 살 난 젊은 작가의 인식과 사유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교육 방송 ‘문학기행’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한강의 소설 ‘여수의 사랑’이 아니라, 거의 무명에 가까운 앳된 소설가의 처녀작에 눈길을 주고 그녀와 소설을 기록으로 남긴 대목이다. 우리는 지금과 여기, 그리고 미래를 향한 열렬(熱烈)한 욕망으로 나날을 살아가기 일쑤다. 돌아봄이 불가능해진 광속(光速)의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돼버린 게 아닌가?! 그런데 교육 방송이 만든 28년 전 기록으로 우리는 시간 기계(타임머신)라도 탄 것처럼 과거의 여수와 한강을 만나는 것이다. 오늘의 한강을 가능하게 한 지난날의 한강을 돌이켜보면서 시간과 기록의 힘을 재삼재사 확인한다. 기록을 우리 일상의 일부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2024-10-20

오늘 윤·한 회동… 위기정국 해법 나올까

오늘(21일) 오후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만난다. 다만 한 대표가 요구한 독대가 아닌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면담 형식으로 회동이 진행된다. 두 사람 간 분위기가 어색하고, 김건희 여사 문제 등과 관련한 논의 의제가 민감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정국위기의 분수령이 될 이번 회동의 핵심의제는 김 여사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 대표는 지난주 당 지도부 회의에서 김 여사 문제와 관련해 3가지(대외 활동 중단, 대통령실 인적 쇄신, 의혹 규명 절차 협조)를 공개적으로 요구했었다. 여권 안팎에서는 이번 회동에서도 한 대표가 윤 대통령에게 이 3가지를 수용해달라고 거듭 요청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밖에 의료위기와 관련, ‘여·야·의·정 협의체’ 출범과 의·정 갈등 관련 부처 책임자 경질 등도 논의테이블에 오를 전망이다. 한 대표는 의대 증원을 둘러싼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정부의 유연한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한 대표가 의료 개혁 실무 책임자인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 경질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번 회동의 주된 관심은 윤 대통령이 한 대표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지에 쏠리고 있다. 만약 이번 회동이 아무 성과없이 ‘빈손’으로 끝난다면 민심은 악화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대부분 20%대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다. 민심이 여기서 더 떨어지면 당·정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친한(친한동훈)계는 민주당이 지난 17일 재발의한 ‘김건희 특검법’ 표결과 관련해 “3대 요구사항이 수용되지 않으면 추가 이탈표 단속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특검법 통과 여부는 윤 대통령에게 달렸다”고 압박하는 상황이다. 그동안 김 여사 문제 대응과 관련해 대통령실과 여당이 조율은 했겠지만, 두 사람은 이번 회동에서 민심의 무서움을 공유하고, 쟁점의제에 대해 반드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2024-10-20

반곡지가 아프다

우정구 논설위원 경북 경산시는 저수지 수가 전국에서 8번째로 많다. 300군데 이르는 저수지 가운데 1800년대 이전에 조성된 곳만 19곳이나 된다. 저수지 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하여 자라 이름이 붙은 남산면의 자라지는 1725년 영조 2년에 조성된 못이다. 지금은 저수지로서 용도가 퇴색해 일부는 관광자원으로, 일부는 시민 산책로 등으로 활용되는 곳도 많다. 경산시에서도 역사와 문화, 경관 등이 뛰어난 저수지 10곳을 선정해 관광 명소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남산면 소재 반곡지는 그중에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저수지다. 1903년 조성된 이곳에는 수백년 된 왕버들 20여 그루가 터널을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왕버들이 저수지에 반영(反影)된 모습에서 시골의 정취와 삶의 여유로움을 느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봄에 피는 복사꽃 풍경 또한 환상적이다. 2011년 문체부가 사진찍기 좋은 명소로 선정했고, 2013년에는 행안부 선정의 우리마을 향토자원 베스트 30선에도 뽑혔다. 드라마 대왕의 꿈, 아랑 사또전과 영화 허삼관 등이 촬영된 곳이다. 대구를 찾는 방문객이면 누구나 한번쯤 가고픈 곳이다. 안타깝게도 반곡지 저수지에 부영양화 현상이 일어나 저수지 위에 떠있는 개구리밥으로 인해 왕버들의 반영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부영양화 현상은 생활하수나 농축산 폐수 등의 유기물질이 유입돼 일어난 수질 오염 상태다. 전국적 명소로 소문난 곳에 수질오염 문제가 생겼으니 당국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지역의 대표 명소에는 이름에 걸맞은 정성과 숨은 노력이 필요하다. 반곡지의 명예 회복을 서둘 때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0

저작권료는 저작자의 목숨줄

유영희 작가 강의에 사용할 작품을 찾기 위해 여러 책을 찾아본다. 그중에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있다. 학창 시절에 배운 작품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작품도 많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교과서나 참고서에서 만나면 오직 시험공부의 대상이라는 생각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이 들어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성인을 위한 글쓰기 강의에서 교과서 작품을 인용하는 이유다. 중고생 참고도서도 본다. 그런데 몇 년 전 청소년 참고서에 실린 글의 저자 P 씨를 만난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체를 하니 그는 자기 작품이 사용된 줄 전혀 몰랐다며 깜짝 놀란다. 그 참고서를 낸 출판사는 내로라하는 국어교육계 교사들이 편집진으로 참여하는 곳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며 함께 통탄하고 안타까워했다. P 씨가 그 출판사에 저작권료 요청을 하지 않겠다고 바로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보면서 미리 알려만 줬으면 저작권료를 안 받는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갑자기 이 기억이 소환된 것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작품이 교과서에 11곳 사용되었음에도 저작권료를 한 푼도 못 받았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한강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저작권료를 지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특이한 저작권료 지급 방식 때문이다. 저작권법 제25조 1, 2에 따르면, 공개된 저작물은 초중고등학교를 위한 교과용 도서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출판사는 저작권료를 작가에게 직접 지불하지 않고 저작권법 제25조 6에 따라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문저협)에 지급하면 문저협에서 작가에게 지급한다. 왜 이런 방식을 채택했는지 궁금해서 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를 검색해보니, 저작자 권리보호 및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사단법인으로서 2000년에 설립되어 문학예술 저작물의 저작(재산)권리를 신탁받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는 국정 한 가지이지만,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검정, 인정으로 구분되어 발행하고 고등학교 교과서만 해도 11종이나 된다. 이렇게 많은 교과서에서 자기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을 것을 생각하고 조사할 작가는 없을 것이다. 작가들은 자기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는지 모르고 있으니, 알아서 청구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문저협이 작가에게 적극적으로 통보하지 않으니,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문저협이 저작권료를 중간에서 착복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이번에 한강의 작품에 저작권료가 문제되자 문저협은 “한강 작가의 연락처를 몰라서 저작권료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급하지 않은 저작권료가 104억 원이나 된다니, 지급받지 못한 작가가 한두 명이 아니다. 문저협은 저작자의 생계와 직결되는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는 것이 더 책임 있는 태도이다. 작품을 사용하는 출판사가 작가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을 의무화하는 방법도 있겠고, 문저협이 저작자 명단을 확보하는 방법도 있겠다. 저작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우리 문화 발전에도 꼭 필요한 일이다.

2024-10-20

유압 설비의 유지와 개선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처음 제철소 현장 견학을 하면서 입을 못 다물 정도로 깜짝 놀란 것이 열연공장에서 압연하는 모습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판이 가열로에서 나와 이송 롤을 타고 쿵쿵쿵하고 이동하여 거대한 소리와 함께 압연기에 압착되어 밀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후 물과 증기를 사방으로 내뿜으면서 압연기와 철판이 부딪치는 굉음이 몇 차례 반복되더니 어느 순간 길이가 길어지고 천둥과 같이 우르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의 태엽처럼 말린 제품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심장을 울리는 듯하다. 이렇듯 시뻘겋게 달구어진 철판을 고객이 원하는 두께로 압연하는 과정에서 설비 제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유압이다. 유압의 기본원리는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이 발견한 것으로 밀폐된 공간에서 가해진 압력은 유체의 모든 방향으로 균등하게 전달되며 그 힘은 동일한 압력에서는 면적에 비례하여 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전달 할 수 있어 산업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며 수리공장에서 자동차를 들어 올리는 리프트나 건설 현장의 중장비 항공기 렌딩기어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된다. 유압 장치는 강력한 힘 전달과 부드러운 움직임을 통한 정밀한 제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비압축성 유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누유로 인한 주변환경 오염이 발생되고 온도가 낮으면 유체의 점도의 증가로 분자들이 느리게 움직여 서로 더 강하게 결합하게 되어 유체 흐름에 저항이 생겨 작동이 느려지며 온도가 너무 높으면 유체의 산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등 온도에 민감하고 화재에 취약한 단점이 있다. 그래서 유지관리가 어려우며 가장 중요한 것은 청결과 온도이다. 청결에 있어 첫째는 유압유의 청정도 관리로 각 부에 설치된 필터의 정기점검과 오일의 주기적 교체 공기와 수분의 차단이다. 둘째는 유압 기기와 주변을 깨끗하게 하여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먼지나 이물이 혼입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현장에 가 보면 제일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주변의 먼지나 이물로 인해 부품의 마모나 손상으로 성능이 저하되고 시스템 과열로 작동 불량이 발생하거나 고장과 가동 중단이 발생하게 된다. 또 다른 유지관리의 핵심은 유체의 적정한 온도관리이다. 유압유의 온도가 높으면 점도가 낮아지고 유압유의 윤활 성능이 저하되며 마찰과 마모가 증가하여 펌프 밸브 실린더 등 주요 부품의 손상이 발생된다. 고온이 지속되면 유압 부품의 열팽창과 고무와 씰 류의 열화로 이어지며 유압유의 산화가 가속화되어 슬러지나 바니시와 같은 찌꺼기가 발생하여 시스템 내부에 쌓이거나 필터를 막아 밸브의 작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생산 현장의 유압 설비는 고장이 없어야 생산과 품질 모두 확보되며 작업자도 부담 없이 일을 할 수 있다. 많은 현장에서 작동에 문제가 없다고 관리를 소홀히 하여 큰 고장이나 화재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았기에 청결과 온도의 중요성을 잊지 말고 실천하기를 권장한다.

2024-10-20

문경시, 한반도 교통의 중심지로 급부상한다

신현국 문경시장 문경시는 2024년에 이른바 한반도 교통의 중심지로 급부상할 전망이다. 오해 11월 개통을 목표로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고속철도는 완공 시 운행구간은 성남시 판교에서 종착역인 문경까지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수서로 이어지는 구간까지 연결되면 문경에서 수도권까지 1시간 9분 내에 접근이 가능해 진다. 문경은 예로부터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는 교통요충지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나 경상도에서 충청도 또는 멀게는 한양으로 향하는 보부상들의 주된 통행로였다. 문경은 또한 문경새재 즉 조령을 비롯해 하늘재, 이화령 등 굽이굽이 고개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길의 고장인 문경은 예로부터 타지역과의 접근성이 좋아진 데 비해, 상대적으로 관내 지역 간 이동을 위한 교통여건은 매우 열악한 상태이다. 문경시는 이에 따라 읍·면지역간 도로 개설 및 확·포장, 위험도로 정비, 도로 선형개량 등을 통해 지역 내 주민들의 이동에도 안전성과 편의를 도모할 계획이다. 먼저, 국토교통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추진 중인 국가지원 지방도 32호선인 문경시 농암면 화산리에서 사현리까지의 도로 선형개량 사업을 벌인다. 이는 농암면 사현리를 시작으로 터널 1개소, 교량 3개소를 포함 총길이 5.36㎞의 도로 2차로 시설개량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에 소요되는 사업비는 약 427억원으로 현재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이 추진 중이며, 2025년 하반기 착공 예정이다. 다음은 경북도에서 추진 중인 ‘문경~산북간 도로건설공사’이다. 지방도 923호선 중 문경읍 갈평리에서 산북면 가좌리 구간을 연결하는 도로 건설 사업이다. 사업량은 터널 포함 총길이 2.8㎞이며, 총사업비는 약 290억원이다. 현재 실시설계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2024년 하반기 착공을 앞두고 있다. 다음으로 경북도에서 추진 중인 ‘국도 59호선 문경 대상지구 위험도로 개량공사’를 들 수 있다. 현재 국도 59호선 중 산북면 대상리와 대하리 구간은 산북면 행정복지센터와 일반 상가 밀집 지역인 면 소재지를 통과하고 있다. 이 때문은 매일 주·정차 차량 등으로 인한 교통혼잡과 상습체증 등의 교통불편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 교통혼잡 해소를 위한 해법으로 면소재지 중심과 시청 소재지, 동로면과 단양군 등지로 향하는 차량을 분리 통행시키는 것이 최대 현안 과제로 대두하고 있다. 시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회전교차로를 포함하는 총길이 2.66㎞의 우회도로를 개설할 계획이다. 총사업비는 약 118억으로, 현재 보상 협의 진행 중이다. 마지막으로 시에서 추진하는 ‘지역연계 도로(단산터널) 개설공사’이다. 문경읍 당포리와 산북면 석봉리 사이에 있는 단산(해발 956m)을 터널로 통과하는 총길이 1.98㎞인 사업이다. 이 사업은 지난 2008년 사업 승인 후 양방향 진입로를 준공하였지만, 이후 국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인 터널 공사가 진행되지 못한 채 현재까지 주민 숙원으로 남아있다. 문경시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2023년 국비 100억 원을 확보해 현재 실시설계 중이며 올해 말 착공을 목표로 추진중이다. 문경시는 집중적으로 도로개설·정비에 역점을 두고 단계를 밟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들은 문경시의 발전을 위해 중앙부처, 경북도, 시가 함께 힘을 합쳐 이뤄낸 성과로써 지역 간 이동 거리 단축과 교통처리 능력 개선을 통해 주민 불편 해소 및 교통편의 증대, 물류비용 절감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 이와 더불어 문경새재 권역과 계곡, 천년고찰과 경천호반이 있는 산북·동로 권역으로 분리된 관광지를 하나로 연결해 대부분 1일 관광에 그쳤던 관광 형태가 1박2일 이상의 체류형 관광으로 변모시킨다.

2024-10-20

여기서 마음껏 ‘아프다가’

아프다가 담 밑에서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손가락 두 마디만 한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한강,‘조용한 날들’ 전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오늘의 첫 대출 도서는 한강의 소설 ‘흰’이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서점가는 물론 도서관의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한강 작품 찾아 읽기, 혹은 다시 읽기, 더해서 한강 작품 모아 읽기 등의 태그를 달아도 될 만큼 가히 노벨상 특수라 할법하다. 한강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시인이기도 하다. 작가의 등단 시는 ‘문학과 사회’에 실려 있는데 이후 발표된 시들을 모아, 한강은 첫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2013)’를 발간한다. 소설을 쓰는 중에 시를 써왔던 것들을 모아 출판한 것으로 작가에게 시와 소설의 경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한강의 시와 함께 소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특히 한강의 시편들과 소설인 듯 시인 듯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흰’과‘하얀 돌’의 색채 이미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실상 같은 돌이다. 마치 흰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에필로그처럼 읽히니 말이다. 이처럼 작가의 시적인 비유와 묘사의 문체, 색채 이미지는 한강 작품이 호소하는 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작가의 문체는‘눈’같다. 작품 속에 ‘눈’의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 것은 하나의 서사전략이다. 이미지는 감각에 의해 선취되는데 주로 시각 이미지에 집중되어 전개된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작가의 망설이는 듯한 느린 발화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조용히’그리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결코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는 발화는 있을 수 없다. 이희정 시인 “오래전 그녀는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모래를 털어낸 뒤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가끔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속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지는 않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흰’에서‘흰 돌’부분) 작가는 무겁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말한다. 환부에 흰 연고를 바르고 흰 거즈를 얹는다고 훼손된 부위가 복원되기는 어렵다. 복원할 수 없는 세상보다 복원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촉각이 스며 있다. 고통과 상처의 촉각, 사랑의 촉각, 찢어지는 목소리의 촉각, 소리 없는 소리의 폭력이 감추어진 폭설의 촉각처럼 말이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작가의 인터뷰에서)

2024-10-20

울릉군의 A 의원의 ’오보’ 발언...‘울릉도 대중교통 운송사업의 재정지원’ 조례 관련

김두한 기자 울릉군의회가 발의한 ‘대중교통 운송사업의 재정지원’에 관한 조례에 대해 A 의원이 5분 발언을 통해 설명하면서  본지 기사를 ‘오보’라고 했다. ‘오보’ 발언은 본지가 지난 2022년 KBS가 조사 보도한 경북 도내 시·군 대중교통 버스 지원금에 대한 보도 자료를 인용했다.   당시 KBS는 버스 1대당 지원금이 영덕군 1억 4938만 원, 청도군 1억 3658만 원, 영양군 1억 3434만 원 등인데 울릉군 8054만 원이었다.   울릉도는 경사도로, 잦은 낙석 등 도로파손, 해풍으로 인한 차량훼손 등으로 버스의 내구연한이 짧아 육지보다 오히려 더 많이 지원해야 하지만 최하수준이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가 단순비교라 ‘오보’라는 것이다. 5분발언 뿐아니라 보도자료 등 몇 차례걸쳐 ‘오보’라고 했다. 울릉군이  5000만 원을 지원했다고 기사를 썼다면 버스회사를 편들기 위한 악이적  ‘오보’다.   단순비교라는 A 의원의 발언이 울릉도 도로사정을 감안 차량 내구연한이 짧아 더 지원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비교가 안 된다고 발언했다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보’관련 내용은 육지는 새벽 일찍시작, 저녁 늦게까지 버스를 운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육지는 많이 지원하지만, 울릉군지원이 많아 단순비교가 안 된다는 뜻이다.   오보는 지차하고 그렇다면 과연 단순비교가 안 된다는 발언이 맞는 말일까. 차량은 이유를 불문하고 운행거리로 비교하면 가장 공정하다. 경북도 내 군부 농어촌버스 평균 운행시각은 대체로 오전 6시~오후 8시로 울릉군과 별차이 없다. (각 군부 지자체 홈페이지 참조) 영양군과 비교하면 영양군 평균 1대당 운행 거리는 260km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울릉군은 섬 일주 버스를 기준으로 평균 235km이다. 하루 25km정도  차이는 있지만, 영양군 지원금 1억 3434만 원과 울릉군 8054만원은 단순비교라도 울릉군 지원이 적다.  내구연한을 따지면 비교도 안된다.  기초지자체 의원의 발언은 모두 녹음이 되고 기록해 역사로 남는다. 따라서 ‘오보’ 지적에 대해  반드시 바로잡아야한다. 근거 없는 ‘오보’ 주장은 의원의 인격 문제다.   어떤 근거로 단순비교가 안 된다고 발언했는지 더욱이 역사에 남을 ‘오보’ 발언을 했는지 이해가 안된다.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마음대로 발언해도 된다는 뜻인지 묻고 싶다. 특히, 울릉군민이 위임한 권한으로 특정해 한 풀기씩 발언을 하면 안 된다. A 의원의 군민을 위한 귀중한 5분 발언이 근거없는 ‘오보’ 지적때문에 오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

2024-10-20

텃밭지킨 한동훈…이제 당내 리더십 강화를

10·16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각자 텃밭을 지켜냄으로써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격전지로 떠오른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를 진두지휘하며 승리를 따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부산을 7차례나 찾는 등 정치생명을 걸다시피 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막판까지 조국혁신당, 진보당과 치열한 3파전이 펼쳐진 전남 영광군수 재선거에서 이겼다. 한 대표와 이 대표가 총력전을 펴면서 이번 선거는 온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여야 대표 중 한명이 텃밭에서 패배했다면 당내 리더십이 크게 추락할 수 있었다. 여러 악재에도 텃밭 두 곳을 모두 지켜낸 한 대표로선 이제 당내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이 대표도 이번 선거에서 ‘호남 대안 정당’을 내건 조국혁신당을 누르고 호남지지세를 재확인한 성과를 냈다. 한 대표는 개표 후 “국민 뜻대로 정부여당의 변화와 쇄신을 이끌 것”이라고 밝혔듯이, 지금부터 본격적인 여권 정비에 나서야 한다. 국민 시선은 이제 내주 초로 예정된 윤석열 대통령과 한 대표의 독대자리로 옮겨가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가 향후 ‘윤·한 갈등’의 향방을 가를 수도 있다. 한 대표는 이 자리에서 의료위기 해법, 김 여사 문제, 대통령실 인적 쇄신과 관련한 민심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전달해야 한다.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의 핵심 당사자인 명태균씨가 연일 윤 대통령과 김 여사에 대한 폭로를 이어가면서 당내 친윤·친한계가 극심한 갈등을 겪는 것도 한 대표가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숙제다. 일부 친윤진영의 방송패널들은 한 대표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다. 이런 내분(內紛)상황에선 민주당이 어제(17일) 재발의한 ‘김건희 특검법’ 국회 처리과정에서 4표 이상의 추가이탈표가 나올 소지가 다분하다. 한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 확인한 보수지지세를 바탕으로, 앞으로 강력한 지도체제를 구축해서 당을 조기에 안정시켜야 한다.

2024-10-17

포항 성매매 업소 폐쇄, 늦었지만 마땅한 조치

본사 취재팀이 구 포항역 일대에서 성업 중인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실태를 보도(8월 6일자 등 5회)한 이후 관계당국이 대책회의를 처음 열었다. 경북경찰청은 지난 8일 경북경찰자치위원회와 포항시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포항북부경찰서에서 성매매업소 근절을 위한 대책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성매매 집결지 폐쇄 TF(테스크포스)를 구성하는 등 성매매 집결지를 폐쇄한다는 데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앞으로 TF팀을 통해 집창촌 실태 조사와 성매매 종사자 지원조례 제정 방안도 모색하고 구체적 대응을 위한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했다. 구 포항역 일대에서 성업 중인 성매매 집결지는 포항시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고 도시재생사업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특히 여성인권보호 차원에서 진작 폐쇄 문제가 논의됐어야 하나 만시지탄의 감은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폐쇄를 위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폐쇄 논의가 폐쇄로 이어지기 위해선 많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무엇보다 난관을 넘기 위한 경찰과 행정기관의 강력한 의지가 중요하다. 대구시의 성매매 집결지인 속칭 자갈마당이 폐쇄된 사례와 성매매방지특별법 시행 후 전국 여러 곳에서 폐쇄 조치가 성공한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구시 자갈마당 폐쇄 조치는 2019년 그해 대구시 최우수 시책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지역의 숙원과제가 해소된 데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구 포항역 일대 성매매 집결지 해소는 자진 폐쇄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다. 경우에 따라 경찰 등 사법기관이 나서 강제 폐쇄에 나서야 하나 성매매 업소 종사자와 보상 등 적지 않은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 특히 성매매 업소 종사자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도록 하는 재활 대책도 잘 마련해야 한다. 포항의 성매매 집결지 폐쇄는 늦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조치다. 사법기관과 행정이 지혜를 모아 원만히 해결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지역사회도 이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2024-10-17

삼성의 가을 야구

우정구 논설위원 가을 야구는 정규시즌이 끝난 후 진행되는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를 포함한 개념이다. 정규시즌이 끝나는 시기가 9월 말에서 10월 초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을 야구란 이름이 붙었다. 특히 가을 야구가 관심을 끄는 것은 단순한 경기가 아니고 팀과 팬들로부터 성과를 평가받는 무대란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마치 축구선수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처럼 선수들에겐 팬들의 이목을 모으기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프로야구가 대중의 인기를 끄는 요소로는 몇 가지 있다. 팀의 연고지가 정해져 있고 내가 좋아하는 선수와 팀이 분명하다는 것은 중요한 요소다. 거기에 구단의 팬 서비스와 응원문화가 팬들의 감성을 사로잡고 있는 것도 인기 이유다. 또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다. 가을 야구는 정기시즌 결과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초기화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극적이면서 예측 불가능한 장면이 유독 가을 야구에서 자주 연출되는 이유다. 그만큼 긴박하고 긴장감 넘치는 경기가 많다는 뜻이다. 관중 또한 경기보는 재미가 크다. 한국 프로야구의 전통 명가이자 대구경북 연고팀인 삼성라이온즈가 플레이오프 1, 2차전을 승리로 이끄는 등 선전을 거듭하면서 역대급 기록을 세우고 있다. 삼성 홈구장인 라이온즈파크는 올해 30회 연속 매진 기록과 함께 전국 구장 최초로 시즌 100만명 관중 돌파를 기록했다. 요즘 대구시민에게 최고의 화제가 삼성 야구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집집마다 온통 삼성 야구로 화제의 꽃을 피운다. 대구시민이 야구로 이렇게 즐거워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다. 한국시리즈를 향한 삼성의 질주에 팬들의 박수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17

대구를 음악도시로 만들 수는 없을까?

신광조​​​​​​​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도시에서 과학기술이 ‘밥’이라면, 문화예술은 ‘반찬’이다. 살 맛 나는 대구를 위해, ‘음악도시 대구 만들기’를 제안한다.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은 뮤직 시티다. 컨트리 음악의 세계적인 수도다. 트럼펫 연주가 루이 암스트롱은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시 재즈 카페가 배출한 스타다. 유럽의 도시는 고전에서 현대음악까지 화려하다. 빈은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음악 본향이다. 런던은 록과 팝의 심장부다. 비틀즈는 리버풀 항구 야간무대에서 실력을 닦았다. 파리는 샹송과 재즈의 도시다. 로마는 오페라의 전당이다. 일본의 시즈오카현 서부 하마마츠시는 야마하가 풍금제작소를 설립한 이래 음악과 인연을 맺어왔다. 야마하에 이어 악기제조업체 카와이의 본사도 왔다. 하마마츠시 건물들은 악기를 형상화 한 것이 많다. 야마하, 키와이, 스즈키의 후원으로 개최되는 ‘하마마츠 국제음악 콩쿠르’는 전도양양한 뮤지션 등용문이다. 음악교류사업으로 아시아대표 음악문화도시가 되었다. 음악산업과 음악의 이미지를 살린 자동차 산업 그리고 관광활성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공자는 인(仁)은 시(詩)로 시작하고, 예(禮)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된다고 하였다. 자존심 강한 대구를 개성을 조화시키며 통합하는데 음악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연극의 4요소는 관객·배우·무대·희곡이다. 음악진흥전략을 펼치려면, 시민들이 음악을 사랑해야 되고, 무대가 있어야 하고, 훌륭한 음악가가 있어야 하고, 미친 기획자가 있어야 한다. 개별자들이 조금씩 손해보고 힘을 합쳐 기적 같은 큰 성과 창조가 음악도시 대구 만들기다. 2005년 5월, 서울 시청 앞 잔디광장은 서울시민을 살만하게 했다.‘조용필 콘서트 장’으로 탈바꿈하여 나이 지긋한 커플들이 ‘친구여’를 따라 불렀다. 많게는 10만원이 넘는 조용필 티켓 공연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모인 5만 시민 모두가 행복했다. 뉴욕 시민의 가장 큰 자부심은 센트럴 파크에서 열리는 보석같은 음악 공연을 무료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가나 재단들의 통 큰 후원금과 기획력 덕분이다. 뉴욕 사람들은 담요와 피크닉 가방을 들고 나와 귀한 공연을 공짜로 누릴 수 있다. 센트럴파크와 뉴욕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가을 청라언덕이 보이는 야외 언덕배기에서 임윤찬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면 대구시민은 기뻐 눈물을 흘리고, 많은 국민은 대구로 발길을 향할 것이다. 피아노 연주 전 대구가 낳은 세계적 소프라노 강혜정이 ‘별’과 ‘고향의 노래’를 소년소녀합창단과 같이 부르면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서로 힘만 합치면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니다. 대구 도심지 전통의 동인초교와 종로초교는 도심공동화 현상으로 큰 규모의 교사(校舍)가 텅텅 비어 있다. 빈 교실 활용, 시민들 사랑받는 ‘시민예술촌’을 조성하자. 문화예술 교육은 어린이만 받는 것이 아니다. 성인 어른들이 색소폰 등 악기를, 그림 데생을, 글짓기 문학을 배우면 된다. 공예품 만들기는 부업도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도시다운 문화도시 대구가 탄생할 것이다. 대구 시민들은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대구 시민을 단합과 화합으로 이끌며, 이미지 제고로 지역경제를 활력 넘치게 할 것이다.

2024-10-17

지금의 시대정신(時代精神)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한 시대의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을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독일 철학자 헤겔이 처음 사용한 말로, 그는 인류 역사의 어떤 시대이던 간에 그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절대적인 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각 시대마다 역사적 배경, 문화적 변동, 사회적 변화 등과 관련하여 그 시대를 지배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철학, 예술,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표출된다는 것이다. 2024년 지금, 우리사회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라야 하는가? 일제강점기에는 나라의 독립이 시대정신이었고, 해방 이후 제5공화국까지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당면한 과제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한국의 시대정신은 포용과 다양성, 기술혁신과 인간성의 조화, 지속가능한 환경, 사회적 정의, 글로벌 시민의식, 정치적 성숙과 같은 가치들을 바탕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치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정국의 정상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정치권은 도무지 정상이 아니다. 입법부의 다수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국정을 마비시키고 사법부를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를 벌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종북주사파들이 주축이 된 야권은 애초부터 타협이나 공조의 대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 대표의 사법리스크와 문재인정권 적폐에 대한 수사로 궁지에 몰린 야권·좌파 세력들은 활로를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성질 고약한 놈이 장기를 두다가 외통수에 몰리면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장기판을 엎어버리는 것처럼, 지금 야권이 짜낸 사법리스크를 모면하기 위한 전략도 아예 국정의 판을 엎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조기에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을 당할 만큼 중대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사실이 없다. 그래서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약한 고리’로 보는 김건희 여사다. 문재인 정권 때부터 법무장관들이 윤석열을 검찰총장직에서 내쫓으려고 탈탈 털었던 것도 김 여사였다. 김 여사의 신중하지 못한 언행이 여러 가지 빌미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과연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중대한 사유가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물러설 야당이 아니다. 기왕에 판을 뒤엎기로 작정을 한 이상 무슨 짓이든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경제든 안보든 위기가 닥쳐 국정파탄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래야 윤석열을 끌어내리고 이재명이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안중에 나라와 국민 따위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교통질서를 위해서 교통법규의 준수가 필요하듯,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법치가 바로 서야 한다. 검찰과 사법부가 제 기능을 다해서 사법정의가 실현되면 부화뇌동하는 민심도 안정과 상식을 회복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절실한 시대정신이다.

2024-10-17

섬나라가 되어버린 한국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지난 15일 정오쯤에 휴전선 철책에 막혀있던 경인선과 동해선의 북쪽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고 합동참모본부에서 밝혔다. 북한이 남북 연결선인 길을 파괴하여 육로로 이어갈 수 있었던 평화의 길을 없애 버린 것이다. 작년 말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한을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고 선언한 뒤부터 북한의 낌새가 이상하게 감지되었다. 올해 5월과 7월에 동해선과 경인선의 철도 레일과 침목을 제거하였고 9월부터는 남측과 연결되는 도로와 철도를 끊어버리고 방어축성물을 쌓으려는 의도가 보여 긴장하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그 두 곳의 도로 옆에 나뭇잎 지뢰 등을 매설했었다. 상호 우발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 측에 통지문을 발송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서로 걸어서 왕래할 수 있는 길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있는 통로만 남아있는 꼴이다. 이렇게 남북한 군사분계선이 통행 불가로 강화되었으니 우리 남한은 섬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우주에서 찍은 밤의 지구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는 한반도가 아니고 북한 쪽이 까맣고 남한만이 밝은 불빛으로 빛나서 섬처럼 보여진다. 우리는 외국을 ‘해외’ 즉, ‘바다 건너’라고 말하듯이 외국을 가려면 반드시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야만 된다. 차로써 또 걸어서는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외국이라는 개념이 너무 멀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엔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국경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다. 첫 유럽 여행할 때였다, 버스를 타고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도중에 작은 마을에서 잠시 버스가 서고 운전기사가 군인인 듯한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차 안을 한번 힐끗 보고는 버스를 출발시켰다. 가이드가 알렸다. ‘스위스로 넘어왔다’고…. 그냥 길을 잘못 들어 지방 경찰에게 묻는 줄 알았는데 국경 검문소였던 것이다. 유럽은 이제 유럽연합(EU)이 되어 하나의 국가처럼 화폐도 통일하여 더욱 국경 개념이 없어졌고,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를 지날 때도 우리나라의 톨게이트 같은 곳에서 잠시 내려 걸어가면 국경 통과, 쉽게 다른 나라로 넘은 것이었다. 북한 때문에 섬 아닌 섬나라에 살아온 탓에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했던 나를 깨우쳐 주었다. 물론 옆 나라와 싸우고 있는 경우는 그렇지 않겠지만 다른 나라를 걸어서 넘어간다니 얼마나 신기하랴. 휴전선 철책으로 한 민족이 사는 호랑이 모양의 반도를 갈라놓아 오고 가지 못하는 비극의 나라, 장자(莊子)는 ‘형제는 수족과 같아서 끊어지면 잇기가 어렵다(手足斷時 難可續).’고 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등으로 형제가 좀 가까워지나 했는데, 뭐가 틀어졌는지 4년 전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쇼를 벌였고 최근에는 폐기물 풍선을 남쪽으로 날려 보내는 등 다시 억지를 부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등으로 시끄러운 세상이 끝나면 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까지 가보고 싶다. 아! 400㎞ 길이의 답답한 작은 섬나라 한국, 유라시아를 달리는 아시안하이웨이의 꿈은 언제 이루어질는지….

2024-10-17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미안함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속보〕노벨문학상에 소설가 한강… 한국 작가 최초 수상.” 지난 주 10일 저녁, TV를 무심히 보고 있는데, 자막으로 뜬 뉴스 속보를 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나도 몰래 크게 손뼉을 쳤다. 옆에 있는 손자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더니, 저도 일단 같이 박수를 쳐준다. 그러면서 묻는다. 할머니 왜? 할머니 왜요? 우리나라의 한강이라는 소설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상을 받는대. 우리나라 소설가가, 그것도 여성이, 또 그것도 젊은 나이의 소설가가…. 흥분된 마음에 믿기지가 않아 스마트폰으로 검색 확인했다. 몇 개의 속보가 같은 문장으로 떴다. 그 속보 아래에 생전 해보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다. “오늘 같이 기쁜 날이 또 있을까요?” 그날 밤 위덕대 이정희 교수와도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로서의 기쁨을 문자를 주고받으며 설레는 밤을 잠 못 이루며 보냈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정말 몇 년만에 형님이 전화를 주셨다. 올해 85세의 손윗시누님이시다. 깜짝 놀라 받으니 하시는 말씀이다. “한강 소설가가 노벨상을 받는다니 참 얼마나 훌륭하고 장한 일인지, 자네도 좋제? 문학 공부하는 자네가 생각나서 전화해 보네….” 이렇게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모처럼의 기쁜 소식에 한마음이 되었나 싶다. 누군가는 벼락같다고 하고, 누군가는 지구가 흔들렸다고 하고 심지어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는 “세상이 꼭 발칵 뒤집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무어라 더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기쁘고 떨린 가슴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진정이 안 된다. 온 나라가 한강을 알고 많은 세계인이 그의 소설을 읽으려 할 것이니 어찌 흥분되지 않으랴. 그러면서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얽힌 작은 에피소드를 떠올리니 몹시 무안해진다. 2017년 여름, 미국의 브링검영대학교에 초빙교수로 가게 되었다. 연구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미국대사관에서 면접을 봐야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 비자를 못 받을까 조마조마했다. 대기실엔 2~30명이 넘는 면접 대기자가 있었고, 여러 칸의 창구 너머엔 남녀 면접관들이 있었다. 여성면접관과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내 이름이 불렸고, 바람대로 여성면접관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인사하고,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미리 얘기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전공을 물었다. 한국문학, 고전문학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녀는 대뜸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이지? 당황해서 되물었고, 한강의 소설을 얘기하는 걸로 곧 알아차렸다. 2016년, 영국에서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그 책을 아는 것 같았다. 그즈음 나는 책을 사긴 했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 다 읽진 못한 상태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몇 페이지만 읽었고 그 이유는 재미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요란하게 손을 저어가며 꽤나 많은 얘기를 했다. 다는 못 알아들었지만 분명히 들린 말, 똑똑히 기억하는 말은 “불편했어요.(uncomfortable!)” 나도 그렇다고 냉큼 대답하며 마주 웃었다. ‘채식주의자’는 미국에 가져가서 다 읽은 후 거기에 사는 한국인 소설가에게 선물로 주었다. 갖고 있을 걸 그랬나 싶다.

2024-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