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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正見)과 무명(無明)

등록일 2025-10-27 17:05 게재일 2025-10-28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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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봉학 변호사

이데올로기란, ‘세상을 바라보는 틀’ 또는 ‘어떤 사회나 집단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신념의 체계’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사고의 틀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렇게 봐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안경’인 셈이다.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부자는, 노력과 능력의 결과물이고, 사회주의적 관점에서의 부자는, 불평등의 구조적 결과물이다(물론, 전적으로 그렇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보는 관점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데올로기가 문제 해결의 참고 사항 정도로 활용되면 매우 유익하게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확고한 소유가 되면 삶이 파괴될 수 있으며, 사회 전체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가치나 신념 체계로 등극하게 되면 그 사회 역시 파괴될 수 있다. 이렇듯 이데올로기는 ‘검의 양날’이다. 이데올로기는, 필요할 때 한 번씩 좋은 곳에 사용하는 것이지, 평생 소유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에 대하여 2500년 전 위대한 처방을 내린 사상이 있다. 불교의 팔정도 정견(正見)이 그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바른길이 팔정도이다. 그중 첫 번째가 정견이다. 정견은,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그 이데올로기를 알되, 나의 견해로 정착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바른 견해이다. 견해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그것이 정견이다. 견해에 집착하여 내 것임을 고집하면, 그 견해로 인하여 평생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팔정도의 통찰이다.

내 것으로 소유되고, 집착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이데올로기는 망상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망상이 된 이데올로기는, 진리라는 이름의 도덕적 독약이요, 위험한 칼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데올로기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 경고했다. 견해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 즉, 연기(緣起)의 첫 번째인, 무명(無明)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두꺼운 장막이 처진 방 안에는 빛이 들어올 수 없다. 오직 어둠뿐이다. 생각을 절대화한 사유의 부재는, 빛을 잃고 어둠 속에 빠지기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헛된 망상(이데올로기)에 빠져,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태우고 고통에 허덕이게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름 최고라 자부하는 지성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망상에 빠져 평생을 허우적거리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다.

평온하고 지혜롭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당장 견해를 내려놓으시라. 나름의 개똥철학, 정치적 견해, 종교적 견해. 이것들이 이데올로기란 망상일 수 있다. 숭배하지 말자. 망상에서 벗어나자. 그것이 좀비가 되지 않는 길이다. 무명의 골방 방문을 열고, 정견의 넓은 마당으로 나가자. 어둠을 뚫고 빛이 찬란한, 열린 세계로.

/공봉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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