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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행복의 저편-칼릴 지브란을 회상하며

누군가로부터, “행복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그때 아마도 대답을 망설였을 것이다. 행복은 드러나는 것이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행복은 찾는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 행복을 찾아보라. 찾지 못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행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그 무엇이므로. 존재하지 않기에 찾을 수도, 추구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늘도 항해를 떠난다. 행복이라는 섬을 찾아서. 하지만 지금까지 그 섬에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충분히 만족하여도, 당신의 손은 만족한 몸의 맨살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 안달하며, 충분히 행복하여도, 당신의 귀는 행복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한다. 손이 행복의 맨살을 만지는 순간, 행복은 이미 당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저 멀리서 당신에게 손짓할 것이다. 귀가 행복을 듣게 되는 순간, 행복은 이미 저 산 너머 메아리로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만지지 않고, 듣지 않을 때만 온전히 당신에게 머물기에. 행복은 ‘지금 이순간’ 당신에게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우주 속 빛의 속도처럼 일정하게 빌트 인(built-in) 된 그 무엇이 아니라, 삶에서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사건들의 연속일 뿐. 주위를 둘러보라. 행복이 널려 있지 않은가. 고통이 찾아오면 당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행복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 고통은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행복의 동반자. 고통은 상처받은 행복을 치료하기 위하여 당신의 내면이 내미는 쓰디쓴 약. 행복이라는 의사를 믿고, 고통이라는 약을 안심하고 드시라. 그리고 친구처럼 고통과 대화하시기를. 행복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을 껴안은 존재가 빚어내는 빛이요, 슬픔이 함께한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요,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자는 말한다. ‘삶이 그대를 괴롭힐 때에도 그 괴롭힘 속에 감춰진 선물을 찾으라고, 기쁨과 슬픔은 서로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고통과 기쁨은 하나의 줄기에서 태어난 형제. 고통은 기쁨을 품기 위해 어두운 땅속으로 움추린 씨앗이요, 기쁨은 고통이 껍질을 벗기고 드러낸 맨얼굴이다. 기쁨은 고통의 어깨 위에 핀 꽃이요, 고통은 기쁨의 뿌리 아래 잠든 불씨이다. 기쁨의 눈동자 속에 드리운 슬픔의 그림자를 사랑하자. 우리의 삶이 곧 고통이요, 기쁨이 아닌가. 우리는 행복이란 창을 마음속에 만들어 두고 산다. 가끔씩은 그 창이 닫힐 때가 있으리라.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이 창문이 닫히면, 저 창문이 열릴 것이다. 열리지 않으면 그냥 ”괜챦아“ 라고 말하면 된다. 이것이 행복의 창문을 여는 방식이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그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밝은 빛과 시원한 바람. 그 빛과 바람은 방안에 웅크리고 있는 당신의 행복을 잠에서 깨울 것이다. 행복의 샘물을 마셔보자! 행복이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시원한 샘물의 맛이 어떤가요. 잊지 마십시오. 그 물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섞여 있다는 사실을. /공봉학 변호사

2025-05-19

무소유의 삶

소유하지 않음이 포기가 아니라 나를 더 잘살게 하는 선택이라면, 당신은 어느 쪽 길을 가겠는가.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결핍되고, 내려놓음으로써 오히려 충만해지는 길이 있다. 비움으로 채워지는 길. 무소유의 길이다. 무소유! 도대체 무엇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나의 답은 이렇다. “무소유란, 자신의 관념을 소유하지 않는 것” 우리는 무소유를 떠올리면 필연적으로 돈을 떠 올린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돈이 무슨 죄가 있으랴. 돈에 대한 직접적인 무소유는 무소유가 지향하는 넓은 의미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무소유는 돈 자체의 소유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돈은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돈을 소유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돈을 버릴 이유도 없다. 돈에 관하여 우리가 소유하지 않아야 할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다. ‘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에서의 무소유, 이것이 돈에 관한 참된 의미의 무소유다. 삶은 돈 이외에 수많은 요소들로 짜여져 있다. 건강, 권력, 명예, 사랑, 우정, 자유, 그리고 행복 등등. 이런 소중한 것들 위에 켜켜이 쌓인 관념들을 이제는 내려놓기로 하자. 내려놓고 다시 채우고. 또 내려 놓고 다시 채우고…. 이것이 무소유의 삶이다. 무소유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다. 무소유라는 ‘테크닉’을 잘 활용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무소유의 삶은 자유롭다. 관념에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재물에 집착하면 창고지기에 불과하다. 지식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지식에 집착하면 꼰대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사랑에 집착하면 불행하게 된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나의 마음 상태이다. 내가 가진 멋진 차에 집착하여 안절부절하고 있다면 그 차는 애물단지가 되지 않겠는가. 물건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사랑이랴. 무소유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다. 나라는 생각조차 버릴 수 있는 해방의 길이요, 더 잘살 수 있는 실천철학이다. 때로는, 가지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1976)에서 인간의 삶에는 ‘소유의 방식’과 ‘존재의 방식’ 두 가지 근본적 태도가 있다고 했다. 소유하려는 자는, 자기 중심적, 불안, 소외를, 존재하려는 자는, 기쁨, 자유, 타자와의 연대를 지향한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행위이다. ‘나는 너를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할 때 사랑은 죽고,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라고 말할 때 사랑은 산다. 무소유는 존재론적 삶의 방식이다. 여기 아름다운 말들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사유하는 자는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 속에서 산다(수타니파타 5.13)’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마태복음 5.3)’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속에는 어떤 꿈들이 있습니까?

2025-05-12

평균의 종말

결론부터 말해 보자. ‘평균은 없다!’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측정하고 줄 세우는 이 시대를 보라. 평균점수, 평균신장, 평균소득…. 평균. 평균. 평균…. 모든 것이 평균을 중심으로 수치화되고 평균은 규범처럼 기능한다.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잠재력의 파괴를 담당한 ‘평균주의’라는 우상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 없이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숭배해 온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평균적인 인간’이란 개념은 통계적 편의에 불과하며, 실존하는 누군가를 정확히 대표하지 못한다. 미국 공군이 조종사의 평균 신체 치수를 기준으로 조종석을 설계했으나, 결과적으로 그 평균에 부합하는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종석을 개별 조정한 이후에야 비로소 사고율이 현격히 낮아졌다는 점은, 평균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위험한 오판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교육, 의료, 노동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맹활약 중인 평균은 중립적 기준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도 정확히 맞지 않는 기계적 틀일 뿐이다. 시험 점수, IQ, 학점과 같은 수치들을 기준으로 한 서열화는 인간 개개인의 특별함과 다양성을 파괴하는 폭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주의 사촌 ‘능력주의’를 보자. 능력주의는, ‘출신과 배경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고,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다는’ 얼핏 보기에는 매우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세운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평등하였는가를! 교육 기회, 정보 접근성, 사회적 자본의 분포가 공평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눈치챌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 채, 성공을 개인의 탁월성으로, 실패를 개인의 무능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평균주의가 능력주의를 만나면 수치화, 표준화된 인간을 탄생시킨다. 고유한 재능과 가능성을 지닌 개인은 사라지고, 정해진 기준에 맞는 소수만이 ‘합당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그런 사회가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당신은 평균 이상인가? 그렇다면 근거를 제시하라. 아마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돈, 외모, 학벌, 직업의 세계에서 평균 이상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오랫동안 환상 속을 헤매어 왔다. 사람은 재단 되어서도 안 되며, 재단될 수도 없다. 당신은 능력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가진 능력 이외의 능력을 보여달라.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노력조차도 능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이 없으니, 평균 이상도, 이하도 없다. 능력 없는 사람 일지라도, 그에게 발굴되지 않은 능력이 있을 수 있다. 일류대 출신, 높은 스펙의 허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성공은 평균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성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토드 로즈('평균의 종말' 저자)의 목소리를 기억하자. 밤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줄 세우는 사람은 없다. 빛나지 않는 별은 없다. 크기와 밝기와 거리와 관계없이 그저 아름답다. 당신의 장점은 평균과의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고유성에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평균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설계했기 때문이며, 진정한 발전은 개별성을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각자 다른 꽃이 피는 세상, 저 마다의 소질을 인정받는 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에 달렸다.

2025-04-28

자유를 외치는 그대에게

우리는 군중 속에 섞여 체제와 관념에 순응함으로써, 마치 삶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외친다. “나는 자유다!”라고. 그러나 이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무한한 공허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 없는 소리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에서 “자유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조건이지만, 동시에 가장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고 자유의 본질을 꿰뜷어 보았다. 자유는 때로는 수갑이요 족쇄이다. 이들이 우리를 묶어두고 있을 때, 우리는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도피하려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에 대해 가끔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어떤 구속에서 해방되었을 때, 불안이 사라졌을 때는 오히려 의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순간들은 자유라는 탈을 쓴 욕망일 수 있으며, 더 큰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자유야!”라고 외치는 순간, 그 자유는 사라질 수 있다. 우리의 낮과 밤을 휘감고 있는 가장 견고한 사슬이 바로 이것이다. 현자는 말한다. 낮에는 걱정거리가 있고, 밤에는 슬퍼할 일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실제로 우리의 내면에서는 모든 것이 반쯤 뒤엉킨 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과 싫어하는 것, 추구하고 싶은 것과 벗어나고 싶은 것들이 한 쌍의 그림자처럼 서로 얽혀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자유란, 단순히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존재다. 이는 움켜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삶의 태도 그 자체다. 이는 감옥 안에서도 빛나고, 가난 속에서도 살아 숨 쉰다. 또한, 자유는 두 눈을 감고 침묵할 때 드러나는 내면의 움직임이며, 우리를 둘러싼 낮과 밤의 걱정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다. 자유는 권력, 돈, 소유, 평판으로 측정될 수 없으며, 오직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소중한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를 마음껏 선물하자.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제 그만두자. 자유를 책임짐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군중 속에서, SNS에서, 마치 노예가 폭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칭송하듯 자신의 자유를 외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돌아보자.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폭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칭송하는 노예처럼 자신의 자유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자유를 감당하기 어려워 권위나 무리, 체계화된 이념이나 신념 속으로 도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오히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보자. 다시 한번 돌아보자. 자유에는 불완전함과 고통이라는 달갑지 않은 필연의 동반자가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자유인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 타인의 삶을 사는 유령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자유를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자유인이 되어야 하며, 다시는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2025-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