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왜 부자에게 투표하는가

등록일 2025-06-23 18:17 게재일 2025-06-24 18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공봉학 변호사

평생 가난에 찌들어도 매번 부자에게 투표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그들은 쉽게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애국심의 원천이 분노인 사람이 있다. 사실을 무시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냉철한 이성이 아닌 도덕적 잣대로 한 표를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 가난하지만 진보가 아니라 외치는 사람이 있다. 부자보다, 똑똑한 사람을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환경오염으로 건강을 잃고서도 오히려 환경규제를 반대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세금 부담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대기업 감세를 외치는 정당의 깃발을 흔들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바른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항해의 목적은 대부분은 편안함과 즐거움! 배가 도착할 최종 목적지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다. 그저 바람 부는 데로 흘러갈 뿐.

이들이 행사하는 한 표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자신이 되고 싶은 계급? 실패한 부자? 지식인에 대한 혐오? 믿고 싶은 이야기? 자신을 노예로 만든 사람들의 신화? 가난의 이데올로기? 이해 아닌 소속감?

이들이 정치를 이야기할 때, 분노는 설득보다 빠르며, 자신의 고통보다 남의 특혜에 더 분노한다. 이들에게는 적이 필요하다. 적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라도 공격한다. 그냥 적이면 된다. 그 적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누군가 만들어 준 적에 대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칼을 휘두른다. 그 칼부림으로 이들은 더욱 피폐해진다.

혹시 내가 이들에 속하지 않은지를 의심해 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정치적 감정부터 다시 설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하여 작동한다. 이때의 다수는 이성적 다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다수가 감정적 다수라면 민주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성적 다수는 감정적 다수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견해가 분노로부터 출발하였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견해를 내려놓기를 권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우리들의 정치적 견해란 대부분 힘 있는 자들이 설계한 것일 가능성이 많다. 힘 있는 자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이들의 분노를 제공받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고, 더 큰 분노를 요구한다.

애국심에 불타는 이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암송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목을 조른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내쫓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표를 던진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가정에 헌신적인 가장들임에도 자기 아이들이 대학 교육이나 적절한 의료혜택을 결코 받을 수 없는 일에 조심스레 동조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몰락한 공업 도시로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날릴 정책들을 남발하는 후보자에게 압승을 안겨주며 갈채를 보낸다. 이곳이 어디인가?

분노는 애국심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상대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자. 이들에게 정말로 정치의 적이 있다면 그 진짜 적은, 이들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평범한 그들(이웃)이 아니라, 이들에게 정치적 견해를 설계한 힘 있는 자들(권력자, 정치인, 재벌, 언론사, 엘리트)일 가능성이 많다.

/공봉학 변호사

공봉학의 인문학 이야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