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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보이지 않는 힘들이 남긴 흔적

도시는 거대한 정원이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표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투와 걸음걸이, 눈빛과 손짓까지 일정하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마치 오래전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든 몸들이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신기하다. 이 질서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누가 이런 거대한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것일까. 나의 정원은 세상이 나에게 준 것인가, 내가 만든 것인가. 정원의 이름은 대체 누가 지었을까. 생각해 보라. 우리의 하루를. 출근길의 걷는 속도, 회의에서의 말투, 아이를 대하는 태도, SNS에 올리는 사진을 고르는 취향까지. 어찌 이리도 서로를 닮았을까. 수많은 목소리와 시선이 심어놓은 작은 표지판들, ‘이렇게 행동하라!’ ‘이렇게 살아라!’ ‘이 정도는 이루어야지!’ 이러한 표지판의 글들은 누가 새겨 놓은 것일까. 표지석 문양은 화석이 되어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떤 거부감도 없다. 세상이 우리를 부르기 오래전부터 세상은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어떤 이름의 결을 따라 걷고, 어떤 무늬대로 웃고 울며, 어떤 방향의 바람을 따라 호흡한다. 마치 스스로 선택한 길처럼. 하지만 그 길은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발자국이 먼저 닿아있었던 길. 학교의 규칙, 가족의 질서, 사회가 붙인 여러 이름들···. 이 모든 것들이 메아리가 되어 우리의 귓속을 통과한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지나가는 거대한 수면이다. 인간의 몸 위로 지나가는 규율의 물결, 일상의 가장 가벼운 동작 속에서 켜지는 감시의 눈빛,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얇은 칼날의 윤곽들. 이것은 산맥처럼 웅대한 것이 아니라, 안개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만질 수 없지만 습기처럼 피부 아래 들어와 몸의 방향까지 결정한다. 우리는 자신을 만들었다고 믿지만, 정작 우리를 만든 것은 알 수 없는 흐름, 규범의 물결, 습관의 온도, 오랫동안 축적된 시간의 회전들이다! 생각해 보라. 매일이 그렇지 않은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 사소한 표정, 걱정이 스며드는 방식까지. 모두 보이지 않는 힘들이 남긴 흔적들이다. 우리는 오래된 이름들의 질서 속 정원에서 태어나고, 그 정원으로 스며든 바람의 규율 속에서 자라났다. 보이지 않는 힘들이 나를 지나가고, 나는 그 힘들을 지나간다. 학교는 우리를 ‘학생’이라 부르고, 국가는 우리를 ‘국민’이라 부른다. 기업은 ‘근로자’를, 가족은 ‘가장의 역할’을 부른다. 이러한 부름에 대한 저항은 성경의 원죄처럼 여겨진다. 저항? 웃기고 있네. 기꺼이 응답한다. 새벽에 잠에서 깨는 순간 창문으로 스며드는 냄새, 벗어놓은 옷의 주름, 책상 위에 흩어진 빛의 조각- 무엇하나 내 의지로 온 것이 없다. 어디선가 왔다가 잠시 머물다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들. 바람은 여전히 분다. 나는 바람과 이름 사이 틈새에 빛나는 흔적일 뿐. ‘보이지 않는 힘의 흔적들’은 내가 지배하기 전에 내가 지배에 받도록 만든다. 우리를 훈육하고, 가치 규정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그으며, 나의 욕망까지 관리 한다.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자유롭다고 느끼도록 길들여진 존재이다. 기분 나빠 죽겠다. /공봉학 변호사

2025-12-01

문형배 재판관, 포항 침촌인문학당으로 오다

재판관 문형배는,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으로 전직 대통령 탄핵판결문을 낭독한 분이다. 역사상 두 번째로 대한민국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불운의 재판관이기도 하다. 비상계엄 선포의 후유증으로 탄핵의 정국이 소용돌이칠 때, 반대하는 자, 찬성하는 자 모두 재판관을 가만두지 않았다. 쪼개진 대한민국은 평범하고도 강직한 재판관을 법정 밖 정치판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라는 망상의 벼랑 끝으로 재판관의 양심까지 몰고 갔다. 전원일치로 판결이 났음에도, 사람들은 법과 정의라는 이성의 편이 아닌, 원하지 않은 결론이라는 감정의 편에서 들끓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변호사 공봉학은, 대한민국 변호사 중 학당을 운영하는 유일한 변호사다. 챗지피티에게 물어서 얻은 답이다. 틀릴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인 내가 아는 한에도 그렇다. 2014년 봄. 사재를 털어 침촌인문학당을 열었다. 명상과 차와 음악 그리고 인문학이라는 3대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한 길이었다. 변호사 업무를 하고 남은 에너지를 학당에 쏟아부은지 벌써 12년째다. 사람들이 곁눈질하였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이 길을 걸어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좋은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 못 갈 거란 주위의 예상과는 달리 학당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재판관과 나는 일면식도 없다. 재판관과 인연 있는 친한 후배 변호사를 통하여 재판관을 초청하였다. ‘포항에서 12년째 학당을 운영하는 변호사가 있다’라고 소개하면 반드시 응해 줄 것으로 믿었고,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후배 변호사와의 인연에 침촌인문학당의 향기가 더해져 얻어낸 아름다운 결실이다. 강연의 주제는 재판관이 근자에 출판한 책 ‘호의에 대하여’이다. 학당초청이니 조촐하게 하여 진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재판관의 요청이 있었다. 학당 도반들과 주변 지인들 정도의 자리로 마련할 예정이다. ‘호의에 대하여’는, 재판관 자신의 삶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은 책이다. 판사로서 살아온 삶의 여정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렸다. 책을 읽는 내내 재판관의 이미지가 그대로 그려졌다. 좋은 글이다. 평범한 판사의 ‘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대통령을 파면하였으니 정치적 평가가 다소 뒤따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은 파면의 선고가 좌우의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다 안다. 재판관은 책에서도, 자신은 ‘정치적으로 어느 쪽도 아니다’라고 단호히 적었다. 법관은 오직 정의의 편에서 양심에 따라 재판할 뿐이다. 여기에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오물을 뒤집어 씌워서는 안 된다. 재판관의 책을 읽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명징하여진다. 바른 언어와 정치적 언어는 다르다. 구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재판관과의 만남은 어쩌면 오래전 준비되었을지 모른다. 오랜 독서 습관이 그것이다. 재판관도 나도 평생을 책과 동행하였으니, 책이라는 친구가 둘의 만남을 주선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독서가 재판관으로 하여금 에세이를 쓰게 하고, 독서가 나로 하여금 학당을 열게 하였으니, ‘호의에 대하여’가 침촌인문학당으로 오게 된 것이다. 좋은 날이 오게 된 것이다. /공봉학 변호사

2025-11-24

GD 그리고 MZ

‘GD’는 싱어송 라이터 권지용이 자신의 성 ‘권’과 이름 지용의 ‘용(龍)’을 영어로 표현한 ‘지드래곤( G Dragon)’의 약칭이다. GD는 조용필, 신해철, 서태지, GD, BTS(방탄소년단)로 이어지는 한국 가요의 맥을 잇는 큰 산맥이자 ‘MZ 세대’의 아이콘이다. MZ는 GD를 통해 자신을 이야기한다. ‘MZ’는 M세대(Millennials)와 Z세대(Generation Z)를 합친 세대다. ‘MZ 세대’라는 용어는, X세대(Generation X· 베이비붐 다음 세대라는 의미), Y세대(Generation Y·X 다음이므로 Y·Millennial과 거의 같은 의미), Z세대(Generation Z·Y 다음 세대이므로 Z)의 X,Y,Z 중 Y·Z를 지칭하는 말이다. ‘X 세대’ (1970~1980년대 청소년기)는 베이비붐 세대 이후 등장한 “정체불명”의 세대로, 산업화와 민주화의 변화를 경험하며 개인의 자아 탐색을 중시했다. ‘Y 세대’(밀레니얼 세대, 1980년대 후반~2000년대 초 출생)는 MF 외환위기, 취업난, 주거난 등 구조적 위기 속에서 성장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개인적 목표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Z 세대’(1995~2010년대 초 출생)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기본값인 세대로, 유튜브. SNS , 스마트폰과 함께 삶을 시작하였고, 자기표현, 다양성, 개인적 정서를 중시하며 기성세대들의 틀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MZ 세대는, 인터넷 모바일 소셜미디어에 친숙한 소위 ‘디지털 원주민’들이다. MZ들은, ‘현실의 자아’와 ‘디지털 자아’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세대 들이다. 욕망, 불안, 계급, 그리고 ‘나’가 사라진 시대의 자화상들이 MZ들이다. 이들은 자기증명과 계급상승의 강박에 시달리는 세대다. 소비패턴과 이미지가 이들의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GD는 1988년생으로 MZ 세대이다. GD의, 2012년 곡 ‘one of kind’의 가사 중, ‘난 달라, 달라,달라“, 2013년 곡 ’삐딱하게‘의 가사 중, ’난 오늘도 화려한 척해‘ ’모두 나를 미워해. 외로워서 미치겠다‘는 표현들을 보자. 행복한 척, 풍족한 척, 화려한 척, 잘사는 척하는 자신들의 분열된 자아를 고백하고 있다. 겉으로는 화려함을 과시하지만, 안으로는 우울과 고독감을 감추는 디지털 시대의 특징을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다. ’SNS의 나‘는, 편집되고, 보정되고, 조합된 하나의 브랜딩 된 자아이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불안하고, 외롭고, 확신이 없고, 명확한 정체성이 없다. 흔치 않은 발라드 2014년 곡 ‘무제(無題)’에서 GD는, ’솔직하게 말할게. 내가 겁이 많은 건지‘라고 고백한다. 외적 화려함 뒤에서 스스로가 느끼는 내적 고갈의 표현이다. GD를 듣노라면 예술과 철학의 경계를 허무는 느낌을 받는다. GD의 노래가 어디 MZ만의 절규일까. X 세대를 포함한 지금의 장년층이라고 다를까. X들이여 GD를 듣자! 세대 간의 무경계를 위하여! /공봉학 변호사

2025-11-17

좋은 글 퍼 나르기는 이제 그만

책이나 유튜브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나이가 들어서 지켜야 할 3가지’. ‘만나면 안되는 유형의 사람들’, ‘부자들의 습관’, ‘고귀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특징’. 등등. 대부분 그럴듯하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비슷하면, ‘그래 맞아’ 하지만, 다르면, ‘뭐 꼭 그래야 하나’라고 슬쩍 기분이 나빠진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냥 소음 정도로 생각한다. 삶이 한마디로 정의될 수도 없거니와, 생각 아닌 감정으로 그 글을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음 중, 나이 든 사람에 대한 대표적인 경구로,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일단, ‘입을 닫아라’는 말의 뜻은, ‘나이 들어 말이 많으면 안 된다’라는 것일 테고, ‘말이 많으면 쓸데가 없다’는 속뜻이 있다. 게다가 나이 든 사람은, ‘나이를 권위로 내세우는 경향’까지 있다는 것까지 슬쩍 올려 두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말 많은 것 자체가 ‘그냥 꼰대 짓’이라는 게다. 그러면 반대로, 젊은 사람은 시종일관 떠들어도 되고, 쓸데없는 말을 해도 되고, 권위를 내세워도 된다는 것인가. ‘입 닫아라’라는 말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재 가치를 나이라는 단순한 숫자적 가치로 환원한 위험한 통념이다.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한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며,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는 형식이다. ‘인간은 언어 속에 존재한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강요된 침묵은, 존재의 집에서의 추방이자, 인간 실격 선언이다. 여기에 대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라고 반박할지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말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갑을 열어라’라는 말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재 가치를 돈이라는 단순한 경제적 가치로 환원한 위험한 통념이다. 이 말속에는, ‘노인이 존중을 받으려면 돈을 써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가 바탕에 깔려있다. 열 지갑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막상 지갑이 있다고 치자. 무턱대고 지갑을 열어야만 하는 당위성은 누가 결정한 기준인가. 노인이 존중받으려면 돈을 써야 한다는 사고는, 세대 간의 관계를 ‘결제 거래’로 축소하고, 사랑, 경험, 지혜 같은 비가시적 가치를 제거한 위험한 사회적 언어이다. 하찮은 경구 하나 때문에 자신의 말이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발적 침묵을 학습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이에게 맞는 옷은 결국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조언들은 맥락 없이 윤리적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좋은 글의 유통은, 사유의 과정은 생략되고 감정적 동조만 남는 소위 ‘생각 없는 공감’의 현장이다. 타인의 말은, 나의 말을 설명하는 수단 정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인용은 사유의 시작이 되어야지,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톡에서 좋은 글을 퍼 나르는 사람은, 펌글을 통해 은근히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 과시하는 속내가 있다. 내가 감동 받았다고 상대가 감동 받을 거란 착각은 금물. 예의에도 어긋날 수 있으니 퍼 나르기는 이제 그만. /공봉학 변호사

2025-11-10

앵무살수

‘칼 끝에 피를 묻힌 자 장강의 하류를 건너지 마라’ 한국 무협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는 김성진 작가의 무협만화 ‘앵무살수’의 첫 문장이다. 만화에서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의 직업은 장강 하류의 뱃사공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에게는 평범한 노 젓기 일 이외에 다른 일이 하나 더 있다. 중원에서 온갖 패악질을 다 저지르고 어디론가 숨어드는 중범죄자를 단죄하는 일이다. 법망을 피해 살아가는 이들을 색출하여 직접 형을 집행하는 만화 속 이야기다. 도주하는 범죄자를 태운 나룻배가 포구를 출발하는 장면으로 만화는 시작된다. 나룻배가 장강의 중간에 도착할 때, 앵무새 한 마리가 날아든다. 사뿐히 주인공의 어깨 위에 앉는다. 쪽지를 입에 문 앵무의 깃털이 장강의 물결에 빛난다. 누군가 내린 명령과 금액이 적힌 쪽지를 주인공이 펼친다. 사형! 그리고 엽전 열 닷 냥. 배가 멈추고, 칼이 춤을 춘다. 칼끝에 묻은 피를 유유히 흐르는 장강의 물결에 씻고, 검의 고수는 뱃머리를 돌린다. 이날의 나룻배는 장강의 저편으로 갈 일이 없다. 작년 6월경 포항문화재단 초청으로 육거리 꿈틀로 청포도 다방에서 ‘앵무살수’를 패러디하여 ‘제2회 인문학 강좌’를 한 적이 있다. 10년 넘게 침촌인문학당 사띠스쿨 원장을 하면서 나름 터득한 사유 여행의 한 꼭지로 열어보았다. ‘낭만자객', ‘지성의 몰락’, ‘붓다의 칼, 예수의 창’, ‘생각 죽이기’, '저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마라’ 순서로 다섯 강좌를 성황리에 마쳤다. 주제는 ‘관념 죽이기’였다. 제1회는 칼릴지브란 선생의 예언자를 중심으로 ‘사랑의 타작마당’이라는 주제로 하였었다. 사랑의 개념을 타작하여 껍질을 벗겨보자는 것도 결국은 관념(개념, 생각, 편견 등) 죽이기였다. 두 번에 걸친 강좌는 겉만 달랐지 속은 같았다. 만화 ‘앵무살수’ 속 장강 하류 나룻터 풍경을 관념 죽이기의 소재로 써보았다. 예언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관념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단죄의 칼부림에 비유하여 보았다. 주인공이 사는 조그만 집, 나루터, 나룻배, 악당, 칼, 앵무새, 주인공, 처형, 그리고 칼 씻음. 이 모두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 개념, 생각들의 환·망·공·상을 제거하는 것과 연결하여 강의하였다. 우리가 극복하여야 할 관념이 만화 속 악당들과 같은 존재라면,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이다’라고 짚었다. 관념이란, 때론 삶의 에너지로, 때론 죽음의 에너지로 쓰이는 검의 양날이다. 우리는 생각 때문에 살고, 생각 때문에 죽는다. 악당이란 탈을 쓴 관념이 가끔 우리를 괴롭힐 때,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 어떤 기술을 쓸 건지, 어떤 무기를 휘두를 쓸 건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취미활동, 운동, 예술 감상. 지인과 잡담 정도의 무기로 족할까. 만화 속 주인공은 검술의 최고수였다. 만화 속 주인공만큼 고수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명상’이라는 무기가 있다. 나름 든든한···. 우리는 알고 있다. 삶 속에는 건강, 돈, 명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공봉학 변호사

2025-11-03

정견(正見)과 무명(無明)

이데올로기란, ‘세상을 바라보는 틀’ 또는 ‘어떤 사회나 집단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신념의 체계’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사고의 틀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렇게 봐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안경’인 셈이다.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부자는, 노력과 능력의 결과물이고, 사회주의적 관점에서의 부자는, 불평등의 구조적 결과물이다(물론, 전적으로 그렇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보는 관점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데올로기가 문제 해결의 참고 사항 정도로 활용되면 매우 유익하게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확고한 소유가 되면 삶이 파괴될 수 있으며, 사회 전체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가치나 신념 체계로 등극하게 되면 그 사회 역시 파괴될 수 있다. 이렇듯 이데올로기는 ‘검의 양날’이다. 이데올로기는, 필요할 때 한 번씩 좋은 곳에 사용하는 것이지, 평생 소유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에 대하여 2500년 전 위대한 처방을 내린 사상이 있다. 불교의 팔정도 정견(正見)이 그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바른길이 팔정도이다. 그중 첫 번째가 정견이다. 정견은,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그 이데올로기를 알되, 나의 견해로 정착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바른 견해이다. 견해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그것이 정견이다. 견해에 집착하여 내 것임을 고집하면, 그 견해로 인하여 평생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팔정도의 통찰이다. 내 것으로 소유되고, 집착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이데올로기는 망상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망상이 된 이데올로기는, 진리라는 이름의 도덕적 독약이요, 위험한 칼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데올로기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 경고했다. 견해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 즉, 연기(緣起)의 첫 번째인, 무명(無明)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두꺼운 장막이 처진 방 안에는 빛이 들어올 수 없다. 오직 어둠뿐이다. 생각을 절대화한 사유의 부재는, 빛을 잃고 어둠 속에 빠지기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헛된 망상(이데올로기)에 빠져,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태우고 고통에 허덕이게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름 최고라 자부하는 지성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망상에 빠져 평생을 허우적거리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다. 평온하고 지혜롭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당장 견해를 내려놓으시라. 나름의 개똥철학, 정치적 견해, 종교적 견해. 이것들이 이데올로기란 망상일 수 있다. 숭배하지 말자. 망상에서 벗어나자. 그것이 좀비가 되지 않는 길이다. 무명의 골방 방문을 열고, 정견의 넓은 마당으로 나가자. 어둠을 뚫고 빛이 찬란한, 열린 세계로. /공봉학 변호사

2025-10-27

저질 정치의 민낯 길거리 현수막

태극기의 물결이 아닌 현수막의 물결이 넘쳐난다. 펄럭이는 현수막은 정치라는 바닥에 발들인 자들의 ‘일방적 자기선전’의 메아리이다. 길가의 아름다운 가로수를 감상할 틈을 주질 않는다. 특히 명절을 전후해서는 더 난리다. 운전에 집중이 안된다. 우리들의 고요하고도 맑은 시선은 온갖 종류의 정치인들이 도배한 현수막에 의하여 잠식당하고 더럽혀진다. 도심을 나서는 순간 이내 기분이 잡친다. 어질어질하다. 내용은 또 어떤가. 정치 초보들은 뭐 그렇다 치자. 기성정치인의 경우는 더 가관이다. 좌. 우가 다를 것도 없다. 누가 이런 저질 정치판을 보고 싶어 하기나 하나. 나름 양질의 정치를 위하여 노력해 봤자 헛수고다. 수준 이하의 현수막이 정치를 혐오하게 만들고, 결국은 정치에 관심을 끊게 만든다. 정치가(사실은 정치가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가 거리의 벽을 점유할 때, 시민은 마음의 벽을 쌓는다. 저질 현수막은 시민의 맑은 눈을 흐리는 민주주의의 독이다. 거리의 현수막은 정치의 미숙함을 넘어 시민의식의 피로함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저질 정치의 현수막 난장은, 시민들이 평온하게 거리를 걷고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침해한다. 정치의 품격 따위는 개밥그릇에 던져 버린 지 오래다. 애당초 품위 있는 정치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제발 나의 평온이나 침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행복추구권이 천부인권임을 선언하고 있다. 행복할 권리 중, “보기 싫은 것을 안 볼 권리”가 있다. 누군가에게, 듣기 싫은 말을 지껄이고, 먹기 싫은 음식을 권하고, 보기 싫은 걸 보게 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자 범죄가 아니겠는가. 여기에 왜 면죄부를 주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듣기 싫은 말과 보기 싫은 언어를 현수막에 똥처럼 싸지르는 저질 정치 현수막을 거부한다. 누가 보고 싶다 그랬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예의다. 보기도 싫은 사람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것은 무례이자, 명백한 행복추구권 침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 구조변동(위르겐 하버마스 저. 1961.)‘에서, ’공론장이 사적이익의 홍보장으로 퇴락할 때 민주주의는 병든다‘고 진단했다. 현수막 정치는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허상‘이다. 그것은 참여를 가장한 일방적 선전이며, 시민의 눈을 빌려 정치인의 자아를 비추는 교묘한 법의 우회다. 도심의 미관을 훼손하고, 시민의 시각과 공간을 강제 점유하며, 공공의 장소를 개인의 선전장으로 변질시키는 행위는 시민의 정신적 환경을 침해한다. 이건 ’시각적 소음‘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정한 힘은 조용하지만, 허약한 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든다‘고 했다. 정치인의 현수막이 늘어간다는 것은 그 정치인이 위기에 빠졌다고 스스로 외치는 꼴이다.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이미지정치, 홍보 정치의 현수막은 사라져야 한다. 현수막에 가려진 도심의 풍경을 시민들에게 되돌려주고, 시민의 눈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기를 바란다. 진정한 정치는, 끊임없는 소통과 실천에 걸려있지, 현수막에 걸려있지 않다. /공봉학 변호사

2025-10-20

질투는 나의 힘

칼 융(Carl Jung)의 ‘페르소나(Persona)’는 라틴어로 ‘가면’을 뜻한다. 페르소나는 ‘타인에게 보여주는 나’이자, 사회 속에서 나의 여러 역할을 상징한다. 직장인, 연인, 친구, 부모···. 이러한 각 관계마다 우리의 얼굴은 다른 가면을 쓴다. 내가 착용한 가면은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진짜 나’를 점점 억압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가면을 진짜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다. 가면에 억눌린 진정한 자아는 ‘그림자(shadow)’로 밀려나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분노와 질투, 열등감의 형태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그림자로 밀려난 나의 자아가 형성한 것 중 ‘질투’가 있다. 질투는 타인의 존재 앞에서 드러나는 자기 결핍의 자각이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불편해지는 이유는, 내 안에 그것을 향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를 깊게 쓴 사람은 질투를 강하게 느낀다. 겉으론 완벽한 척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불안’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이 바로 질투의 연료인 셈이다. 질투를 떠올릴 때, 우리는 불안과 부끄러움을 함께 경험한다. 불안의 연료를 태우고 피어나는 질투라는 연기는 우리에게 부정적 감정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만든다. 이런 질투 감정을 다르게 맞이하게 해준 사람이 시인 기형도이다.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입속의 검은 잎, 1989)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질투가 삶을 살게 하는 힘이었다니! 질투는 가면이 깨질 때 나는 소리이며, 아픔 속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자아이다. 질투가 병든 감정이 아니라, 나의 참모습임을 기형도는 자신의 입속의 검은 잎을 통하여 말해 주었다. 그렇다! ‘질투는 나의 힘’이다. 내가 다시 일어나서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게 해주는 그 무엇인 셈이다. 질투를 온전하게 내 것으로 긍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질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명절을 지내고 나면 보통은 무기력증에 빠진다. 그 무기력증의 상당 부분은 질투로 소비한 감정의 후유증 때문일 수 있다. 간만에 만난 지인, 친척, 친구들이 늘어놓은 자랑질로 인하여 온통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력증이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질투의 감정이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마음껏 질투를 하자. 불안을 태우지 말고, 이제는 질투를 연료 삼아 태우자. 아래는 ‘질투는 나의 힘’의 전문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니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굿바이 형도! /공봉학 변호사

2025-10-13

노욕(老慾)과 몰염치(沒廉恥)의 난장

노욕은, 늙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요,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인생의 후반기에도 지나친 욕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염치가 있을 리 없다. ‘노년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자는 삶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세네카의 경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노욕의 추함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안다. 노욕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추하게 되니 염치는 뒷전이다. 지나친 욕망은 세대와는 무관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노욕에는 ‘물러나지 않음’이라는 상품이 하나 더 추가된다. 노욕이 젊은이의 욕심보다 더 추하게 보이는 이유다. 욕망의 1+1이다. 물러나지 않음은 ‘놓지 않음’과 연결된다. 물러나지 않고 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황혼에 접어든 사실(죽음이 가까워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의 자각’은,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통로’라 보았다. 노년에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죽음에의 자각이 필요한 이유다. 염치없음은 또 어떤가. 흔히 하는 말로, ‘부끄러운 줄 좀 알아라!’라는 말이다. 순자는 예론(禮論)에서, ‘사람이 염치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하다.’(人而無恥, 不如禽獸)라고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아무 데나 마구 들이댄다. 쥐뿔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 체력이 바닥을 기는 사람들, 세상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한때 잘 나갔다는 이유로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를 가리지 않고 설쳐댄다. 특히 권력을 탐하려는 노욕은 보편적 도덕법칙이 아니라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판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욕망은, 공동체의 미래를 빼앗고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억압한다, 정치적 노욕은 공동체를 사유화하는 일종의 도덕적 배임이자 철학적 자기 한계의 망각이다. 노욕은, 죽음이 두려워 삶에 집착하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신적 빈곤이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노욕에 설쳐대는 순자의 몰염치들이 득실댄다. 한평생 호의호식하고도 또다시 더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몰염치의 난장판이다. 이들에게는 후계자는 없다.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모조리 자신이 하고야 말겠다는 처절한 의지를 불태운다. 후학들을 키울 생각은커녕, 싹트기 전에 잘라버리기 바쁘다. 그 기세가 너무나 맹렬하여 구토가 나고 어지러워 쓰러질 지경이다. 하기야 노욕의 난장판이 어디 여기뿐이겠는가마는.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은, ‘나이가 들면 사욕을 줄이고 자연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참으로 공자님이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 50은 청춘이니 현대의 지천명은 70 정도로 보면 적당할 듯하다. 70 전후에도 노욕에 휩싸여 몰염치의 난장에서 추어대는 노장들의 칼춤이 볼만하다. 춤추는 자뿐만 아니라, 구경꾼들도 조심해야 된다. 그 무대가 어떤 난장인지, 춤꾼이 몰염치한 인지. 단디 보자. 비싼 관람료 지불하고,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젊은이들을 망칠 수 있다. 제발 단디 보자. /공봉학 변호사

2025-09-30

쇼펜하우어 VS 니체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권태가 인간 실존의 두 얼굴이라 보았다. 욕망은 삶의 본질이자 고통의 원인이요, 권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드러나는 삶의 공허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이렇듯 욕망과 권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회귀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명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새겼다.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카잔차키스 자신은 욕망하지 않았으므로 두렵지 않았고,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욕망하지 않으면 불안도 없다. 고통의 뿌리가 욕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러한 욕망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생존에의 의지’의 핵심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Das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에서 밝힌 의지는, 생을 추동케 하는 맹목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욕망이다. 싯다르타의 고성제(苦聖諦. 삶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맹목적 의지(욕망)로 치환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더라도 ‘권태라는 악마의 등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태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존재가 아무런 욕망을 하지 않을 때도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 상태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권태는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피로와 무의미’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라 보았다. 악의 꽃 마지막 부분에서, 권태를 괴물로 형상화하여 탐욕, 방탕, 허영을 능가하는 궁극의 악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은 권태 속에서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술, 마약, 매춘, 심지어 폭력, 죽음까지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보들레르에게 권태는, 악의 꽃을 피우는 ‘토양’인 셈이다. 욕망과 권태의 윤회 속에서 인간은 허덕일 수밖에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에 대하여 니체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 쏘아 부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억제하거나 부정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니체에게는 자기실현과 자기극복의 특급열차가 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존재 자체의 무의미성이자 삶의 고통과 허탈감으로 드러나는 권태라는 이름의 악마는, 니체에게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삶을 자극하는 천사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욕망과 권태로부터 구원받는 방식도 달라진다. 쇼펜하우어는 금욕, 관조, 욕망과 권태의 줄임과 제거를 주장하지만, 니체는 자기 극복, 새로운 가치창조, 아모르파티를 통해 욕망과 권태를 나의 일부로 포용하여 적극 수용하길 권한다. 예술의 경우는, 쇼펜하우어에게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일시적 해방 또는 위안의 도피처이지만, 니체에게는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적극적 힘의 놀이터이다. 두 사람이 대하는 욕망과 권태에 대한 태도와 해결 방안 중 누구 것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니체를 따른다. 나로부터 분리하여 처리하여야 할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영원히 함께하는 동반자요, 내 삶의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자. 안녕! 반가워~ 나의 욕망과 권태야! /공봉학 변호사

2025-09-22

눈먼 자들의 도시

‘직시(直視)보다 왜곡(歪曲)에 편승하기. 신념은 깡다구의 결과물. 최고의 날라리가 되어볼까. 생각을 멈출까. 눈먼 사람은 밤과 낮이 없거든. 그렇게 굳히기 한판의 삶. 앞니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찬란하지 않더라도. 기어코 개겨볼까, 몰라, 젠장.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그러나 사랑이 독약(毒藥)이라해도.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이 해독제인 걸, 나라 사랑 말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출처. ‘이우근 시인과 박계현 화백의 포항 메타포’ 경북매일신문) 시인 이우근의 시, ‘눈먼 자들의 도시’ 전편이다. 왜곡된 나라 사랑에 대한 이토록 통렬한 관찰이 있었나 싶다. 시인은, 제목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노벨 수상작)’에서 빌려왔음을 자작 시평에서 고백한다. 눈먼 자들이 들끓는 도시가 시인의 맑은 눈을 통하여 직시된다. 눈먼 자들의 하울링이 시인의 가슴을 헤집는다. 눈먼 자들의 신념은 처연하다. 막걸리 술판의 김치 한 조각 안주에서 묻어난 이빨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그들은 막걸리 묻은 입술에서 신념을 토해낸다. 쏟아져 나오는 말을 듣는 자도, 이해하는 자도, 사실은, 아무도 없다. 공허한 하울링. 몰라. 젠장. 그냥 개겨보는 거지 뭐.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사라진 그 자리는 정치가 대신할 거라 예언했다. 교회당과 절간에 다니던 사람들이 길거리 정치판으로 쏟아져 나온다. 정치가 신의 자리를 대신한 풍경이다. 한순간에 모든 사람이 시력을 잃는 기묘한 사건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시인의 손끝에서 이 시대의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시인은, 이념과 아집에 눈먼 자들의 폭력과 욕망을 꿰뚫어 본다. 공동체의 파괴를! 도덕적 양심과 이성적 통찰의 상실을! 그들의 말과 몸짓을 개떼의 하울링에 은유한다. 시인이 표현한 개떼는 ‘집단적 실명’이다. 정치적 극단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은 세상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눈을 감는다. 이렇게 실명한 자들은 단순한 선악, 음모론적 사고, 적 아니면 동지라는 흑백 구도를 맹종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돈 속에서 확실성을 갈망하는 인간의 불안을 달래주는 달콤한 독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사람을 소환한다. 실명을 치료하는 약은 결국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그래 사람이지! 사람이면, 사람을 사랑해야지, 나라 사랑 말고. 시인의 마지막은 늘 사람이다. 시인의 시 ‘똥개’ 전문을 감상해 보자. ‘나는 존재 밖이다. 태생의 한계를 직감하고 능동적으로 가장 낮은 곳을 안다. 나는 똥개. 나의 유전자의 본질. 대문 앞의 경계의 삶. 차가운 공기 먼 산, 그림자와 새벽의 안개는 나의 이웃. 그 무엇이 나의 적인가 아직 몰라서 조그만 인기척에도 나는 짖는다. 다만 짖지 않으려 한다. 침묵은 스스로 자처해야 온전히 얻을 수 있다. 밥그릇에 비가 내린다. 그리하여 주인공 없는 삶.’(출처 ’개떡같아도찰떡처럼‘ 이우근) 똥개는 침묵하고 싶다. 어찌하면 침묵을 온전히 얻을 수 있을까. /공봉학 변호사

2025-09-15

물 맛에 대하여

순수한 물(H2O) 자체는 사실상 아무런 맛이 없다. 실제 우리가 마시는 물은 다양한 무기질과 철 망간 등의 미량 성분이 용해되어 있어 맛이 달라진다. 여기에 물의 온도, 지역, 마실 때의 상황에 따라 물의 맛이 더 다양해진다. 오래전 어떤 드라마 장면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물맛을 아느냐’라고 물었던 장면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물맛이 그 맛이지 따로 무슨 맛이 있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지배했던 30대쯤이었던 것 같다.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서 시골 산자락에 터를 잡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원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정원에서 하루가 마감된다. 따로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노동량이다. 전원생활의 절반은 풀과의 전쟁이다. 깨끗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풀을 뽑아야 한다. 잔디를 깎는 것도 사실은 풀을 뽑는 것과 유사한 행위이다. 꽃과 나뭇가지들도 적당하게 정리하여 주지 않으면 금방 볼썽사나워진다. 마당은 나의 헬스클럽인 셈이다. 시골에 집을 지을 때 뒤뜰 황토방을 지어주신 어르신께서, ‘공 변호사는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겠구먼’ 하시면서 빙긋이 웃으셨던 한마디가 아직 귓전에 어른거린다. 그 말씀은 사실이 되었다. 마당 일을 마치고 생수병을 들이킬 때면 문득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운동이나 육체노동 이후에는 계절을 불문하고 몸에서 열이 난다. 추운 겨울에도 노동 후에는 시원한 물을 찾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름의 마당 일은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한다. 어떤 때에는 생수 몇 통을 들이킨 적도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맛이 있었던 것은 갈증 날 때 마시는 시원한 물이었지 싶다. 같은 이유로 밥맛은 배고플 때가 최고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그 뜻이리라. 현대는 물맛과 밥맛을 잊은 시대이다. 체내 수분 유지를 위해 갈증 나기 전에 물을 섭취하여야 하며, 위장에 부담을 주는 폭식을 피하기 위해 때 맞춰 밥을 먹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마신다. 갈증 나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니 최고의 맛난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밥상의 요리도 웬만해서는 맛나다는 칭찬을 듣기 어렵다. 시원한 물맛은 필요와 충족, 결핍과 해소의 원초적인 합일이다. 갈증이라는 결핍이 땀 흘린 노동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물은 단순한 수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그 무엇이다. 바야흐로 땀을 흘리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아니 벌써 왔을지 모른다.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의 물맛까지 빼앗고 있지 않은가. “노동은 최고의 사랑.” 노동으로 흘린 땀방울이 일으킨 갈증을 추구하자. 최고의 물맛을 즐기고 싶은가, 그러면 갈증을 일으켜 보라. 최고의 식사를 하고 싶은가, 그러면 굶어 보라. 땀을 흘리지 않고 시원한 물맛을 기대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현대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갈증이 나질 않고,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육체노동을 할 일이 없으면 운동이라도 하자. 최고의 물맛을 보기 위하여 시원한 생수 한 통 들고 운동장으로!! /공봉학 변호사

2025-09-08

잘못된 만남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얼마나 듣기 좋은 구절인가. 듣는 순간 따뜻한 사랑이 엄습해 온다. 이웃이 정겨워진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나와 이웃은 서로를 사랑하는 따뜻한 사이인 것 같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해 보자. 내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나의 이웃사랑이 진정한 헌신인지, 아니면 자기 위안 인지를. 이웃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숨겨진 동기와 욕망은 따로 있지나 않은지. 우리는 수시로 이웃(지인)을 찾는다. 우리가 이웃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고독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서? 이웃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어쩌면 우리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여 이웃에게 달려갈지 모른다. 고독이란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자기애의 결핍을 치유하기 위해, 이웃들에게 달려간다. 이웃을 만나서 그 이웃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잘못을 핑계 삼아 나 자신을 합리화한다.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이웃에게 나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대부분의 이웃사랑은 위장된 자기애일지 모른다. 자기 내면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타인과 관계 맺고, 관계를 꾸며댄다. 이때의 이웃사랑은 진정한 베품이 아니라, 자기 결핍이다. 오늘도 우리들은 고독과 권태, 자기 상실감에 떠밀려 이웃에게 달려간다. 이웃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나를 속이고, 이웃을 속이지는 않은지. 진정한 이웃사랑은, 이웃의 인정이나 위로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견디고 그 힘으로 타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이웃을 내 결핍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가 진정한 이웃사랑이다. 나의 고독을 견딜 줄 알고 타인의 고독을 존중할 때, 비로소 이웃사랑은 실천된다. ‘타인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타인을 얽어매고 동시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장치일지 모른다. 좋은 말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이웃사랑은 도덕적 미사여구로 소모된다, SNS의 ‘구독’과 ‘좋아요’처럼. 형식적 기부, 보여주기식 봉사활동은 타인 속에서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이자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타인을 끌어들이는 교묘한 위장 전술이다. 이런 것들이 이웃사랑이라면, 나는 이웃사랑을 거부한다. 이웃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이웃과 통화를 하고, 이웃의 SNS에 좋아요 누른다. 커피숍을 나설 때, 전화를 끊을 때, 좋아요를 누른 후에도 나의 이웃사랑은 그대로 인지 궁금하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다’라는 공자의 한마디가 이웃사랑의 시작일지 모른다. 이웃을 통해 나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웃은 없다. 말 안해도 다 안다. 나도 알고, 이웃도 안다. 내가. 그대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공봉학 변호사

2025-09-01

뽕짝에 관한 단상

예술을 정의할 때 가장 자주 거론되는 가치 중 하나는 ‘독창성’이다. 어떤 작곡가가 표절 없이 작곡하였더라도, 같은 멜로디가 수백 년 전에 이미 존재 하였던 것이라면 이 음악의 예술적 가치는 부정된다. 위대한 예술가를 말할 때, 우리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형식과 감각을 창조한 사람들을 떠 올린다. 베토벤이 교향곡의 문법을 바꾸었고, 피카소가 회화의 시선을 해체한 것처럼, 예술은 낯익은 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힘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예술의 독창성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트롯트는 다소 난처한 위치에 놓인다. 일정한 2박자 리듬, 단순한 코드 진행, 반복되는 멜로디와 주제로 일관한다. 형식적 실험이나 조성의 파괴 대신 익숙함 속에서 감정을 끌어낸다. 그래서 흔히 ‘음악성은 부족하다’거나 ‘저급한 대중 오락‘이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가 따른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을 오직 형식적 독창성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독창성을 떠난 예술은, 고통을 미화하는 ’위대한 거짓말‘이자, 인간의 삶을 다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신비한 마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트롯트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도 애절한 정서와 사랑을 노래하며,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제공한다. 반복의 진부함보다는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우위를 점하는 곳이 뽕짝의 필드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을 ’인간이 세계와 화해하고, 삶을 긍정하기 위한 근원적 장치‘로 보았다. 니체에게 예술이란, 진리에 대한 인식 행위보다 더 깊은 차원의 힘이며,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묘약이다. 진리가 삶의 무의미와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예술은 고통을 형상화하고 미화한다. 우리의 삶에게, ’그래 좋아‘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트롯트는 묻는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가 어디냐?‘ 라고. 이 질문을 던진 트롯트가 현대 미학을 인도의 향불(정의송 노래)처럼 흔들리게 만든다. 미셀 옹프레는 ’예술의 이유‘에서 ’고상한 미적 영역이라는 관념의 신전‘에서 예술을 끌어내려, 예술이 초월적 그 무엇이 아닌, 감각적 그 무엇임을 선언한다. 예술을 민중적, 감각적, 쾌락적 힘에서 찾고, 고통을 노래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면 그것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맛난 음식을 한입 머금고 ’오! 예술이다!‘라고 감탄할 때, 예술은 그저 맛난 것일 뿐이다. 예술의 독창성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술이 삶에 봉사하는 그 무엇으로 볼 때, 우리는 예술의 대중성을 또 다른 가치 창조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 음양으로 짜여있듯, 예술도 순수와 대중이 함께 한다. 거실에서는 조용히 클래식을, 차 안에서는 뽕짝을 감상하자. 이왕이면 한 곡 뽑아도 좋고. 이 맛에 사는 것이 아닐까. 예술의 진정한 이유가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감각을 해방하는데 있다면, 트롯트는 그 자체로서 충분히 예술이리라. 오늘 퇴근길 차 안에서는 뽕짝 한 곡을. 쿵짝 쿵짝~~ /공봉학 변호사

2025-08-25

인간 욕망의 끝판왕, 죽은 자의 천국

사후세계의 천국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궁극적 욕망의 표상이요, 지상에서의 고통과 결핍을 넘어선 풍요, 불멸, 평화, 완전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만든 처절한 상징이다. 천국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허구 세계다. 믿거나 말거나, 죽은 자의 천국은 없으며, 오지 않으며, 온다 한들 죽은 후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백번을 양보하여 천국이 존재한다 치더라도, 죽은 이후 천국의 도래는 용서할 수 없다. 왜 하필 죽은 이후에 오는가. 있다면 죽기 전에 오라.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겐 천국의 부재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의 고통이다. 이들은 천국을 믿음으로써 현재를 낭비한다. 이들은 천국을 믿음으로써 삶에서 도피한다. 이들에겐 천국이란 낙타가 짊어진 거대한 짐이다.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겐 천국은 아무런 관심 사항이 아니다. 이들은 천국의 부재로 인하여 고통받지 않는다. 이들은 천국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며, 천국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유예하지도 않는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우리네 삶은 ‘오직 한 생’이라 그랬다. 인류의 수 많은 현자들은 릴케처럼 우리네 삶이 오직 한 번뿐이라는 걸 알았다. 다음 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직 한 생인 지금 이 삶의 소중함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돌아오질 않을 이 한 번의 삶을 위하여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도덕적 삶은, 천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너무나 당연한 삶의 기준일 뿐, 천국의 문을 통과하기 위한 자격증이 아니다. 현자는 천국을 위하여 다음 생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나머지 삶을 천국에서 보상받겠다고 기대하면서 지난 삶을 살아왔던가! 그래도 늦지 않았다. 남은 삶을, ‘지금의 삶, 여기의 천국’에 아낌없이 투자하여야 한다. 후회할 일도, 후회할 필요도 없다. 천국이란, 인간이 지어낸 욕망의 끝판왕이다. 욕망은 결핍에서 시작된다. 현실 세계에서의 결핍과 불완전을 사후에 보상하려고 인간들이 만들어 낸 정교한 상징 체계가 천국이다. 과도한 욕망은 삶을 힘들게 하고 고통 속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다. 천국에의 집착은, 욕망에 대한 집착과 동의어이다, 천국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실 세계를 경멸하게 하고, 삶을 부정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천국에의 집착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몰아갈지 모른다. 이 세계 너머 저 세계는 없다. 천국을 찾고 싶다면 주위를 살펴보면 된다. 그냥 눈을 뜨면 된다. 여기저기 천국이 널려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죽은 이후에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라. 천국에 대한 갈망도,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질 것이다. 죽음과 그 이후는, 산자의 인식(생각)일 뿐, 삶의 부분도, 삶의 연장도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존재 하는 동안 죽음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고, 죽음이 올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천국을 믿는다면, 그대는 허무주의자일 가능성이 많다. 천국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당신의 주변에서 깨끗이 정리하시라.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니, 천국이라는. /공봉학 변호사

2025-08-18

술꾼에 관한 그럴듯한 수명 계산법

장수는 모든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자 행복의 큰 부분이다. 한때 환갑이 장수의 기준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환갑은 장수마을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인간의 수명이 날로 길어진다. 오래 살면 장수이지, 다른 장수가 있겠느냐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에 물음표를 던져 본다. 오래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생물학적 장수가 장수일까? 아니면 진정한 장수가 따로 있을까? 술꾼의 수명에 관한 아래의 계산 방식을 보라. 90을 살아도 70에 죽은 자가 있으며, 70에 죽어도 90을 산 자가 있다. 술꾼의 수명을 언급하기 전에 물리학적 시간 개념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다소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시간은 실재가 아니며,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전통 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존재 하는 것이며, 흐르는 것이며, 과거, 현재, 미래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대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상대적), 흐르지 않으며(심리적 인식),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양자중력이론에서는 기본방정식에 시간 항이 없다. Wheeler-DeWitt 방정식). 요약하자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이다(까를로 로벨리). 현대 물리학적 관점에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 환상으로 치부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물리학은 그렇다 치고. 시간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하고, 세월도 흐른다는 개념을 전제로 술꾼의 수명을 계산하여 보자. 재미 삼아. 주 2회 술을 마시는 술꾼을 예로 들어보자. 이 술꾼은 술을 마실 때마다 과음하는 주당이다. 그는 퇴근 후 저녁 내내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한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므로 다음 날 오후 정도 되어야 술이 제대로 깬다. 술을 마시는 데 필요한 시간과 술을 깨는 데 필요한 시간이 모두 술로 인하여 소비되는 시간이다. 이 주당은 1회 음주로 사실상 하루를 소비한다. 일주일에 2회 마시면 2일이 소요되므로 한 달에 8일(2일 4주)을 술을 마시는 데 소비한다, 계산의 편의상 하루를 양보하여 일주일(7일)이라 치자. 그러면 이 술꾼은 한 달에 일주일을 술을 마시면서 보내는 셈이다. 일 년으로 계산하면 12주 술을 마시고, 이를 달로 환산하면 3달이다. 20세부터 70세까지 50년을 술을 마시면 150달을 술을 마신 셈이고, 이는 12년의 세월이다. 어디 시간 낭비만 있으랴. 에너지, 인격, 돈, 가정의 화목 등등이 술과 함께 허무하게 소비된다. 술을 끊으면 술로 인하여 소비되는 그 시간에 또 다른 의미 있고 창조적인 것들을 할 수 있다. 술의 노예가 되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 수처작주는 그림의 떡이다. 주인이 사람이 아니고, 술이다. 필자도 한때 그런 삶을 살았으나, 일찍이 깨달았다. 오래 살았다고 다 오래 산 것이 아닐지 모른다. 진정한 장수라는 타이틀은, 의미 있는 삶을 산 자에게 붙여져야 할지도 모른다. ‘한 번의 만취는 이틀의 시간을 뺏는다. 술은 마시는 자의 적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달콤한 독이다. 술은 빌린 기쁨을 높은 이자로 갚게 만든다.’ 술의 지옥에서 탈출하자. 술을 끊으면 새로운 삶이 열릴지니, 천국이 그대의 것이라. /공봉학 변호사

2025-08-11

자유의지 VS 법적 책임

자유의지란, ‘개인이 외부의 강제나 내적 필연성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위를 하는 능력’을 말한다는 정도로 대충 정의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정의가 그럴듯하여 보여도 자유의지를 제대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자유의지는 ‘자유’와 ‘의지’라는 두 단어의 철학적 함의는 물론, 양자의 의미가 결합 된 이후의 뇌과학적 분석까지 필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유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왔던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범죄를 저지른 자의 범죄 행위는 자유의지로 인한 것이었으므로, 뒤따르는 법적 책임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의 행위는 자유의지의 결과물로서 발생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인류는 오랜 기간 신앙처럼 지켜왔다.(슬프게도 자유의지는 종교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기도 하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그 중요 구성 요소는, ‘선택 가능성, 자기 결정성, 도덕적 책임’이다. 그런데 그 범죄가 범죄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저질러진 것이라면 우리는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하여야 할 것인가? 도덕적 비난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현대 뇌과학계에서 자유의지 긍정론에 반대하는 상당수의 뇌 과학자들이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자유의지 긍정론과 부정론의 비율이 정확하게 조사되어 보고된 통계는 없지만,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자유의지란 없다’라고 주장하는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내린 결정은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며, ‘자신이 결정하였다고 생각(의식)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한다.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때,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마음의 발생 기관인 우리의 신체, 그 중 특히 뇌가 ‘물질로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고려하여야 한다. 행위의 근원인 마음은 물질인 신체(대부분 뇌)에서 발생 되기 때문이다. 현대 뇌 과학에서도, 마음이란 ‘전기적 신호 전달로 인하여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물리 화학적 작용의 결과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다수설이다. ‘마음이 물질의 결과물’이라는 선언에 대하여, 우리의 순진하고도 전통적인 영혼 수호자들은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떡하랴! 물질의 작용이 잘못되면 마음도 잘못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결정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질(시냅스)에서 발생(창발)한 마음이 물질이든 아니든 그것은 그다음 문제이다. 범죄자의 행위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대한 법적 처벌은 달라져야 한다. ‘도덕적 비난’보다는 ‘사회 유지와 재범 가능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창백한 범죄자’에 대하여, ‘바보라고 부르되 죄인이라고 부르지 마라!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한 표상은 서로 별개의 것이다. 이것들 사이에는 인과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라고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말했다. ‘그냥 처벌하면 될 일’을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서 두 번 죽이지 말라’는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탁월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 것이다. 과연 누가 창백한 범죄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공봉학 변호사

2025-08-04

뻐꾸기 탁란

뻐꾸기가 꾀꼬리 둥지에 알을 낳는다. 뻐꾸기알은 꾀꼬리알보다 일찍 부화한다. 부화하지 않은 꾀꼬리알은 일찍 부화한 뻐꾸기 새끼에 의하여 둥지 밖으로 밀려나 추락하여 깨진다. 둥지의 주인인 꾀꼬리는 뻐꾸기를 자신의 새끼로 생각하고 열심히 키운다. 자연의 섭리로 치부하기엔 뭔가 찜찜한 장면이지만, 어느 숲속 나무 위의 꾀꼬리 둥지에서 조용히 벌어지기만 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세계에도 ‘탁란 형 무임승차’가 판을 친다. 알고도 속는 세상. 욕망, 정치, 종교의 바닥이 그러한 곳이다. 당신의 욕망은 진정 당신의 것인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언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욕망은 누군가가 당신의 정신적 둥지에 몰래 낳은 ‘타인의 욕망이라는 알’일지 모른다. 유튜브 알고리즘, 넷플릭스 큐레이션은 당신의 감정, 욕망을 조작하여 ‘내가 원해서 샀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주체적 소비가 사라진 공허한 소비의 현장이다. 정치의 영역은 어떤가. 자기 책임과 정체성을 숨긴 채, 타인의 시스템이나 신념, 노동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실현하는 ‘탁란 형 권력’. 이것은 권력자가 기존 도덕, 종교, 민족주의 담론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슬쩍 얹어 다수의 대중이 그것을 ‘자기 것’이라 믿고 행동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기존의 가치라는 둥지’에 ‘전혀 다른 목적의 알’을 몰래 넣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평생 열심히 투표하듯이 지배층이 만든 세계관을 피지배자가 스스로 내면화하여 실천하는 노예도덕의 현장이다. 종교라고 별반 다를까?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는 ‘샤먼이라는 뻐꾸기 탁란’일지 모른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등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 그 핵심에는 ‘샤먼이라는 근본 뿌리’가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부처, 예수의 본래 면목은 둥지 밖으로 밀려나 사라졌다. 뻐꾸기는 오직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뿐이다.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 지를 살펴보면 탁란 형 신앙인지 아닌지는 단번에 알 수 있다. 탁란 형 성전은 거짓 사랑과 헛된 자비라는 장막이 드리워진 공사 현장이다. 위 세 곳의 현장들을 진실하게 들여다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나 자신의 욕망’을 소비할 수 있고, ‘바른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참된 기도’를 할 수 있다. 굳이 칼 융을 빌리지 않더라도 탁란 형 인간은 인간의 ‘자기 됨(Selfhood)’에 실패한 자다. 무의식 속 타자의 그림자가 자기를 덮어 그것이 나의 것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 자비, 우정. 부모, 자식, 시민, 근로자, 신자, 애국자라는 개념이 내 새끼처럼 품고 사는 ‘타인의 알’ 이라면 믿겠는가. 안전한 가짜 자아에 속아서는 안 된다. 평생 단 한 번도 뻐꾸기를 의심한 적이 없는 꾀꼬리여도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내 안의 알’은 누구의 것인지 살펴보자. ‘탁란된 것들’은 나의 자아를 점유하고 욕망, 윤리, 감정의 방향까지 설정한다. 해체하고, 폭로하고, 새로운 주인의 도덕을 찾아 떠나보자.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두려울지 몰라도 어느 순간 평화가 찾아와 그대를 다스릴지니. /공봉학 변호사

2025-07-28

최고의 취미, 공부

헤르만 헤세는 1946년 자신의 저서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중 배경인 ‘카스틸리안(Casastalian)’이라는 가상의 교육공동체에서 매년 벌어지는 최고 지성들의 게임인 유리알 유희는 ‘이성과 감성, 과학과 예술, 동양과 서양, 현실과 이상’이라는 이분법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궁극적 시도였다.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 대하여, ‘수 세기 동안 인간 정신의 모든 창조물들을 기호와 상징으로 추상화하고, 이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고 조율하는 예술이다’라고 묘사했다. 헤세는 작품에서 유희의 구체적 방법을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묘사한다. 유리알 유희의 실질적인 게임의 규칙이나 실제 진행 방식은 자세히 서술하지는 않는다. 유희가 상징하고자 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정신’이기 때문이다. 헤세의 유리알 유희는 ‘지(知)적 유희’다. 지적 유희는 수학, 철학, 음악, 문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의 영역을 연결하고 상징하는 ‘놀이’다. 헤세는 ‘놀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가장 숭고한 표현이다’라고 책에서 묘사한다. 카스틸리안의 유희는 놀이 치고는 너무 진지하다. ‘삶 전체를 건’ 놀이 임과 동시에 ‘유희자 자신의 존재를 묻는’ 놀이다. 헤세가 ‘유희’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엇일까. 공자는 학이편 첫 구절에서, ‘학이시습지불역열호아'라 하였다. 간단히 풀이 하자면, ‘공부는 즐겁다’이다. 여기서, 즐거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공부의 목적이, ‘무언가 얻음’이 아니라, ‘즐거움’이라 선언한 대목이다. 무언가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노동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즐거움이다. 그런 연유로, 공부가 즐거움인 사람에게 학이편의 ‘열’은 ‘습(習)’과 함께하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은 많아도, 자신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 고 말했다. 공부가 즐거움이 되는 도리가 있다. 공자에겐 공부가 최고의 취미 활동인 셈이었다. 헤세의 유희와 공자의 공부가 다를 리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두 거성은 공부가 즐거움이라 하였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나 재밌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에겐 공부가 밥 벌이었다. 의무적으로 해야 했기에, 공부는 힘든 것이자 언젠가 마쳐야 하는 것이었다. 수 백년 동안 공자왈, 맹자왈 했어도 학이편 한 구절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의 사회는 공부가 즐겁다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았다. 늦었지만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 뭐든 읽고 깨우치자. 공부하자. 최고의 취미 활동을 하자. 이 취미는 우주와 세계와 삶의 본질을 다루는 최고의 놀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울 만큼 재미가 있다. 헤세의 유희란, 얽매이지 않음이며,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다. 자유, 진리라는 거창한 말에 기죽을 필요는 없다. 지적 유희라는 취미 활동이 별거 있으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고 자신의 생각을 깨뜨려 가면 되는 것이다. 재미에 덤으로, 당신의 의식을 저 높은 곳까지 인도하여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걸어두는 일도 없을 것이다. /공봉학 변호사

2025-07-21

99 vs 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99 마리 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태)’ 예수가 이토록 기뻐한 한 마리 양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 홀로 가는 한 마리 양이 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이라고 이름 붙여진. 남겨진 99마리는 1마리 양이 무엇 때문에 길을 잃었는지, 왜 홀로 가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다만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99 마리는, 무리 속에서 안전하게 머물면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위험과 불안을 이야기한다. 99마리는 한 마리 양을 반드시 찾아내어 무리 속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입을 모아 외친다. 그리고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그 양은, 겉 모습은 같았으나, 무리를 떠나기 전의 그 양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길을 잃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길을 잃어야 한다, 진리와 참된 세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리 앞에서 길을 잃어야 한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무리에서 이탈된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로만 보아서는 양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세렝게티 초원 영양무리에 관한 장면이 아니다. 불가에서의 출가는, ’구도에의 길에 나서는 시작‘을 의미한다. 처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선 싯다르타가 구도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출가는 단지 가출에 불과했을 것이다.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 양이 무리를 떠난 이유를 알아야 한다. 1 마리는 99 마리가 머무는 ’그 무리‘ 를 염려했으며, 99마리가 묵묵히 순종하며 걸어가는 ’그 길‘ 을 의심했다. 99마리가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달콤한 잠이 든 그 순간에도 1 마리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고, 열사의 사막을 지나, 험준한 설산을 넘었다. 99마리와 1마리가 만났을 때, 99마리는, ’드디어 어린 양을 찾았다‘라고 기뻐 외쳤으나, 1마리는, ‘너희들이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찾아 왔다’ 라고 조용히 말했다. 길 잃은 양은 집단의 안일함을 거부한 의식의 개별자이다. 방황 속에서 진리의 음성을 듣고자 길을 떠났고, 진리를 묻기 위해 길을 잃었다. 구도란 길 잃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길을 잃어야 비로소 진실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 광야를 달리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수타니파타)’ 그렇다. 진리의 세계로 가는 길은 고독하고 멀다. 그 길은 동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도 예수도, ‘홀로 가라’ ‘방랑자가 되라(도마)’고 했다. 삶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은, 무소의 뿔처럼 고독하며, 길 잃은 양처럼 절박하다. 예수는 진리의 샘을 찾아 나선 한 마리 양을 찬양했다, 존재가 자기 자신을 묻기 시작하는 순간, 99마리의 울타리 안에 안주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우리네 삶 속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길을 잃어보자. 고요히 정좌하여 평온하게 호흡하면서 내가 속한 이 집이, 가는 길이 온전한지를 들여다보자. 당신도 언젠가는 부처와 예수처럼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 온전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 /공봉학 변호사

202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