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Carl Jung)의 ‘페르소나(Persona)’는 라틴어로 ‘가면’을 뜻한다. 페르소나는 ‘타인에게 보여주는 나’이자, 사회 속에서 나의 여러 역할을 상징한다. 직장인, 연인, 친구, 부모···. 이러한 각 관계마다 우리의 얼굴은 다른 가면을 쓴다. 내가 착용한 가면은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진짜 나’를 점점 억압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가면을 진짜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다. 가면에 억눌린 진정한 자아는 ‘그림자(shadow)’로 밀려나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분노와 질투, 열등감의 형태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그림자로 밀려난 나의 자아가 형성한 것 중 ‘질투’가 있다. 질투는 타인의 존재 앞에서 드러나는 자기 결핍의 자각이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불편해지는 이유는, 내 안에 그것을 향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를 깊게 쓴 사람은 질투를 강하게 느낀다. 겉으론 완벽한 척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불안’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이 바로 질투의 연료인 셈이다.
질투를 떠올릴 때, 우리는 불안과 부끄러움을 함께 경험한다. 불안의 연료를 태우고 피어나는 질투라는 연기는 우리에게 부정적 감정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만든다. 이런 질투 감정을 다르게 맞이하게 해준 사람이 시인 기형도이다.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입속의 검은 잎, 1989)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질투가 삶을 살게 하는 힘이었다니! 질투는 가면이 깨질 때 나는 소리이며, 아픔 속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자아이다. 질투가 병든 감정이 아니라, 나의 참모습임을 기형도는 자신의 입속의 검은 잎을 통하여 말해 주었다. 그렇다! ‘질투는 나의 힘’이다. 내가 다시 일어나서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게 해주는 그 무엇인 셈이다. 질투를 온전하게 내 것으로 긍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질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명절을 지내고 나면 보통은 무기력증에 빠진다. 그 무기력증의 상당 부분은 질투로 소비한 감정의 후유증 때문일 수 있다. 간만에 만난 지인, 친척, 친구들이 늘어놓은 자랑질로 인하여 온통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력증이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질투의 감정이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마음껏 질투를 하자. 불안을 태우지 말고, 이제는 질투를 연료 삼아 태우자. 아래는 ‘질투는 나의 힘’의 전문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니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굿바이 형도!
/공봉학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