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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편견

사람들은 편견 속에서 허덕인다. ‘그럴듯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정의라는 가면을 쓴 채, 괴로움이라는 달갑지 않은 속을 품고 있는 것이 편견이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충분한 근거 없이, 개인의 경험, 감정, 선입관에 따라 사물이나 사람을 한쪽으로 치우쳐 판단하는 생각이나 태도를 일컫는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두 가지, ‘공정하지 못하다’와 ‘한쪽으로 치우치다’ 개념 중,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정하지 못하다’ 에 이르면 편견이라는 개념의 속내가 복잡해진다. 공정하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편견 속의 괴로움을 들추기 전에, 공정하다는 것이 공정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지 잠깐 살펴보자. 최근의 존 롤스, 로버트 노직, 마이클 샌달과 그 이전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장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고전 철학자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구했으나, 시대적·맥락적 한계로 인해 완전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찾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이들의 정의에 관한 개념들은 그때는 맞았더라도 지금은 틀리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정하지 못하다’라는 ‘편견의 한 조건’은 사전적 의미에서 제거되어야 할지 모른다. ‘공정하지 못함’이라는 조건을 편견의 세계에서 제거하면, 남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침’이다. 사실, 어떤 견해이든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이것은 견해가 갖는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다.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다. 고로, 모든 견해는 편견이기도 하다. 그 견해가 비록 공정하다고 하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것은 편견이 되는 것이다. 견해는 드러내는 순간, 한쪽으로 치우치게 마련이고, 편견이 되는 것이다. 이런 편견이 왜 괴로움이 되는가. 그것은 치우침의 ‘계속됨’ 때문이다. 견해 자체가 어떤 조건 지워진 상황에서 ‘일시적 치우침(견해)’이면, 그것은 편견이 아니라, ‘지혜’일지 모른다. 한번 멋지게 써먹고 버리면 그만인 것을 끝까지 짊어지고 가는 일이 허다하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견해가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때, 편견은 ‘지혜라는 가면을 쓴 집착’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바른 견해일지라도 견해에 대한 집착이 계속되어 다른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 견해는 괴로움이 되어, 나를, 나의 주변을, 힘들게 한다. 세상 만물이 변화하고 흐른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인간사의 기본 도리이다. 노자의 ‘상선약수’,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그러하다. 고정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편견이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지나 않은지. 편견 속에서 허덕이고 있지나 않은지. 편견의 노예가 되어 오늘도, 내일도, 여기서, 저기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지나 않은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밤낮없이 분노의 화살을 날리고 있지나 않은지. 하지만, 잊지 말자. 내가 쏜 편견이라는 분노의 화살은 상대에게 도달하기 전에 나의 심장을 먼저 관통한다는 사실을. /공봉학 변호사

2026-01-19

종이 내음

어린 시절, 새 책 내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잠잘 때도 껴안고 잠들었었다. 나에게는 몇 가지 냄새의 화석이 있다. 새 책,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보리밭, 해 그늘지는 늦여름의 논둑 길. 이 아이들이 ‘화석의 근거지’다. 프로스트가 홍차에 찍어 먹은 마들렌 향기의 추억처럼. 새 책의 종이가 나에게 선물한 ‘내음의 기억들’은 언제나 뜻밖의 경로로 나에게 들어왔다. 그렇다. 기억은 언제나 뜻밖의 경로로 들어오는 것이다. 기억은 스스로 길을 선택한다. 새 책을 펼칠 때 코끝을 스치는 종이 내음처럼 아주 사소한 감각의 틈을 타서 들어오는 것이다. 냄새는 과거를 설명하지 않지만, 대신 과거를 통째로 데리고 온다. 설명 이전의 시간, 해석 이전의 삶이 코를 거쳐 한순간 현재로 쏟아져 들어와 나의 현재를 흔든다. 과거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 현재의 나를 한순간에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새 책을 펼칠 때면, 글보다는 종이 내음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건다. 그 냄새는 비슷하지만, 매번 다른 시간을 불러온다. 조그만 시골집 툇마루, 학교 도서관, 비 오는 날 카페 창가, 그때의 공기, 마음의 온도, 사유의 감촉 같은 것들이다. 그런 내음들은 설명된 적이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내가 살아왔고, 살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새 책의 종이 내음이 유난히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 책을 펼칠 때, 종이 내음을 먼저 나의 심연으로 초대한다. 내 몸속 내음의 화석을 깨우기 위해서다. 코끝을 지나 폐부에 깊이 스며들어 나를 깨우기 전까지는, 책의 저자는 아직 책의 밖에 있다. 내음의 화석이 깨어나면, 읽게 될 가능성의 설렘과 지나가 버린 시간의 그리움이 동시에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 서점에서 방금 사서 가지고 온 책이나 택배 상자를 열어 처음 손에 쥔 책을 펼칠 때, 아직 한 줄도 읽지 않았음에도 ‘성스러운 종이 내음의 영접’이라는 멋진 통과의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새 책 종이 내음은 마치 오래된 내면의 서가를 조용히 열어젖히는 열쇠와 같다. 첫 장의 내음이 스치는 순간, 시간은 사유의 강물이 되어 거슬러 흐르고, 잊혔던 순간들이 은은한 향기와 함께 다시 태어나 우리 존재의 근원을 깨우게 되는 것이다. 전자책은 이러한 통과의례가 없다. 종이는 사라지고 글만 남은 세계. 더 이상 후각이라는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 곳. 냄새라는 기억을 통해 더 이상 과거의 어떤 것도 소환하지 않는 푸른 피 종족이 전자책이다. 종이책은 종이의 내음만으로 나의 생명을, 나의 영혼을 일깨워준다. 봄날 아지랑이 피는 들녘 초록의 내음처럼,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 아래 자라는 벼의 뿌리에 정화된 논물의 내음처럼. 그렇다. 독서는 종이의 내음과 함께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멋지고, 아름답고, 생명 가득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싶다면, 향기를 맡을 일이다. 책을 들고, 봄날 초록의 언덕길을, 여름의 숲길을 걸어가면 될 일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봄의 풀과 여름의 나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아도, 대지의 여신은 오직 향기만으로 그대가 살아 있음을 노래해 줄 테니. /공봉학 변호사

2026-01-12

지금 여기에

‘신이 존재 하지 않는 곳’에서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어떤 것일까. 홀로 가는 삶. 평안이 약속되지 않는 삶. ‘누군가 전부를 책임지고 있다는 믿음’에 기대지 않는 삶. 그곳에선, ‘모든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도 의미가 퇴색하며, ‘결국은 잘될 거라’는 위로도 사라진다, 신의 부재 속에 남는 것은,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과 그것을 겪어야 하는 몸과 마음 뿐. 신이 부재한 자리에 선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도, 누군가의 계획 속에 배치된 존재도 아니다. 오직 조건과 조건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사건일 뿐. 신이 부재한 그곳에 선 자는, 중심도 아니고, 선택받지도 않았으며, 특별하지도 않다. 의미는 더 이상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신이 부재한 자리의 도덕은 더 이상 명령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감각, 말과 행동이 일으킬 파문에 대한 감수성 그 자체다. 이곳의 도덕은, 신의 감시가 사라진 자리의 빛남이요, 신의 처벌이 전제되지 않은 확고함이다. 보상이 전제되지 않으므로, 도덕이라는 감각은 더 섬세해진다. 신이 부재한 자리는 변명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무책임이 아니라, 삶을 더 조심스럽게 만든다. 매 순간의 선택은 신에게 보고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영원히. 신이 부재한 삶의 불안은 의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계를 통제할 수 없음에서 오는 떨림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고통을 정당화하지도, 의미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신이 부재한 삶에서는 평안은 목표가 아니다. 그저 우연히 찾아오는 방문객일 뿐. 움켜쥠을 놓을 때, 설명하려는 욕망을 멈출 때, 세계를 평가하지 않을 때, 평안은 그 틈으로 스며든다. 신이 부재한 삶은 불확실성의 바다를 향한 항해. 근거(신) 없음의 근거 위에서 공존한다는 공감은, 신이 보증한 형제애보다 더 조용하고 현실적인 연대를 낳는다. 신이 부재한 세상의 사람들은 깨달음도 완성도 구원도 말하지 않는다. 신을 떠난 생각은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며, 신을 떠난 불안은 더 이상 해답을 구하지 않으며, 신을 떠난 의미는 더 이상 강박에 시달리지 않는다. 이야기와 해답은 필요 없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설명의 여백, 의미의 틈, 침묵의 공간을 자신으로 채운다. 자기 삶을 설명해 줄 타자를 더 이상 찾을 필요도 없다. 근거 없이 살 수 있고, 의미 없이 무너지지 않으며, 구원 없이도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잠시 움켜쥐는 손이 풀릴 때, 설명하려던 입이 닫힐 때, 세계를 그대로 두는 용기가 생길 때 평안은 온다. 누군가 기도할 때, 누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금식할 때, 누구는 먹는다. 누군가 신의 품에서 놀고 있을 때, 누구는 사람들 속에서 논다. 누군가 신을 찾을 때, 누구는 자신을 찾는다. 누군가 구원을 찾아 떠날 때, 누구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문다. 그대는 누구인가? /공봉학 변호사

2026-01-05

강자 VS 약자

불어 ‘르상티망’의 사전적 의미는,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패배주의적 분노나 아등바등한들 늘 제자리 걸음하기도 벅찬 삶의 허무함에 대한 억압적 감정이다. 약자들의 강자들에 대한 르상티망은, 질투나 시기심, 원한 감정 또는 분노다. 강하다는 것은 도달하고 싶은 것이면서, 동시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된다. 강자와 약자 사이를 방황하는 존재. 이것이 인간이다. 강자는 스스로를 증명한다. 그는 비교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힘을 세계로 흘려보낸다. 그 힘은, ‘폭력적일 필요도 없고, 지배적일 필요도 없다.’ 창조하고, 책임지고, 감당하는 태도 자체가 이미 강함이다. 그러나 강함이 드러나는 순간 세계는 조용히 갈라진다. 약자는 증명할 꺼리가 없다. 그는 타인과 비교하며, 변명하며, 자신이 가진 원한 감정을 세계로 흘려보낸다. 겉으로는 강자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정의를, 공정을, 평등을 말한다. 창조하지도, 책임지지도, 감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약함이 드러나는 순간 강자는 조용히 지배당한다. 약자는 강자를 직접적으로 쓰러뜨릴 힘이 없다. 그래서 강함 자체를 문제 삼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약자에게 강함은, 위험한 것, 부도덕한 것이다. 약자의 르상티망은 격렬하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며, 차분하고, 논리적이며,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칼을 갈 일이 없다. 르상티망은, 찌르지 않아도 깊이 스며든다. 경쟁을 악으로, 탁월함을 의심의 대상으로 바꾼다. 약자는 묻는다. “왜 저 사람은 저 자리에 있는가?”라고. 때로는 정당한 이 질문에 르상티망이 개입되면 질문의 의미는 강자에 대한 단죄로 바뀐다. 약자는, 강자를, 아니 강함을 약화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약자 스스로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약자가 원하는 것은 ‘아무도 강하지 않은 세계’다. 이곳에서는 비교할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약자의 르상티망 속에서 강자는 서서히 지쳐간다. 이것이 약자가 강자를 약화시키는 방식이다, 강자의 힘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강함의 의미를 소진시킨다. 약자가 결국은 승리한다. 그러나, 승리의 축배를 들어도 약자는 행복하지 않다. 여전히 약자이기 때문이다. 르상티망은 단순한 원한 감정이 아니라, ‘책임지지 않으려는 의지’다. 르상티망에 공격당한 강자는 끊임없이 사과해야 한다. 이유 없이 미안해야 한다. ‘왜 더 가졌는지’ ‘왜 더 빨리 갔는지’ ‘왜 더 잘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 끝나면 또 다른 설명이 요구된다. 르상티망은 교묘하다. 언제나 선한 얼굴을 한다. 그러나 그 선함에는 기쁨, 웃음, 여유, 삶을 긍정하는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약자들이 무너뜨리고 싶은 강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폭력적이지도 않고 지배하지도 않지만, 그토록 르상티망을 자극하는 강함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강자의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돈 한 푼 없었고, 아무런 지배를 하지 않았던 부처와 예수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부처가 약자라면, 그가 강자에 대한 원한 감정이 있었을까. 예수가 약자라면, 그에겐 아무런 창조하는 힘도,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을까. 그대는 강자인가 약자인가. /공봉학 변호사

2025-12-22

노무현을 팔아먹는 자들

칼 마르크스의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 정치가 언제부터 토론의 영역이 아닌 신념의 영역이 되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대신,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먼저 묻는다. 이때부터 정치는 토론이 아니라 충성의 문제가 된다. 이런 상태를 두고, ‘정치가 종교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라고 한다. 정치가 종교처럼 어떤 상황을 비판할 수 없는 영역으로 격리된다고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가. 정치가 종교가 된다는 것은, 특정 이름과 가치가 질문으로부터 보호된다는 의미다. 보호되는 순간, 사유는 멈춘다. 질문은 곧 불경스러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 진보 정치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점점 이런 성역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처음 이 이름이 불리었을 때, 그것은 한 개인의 선택과 실패, 용기와 고독을 함께 떠올리게 했다. 기득권과 싸웠고, 패배를 감수했으며,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권력을 불편해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하나의 질문이 아니다, 노무현은 어느새 정의가 되었고, 정의는 진보가 되었으며, 진보는 현재의 특정 정치 세력과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등가와 연쇄가 작동하는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다. 누군가 현재의 정책을 비판하면, ‘노무현의 가치를 부정하는가? 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여기서 논의는 끝이다. 비판하는 자는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문제 제기는 내부 총질이 되고, 자연스럽게 ’입틀막‘으로 가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 연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종교에서 신이 성스러운 이유는, 비판과 사용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성스러워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의 대상이 된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지금 그런 위치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그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를 정치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용 가치가 아닌 교환 가치가 된 것이다. 돈과 권력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성스러워진 이름은 그 이름이 가졌던 좋은 것들을 제거한다. 예컨대, ’왜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나‘ ’왜 권력은 늘 기득권의 편으로 기우는가‘ ’왜 진보조차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가‘ 같은 질문들이 사라진다. 대신 상징만 남는다. 상징은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과거의 희생은 현재의 정당성이 되고, 죽은 자의 이름은 살아있는 자의 방패가 된다. 믿음은 반복되지만, 의미는 갱신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가이다. 이데올로기는 늘 이렇게 작동한다. 거창한 선언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아주 익숙한 동기에서 출발한다. 노무현=정의. 정의=진보. 진보=지금 우리. 이 등가와 연쇄가 완성되면 현재의 권력은 스스로 성찰할 필요가 없어진다. 노무현을 팔아 돈과 권력 장사를 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노무현 성전‘을 세워 신도들을 그러모아 기도하게 하고, 헌금을 바치도록 한다. 지금 당장 성전을 허물고, 노무현을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려 놓기 바란다. 정의롭고 당당하게 열심히 일한 인간 노무현을 신으로 격상시켜 죽이지 않길 바란다. 신 노무현이 아닌 인간 노무현의 가치를 이어받고 싶다. 누가 노무현의 바울인가···. /공봉학 변호사

2025-12-15

12월 3일에 대한 철학적 우울감

2024년 12월 3일 밤. 한 인간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던진 한마디. 이것으로 인하여 평온하던 세상은 알 수 없는 침묵과 우울감으로 뒤덮였다. 의학적 우울에피소드와는 전혀 다른 우울감이다.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심리상태. 억장이 무너지고, 미치고 팔짝 뛰는 침묵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의학 전문 용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냥 ‘철학적 우울감’이라 해보자. 치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기분이 너무 나쁘다. 나의 경우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지독하게 집착한 것도 아니었다.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소양이랄까. 뭐 이 정도의 범위 내에서 나름 올바른 견해를 갖기 위하여 적당히 관심을 두었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정치가 술판의 안주처럼 언제든 꺼내 씹을 수 있는 가벼운 화제였고, 금지되지 않은 신나는 주제였던 시절이 있었다. 정겨운 사람들과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 ‘정치라는 안주’를 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가타부타 갑론을박하다가, ‘그래 너 말도 맞아’ 하면서 상대를 치켜세워 주기도 하고, ‘뭔 개소리야’ 하면서 상대를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정치판을 떠도는 사람들을 술판의 안주 삼아 맛나게 씹어대고 삼켰다. 술자리가 더 흥성거릴지언정 분위기가 망가지는 일은 없었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1968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미국, 일본까지 퍼진 ‘68혁명’은, 전통, 권위, 군사주의, 자본주의, 성도덕, 학벌과 교육의 위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전 세계를 들끓게 하였다.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 소비사회와 중산층의 확대, 교육의 팽창과 지식인의 각성, 베트남 전쟁이라는 화두 중심으로, 푸코, 들뢰즈,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등장하여, 국가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학벌·성적·규율 중심의 교육, 가부장제 및 성에 대한 금기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68혁명과 같은 정신적 변곡점을 거칠 수 없는 못한 불우한 지리적, 환경적 상황에 있었다. 남북 대치 상황과 군부독재 속에서도 우리는 나름 민주주의를 지키고, 키워왔다. 순국선열과 민주열사들의 피로 지켜온 21세기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는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믿었다. 2024년 12월 3일까지는. 믿음은 깨어졌고,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침잠하여 들어갔다. 문제의 인간을 신속하게 권력의 정점에서 제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침묵과 혼돈이 계속되고 있다. 왜 그럴까? 계속된 혼돈의 이유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그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권력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는 철학적 불신’의 제도화이다. 권력이 시민을 두려워할 때 민주주의는 시작된다. 우리가 느끼는 이 ‘철학적 우울함’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감각의 증거이다. 철학적 우울은 패배가 아니라, 잊지 않겠다는 공적 기억의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시민의 우울감에서 세워진다. 우울을 느끼는 시민이 사라지는 순간, 독재는 완성된다. 철학적 우울은 인류가 ‘자유를 감각하는 방식’이자, 상처받은 자유를 치유하는 ‘정치적 명약’이다. 우울감을 즐기자. 이러한 감각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더욱 마음껏 즐겨라. 아직도 그날을 옹호하는 그들보다는 덜 괴롭고, 훨씬 덜 우울할 테니. /공봉학 변호사

2025-12-08

보이지 않는 힘들이 남긴 흔적

도시는 거대한 정원이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표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투와 걸음걸이, 눈빛과 손짓까지 일정하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마치 오래전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든 몸들이 일사불란하게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신기하다. 이 질서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누가 이런 거대한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것일까. 나의 정원은 세상이 나에게 준 것인가, 내가 만든 것인가. 정원의 이름은 대체 누가 지었을까. 생각해 보라. 우리의 하루를. 출근길의 걷는 속도, 회의에서의 말투, 아이를 대하는 태도, SNS에 올리는 사진을 고르는 취향까지. 어찌 이리도 서로를 닮았을까. 수많은 목소리와 시선이 심어놓은 작은 표지판들, ‘이렇게 행동하라!’ ‘이렇게 살아라!’ ‘이 정도는 이루어야지!’ 이러한 표지판의 글들은 누가 새겨 놓은 것일까. 표지석 문양은 화석이 되어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너무나 자연스럽다. 어떤 거부감도 없다. 세상이 우리를 부르기 오래전부터 세상은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어떤 이름의 결을 따라 걷고, 어떤 무늬대로 웃고 울며, 어떤 방향의 바람을 따라 호흡한다. 마치 스스로 선택한 길처럼. 하지만 그 길은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발자국이 먼저 닿아있었던 길. 학교의 규칙, 가족의 질서, 사회가 붙인 여러 이름들···. 이 모든 것들이 메아리가 되어 우리의 귓속을 통과한다. 세계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지나가는 거대한 수면이다. 인간의 몸 위로 지나가는 규율의 물결, 일상의 가장 가벼운 동작 속에서 켜지는 감시의 눈빛,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얇은 칼날의 윤곽들. 이것은 산맥처럼 웅대한 것이 아니라, 안개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만질 수 없지만 습기처럼 피부 아래 들어와 몸의 방향까지 결정한다. 우리는 자신을 만들었다고 믿지만, 정작 우리를 만든 것은 알 수 없는 흐름, 규범의 물결, 습관의 온도, 오랫동안 축적된 시간의 회전들이다! 생각해 보라. 매일이 그렇지 않은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 사소한 표정, 걱정이 스며드는 방식까지. 모두 보이지 않는 힘들이 남긴 흔적들이다. 우리는 오래된 이름들의 질서 속 정원에서 태어나고, 그 정원으로 스며든 바람의 규율 속에서 자라났다. 보이지 않는 힘들이 나를 지나가고, 나는 그 힘들을 지나간다. 학교는 우리를 ‘학생’이라 부르고, 국가는 우리를 ‘국민’이라 부른다. 기업은 ‘근로자’를, 가족은 ‘가장의 역할’을 부른다. 이러한 부름에 대한 저항은 성경의 원죄처럼 여겨진다. 저항? 웃기고 있네. 기꺼이 응답한다. 새벽에 잠에서 깨는 순간 창문으로 스며드는 냄새, 벗어놓은 옷의 주름, 책상 위에 흩어진 빛의 조각- 무엇하나 내 의지로 온 것이 없다. 어디선가 왔다가 잠시 머물다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들. 바람은 여전히 분다. 나는 바람과 이름 사이 틈새에 빛나는 흔적일 뿐. ‘보이지 않는 힘의 흔적들’은 내가 지배하기 전에 내가 지배에 받도록 만든다. 우리를 훈육하고, 가치 규정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그으며, 나의 욕망까지 관리 한다. 우리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자유롭다고 느끼도록 길들여진 존재이다. 기분 나빠 죽겠다. /공봉학 변호사

2025-12-01

문형배 재판관, 포항 침촌인문학당으로 오다

재판관 문형배는,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으로 전직 대통령 탄핵판결문을 낭독한 분이다. 역사상 두 번째로 대한민국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불운의 재판관이기도 하다. 비상계엄 선포의 후유증으로 탄핵의 정국이 소용돌이칠 때, 반대하는 자, 찬성하는 자 모두 재판관을 가만두지 않았다. 쪼개진 대한민국은 평범하고도 강직한 재판관을 법정 밖 정치판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라는 망상의 벼랑 끝으로 재판관의 양심까지 몰고 갔다. 전원일치로 판결이 났음에도, 사람들은 법과 정의라는 이성의 편이 아닌, 원하지 않은 결론이라는 감정의 편에서 들끓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변호사 공봉학은, 대한민국 변호사 중 학당을 운영하는 유일한 변호사다. 챗지피티에게 물어서 얻은 답이다. 틀릴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인 내가 아는 한에도 그렇다. 2014년 봄. 사재를 털어 침촌인문학당을 열었다. 명상과 차와 음악 그리고 인문학이라는 3대 슬로건을 내걸고 시작한 길이었다. 변호사 업무를 하고 남은 에너지를 학당에 쏟아부은지 벌써 12년째다. 사람들이 곁눈질하였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이 길을 걸어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좋은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 못 갈 거란 주위의 예상과는 달리 학당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재판관과 나는 일면식도 없다. 재판관과 인연 있는 친한 후배 변호사를 통하여 재판관을 초청하였다. ‘포항에서 12년째 학당을 운영하는 변호사가 있다’라고 소개하면 반드시 응해 줄 것으로 믿었고,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후배 변호사와의 인연에 침촌인문학당의 향기가 더해져 얻어낸 아름다운 결실이다. 강연의 주제는 재판관이 근자에 출판한 책 ‘호의에 대하여’이다. 학당초청이니 조촐하게 하여 진행하였으면 좋겠다는 재판관의 요청이 있었다. 학당 도반들과 주변 지인들 정도의 자리로 마련할 예정이다. ‘호의에 대하여’는, 재판관 자신의 삶을 에세이 형식으로 담은 책이다. 판사로서 살아온 삶의 여정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렸다. 책을 읽는 내내 재판관의 이미지가 그대로 그려졌다. 좋은 글이다. 평범한 판사의 ‘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대통령을 파면하였으니 정치적 평가가 다소 뒤따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실은 파면의 선고가 좌우의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다 안다. 재판관은 책에서도, 자신은 ‘정치적으로 어느 쪽도 아니다’라고 단호히 적었다. 법관은 오직 정의의 편에서 양심에 따라 재판할 뿐이다. 여기에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오물을 뒤집어 씌워서는 안 된다. 재판관의 책을 읽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명징하여진다. 바른 언어와 정치적 언어는 다르다. 구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재판관과의 만남은 어쩌면 오래전 준비되었을지 모른다. 오랜 독서 습관이 그것이다. 재판관도 나도 평생을 책과 동행하였으니, 책이라는 친구가 둘의 만남을 주선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독서가 재판관으로 하여금 에세이를 쓰게 하고, 독서가 나로 하여금 학당을 열게 하였으니, ‘호의에 대하여’가 침촌인문학당으로 오게 된 것이다. 좋은 날이 오게 된 것이다. /공봉학 변호사

2025-11-24

GD 그리고 MZ

‘GD’는 싱어송 라이터 권지용이 자신의 성 ‘권’과 이름 지용의 ‘용(龍)’을 영어로 표현한 ‘지드래곤( G Dragon)’의 약칭이다. GD는 조용필, 신해철, 서태지, GD, BTS(방탄소년단)로 이어지는 한국 가요의 맥을 잇는 큰 산맥이자 ‘MZ 세대’의 아이콘이다. MZ는 GD를 통해 자신을 이야기한다. ‘MZ’는 M세대(Millennials)와 Z세대(Generation Z)를 합친 세대다. ‘MZ 세대’라는 용어는, X세대(Generation X· 베이비붐 다음 세대라는 의미), Y세대(Generation Y·X 다음이므로 Y·Millennial과 거의 같은 의미), Z세대(Generation Z·Y 다음 세대이므로 Z)의 X,Y,Z 중 Y·Z를 지칭하는 말이다. ‘X 세대’ (1970~1980년대 청소년기)는 베이비붐 세대 이후 등장한 “정체불명”의 세대로, 산업화와 민주화의 변화를 경험하며 개인의 자아 탐색을 중시했다. ‘Y 세대’(밀레니얼 세대, 1980년대 후반~2000년대 초 출생)는 MF 외환위기, 취업난, 주거난 등 구조적 위기 속에서 성장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개인적 목표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Z 세대’(1995~2010년대 초 출생)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기본값인 세대로, 유튜브. SNS , 스마트폰과 함께 삶을 시작하였고, 자기표현, 다양성, 개인적 정서를 중시하며 기성세대들의 틀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MZ 세대는, 인터넷 모바일 소셜미디어에 친숙한 소위 ‘디지털 원주민’들이다. MZ들은, ‘현실의 자아’와 ‘디지털 자아’ 사이에서 진정한 자아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세대 들이다. 욕망, 불안, 계급, 그리고 ‘나’가 사라진 시대의 자화상들이 MZ들이다. 이들은 자기증명과 계급상승의 강박에 시달리는 세대다. 소비패턴과 이미지가 이들의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GD는 1988년생으로 MZ 세대이다. GD의, 2012년 곡 ‘one of kind’의 가사 중, ‘난 달라, 달라,달라“, 2013년 곡 ’삐딱하게‘의 가사 중, ’난 오늘도 화려한 척해‘ ’모두 나를 미워해. 외로워서 미치겠다‘는 표현들을 보자. 행복한 척, 풍족한 척, 화려한 척, 잘사는 척하는 자신들의 분열된 자아를 고백하고 있다. 겉으로는 화려함을 과시하지만, 안으로는 우울과 고독감을 감추는 디지털 시대의 특징을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다. ’SNS의 나‘는, 편집되고, 보정되고, 조합된 하나의 브랜딩 된 자아이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불안하고, 외롭고, 확신이 없고, 명확한 정체성이 없다. 흔치 않은 발라드 2014년 곡 ‘무제(無題)’에서 GD는, ’솔직하게 말할게. 내가 겁이 많은 건지‘라고 고백한다. 외적 화려함 뒤에서 스스로가 느끼는 내적 고갈의 표현이다. GD를 듣노라면 예술과 철학의 경계를 허무는 느낌을 받는다. GD의 노래가 어디 MZ만의 절규일까. X 세대를 포함한 지금의 장년층이라고 다를까. X들이여 GD를 듣자! 세대 간의 무경계를 위하여! /공봉학 변호사

2025-11-17

좋은 글 퍼 나르기는 이제 그만

책이나 유튜브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나이가 들어서 지켜야 할 3가지’. ‘만나면 안되는 유형의 사람들’, ‘부자들의 습관’, ‘고귀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특징’. 등등. 대부분 그럴듯하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비슷하면, ‘그래 맞아’ 하지만, 다르면, ‘뭐 꼭 그래야 하나’라고 슬쩍 기분이 나빠진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냥 소음 정도로 생각한다. 삶이 한마디로 정의될 수도 없거니와, 생각 아닌 감정으로 그 글을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음 중, 나이 든 사람에 대한 대표적인 경구로,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일단, ‘입을 닫아라’는 말의 뜻은, ‘나이 들어 말이 많으면 안 된다’라는 것일 테고, ‘말이 많으면 쓸데가 없다’는 속뜻이 있다. 게다가 나이 든 사람은, ‘나이를 권위로 내세우는 경향’까지 있다는 것까지 슬쩍 올려 두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말 많은 것 자체가 ‘그냥 꼰대 짓’이라는 게다. 그러면 반대로, 젊은 사람은 시종일관 떠들어도 되고, 쓸데없는 말을 해도 되고, 권위를 내세워도 된다는 것인가. ‘입 닫아라’라는 말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재 가치를 나이라는 단순한 숫자적 가치로 환원한 위험한 통념이다. 언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한 인간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며, 자신을 세계 속에 드러내는 형식이다. ‘인간은 언어 속에 존재한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강요된 침묵은, 존재의 집에서의 추방이자, 인간 실격 선언이다. 여기에 대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겠지’라고 반박할지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말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제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갑을 열어라’라는 말은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재 가치를 돈이라는 단순한 경제적 가치로 환원한 위험한 통념이다. 이 말속에는, ‘노인이 존중을 받으려면 돈을 써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가 바탕에 깔려있다. 열 지갑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막상 지갑이 있다고 치자. 무턱대고 지갑을 열어야만 하는 당위성은 누가 결정한 기준인가. 노인이 존중받으려면 돈을 써야 한다는 사고는, 세대 간의 관계를 ‘결제 거래’로 축소하고, 사랑, 경험, 지혜 같은 비가시적 가치를 제거한 위험한 사회적 언어이다. 하찮은 경구 하나 때문에 자신의 말이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발적 침묵을 학습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이에게 맞는 옷은 결국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조언들은 맥락 없이 윤리적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좋은 글의 유통은, 사유의 과정은 생략되고 감정적 동조만 남는 소위 ‘생각 없는 공감’의 현장이다. 타인의 말은, 나의 말을 설명하는 수단 정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인용은 사유의 시작이 되어야지,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톡에서 좋은 글을 퍼 나르는 사람은, 펌글을 통해 은근히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 과시하는 속내가 있다. 내가 감동 받았다고 상대가 감동 받을 거란 착각은 금물. 예의에도 어긋날 수 있으니 퍼 나르기는 이제 그만. /공봉학 변호사

2025-11-10

앵무살수

‘칼 끝에 피를 묻힌 자 장강의 하류를 건너지 마라’ 한국 무협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는 김성진 작가의 무협만화 ‘앵무살수’의 첫 문장이다. 만화에서 등장하는 젊은 주인공의 직업은 장강 하류의 뱃사공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에게는 평범한 노 젓기 일 이외에 다른 일이 하나 더 있다. 중원에서 온갖 패악질을 다 저지르고 어디론가 숨어드는 중범죄자를 단죄하는 일이다. 법망을 피해 살아가는 이들을 색출하여 직접 형을 집행하는 만화 속 이야기다. 도주하는 범죄자를 태운 나룻배가 포구를 출발하는 장면으로 만화는 시작된다. 나룻배가 장강의 중간에 도착할 때, 앵무새 한 마리가 날아든다. 사뿐히 주인공의 어깨 위에 앉는다. 쪽지를 입에 문 앵무의 깃털이 장강의 물결에 빛난다. 누군가 내린 명령과 금액이 적힌 쪽지를 주인공이 펼친다. 사형! 그리고 엽전 열 닷 냥. 배가 멈추고, 칼이 춤을 춘다. 칼끝에 묻은 피를 유유히 흐르는 장강의 물결에 씻고, 검의 고수는 뱃머리를 돌린다. 이날의 나룻배는 장강의 저편으로 갈 일이 없다. 작년 6월경 포항문화재단 초청으로 육거리 꿈틀로 청포도 다방에서 ‘앵무살수’를 패러디하여 ‘제2회 인문학 강좌’를 한 적이 있다. 10년 넘게 침촌인문학당 사띠스쿨 원장을 하면서 나름 터득한 사유 여행의 한 꼭지로 열어보았다. ‘낭만자객', ‘지성의 몰락’, ‘붓다의 칼, 예수의 창’, ‘생각 죽이기’, '저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마라’ 순서로 다섯 강좌를 성황리에 마쳤다. 주제는 ‘관념 죽이기’였다. 제1회는 칼릴지브란 선생의 예언자를 중심으로 ‘사랑의 타작마당’이라는 주제로 하였었다. 사랑의 개념을 타작하여 껍질을 벗겨보자는 것도 결국은 관념(개념, 생각, 편견 등) 죽이기였다. 두 번에 걸친 강좌는 겉만 달랐지 속은 같았다. 만화 ‘앵무살수’ 속 장강 하류 나룻터 풍경을 관념 죽이기의 소재로 써보았다. 예언자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관념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단죄의 칼부림에 비유하여 보았다. 주인공이 사는 조그만 집, 나루터, 나룻배, 악당, 칼, 앵무새, 주인공, 처형, 그리고 칼 씻음. 이 모두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 개념, 생각들의 환·망·공·상을 제거하는 것과 연결하여 강의하였다. 우리가 극복하여야 할 관념이 만화 속 악당들과 같은 존재라면,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관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이다’라고 짚었다. 관념이란, 때론 삶의 에너지로, 때론 죽음의 에너지로 쓰이는 검의 양날이다. 우리는 생각 때문에 살고, 생각 때문에 죽는다. 악당이란 탈을 쓴 관념이 가끔 우리를 괴롭힐 때,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가. 어떤 기술을 쓸 건지, 어떤 무기를 휘두를 쓸 건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취미활동, 운동, 예술 감상. 지인과 잡담 정도의 무기로 족할까. 만화 속 주인공은 검술의 최고수였다. 만화 속 주인공만큼 고수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명상’이라는 무기가 있다. 나름 든든한···. 우리는 알고 있다. 삶 속에는 건강, 돈, 명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음을. /공봉학 변호사

2025-11-03

정견(正見)과 무명(無明)

이데올로기란, ‘세상을 바라보는 틀’ 또는 ‘어떤 사회나 집단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신념의 체계’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사고의 틀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렇게 봐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안경’인 셈이다. 부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의 부자는, 노력과 능력의 결과물이고, 사회주의적 관점에서의 부자는, 불평등의 구조적 결과물이다(물론, 전적으로 그렇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보는 관점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데올로기가 문제 해결의 참고 사항 정도로 활용되면 매우 유익하게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확고한 소유가 되면 삶이 파괴될 수 있으며, 사회 전체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가치나 신념 체계로 등극하게 되면 그 사회 역시 파괴될 수 있다. 이렇듯 이데올로기는 ‘검의 양날’이다. 이데올로기는, 필요할 때 한 번씩 좋은 곳에 사용하는 것이지, 평생 소유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에 대하여 2500년 전 위대한 처방을 내린 사상이 있다. 불교의 팔정도 정견(正見)이 그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바른길이 팔정도이다. 그중 첫 번째가 정견이다. 정견은, ‘견해를 내려놓는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그 이데올로기를 알되, 나의 견해로 정착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바른 견해이다. 견해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그것이 정견이다. 견해에 집착하여 내 것임을 고집하면, 그 견해로 인하여 평생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 팔정도의 통찰이다. 내 것으로 소유되고, 집착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이데올로기는 망상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망상이 된 이데올로기는, 진리라는 이름의 도덕적 독약이요, 위험한 칼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데올로기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라 경고했다. 견해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 즉, 연기(緣起)의 첫 번째인, 무명(無明)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두꺼운 장막이 처진 방 안에는 빛이 들어올 수 없다. 오직 어둠뿐이다. 생각을 절대화한 사유의 부재는, 빛을 잃고 어둠 속에 빠지기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헛된 망상(이데올로기)에 빠져, 고통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태우고 고통에 허덕이게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름 최고라 자부하는 지성들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망상에 빠져 평생을 허우적거리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다. 평온하고 지혜롭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당장 견해를 내려놓으시라. 나름의 개똥철학, 정치적 견해, 종교적 견해. 이것들이 이데올로기란 망상일 수 있다. 숭배하지 말자. 망상에서 벗어나자. 그것이 좀비가 되지 않는 길이다. 무명의 골방 방문을 열고, 정견의 넓은 마당으로 나가자. 어둠을 뚫고 빛이 찬란한, 열린 세계로. /공봉학 변호사

2025-10-27

저질 정치의 민낯 길거리 현수막

태극기의 물결이 아닌 현수막의 물결이 넘쳐난다. 펄럭이는 현수막은 정치라는 바닥에 발들인 자들의 ‘일방적 자기선전’의 메아리이다. 길가의 아름다운 가로수를 감상할 틈을 주질 않는다. 특히 명절을 전후해서는 더 난리다. 운전에 집중이 안된다. 우리들의 고요하고도 맑은 시선은 온갖 종류의 정치인들이 도배한 현수막에 의하여 잠식당하고 더럽혀진다. 도심을 나서는 순간 이내 기분이 잡친다. 어질어질하다. 내용은 또 어떤가. 정치 초보들은 뭐 그렇다 치자. 기성정치인의 경우는 더 가관이다. 좌. 우가 다를 것도 없다. 누가 이런 저질 정치판을 보고 싶어 하기나 하나. 나름 양질의 정치를 위하여 노력해 봤자 헛수고다. 수준 이하의 현수막이 정치를 혐오하게 만들고, 결국은 정치에 관심을 끊게 만든다. 정치가(사실은 정치가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다)가 거리의 벽을 점유할 때, 시민은 마음의 벽을 쌓는다. 저질 현수막은 시민의 맑은 눈을 흐리는 민주주의의 독이다. 거리의 현수막은 정치의 미숙함을 넘어 시민의식의 피로함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저질 정치의 현수막 난장은, 시민들이 평온하게 거리를 걷고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침해한다. 정치의 품격 따위는 개밥그릇에 던져 버린 지 오래다. 애당초 품위 있는 정치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제발 나의 평온이나 침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행복추구권이 천부인권임을 선언하고 있다. 행복할 권리 중, “보기 싫은 것을 안 볼 권리”가 있다. 누군가에게, 듣기 싫은 말을 지껄이고, 먹기 싫은 음식을 권하고, 보기 싫은 걸 보게 한다면 그것은 폭력이자 범죄가 아니겠는가. 여기에 왜 면죄부를 주어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듣기 싫은 말과 보기 싫은 언어를 현수막에 똥처럼 싸지르는 저질 정치 현수막을 거부한다. 누가 보고 싶다 그랬나.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예의다. 보기도 싫은 사람에게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것은 무례이자, 명백한 행복추구권 침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 구조변동(위르겐 하버마스 저. 1961.)‘에서, ’공론장이 사적이익의 홍보장으로 퇴락할 때 민주주의는 병든다‘고 진단했다. 현수막 정치는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허상‘이다. 그것은 참여를 가장한 일방적 선전이며, 시민의 눈을 빌려 정치인의 자아를 비추는 교묘한 법의 우회다. 도심의 미관을 훼손하고, 시민의 시각과 공간을 강제 점유하며, 공공의 장소를 개인의 선전장으로 변질시키는 행위는 시민의 정신적 환경을 침해한다. 이건 ’시각적 소음‘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정한 힘은 조용하지만, 허약한 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든다‘고 했다. 정치인의 현수막이 늘어간다는 것은 그 정치인이 위기에 빠졌다고 스스로 외치는 꼴이다.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이미지정치, 홍보 정치의 현수막은 사라져야 한다. 현수막에 가려진 도심의 풍경을 시민들에게 되돌려주고, 시민의 눈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기를 바란다. 진정한 정치는, 끊임없는 소통과 실천에 걸려있지, 현수막에 걸려있지 않다. /공봉학 변호사

2025-10-20

질투는 나의 힘

칼 융(Carl Jung)의 ‘페르소나(Persona)’는 라틴어로 ‘가면’을 뜻한다. 페르소나는 ‘타인에게 보여주는 나’이자, 사회 속에서 나의 여러 역할을 상징한다. 직장인, 연인, 친구, 부모···. 이러한 각 관계마다 우리의 얼굴은 다른 가면을 쓴다. 내가 착용한 가면은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진짜 나’를 점점 억압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가면을 진짜로 착각하기 시작할 때다. 가면에 억눌린 진정한 자아는 ‘그림자(shadow)’로 밀려나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분노와 질투, 열등감의 형태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그림자로 밀려난 나의 자아가 형성한 것 중 ‘질투’가 있다. 질투는 타인의 존재 앞에서 드러나는 자기 결핍의 자각이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고 불편해지는 이유는, 내 안에 그것을 향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를 깊게 쓴 사람은 질투를 강하게 느낀다. 겉으론 완벽한 척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불안’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이 바로 질투의 연료인 셈이다. 질투를 떠올릴 때, 우리는 불안과 부끄러움을 함께 경험한다. 불안의 연료를 태우고 피어나는 질투라는 연기는 우리에게 부정적 감정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만든다. 이런 질투 감정을 다르게 맞이하게 해준 사람이 시인 기형도이다.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입속의 검은 잎, 1989)을 처음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질투가 삶을 살게 하는 힘이었다니! 질투는 가면이 깨질 때 나는 소리이며, 아픔 속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자아이다. 질투가 병든 감정이 아니라, 나의 참모습임을 기형도는 자신의 입속의 검은 잎을 통하여 말해 주었다. 그렇다! ‘질투는 나의 힘’이다. 내가 다시 일어나서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게 해주는 그 무엇인 셈이다. 질투를 온전하게 내 것으로 긍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질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명절을 지내고 나면 보통은 무기력증에 빠진다. 그 무기력증의 상당 부분은 질투로 소비한 감정의 후유증 때문일 수 있다. 간만에 만난 지인, 친척, 친구들이 늘어놓은 자랑질로 인하여 온통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력증이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질투의 감정이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마음껏 질투를 하자. 불안을 태우지 말고, 이제는 질투를 연료 삼아 태우자. 아래는 ‘질투는 나의 힘’의 전문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니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굿바이 형도! /공봉학 변호사

2025-10-13

노욕(老慾)과 몰염치(沒廉恥)의 난장

노욕은, 늙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요,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인생의 후반기에도 지나친 욕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염치가 있을 리 없다. ‘노년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자는 삶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세네카의 경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노욕의 추함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안다. 노욕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추하게 되니 염치는 뒷전이다. 지나친 욕망은 세대와는 무관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노욕에는 ‘물러나지 않음’이라는 상품이 하나 더 추가된다. 노욕이 젊은이의 욕심보다 더 추하게 보이는 이유다. 욕망의 1+1이다. 물러나지 않음은 ‘놓지 않음’과 연결된다. 물러나지 않고 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황혼에 접어든 사실(죽음이 가까워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의 자각’은,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통로’라 보았다. 노년에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죽음에의 자각이 필요한 이유다. 염치없음은 또 어떤가. 흔히 하는 말로, ‘부끄러운 줄 좀 알아라!’라는 말이다. 순자는 예론(禮論)에서, ‘사람이 염치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하다.’(人而無恥, 不如禽獸)라고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아무 데나 마구 들이댄다. 쥐뿔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 체력이 바닥을 기는 사람들, 세상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한때 잘 나갔다는 이유로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를 가리지 않고 설쳐댄다. 특히 권력을 탐하려는 노욕은 보편적 도덕법칙이 아니라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판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욕망은, 공동체의 미래를 빼앗고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억압한다, 정치적 노욕은 공동체를 사유화하는 일종의 도덕적 배임이자 철학적 자기 한계의 망각이다. 노욕은, 죽음이 두려워 삶에 집착하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신적 빈곤이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노욕에 설쳐대는 순자의 몰염치들이 득실댄다. 한평생 호의호식하고도 또다시 더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몰염치의 난장판이다. 이들에게는 후계자는 없다.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모조리 자신이 하고야 말겠다는 처절한 의지를 불태운다. 후학들을 키울 생각은커녕, 싹트기 전에 잘라버리기 바쁘다. 그 기세가 너무나 맹렬하여 구토가 나고 어지러워 쓰러질 지경이다. 하기야 노욕의 난장판이 어디 여기뿐이겠는가마는.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은, ‘나이가 들면 사욕을 줄이고 자연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참으로 공자님이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 50은 청춘이니 현대의 지천명은 70 정도로 보면 적당할 듯하다. 70 전후에도 노욕에 휩싸여 몰염치의 난장에서 추어대는 노장들의 칼춤이 볼만하다. 춤추는 자뿐만 아니라, 구경꾼들도 조심해야 된다. 그 무대가 어떤 난장인지, 춤꾼이 몰염치한 인지. 단디 보자. 비싼 관람료 지불하고,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젊은이들을 망칠 수 있다. 제발 단디 보자. /공봉학 변호사

2025-09-30

쇼펜하우어 VS 니체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권태가 인간 실존의 두 얼굴이라 보았다. 욕망은 삶의 본질이자 고통의 원인이요, 권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드러나는 삶의 공허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이렇듯 욕망과 권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회귀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명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새겼다.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카잔차키스 자신은 욕망하지 않았으므로 두렵지 않았고,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욕망하지 않으면 불안도 없다. 고통의 뿌리가 욕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러한 욕망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생존에의 의지’의 핵심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Das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에서 밝힌 의지는, 생을 추동케 하는 맹목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욕망이다. 싯다르타의 고성제(苦聖諦. 삶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맹목적 의지(욕망)로 치환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더라도 ‘권태라는 악마의 등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태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존재가 아무런 욕망을 하지 않을 때도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 상태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권태는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피로와 무의미’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라 보았다. 악의 꽃 마지막 부분에서, 권태를 괴물로 형상화하여 탐욕, 방탕, 허영을 능가하는 궁극의 악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은 권태 속에서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술, 마약, 매춘, 심지어 폭력, 죽음까지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보들레르에게 권태는, 악의 꽃을 피우는 ‘토양’인 셈이다. 욕망과 권태의 윤회 속에서 인간은 허덕일 수밖에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에 대하여 니체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 쏘아 부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억제하거나 부정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니체에게는 자기실현과 자기극복의 특급열차가 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존재 자체의 무의미성이자 삶의 고통과 허탈감으로 드러나는 권태라는 이름의 악마는, 니체에게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삶을 자극하는 천사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욕망과 권태로부터 구원받는 방식도 달라진다. 쇼펜하우어는 금욕, 관조, 욕망과 권태의 줄임과 제거를 주장하지만, 니체는 자기 극복, 새로운 가치창조, 아모르파티를 통해 욕망과 권태를 나의 일부로 포용하여 적극 수용하길 권한다. 예술의 경우는, 쇼펜하우어에게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일시적 해방 또는 위안의 도피처이지만, 니체에게는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적극적 힘의 놀이터이다. 두 사람이 대하는 욕망과 권태에 대한 태도와 해결 방안 중 누구 것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니체를 따른다. 나로부터 분리하여 처리하여야 할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영원히 함께하는 동반자요, 내 삶의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자. 안녕! 반가워~ 나의 욕망과 권태야! /공봉학 변호사

2025-09-22

눈먼 자들의 도시

‘직시(直視)보다 왜곡(歪曲)에 편승하기. 신념은 깡다구의 결과물. 최고의 날라리가 되어볼까. 생각을 멈출까. 눈먼 사람은 밤과 낮이 없거든. 그렇게 굳히기 한판의 삶. 앞니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찬란하지 않더라도. 기어코 개겨볼까, 몰라, 젠장.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그러나 사랑이 독약(毒藥)이라해도.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이 해독제인 걸, 나라 사랑 말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출처. ‘이우근 시인과 박계현 화백의 포항 메타포’ 경북매일신문) 시인 이우근의 시, ‘눈먼 자들의 도시’ 전편이다. 왜곡된 나라 사랑에 대한 이토록 통렬한 관찰이 있었나 싶다. 시인은, 제목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노벨 수상작)’에서 빌려왔음을 자작 시평에서 고백한다. 눈먼 자들이 들끓는 도시가 시인의 맑은 눈을 통하여 직시된다. 눈먼 자들의 하울링이 시인의 가슴을 헤집는다. 눈먼 자들의 신념은 처연하다. 막걸리 술판의 김치 한 조각 안주에서 묻어난 이빨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그들은 막걸리 묻은 입술에서 신념을 토해낸다. 쏟아져 나오는 말을 듣는 자도, 이해하는 자도, 사실은, 아무도 없다. 공허한 하울링. 몰라. 젠장. 그냥 개겨보는 거지 뭐.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사라진 그 자리는 정치가 대신할 거라 예언했다. 교회당과 절간에 다니던 사람들이 길거리 정치판으로 쏟아져 나온다. 정치가 신의 자리를 대신한 풍경이다. 한순간에 모든 사람이 시력을 잃는 기묘한 사건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시인의 손끝에서 이 시대의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시인은, 이념과 아집에 눈먼 자들의 폭력과 욕망을 꿰뚫어 본다. 공동체의 파괴를! 도덕적 양심과 이성적 통찰의 상실을! 그들의 말과 몸짓을 개떼의 하울링에 은유한다. 시인이 표현한 개떼는 ‘집단적 실명’이다. 정치적 극단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은 세상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눈을 감는다. 이렇게 실명한 자들은 단순한 선악, 음모론적 사고, 적 아니면 동지라는 흑백 구도를 맹종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돈 속에서 확실성을 갈망하는 인간의 불안을 달래주는 달콤한 독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사람을 소환한다. 실명을 치료하는 약은 결국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그래 사람이지! 사람이면, 사람을 사랑해야지, 나라 사랑 말고. 시인의 마지막은 늘 사람이다. 시인의 시 ‘똥개’ 전문을 감상해 보자. ‘나는 존재 밖이다. 태생의 한계를 직감하고 능동적으로 가장 낮은 곳을 안다. 나는 똥개. 나의 유전자의 본질. 대문 앞의 경계의 삶. 차가운 공기 먼 산, 그림자와 새벽의 안개는 나의 이웃. 그 무엇이 나의 적인가 아직 몰라서 조그만 인기척에도 나는 짖는다. 다만 짖지 않으려 한다. 침묵은 스스로 자처해야 온전히 얻을 수 있다. 밥그릇에 비가 내린다. 그리하여 주인공 없는 삶.’(출처 ’개떡같아도찰떡처럼‘ 이우근) 똥개는 침묵하고 싶다. 어찌하면 침묵을 온전히 얻을 수 있을까. /공봉학 변호사

2025-09-15

물 맛에 대하여

순수한 물(H2O) 자체는 사실상 아무런 맛이 없다. 실제 우리가 마시는 물은 다양한 무기질과 철 망간 등의 미량 성분이 용해되어 있어 맛이 달라진다. 여기에 물의 온도, 지역, 마실 때의 상황에 따라 물의 맛이 더 다양해진다. 오래전 어떤 드라마 장면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물맛을 아느냐’라고 물었던 장면이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물맛이 그 맛이지 따로 무슨 맛이 있겠느냐는 식의 생각이 지배했던 30대쯤이었던 것 같다.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서 시골 산자락에 터를 잡은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정원에서 하루가 시작되고 정원에서 하루가 마감된다. 따로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노동량이다. 전원생활의 절반은 풀과의 전쟁이다. 깨끗한 정원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풀을 뽑아야 한다. 잔디를 깎는 것도 사실은 풀을 뽑는 것과 유사한 행위이다. 꽃과 나뭇가지들도 적당하게 정리하여 주지 않으면 금방 볼썽사나워진다. 마당은 나의 헬스클럽인 셈이다. 시골에 집을 지을 때 뒤뜰 황토방을 지어주신 어르신께서, ‘공 변호사는 따로 운동할 필요가 없겠구먼’ 하시면서 빙긋이 웃으셨던 한마디가 아직 귓전에 어른거린다. 그 말씀은 사실이 되었다. 마당 일을 마치고 생수병을 들이킬 때면 문득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운동이나 육체노동 이후에는 계절을 불문하고 몸에서 열이 난다. 추운 겨울에도 노동 후에는 시원한 물을 찾게 되는 것이다. 특히 여름의 마당 일은 많은 양의 물을 필요로 한다. 어떤 때에는 생수 몇 통을 들이킨 적도 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맛이 있었던 것은 갈증 날 때 마시는 시원한 물이었지 싶다. 같은 이유로 밥맛은 배고플 때가 최고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그 뜻이리라. 현대는 물맛과 밥맛을 잊은 시대이다. 체내 수분 유지를 위해 갈증 나기 전에 물을 섭취하여야 하며, 위장에 부담을 주는 폭식을 피하기 위해 때 맞춰 밥을 먹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먹고 마신다. 갈증 나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니 최고의 맛난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밥상의 요리도 웬만해서는 맛나다는 칭찬을 듣기 어렵다. 시원한 물맛은 필요와 충족, 결핍과 해소의 원초적인 합일이다. 갈증이라는 결핍이 땀 흘린 노동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물은 단순한 수분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그 무엇이다. 바야흐로 땀을 흘리지 않는 시대가 오고 있다. 아니 벌써 왔을지 모른다. 사람의 노동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의 물맛까지 빼앗고 있지 않은가. “노동은 최고의 사랑.” 노동으로 흘린 땀방울이 일으킨 갈증을 추구하자. 최고의 물맛을 즐기고 싶은가, 그러면 갈증을 일으켜 보라. 최고의 식사를 하고 싶은가, 그러면 굶어 보라. 땀을 흘리지 않고 시원한 물맛을 기대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현대인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갈증이 나질 않고,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육체노동을 할 일이 없으면 운동이라도 하자. 최고의 물맛을 보기 위하여 시원한 생수 한 통 들고 운동장으로!! /공봉학 변호사

2025-09-08

잘못된 만남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얼마나 듣기 좋은 구절인가. 듣는 순간 따뜻한 사랑이 엄습해 온다. 이웃이 정겨워진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나와 이웃은 서로를 사랑하는 따뜻한 사이인 것 같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해 보자. 내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나의 이웃사랑이 진정한 헌신인지, 아니면 자기 위안 인지를. 이웃사랑이라는 감정 속에 숨겨진 동기와 욕망은 따로 있지나 않은지. 우리는 수시로 이웃(지인)을 찾는다. 우리가 이웃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고독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이웃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싶어서? 이웃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어쩌면 우리들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여 이웃에게 달려갈지 모른다. 고독이란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자기애의 결핍을 치유하기 위해, 이웃들에게 달려간다. 이웃을 만나서 그 이웃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이웃의 잘못을 핑계 삼아 나 자신을 합리화한다.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이웃에게 나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대부분의 이웃사랑은 위장된 자기애일지 모른다. 자기 내면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타인과 관계 맺고, 관계를 꾸며댄다. 이때의 이웃사랑은 진정한 베품이 아니라, 자기 결핍이다. 오늘도 우리들은 고독과 권태, 자기 상실감에 떠밀려 이웃에게 달려간다. 이웃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나를 속이고, 이웃을 속이지는 않은지. 진정한 이웃사랑은, 이웃의 인정이나 위로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견디고 그 힘으로 타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이웃을 내 결핍을 충족시키는 도구가 아닌, 하나의 독립적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가 진정한 이웃사랑이다. 나의 고독을 견딜 줄 알고 타인의 고독을 존중할 때, 비로소 이웃사랑은 실천된다. ‘타인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타인을 얽어매고 동시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장치일지 모른다. 좋은 말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이웃사랑은 도덕적 미사여구로 소모된다, SNS의 ‘구독’과 ‘좋아요’처럼. 형식적 기부, 보여주기식 봉사활동은 타인 속에서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의 표출이자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타인을 끌어들이는 교묘한 위장 전술이다. 이런 것들이 이웃사랑이라면, 나는 이웃사랑을 거부한다. 이웃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이웃과 통화를 하고, 이웃의 SNS에 좋아요 누른다. 커피숍을 나설 때, 전화를 끊을 때, 좋아요를 누른 후에도 나의 이웃사랑은 그대로 인지 궁금하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다’라는 공자의 한마디가 이웃사랑의 시작일지 모른다. 이웃을 통해 나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웃은 없다. 말 안해도 다 안다. 나도 알고, 이웃도 안다. 내가. 그대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공봉학 변호사

2025-09-01

뽕짝에 관한 단상

예술을 정의할 때 가장 자주 거론되는 가치 중 하나는 ‘독창성’이다. 어떤 작곡가가 표절 없이 작곡하였더라도, 같은 멜로디가 수백 년 전에 이미 존재 하였던 것이라면 이 음악의 예술적 가치는 부정된다. 위대한 예술가를 말할 때, 우리는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형식과 감각을 창조한 사람들을 떠 올린다. 베토벤이 교향곡의 문법을 바꾸었고, 피카소가 회화의 시선을 해체한 것처럼, 예술은 낯익은 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힘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 이것이 예술의 독창성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트롯트는 다소 난처한 위치에 놓인다. 일정한 2박자 리듬, 단순한 코드 진행, 반복되는 멜로디와 주제로 일관한다. 형식적 실험이나 조성의 파괴 대신 익숙함 속에서 감정을 끌어낸다. 그래서 흔히 ‘음악성은 부족하다’거나 ‘저급한 대중 오락‘이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가 따른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을 오직 형식적 독창성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독창성을 떠난 예술은, 고통을 미화하는 ’위대한 거짓말‘이자, 인간의 삶을 다시 ’예‘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신비한 마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트롯트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도 애절한 정서와 사랑을 노래하며, 삶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제공한다. 반복의 진부함보다는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우위를 점하는 곳이 뽕짝의 필드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을 ’인간이 세계와 화해하고, 삶을 긍정하기 위한 근원적 장치‘로 보았다. 니체에게 예술이란, 진리에 대한 인식 행위보다 더 깊은 차원의 힘이며,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묘약이다. 진리가 삶의 무의미와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예술은 고통을 형상화하고 미화한다. 우리의 삶에게, ’그래 좋아‘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다. 트롯트는 묻는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가 어디냐?‘ 라고. 이 질문을 던진 트롯트가 현대 미학을 인도의 향불(정의송 노래)처럼 흔들리게 만든다. 미셀 옹프레는 ’예술의 이유‘에서 ’고상한 미적 영역이라는 관념의 신전‘에서 예술을 끌어내려, 예술이 초월적 그 무엇이 아닌, 감각적 그 무엇임을 선언한다. 예술을 민중적, 감각적, 쾌락적 힘에서 찾고, 고통을 노래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면 그것이 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맛난 음식을 한입 머금고 ’오! 예술이다!‘라고 감탄할 때, 예술은 그저 맛난 것일 뿐이다. 예술의 독창성을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술이 삶에 봉사하는 그 무엇으로 볼 때, 우리는 예술의 대중성을 또 다른 가치 창조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이 음양으로 짜여있듯, 예술도 순수와 대중이 함께 한다. 거실에서는 조용히 클래식을, 차 안에서는 뽕짝을 감상하자. 이왕이면 한 곡 뽑아도 좋고. 이 맛에 사는 것이 아닐까. 예술의 진정한 이유가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감각을 해방하는데 있다면, 트롯트는 그 자체로서 충분히 예술이리라. 오늘 퇴근길 차 안에서는 뽕짝 한 곡을. 쿵짝 쿵짝~~ /공봉학 변호사

2025-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