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욕은, 늙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요,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인생의 후반기에도 지나친 욕망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염치가 있을 리 없다.
‘노년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자는 삶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세네카의 경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노욕의 추함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안다. 노욕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추하게 되니 염치는 뒷전이다. 지나친 욕망은 세대와는 무관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노욕에는 ‘물러나지 않음’이라는 상품이 하나 더 추가된다. 노욕이 젊은이의 욕심보다 더 추하게 보이는 이유다. 욕망의 1+1이다. 물러나지 않음은 ‘놓지 않음’과 연결된다. 물러나지 않고 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황혼에 접어든 사실(죽음이 가까워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의 자각’은,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통로’라 보았다. 노년에의 삶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죽음에의 자각이 필요한 이유다.
염치없음은 또 어떤가. 흔히 하는 말로, ‘부끄러운 줄 좀 알아라!’라는 말이다. 순자는 예론(禮論)에서, ‘사람이 염치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하다.’(人而無恥, 不如禽獸)라고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아무 데나 마구 들이댄다. 쥐뿔 아는 것도 없는 사람들, 체력이 바닥을 기는 사람들, 세상을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한때 잘 나갔다는 이유로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를 가리지 않고 설쳐댄다.
특히 권력을 탐하려는 노욕은 보편적 도덕법칙이 아니라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판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 욕망은, 공동체의 미래를 빼앗고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억압한다, 정치적 노욕은 공동체를 사유화하는 일종의 도덕적 배임이자 철학적 자기 한계의 망각이다. 노욕은, 죽음이 두려워 삶에 집착하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정신적 빈곤이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노욕에 설쳐대는 순자의 몰염치들이 득실댄다. 한평생 호의호식하고도 또다시 더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몰염치의 난장판이다. 이들에게는 후계자는 없다.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모조리 자신이 하고야 말겠다는 처절한 의지를 불태운다. 후학들을 키울 생각은커녕, 싹트기 전에 잘라버리기 바쁘다. 그 기세가 너무나 맹렬하여 구토가 나고 어지러워 쓰러질 지경이다. 하기야 노욕의 난장판이 어디 여기뿐이겠는가마는.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은, ‘나이가 들면 사욕을 줄이고 자연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참으로 공자님이시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즘 50은 청춘이니 현대의 지천명은 70 정도로 보면 적당할 듯하다. 70 전후에도 노욕에 휩싸여 몰염치의 난장에서 추어대는 노장들의 칼춤이 볼만하다. 춤추는 자뿐만 아니라, 구경꾼들도 조심해야 된다. 그 무대가 어떤 난장인지, 춤꾼이 몰염치한 인지. 단디 보자. 비싼 관람료 지불하고,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젊은이들을 망칠 수 있다. 제발 단디 보자.
/공봉학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