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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 핀 길을 걸으며, 여성의 존엄을 생각하다

등록일 2025-08-19 19:55 게재일 2025-08-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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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케이지 입구.

7월 18일. 날씨는 화창했으나 최고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이었습니다. 저는 시부야에서 쇼난선(湘南線)을 타고 기타가마쿠라역으로 향했는데요. 기타가마쿠라 일대는 명찰이 즐비한 곳입니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가 인생의 비의를 풀고자 참선수행했으며, ‘문’(1910)이라는 소설에까지 등장시켰던 엔카쿠지를 비롯해, 초여름이면 수국으로 유명한 메이게츠인, 국보인 범종과 동일본 최대 규모의 산문을 자랑하는 겐쵸지 등이 유명하죠.

오늘 답사지로 선택한 곳은 도케이지(東慶寺)입니다. 도케이지는 8년 전에 몇 명의 연구자와 방문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는 일본에서 ‘비평의 신’으로 불리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무덤을 찾느라 꽤나 많은 땀을 흘렸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사찰 곳곳에 피어있던 짙은 하늘색의 수국이 무척이나 이채롭고 아름다웠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방문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8년 만에 다시 찾은 도케이지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무덤과 수국만으로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 절이었습니다. 1285년 창건된 도케이지는 600여년 동안 ‘여성의 피난처’ 역할을 하던 사찰이었는데요. 과거 여성이 남편의 동의 없이 이혼할 수 없던 시절에, 여성이 이 절로 들어와 2년간 머물면 이혼이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여성이 비녀나 짚신을 던져 넣기만 해도, ‘도망쳐 들어온 것’으로 인정되었다고 하는데요. ‘인연 끊는 절(縁切り寺)’로도 불린 도케이지는 오늘날의 가정폭력 쉼터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도케이지에서 놀란 건, 이 곳에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 지식인들의 무덤이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8년 전에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무덤 찾는 것에만 신경을 썼는데요. 이번에 자세히 보니 이 곳에는 ‘비평의 신’ 이외에도 일본의 선(禪)을 세계에 널린 알린 스즈키 다이세쯔, ‘선(善)의 연구’(1911)로 일본근대철학의 주춧돌을 놓은 니시다 기타로, 윤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와쓰지 데쓰로, 전후 일본의 교육 개혁을 주도했던 아베 요시시게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 근대 지성들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이토록 많은 근대 지성이 한곳에 묻힌 이유는, 바로 도케이지 뒤편 산자락에 마쓰가오카 분코가 만들어진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는데요. 마쓰가오카 분코는 일종의 도서관으로, 유명한 선승인 샤쿠 쇼엔이 주도하여 설립하고, 그의 제자인 스즈키 다이세쯔가 말년에 깊은 연구를 수행한 곳입니다. 아마도 이런 인연으로 근대 일본의 수많은 지성이 도케이지에 묻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꽃의 절’로도 불릴 만큼, 계절별로 아름다운 꽃이 피는 이 조용한 절은 영혼의 안식을 얻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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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신’이라 불린 고바야시 히데오의 무덤.

마침 도케이지를 방문한 이 날은 한 달에 한번 수월관음보살반가상(水月観音菩薩半跏像을 일반에 공개하는 날이었는데요.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목조 반가상은, 편안하게 바위에 기대어 조용히 수면에 비치는 달을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의 관음상은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시대(1185-1333)에 주로 유행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 관음상을 보고 가장 크게 놀란 것은 크기였습니다. 관음보살의 전체 모습은 물론이고, 각종 장식까지 세밀하게 표현했음에도, 전체 높이가 겨우 34cm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너무나 작고 정밀하여 놀랍기까지 한 관음상 앞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오래된 명제가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최고의 일본문화론 중 하나로 꼽히는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1982)은 일본인들이 뭐든지 ‘작게 만드는 것’에 특기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접이식 부채, 주먹밥, 접이우산, 도시락, 문고본, 분재, 꽃꽂이, 하이쿠 등이 모두 ‘축소지향’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에는 몸 하나 누일만한 공간에 호텔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인 캡슐호텔이 인기를 끌고, 수십년 전에는 ‘손 안의 오디오’인 워크맨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저서를 관통하는 방법론은 구조주의로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수많은 일본문화의 표면 현상 밑에 놓인 심층구조로서의 ‘축소한다’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축소한다’는 고메루(込める, 밀어넣는다), 오리타타무(折畳む, 접어 작게 하다), 히키요세루(引き寄せる, 가까이 끌어당기다), 니기루(握る, 쥐다), 게즈루(削る, 깎아내다), 도루(取る, 잡다), 쓰메루(詰める, 채우다), 카마에루(構える, 자세를 취한다), 고라세루(凝らせる, 집중시키다) 등으로 세분화할 수도 있는데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34cm 크기의 관음상을 보며,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명제를 실물로서 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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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 숭실대 교수

8년 전에 처음 도케이지에 왔을 때는, 오직 고바야시 히데오의 무덤 하나만을 찾아 한나절을 헤맸는데요.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은 도케이지는, 일본문화의 많은 것들을 응축해 놓은 통조림처럼 느껴졌습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짙푸른 녹음과 아름다운 새소리에 둘러쌓여, 산문을 나서는 제 머리에는 시대를 초월한 여성의 존엄과 자유, 그리고 구원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고 떠올랐습니다.

/이경재(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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