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본(인)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등록일 2025-09-02 19:29 게재일 2025-09-03 17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가마쿠라 대불.

 7월 18일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도케이지 산문을 나왔을 때는 1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저는 5km 정도 떨어진 고토쿠인(高徳院)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요. 한해 이천만명이 찾는다는 관광도시 가마쿠라에서도 고토쿠인은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 중 하나입니다. 고토쿠인이 유명한 이유는, 그곳에 일본을 대표하는 거대 불상인 가마쿠라 대불이 있기 때문인데요. 기타가마쿠라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가마쿠라역까지 전철로 이동한 저는,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고토쿠인으로 향했습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아미타불은 12미터의 높이와 121톤의 무게로 보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전각 안이 아닌 야외에 노출되어 있어 더욱 웅장하게 느껴졌는데요. 이 청동불상은 본래 나무로 만들어졌다가, 태풍으로 파괴된 이후 1252년에 다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본래는 대불이 머무는 전각도 있었지만 15세기 무렵 자연재해로 파괴되면서 이후에는 대불만 야외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시대에 만들어져서일까요? 이 청동 대불에서는 자애로움보다는 뭔가 엄격한 위엄이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큰지, 50엔(500원 정도)만 내면 불상 내부에까지 들어가 볼 수도 있었습니다. 

 

고토쿠인은 규모로 승부를 보겠다는 듯이, 가마쿠라 대불 옆의 건물에는 길이 1.8m의 짚신이 걸려 있었습니다. 대불이 “짚신 신고 일본 곳곳을 걸어다니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아이들이 만들어 기부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하는데요. 방금 전까지 토케이지의 34cm 수월관음상을 보며 ‘축소지향의 일본’을 떠올렸던 저는, 불과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이토록 크기와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는 청동 대불과 짚신이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수천년의 역사와 남한 면적의 4배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하나의 명제로 정리한다는 것은 애당초 인간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가 전공하는 문학에서 다루는 ‘근대적 인간’이란, 우주보다 깊고도 심오한 내면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요. 한 명의 개인이 그러할진대, 1억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를 한두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겁니다. ‘축소지향’과 더불어 ‘확대지향’을 지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고, 이러한 문화의 양면성과 복합성이야말로 모든 문화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날 고토쿠인을 찾은 진짜 이유는, 얼마 전에 한국 언론에도 크게 보도된 관월당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난 6월 23일 관월당이 한국에 돌아왔다는 보도를 접하셨을 텐데요. 그 관월당이 있던 곳이 바로 고토쿠인입니다. 현재 관월당은 낱낱이 해체되어 4000여 점의 조각이 파주시에 있는 전통건축부재보존센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관월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단층건물로 맞배지붕 형태의 전형적인 한국 건축물인데요. 관월당이 바다를 건너 대불 뒤편에 놓이게 된 사정은 비교적 상세히 밝혀져 있습니다. 평소 일본 재계의 거물이었던 스기노 키세이(1870-1939)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조선식산은행이, 1924년 무렵 담보로 갖고 있던 관월당을 스기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스기노는 일단 관월당을 메구로에 있는 자신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가, 10년 후쯤에 폐병으로 가마쿠라에서 요양과 기도를 할 무렵, 고토쿠인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Second alt text
바닥돌과 좌우 석등만이 남아 있는 관월당 터.

오랫동안 고토쿠인에서 관음보살을 모셔놓은 법당으로 사용된 관월당이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사토 다카오 고토쿠인 주지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고고학 연구자로 게이오대 교수이기도 한데요. 2002년 고토쿠인의 주지가 되었을 때부터 관월당을 한국에 반환하려고 애써 왔다고 합니다. 관월당은 언제 어떤 용도로 만들어져, 어디에 있었던 것인지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조선 왕실의 사당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지만, 1871년 정학교(丁學敎)가 썼다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환수를 위한 방법은 소장국가에 반환요청을 하거나 경매로 구매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반환요청을 하기 위해서는 약탈이나 도난의 증거를 제시해야 하며, 설령 도난과 약탈을 증명하더라도 소장국가에서 반환을 거부하면 그것을 강제할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토 다카오 주지는 흔쾌히 관월당을 고향에 돌려보낸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반환비용 전부를 사토 다카오 주지가 부담했으며, 나아가 한일 간 문화유산 연구와 학생교류를 위한 별도기금 1억엔(10억원 정도)까지 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Second alt text
이경재 숭실대 교수

제가 고토쿠인을 찾았을 때, 관월당이 있던 곳에는 바닥돌과 좌우 석등만이 남아 있었는데요. 관월당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계 각국에서 모인 관광객들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빈터에는 곧 가마쿠라 대불은 물론이고, 관월당에 대해서도 소개하는 자료관이 세워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서울에도 멋지게 복원된 관월당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백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관월당을 보며, 우리는 그 고풍스러움과 아름다움에 취해 행복해할 텐데요. 그 행복 속에서 우리는 사토 다카오라는 한 일본인의 따뜻한 마음도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이경재(숭실대 교수)

이경재의 일본을 읽다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