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일한문화교류기금이 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2025년 5월 31일 도쿄 치요다구의 도시센터호텔에서 열렸습니다. 이 날 행사의 취지는 일한문화교류기금 이사장의 인사말에 잘 드러나 있었는데요. 가토리 이사장은 포퓰리즘과 민족주의로 세계의 긴장이 높아지는 지금, 수백년 동안 조일(朝日)간의 무탈한 관계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의 교훈을 배우자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 걸맞게 심포지엄의 주제도 ‘조선통신사라는 지혜‘였는데요.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요시다 마쓰오(도쿄대 명예교수), 다시로 가즈이(게이오대 명예교수), 이시다 토오루(시마네현립대 교수), 기무라 타쿠(주오대 교수)가 순서대로 ’조선왕조 정치시스템과 통신사‘, ’조선통신사와 쓰시마번의 역할‘, ’조선통신사와 訳官使‘, ’조선통신사라는 명칭에 담긴 의미‘를 발표했습니다.
통신사의 시작은 왜구의 금입(禁入)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1375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12회(1607년-1811년)에 걸쳐 일본에 파견됐던 사절단을 말합니다. 3회까지 사절단의 공식 명칭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고, 4회부터 ‘통신사(通信使)’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요.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은 쇼군의 국서에 ‘회답(回答)’한다는 의미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을 데려온다(刷還使)’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통신사가 200년 넘게 유지된 이유는, 막부의 위상을 높이려는 일본의 요구와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문화를 전파하려는 조선의 요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양에서 에도에 이르는 약 1800킬로미터의 여정은 실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국가적 이벤트였습니다. 바다를 건너느라고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통신사행에 참여한 인원만 5백여명에 이르렀으며, 사행 기간도 10개월에서 1년이 걸렸습니다. 더군다나 잔인한 전쟁까지 겪은 후이기에,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데요.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이들이 남긴 사행록(현재 40여종이 남아 있음)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향한 교토의 절에서 연회를 받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나 쓰시마번의 번주에게 절을 하라는 요구에 분연히 맞서는 모습 등이 나오기도 합니다.
일본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선과 일본은 외교에 대한 기본 의식조차 달랐다고 하는데요. 실용적인 관점에서 외교를 생각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외교를 도덕적 규범인 예의 문제로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통신사’의 의미조차 달랐다고 하는데요. 일본에서 통신사의 ‘신(信)’이 기본적으로 국서(國書)를 의미했다면, 조선에서 ‘신(信)’은 예의와 직결된 ‘신의(信義)’를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조선과 일본은 교류를 이어가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특히 조선과 일본과의 중계무역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던 쓰시마번(대마도)의 역할에 주목한 논의가 많았습니다. 쓰시마번은 문서를 위조할 정도로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위해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통해 당시 일본에서는 일종의 조선붐이 일었다고 하는데요. 대표적으로 당시 조선 인삼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1709년 한 해 동안 에도에 992kg의 인삼이 수입되었으며, 하루 매출액이 현재 시가로 수천만 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시로 가즈이 교수에 의하면, 이처럼 조선 인삼이 유행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인삼의 약효를 높이 평가한 허균의 ‘동의보감’이 널리 읽힌 결과라고 합니다.
이 날 3시간 넘게 진행된 심포지엄에서 말한 ‘지혜’의 핵심은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지극한 마음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 열린 마음만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핵심단어(通信使)의 의미조차 다른 상황에서도 수백 년이 넘는 교류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한 방청객이 오늘날 쓰시마번의 역할을 누가 해야겠냐고 질문했는데요. 이에 대해 발표자는 이제 ‘일본인 전부’가 쓰시마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한국인인 저로서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도 한일간의 건설적인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행사가 열린 도시센터호텔 맞은편에는 튜더 양식의 아름다운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가 있었는데요. 조선통신사가 한반도와 일본의 우호 관계를 상징한다면,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는 일본의 강압적인 한반도 지배를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이은(1897~1970년)이 1930년부터 해방이 될 때가지 살던 곳인데요. 1907년 11세의 나이로 이토 히로부미를 따라 일본에 간 이은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합니다. 육군 중앙유년학교에서 공부한 후 일본군이 되었으며, 결혼도 일본 황족 여성인 마사코와 해야 했으니까요.
그럴듯한 어떤 명목을 갖다 붙인다 해도 이은은 일제의 볼모이자 인질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은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스페인풍이 가미된 이 아름다운 영국식 건물을 “관청처럼 감시받는 듯해 숨막히는 곳”이었다고 증언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심포지엄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저는 도시센터호텔과 아카사카 프린스 클래식 하우스 사이로 한반도와 일본 사이를 가로지르는 두 갈래 길이 펼쳐져 있는 듯한 환영 속에서 오랫동안 서성여야만 했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