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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선거용 재난지원금, 청년들에게 빚더미 안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최하 30만∼50만원의 전 국민 6차 재난지원금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금까지 5차례 지급된 재난지원금 규모가 1인당 48만~50만원이니 100만원을 채우자는 논리다. 이에대해 국민의힘에서는 “자유당 시대 고무신선거와 다를 바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전 국민 재난지원금 추가지급 주장을 ‘대선 매표행위’로 규정했다. 야당의 거센 반발과는 달리 민주당은 그저께(2일) 재난지원금 재원 마련 방안을 선거대책위원회 정책본부 차원에서 본격 검토하기로 했다. 민주당 박완주 정책위의장은 이날 재원 마련 방식과 관련해서 “남은 세수를 가지고 할 거냐, 빚내서 할 거냐가 주 쟁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민주당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김부겸 국무총리는 3일 “재정여력이 없다”고 분명히 했다. 국회가 내년 예산안을 심사하면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해 올해 추경예산안을 다시 짤 수도 없는데다, 내년 본예산에는 올해 지원에서 제외됐던 300만명 가량의 자영업자(여행·관광 등) 손실보상금이 우선적으로 편성돼야 한다는 이유에서다.이재명 후보는 경기도지사 시절부터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개인 브랜드 수준으로 만들었다. 올 추석 재난지원금이 지급될 때도 정부 방침과는 달리 이 후보는 전 도민 지급을 관철했다. 민주당과 중앙정부가 피해 상황과 재정 형편을 고려해 지급 대상을 소득 하위 88%로 제한했지만, 경기도는 자체 예산을 동원해 전 도민에게 지급한 것이다.재난지원금 지급은 막대한 국가 예산이 들어간다. 1인당 50만원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25조원의 추가예산이 필요하다. 지금 정부 재정상황은 최악이다. 국회예산정책처 자료에 의하면 2023년부터 우리나라 국가채무의 연간이자가 20조원을 넘어선다. 우리 청년세대에게 어마어마한 빚더미를 상속하는 것이다.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재난지원금 지급문제가 논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내년 본예산 심사가 선거판으로 변질할 수도 있다. 지금 정치권이 할 일은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중소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에 대한 지원 강화를 위해 정부와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2021-11-03

대선판에 교육이 사라졌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선정국. 나라 안에 가장 중요한 결정이 아닌가. 그럼에도 보이는 것은 정치인들의 말싸움일 뿐 정작 나라와 민생에 중요한 사안들은 보이지 않는다. 후보들의 수십 차례 토론이 있었지만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말다툼과 입씨름이 아닌가. 나라의 내일을 향한 비전과 구상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국민의 어려운 살림살이는 어디에다 하소연을 해야 하는가. 후보들의 면면과 입담들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 하나 믿고 맡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구호로만 변화를 외치고 듣기에도 식상한 혁신이 되고 말았다. 여야의 주자들이 결정되면 그래도 나아질까 기대한다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앞으로 몇 달에도 큰 기대가 걸리지 않는다. 나라는 선진국으로 들어섰다는데, 정치는 여태껏 제자리일까.미래를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긴 지평과 너른 비전을 말하지 않으면서 들먹이는 정략으로는 국민들의 갈증이 가실 길이 없다. 대통령 직함만 가지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맹랑한 주장에 넘어갈 국민은 없다. 남을 비난하기보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었어야 한다. 다른 당을 폄하하기 전에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지 드러냈어야 한다.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가닥이 있다. 교육. 백년대계라는 별명은 누가 지었을까. 다음세대가 무엇을 배우는지 당신들은 아는지. 대한민국의 자녀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나라의 내일을 그나마 살려낼 길은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걸 느끼고나 있는지. 지역소멸이 문제라면서 학교를 돌아보지 않는 당신들의 착각은 인지부조화가 아닌가.나라의 균형발전을 말하려면 지역의 교육실태부터 살펴야 한다. 지역의 사활은 동네 학교에 달렸다. 학교가 살면 지역이 살고 지역이 살면 균형이 보인다. 학교가 사라지면 지역이 힘을 잃고 소멸의 길로 접어든다. 교육의 힘은 개인을 일으키지만, 지역사회가 활발하게 돌아가려면 학교부터 세워야 한다. 교육이 사람을 살리고 학교가 지역을 살린다. 지역에서 학교는 공동체의 중심역할을 한다. 문화의 중심이 되고 지역 자긍심의 심장이 된다. 동네 안팎으로 소통의 근원이 되고 지역 간 교류의 교두보가 된다. 학교가 있어 지역은 미래를 기약하고 교육으로 길러내는 다음세대가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간다. 지역의 자존심도 학교에서 솟아나고 온갖 소식의 교환도 학교에서 벌어진다.대선판에 사라진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교육을 말하지 못하는 나라의 지도자는 인정할 수가 없다. 학교를 걱정하지 않는 후보는 지지할 길이 없다. 학교는 가르치고 배우는 터전이며 나누고 소통하는 통로이다. 다음세대를 무너지게 버려두는 일은 가히 범죄가 아닌가. 나라와 국민을 살리려면 교육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교육을 소홀히 하는 정치는 미래가치를 몰각한 작태가 아닌가. 대선후보들에게 묻는다. 나라의 교육을 위하여 무엇을 할 터인가. 이 땅의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1-11-03

생태 통로와 교육 통로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 “쉿, 동물이 지나가고 있어요!”체험학습 사전 답사를 위해 고속도로를 가다가 본 문장이다. 출퇴근 길에도 자주 본 글이지만, 이 문장이 그날따라 유독 더 선명하고 크게 마음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화창한 가을 날씨, 형형색색의 단풍 등 많은 것을 떠올려 보았지만, 모두 아니었다.그러다 산 전체가 없어지는 공사 현장을 지나면서 필자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았다. 어떤 공사인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분명 큰 산 하나가 없어지고 있었다. 이미 벌목 작업은 끝났고, 산을 해체하면서 나오는 흙을 운반하기 위해 늘어선 차량의 길이는 끝을 알 수 없었다.환경과 우리 삶은 한 몸이다. 굳이 우위를 가리자면 이제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 환경이 좋지 않으면 우리도 좋지 않다. 반대로 우리가 좋지 않으면 우리는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떠난다. 그래서 세계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하지만 아직 무분별한 개발은 진행 중이다. 그 결과 환경은 복원이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다. 환경 파괴는 곧 우리 삶의 파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지만, 사람들은 개발주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그래도 환경에 대한 양심은 있어 만든 것이 생태 통로이다.생태 통로를 보면서 필자는 교육 통로가 떠올랐다. 환경 파괴와 교육 파괴가 다른 것은 환경 파괴 현장에는 생태 통로라도 있지만, 파괴된 교육 현장에는 교육 통로가 부재하다는 것이다.평생을 제자 교육을 위해 헌신한 김만수 시인은 시 ‘목련꽃 목댕기’에서 말한다.“(….) 정직과 용기를 가르치며/서른여덟 해를 바다 언덕길 걸어왔습니다 // 그러나 아버지/교실은 비고 아이들은 아스라이 멀어지며 선생님들이 뺨을 맞는/스승의 자존이 무너지고 숭고한 정신이 훼절되어/깊은 상처가 번지는 날들이 늘어갔습니다 (….)”이 시는 교육 파괴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중 스승이라는 말이 너무 아프다. 스승이라는 말은 이제 학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필자는 “그래도”라는 말을 여기서 꼭 쓰고 싶다. 비록 학교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학교는 희망 제작소다. 그 희망을 만드는 이가 교사요, 그들이 곧 스승이다. 김만수 시인은 이 나라 교사들이 스승인 이유를 같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아버지/이 땅의 스승들은 (….) 불의에 맞서는 정신과/정직과 용기의 가치를/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새로움을 열어가는 길을 가르치며/새벽을 열어갔습니다 (….)”비상구조차 보이지 않은 교육 현장에서 필자는 대선배 교사의 시에서 교육 통로를 찾았다.“(….) 너무도 그리운 아버지/설머리 붉은 해는 떠오르고/오직 한마음 곧은 정성으로/팍팍한 언덕길 다시 오르는/이 땅의 스승들 있어 희망이 있습니다 (….)”교육 대로(大路)를 재건할 사람은 교사다. 교사가 살아야 교육도 산다. 교사를 살리는 11월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1-11-03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양면적 평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노태우 전 대통령이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5일간의 국가 장을 치르고 파주의 어느 사찰에 안치되었다. 광주 5·18 단체와 민주화 운동 기념단체는 그의 국가 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일부에서는 대통령 재임 시의 여러 공적을 내세워 국가 장을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그의 국가 장 찬반 논의는 그의 대통령 재직 시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있다.인물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덮고 난후에 판단해야 한다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엇갈리고 있다.얼마 전 윤석열 대선후보의 전두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정치권을 매우 소란스럽게 하였다. 윤 후보의 단순 발언의 실수인지 강보수층을 향한 선거 전략인지는 알 수가 없다. 노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12·12 쿠데타의 공동 주역인 그의 평가와 직결된다.이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보다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념이나 진영논리가 아니라 그의 업적에 따라 냉정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궤적에는 누구나 빛과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노 전 대통령 재직 시의 공적부터 살펴보자. 우선 그는 군 출신 대통령이면서도 통일과 안보와 직결된 북방외교를 과감히 추진하였다. 그는 1988년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7·7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1989년 공산국가 헝가리와 수교하고, 소련·중국과도 과감히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91년 9월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을 성사시켰다. 그의 재임 시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선포하여 대한민국 통일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급기야 1991년 12월에는 남북의 ‘남북기본합의서’까지 채택되었다. 당시 반공 보수 강경 분위기에서 북방외교의 초석을 다진 것은 그의 외교적 큰 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아직도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그의 국가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을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는 전두환과 함께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혐의로 내란죄로 2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정권 탈취 과정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은 아직도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재임 중 2천600여억 원의 사실상 뇌물인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그는 당시 직선제 대통령이 되었지만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고문과 탄압으로 아직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불행히도 우리는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 명도 갖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내란죄와 뇌물, 북방외교 성과라는 두 개의 얼굴이 공존한다. 사람의 평가는 공칠과삼(功七過三)만 되면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공(功)은 과(過)를 덮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의 빛은 그림자를 덮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아들이 몇 해 전 광주를 찾아 부친의 죄과에 용서를 청한 적이 있다. 가족이 밝힌 유서에서도 ‘자신의 과오’에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은 있다. 그러나 그는 생시에 광주 5·18에 관한 진정한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난 ‘보통사람’ 노태우의 명복을 빌 뿐이다.

2021-11-03

사색 한자락

오낙률시인·국악인 “다 같이 나뭇가지에 내린 물인 것을, 어느 것은 물이라 하고 어느 것은 서리라 하고, 어느 것은 눈이라 하고 또 어느 것은 이슬이라 하고, 또 어느 것은 꽃이라 하더이다. 올 한해는 서리라기보다 눈이라 불리고 싶고, 눈이라기보다 꽃이라 불리는 한 해가 되었으면 싶고, 임께서도 그러하시길 소망합니다. 올해도 저에게 꽃을 피우는 온화한 기운이 되어주실 것도 소망합니다”어느 새해 벽두에 카카오톡으로 나눈 지인과의 새해 인사에서 필자가 보낸 인사 문구인데 생각이 나서 이 글에 인용해 보았다.나이 들면서 가능하면 아름다운 생각과 아름다운 언어와 아름다운 눈과 아름다운 표정으로 살고 싶다. 뉜들 그게 꿈 아닐까 해도 사람 살이 하면서 그게 그리 쉬울까 해도, 이제 내 남은 생애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것이고 싶다. 아름다운 꽃과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다운 가족과 아름다운 이웃하며, 가을이면 투정하듯 붉게 물드는 단풍과 그리고 때론, 내 어여쁜 아기 손주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고 싶다.흔히 꽃과 나무와 온갖 새들이 살아가는 이 지구를 낙원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저 꽃과 나무와 새들의 입장에서 봐도 인간과 더불어 살아감이 낙원처럼 느껴질까?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지상에 튼실하게 뿌리를 박으며 살고 있는 갖가지 식물들이 지구의 주인이다. 지구는 온갖 식물들이 살아가는 낙원이고 인간은 지구를 탐하며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는 침입자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인간은 굳이 물구나무를 서지 않고서도 문어나 오징어처럼 여러 개의 발로 지구를 어루만지며, 지구에서 자라는 갖가지 식물들을 마치 소가 풀을 뜯듯 하며 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라는 허공에 부유물처럼 떠있는 존재로서 지구의 표면에 최대한 달라붙어 끝없이 지구를 탐하고 있는 셈이다.인간은 밤이면 등을 지구에 대고 중력을 잃은듯 네 발을 버둥거리며 허공에 떠 있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하곤 한다. 잠자는 모습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가급적 지구로부터 멀리 이탈하지 않으려고 집이라는 건물을 짓고 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몸을 의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지구를 가지려 해도 결국엔 지구의 표면을 배회하는 지구의 주변에 불과할 뿐, 가끔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묘지에 들어가서 지구에 안착하기도 한다. 요즘의 장례식 문화는 화장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탓에 그마저도 성공률이 희박한 실정이다.소나 돼지 닭, 또는 물고기…. 인간들은 날마다 혹은 자주 그들의 장례를 치르며 그들의 빈소에서 허기를 채우고 있다. 자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명이 사는 지구를 탐하다 희생당한 동물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잘 손질된 야크의 사체를 등짐으로 지고 땀을 흘리며 언덕길을 내려가는 저 높은 곳의 족속, 네팔 사내들의 진지함 쯤은 되어야 내가 아는 최소한의 약식 장례식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한 접시의 고기요리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는 지금, 지구의 정복을 위해 인간과 연대하여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그들의 장례식을 너무 경박하게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2021-11-02

구룡포에서 보낸 하룻밤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바다는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내지에 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이다. 섬사람들이 뭍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뭍에 사는 사람은 섬사람만큼 뭍이 그립지 않으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언제나 바다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함은 타성과 습관의 나락에 떨어져 망각과 상실과 만나는 법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주장한다.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아시스를 찾는 목마른 나그네처럼 집착한다. 대상을 소유하겠다는 열망에 그는 온몸과 마음을 불사른다. 바라던 대상이 마침내 손에 들어오면, 그의 성취감은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의 내면에는 싫증과 권태가 슬며시 똬리를 튼다. 익숙함이 주는 진부함과 새로움을 향한 열망이 그를 다시 찾아온다.세상과 인간을 염세한 쇼펜하우어의 놀라운 통찰이다. 짧은 문장 하나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 하지만 이런 명제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예외 때문이다. 주어진 관계와 물질과 인식의 범위 안에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소유’라는 어마어마한 수양과 깨우침은 아니더라도 말이다.그런 생각을 담고 마주한 구룡포의 풍경은 따사로웠다. 주말을 맞아 인파로 넘쳐나는 포구에서 오랜만에 흠뻑 마시는 갯내음과 바닷바람이 내장을 서늘하게 뚫고 지나간다. 오래 잊고 지냈던 시간이었군, 하는 잔상이 스치듯 지나간다. 생선회와 대게를 파는 가게의 번다함과 왁자지껄한 소음은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하다. 일상에 지칠 때 항구에 펼쳐지는 어물전을 찾으면 영혼과 정신이 일신되지 않는가?!정겨운 대화와 주고받는 술잔과 활발한 저작(咀嚼)과 웃음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어느새 찾아든 저녁이 짙은 그림자로 사위를 감싼 후에야 술자리가 막을 내린다.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를 어린애들처럼 걸으며 마주한 등댓불이 눈과 마음을 대낮처럼 비춘다. 등대지기의 고단한 일상에 의지하는 고기잡이배며 여객선이며 화물선의 일꾼들이 떠오른다. 밤을 다퉈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선의 경적! 그들은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밤하늘의 별과 선잠에서 깨어나 우짖는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삼삼오오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밤에는 과업과 관계와 일상에서 놓여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혹부리영감. 오래전 수련원 옆에 점방을 냈던 혹부리영감의 자랑스러운 딸의 얼굴이 설핏 떠오른다. 어렵게 공부시킨 딸의 성적표를 보여주며 이것저것 묻던 영감은 그사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 무참한 세월이여!오온(五蘊)이 모두 공하다는 관자재보살의 논리를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얘기가 늦도록 우리 주위를 떠돈다. 장엄한 아침 해와 더불어 깊은 깨달음에 도달할 것인가?! 하늘의 별이 바람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포구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2021-11-02

‘라팍의 저주’

미국 프로야구 월드 시리즈에서 유래된 ‘염소의 저주’는 미국 시카고 컵스팀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45년 시카고 컵스가 자신의 홈구장에서 벌어진 월드시리즈 4차전 경기를 구경하려고 염소와 함께 입장하려는 팬을 저지하고 되돌려 보낸 이후 한번도 우승을 하지 못한 데서 붙여진 일종의 징크스를 이르는 표현이다.삼성라이온즈 팬들은 2016년 삼성이 홈구장을 대구시민야구장에서 대구라이온즈파크로 옮겨온 이후 우승은 커녕 내리 연속 하위권에 머물자 ‘라팍의 저주’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초가집서 기와집으로 옮겨놓고 가세가 기울었다는 말도 떠돌았다. 1천60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현대식 구장을 지어놓고는 정작 가을야구를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섭섭함을 담은 표현이다.5년 연속 추락하던 삼성 라이온즈가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2위에 올랐다. 삼성라이온즈는 KT위즈에게 아쉬운 패배를 해 우승은 놓쳤지만 한편으로는 라이온즈파크에서 처음으로 가을야구를 볼 수 있는 설레임을 팬들에게 선물했다. 내친김에 한국시리즈 우승도 바라보자는 기대감도 나돌아 이래저래 가을 야구가 대구에서는 화제다.삼성은 2010년부터 5시즌 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하고, 4번의 통합우승 그리고 한국시리즈 8번을 우승한 연부역강한 팀이다. 6년만에 찾아온 가을 경기를 통해 과연 막강 삼성이 야도(野都) 대구의 자존심을 살릴지, 또 라팍의 저주를 풀고 새로운 왕조시대를 열 것인지 대구시민의 관심이 벌써 9일 열릴 라팍 경기에 쏠려있다.참고로 시카코 컵스팀은 1908년 월드시리즈 이후 우승을 한번도 하지 못하다 2016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08년만에 염소의 저주를 깬 셈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1-02

인구만을 기준으로 하는 선거구획정 개선돼야

헌법재판소가 지난 2018년 6월 28일 ‘광역의원 선거구별 인구편차를 4대1(편차 60%)에서 3대1(편차 50%)로 줄여야한다’고 판시함에 따라 경북도내 상당수 군지역이 광역의원을 1명만 뽑게 될 처지에 놓였다. 올해 9월 기준 경북도 총 인구는 262만8천344명으로, 이를 경북도의회 지역구 의원 수 54명(비례 6명 제외)으로 나누면 평균인구는 4만8천673명이다. 이를 헌법재판소가 판시한 새로운 인구 편차(3대 1)를 적용하면 하한은 2만4천336명, 상한은 7만3천10명이 된다. 기존 인구 편차(4대 1)를 적용한 하한 1만9천469명, 상한 7만7천877명보다 하한 인구수가 5천여명이나 많아지게 된다. 매년 인구가 감소하는 농어촌 지역의 경우 민의를 대변할 광역의원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최종 선거구 획정은 오는 12월 31일 인구수를 기준으로 하며, 내년 2월 국회에서 결정된다.경북도의회 사무처는 “현재 경북도의원 정수 54명은 그대로 유지한 채 감소한 의원수만큼 인구가 많은 인근 시의 도의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통폐합 대상으로 꼽히는 광역의원 선거구는 성주군 제1선거구(성주읍·선남면·월항면)와 제2선거구(수륜면·가천면·금수면·대가면·벽진면·초전면·용암면), 청도군 제1선거구(청도읍·운문면·금천면·매전면)와 제2선거구(화양읍·각남면·풍각면·각북면·이서면), 울진군 제2선거구(평해읍·근남면·매화면·기성면·온정면·후포면)다.농어촌지역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 수가 계속 감소하는 현상은 대의민주주의 차원에서 문제가 많다. 비수도권 소멸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수도권 규제 장치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것도 수도권에 정치권력이 집중되고 있는 탓이 크다. 17대 총선(2004년) 당시 수도권(서울·인천·경기) 국회의원 숫자는 전체의 40.7%를 차지했으나, 21대 총선(2020년)에서는 47.8%로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인구수를 기준으로 한 선거구획정 때문이다. 농어촌지역은 현재 인구수를 주요변수로 하는 모든 국책사업이나 정책에서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소외를 당하고 있다. 국토균형발전 차원에서 인구뿐만 아니라 면적 등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선거구 획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2021-11-02

철조망 십자가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한 시대의 어둠을 지탱하기 위해 / 저리도 많은 십자가가 필요한 줄은 /오늘에야 처음으로 알았다 / 이천 년 전 한 사내를 / 못박아 세운 것만으로는 / 모자랐던 것일까”오성호 시인이 1994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시집 ‘가시나무 그늘 아래서’에 들어있는 시 ‘십자가’의 첫 6연이다. 시인은 도시 곳곳에서 빛을 비추는 교회당 십자가를 보며 시대의 어둠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또 십자가가 ‘도회지의 거리마다 창부처럼 짙게 화장’을 한 채 내걸리고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은총이 값싼 만병통치약처럼 팔려나’가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노래하였다. 어디 도시뿐이랴. 도시 농어촌 가릴 것 없이 우리나라 교회들은 유독 붉은 십자가를 내건 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알리고 있다.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목걸이로, 귀고리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 일각에서는 십자가를 교회의 거룩한 상징으로 여기며 소중히 다루는 행위를 우상 숭배로 치부하며 십자가 형상을 만들어 건물에 붙이거나 장신구로 몸에 거는 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형상의 물건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 십자가에 담긴 예수의 희생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굳이 우상 숭배라는 붉은 줄로 동여맬 필요는 없을 듯하다.기독교는 교인 여부를 떠나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개신교 인구는 총 인구수 대비 2005년 18%, 2015년 20%를 차지했고, 가톨릭을 포함하면 2005년 29%, 2015년 28%로 21세기에 들어 기독교 인구는 총인구 대비 30% 가까운 교세를 보였다. 요즈음 기독교가 이런저런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교세가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지난 5월 보고에 따르면 2021년 현재의 기독교 인구는 23%(개신교 17%, 천주교 6%)로 한국인 네 사람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인 셈이다.한국뿐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개신교가, 유럽에서는 가톨릭이 사회와 문화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가톨릭 수장인 교황의 영향력은 비기독교 국가를 포함한 지구촌 전체에 미치고 있다. 10월 28일부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및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참석 등을 위해 유럽을 순방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철조망 십자가’를 선물하였다. 로마 산티냐시오 성당에서는 ‘철조망, 평화가 되다’라는 이름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에는 DMZ의 녹슨 철조망을 녹여 만든 136개의 십자가가 전시되어 있다. 136이라는 숫자는 남과 북이 서로 떨어져 살아온 각각의 68년을 합친 것이다.성경 이사야서에는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철조망 십자가’가 남과 북의 전쟁과 대결을 그치게 하자는 소망의 상징을 넘어서서 열쇠가 되었으면,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갈등을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1-11-02

대구형 일자리 2호, 경제 활력 마중물 되길

제2호 대구형 일자리 사업이 성사됐다. 지난 1일 대구시는 2호 대구형 일자리 사업을 시작하는 (주)대동과 (주)대동 모빌리티 그리고 한국노총, KT, 한국로봇융합연구원 등 11개 노·사·민·정이 참여한 가운데 일자리 상생협약식을 가졌다. 두 번째 대구 상생형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는 대동그룹은 지역에서 70년 넘게 농기계 생산에 주력해 온 기업이다. 대동그룹은 계열사인 대동 모빌리티를 통해 앞으로 5년간 대구국가산단 부지 10만2천여㎡에 1천814억원을 투자해 AI 로봇, 스마트 모빌리티 등의 첨단공장을 설립하고, 300여명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밝혔다. 협력사까지 포함하면 2천234억원이 투자되고 신규 일자리는 800여개로 늘어나게 된다고 한다.특히 농기계만 주력으로 생산하던 대동그룹이 계열사인 대동 모빌리티를 통해 AI(정보통신) 첨단 로봇산업으로 일자리 창출에 나선다고 하니 특별히 주목된다. 일자리 창출에 대한 기대감은 물론 대동그룹의 로봇첨단분야 사업 진출이라는 점에서 지역산업계에 미칠 파장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동 모빌리티는 인공지능 모빌리티와 신개념 교환형배터리 공유방식의 e-바이크를 주력 생산해 빠르면 내년부터 제품을 생산하게 된다고 한다.대구는 일자리가 부족한데다 첨단분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나가야 할 처지에 있다. 다행히 국가산단중심으로 로봇산업 기업들이 입주하고 최근에는 국가로봇테스트필드가 대구 달성에 유치됨으로써 대구가 지향하는 로봇도시의 위상도 커지고 있다. 이런 시기에 대동그룹의 첨단분야 상생형 일자리 사업 참여는 지역 경제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하겠다. 광주가 상생형 일자리 사업으로 설립한 광주글로벌모터스(GGM)를 통해 고용 등 지역경제에 긍정효과를 얻고 있다는 소식이다. GGM은 간접고용까지 합하면 1만명 정도의 일자리가 발생할 거라고도 한다. 전국적으로 상생형 일자리는 광주와 경남 밀양, 전북 군산, 부산 등 여러곳에서 시도되고 있다. 얼마만 한 성과를 낼지는 지역사회의 노력과 관심 그리고 사업의 장래성에 달려있다.이번 두 번째 대구형 일자리사업이 성공적으로 정착을 하고 제3·4의 상생형 일자리 사업이 또다시 나와 지역경제 활성화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1-11-02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의 여러 시집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이 時代(시대)의 사랑’이다. 시를 잘 모르던 시절, 제목이 너무 예뻐서 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시집에 사랑에 대한 잠언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정작 그 안에 든 건 그로테스크하고 무참한 인간의 슬픔이었기에 많이 놀랐던 것 같다.생각해보면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에 걸린 잠언이나 경구들처럼 평온하고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사랑은 대상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니까. 사랑은 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의 깊이만큼의 처참함을 간직한다. 그 안에는 소유하기를 원하는 마음도, 그리하여 그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이 時代의 사랑’의 한편에 아름다운 처량한 마음이 있어, 다른 한편에는 그로 인해 찢겨지고 비참해진 마음이 같은 크기로 놓여 있는 것처럼. 그처럼 ‘나’의 마음이 아름다움과 처참함으로 양분되는 건 분명 사랑의 힘일 것이다. 그뿐일까.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내가 얼마나 비루한 존재인가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모두 사랑의 능력이다.이 모든 과정에서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사랑’이다. 비록, 나 자신이 비루하고 비참한 신세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지라도, 그 시대의 사랑은 결코 다른 사물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내가 비참하게 된다 할지언정,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사랑에게 나의 삶의 중심을 양보하는 것, 그게 ‘이 時代의 사랑’의 의미가 아니었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그래서 내게 80년대의 사랑이란, 마치 ‘나’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이루어지는 모험과도 같이 느껴진다. 절박하고, 비참해지기도 하는 사랑. 사랑이 이루어질 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그 모든 노력에 대한 보상을 얻겠지만,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모험 같은 사랑은 왠지 사랑이 아닌 인정투쟁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건 그 시대가 그만큼 사랑 외에는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혹은 자신의 다른 의미를 쟁취할 길이 없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사랑’에게 자신의 삶의 중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랑은 더 이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흔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제는 현실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에 따라 사랑이 스스로의 모습을 바꾼다.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모순형용적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려온다.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사랑 외에 다른 인정의 수단이 생겼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우리가 자유를 느끼고 해방감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심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제는 사랑을 통해서조차 그와 같은 것들이 이룰 수 없게 되었노라고. 그리하여 이 시대에 사랑은 가장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사랑이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빠져가고 있다고.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제는 조건이 사랑을 결정하고, 조건이 사랑의 성패를 결정한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 속에서나 혹은 액정 너머로만 존재할 뿐이다. 예쁜 선남선녀가 좋은 경제적 조건 하에 어떤 고난 없이 서로를 위하는 그림 같은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더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은 가난보다 더 지긋지긋하고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대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최승자의 시 속 화자가 구원받지 못한 형상이 되었던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구원조차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사랑조차 우리를 구원할 수 없어서, 우리는 지금 사랑에 무관심해져버린 것 같다고.우리는 늘 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조차도 사실은 “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이 말은, “비록 이토록 처참한 나지만 사랑해줘”라는 투정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은, 사랑을 위해 더는 무리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에 부쳐서, 사랑을 위해 무리할 힘 따위 남아있지 않은 걸지도. 그 모든 힘듦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었던 사랑은 이제 과거에만 남았다.

2021-11-02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게 되는 걸까. 무수한 언어가 별처럼 모여 일상을 구성하고 있다. 빈번하게 마주치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말을 꺼내야 한다. 나를 드러내고 상대를 이해하는 방식의 발화를 고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말은 혀끝에 모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말은 깃털처럼 가벼우며 철근처럼 무겁다. 온종일 마음에 남아 있다가도 잠깐 한눈을 팔면 사라져버리고 만다. 무게도 속성도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사용할 때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폭신폭신한 말도 함부로 다루게 되면 무엇보다 날카로운 흉기로 바뀌기 마련이다.거짓말에 속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온전히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허탈함과 무력함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음을 할퀸다. 영혼에 생채기가 나면 쉽게 치유되기 어려워 한동안은 그저 아파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 교육받았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도덕적으로 매우 어긋난 일이며 해서는 안 되는 금기로 존재한다.거짓말을 단순히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세상에는 다양한 거짓말이 있다. 정치인이 내뱉는 거짓말처럼 허망한 발화도 있지만 상대를 위해서 거짓을 내보이는 경우도 있다. 너무나 아픈 진실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는 것이야말로 상대에게 휘두르는 폭력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위한 거짓말은 부정적인 언사라기보다 다정하고 슬픈 발화에 가깝다.소설이야말로 대표적인 거짓말의 장르다. 허구로 구성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말은 ‘거짓말을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틀린 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표현임은 확실하다. 소설은 무엇보다 현실을 냉엄하게 기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소설은 허구의 인물과 배경을 바탕으로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게 된다. 붙잡을 수 없는 세계를 찬찬히 그려나가며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이거 다 거짓말이잖아’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소설 속 인물에 공감하고 함께 웃고 울면서 텍스트를 따라간다. 허구의 세계를 살아가는 허구의 인물을 응원하고 동시에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에 투영하기도 한다. 거짓이라는 형식을 통해 도리어 진실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어떤 거짓말은 과하다 느껴질 만큼 달콤하다. 거짓말처럼 나쁜 것이 좋아지고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해결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정말 그런 순간이 온대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순간을 믿기 어려워하고 불행에 익숙한 사람처럼 매일을 살아간다. 거짓말처럼 기쁜 날을 앞에 두고도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서성거리기도 한다.어째서 그런 것일까. 거짓의 달콤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은 우리의 발목을 세게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눈을 뜨면 달콤한 거짓말의 세계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 드러나고야 만다. 그러한 거짓말은 가장 강력한 찰나로 작용한다.그러한 찰나가 그저 무의미한 것은 아닐 테다. 가끔 우리는 세상에 그리고 상대에게 현명하게 속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 기꺼이 속아주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진실 한 스푼을 발견하게 된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맛이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요리한 상대를 치켜세워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아프면서 아프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내보이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속고 속이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다. 나는 그 진부한 연극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그것은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오해이며 소중한 이해다.우리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한다. 가끔은 서로의 말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말은 곡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어떤 말은 그 안에 담긴 진실을 찾아내야 할 때도 있다.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행을 숭고하게 여기고 기꺼이 해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말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이며 세계를 이해하는 노력이 되기 때문이다.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순간이 도래하는 날을 상상한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희망찬 내일을 바란다. 그러한 상상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일말의 낙관 또한 지난한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필요한 거짓말일 테다.

2021-11-02

노인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돌봄 ‘노인통합돌봄 사업’

류병조국민건강보험공단 대구중부지사 노인장기요양 대구중부운영센터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요양원에 가야지”라는 이야기를 자주한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과 변화된 세태를 한탄하듯 반영한 것이지만 이 말이 어르신들의 진심일까? 2017년 노인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어르신의 57.6%는 거동이 불편해도 살던 곳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왔던 이웃과 친구들, 눈에 익은 환경을 뒤로 하고 낮선 병원, 요양원으로 가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노인이 되면 필요한 의료나 요양, 일상생활 나아가 주거문제까지 한꺼번에 도움을 받으면서 내가 살던 곳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일까?우리나라 고령화 속도는 OECD국가 중 가장 빨라 2020년 15.7%에 달했고 2025년에는 그 비율이 20%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 노인인구 증가에 따라 13년 전부터 실시한 노인장기요양보험은 노인인구의 10%가 이용하는 대표적인 사회보장제도로 발돋움해 국민들이 가장 만족하는 사회보장제도로 발전했다.그러나 요양병원, 요양원으로 대표되는 급속한 시설화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도움만 충분하다면 살던 집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리다시피 입원하게 되면 이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가족이 져야 한다. 또한 필요한 서비스가 기관별로 제공되어 불편하고 정보부족으로 제대로 이용을 하지 못할 경우마저 생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살던 곳에서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정부는 노인통합돌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춘천과 화성시에서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함께 해당 지자체, LH한국토지주택공사 등이 모여 사례대상자 발굴부터 필요한 서비스를 유기적으로 제공하는 노인통합돌봄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해 병의원을 이용하기 어려우면 의사의 왕진서비스가 연계되고 어르신이 필요한 시간에 방문하는 수시 방문형 장기요양재가서비스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식사부터 진료, 나아가 주택개조사업까지 개개인의 욕구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로 인해 의료 요양비 증가, 이로 인한 가족 간 갈등 심화 등 돌봄 부담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는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서 있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면서 노후 삶의 질 향상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노인통합돌봄 사업의 정착을 위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협력 등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노인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사회가 지속가능한 토대위에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2021-11-02

황룡사지 발굴조사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공사를 시작해 30년(569)에 경역을 마련하고 1차 가람을 완료했다. 진흥왕 35년(574)에 약 5m 이르는 장육존상을 비롯해 금동삼존상을 조성했고, 진평왕 6년(584)에는 이 불상을 모셔두기 위한 금당을 새롭게 건립했다. 선덕여왕 12년(643)엔 자장스님의 건의로 황룡사에 구층목탑을 조성하고자 했다. 목탑을 조성하기 위해 백제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하고, 이간 김용춘은 장인 200명을 인솔해 착공 3년만인 선덕여왕14년(645) 구층목탑을 완공했다. 구층목탑은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높이가 약 80m 정도다. 바닥의 면적이 약 150평이고 기단 한 변의 길이가 약 22.2m로 당대 왕경 내 최고 높이의 건축물이었다. 이렇게 황룡사는 신라 4대왕(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을 거쳐 93년 걸린 대역사를 통해 국찰로서 그 면모를 갖추게 된다.사적 제6호인 황룡사 터는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황룡사지를 비롯해 신라시대 절터가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 ‘구황동(九黃洞)’ 이라는 명칭도 ‘皇(黃)’자가 들어가는 사찰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1238년 몽골군에 의해 황룡사는 소실되었고, 이후 70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유허(遺墟)만 남고 그 터는 민가의 대지나 전답(田畓) 등으로 변모했다. 발굴조사 이전 황룡사 터에는 구황마을이 있었다. 조사 직전 촬영된 사진을 보면 목탑과 중문지 근처에 가가호호 들어선 초가와 기와집이 있고, 제법 규모가 큰 돌담장도 눈에 들어온다.황룡사 터는 1971년 11월 수립된 ‘경주관관종합개발계획’을 일환으로 1976년 4월 발굴조사가 착수된다. 사역 내 마을을 이루고 있는 민가 100여호를 철거하고, 연차적으로 56,700여 평의 주변 토지를 매입해 최초 3차년 계획으로 발굴되었다. 이후 1983년 11월까지 8차년 사업으로 발굴조사는 마무리 됐다. 8년간의 조사 기간 동안 현장 작업일수만 2,000일에 가까우며, 발굴 현장에 동원된 연인원은 무려 78,000여 명에 달한다. 발굴조사 결과 25,000여 평에 이르는 황룡사 경역의 범위와 1탑 3금당식의 가람배치가 새롭게 밝혀졌다. 또한 금당, 목탑을 비롯해, 중문, 강당, 회랑, 종루, 경루 등의 사찰 내 중요 건물터도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와전류, 용기류, 불상류, 금속유물 등 총 45,000여 점으로 대부분 신라와 고려시대 만든 것이다. 특히 강당지 북편에서 발굴된 치미 파편들은 모두 수습되어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약 180㎝로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가장 큰 치미로 알려져 있다.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우리나라 고대 사찰 연구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황룡사지 발굴 중 드러난 유구와 출토된 유물은 모두 기록으로 남겨져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자료로 관리되고 있다. 먼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중 학술적·역사적 중요도가 높은 유물은 국가에 귀속시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는 국가귀속대장은 6권이며, 여기에 수록된 국가귀속문화재는 모두 45,656점이다. 발굴조사 중 중요한 유구나 유물이 발굴되면 즉각 사진촬영을 한다. 발굴 당시는 모두 필름사진이었기 때문에 사진 한 컷이 매우 중요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황룡사지 발굴 관련 필름은 슬라이드필름, 흑백필름, 칼라필름 등 3종류. 슬라이드필름 24,934컷, 흑백필름 51,859컷, 칼라필름 1,983컷 등 모두 합해 78,776컷을 연구소에서 현재 보관 중이다. 유구나 유물을 실측한 도면은 2,845장, 그 외 발굴조사기록카드(589장), 유물분류카드(7,182장), 유물카드(2,144장), 유물조사카드(3,999장), 유물처리기록카드(4,784장)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황룡사지 발굴이 남긴 또 다른 역사이자 기록인데, 최근 연구소에서는 이 자료들을 모두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김동하 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장기간 이뤄진 사업이었다. 예상치 못한 유구들이 발굴에서 확인돼 조사 자체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실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그 넓은 경역 전체를 꾸준히 발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황룡사처럼 경역 전체를 발굴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1971년 11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정부에서 발표되고, 그 일환으로 경주지역 내 많은 유적의 정화사업이 착수된다. 이에 1973년 3월 문화재관리국은 ‘경주미추왕릉지구발굴조사단(이하 왕릉조사단)’을 임시로 구성하고, 대릉원 내 천마총, 황남대총 등을 발굴한다. 이후 1975년 10월 경주지역 유적 발굴조사의 지속성을 위해 기존 왕릉조사단을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으로 개편한다. 당시 부족한 예산과 인력에도 불구하고 경주 안압지, 황룡사지, 월성해자, 신라왕경 등의 대형발굴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경주 유적 발굴조사를 전담할 수 있는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1990년 1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기관 ‘경주문화재연구소’로 정식 인가됐고, 이후 200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한다.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에 왜곡되었던 황룡사의 가람배치가 1970년대 우리의 발굴기술로 명확하게 밝혀졌다는 점에서 자부와 긍지를 가질 수 있다.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신라 불교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사단원들이 흘린 땀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우리나라 초창기 문화재 발굴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 시작점에 경주 황룡사지 발굴이 자리한다.

2021-11-01

1636년 남한산성의 안과 밖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1636년 병자년 12월 1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의 도성까지 다달은 청의 부대를 피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이듬해 1월 30일까지 버티다 마침내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들여 인조는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조아린다.소설과 동명의 영화 ‘남한산성’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가 걸어서 나온 47일간의 기록이다. 김훈 작가의 첫 문장처럼 인조는 떠밀리듯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마지못해 남한산성을 나오게 된다. 전란의 와중에 조선의 섬처럼 남은 남한산성 안에서 매섭고 날카로운 대결이 펼쳐지고, 그 대결과 함께 영화의 홍보문구처럼 ‘나라의 운명이 그곳에 갇혀’ 성밖을 넘지 못한다.주화론자(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와 척화론자(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는 대의와 명분, 목숨과 백성을 들어 냉혹하고 처절한 논쟁을 벌인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들의 말은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인조의 나아갈 길을 극단으로 제시한다. 치욕을 견뎌 목숨을 구할 것인가, 죽음의 길을 택해 명분을 구할 것인가의 길이다.성밖 전장에서는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전투가 펼쳐지고, 남한산성 안에서는 화친과 항전을 둘러싼 말(言)의 싸움이 지속된다. 임금 앞에 시선을 내리깔고 조아린 모습들 속에서 서슬퍼런 말의 칼날이 부딪치고, 한 겨울 삭풍보다 매섭고 날카롭게 상대를 파고든다. 왕은 또 다른 선택지를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다그치지만 그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인조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흔들린다. 성안의 식량상황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인조는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 말아라”는 말로 하명한다. “얼마나 아껴야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그것까지 내가 정해주랴”고 답한다. 이 대사처럼 왕은 우유부단함과 모호함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무능한 신하들로 인해 안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는 청나라 병사들과의 싸움보다는 산성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산성을 둘러싼 청나라 병사들은 일정의 선을 넘지 않는다. 적으로써의 대상보다는 마치 목격자이며, 목표지점에 대기하고 있는 존재처럼 그리고 있다. 감독이 집중한 것은 고립된 상황 속에서 조선이 어떻게 안으로부터 무너지는가의 과정이라고 하겠다.김훈은 소설 속에서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라고 표현했다. 황동혁 감독은 이것을 영상으로 옮겼다. 김훈 소설의 문장처럼 수사적 군더더기가 없고, 짧으며 단호하게 끊어낸다.칼날 위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사는 소설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다. 영화는 소설 속 분위기를 화면에 표현하기 위해 장황한 서사를 생략하고 간결하고 상징적인 화면들로 채운다. 그래서 영화는 원작의 분위기와 인물 구도를 충실하게 구현한다. 어느 순간부터는 원작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며 소설과 영화를 넘나든다.삶과 죽음의 길, 살고자 하는 길에는 패배와 치욕이 있으며 죽고자 하는 길에는 명예가 남는다. 두 갈래의 길을 두고서 성안의 논쟁은 치열하고 뜨거워진다. 반대로 겨울은 깊어지고, 성안의 백성들은 한겨울 혹한 속에서 냉정하게 사지로 내몰린다.위정자들에게 두 갈래의 선택이 치욕과 명예의 길이었다면, 백성들에게는 오로지 살고자 하는 하나의 길을 희망할뿐이었다. 마침내 최명길은 항복문서의 초안을 작성한다.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고 길입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다고 말하며, 성문 밖으로 난 길을 따라 최명길의 항복문서를 밟고 삶의 길을 가라고 간청한다.그 길 위에 대장장이 서날쇠의 말처럼 “그 어느 편도 아닌” 자신과 가족을 먹이는 일이 중요한 백성들의 또 다른 삶이 이어지고, “지독한 겨울을 견뎌낸 자만이 봄을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그 길로 들어서기까지의 47일간의 뜨겁고 격정적인 이야기를 서늘하고 냉엄하게 그린다./(주)Engine42 대표

2021-11-01

어떤 착시현상

강길수 수필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실 뒷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모임이다. 먼저 온 분들이 몇 분 앉아있고. 소속 단체들의 팻말이 통로 좌우 탁자에 놓여 있었다. 뒤에서 얼핏 보니, 앞에서 세 번째 탁자에 내 소속 단체 팻말이 있었다.볼 것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때 뒷자리에 앉은 분이, “그 자리가 아닌데요….”하기에 다시 팻말을 보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 조금 전 우리 단체 팻말로 보았는데, 새로 본 팻말은 다른 단체의 것이었다.“어?”하고 일어나 제자리에 가는 잠깐 사이, 뒷머리에 망치라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팻말의 글씨가 작지도 않은데, 왜 착시로 보였을까. 물론, 뒷문을 들어서며 전처럼 얼핏 보았지 하나하나 제대로 보지는 않았다. 웬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나중에 다시 생각해봐도 이상했다. 우리 단체는 ‘평화의 모후’이고, 내가 앉은 단체는 ‘일치의 모후’였다. 글자 모양이나 내용이 오인하거나 착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안이었다. 무얼 골똘히 생각하며 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직 치매 증상이 드러난 것도 아니다. 도대체 무슨 요인이 착시를 일으켰을까.저녁에 낮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회의실에 들어가며 내 잠재의식은 ‘오늘이 마지막 참석’이란 사실을 품고 있었나 보다. 이사 갔거나 다음 달 타지방으로 갈 단원들에게 ‘상급 회의에 오늘 마지막 참석하겠다’라고 사전 연락을 한 상태였다. 회의록이나 장부도 다 마감했다. 그래서 담담한 마음으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팻말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사실을 보면 속마음은 겉과 달랐던 게 아닐까.기억력이 젊은 때 보다 떨어지고 있다. 기억 재생능력이라 해야 더 맞을지 모르겠다. 말을 하다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거나 화장실 사용 후 전등을 끄지 않는 일 등도 종종 있으니까. 두 살과 네 살짜리 손주들의 기억력을 곁에서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사람의 두뇌를 생체컴퓨터로 본다면 내 기억 재생능력은 개인 컴퓨터이고, 손주들의 그것은 가히 슈퍼컴퓨터다.아무튼, 상황 인지능력도 기억력과 함께 감퇴 되고 있다는 심증이 간다. 뉘라서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있으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자연의 순환법칙에 순응하며 사는 법을, 나이 들면서 시나브로 배우고 익혀가야 한다. 구원도, 성불도, 진정한 이룸도, 생·노·병·사의 순환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얻어낼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 다가오는 노쇠현상 앞에 겸손해야겠다.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대선정국이 달아오른다. 여당 후보는 뽑혔고, 제1야당 후보도 곧 뽑힐 것이다.선거 과정에서 유권자가 어떤 착시현상에 빠졌거나, 빠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대장동 개발 의혹 논란에다, 소시오패스라는 말까지 나오니 말이다. 새로 나올 대통령은 정치로 생긴 적폐, 거짓, 부정, 조작, 비리, 편 가르기 등을 없애고 나라를 하나로 모으면 좋겠다.불안한 국민의 살림 걱정을 덜어주며, 튼튼한 국방, 국익 높이는 외교로 나라에 새 희망을 안겨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1-11-01

가을의 선율에 젖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산과 들의 빛 어림이 나날이 짙어 가고 있다. 산천의 초목이나 들판의 곡식들이 제 나름의 빛과 색으로 형형색색 물들어가며 가을날이 깊어 가고 있다.청록의 잎새들이 누르스름하게 변조되거나 발그스레하게 물들어가는 풍엽(楓葉)은, 어쩌면 내면의 소리와 울림을 조곤조곤 색조와 빛깔로 풀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빨갛게 타는 듯 일어나는 가을산의 단풍물결은 그리움의 밀어가 꽃불처럼 온 산에 울부짖듯이 활활 번져가는 것이 아닐까?정갈한 햇살이 부서지는 알록달록한 단풍숲에 들면 정말이지 어디선가 꼭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빠질 때가 있다. 노란 은행나무 숲길에서는 꾀꼬리의 고운 목청이 은행잎 마냥 나풀거리며 우짖는 듯하고, 굴참나무숲에서는 길쭉한 갈잎의 서걱거림이 중저음의 첼로소리로 내려앉는 듯하다. 또한 앙증맞은 단풍나무 숲을 거닐면 오색찬란한 재잘거림이 영롱한 별빛 속삭임으로 다가오는가 하면 낙엽지는 모습은 비올롱의 긴 흐느낌 마냥 처연하기만 하니, 자연은 빛과 색의 조화를 때때로 율(律)과 현(絃)으로 탄주하며 오묘함을 더해주고 있다.그래서일까? 코로나의 와중이지만 다채로운 가을에는 유난히 음악회가 많다. 정기연주회나 음악 발표회, 길거리 음악제, 산사음악회 등의 음악잔치가 지난 10월부터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코로나19에 저당 잡힌 갑갑한 일상의 환기구나 탈출구로 여겨 소리와 가락의 흥취에 빠지다 보면, 잠시나마 음악이 주는 선물 같은 평온과 위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굳이 이름난 음악회가 아니더라도 혼자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거나 길거리 버스킹 등에 눈과 귀를 열다 보면, 가볍고 편안하게 멜로디에 젖어 들어 손뼉을 치고 어깨를 들썩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음악에는 공감의 흥이 있고 치유의 힘이 있다.지난 주말 교외의 한적한 카페 잔디마당에서 열린 작은음악회는 소박하면서도 정겨웠다. 출연자 중심으로 초청, 진행된 소소한 음악회는, 관객이 출연자가 돼서 준비한 레퍼토리를 발표하고 서로 격려와 응원으로 흥을 돋구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음악 나눔 마당이었다. 가요, 국악, 기타, 색소폰, 하모니카의 선율이 폭포수나 실여울처럼 흐르며 강렬하면서도 잔잔하게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또한 시월의 마지막 날에 열린 산사음악회는 ‘위드 코로나’를 맞이함(?)인지 지역과 중앙의 인기가수와 탤런트, 작곡가, 연주자 등이 출연해 관객들과 함께 깊어 가는 가을의 낭만을 한껏 즐겼다. 특히 오프닝 공연으로 포항시낭송회 낭송가가 우정 출연해서 윤동주의 ‘별 헤는 밤’과 지역의 오낙율 시인의 ‘포항 12경’을 차분하고 멋드러지게 낭송해 음악회의 품격을 더하기도 했다.포항시는 철의 선율로 문화도시 기반 조성을 위한 순수예술 진흥 프로젝트(주제 ‘기억의 시작’)로 11월 5일부터 11일까지 포항음악제를 개최한다. 시민들의 다양한 문화 향유권 조성과 고급화된 문화 수요에 부응하며 화려한 라인업으로 볼거리, 들을거리가 가득할 것으로 보인다. 음악과 함께 코로나의 시름을 털어내며 즐겁고 행복한 가을의 선율에 흠뻑 젖어보면 어떨까?

2021-11-01

국민의힘 ‘운명의 한주’… 원팀정신 보여주길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1일 대권 도전을 선언함으로써 내년 대선은 원내 정당을 기준으로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 국민의당 후보간 4자 구도로 치러지게 됐다. 민주당은 오늘(2일) 169명 의원 전원이 참여하는 선대위 체제를 출범시켰으며, 국민의힘은 오는 5일 오후 2시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대선 본선에 진출할 당 후보를 선출한다. 여야 모두 이번 주말부터는 대선후보를 확정해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한다. 오는 5일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국민의힘은 ‘운명의 한주’가 시작됐다. 전당대회 투표는 4일까지 진행된다. 당원 투표는 오는 1∼2일 모바일 투표와 3∼4일 ARS 전화 투표 순으로 진행되며, 여론조사는 3∼4일 이틀 동안 전화 면접 방식으로 별도 진행된다. 당원 투표와 일반국민 여론조사가 절반씩 반영되며 그 결과는 오는 5일 공개된다. 국민의힘 본경선의 최대 변수는 당원투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투표권을 가진 책임당원 수가 지난 6·11 전당대회 당시 28만명에서 57만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난 만큼, 신규당원 표심이 경선의 향배를 가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신규당원의 절반가량이 20∼40대로, 이들의 표심이 최종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 선두권을 다투는 윤석열·홍준표 후보가 각종 외부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이내 접전을 벌이는 상황이어서, 사실상 당원 투표에서 당락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정권교체를 바라는 유권자들이 지금 가장 우려하는 점은 국민의힘 경선이 막판까지 진흙탕 싸움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당협위원장 줄 세우기 논란에 이어 당 조직 동원, 공천 협박 공방까지 벌이며 건드려선 안 될 선까지 가는 느낌이다. 승부를 예측하기 힘든 유력후보들간의 판세로 인해 남은 기간 흑색 선전과 조직 동원 논란은 더 거세질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후보들은 지금부터라도 국정운영비전과 정책을 유권자에게 선명하게 제시하며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더 이상 네거티브전에 파묻혀서는 안 된다. 최근 국민의힘 초선 의원들은 “단 며칠 만이라도 통합의 리더십과 원팀 정신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이 호소를 무시한다면 엄청난 경선후유증으로 당 존립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2021-11-01

영남권 메가시티, 실현 가능한 사업부터 시작을

작년 8월 대구와 경북, 부산, 경남, 울산 등 영남권 5개 광역단체장이 모여 영남권 미래발전협의회를 결성한 후 처음으로 수도권에 대응할 영남권 그랜드 메가시티 청사진이 제시됐다. 대구경북연구원 등 4개 연구원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메가시티 발전방안 공동연구 결과에 의하면 모두 7개 분야 33개 핵심사업, 111개 세부사업과 36개 단기 대표사업이 제시됐다. 핵심사업으로는 영남권 거점도시 1시간 생활권 조성을 위한 광역철도 및 도로망 구축, 영남권 자연·역사·문화를 활용한 스토리 투어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단기 대표사업으로 영남권 수소산업 생태계 구축, 의료자원 공유 및 연계, 상수원 수질 개선사업 등이 제시돼 있다. 영남권 미래발전협의회는 영남권 5개 광역단체장이 만나 수도권 일극체제를 극복하고 국가균형발전을 이끌어 내기 위해 결성한 모임이다. 수도권에는 인구가 넘쳐나는데 지방은 소멸위기로 치닫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지역 단위 단체장의 고육지책의 하나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정부가 적극 나서지 않음에 따라 지역의 광역단체장이 모여 힘을 모은 것이다.올 7월 미래발전협의회는 권역별 초광역협력사업의 국가 정책화 등 5개항으로 구성된 영남권 상생번영협약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영남권은 전국 인구감소지역 89곳 가운데 32곳(36%)이 포함된 곳이다. 지방소멸의 위기감이 매우 고조된 곳이다. 전국적으로 매년 10만명의 청년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면서 지방소재 대학들은 심각한 존폐위기에 직면하고 지방의 경제도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정부는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비롯한 지방의 경제를 살리는 문제에 대해 등한시하고 있다. 수도권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개선하지 않으면 국가의 성장에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개선할 의지도 부족하다.지금 지방은 획기적 투자를 하지 않으면 소멸 속도가 급속히 빨라질 수 있다. 5개 광역단체가 결성한 영남권 미래발전협의회는 이런 면에서 막중한 역할을 수행할 임무를 띠고 있다. 울산연구원의 말대로 경제공동체를 넘어 수도권 집중을 견제하고 세계적 메가시티를 지향해야 지방도시의 미래가 있다. 청사진 발표를 계기로 대표사업 착수 등 실현 가능한 부분부터라도 사업을 시작해 영남권 그랜드 메가시티 구상의 존재감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2021-11-01

개나리가 피기까지는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 겨울이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봄꽃 이야기를 하려니 너무 성급해 보이기는 하지만, 한 달간 매일 500자를 쓰고 나니 문득 이른 봄에 피는 개나리가 생각난다. 개나리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눈을 준비하고 겨울을 지내고 꽃을 피운다. 개나리뿐 아니라 잎 없이 꽃 먼저 피는 봄꽃은 여름부터 꽃눈을 준비한다.이렇게 긴 겨울을 지내고 꽃이 피는 것을 춘화 현상이라고 한다. 겨울이 가고 일정한 온도가 되면 꽃이 피는데, 온실에서 일찍 그 온도를 맞추어주어도 피지 않는다. 반드시 한두 달을 추위에서 견뎌야 꽃이 핀다.눈치 빠른 독자는 개나리 이야기를 꺼낸 의도를 벌써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매일 500자 쓰기를 겨울 추위에 비유하려고 한다는 것을. 실제로 춘화 현상을 검색하니 고구마 줄기 당기면 고구마가 줄줄이 따라나오는 것처럼 인내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가르침이 줄을 잇는다.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의미를 부여해서 인간의 가치를 설명하는 일은 별 감흥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래전 무어나 흄 같은 철학자는 자연의 속성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진작에 비판했다. 겨울을 나야 꽃을 피우는 일부 꽃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춘화 현상은 이른 봄에 피는 꽃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춘화 원리를 밝힌 라이센코가 무엇을 했는지 알면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지 깨닫게 된다. 라이센코는 구 소련의 식물생리학자인데, 식물의 춘화 처리 원리를 확장하여 모든 생명 현상이 적절한 환경 조건에 의해 개량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도 이상적 인간형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그러나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겨울 추위 같은 단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유명한 김연아 선수도 어려서부터 눈에 띄게 재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혹독한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올림픽 금메달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교통사고로 왼쪽 팔을 다 절단한 김나윤은 척추를 붙이는 2년간의 재활치료와 피나는 노력 끝에 일반부 피트니스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이렇게까지 유명하고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더도 뭐라도 성과를 내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음카카오의 브런치에서 작가가 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정기적으로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이 작가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주 1회라도 꾸준히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니 이런 훈련과 인내 후에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을 춘화 현상에 비유하는 것을 식상하다고 손사레를 칠 일은 아니다. 이른 봄에 피는 귀여운 개나리도, 정겨운 진달래도, 아름다운 목련도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지난 여름부터 꽃눈을 준비하고 긴 겨울을 난 것처럼 우리의 삶도 꾸준한 단련이 있어야 기대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 달간 매일 500자 쓰기는 겨울 추위처럼 5000자를 쓰기 위한 단련이 될 것이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도 고단한 추위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그 추위만큼은 자꾸 피하고 싶다.

2021-11-01

백스

백스(Vax)는 백신(Vaccine)의 영어 줄임말이다. 이 단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발간하는 옥스퍼드 랭귀지가 선정한 ‘2021년도 올해의 영어 단어’다.옥스퍼드 랭귀지는 매년 영어권 세계 뉴스에서 수집된 145억개 단어를 훑어 그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분위기를 가장 잘 대변하는 단어를 선정해왔다. 지금까지 셀피(셀카 사진), 베이프(전자담배를 피우다), 기후 위기 등 다양한 단어를 선정했다.지난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으로 한 단어를 선정하는 대신 ‘전례 없는 올해의 단어들’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옥스퍼드 랭귀지의 분석에 따르면 백스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올해 9월 기준 1년 전보다 비교했을 때 72배 많이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백스라는 단어는 1980년대 처음 등장한 단어다. 처음에는 말장난 형식으로만 쓰이던 용어인데, 올해 주류 용어로 급부상했다.피오나 맥퍼슨 옥스퍼드 랭귀지 신조어 수석 편집자는 뉴욕타임즈에 “백신 관련 단어가 모두 증가했지만 백스만큼은 아니었다”며 “짧고 강렬하며 주의를 끄는 단어로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모든 조합에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백스는 백신이라는 단어보다 짧기 때문에 기존 단어들과 조합하기 쉽다. 예를 들어 백신 반대론자를 뜻하는 ‘안티 백스’나 백신을 2회 접종한 것을 뜻하는 ‘더블 백스’처럼 다른 단어를 붙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 있다.국제 백신구매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도 줄임말에 백스를 활용한 예다.코로나 팬데믹 시대, 백신이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방증이다.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11-01

울릉도 죽도(대섬)는 잘 있는가?

김윤배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동해연구소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대장 지난 10월 8일, 섬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와 섬 진흥에 관한 국가 정책을 발굴할 행정안전부 산하 한국섬진흥원이 공식 개원했다. 이 소식을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섬이 독도와 함께 울릉군의 부속섬이며 현재 1가구가 거주하는 죽도이다.대나무가 많이 자생하는데서 이름이 유래한 죽도는 대섬, 댓섬이라고 울릉도 주민들에게 불려왔다. 죽도는 저동항으로부터 북동쪽 약 3.8㎞, 울릉도 본섬과 최단 약 1.8㎞ 떨어진 섬이다.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가 2014년 개원한 뒤 이곳에 상주하면서 1년에 3~4차례 죽도를 여러 목적으로 찾는다. 죽도의 유일한 주민 김유곤씨는 더덕밭을 일구는 일, 관광객을 맞이하는 일 등 혼자서 죽도의 만만치 않는 삶을 견뎌내고 있다. 그에게 죽도는 부모님이 삶을 일구셨던 땅이며,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섬이기도 하다. 모든 섬들이 그렇지만 섬 주민의 애환이 죽도에 담겨 있다.우리나라 섬 영상으로는 매우 희귀한 1960년대 울릉도 생활상을 담은 미국인 험프리렌지 영상에는 당시의 죽도 삶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1960년대 죽도에는 4가구 30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의 삶은 밭농사와 함께 소 사육으로 하루를 보냈다. 오르막길이 워낙에 가팔라 죽도 주민이 이고 올라간 송아지는 도축되어서야 죽도를 나올 수 있었다. 축산학과의 한 교수는 진짜 한우고기를 먹으려면 울릉도 특히 죽도에서 키운 한우고기 맛을 보라고 했을 정도로 죽도의 소고기는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죽도에서는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수박과 참외가 경작되었다고 한다. 여름날 울릉도 주민들은 죽도를 찾아 죽도의 수박을 즐기며 섬 생활의 노고를 잊곤 했다.죽도는 원래 대나무와 함께 나무가 무성했다고 한다. 울릉도·독도 국가지질공원의 지질명소이기도 한 죽도는 지질학적으로 비교적 최근 시기에 형성된 죽도포놀라이트라는 암체로 구성되어 있다.한국지질자원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죽도의 암질은 울릉도의 삼선암, 공암, 관음도를 구성하는 암질보다 더 최근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또한 독자적인 용암돔으로 고려되고 있다. 심지어 죽도(20만7천801㎡)는 독도(18만7천554㎡)보다 면적이 큰 섬이다. 울릉군의 부속섬 중에서 가장 큰 크기는 생성시기가 가장 젊기 때문에 풍화와 침식의 영향이 적었던 이유로 추정된다.죽도의 지표면은 화산분출에 따른 부석층으로 덮여 있는데, 부석층은 풍화에 약하므로 쉽게 토양층을 형성한다. 부석들의 풍화로 인해 식물이 잘 자랄 수 있었던 나리분지의 원시림처럼 죽도는 대나무와 함께 산림이 무성했으며, 농사에 적합한 조건을 형성하였다. 대나무와 산림이 무성했던 죽도는 일제강점기 대부분 벌목되어 농토로 바뀌었고, 울릉농회의 시험포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더덕 농사로 이어지고 있다.죽도는 또한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반박할 때 등장하는 섬이기도 하다. 일본 외무성은 다케시마 홍보 팸플릿을 통해 한국의 고문헌에 등장하는 우산도가 독도가 아닌 죽도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또한 10월 25일 독도의 날 지정의 계기가 되었던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의 울도군의 부속도서로 언급된 석도가 독도가 아니라 죽도라고 반박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 대응 측면에서도 죽도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 필요하다. 죽도 또한 울릉군의 부속섬으로서 울릉도에 정착한 이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동안 독도만큼은 아니더라도 죽도에 대한 연구와 함께 주민의 삶의 터전으로서 관심이 너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1960년대 4가구 30여명이 거주하였던 죽도는 이제 1가구만이 거주하며 근근이 유인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물과 전력 그리고 울릉도 본섬과의 왕래가 가장 큰 불편이다. 식수가 나지 않아 빗물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력은 태양광과 풍력발전으로 대체하고 있다. 풍력보다 관리가 편해 죽도 주민이 선호하는 2006년에 준공된 태양광 발전은 판넬의 노후화로 효율이 떨어져 수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한다. 다행히 노후된 전기 축전기는 최근 죽도를 다녀간 한 울릉군 의원의 관심으로 해결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비록 해상상태가 좋을 때 유람선이 관광객을 싣고 죽도를 왕래하기도 하지만, 본섬과의 왕래는 여전히 불편하다. 그래서 최근 남해안에 도입되기 시작한 드론을 활용한 택배 배송에 관심이 아주 많다. 유인도로서 죽도가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주민의 입장에서 죽도 섬 발전 전략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있었으면 한다.죽도는 본섬인 울릉도 그리고 대한민국 섬의 미래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이다. 지금 죽도가 그리고 대한민국 섬이 긴급 처방을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 최외곽에서 해양영토를 관리하고 있는 섬 주민의 손을 놓지 않았으면 한다. 정부 그리고 한국섬진흥원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해 본다. 섬 속의 섬인 죽도에 주민이 오랫동안 거주했으면 한다.

2021-10-31

여야 대선후보들의 국토균형발전 공약 아쉽다

송하진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장(전라북도지사)이 지난달 29일 울산에서 열린 지방자치의 날 기념식에서 “20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이번 대선 정국에서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전환해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분권화하고, 지방의 다양성과 창의성, 역동성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도록 국가의 운영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지방분권형 헌법개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 회장의 이날 발언은 여야 대선후보들에게 지방분권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이와 관련된 정책을 공약으로 제시해 달라는 요구로 받아들여진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지난 1948년 제정된 이래 지금까지 9차례 바뀌었지만, 지방자치제와 관련된 규정은 손을 대지 않은 채 유지해 왔다. 이번 대선을 계기로 지방분권형 헌법개정이 여야 대선후보들의 공약으로 제시돼 차기 정부에서는 중앙과 지방이 대등한 관계에서 협력적인 파트너십을 가지는 것이 시대정신에도 맞다. 시도지사협의회가 제안하고 있는 지방분권 개헌의 주요 내용은, 헌법 전문과 제1조에 대한민국이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지방자치단체라는 용어도 지방정부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지방정부의 자치입법권과 자치조직권, 자치재정권을 보장해야 하며, 국가의 지역간 균형발전 추진에 대한 책무를 명시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현재로선 지방분권 개헌문제가 여야 대선후보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토균형발전 정책을 주요공약으로 내놓은 후보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국토를 효율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해 발생하는 지방소멸 어젠다는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정과제 1순위로 삼아야 한다.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지역균형발전이 이루어지려면 최고 권력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 대선주자 대부분은 수도권에 거주하기 때문에 지방소멸 위기를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도 노무현 정부를 계승한다고 해서 기대를 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수도권 일극주의를 오히려 심화시켰다. 특히 대구·경북은 이 정부 들어 외톨이신세가 되면서 인구가 줄고 현안은 줄줄이 표류해 왔다. 여야 대선후보들은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국토균형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획기적인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길 기대한다.

2021-10-31

‘대통령 리더십’ 안 보이는 與野후보

심충택 논설위원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대진표 확정이 임박했지만, 당선 후 5년간의 국가비전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후보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정책·공약은 실종됐고, 즉흥적인 ‘아무말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정권교체에 집중해야 할 야당은 후보간 상호비방으로 날 새우고 있다. ‘이사람이 대통령감이다’고 할 만한 리더십을 가진 후보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제·사회·외교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난제가 쌓인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하다.내일(2일) 당 선대위를 가동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후보는 대장동의혹 반박에 집중하며 아직 1호공약조차 내지 못했다. 첫 민생행보에서는 ‘음식점 허가 총량제’라는 급진적인 의제를 내놓으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 후보는 ‘음식점 허가 총량제’ 언급에 대해 “자살할 자유는 자유가 아니고, 불량식품을 먹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굶어 죽을 자유도 (자유가) 아니듯, 마구 식당을 열어 망하는 것도 자유가 아니다”라는 안타까움에서 표현한 발언이라고 했지만, 관련기사엔 ‘사회주의적 사고가 머리에 가득차 있다’는 댓글이 넘치고 있다.오늘부터 당원투표가 진행되는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파리떼’ ‘야비하다’와 같은 원색적인 인신공격이 나올 정도로 상호비방전이 과열되고 있다. 경선전이 진흙탕 싸움으로 일관되면서 국민의힘 지지율에도 경고등이 켜졌다. 위기를 느낀 당 초선의원 35명이 지난주 대선주자들에게 ‘통합의 리더십’, ‘원팀경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초선의원들은 “도가 지나친 공격으로 정권교체를 바라는 많은 국민께 실망과 우려를 드리고 있다”며 후보들의 자중을 당부했다. 국민의힘 대선주자와 캠프인사들간의 상호 인신공격은 뒤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상대를 향한 손가락질과 조롱, 비아냥이 계속되면 정권교체는 물건너 간다. 각 후보와 캠프는 국민들이 등을 돌리기 전에 과열된 경선분위기를 진정시켜야 한다.국민의힘은 조직과 자금, 여론전 등 모든 면에서 집권당인 민주당과 비교해 보면 경쟁이 되지 않는다. 외부 환경도 좋지 않다. 민주당은 이낙연 전 대표가 최근 이재명 후보와 만나 정권재창출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원팀으로 뛰고 있다. 그동안 제3지대에서 조직과 정책을 다져온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오늘 대선링에 오른다. 야권통합을 위해 협력해야 할 안 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벌써부터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해 가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당내 지도자의 리더십이 취약한 국민의힘으로선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에 놓여있다.국민의힘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유권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정책·공약제시다. 지금까지 야당 대선후보들이 내놓은 정책과 공약은 대선후보 공약집에 넣기엔 구체성이 많이 부족하다. 경선 토론회에서 후보들끼리도 서로 지적했지만, 치밀한 준비없이 설익은 정책을 마구 내놓은 경향이 없지 않다. 국민의힘 후보들이 지금부터 국정운영을 책임질만한 청사진과 리더십을 보여주지 않으면 대선에서 집권여당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2021-10-31

위드 코로나 시대 개막… 방역 긴장감 풀지 말아야

국민적 기대속에 단계적 일상회복을 위한 위드 코로나 체계가 오늘부터 시작됐다. 작년 첫 코로나로 1년 9개월만이다. 의료진의 헌신적 노력과 국민들의 적극적 호응으로 비교적 빠르게 위드 코로나 시대에 진입해 퍽 다행스럽다. 정부는 오늘부터 수도권은 10명, 비수도권은 12명까지 사적 모임을 허용한다. 유흥시설을 뺀 모든 다중이용시설의 영업시간 제한도 해제했다. 또 실내체육시설 등 감염 위험이 높은 일부시설은 접종완료자나 PCR 진단 검사 등 음성확인자만 입장할 수 있는 백신패스제도 시행한다. 그러나 정부의 방역과 일상을 함께하는 위드 코로나 전환을 코앞에 두고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갑자기 늘어나 위드 코로나는 시작부터 불안한 조짐이다. 안정세를 보이던 코로나19 국내 신규 확진자가 31일 2천61명이 발생하면서 나흘 연속 2천명대다. 경남 창원 한 병원에서는 121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 대부분이 돌파감염으로 추정된다 한다.대구서도 28일 106명의 신규 확진자가 나오는 등 100명 안팎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경북에서도 구미 30일 37명 등 도내 곳곳에서 신규 확진자가 이어지고 있다.우리는 국민 70% 백신접종으로 위드 코로나 체계로 전환하고 있지만 싱가포르 사례를 보면 위드 코로나라고 안심할 수만은 없다. 싱가포르는 국민의 84%가 접종을 완료하고 위드 코로나 체계로 들어갔으나 하루 5천명의 신규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는 위드 코로나 이후 풀린 긴장감이 원인으로 보인다. 우리도 위드 코로나 발표 직후 신규 확진자가 갑자기 느는 것은 긴장감 해이와 무관치 않다. 위드 코로나는 방역과 일상을 함께 하면서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마스크를 쓰고 개인이 지켜야 할 수칙을 잘 지키는 책임 있고 절제 있는 생활 자세가 필요하다. 방역당국에 의하면 백신 미접종자는 코로나19 사망 위험이 접종자보다 9.4배나 높다. 반면 백신접종자는 감염되더라도 그 증상이 경증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지속적으로 백신접종률을 높여가야 한다. 일상회복을 위한 조치가 단계적으로 풀려가지만 우리가 긴장의 끈을 놓는다면 언제든 코로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다. 성숙한 시민정신으로 성공적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아야겠다.

2021-10-31

주 4일 근무제 논란

스페인,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연안국가에서는 ‘시에스타’라는 낮잠 자는 풍습이 있다. 무더위 때문에 일 능력이 오르지 않아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저녁까지 일을 하자는 취지의 풍습이다. 풍습이지만 시에스타 시간에는 상점은 물론 관공서도 모두 문을 닫는다. 낮잠 시간은 오후 1∼3시, 2∼4시 등으로 나라마다 조금 다르다.스페인 정부가 세계 최초로 주 4일 근무제 시범운영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린다. 근무시간 축소에 따른 기업의 손실은 정부가 보상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시범운영 첫 해는 정부가 기업 손실분 전액을 보상하고, 두 번째 해부터는 지원 범위를 축소하는 방식이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주 4일 근무하는 기업이 등장하고 있으나 아직은 큰 흐름은 아니다.코로나19 영향으로 기업의 근무환경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재택근무가 늘고 맞벌이 부부의 유연근무제도 활성화되고 있다. 또 남자의 육아 휴직도 눈에 띄게 늘었다. 미국에서는 코로나 영향으로 아예 영구 재택근무를 채택하는 기업도 생겨났다고 한다.대선을 앞두고 주 4일 근무제가 논란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대선공약으로 주 4일 근무제를 꺼내 들자 야당 대표는 “굉장히 성급하며, 경제적으로 무지한 소리”란 비판을 가했다. 경제계 일각에서도 아직은 현실에 맞지 않는 시기상조의 정책이라 거부 입장을 보이는 데가 많았다.주 52시간 근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영세기업 근로자 입장에선 너무 앞서간 정책으로 오히려 휴일 양극화를 더 심화시킬 현실성 없는 정책이란 반응도 있다. 주 4일 근무제가 젊은이의 로망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청년실업난이 거듭되는 한 선심성 정책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다./우정구(논설위원)

2021-10-31

선비문화 마을, 덕동 숲

윤영대수필가 지난주 포항문화원의 경북선비아카데미 12강좌가 끝났다. 격조 높은 강의를 들으며 포항지역의 선비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경북지역은 유학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 낙동강을 맥으로 삼아 상·중·하로 구분되어 포항지역은 대구 구미 선산과 더불어 낙중학(洛中學)으로 교육의 맥을 이어온 곳이라, 선비정신이 은은하게 배어있고 자취도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알고 그 정신적 향기를 맡아보고 싶어졌다.비 온 후 맑은 가을하늘 아래 기계면을 지나 기북면으로 들어가니 과수원엔 탐스런 사과들이 태양을 닮고 있었고 잠시 후 오덕리 덕동숲에 닿았다. 이 숲은 풍수적으로 조성한 수구막이 숲으로 2006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였고 소담스러운 전통마을을 품고 있다. 입구 노송숲에 ‘덕동국민학교 교적비’가 눈에 띈다. 30년 전 폐교했다는 자리에는 전통문화체험관이 널찍하게 들어서 있다. 코로나로 방문객이 드문 관내를 돌아보며 볼거리느낌 집, 배움나눔 집, 잠자는 집과 다도와 공예체험실 등을 기웃거리다 뒤뜰로 오면 정겨운 장독대가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덕동민속전시관 앞에 주차하고 보니 덕연관(德淵館)은 닫혀있고 노부부가 낙엽을 쓸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이 여주 이씨 후손인 듯해서 인사를 했더니 전시관 주인으로 이 마을의 고문서 등을 보존하고 있다며, 이제는 마을에 맡겼다고 아쉬운 듯 뒤돌아본다. 앞에는 ‘제4호 기록사랑마을’의 커다란 표석이 보이고 덕연구곡 비석도 있다. 삼기(三奇) 구곡(九曲) 팔경(八景)을 메모하여 둘러보기로 했다.먼저 용계정(龍溪亭)으로 내려갔다. 임진왜란 당시 북평사를 지낸 농포 정문부 선생의 별장으로 이조 말엽 서원철폐에도 용케 화를 면하고 좁은 용계천 바위 벼랑에 서서 맞은편 연어대(鳶魚臺)를 내려다보며 늠름하다. 맑은 개울가 합류대에서 조약돌 하나를 주워 만지작거리며 올라오니 세덕사 터에 수백년 된 와향(臥香)이 세월의 무게를 업고기는 듯한 모습이 신기하다.조용한 골목길을 올라가면 애은당(愛隱堂) 고택이다. 기왓장을 쌓은 입구로 들어가 봤더니 인적이 없어 ‘ㅁ’자 모양이라는 상류층 고택을 살펴보지 못하고 나와 여연당(與然堂)으로 갔다. 정문부가 사위인 이강에게 양도했다는 가옥이다. 자연석 기단 위 툇마루에 마침 노인이 앉아있기에 현판 글씨가 아름다워 허락을 얻고 찍었다. 바로 옆이 사우정(四友亭) 고택, 정면 7칸 ‘一’자 형의 납도리집 사랑채는 긴 마루에 나란히 앉아 담소했을 네 명의 친구들이 그려지고, 담 붙은 근대한옥의 태고와(太古窩) 마루에 잠시 앉았다가 앞길의 덕계서당으로 갔다. 전통건축 중에 서당이 흔치 않아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곳 강의재(講義齋)에 앉아 시 한 수 읊고 싶은 마음을 안고 강둑 길 지나 와룡암으로 갔더니 넓은 반석 위로 깨끗한 개울물이 계절을 씻고 있었다.되돌아오는 길, 섬솔밭으로 들어가 연잎이 고요히 들어찬 호산지당 옆 회나무 우물 ‘회정’에 입도 적셔보고, 이 나라에 군자의 덕을 갖춘 진정한 선비가 나와 국가를 이끌기를 염원하며 구령대 앞에 서니 선비들의 삶을 느낀 오늘의 나들이가 마음에 찬다.

2021-10-31

대마 주산지 안동, 국가 헴프 산업 전초기지되다

권영세안동시장 고대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연못만 바라보다가 빠져 죽고 말았고, 그 자리엔 수선화가 피어났다. 수선화(narcissus) 향기의 마취 성분에 연유하여 마약을 뜻하는 영어 단어 ‘narcotics’가 유래했다고 한다. 마약은 의학이 발달하기 전 고대부터 고통을 억제하는 민간 요법으로 사용돼왔다. 기원전 3000여 년전 수메르인들이 아편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됐고, 기원전 1500여 년전 파피루스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동양에서는 기원전 2727년 중국 최초 약물학 서적인 신농본초경에 대마 씨앗을 치료에 사용한 기록이 있고, 삼국지에는 화타가 대마로 마취해 수술했는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에도 대마가 오장의 기가 부족할 때, 정신을 맑게 하고 딸꾹질, 타박상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최근 우리나라에서 수 백년간 삼베옷의 원료로 이용해온 대마가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대마 속 유용한 물질이 의약 원료 등으로 활발히 사용되면서 새로운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마라고 알려진 대마초(마리화나)는 대마의 꽃이나 잎에서 추출된 테트라히드로칸나비놀(THC)이라는 환각 성분을 이유로 역사적으로 숱한 사회적 이슈를 생성하며 부정적 시각을 고착화해왔다.이와 구별하여 ‘헴프’는 대마 속 환각 성분인 ‘THC’(테트라히드로칸나비놀)가 0.3% 미만인 대마식물과 그 추출물을 의미한다. 헴프에는 CBD(칸나비디올)라는 천연 성분이 있어 통증과 염증을 줄이고, 간질 발작을 조절하며 정신질환과 중독을 치료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아뇌전증, 치매, 파킨슨병에 효과가 크다고 한다. 이미 캐나다, 미국, 영국, 호주 등 50여개 국가에서는 의료용 목적으로 대마를 합법화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칸나비디올(CBD)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산업 분야로서 매년 20% 이상의 성장세를 어어나가고 있다. 미국 그랜드 뷰 리서치(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2027년 전세계 대마 시장 규모는 약 150억 달러(16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19세기 미국의 ‘골드러시’에 이어 대마 산업으로 자금이 몰리며 ‘그린러시’라 불리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마초 합법화 공약과 함께 기대감을 모으던 지난해 12월, WHO 권고를 받아들인 UN 산하 마약위원회가 60년 만에 대마를 마약류에서 제외하는 규제 완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국내에서도 대마 활용을 위한 보폭이 넓어지고 있다. 2020년 7월 중소벤처기업부는 대마 주산지인 안동 일대를 경북 산업용 헴프 규제 자유특구에 지정했다. 이로써, ‘마약’은 곧 ‘범죄’라는 사회통념과 마약류관리법 등에 막혀 70여 년 동안 시도조차 못한 대마를 활용한 산업화의 문이 비로소 열리게 됐다.안동시 임하면과 풍산읍 일대의 헴프특구에는 2021년까지 약 380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된다. 특구사업에는 (재)경북바이오산업연구원, 한국콜마(주), (주)유한건강생활, 교촌에프앤비(주), (주)우경정보기술 등 21개의 국내 유수의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안동 대마 재배지에는 최신 기술이 결합된 스마트팜이 조성됐고, 앞으로 6개 기업에서 약 20톤의 헴프를 재배해 총 62kg의 CBD(칸나비디올)를 추출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원료의약품 제조와 전주기 이력관리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대한 실증사업을 추진한다.헴프 활용을 위한 모든 실증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공정 전주기에 대한 표준 방식이 도출되면 이를 근거로, 마약류관리법도 개정될 전망이다. 안동시는 헴프 실증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대한민국 헴프 산업을 견인해나갈 수 있도록 관련 기관, 기업과 협력하고 행·재정적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이번 특구 사업으로 30여 개 기업이 안동에 유치되면 신규고용 70여 명과 함께 수출 효과도 상당할 것이다. 대형 공장이나 중견 기업이 없는 안동으로서는 청년 일자리 마련과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수백년간 옷감으로 활용되며 명맥을 이어온 대마가 바이오 신기술을 만나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고령화, 인구감소에 시달리는 지역 경제에도 새로운 희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21-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