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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지금은 베이지안 시대!’ 인공지능 시대를 함축한 한 줄 문장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목이 간질거리고 몸이 으슬으슬 떨리면, 우리는 ‘감기에 걸렸을 수도 있다’ 는 가설을 세운다. 그런데 이어서 열이 나기 시작하고 기침까지 나오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수정하고, 믿음을 조정하며 살아간다.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인간은 기존에 의지하였던 절대적 진리나 확실성을 버리고, 더 나은 예측과 점진적 갱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확실성을 추구하던 시대에서 불확실성을 계산하는 시대로, 고정된 진리에서 유연한 믿음의 조정으로, 패러다임이 이동한 것이다. 흄은, ‘우리는 확신없이 살아간다’ 고 말했고, 포퍼는, ‘우리가 틀릴 수 밖에 없다’ 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베이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 베이즈의 정리에 따르면, 인간은 ‘확률로 사유’한다. 우리는 외부 세계를 직접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만든 가설모델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예측하고, 감각과 실재 차이를 줄이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측한 것’을 본다. 현대 신경과학은 이 베이즈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인간의 뇌는 베이지안 기계’ 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엘런 튜링, 폰 노이만, 존 내쉬 그리고 토마스 그리피스 같은 학자들에 의하여 확률, 정보, 게임이론, 심리학과 인공지능을 통합하여 생각하는 시스템에 대한 수학적 모델을 구축하게 했다. 이러한 학문적 기풍은 이후 캘리리포니아, MIT, 그리고 옥스퍼드 등지의 베이지안 인지과학과 인공지능 모델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모든 생명체는, 자신을 예측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려 하며, 예측 오차를 줄여 자기 보존을 시도하는 기계이자 지능’이라는 ‘프린스턴의 자유에너지 이론’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예측하는 기계이다. 베이지안은 불확실성을 계산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예측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고, 이에 필요한 자유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하여 행동하고, 학습하고, 감각을 조절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 인공지능의 학습 방법이 이것이다. 인공지능은 예측하는 존재이다. 단순히 계산하는 기계를 넘어 예측하고 추론하며, 자기 상태를 갱신한다, 인공지능은 확률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스스로 데이터를 수용해 새로운 믿음을 형성한다. 우리는 베이지안 시대에서 살고 있다. 프린스턴이 남긴 자유에너지의 길 위에서 행복한 삶을 예측하는 존재이다. 더불어, 인공지능이라는 진화하는 새로운 지성과 동행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도 인공지능도 같은 방식으로 예측하고 진화한다. 한 시대가 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자! 도로교통법이 존재 하지 않는 세상. 자동차의 소유가 필요 없는 세상. 차로 인하여 사람의 목숨이 좌우되지 않는 세상.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아니한가!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차를 줄이고, 갱신하므로 존재한다’ 토마스 베이즈와 일런 머스크를 위하여 건배!! /공봉학 변호사

2025-06-30

왜 부자에게 투표하는가

평생 가난에 찌들어도 매번 부자에게 투표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그들은 쉽게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애국심의 원천이 분노인 사람이 있다. 사실을 무시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냉철한 이성이 아닌 도덕적 잣대로 한 표를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 가난하지만 진보가 아니라 외치는 사람이 있다. 부자보다, 똑똑한 사람을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환경오염으로 건강을 잃고서도 오히려 환경규제를 반대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세금 부담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대기업 감세를 외치는 정당의 깃발을 흔들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바른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항해의 목적은 대부분은 편안함과 즐거움! 배가 도착할 최종 목적지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다. 그저 바람 부는 데로 흘러갈 뿐. 이들이 행사하는 한 표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자신이 되고 싶은 계급? 실패한 부자? 지식인에 대한 혐오? 믿고 싶은 이야기? 자신을 노예로 만든 사람들의 신화? 가난의 이데올로기? 이해 아닌 소속감? 이들이 정치를 이야기할 때, 분노는 설득보다 빠르며, 자신의 고통보다 남의 특혜에 더 분노한다. 이들에게는 적이 필요하다. 적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라도 공격한다. 그냥 적이면 된다. 그 적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누군가 만들어 준 적에 대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칼을 휘두른다. 그 칼부림으로 이들은 더욱 피폐해진다. 혹시 내가 이들에 속하지 않은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정치적 감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하여 작동한다. 이때의 다수는 이성적 다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다수가 감정적 다수라면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성적 다수는 감정적 다수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견해가 분노로부터 출발하였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견해를 내려놓기를 권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들의 정치적 견해란 대부분 힘 있는 자들이 설계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힘 있는 자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이들의 분노를 제공받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더 큰 분노를 요구한다. 애국심에 불타는 이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암송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목을 조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내쫓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표를 던진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가정에 헌신적인 가장들임에도 자기 아이들이 대학 교육이나 적절한 의료혜택을 결코 받을 수 없는 일에 조심스레 동조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몰락한 공업 도시로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날릴 정책들을 남발하는 후보자에게 압승을 안겨주며 갈채를 보낸다. 이곳이 어디인가? 분노는 애국심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상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 이들에게 정말로 정치의 적이 있다면 그 진짜 적은, 이들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평범한 그들(이웃)이 아니라, 이들에게 정치적 견해를 설계한 힘 있는 자들(권력자, 정치인, 재벌, 언론사, 엘리트)일 가능성이 많다. /공봉학 변호사

2025-06-23

제사에 관한 에피소드

오래전 일이다. 친동생처럼 지냈던 경남에 살고 있는 후배 부부가 갑자기 찾아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부부의 고민 사항이 하나 있는데, 나에게 그 답을 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부 사이의 고민 사항이라는 게 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동생 부부가 나에게 던진 질문은 의외였다.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요?” 듣고 나서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이혼 상담보다 더 심각한 부부의 분위기가 나의 웃음을 안으로 들이키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지난 세월 제사로 얼룩진 동생 가족의 일상이 그려졌다. 나의 답변에 따라 한쪽은 완전하게 패배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부부에게 두 가지 요구조건을 걸었다. 위대한(?) 답변에 대한 나름의 대가를 요구한 셈이었다. 제사에 대하여 일찍이 결론을 내고 있었던 나의 입장도 있었지만, 나의 답변으로 인하여 한쪽이 입게 될 상처가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첫째, 나의 답변대로 실천할 것, 둘째, 이 결정으로 인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어떠한 원망도 하지 않을 것. 부부는 맹세하였다. 답변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겠노라고. 절대 상대를 원망하지 않겠노라고. “지금 이 순간부터 제사는 지내지 마라” 그때, 동생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제수씨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스쳤던 걸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평소 완고한 성격의 동생은 자신의 완전한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답을 구한 상대가 왜 나였는지, 무슨 연유로 제사의 생사를 결정하려고 하였는지의 사연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제사에 대한 위대한 대화가 있다. 최시형과 손병희 사이에서 주고받은 대화이다. 의암이 물었다. “스승님 제사란 무엇인가요?” 해월이 답하였다. “위패를 너 자신을 행하게 하는 것” 즉 제사는 자신을 위해 지내는 것이라는 통찰이 담긴 대화이다. 나에게 있어 제사라는 단어는 옛말이다. 나는 매일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따로 제사를 지낼 필요도 없다. 제사는, ‘조상이 후손에게 바라는 그 무엇을 실천하는 행위 자체’라고 생각한다. 위패를 자신을 향하게 한다는 것은,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어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하에 더 잘 살아가기를 스스로 다짐하라는 뜻이 아닐까. 제사를 고집하는 사람의 내면세계에는 욕망과 집착 및 권위라는 달갑지 않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할 가능성이 많다. 제사는 오래된 잘못된 문화라 생각한다, 늦었지만 과감히 제사상을 치우자. 진정한 제사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천 번의 제사보다, 한 번의 가족 나들이가 나으리라. 동생 부부가 하동으로 내려간 이후 지금까지 계란이 끊이질 않는다. 답변에 대한 실천의 징표이기도 하지만, 실천 이상으로 얻은 것이 있다는 뜻이리라. 인문학당 도반 한 분이 나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질문한 적이 있다.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굳이 깨닫고 싶다면 그냥 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 나의 답이었다. 단지 하지 않음으로써, 삶의 많은 부분에서 도에 이를 수 있다. 술 담배 끊으면 되고, 싸우지 않으면 되고, 화내지 않으면 된다. 제사! 일러 무삼하리요. /공봉학 변호사

2025-06-16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믿음에 관한 뇌과학적 통찰이 있다. 모든 믿음은 뇌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본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보는 존재이며. 무엇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믿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 실재한다는 것은 그냥 환상이요, 착각인 셈이다. 믿음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뇌에 대하여 알아보자. 재생되지 않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 1.5 키로그램의 무게, 1.500cc의 부피, 인체 에너지의 20% 가량을 소비, 전기적 신호와 뇌 신경전달물질에 의하여 작동, 캄캄한 두개골 속 존재, 산소와 포도당으로 생존. 이것이 뇌의 대략적 구성표이다. 주요 뇌 신경 전달 물질은, 글루탐산, 가바, 아세틸콜린,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엔돌핀,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히스타민 등이며, 이들 중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탐산이 80~90%,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가바는 10~15%로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나머지는 의외로 전부 1% 정도로 분포한다. 뇌 신경 전달 물질은 호르몬과는 유사하기는 하나 다른 물질이다. 인슐린, 코르티졸, 에스트로겐, 아드레날린 등은 호르몬 종류다. 뇌 신경전달물질은, 신경세포 말단에서 분비되며, 매우 짧은 간극과 전달시간이 매우 빠른 것에 비하여, 호르몬은, 부신, 갑상선, 췌장 등 내분비샘에서 분비되어 혈류를 통해 전신으로 전달되고 간극은 매우 길며, 전달 속도도 느린 편이다. 신경전달물질 중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은 호르몬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작용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마음은 물질이다’라고 정의하더라도 별다른 반박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뇌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는 지각, 인지 또는 감정 작용이다. 믿음은 보는 것보다 먼저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념이 먼저이고, 논증은 나중이다. 믿음은 패턴의 인식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보고 ‘호랑이다’라고 잘못 믿더라도 생존 확률은 높아진다. 이러한 패턴성 탐지는 종종 음모론과 미신으로 연결된다, 나아가 믿음은 도파민과 뇌 보상체계에 의존한다. 뇌의 도파민 시스템은 신념이 강화될 때 보상을 제공한다.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기존의 신념과 부합하면 긍정적인 감각을, 그렇지 않을 때는 거부반응을 느낀다. 이러한 믿음은 개인의 뇌에서 시작되지만, 사회적 집단과 문화적 분위기를 통해 고착화 된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들을 심각하게 통찰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믿음이 우리네 삶을 힘들게 하거나, 심지어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신앙, 정치적 신념, 역사관, 내세관 등등. 여기에 믿음이 개입되지 않은 부분이 단 한 곳이라도 있는가? 서두에 언급한 믿음의 대상은 전부 환상이요 착각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너와 내가 믿기 때문에 믿을 뿐이다. 그 믿음이 삶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한다면야 무슨 말이 필요할까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공봉학 변호사

2025-06-09

5060의 2030 사랑

‘자식에 대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자식 사랑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온전하게 소유한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식의 실패이므로, 모든 부모의 자식 사랑은 불완전하다.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결국은 자식을 망치는 왜곡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지 않은가. 자식은 활의 시위를 떠나가는 화살과 같은 존재이다. 활이 할 일은, 자식이라는 화살이 멀리 똑바로 나아가도록 최대한 자신을 휘어지게 하는 것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어디로 갈지, 얼마나 갈지, 활은 알 수도, 간섭할 수도 없다. 태어났지만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함께 있지만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생명 자체가 재생을 염원하는 그 염원의 아들이자 딸이다. 부모는 자식이 지은 생각이라는 집속으로도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충고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일 뿐. 우리들의 소중한 자식들인 2030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때는 귀엽고 순한 유치원생이었고, 중·고등을 지나 대학입시를 향해 달렸던 아이들이 지금은 취업난, 주거난, 관계의 단절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다. 지난 세월동안 2030들은 사이버공간에서 다시 탄생하였고, 그곳이 그들의 현실이 되었다. 5060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은 5060의 세계로 초대받는 것조차 꺼려한다. 이해하지 못하므로 대화는 단절되었다. 누가 누구를 이해하여야 하는지조차도 애매해졌다. 세대 차이가 아닌, 공유영역조차 없는 세대 단절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의 다른 인류들이 되었다. 밥상머리에서는 침묵이 흐르고, 5060들은 2030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의 상당수는 페미와 잰더 갈등 속에서 공정이라는 단어의 개념조차 의심한다, 생명이 염원하는 따뜻한 체온의 교감을 멀리하고, 사이버공간의 차가운 위로를 선호한다. 부모와 자식이 갈라지고, 남녀가 갈라지고, 정치적으로 분열되었다. 활의 시위를 떠난 화살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얼마나 멀리 가버렸는지 5060들은 알지 못한다. 오호 통재라!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곳에 있는지 모른다.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사라졌고, 단절되었다. 무엇이 되어야 하며, 무엇을 이루어야 하며,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이기면 누가 져야 되며, 누군가 살아남으면 누군가 죽어야 되지 않은가. 이제 우리 모두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서로를 알아야 하고, 이해하여야 하며,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세계를 긍정하고, 사랑하여야만 한다. 무엇이 그들을 여기까지 오게 하였는지에 대하여 깊이 사유하여야 한다. 2030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누군가의 자식이다. 보라, 그들의 인생을. 어떤가. 잘 된 인생. 못 된 인생. 그런 저런 인생. 전부 다르지 않은가. 부모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하여 자식의 실패를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 2030이 공정이라는 단어를 의심하였듯, 5060은 실패라는 단어를 의심하자. 세상엔 성공한 인생. 실패한 인생 따위는 없다. 다만 ‘그런 인생’이 있었을 뿐이다. 자식의 실패조차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사랑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 /공봉학 변호사

2025-06-02

인간이 그리는 무늬, 침촌 인문학당

인문이란 무엇일까. 그 정의는 어렵지만,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정도로 하자. 인류 탄생 이후로,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수많은 무늬를 그려왔다. 그 무늬는 다양하다. 문학·철학·역사·종교· 언어· 예술 등등. 우리의 조상이 그렸고, 당신과 내가 그리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그릴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어떤 무늬의 그림을 그렸는가. 자신의 과거· 현재·미래의 그림을 감상하고 통찰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또 본다.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예술을 사랑하였으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명상하였다. 2014년 봄, 포항시 북구 장성동 소재 침촌문화회관 1층 70여 평의 공간에 퀘렌시아를 개설하였다. 틈틈이 공부하여 쌓은 나름의 결실을 나누고,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내었다. ‘인문학당 침촌 싸띠스쿨’ 1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명상, 차와 음악, 그리고 인문학의 순서로 세 시간 동안 노는 곳이다. 변호사가 무슨 저런 일을? 곁눈질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좋은 일이니 그냥 가면 될 것이었다. 첫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M.O.S.T.(mindscience origin sati technic) 풀이 하자면, ‘알아차림에 기반한 마음과학 기술’ 정도이겠다. 명상은, 과학이라는 근거에서 출발한다.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에 기반한 내면 소통 과정이다. 걷기 명상과 호흡명상으로 ‘알아차림 기술’을 연마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조건들에 도전장을 내밀고, 자신과 끊임없는 내면 소통을 하는 시간이다. 둘째 시간은 ‘차와 음악’의 시간이다. 정갈한 차 한잔과 음악 속에서 침묵과 담소로 힐링의 시간을 가진다. 마음 편하게 차 한잔 나눌 수 있으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리라. 셋째 시간은 ‘인문학 강의’ 시간이다. 학당의 기본 교재는, ‘MOST’(붓다빠라 반테 저), ‘뇌 생각의 출현’(박문호 저),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 저), ‘거의 모든것의 역사’(빌브라이슨 저), ‘빅 히스토리’(데이비드크리스천 저)로 출발하였으며, 이 이외에도 많은 교재를 도반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형식으로 공부하였다. 학생이 스승이요 스승이 학생인 학당, 최고의 학생이 최고의 스승인 곳. 가르침은 없다. 스승이 된 자는 자신의 무늬를 보여주고, 학생이 된 자는 그저 감상할 뿐이다, 학당이 위치한 건물은 전통을 자랑하는 수원백씨 참판공 종회 건물이다. 5층의 대규모 건물로 이쁜 정원, 주차장 시설까지 완벽하다. 평소 건물관리가 매우 잘 되어 있는 건물이다. 학당이 지금까지 잘 운영되어 온 것은 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내공을 닦는 곳이요, 쉬는 곳이요, 지식을 쌓는 곳이다. 오늘도 자유롭고 행복한 사유 여행은 계속된다.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가 생각난다. “여기 명상과 차, 음악과 지혜가 흐르는 아름다운 학당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리고 당신이 온다 한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숨 쉰다. 고로, 존재한다.’ /공봉학 변호사

2025-05-26

행복의 저편-칼릴 지브란을 회상하며

누군가로부터, “행복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그때 아마도 대답을 망설였을 것이다. 행복은 드러나는 것이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행복은 찾는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 행복을 찾아보라. 찾지 못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행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그 무엇이므로. 존재하지 않기에 찾을 수도, 추구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늘도 항해를 떠난다. 행복이라는 섬을 찾아서. 하지만 지금까지 그 섬에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충분히 만족하여도, 당신의 손은 만족한 몸의 맨살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 안달하며, 충분히 행복하여도, 당신의 귀는 행복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한다. 손이 행복의 맨살을 만지는 순간, 행복은 이미 당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저 멀리서 당신에게 손짓할 것이다. 귀가 행복을 듣게 되는 순간, 행복은 이미 저 산 너머 메아리로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만지지 않고, 듣지 않을 때만 온전히 당신에게 머물기에. 행복은 ‘지금 이순간’ 당신에게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우주 속 빛의 속도처럼 일정하게 빌트 인(built-in) 된 그 무엇이 아니라, 삶에서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사건들의 연속일 뿐. 주위를 둘러보라. 행복이 널려 있지 않은가. 고통이 찾아오면 당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행복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 고통은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행복의 동반자. 고통은 상처받은 행복을 치료하기 위하여 당신의 내면이 내미는 쓰디쓴 약. 행복이라는 의사를 믿고, 고통이라는 약을 안심하고 드시라. 그리고 친구처럼 고통과 대화하시기를. 행복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을 껴안은 존재가 빚어내는 빛이요, 슬픔이 함께한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요,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자는 말한다. ‘삶이 그대를 괴롭힐 때에도 그 괴롭힘 속에 감춰진 선물을 찾으라고, 기쁨과 슬픔은 서로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고통과 기쁨은 하나의 줄기에서 태어난 형제. 고통은 기쁨을 품기 위해 어두운 땅속으로 움추린 씨앗이요, 기쁨은 고통이 껍질을 벗기고 드러낸 맨얼굴이다. 기쁨은 고통의 어깨 위에 핀 꽃이요, 고통은 기쁨의 뿌리 아래 잠든 불씨이다. 기쁨의 눈동자 속에 드리운 슬픔의 그림자를 사랑하자. 우리의 삶이 곧 고통이요, 기쁨이 아닌가. 우리는 행복이란 창을 마음속에 만들어 두고 산다. 가끔씩은 그 창이 닫힐 때가 있으리라.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이 창문이 닫히면, 저 창문이 열릴 것이다. 열리지 않으면 그냥 ”괜챦아“ 라고 말하면 된다. 이것이 행복의 창문을 여는 방식이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그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밝은 빛과 시원한 바람. 그 빛과 바람은 방안에 웅크리고 있는 당신의 행복을 잠에서 깨울 것이다. 행복의 샘물을 마셔보자! 행복이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시원한 샘물의 맛이 어떤가요. 잊지 마십시오. 그 물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섞여 있다는 사실을. /공봉학 변호사

2025-05-19

무소유의 삶

소유하지 않음이 포기가 아니라 나를 더 잘살게 하는 선택이라면, 당신은 어느 쪽 길을 가겠는가.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결핍되고, 내려놓음으로써 오히려 충만해지는 길이 있다. 비움으로 채워지는 길. 무소유의 길이다. 무소유! 도대체 무엇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나의 답은 이렇다. “무소유란, 자신의 관념을 소유하지 않는 것” 우리는 무소유를 떠올리면 필연적으로 돈을 떠 올린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돈이 무슨 죄가 있으랴. 돈에 대한 직접적인 무소유는 무소유가 지향하는 넓은 의미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무소유는 돈 자체의 소유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돈은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돈을 소유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돈을 버릴 이유도 없다. 돈에 관하여 우리가 소유하지 않아야 할 것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다. ‘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에서의 무소유, 이것이 돈에 관한 참된 의미의 무소유다. 삶은 돈 이외에 수많은 요소들로 짜여져 있다. 건강, 권력, 명예, 사랑, 우정, 자유, 그리고 행복 등등. 이런 소중한 것들 위에 켜켜이 쌓인 관념들을 이제는 내려놓기로 하자. 내려놓고 다시 채우고. 또 내려 놓고 다시 채우고…. 이것이 무소유의 삶이다. 무소유는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다. 무소유라는 ‘테크닉’을 잘 활용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무소유의 삶은 자유롭다. 관념에 집착함이 없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재물에 집착하면 창고지기에 불과하다. 지식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지식에 집착하면 꼰대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사랑에 집착하면 불행하게 된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나의 마음 상태이다. 내가 가진 멋진 차에 집착하여 안절부절하고 있다면 그 차는 애물단지가 되지 않겠는가. 물건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사랑이랴. 무소유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다. 나라는 생각조차 버릴 수 있는 해방의 길이요, 더 잘살 수 있는 실천철학이다. 때로는, 가지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1976)에서 인간의 삶에는 ‘소유의 방식’과 ‘존재의 방식’ 두 가지 근본적 태도가 있다고 했다. 소유하려는 자는, 자기 중심적, 불안, 소외를, 존재하려는 자는, 기쁨, 자유, 타자와의 연대를 지향한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행위이다. ‘나는 너를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할 때 사랑은 죽고,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라고 말할 때 사랑은 산다. 무소유는 존재론적 삶의 방식이다. 여기 아름다운 말들이 있다.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사유하는 자는 속박에서 벗어나 진리 속에서 산다(수타니파타 5.13)’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마태복음 5.3)’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속에는 어떤 꿈들이 있습니까?

2025-05-12

평균의 종말

결론부터 말해 보자. ‘평균은 없다!’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측정하고 줄 세우는 이 시대를 보라. 평균점수, 평균신장, 평균소득…. 평균. 평균. 평균…. 모든 것이 평균을 중심으로 수치화되고 평균은 규범처럼 기능한다.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잠재력의 파괴를 담당한 ‘평균주의’라는 우상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 없이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숭배해 온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평균적인 인간’이란 개념은 통계적 편의에 불과하며, 실존하는 누군가를 정확히 대표하지 못한다. 미국 공군이 조종사의 평균 신체 치수를 기준으로 조종석을 설계했으나, 결과적으로 그 평균에 부합하는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종석을 개별 조정한 이후에야 비로소 사고율이 현격히 낮아졌다는 점은, 평균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위험한 오판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교육, 의료, 노동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맹활약 중인 평균은 중립적 기준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도 정확히 맞지 않는 기계적 틀일 뿐이다. 시험 점수, IQ, 학점과 같은 수치들을 기준으로 한 서열화는 인간 개개인의 특별함과 다양성을 파괴하는 폭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주의 사촌 ‘능력주의’를 보자. 능력주의는, ‘출신과 배경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고,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다는’ 얼핏 보기에는 매우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세운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평등하였는가를! 교육 기회, 정보 접근성, 사회적 자본의 분포가 공평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눈치챌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 채, 성공을 개인의 탁월성으로, 실패를 개인의 무능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평균주의가 능력주의를 만나면 수치화, 표준화된 인간을 탄생시킨다. 고유한 재능과 가능성을 지닌 개인은 사라지고, 정해진 기준에 맞는 소수만이 ‘합당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그런 사회가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당신은 평균 이상인가? 그렇다면 근거를 제시하라. 아마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돈, 외모, 학벌, 직업의 세계에서 평균 이상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오랫동안 환상 속을 헤매어 왔다. 사람은 재단 되어서도 안 되며, 재단될 수도 없다. 당신은 능력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가진 능력 이외의 능력을 보여달라.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노력조차도 능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이 없으니, 평균 이상도, 이하도 없다. 능력 없는 사람 일지라도, 그에게 발굴되지 않은 능력이 있을 수 있다. 일류대 출신, 높은 스펙의 허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성공은 평균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성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토드 로즈('평균의 종말' 저자)의 목소리를 기억하자. 밤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줄 세우는 사람은 없다. 빛나지 않는 별은 없다. 크기와 밝기와 거리와 관계없이 그저 아름답다. 당신의 장점은 평균과의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고유성에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평균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설계했기 때문이며, 진정한 발전은 개별성을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각자 다른 꽃이 피는 세상, 저 마다의 소질을 인정받는 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에 달렸다.

2025-04-28

자유를 외치는 그대에게

우리는 군중 속에 섞여 체제와 관념에 순응함으로써, 마치 삶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외친다. “나는 자유다!”라고. 그러나 이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무한한 공허 속에서 울리는 메아리 없는 소리일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에서 “자유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조건이지만, 동시에 가장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고 자유의 본질을 꿰뜷어 보았다. 자유는 때로는 수갑이요 족쇄이다. 이들이 우리를 묶어두고 있을 때, 우리는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도피하려 한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에 대해 가끔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어떤 구속에서 해방되었을 때, 불안이 사라졌을 때는 오히려 의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순간들은 자유라는 탈을 쓴 욕망일 수 있으며, 더 큰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자유야!”라고 외치는 순간, 그 자유는 사라질 수 있다. 우리의 낮과 밤을 휘감고 있는 가장 견고한 사슬이 바로 이것이다. 현자는 말한다. 낮에는 걱정거리가 있고, 밤에는 슬퍼할 일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실제로 우리의 내면에서는 모든 것이 반쯤 뒤엉킨 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과 싫어하는 것, 추구하고 싶은 것과 벗어나고 싶은 것들이 한 쌍의 그림자처럼 서로 얽혀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자유란, 단순히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존재다. 이는 움켜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삶의 태도 그 자체다. 이는 감옥 안에서도 빛나고, 가난 속에서도 살아 숨 쉰다. 또한, 자유는 두 눈을 감고 침묵할 때 드러나는 내면의 움직임이며, 우리를 둘러싼 낮과 밤의 걱정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다. 자유는 권력, 돈, 소유, 평판으로 측정될 수 없으며, 오직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소중한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를 마음껏 선물하자.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제 그만두자. 자유를 책임짐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군중 속에서, SNS에서, 마치 노예가 폭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칭송하듯 자신의 자유를 외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돌아보자.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폭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칭송하는 노예처럼 자신의 자유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자유를 감당하기 어려워 권위나 무리, 체계화된 이념이나 신념 속으로 도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오히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해보자. 다시 한번 돌아보자. 자유에는 불완전함과 고통이라는 달갑지 않은 필연의 동반자가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자유인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 타인의 삶을 사는 유령들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자유를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자유인이 되어야 하며, 다시는 자유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2025-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