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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등록일 2025-09-15 16:11 게재일 2025-09-1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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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학 변호사

‘직시(直視)보다 왜곡(歪曲)에 편승하기. 신념은 깡다구의 결과물. 최고의 날라리가 되어볼까. 생각을 멈출까. 눈먼 사람은 밤과 낮이 없거든. 그렇게 굳히기 한판의 삶. 앞니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찬란하지 않더라도. 기어코 개겨볼까, 몰라, 젠장.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그러나 사랑이 독약(毒藥)이라해도.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이 해독제인 걸, 나라 사랑 말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출처. ‘이우근 시인과 박계현 화백의 포항 메타포’ 경북매일신문)

시인 이우근의 시, ‘눈먼 자들의 도시’ 전편이다. 왜곡된 나라 사랑에 대한 이토록 통렬한 관찰이 있었나 싶다. 시인은, 제목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노벨 수상작)’에서 빌려왔음을 자작 시평에서 고백한다. 눈먼 자들이 들끓는 도시가 시인의 맑은 눈을 통하여 직시된다. 눈먼 자들의 하울링이 시인의 가슴을 헤집는다. 눈먼 자들의 신념은 처연하다. 막걸리 술판의 김치 한 조각 안주에서 묻어난 이빨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그들은 막걸리 묻은 입술에서 신념을 토해낸다. 쏟아져 나오는 말을 듣는 자도, 이해하는 자도, 사실은, 아무도 없다. 공허한 하울링. 몰라. 젠장. 그냥 개겨보는 거지 뭐.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사라진 그 자리는 정치가 대신할 거라 예언했다. 교회당과 절간에 다니던 사람들이 길거리 정치판으로 쏟아져 나온다. 정치가 신의 자리를 대신한 풍경이다. 한순간에 모든 사람이 시력을 잃는 기묘한 사건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시인의 손끝에서 이 시대의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시인은, 이념과 아집에 눈먼 자들의 폭력과 욕망을 꿰뚫어 본다. 공동체의 파괴를! 도덕적 양심과 이성적 통찰의 상실을! 그들의 말과 몸짓을 개떼의 하울링에 은유한다. 시인이 표현한 개떼는 ‘집단적 실명’이다. 정치적 극단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은 세상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눈을 감는다. 이렇게 실명한 자들은 단순한 선악, 음모론적 사고, 적 아니면 동지라는 흑백 구도를 맹종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돈 속에서 확실성을 갈망하는 인간의 불안을 달래주는 달콤한 독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사람을 소환한다. 실명을 치료하는 약은 결국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그래 사람이지! 사람이면, 사람을 사랑해야지, 나라 사랑 말고. 시인의 마지막은 늘 사람이다. 시인의 시 ‘똥개’ 전문을 감상해 보자.

‘나는 존재 밖이다. 태생의 한계를 직감하고 능동적으로 가장 낮은 곳을 안다. 나는 똥개. 나의 유전자의 본질. 대문 앞의 경계의 삶. 차가운 공기 먼 산, 그림자와 새벽의 안개는 나의 이웃. 그 무엇이 나의 적인가 아직 몰라서 조그만 인기척에도 나는 짖는다. 다만 짖지 않으려 한다. 침묵은 스스로 자처해야 온전히 얻을 수 있다. 밥그릇에 비가 내린다. 그리하여 주인공 없는 삶.’(출처 ’개떡같아도찰떡처럼‘ 이우근)

똥개는 침묵하고 싶다. 어찌하면 침묵을 온전히 얻을 수 있을까.

/공봉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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