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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고독

등록일 2025-09-16 20:12 게재일 2025-09-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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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나’와 선생이 처음으로 만나는 가마쿠라 해안.

 가마쿠라 대불과 관월당 터를 뒤로 하고 고토쿠인을 나선 저는 하세역으로 향했습니다. 하세역에서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 해안에 가기 위해서였는데요. 에노덴 노선은 후지사와역부터 가마쿠라역까지를 연결하는 총 길이 10km의 짧은 노선입니다. 이 노선은 해안선과 주택가를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70미터가 조금 넘는 4량의 작고 귀여운 모습의 열차로도 유명합니다. 

 

에노덴은 가마쿠라의 수많은 관광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면서, 그 자체가 훌륭한 볼거리이기도 합니다. 

 

 가마쿠라 해안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마음’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요. 나쓰메 소세키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일본의 국민작가입니다.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런던에서 유학했으며, 도쿄제대 전임교수였던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저는 나쓰메 소세키의 식지 않는 인기를 직접 확인한 일도 있는데요. 2025년 2월 13일 작가가 묻혀 있는 조시가야 공원묘지를 찾았을 때, 그의 무덤 앞에는 절절한 동경의 마음을 담은 장문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150년 전에 태어난 작가를 향한 팬심은 무척이나 드물고 귀하여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우미인초’」, ‘산시로’, ‘그 후’, ‘행인」’ ‘문’ 등의 수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마음’(1914)입니다. 이 작품은 1946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100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합니다. 와세다대 근처에 있는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에서는 2025년 4월 24일부터 7월 13일까지 ‘외국어가 된 소세키 작품’ 전시가 열렸는데요. 이 전시회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 역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토록 유명한 ‘마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 다름 아닌 가마쿠라 해안입니다. 대학생인 ‘나’는 가마쿠라 해안에서 한 초로의 남성을 만나고, 그의 인품과 교양에 매료되어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르게 됩니다. 선생은 세상과 절연한 채, 아내와 단둘이서만 살아가는데요.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귀향한 ‘나’에게 선생으로부터 두툼한 편지가 도착합니다. 놀랍게도 그 편지는 ‘선생의 유서(遺書)’인데요, 거기에는 젊은 날의 선생과 친구 K, 나중에 선생의 아내가 된 하숙집 딸을 둘러싼 비극의 드라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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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가야 공원묘지에 있는 나쓰메 소세키의 무덤. 이곳은 마음의 친구 K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저는 선생의 유서에 담긴 이야기가 근대라는 문명이 낳은 질병, 즉 개인주의의 어두운 심연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부족, 종교단체 같은 집단 속에서만 정체성을 가졌던 사람들은, 근대에 이르러 독립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자율적 사고와 감정, 목적, 욕망을 가진 개인으로 재탄생한 것인데요. 문제는 이러한 개인에의 강조가 자신의 욕망만을 절대시하는 이기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선생의 외로운 삶은 근대라는 문명의 고질병으로 규정됩니다. 이는 선생이 ‘나’에게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는군요.  

 

 선생과 K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입니다. ‘나’는 줄곧 K를 동경(질투)하며 살아왔는데요. K는 타고난 두뇌도 뛰어나고, 중고등학교 시절 성적도 늘 우수했으며, 모든 방면에서 ‘나’를 앞섰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K는 금욕적 이상주의자로서, 종교나 철학 등의 관념적 세계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력을 키워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인 구도자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K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정진(精進)‘이라는 단어에 합당한 듯 보였습니다, 

 

 이런 K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나‘는 K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모녀 단둘이 사는 자신의 하숙집 방으로 K를 불러들입니다. 결국 K는 하숙집 딸을 좋아하게 되고, 그 사실을 ’나‘에게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자 ’나‘는 그동안 받은 열등감을 되갚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거나 “자넨 자네가 평소에 주장하던 그 ’길‘을 어찌할 셈인가?”라며 K를 궁지로 내몹니다. 더욱 잔인한 것은, K의 고백을 들은 이후 평소 자신을 신뢰하던 하숙집 사모님에게 “사모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말하여, 결혼승낙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결국 K는 ’나‘와 하숙집 딸의 결혼 소식을 들은 이후,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선생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욕망)을 위해 친구 K의 성(城)을 무너뜨려 결국 죽음에까지 내몰고 만 겁니다. 저는 ‘마음’을 읽을 때마다, 근대의 개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잔인함의 막장에 몸서리가 처지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음’을 다시 읽으며, 이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의 “천벌”을 감내하며 고립과 은둔의 삶을 살던 선생이 ‘나’를 향해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는 대목에서입니다. 선생은 유서에서 “나는 지금 내 스스로 나의 심장을 도려내어 그 피를 자네의 얼굴에 쏟아부으려 하네. 나의 심장이 고통을 멈추고 그 대신 자네 가슴에 새로운 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네.”라고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개방적 자세야말로 친구 K를 향한 진정한 속죄이자, 선생이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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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 숭실대 교수

선생이 아내에게도 꽁꽁 숨겨둔 비밀을 털어놓게 되는 ’나‘를 만난 곳이 바로 여름의 가마쿠라 바다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선생에게 매혹되고 선생 역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타인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가마쿠라의 바다는 분명 그런 힘을 가진 듯이 보였습니다. 제가 가마쿠라 해안을 찾은 이 날은, 멀리 구름 위로 후지산이 보이기도 했는데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근대의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가마쿠라 바다의 생명력에서 비롯된 ‘희망’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경재(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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