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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치열했던 공방전, 영천전투

영천은 한국전쟁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자 치열한 전쟁터였다. 1950년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온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에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영천전투는 보현산을 넘어 영천을 점령하려 한 북한군 제15사단을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사단과 제8사단이 9월 5일에서 13일까지 전력을 다해 공방전을 펼치고 끝내 영천을 확보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한 대승리로 평가받고 있다.1950년 7월 14일 북한군이 금강 방어선을 넘자 워커 장군은 낙동강방어선을 말하며, ‘만약 이 선에서 적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면 연합군과 한국군의 반격 작전은 실패할 것’이라 강조했다. 북한군은 8월에 다부동과 대구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영천을 점령 후 다시 대구나 경주로 진격하고자 했다. 만약 영천이 점령되면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방어선을 지키기 어려울 수 있으며, 만약 경주로 진격한다면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었다. 영천은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하는데 핵심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비가 쏟아지던 9월 5일 새벽 1시, 북한군 제15사단은 전차 5대를 앞세워 총공격을 해왔다. 국군은 북한군에게 밀리다 분산 철수를 단행한다. 육군은 속절없이 뚫린 제8사단의 배속을 제1군단에서 제2군단으로 변경하여 병력을 보충한다. 9월 6일, 영천은 완전히 북한군의 차지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국군은 북한군에 밀렸음에도 다시 공격하여 영천을 탈환해 낸다. 또한 신녕의 317고지에서도 북한군을 방어해 낸다. 영천과 신녕을 차지하지 못한 북한군 제8사단은 전멸 상태로 패퇴하였다. 9월 7일, 국군은 일대를 수색하여 북한군 보급 차량 30여대를 파괴하고, 제73연대를 격멸하며, 139고지-130고지를 차지한다. 9월 8일, 북한군 제15사단이 다시 총공격을 감행하나 국군의 방어로 실패한다. 9월 9일, 국군 제8연대는 대구로 향하던 북한군을 저지하고 영천 시내로 진격한다. 이 과정에서 제5연대가 임포터널에 숨은 북한군 제15사단 포병연대를 섬멸한다. 9월 10일, 영천에서 경주 사이의 도로를 확보한 국군 제2군단은 영천 방면의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해 반격을 시작한다. 제7사단과 제8사단을 중심으로 자포동·도림동·완산동으로 진출했다. 또한 제19연대와 제21연대에서 적의 연락군관 2명을 생포하여 북한군 사령부의 위치를 파악한다. 9월 11일, 대의동에 위치한 북한군 제15사단의 사령부를 성공적으로 공격한다. 9월 12일, 북한군 제15사단은 전차·자주포 그리고 병력의 반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국군은 이를 계기로 자천을 탈환하였다. 9월 13일, 영천에서 북한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국군 제8사단은 전술지휘소를 영천으로 북상시켰다. 9월 15일, 기다리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영천전투는 미군이 북한군의 8월 공세 후 인천상륙작전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는 과정에서 허를 찔려 발생한 공방전이다. 북한군이 전력을 특정하여 집중하던 8월과 달리 9월에는 여러 방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가해 혼란을 유발했었다. 전달과 다른 전략으로 인해 처음에는 한국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영천을 비롯해 낙동강방어선이 밀려 위험해졌었다. 그러나 한국군이 북한군의 전략을 파악하고, 가용 전력을 끌어모아 반격을 시작하자 북한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물러나게 된다. 이러한 영천전투의 승리는 낙동강 등 병참선의 안정적 공급을 보장했고, 이는 앞으로 수행될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 성공 가능성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불리는 국군과 유엔군의 북한군에 대한 총반격도 낙동강방어선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영천전투는 한국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영천에는 전투와 관련된 장소가 여럿 마련되어 있으며, 언제든 방문하여 그들을 기릴 수 있다. 한국전쟁의 참전용사들을 비롯한 영웅들이 영천호국원에 잠들어있고, 전투호국기념관에서는 그 치열했던 역사를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창구동 산자락에는 영천전투를 체험할 수 있는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가 있다. 전투전망타워 1층에서는 간략하게 영천전투의 역사를 살피고, 2층 전망타워에서 영천시가지를 한눈에 담아본다. 야외에 마련된 시가전체험장·연병장·고지전체험장·국군훈련장에서 군사훈련과 서바이벌게임을 체험하며, 공원에 마련된 길을 따라 민족통일염원비·영천지구전적비·영천지구전승비·충혼탑을 둘러보며 참전용사들을 기린다. 다만 아쉬운 점은 체험프로그램이 단체 위주로 편성되어 있어 개인이 참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영천전투와 관련 있는 장소를 방문하고 체험한 이들은 오랫동안 전쟁영웅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체험의 문이 개인에게도 활짝 개방되는 날을 기다려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12-11

탁자 위에서 스멀거리며 자라나는 공포

어떤 이야기는 우리를 끝도 없는 공포의 감정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참혹하고 무서운 장면을 담고 있는 영화나 게임은 우리에게 즉각적인 공포를 불러오지만, 무서운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우리들 마음속에 존재하는 상상의 씨앗을 돋워 올려 좀 더 근원적인 공포와 마주하도록 한다. 어린 시절 누군가가 들려주었던 무서운 이야기가 주는 오싹함에 코 끝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따뜻하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괴담 같은 공포를 주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공포란 언어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감각인 까닭이다.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는 에드거 앨런 포 이후, 미국 문학계에서 글쓰기를 통해 전달하는 공포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작가였다. 그가 1898년에 크리스마스 시즌에 적합한 유령 이야기로 쓴 중편의 이야기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은 귀신이나 유령을 직접적으로 다뤘던 흔한 괴담에서 벗어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공포라는 감각의 본질에 대해 보여주는 작품이다.이 소설은 겨울 난롯가에 앉아서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나누면서 긴 겨울밤을 채우고 있다. 누군가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자, 더글러스라는 남자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자신이 40년 동안이나 비밀로 해 두었다는 자신의 조카인 두 어린 아이에게 나타난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여자가 죽기 전에 직접 써서 남긴 원고 속에 들어 있다. 더글러스는 크리스마스의 난롯가 앞에서 그 원고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모두들 일정한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듣는다.이야기는 한 여성이 블라이라는 시골에 가정교사가 되어 오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맡게 되는 아이는 마일스라는 남자아이와 플로라라는 여자아이 두 명이다. 그녀에 앞서 가정교사로 있던 제셀이라는 여성이 죽어 새롭게 가정교사를 찾게 된 것이라는 사정을 알게 되지만, 아무도 이전 가정교사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두 어린 아이는 예쁘고 똑똑해서 나는 그들을 가르치는 일에 만족하게 되지만, 그녀에게는 점점 이상한 일들이 생긴다. 마일스와 친했던 피터 퀸트라는 죽은 하인의 환영을 보기도 하고, 플로라와 유독 친했다던 예전 가정 교사 제셀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인간들처럼 내 앞에 간혹 나타나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있는 시선으로 쳐다본다.이 작품은 이처럼 낯선 가족에 들어온 가정교사에게 나타난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누군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현실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면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있을 법하게 들려주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갖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는 공포는 그것만은 아니다. 헨리 제임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가능성들의 빈틈이 존재한다. 가정교사는 결국 점점 미쳐가게 되는데, 누구도 그녀가 보는 유령을 보지 못한다. 과연 유령은 실재하는 것인가. 단지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기엔 그가 아름다운 필체로 꼼꼼히 적어나간 이 글쓰기가 갖는 존재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들이 가진 순진무구함이자 가끔씩 그들에게서 튀어나오는 사악함이나 잔인함은 유령이 그들을 잠식했다는 징표인가 아닌가. 나사(screw)는 회전할수록 우리의 마음을 조이고, 나선들 사이의 틈 속에서 공포는 자라난다. 귀신이나 유령이 실재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틈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공포로 조여지는 것이라는 것을 헨리 제임스는 보여준다. /홍익대 교수

2023-12-11

집권 후반기는 안정될 수 있을까

김진국 고문 국회의원 선거가 꼭 4개월 남았다. 내년 4월 10일이 22대 총선이다. 내일부터 예비후보자 등록을 할 수 있다. 예비후보가 되면 합법적인 선거운동이 가능하다. 이제 현수막이 숨이 막히게 나붙게 된다.그런데도 아직 예비후보들이 출마할 선거구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난 5일 선거구획정위원회는 253개 선거구획정안을 김진표 국회의장에게 제출했다. 전체 지역구 수는 고정해놓고, 인구에 맞춰 조정한 정도다. 그런데 선거구가 줄어든 지역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관련 법 개정안을 내고, 법을 고쳐서라도 선거구 축소를 막겠다고 한다.선거일 1년 전에 선거구 획정 등 선거와 관련한 기본 규칙을 정하도록 공직선거법에 못 박아놨다. 그런데 소용이 없다. 선거 때마다 한 달여를 앞둔 시점에 선거법과 선거구를 확정했다. 그러니 예비후보 등록과 실제 출마 선거구가 바뀌기도 한다. 선거구는커녕 선거법의 큰 틀도 합의하지 못했다. 소선거구제로 한다는 원칙만 세웠지,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 비율을 어떻게 할지, 비례대표를 어떻게 뽑을지 논란만 벌인다.현행 선거법은 거대정당들이 국민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추한 경험을 안고 있다. 선거제도에서 ‘연동형’은 유권자의 투표와 정당이 차지하는 의석이 비례하도록 배분하기 위해 고안됐다. 21대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은 더불어민주당 33.4%,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33.8%, 정의당 9.7%다. 그러면 국회에서 각 정당이 차지하는 의석도 득표 비율에 비례하게 나누어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지역별로 1등과 2등의 표 차가 매우 다르다. 영호남처럼 1등과 2등의 차이가 큰 선거구가 있는가 하면, 서울·경기에서는 1천 표 이내의 적은 표 차로 당락이 갈린다. 당선자는 3분의 1 득표로 당선되고, 절반 이상의 유권자가 자기표의 가치를 얻지 못한다. 이런 경향이 비슷하다 보니 서울에서 지역구 후보가 얻은 표는 민주당 53.5%,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41.9%였지만, 실제 얻은 의석수는 민주당 41석(83.7%), 미래통합당 8석(16.3%)이었다. 경기도에서도 민주당은 53.9% 득표로 86.4%(51석)의 의석을 얻었다.이 결과를 보면 어떤가. 국민의힘이 연동형을 하자고 하는 것 아닌가. 정당투표에서 얻은 표(33.8% 대 33.4%)를 보면 국민의힘이 민주당을 이겼다. 완전한 연동형이라면 국민의힘이 원내 제1당이다. 그러나 비례 의석을 줄이고, 그 중에서도 연동되는 비례 의석은 더 줄여 ‘준연동형’으로 바꾸었다. 더구나 위성정당을 주도함으로써 사실상 제 발등을 찍었다. 탄핵을 몰아붙이는 3분의 2에 가까운 민주당 의석은 국민의힘이 만들어준 꼴이다.연동형은 군소정당이 목을 매는 제도다. 어떻게든 원내에 진출하기 위해서다. 정작 선거법에 결정권을 가진 양대 정당은 부정적이다. 자기 의석을 줄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양대 정당에서 목소리가 큰 텃밭 출신 의원들은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는 압박 요인이 있는 연동형을 싫어한다. 연동형의 효과를 높이려면 비례 의석을 늘릴 수밖에 없고,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구는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사실상 개인적인 정치적 계산들이다. 포장만 그럴듯하게 한다. 윤석열 정부가 곤욕을 치르는 건 선거법 협상에 실패한 결과다. 지금도 국민의힘 지도부는 환상을 판다. 소선거구제로, 비례 의석을 줄이고, 연동형을 배제한 병립형으로 과반수를 차지한다고 선전한다.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선거법 협상과 관련해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했다. 현행 준연동형으로 가서 위성정당을 만드는 여지도 열어뒀지만, 그보다는 국민의힘과 손잡고 병립형으로 가자는 속셈이다. 20대 총선과 같은 제도다. 국민의힘이 자체 분석한 서울 판세는 21대 총선(41곳 중 8곳 당선)보다 더 어렵다(6곳 우세).위성정당을 막지 못하면 21대 총선꼴이 된다. 그러나 위성정당만 막는다면 윤석열 정부 후반기가 더 안정될 수 있다. 국민의힘은 과반을 얻어 독주한다는 환상보다, 야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않도록 막는 게 더 다급한 현재 판세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2-10

경찰손에 넘어가는 학폭조사, 부작용 없을까

내년부터는 학교폭력(학폭)이 발생하면 피해·가해학생 조사를 교사가 아니라 ‘학폭 전담 조사관’이 담당한다. 교사가 학폭부담에서 벗어나 본연의 기능인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학폭 전담 조사관은 내년 3월부터 전국 177개 교육지원청에 2천700여 명 배치된다. 수사·조사 경력이 있는 퇴직 경찰이나 학폭·생활지도 경력이 있는 퇴직 교원을 대상으로 위촉하며, 각 교육지원청별로 약 15명씩 근무한다. 2004년 학교폭력예방법이 생긴 이후 20년 만에 학폭 처리 방식이 대폭 바뀌는 것이다.앞으로 학폭처리 절차는 전담조사관이 조사를 한 후 결과를 학교장에게 보고하면, 학교에서 자체 해결 여부를 결정한다. 학폭 당사자간 합의처리가 안돼 자체해결이 어려울 경우에는 사건을 교육지원청의 ‘학폭 사례 회의’로 보낸다. 사례 회의에는 조사관과 학교 전담 경찰관, 변호사 등이 참석하는데, 1차 조사 결과를 보완해 교육지원청의 ‘학폭 대책 심의위원회’에 넘긴다.그동안 교사들은 학폭 조사 과정에서 학부모의 악성 민원과 협박에 시달리며 엄청난 고통을 겪어왔다. 사실상 혼자서 피해·가해·주변 학생을 조사하고 객관적 사실을 입증할 자료도 수집해야 했다. 정당한 조사인데도 온갖 민원이나 시달림을 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내년부터는 전담 조사관이 학폭 사건을 조사하기 때문에 교사가 수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문제는 학폭 사건 조사를 공권력에 맡기는 게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냐는 것이다. 피해·가해 학생을 경찰에 넘겨 조사를 받게 하는 것 자체가 학생·학부모 모두에게 큰 스트레스다. 경미한 학폭 사건에도 조사관이 나서면 원만한 해결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우리사회 전체적으로 교사를 학폭 사건 조사업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합의는 충분히 이루어져 있다. 무슨 정책이든 장·단점이 있고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앞으로 학폭 전담 조사관제도 시행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면, 즉각적인 보완조치를 해야 할 것이다.

2023-12-10

전쟁 끝난 지 언젠데 아직도 지뢰밭이 있다니

과거 방공포대가 주둔해 있던 포항 호미곶면 고금산과 봉화산 일대에 아직도 300발이 넘는 지뢰가 매설된 채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6·25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지뢰밭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고, 또 이로 인한 주민들의 안전은 어떻게 보호돼야 할지도 걱정스럽다.포항에서는 군 당국이 지난 2003년 처음으로 지뢰제거 작업에 나선 바 있고 이후 2014년과 2018년 등 수차례 더 지뢰제거 작업에 나섰지만 완전한 제거는 못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2021년 국방부가 제출한 후방지역 지뢰 매설지 및 제거 현황에 따르면 포항 호미곶면 일대에는 과거 군부대 주둔으로 설치된 지뢰가 아직 343발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군 당국은 이와 관련, 2021년 10월까지 모두 제거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현재까지 추가로 제거작업이 진행된 적은 없다.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폭우나 산사태 등으로 지뢰가 유실될 가능성이 많고 유실된 지뢰가 통제가 되지 않는 민간 사유지로 밀려올 경우 폭발사고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실제로 지난해 7월 강원도 철원에서는 수해복구 작업을 하던 굴삭기 기사가 폭발사고로 숨진 사고가 있었다. 국방부의 지뢰 및 폭발물 피해자 현황 실태조사 보고서(2021년 기준)에 따르면 전국의 지뢰 피해자는 1천171명에 이른다. 불발탄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또 사고도 종전 후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으로 확인돼 완전한 지뢰제거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 한 또다른 피해자 발생이 우려되는 상황이다.사고는 미연에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국방부는 전국에 걸쳐 산재한 지뢰지대를 더이상 방치말고 조속 제거 작업에 나서야 한다. 지뢰로 인한 주민의 불안감 해소뿐 아니라 사고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지뢰매설지에 대한 안전안내문 설치 등 안전관리에도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호미곶면 일대에 지뢰가 매설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2023-12-10

이민정책에 관심을

우정구 논설위원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로 지목된 한국의 인구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출산율 제고며 또 하나는 이민 유입이다.올해 말 국내 출산율이 0.6명대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보면, 출산율 제고를 통해 인구를 늘리겠다는 정부 정책은 현시점에서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그렇다면 이민을 통해 인구를 늘려야 하나 외국인 인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수반하는 문제가 적지 않다. 법적 제도적 문제뿐 아니라 국민정서 등도 심각히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복지천국으로 소문난 스웨덴이 북유럽 최악의 범죄 국가로 추락한 과정을 반면교사할 필요가 있다. 스웨덴은 인도주의를 앞세워 무분별하게 난민을 받아들여 현재 전체 인구(1천50만명)의 약 20%가 외국 태생의 이민족으로 구성돼 있다.문제는 이들이 제대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난민 중심의 범죄조직이 활개를 쳐 북유럽 최악의 범죄국가란 오명을 쓰고 있다. 스웨덴에 소재한 이민자 범죄조직만 50개, 조직원이 3만명이라 한다. 스웨덴 치안을 맡은 경찰 수보다 3배나 많다.이민정책은 국가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국가에 득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싱가포르 등과 같이 이민정책이 성공한 나라도 있다.정부와 여당이 이민청 설립에 적극적이다. 단일민족으로 수천 년 내려온 우리 역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찍을 정책이란 점에서 국민의 관심이 모아져야 할 정책이다. 인구 문제가 우리에겐 발등의 불이긴 하나 역사적 걸음을 뗄 이민청 설치에 충분한 연구와 준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10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 겨울인데 한낮 기온이 18℃까지 올라간다. 이래도 괜찮은가, 생각하며 커피나무를 마당에 내놓고 화분에 흙을 북돋우고 한껏 물을 준다. 일주일 내내 거실에 있어서 답답하기도 한 것처럼 너른 이파리를 한껏 흔들어댄다. 커피나무는 그나마 운이 좋아 잠시나마 밖에서 외기(外氣)와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만, 거대한 덩치의 길상천은 꼼짝할 수 없다. 남들보다 크고 무겁다는 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닌 셈이다.얼마간 미뤄둔 마당 정리를 마치고 훌훌 들로 나선다. 어느새 다가온 해거름이어서 멀리 서녘으로 길지 않은 겨울 해가 꼴깍, 소리 내고 사라지고 있다. 여름의 태양은 오래도록 하늘가에 흔적을 남기는데, 겨울 햇빛은 인색하다 못해 심술궂은 느낌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천체의 작동과 운동에 인간의 의지나 바람이 개입할 여지는 없으니 군소리 없이 바라보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따사로운 햇살과 달리 사납게 몰아닥치는 바람이 목덜미에 선선한 흔적을 남긴 후에야 미뤄둔 문제가 머리를 쳐든다.‘그대 마음은 어디 있는가?’ 가슴인가, 머리인가, 육신 어느 다른 곳인가! 어느 양자물리학자는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육신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인간의 뇌에 고작 0.0001%의 마음이 있을 뿐, 나머지 99.999%의 마음은 우리의 육신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탄식이 절로 나온다.두 손을 휘휘 저으면서 바람 속을 걷다 속삭인다. 그래, 나의 마음아, 너는 지금 나의 육신과 함께 가고 있느냐?!그렇다면 마음아, 너는 나의 앞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옆이냐, 위냐, 좌냐 우냐, 너의 위치를 알려다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묵묵부답 고요하다. 마음은 그런 나의 질문이 귀찮은 것인지, 성에 차지 않아서 그런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상냥하게 다시 묻는다. 나의 마음아, 나와 대화하는 게 귀찮지는 않은 것이냐?!그래도 마음은 대꾸하지 않는다. 이윽고 붉게 소멸해가는 햇살과 바람에 버티고 서서 태양과 작별하는 작은 구름장과 윙윙 소리 내며 질주하는 바람과 비어버린 들판과 대지의 수호신인 양 의연히 서 있는 전봇대를 사진기에 담는다. 세 장의 사진을 찍는 데 소요된 시간은 불과 10여 초, 하지만 사진에 담긴 풍경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그 사진을 찍는 나의 마음이 사진 영상에 비친 피사체인 겨울 풍경을 변화시킨 것이다.내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눈과 시각중추가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전권은 오직 마음이 가지고 있다. 마음이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인지 결정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가 ‘관찰자 효과’다. 전자는 인간이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波動)으로, 관측하면 입자(粒子) 형태로 ‘슬릿(slit)’을 통과하는 이른바 ‘이중 슬릿 실험’에서 나온 용어가 관찰자 효과다.아주 미소한 입자인 전자가 관측 행위로 인해 빛의 영향을 받으면, 파동의 성질이 입자의 성질로 바뀌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나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2023-12-10

‘평범한 삶 추구’, 중국 춘추 오패의 교훈

박진홍 부국장 인류사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자리’는 항상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다.더 나아가 ‘높은 자리’는 침탈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위태로운 삶의 숙명을 가졌다.진화론에 따르면 지구 모든 생명체는 ‘번식·생존의 이기적인 본성’ 때문에 서로 충돌 하는 필연성을 보여 준다. 역사가 증명하듯,‘번식과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는 권력과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 역시 끝이 없다. .그러나 끝없는 욕망은 결국 불행으로 귀결됨을, 중국의 대표적인 권력 투쟁사인 ‘춘추 5패’에서 잘 드러난다.BC 1046년 중국 고대 주나라 무왕이 목야전투에서 은나라 폭군 주왕을 꺾고 중원 대륙을 차지하면서,‘중국인 마음의 고향’ 주나라 역사가 펼쳐진다.하지만 BC 771년 주 유왕은 애첩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외적이 쳐들어 왔다’는 양치기 소년 게임을 거듭하다, 실제 견융의 침략에 지방 제후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유린당하게 된다.유왕이 살해되고 도읍을 동쪽의 낙읍으로 옮기면서 서주의 역사는 끝이 난다.이때부터 동주와 함께 중국 춘추시대(BC 771∼BC 453년)가 시작된다. 봉건시대인 주나라 춘추시대의 특징은 힘이 약화된 왕실이 명목상 천하의 주인일뿐, 실제로는 지역 제후 가운데 회맹에서 맹주로 뽑한 패자가 천하의 주도했다.패자들의 명분은 ‘주왕실을 보호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였지만, 치열한 생존 경쟁은 계속됐다. BC 91년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춘추시대 300여년동안 주왕이 봉한 제후국은 140여개국에 달했다.이 중 멸망한 나라는 60여개국, 살해된 군주가 40여명, 전쟁 횟수만 1천200회가 넘는다. 오죽하면 이때를 ‘국가가 봄에 건국했다가 가을에 지는 춘추(春秋)시대’라고 했겠는가!생존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제(齊)나라 환공(桓公), 진(晉)나라 문공(文公), 초(楚)나라 장왕(莊王),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 등이 당시 중국의 패자로 번갈아 등장하게 된다.중국 대륙을 호령하는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재력을 가진 ‘춘추 오패’.하지만 이들의 속살을 들여다 보면 화려한 이면에 참담한 현실도 그대로 드러난다.‘관포지교’로 유명한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해 부국강병에 성공하며 남방의 오랑캐들을 막아내 첫번째 패자로 등극한 제 환공.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제환공은 관중이 죽은 후 간신들에게 의지하다 ‘권력의 레임덕’에 빠지면서 별궁에 갇혀 굶어 죽고 만다. 두달간 장사를 못지내면서 시신의 구데기가 별궁 담장 밖으로 나올때 까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두번째 패자 진문공의 삶도 기구하고 파란만장했다. 아버지 헌공의 젊은 애첩이 자신의 어린 아들 혜제의 태자 책봉을 도모하자, 진문공은 19년간의 춥고 배고픈 험난한 망명생활을 겪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이복동생 이오가 먼저 왕이 됐다. 그러자 진문공은 동생의 극심한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겨우 62세에 귀국, 9년간 왕위에 올랐다.세번째 패자 초장왕의 가족사는 처절했다.초장왕의 아버지 목왕은, 그의 아버지 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성왕 역시 늦장가로 얻은 애첩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다.이에 목왕은 ‘이복동생이 왕이 될 경우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목왕을 자결케 했다.왕위에 오른 초장왕은 조정 대신들의 권력과 파워게임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 3년간 주색잡귀에 빠진 척하며 간신과 충신을 가린 후 일거에 정권을 장악한다.이때 나온 유명한 고사성어가 ‘삼년동안 울지도, 날지도 않는다’는 불비불명(不飛不鳴)이다.네번·다섯번째 패자인 오 합려와 월 구천은 2대에 걸쳐, 서로 죽고 죽임에 시달리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기구한 운명이었다. 오 합려는 숙적 월나라를 침공하다 월 구천에게 대패한 후 부상으로 사망한다.이에 합려의 장자 부차는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월나라를 재침공해 승리한다. 오나라로 끌려간 구천은 부차의 하인으로 전락해 목숨을 구걸한 후 매일 쓴 쓸개를 핥으며 심기일전, 결국 복수에 성공한다. 구천에게 패한 부차는 자결한다.높은 자리나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항상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노자는 무위(無爲)사상을 통해 ‘다른 사람 보다 앞서면, 시기 질투를 받아 위험하다’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無爲)’고 했다.역사는 ‘평범한 삶이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많이 보여준다.

2023-12-10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쫓아오던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십자가’ 전문(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정음사) 단 한 장 남은 12월이 십자가의 그늘을 지난다. 윤동주(1917~1945)의 시를 읽고 나면 쓸쓸해진다고 했다. 비에 젖은 나무가 젖은 흙으로 뿌리를 내리듯 한 시인이 거느리는 무게감을 그저‘쓸쓸’이라는 말로 견인 할 수 있을까. 그가 떠나고 3주기 되던 해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비로소 세상의 꼭대기 첨탑에 걸리었다. 윤동주가 걸어간 자리가 그렇다.“부끄럽지 않고 슬프고도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시인 정지용의 서문처럼. 온 국민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 첫 자리에 드는 시가‘서시’인 것은 ‘별 헤는 밤’‘자화상’등 그의 시편을 대할 때마다 마치 첫눈을 보는 마음처럼 순결해지는 것과 같음이리라.학기를 마무리하며‘영화가 있는 도서관’에서 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몇몇 학생은 영화의 내용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주는 고통과 절망의 낙차 때문일까. 학문과 사상의 자유, 양심과 표현의 자유 등 이미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는 오늘의 위치 때문일까. 그 무엇도 제 것을 가져보지 못한 시대, 주권 없는 그늘이 주는 상실의 폭은 멀고도 깊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은 몰입했고, 감상 후 학생들의 내면 고백은 뭉클한 여진으로 흔들렸다. 이희정 시인 가볍게 산책하려던 마음은 빗나갔다. 이 시를 쓴 때는 1941년 5월 31일이지만“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데”라는 문장은 11월경에 시를 수정할 때 썼던 얇은 펜으로 삽입되었다. 그 점에 주목해 보자, 시인‘동주’는 왜 이 문장을 삽입했을까. 쇠붙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려고 당시 일제는 쇠붙이란 것들은 죄다 쓸어갔다. 교회 종인들 남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끔찍한 상황이 되고 만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는 종소리 대신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고 했다.“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처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기에 동주의 고뇌는 깊어갔다.언제나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는 걸려 있다. 정황을 뒤집어 보면 “왜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를 거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먼저와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는 십자가를 남발하지 않았고, 종교 언어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가슴속 울분은 기척도 없이 고결하게 정제되었다. 해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 서럽고도 외려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거리는 빙 크로스비의 음성으로 감미롭다. 울려 퍼지는 캐롤과 성탄 트리의 빛으로 더없이 환한, 이런 때 진정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걸어 둔 십자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아닐는지. 밖을 향한 손쉬운 단죄 대신 안을 들여다보는 깊은 자성을 택한 영혼의 힘은 여기에 있다. 종소리 없이도 더 환하게 울리는 그의 시 앞에서 시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한 여학생의 소감 한 줄이 첨탑을 지난다.“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2023-12-10

지방소멸,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위현복 (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인구소멸과 지방소멸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지금 우리에게 동시에 대두된 난제이다.대부분의 지방 시·군 등이 인구가 줄어든 지가 오래고 이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소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난리가 난 상황이지만 수도권에서는 지금도 서울의 도시 경쟁력을 위해서 김포를 서울로 편입한다, 구리를 편입한다며 서울 메가시티 논란에 정치권이 뜨겁다.과도하게 밀집된 수도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 경쟁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입장에선 수도권과 지방격차, 도농격차의 상징이다. 모든 것이 수도 서울로 몰리다 보니 서울은 끝도 없는 주택난과 교통난에 부대끼고 이럴 바에는 제주까지 서울에 편입시켜 나라 전부를 메가시티서울로 개발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 하는 자조 섞인 말조차 나온다.지방소멸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대책들이 총선을 앞두고 앞다투어 발표되고 있다. 그 중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지역별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안도 있다. 이 정책은 특정지역, 특정기업, 특정인에게 특혜만 되고 투기만 조장할 뿐이다. 지방에 특화된 산업단지를 조성해도 이제 그곳에 일할 그 지방 사람은 없다. 공연히 외국인 근로자만 몇 명 더 늘어날 뿐이다.지방 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물이 그득한 큰 댐(중급 대도시)이 존재해야 하며, 큰 댐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다양한 작은 수자원, 실개천이 튼튼하게 지탱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무리 큰 가뭄이 와도 들판이 살고 식물이 자라야 사막화를 막을 수 있고 소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지방의 사막화를 막으려면 먼저 댐을 채울 수원지, 수자원을 살려야 하는데 지금 당장 메마른 댐에 물을 보내줄 주변의 수자원으로 무엇이 있는가?특별시와 광역시를 빼고 전국 163개 시·군 등 각 기초자치단체의 면적은 대략 서울시와 비슷하다. 그런데 모든 부의 90% 가까이가 163개 시·군 중 하나와 면적이 비슷한 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부의 규모는 형편없이 쪼그라든다. 서울에서 먼 지방에도 기본적인 부가 흘러넘쳐야 5일장도 살고, 각 급 학교도 살고, 사람도 살 수 있을 텐데, 산업화·근대화의 첫 번째 피해자가 지방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서울-지방간 격차를 줄이고자하는 근본적인 노력 없이 수도권으로 자원과 인력을 빨아들이기만 했다. 지방이 살려면 지방이라는 전통적인 수원지에 물(부)이 흐르게 해야 한다.서울의 토지는 평당 1억 호가하는 땅이 수두룩한데 지방의 문전옥답들은 평당 10만 원 이하가 수두룩할 뿐더러 ‘LH투기 사태’ 이후 농민이 아니면 농지구입을 원천적으로 막아 농지거래는 희귀한 일이 되어 농지를 통한 생산소득이나 농지거래소득이 끊어진지 오래다. 첫째는 농지생산소득 증대 방안을 찾아서 농지생산가치가 평당 100만원을 넘어서게 해야 하고, 둘째는 농지거래를 활성화시켜 외부 자본이 농촌에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 셋째는 그렇게 흘러넘치는 물(부, 자본)을 댐(중급 대도시)에 모아야 지방 소멸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일본에서는 지방소멸 대책으로 거대도시 도쿄와 오사카 사이에 지역거점도시로 100만 명 정도의 중급 대도시를 적극 키우는 정책을 추진하였다.청송·봉화 사람들이 서울·부산으로 한 번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지만, 안동이 100만쯤 될 경우 청송·봉화 사람들이 안동 가서 살면 주말에 고향에 자주가게 되고 그러면 언젠가는 다시 고향 청송·봉화로 많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우리나라는 늦은 감이 있지만 안동 정도가 힘들면 현 광역시를 중심으로 댐 역할을 하도록 지역별 중심도시로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지방이 그냥 속수무책으로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경상북도에서 볼 때 포항·경주·영덕 정도를 하나의 경제권·생활권으로 묶일 수 있도록 선제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소멸되는 사태는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무엇보다도 지방 구석구석으로 물(자본)이 흘러들어 댐(중급 대도시)의 수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마침 태양광농사(농지태양광 발전사업)는 현재 쌀농사 기준으로 영농복합형 태양광발전 사업은 8배 이상 소득증대가 기대되고, 순수 농지태양광 발전만 할 경우 38배, 스마트팜 융복합사업을 할 경우 현재보다 310배 정도의 소득증대가 예상되므로 농촌, 지방의 획기적인 변화와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댐에 충분히 물을 채울만한 수자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농촌, 지방에 물(자본)이 흘러넘치면 지방도 풍요로워지고, 지방이 풍요로워지면 지방 소멸도 막을 수 있고, 국토균형발전도 자연스레 이뤄질 것이다.재생에너지는 분산에너지라 한다. 에너지의 분산은 곧 부의 분산이고 부의 평준화이며 경제민주화의 구현이다. 적극적인 재생에너지 정책과 농지태양광 발전사업 활성화는 에너지 전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토균형발전과 빈부격차해소와 지방소멸 방지뿐 아니라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수 있는 만능 해법이 될 수 있으니 반드시 추진해야할 일이라 생각한다.

2023-12-10

사람 앞에만 서면 두근두근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오늘은 발표가 두렵다는 30대 K과장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K과장은 매월 1회 회사 전체회의에서 발표해야 한다. 평소 직원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괜찮은데, 많은 사람 앞에 나가서 발표할 때는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감이 엄습한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목소리가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고 식은땀이 난다. 미리 적은 것을 읽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중요한 발표가 있는 날이 다가오면 전날 두려움과 불안으로 한숨도 못 자기도 하고 발표가 끝나고 나면 온종일 몸살을 앓기도 한다.K과장은 정신과적 검사와 진단적 면담을 통해 사회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로 진단됐다. 사회불안장애는 오랫동안 사회 공포증으로 불려 왔으며, 현재는 두 명칭이 혼용되나 사회불안장애가 대표 진단명이다.사회불안장애의 핵심적 특징은 타인에게 자세히 관찰될 수 있는 사회적 상황에 노출되는 상황에 대해 극도로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며 사회적·직업적 상황 등에서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사회적 불안장애에서 말하는 사회적 상황의 대표적인 경우를 살펴보면, 여러 사람 앞에서 수행(예: 발표, 노래, 연주 등)을 하거나 어떤 행동(예: 음식을 먹거나 마시는 자리)을 하는 상황, 시험 특히 면접을 보는 상황, 낯선 사람이나 권위 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대화를 하는 상황, 공중화장실에서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소변을 보는 상황 등이다. 불안장애의 분류에 속하는 공황장애, 범 불안장애의 평생유병률은 각각 3%, 9%인데, 사회불안장애의 평생유병률은 10% 정도이다. 사회불안장애는 이렇게 흔한 질병임에도 진단이 잘되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떨리고 긴장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므로 수줍음이 많은 성격 탓이라 치부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불안장애는 단순한 수줍음을 넘어 그 정도가 지나쳐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데 문제가 있다. 즉, 학교 적응, 취업률, 직업적 생산성, 사회경제적 지위, 낮은 사회적 안녕, 심지어 삶의 질과도 연관된다.만약 수줍음도 아주 심해 일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사회불안장애로 진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 어린 시절의 수줍음은 대부분 거듭된 사회적 노출을 통해 호전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사회불안장애는 사회적 상황이 늘어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특히 사회불안장애는 공황장애, 우울장애, 알코올 의존, 약물 의존 등의 후유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불안장애는 상황이 반복될수록 자신의 불안한 예측대로 들어맞는 것만을 기억하며 점점 악화한다. 사회불안장애를 단순한 수줍음으로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우리는 사회불안장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고, 사회불안장애는 약물치료나 인지행동치료로 치료가 비교적 잘 되는 질환임에도 정신과를 잘 찾지 않는 경향이 있다.사회불안장애의 약물치료에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는 꾸준히 복용하면 공포감, 불안감을 덜어 주는데 효과적이고 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은 치료 초기 불안이 아주 심할 때 사용할 수 있고, 발표 공포증에 흔히 사용하는 베타 차단제(인데놀)는 신체적 증상(예: 떨림, 심계항진, 발한)을 완화하는 데 즉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인지행동치료에는 왜곡된 생각을 고쳐주는 인지치료, 사회적 상황에 직면하여 연습하는 직면치료(노출치료), 긴장 이완을 해 신체적 증상을 조절해주는 신체조절법(이완치료법)이 있다.사회불안장애 환자는 2가지 핵심 인지왜곡이 있다.첫째, 모든 사람에게 인정, 칭찬을 받아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는 인지왜곡이 있다.둘째, 사회적 평가에 대한 조건적 신념, 내가 실수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정적(예: 무시하거나 싫어할 것이라는 등)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인지왜곡이 있다.이러한 인지왜곡적 생각들이 두려움과 불안, 신체적 증상(예: 떨림, 심계항진, 발한)들의 증상을 일으키게 되고 증상을 줄이기 위한 방어적 시도들이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킨다. 사람들에게 사회불안에 대한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예를 들면, “나는 지금 (주요하신 여러분들) 앞에 서니 상당히 긴장되고 떨린다”고 말하면, 상대방도 존중해주고 나는 겸손해 보이며 내 긴장도 풀고 1석3조이다.오히려 사람들이 더 긍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커진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과 같은 부족함을 발견하면 공감하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그런데 사회불안장애 환자들은 불안한데 불안을 보이려 하지 않으려 하기에 오히려 부자연스러워지고 더 불안해진다.오히려 자신의 사회불안을 알려라. 자연스러워진다. 덜 불안해진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2023-12-10

한계를 뛰어넘는 힘, ‘겅호’(工和)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선물’ 등과 같은 우화식의 경영서를 보면 재미도 있고, 감정이입이 잘 되어 그 메시지를 잘 전달 받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런 책 중에서 필자가 기업에서 혁신 컨설팅을 하는데 큰 영향을 준 책이 바로 ‘겅호’라는 책이다. 16년 전 QSS혁신 컨설턴트로 올 때 자신감을 주었던 이 책의 지혜는 기업에서 조직의 변화를 불러 일으킬 때 아직도 실천하고 있는 내용이다.‘겅호’를 한자로는 공화(工和)라고 하며 ‘침체된 조직에 열정과 패기, 용기 그리고 직무 혹은 임무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한한 책임을 달성하자’라는 강한 신념의 파이팅 구호이다.이 책 내용은 윌튼이라는 쓰러져가는 공장에 페기라는 공장장이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의에 빠지지만 앤디라는 부하 직원에게 조직을 살리는 지혜를 배우게 되고 이를 현장에 실천하여 새로운 공장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후 미국 대통령상인 말콤볼드리지상을 수상하는 실화이다.무너져가는 회사를 멋지게 성장시키는 핵심요소를 세 마리 동물의 지혜로 배운다.첫째 동물은 다람쥐이고 ‘다람쥐 정신’이다. 식량을 모으지 않으면 겨울을 날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어 부지런히 먹이를 모으는 것이 다람쥐 정신이다. 즉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둘째 동물은 비버이며 ‘스스로 일하는 방식’이다. 자신들의 집이 폭우에 허물어지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본 비버가 즉시 보수한다는 것이다. 즉 팀원 모두가 목표 달성에 필요한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적합한 일을 적합한 방식으로 스스로 추진하는 것이다.셋째 동물은 기러기이며 ‘칭찬과 격려의 선물’이다. 수천㎞의 멀고 먼 목적지를 여행하는 이들은 그 먼 거리를 V자로 날면서 선두에서 날던 기러기가 뒤로 처지면 다른 기러기가 선두 자리에 나서면서 다같이 힘내라고 울음소리를 낸다. 즉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에너지를 얻고 나아가는 것이다.나를 변화시키고, 동료를 변화시키고, 조직이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게 하려면 첫째 나의 삶의 터전인 직장에서 가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하고, 공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둘째 스스로 일을 완성하는 조직은 일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최신 정보들은 공평하게 제공하고, 비밀이 없도록 해야한다. 셋째 팀원의 임무에 대하여 완료된 일의 결과에 대해서만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과정에서도 서로 응원하고 격려해야 동기부여가 확실히 이루어진다.동기부여에 의해 일어나는 열정(Enthusiasm)은 임무(Mission)와 격려(Congratulation)에 비례해서 증가한다고 한다. E=MC2 공식을 기억해야 한다.자신 스스로 묶여있는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겅호 정신’으로 무장해야 하고, 세가지 동물의 지혜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 기업의 변화를 일으키는 혁신 구호로 “지금 할 일은 지금, 오늘 할 일은 오늘, 즐겁고 신나게,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라는 구호를 외쳐본다.

2023-12-10

가까운 사람이 기뻐해야 멀리서 찾아온다

유영희 작가 올 12월에도 작년에 이어 지방 의회를 방청하고 있다. 의원들의 질의를 듣다 보면, 일부러 검색하지 못한 세세한 지역 소식을 알게 된다. 올해는 내가 사는 지역의 출산율이 0.5명대라며 육아 환경 질의가 오고 갔다. 나 역시 몇 년 전에 결혼한 두 딸에게 아이 낳는 것을 부추겨야 할지 망설이는 상황이라 관심이 갔다. 맞벌이하면서 육아를 해나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잘 되어 있는지 걱정되기 때문이다.출산율 하락이 세계적인 추세이기는 하지만, 한국 출산율의 하락 추세는 더 가파르다. 전국 출산율은 0.78명을 기록했고, 서울은 3년 전에 0.5명대로 떨어졌다. 이 수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021년 평균 합계출산율 1.58명의 절반 수준인데, 앞으로 전망은 더욱 어둡다. 현재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할 지역은 인구소멸 고위험지역과 위험지역, 주의지역으로 지정된 기초자치단체를 합하면 전체 지자체 226곳 중 90%가 넘는 206곳이나 된다. 광주광역시조차 인구소멸을 걱정한다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취임 때부터 이민청(출입국·이민관리청) 신설을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 추진하는 이민청은 완전한 신설이라기보다는 기존 기구의 승격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이미 있었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업무에 외교부,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등에 흩어진 이민정책을 모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관리 업무는 1961년부터 법무부 산하에 있던 출입국관리소가 맡아 왔고, 이것이 2007년에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로 전환되어 외국인 등록이나 영주권 업무를 지금까지 담당해 왔다.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주민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이자스민은 이민청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민청 설립만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다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주민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출산율이 높아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77년생인 이자스민 자신만 해도 현재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필리핀에 살았더라면 더 낳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참고로, 2022년 필리핀의 출산율은 1.9명이지만, 2020년만 해도 2.78명이었고 그 전에는 훨씬 더 높았다.‘논어’ 자로 편에는,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가까운 사람이 기뻐하면 멀리서도 찾아옵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민청 설립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한국이 아이 낳기 좋은 정치를 하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도 아이를 낳기 어려운데, 이주민이 아이를 낳고 영주하기는 더 어렵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사용하려고만 한다면 출산율 제고는 더 불가능하다.먼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미등록 외국인들부터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고급 인력이 오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한국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게 할지 이주민 정책을 잘 세워야 한다. 이것이 이민청이 저출산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2023-12-10

탄탄 단상 / 늘 숙제였던 삶

죽음의 강을 건널 때에 마지막 남기는 글을 세간世間에서는 사세辭世라 하고 불가에서는 임종게臨終偈, 열반송涅槃頌 혹은 입적게入寂偈라고도 한다. 선승들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회를 짧게 압축하여 후세에게 주는 글 대부분은 한마디로 인생의 무상함이다. 인간에게서 읽고, 쓰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대함이다.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한 역사든, 깊은 밤의 달빛에 젖은 야사든, 선인들께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삶에 있어서 다시금 내밀히 관조하게 하려는 마지막 가르침이며 오롯이 할喝이요 방棒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지만, 그들이 마지막 남긴 글 가운데 뼈에 사무친 말 대부분이 인생이 꿈만 같고 꿈꾸다 가는 것이며, 인생 성공의 삼위일체라는 출세욕, 물욕, 명예욕 이 모든 게 부질없으니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이다. 인생이 "풀 초草, 이슬 로露" 풀에 맺힌 이슬과 같다 하여 초로인생이라고도 하지를 않던가? 아침나절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은 한낮의 햇볕이 나면 흔적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하니 덧없다고도 하지를 않던가? 불교든, 노장사상이든 주된 가르침은 내가 최고라는 오만방자하고 교만한 마음을 속히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 복력에 넘치는 지나친 욕심을 지니거나 잘난척하려는 얼굴 표정도 버려야 한다. 만사를 자신의 의지나 뜻대로 관철해 보려는 욕심 역시 버려야 한다. 공孔씨 가문의 큰 선생께옵서도 죽으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입을 열어 보이시며, 다 빠져버린 이빨에 유일하게 남은 혀를 보임으로써 부드러운 게 진정 강함을 비유하여 몸소 보여 주었다 하지를 않던가? 세상을 다 지닌 절대 권력자라도, 가질 것 다 가진 부자라 하여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 욕심을 낸다면 권세와 재물의 노예일 뿐이며 거리의 노숙자만도 못한 부자유한 자가 아닐는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착취하거나 압박하여 타인을 궁지에 몰고 남을 어려움에 처하게 한다면 어찌 그를 인생의 승자라 할 것인가? 아프리카의 건조기에 수만 마리의 누우 떼가 살아남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건너야 하는 극지의 강에서 먼저 몇 마리가 뛰어들어 스스로 악어의 밥이 된다고 한다. 사실 유무를 떠나 몇 마리의 숭고한 희생으로 누우 떼가 유유하게 그 강을 건너게 하는 불멸의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어떤 방법으로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버리고 내던져 인습의 구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하는지? 평야의 어느 어두워진 초막에서 달을 바라다 보며 조급한 고뇌에 빠진다. 어느 곳에서 누구를 만나 내 살아온 이야기 전부를 보여 줄거나.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한때의 영화를 누렸던 이들이여, 십수년 후면 우리 모두는 고인이 되어 한 줌 재로 돌아갈 터이다. 모질게 가지려고만 누리려고만 하덜말고 한번쯤 되돌아 보세나. 아,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지나온 삶이었네라.

2023-12-08

대구·경북 출생아수 가파른 감소, 충격적이다

동북지방통계청이 대구·경북의 인구감소지역(대구 서·남구, 경북 군위포함 16개 시·군) 출생아 수를 분석한 결과, 최근 10년간 대구는 72.7%, 경북은 53.5% 줄어들었다. 감소추세가 가팔라 심각한 위기감을 가지게 된다.2022년말 기준, 대구 서·남구 주민등록인구는 30만1천명으로 2012년 대비 8만8천명(22.5%) 줄어들었지만, 출생아 수는 72.7%나 감소했다. 인구 1천명당 출생아 수를 뜻하는 조출생률은 지난해 기준 2.5명으로 전국 평균(4.9명)의 절반수준이다. 출생아 수에 비해 사망자가 더 많을 때 발생하는 자연감소 인구도 1만1천명이나 됐다.경북의 인구감소지역은 지난 7월 대구에 편입된 군위군을 포함해 16개 시·군이다. 해당 지역 인구는 지난해 87만명으로, 2012년과 비교해 8.4% 감소했지만, 출생아 수는 10년새 53.5%나 줄었다. 조출생률도 3.7명으로 전국 평균(4.9명)에 미치지 못했다.정부는 지난 2021년부터 연평균 인구증감률·인구밀도·청년순이동률·고령화비율 등 8개 지표로 인구감소지역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최근 자연적 인구감소와 사회적 인구 유출로 지역사회의 활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이다. 인구감소지역으로 처음 지정된 곳은 전국 89군데이며, 5년 주기로 지정한다.대구·경북뿐 아니라 우리나라 출산율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달 말 발표한 3분기 합계출산율은 0.7명으로 집계됐다. 이대로 가면 올 4분기에는 0.6명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가파른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지만, 제동을 걸 수단이 없다는 점이다. 오죽했으면 해외에서 “한국 인구감소 속도가 흑사병 창궐로 인구가 급감했던 14세기 유럽보다 더 빠를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겠나. 한국 특유의 저출산 원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정부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이 상태로선 얼마 안 가 비수도권 자치단체뿐 아니라 나라까지 소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인구대책을 세워야 한다.

2023-12-07

잇따른 가축질병, 방역 고삐 늦추지 말아야

올해는 유난히 가축질병이 많아 축산농가들의 시름이 크다.지난 10월 충남 서산에서 국내 최초로 바이러스성 소 전염병인 럼피스킨병이 확인된 후 전국으로 빠르게 번져나가 축산농가들을 긴장시켰다. 전국에서 소 사육두수가 가장 많은 경북도 예천과 김천 등지에서 럼피스킨병이 발생해 방역당국이 긴급방제에 나섰다. 백신접종 등 신속한 대응으로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럼피스킨병은 국내 1종 가축전염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올해 확진 사례가 나온 것으로 이 병에 감염된 소는 피부에 혹 등이 생겨 식욕을 잃게되는데, 치사율은 10% 정도다.지난 5월에는 구제역이 발생해 가축농가를 힘들게 했다. 소, 돼지, 양 등에 발병하는 구제역은 입과 혀 등에 물집이 생기고 심한 경우 폐사한다. 올 들어 발생한 구제역은 2020년 이후 2년동안 발생한 구제역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또 아프리카 돼지열병(ASF)도 경기도 파주에서 시작해 점차 남하해 지난 9월에는 경북 청송에서 발견된 멧돼지에서도 양성 판정이 났다. ASF는 전염성이 강하고 급성형의 경우 치사율이 100%다. 한번 발병하면 양돈농가는 막대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지난 1일 구미 샛강에서 발견된 야생조류에서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검출됐다. 올 겨울 첫 확진 사례라 향후 추이가 비상한 관심이다. 경북도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가 발견된 장소의 출입을 통제하고 야생조류에 대한 추가 조사에 나서고 있다. 또 반경 10km이내 닭 등 가금류 사육농가를 대상으로 이동을 통제하고 있다.가축 질병은 백신접종 등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평소 가축 축사의 안팎을 깨끗이 소독 정리하고 축사를 출입하는 차량도 꼼꼼히 소독하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 특히 축산농가와 방역당국은 긴밀한 연락망을 갖고 질병 발생 시 즉각 대응해야 질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방역당국도 가축질병이 발생하면 관련 농가에 신속히 알리고 정해진 지침에 따라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 가축질병이 잇따르고 있어 방역당국의 긴장감도 더 높아져야 겠다.

2023-12-07

‘달빛고속철도’와 정치력

홍석봉 대구지사장 ‘달빛고속철도특별법’의 연내 본회의 처리가 물 건너 가는 모양새다. 대구와 광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이다. 지난 5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상정됐다. 하지만 결국 국회 소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동서화합과 지역균형발전의 염원을 담은 프로젝트였다. 헌정 사상 최다인 여·야 국회의원 261명이 공동 발의했다. 이례적인 기록이다. 연내 통과를 장담했다가 결국 헛물만 삼켰다. 의원들 스스로 약속을 깼다.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 등 관련 부처가 강력 반대했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와 철도 복선화 등 예산조달 방안이 문제였다. 공청회를 열어 전문가 의견을 듣자는 말도 나왔다. 앞뒤 재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밀어붙인 것이 화근이었다. 정부부처의 이견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공동발의했던 의원들이 뒤늦게 말을 바꾼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졸속 입법을 자인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홍준표 대구시장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그는 “자기가 법안 발의해놓고 반대하는 기이한 국회의원도 있다”며 “법안 내용을 알고 반대했다면 그런 이중인격자는 국회의원을 더 이상 해선 안 되고, 법안 내용도 모르고 발의했다면 그런 사람은 동네 의원도 시켜선 안 된다”고 질타했다.영호남은 소백산맥에 가로막혀 교류가 차단돼 이질적인 문화권이 형성됐다. 소원했던 양 지역에 지역 감정이 싹텄고 정치권이 불 질렀다. 선거때마다 되풀이되는 고질병이 됐다. 1981년 착공, 1984년 개통한 ‘88고속도로’는 동서화합의 상징이었다. 88고속도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영호남 상호교류 촉진과 지방 산업 활성화를 목적으로 건설됐다. 2015년엔 4차선으로 확장하고 이름도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바꿨다. 양 지역 교류가 활성화됐다.여기에 더해 광주시와 대구시가 양 지역을 잇는 고속철도를 만들자고 의견 일치를 봤다. 이렇게 11조 원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당초 달빛철도는 사업성이 떨어져 계획에도 없었다. 그러다가 2021년 6월, 4차 국가철도망 구축 사업에 포함됐다. 이에 양 지자체와 정치권이 합심해 밀어부쳤다. 양 지자체장의 치적 욕심도 불을 당겼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예타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한 양 단체장은 정치권을 부추겼다.특별법을 만들어 해결하자는 것이다. 지역 발전과 동서화합이라는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명분을 내세웠다. 이 대명제 앞에 여야 국회의원 261명이 참여, 달빛철도특별법을 공동 발의했다. 양 지역 지자체와 지역민들도 쌍수를 들고 반겼다. 연내 국회통과와 내년 예산 반영 등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달빛고속철도특별법은 연내 국회 통과가 무산됐다. 지역민들의 기대가 무너졌다. 장밋빛 희망에 안주했던 것은 아니었나 반성의 소리도 나온다. 한쪽에서는포퓰리즘 지적도 나왔다.시작은 창대했다. 하지만 결국 국회 벽을 넘지 못했다. 정치인들의 과욕과 무책임이 빚은 참사였다. 다시 시작하면 되겠지만 이미 동력을 잃었다. 정치권의 무책임을 질타하는 여론이 팽배하다.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2023-12-07

경북대의 선택

우정구 논설위원 윤석열 정부는 비수도권 소재 대학 30군데를 선정해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대학으로 키우는 글로컬대학 육성사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 10군데 대학을 선정했고, 내년에도 추가 선정한다. 선정된 대학에 대해서는 매년 1천억원의 파격적 예산도 지원한다.올해 경북에서는 안동대(경북도립대와 통합), 포항공대가 선정됐다. 대구는 해당 대학이 없다. 글로컬대학은 지방대학을 글로벌 수준의 대학으로 키워 지역사회와 경제를 혁신적으로 이끌도록 하는 사업이다. 학령인구 감소와 지방소멸 위협에 놓인 지방도시를 대학의 담대한 혁신을 통해 지역사회와 대학이 함께 동반성장하자는 것이다.교육계는 글로컬대학 사업을 비수도권 대학의 구조조정 사업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현재의 학령인구 추이로 보면 20년 후에는 비수도권 대학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수도권 대학의 정원만으로 전국의 학령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올해 글로컬대 선정에 탈락한 국립 경북대가 국립 금오공대와 통합 논의를 벌인다는 소식이다. 내년도 글로컬 대학 공모를 앞두고 두 대학의 논의가 어떻게 진척을 볼지 모르나 학생들의 반대도 만만찮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부산의 경우 국립 부산대와 부산교대가 통합을 조건으로 올해 글로컬대학에 선정돼 한발 빠르게 앞서가고 있다. 경북대는 금오공대와 통합은 물론 대구교대와의 통합도 과제로 남아 실제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대구 유일의 국립 경북대가 글로컬대학 선정에 빠지는 것도 좋지 않은 모양새다. 내외적으로 압박을 받는 경북대의 선택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이유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07

개쑥갓 겨울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12월의 들길을 걷는다. 거의 날마다 들길 산책이 주요 일과였으니, 올해도 들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온 셈이다. 좋게 보면 유유자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허송세월이었다. 하지만 남이야 어떻게 보든 후회나 미련이 남는 행로는 아니었다. 내가 들길을 걸으면서 누린 자유와 여유를 그 무엇과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다지 어려운 길은 아닌데, 아무나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길도 아닌가 보다.들판은 사철 살아있는 경전이다. 날마다 들길을 걸으면서 시시각각 오관으로 그 경전을 읽는다. 오늘은 이 경전의 개쑥갓에 밑줄을 긋는다. 개쑥갓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식물도감에는 국화과의 한해살이 식물로 봄부터 늦가을까지 성장을 하면서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걸로 나와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동남쪽인 이 지역에서는 상당수가 산 채로 월동을 하면서 날씨가 조금만 풀려도 꽃을 피운다. 물론 냉이나 봄까치꽃, 광대나물 같은 풀들도 양지쪽에서 월동을 하지만 개쑥갓의 겨울나기는 어느 풀에도 뒤지지 않는 것 같다.자연 경전에는 우열이나 귀천이 없다. 사람들은 삼라만상의 가치를 따지거나 의미부여를 하고 가격 매기기 좋아하지만, 자연에는 아예 그런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냉이는 냉이대로 개쑥갓은 개쑥갓대로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고 생명으로서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비교나 경쟁이나 차별 따위가 불필요한 것이다.월동하는 풀들은 풀잎에 솜털이 나고 갈색으로 변한다. 엽록소를 버린다는 것은 성장을 멈추고 일종의 동면상태에 들어간다는 의미일 터이다. 개쑥갓에게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 계절인지, 왜 혹한의 계절에도 악착스레 살아남으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극한상황 속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조건만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살아있는 것에서 생명의 엄연함을 읽는다. 한편으로, 한 점 생기도 다 소진하고 바싹 마른 잎이나 대궁으로 겨울바람에 쇠락해가는 다른 풀들이라고 나약하거나 소심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을 깨끗이 비워버린 허허로운 모습 또한 서늘한 의지로 다가온다.들판 가운데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내가 걸어온 길은 들길이고 서 있는 곳은 들판이다. 바싹 마른 억새가 같은 키로 서 있고 둑길 양지에는 가까스로 월동을 하는 풀들이 있다. 며칠 전에 도착한 청둥오리들이 무리지어 바삐 날아가고 까치와 비둘기, 참새 같은 텃새들도 먹이를 찾아 내려앉는다. 겹겹이 껴입은 옷의 두께만큼 저들과는 멀지만, 마음만큼은 나도 슬며시 저들의 자유에 끼어들고 싶다.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고 단순하고 소박해져야 근처라도 갈 수 있을 것이다.들판이라는 경전에 쓰인 말씀들은 모두가 불립문자(不立文字)다. 개념이나 의미나 가치로 규정되기 이전의 날것이다. 뭐라고 서둘러 규정짓지 말고 단정하지도 말고 아집이나 독선, 고정관념에 빠지지도 않아야 보이고 들리는 우주의 메시지다. 개쑥갓도 그렇다.

2023-12-07

지방 균형발전의 꿈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 현상은 심각하다. 수도권 면적이 국토의 약 12%인데 인구의 50%가 몰려있어 비수도권 즉, 지방소멸의 위험지역은 12년 사이에 2배로 늘어났다. 국가 경쟁력은 훼손되고 지역 간 양극화로 국민의 불안감은 커지는 가운데 17개 시·도는 ‘지방분권-균형발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지방시대를 열자”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방시대 5대 전략은 교육혁신을 통한 지역 혁신 인재를 양성하고 특화 산업을 일으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시킴으로써 2030세대의 정착을 유도한다는 것이다.“지방소멸을 막자”는 목소리가 높다. 지방 균형 발전과 함께 경제 성장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그 보장의 원칙으로는 공업의 합리적 배치, 생산력의 적합성과 함께 교통 인프라 구축도 필요하게 된다. 지방마다 자연조건과 자원의 분포 상태가 다름으로 각자의 끊임없는 정책 개발과 실현이 중요하다.인구소멸과 투자가 없는 지방을 방치하게 되면 국가 균형발전이 깨어지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어진다. 국회는 ‘지역 균형발전 포럼’도 열고 권역별 메가시티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경북도는 2년 연속 산업통상자원부의 ‘투자유치 우수 지방단체’에 선정되어 지방세 30억 절감 효과를 가져왔으며 내년에도 지자체 지원이 가능하다. 그 평가는 투자유치, 투자 수행 방식, 사업 이행관리 및 만족도 등을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2024년부터 경북도 내의 균형발전 낙후 지역인 상주 문경 의성을 비롯한 11개 기초지자체는 국고보조비율 10%를 상향 지원을 받게 된다. 2차전지와 반도체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특화단지 2곳과 국가산단 후보지 3곳을 선정하는 등 경북도의 산업구조를 바꾸려고 한다.1960~70년대 울산은 반도체와 자동차, 선박 제조 산업을 통해 힘찬 공업도시로 발전하였고, 경기 화성은 근래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을 집중시켜 신도시로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포항은 70년대 포항제철을 중심으로 동해안의 굴지의 철강 도시로 우뚝 섰었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는 지방자치는 갈수록 위축되고 국가균형발전은 요원한 듯하다. 인구 감소, 고령화, 지역 격차 등을 이겨나가도록 주민복지와 생활여건 개선을 위한 스마트빌리지 사업도 키우고 지방투자 촉진 보조금을 통한 기업의 지방투자 활성화도 지원하고 있다.경북도는 ‘K-U시티’ 사업에 ‘배우고 익히고 누리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2개 시·군에 맞춤형 사업과 지역 대학과의 인프라 구축을 통해 미래 신도시, 청년 정주 도시를 만들려고 한다. 구미는 반도체 산업을 금오공대 구미대와, 의성은 세포배양 산업을 영남대와, 포항은 2차전지 산업을 포항공대와 한동대 등과 협력하기로 하였다. 또 블루밸리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전기차 배터리의 재활용 클러스터를 만들고 일반산업단지에서는 2차전지 및 산업용 가스생산설비를 만들겠다고 한다.산업과 함께 교육 인프라도 중요하니 포스텍의 연구중심 의과대학도 꼭 설립되었으면 한다. 지방 정주와 교육, 문화와 산업 등 5대 분야의 대전환 정책이 달성되었을 때, 진정한 지방 균형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2023-12-07

김장철이 되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맘때면 김장 담그기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집안 행사다. 11월의 주부들의 인사는 “김장은 했느냐”, “올해는 배추 몇 포기나 할 것이냐”이다. 나도 해마다 그런 인사를 받지만 대답은 한결같다. “전 김장하지 않아요.”결혼한 지 42년째다. 김장을 딱 두 번 했다. 아, 올케들이 와서 한 것까지 치면 세 번이다.젊었을 적, 한 5년 시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모시고 살았다기보다 얹혀살았다는 표현이 맞다. 시간강사로 학교에 다니면서 학위공부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어머님께서 전적으로 살림 맡아주시고, 아이들이 제법 클 때까지 돌봐주셨다. 큰살림을 척척하셨던 어머님이셨다. 친척 중에 잔치가 있으면 메밀묵을 쒀서, 혹은 유과를 만들어 보내시곤 하셨다. 김장철, 이른 아침에 눈 뜨면 배추 100포기가 마당 한켠 수돗가에 쌓여 있었다. 저녁에 거들어야지 생각하고 퇴근 후에 돌아오면 이미 버무려놓으셨다. 일손 빠르신 어머님 덕분에 나는 겨우내 김장독에서 물에 둥둥 뜬 김치를 건지느라 애를 먹었다.그즈음 한해,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 그래도 명색이 며느리인 내가 김장을 해야지 싶었다. 한식요리책을 사서 김치 파트를 열심히 공부했다. 비늘김치, 호박김치, 개성보쌈김치 등 맛있고 특색있어 보이는 김치 몇 가지를 멋부리듯 만들었다. 결과는 실패. 한 달쯤 후 어머님께선 늦은 김장을 다시 하셨다.김치냉장고가 처음 나올 때였다. 김장하자던 남편에게 김치냉장고를 사주면 하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바로 사들였다. 그 해 또 한 번의 김장을 한 게 내 인생 김장 역사의 전부다. 10년 전 이맘때,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를 모셨던 오빠는 청주에 살았다. 고향 가까운 대구에서 장례를 모시자며 형제간 합의했고 우리 집에서 모든 상을 치렀다. 장례 후 삼우재까지 지내려 삼남매와 올케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이참에 김장이나 하자며 큰 올케가 주도해서 집엔 갑자기 김장 풍경이 펼쳐졌다.내가 김장하지 않아도 우리 집엔 맛있는 김장김치가 해마다 넘쳐났다. 큰집과 작은집 형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담근 김치와 쨍한 맛의 동치미는 겨우내 식탁에 올라 우리 식구를 감동시켰다. 올케도 김장을 하면 해마다 보내주었다. 싱싱한 명태를 넣은 김치는 감칠맛이 그만이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도 김장하는 날이면 김장체험하라며 부르곤 했다. 그리고는 한 통 가득 김장을 나눠주었다. 대학교 은사님의 사모님도 김장철이면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이 교수 올해도 김장 안했지. 그럴 줄 알고 좀 더 담았으니 가져가시게.” 이렇게 동서표, 올케표, 친구표에 사모님표까지 다양한 김치가 넘쳤다.최근에는 김장할 줄 모르는 내 처지를 아시는 청도의 어르신은 직접 아파트에 가져다 두시고 안동의 한 어르신은 택배로 보내주신다. 올해는 안사돈께서 귀하게 담근 배추김치에 고들빼기김치며 들깨김치까지 보내시니 황송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세상에 나같이 김치복, 아니 인복 많은 이는 다시 또 없을 거다.

2023-12-06

손목 통증과 팔의 역학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손목 통증은 별 것 아닌 통증으로 보는 사람이 많고 실제 환자들도 그렇게 내원한다. 물론 오래되지 않은 손목 통증은 위치를 잘 잡고 적절히 치료를 잘하면 잘 낫기도 하나 손목에 구조적 부정렬이 있는 경우는 잘 낫지 않고 환자 본인도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손목 건초염의 경우에는 상당히 치료가 어려운 것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손목 터널증후군과 같이 신경이 눌리는 질환은 단순히 손목만 치료해서는 잘 낫지 않고 목 어깨를 교정해야 좋아진다. 손목 질환은 팔꿈치 요골 부위를 압박하면 그곳이 불편한 경우가 많다. 손목부터 팔꿈치 어깨, 목까지 톱니바퀴처럼 서로 관절로 연결돼 있어 이 중 한 곳의 심한 통증은 다른 부분도 같이 치료해야 빨리 좋아진다.사람들은 대부분 등을 굽히고 어깨를 앞으로 오므려서 일을 한다. 목은 앞으로 나와 있으며 이를 거북목 혹은 일자목이라고 한다. 이런 부정렬한 자세에선 당연히 목 어깨 팔꿈치 손목의 기능적 문제가 생기고 지속되면 기능적 퇴행 구조적 퇴행으로 이어진다. 텐트를 쳤을 때 사방에서 당기는 줄 한두개만 끊어져도 장력이 무너져 텐트의 모양이 무너지듯 인간의 구조적 부정렬에서도 그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굽은 등과 둥근 어깨는 어깨 관절의 부정렬을 만들고 팔꿈치의 부정렬을 만든다. 결국 손목의 부정렬도 생긴다. 그래서 손목의 치료는 단순히 손목만 치료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차적으론 손목을 치료를 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좋아지고 나서 더이상 치료의 진전이 없거나 손목 모양이 틀어지거나 부어 있는 경우는 팔꿈치쪽의 요골과 어깨 목까지 치료를 해야 한다.손목치료의 기본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보통 환자본인도 정확한 위치의 통증을 모르고 손목 전체가 아프다고 내원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듯이 대부분 건초염이 생기는 엄지쪽이나 소지쪽 관절부위를 눌러 보면 통증이 있다. 그럼 그곳에 부항으로 피를 뽑고 약침을 놓고 침치료를 하면 심하지 않은 경우 4~5회의 치료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증이 몇 달이 넘은 경우 또 아픈 부위가 틀어져 있거나 부어 있는 경우는 몇 번의 치료로 통증이 줄어들 수는 있으나 완치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손목이 틀어져 있고 부어 있는 경우는 단순히 손목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팔꿈치 근처 요골쪽의 뼈를 교정하고 근육을 풀어 주는 치료를 해야지 해결 되는 경우가 많다. 요골은 팔꿈치부터 손목을 이어주는 뼈로 일반적인 부정렬 자세에서 앞으로 약간 밀려나 있는 상태가 된다. 이것을 원래 자리로 살짝만 밀어주고 치료를 해도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손목터널증후군은 정중신경이 손목 부근에서 압박을 받아 발생하는 질환인데 이것도 역시 손목만 치료 하기 보단 손목 팔꿈치 목 어깨까지 교정을 해줘야지 효율적인 치료가 된다. 추나로 목 어깨 팔꿈치 정중신경의 눌리는 것을 감소시키는 교정을 하면 손목 주변만 치료하는 것보다 치료 속도가 상당히 빨라지니 보통은 추나와 함께 침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손목통증이 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과사용으로 손목에 계속 무리가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용할 때는 보호대를 끼고 쉴 때는 손목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2023-12-06

포항은 사라지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최근 외신은 대한민국이 인구격감으로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하였다. 합계출산율이 1 아래로 떨어진 나라가 세계적으로 드문 가운데, 우리나라는 놀랍게도 0.78을 기록하였다. 이는 한 세대 30년이 지나면 인구가 오늘의 39퍼센트 정도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숫자다. 5천만 대한민국이 2063년 경이면 2천만이 되고 2093년에는 1천만도 안 되는 작은 나라가 된다. 인구가 국력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이웃 일본이 합계출산율 1.3 이상을 버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인구정책에 있어 우리가 큰 문제에 봉착했음에 틀림이 없다. 포항은 어떤가. 작년 통계는 합계출산율 0.88이다. 국가평균보다는 낫지만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포항인구는 30년 안에 22만, 60년이면 10만 아래로 쪼그라든다.100년쯤 지나면 포항은 지도 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살리고 포항을 살릴 수 있을까. 인구동향에 지혜를 모아 대처해야 한다.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논설은 대한민국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까닭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극심한 교육경쟁 문화가 젊은 부모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에 더한 극심한 불안을 안겨주는 문제가 우선 크다. 그리고 문화적 보수성향과 문화경제적 현대화 사이에서 생기는 사회적 갈등의 문제가 극심하다. 교육경쟁은 심각하다. 인구의 감소로 대학정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데도 대학입시를 정점에 둔 교육정책의 결과로 수험생과 부모들에 대한 압박은 오히려 늘어난다. 자녀양육과 교육을 편안하게 대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낼 정책적 배려가 시급하다.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우리의 가부장적 문화기반이 현대적 가족질서로 나아가는 길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문화적 갈등을 빚고 있다는 지적도 따끔하다. 남성위주였던 노동시장의 질서는 양성이 모두 참여하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는데 가족관계와 자녀양육 등의 역할과 의무는 아직도 전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모두 맡아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에서 탈피하려는 게 당연하다 싶다. 새 생명이 가정에 찾아오는 기쁨을 함께 누리고 다음세대의 성장을 즐겁게 도우며 미래를 가꾸어가는 보람을 만끽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고려가 있어야 한다. 가부장적 태도가 엿보이는 ‘여성중심’의 생각을 벗어나 ‘양성이 함께 참여하고 더불어 누리는’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정으로 이끌어야 한다.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룬 결과 오늘의 인구수준을 유지하려면 합계출산율은 2.0이 되어야 한다.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을 남기는 일. 선진국들의 추세는 1.50 정도로 보인다. 합계출산율 0.78은 낮아도 너무 낮은 수준이다.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순전한 기쁨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가정의 행복이 나라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국가정책의 입안과정에서 인구문제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특단의 조치들이 따라야 한다.아이를 더 낳고싶은 터전을 만들어 미래의 대한민국을 앞당겨야 한다. 아기 울음소리로 가득한 포항을 만들어야 한다.

2023-12-06

친구 이름 지어주기 전통

홍석봉 대구지사장 여유당은 다산의 당호(堂號)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 말로,‘신중하기(與)는 겨울에 내를 건너는 듯하고, 삼가기(猶)는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는 뜻이다. 운치가 넘친다. 정약용은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사암(俟菴) 등 많은 호를 가졌다. 김정희는 추사, 완당 등 호가 200개나 됐다.본명을 피하고 호를 쓰는 관습은 중국 당나라 때 생겼고 조선시대 때 성행했다. 선조들은 전 생애에 걸쳐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본명 외에 ‘아명(兒名)’이 있었고, 혼례 전 성인식 때는‘자(字)’를 받았다. 성인이 된 뒤에는 일상에서 ‘호(號)’를 썼다.남자 아이들은 ‘아명’이라고 해 어릴 때 쓰던 이름이 따로 있었다. 관례를 치르기 전에는 아명으로 부르다가 관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자’를 이름 대신 썼다. 나이 든 후에는 ‘자’ 대신 ‘호’를 쓴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 이름 대신 편하게 쓸 수 있는 ‘호’를 사용했다. 호는 자신이 직접 짓기도 했고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지어주기도 했다.상주향교가 최근 수호지례(授號之禮)를 개최, 관심을 끌었다. 수호지례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대신 벗 간에 쉽게 부르는 다른 이름을 지어주는 의식이다. 그동안 잊혔던 호를 지어주는 전통을 되살린 것이다. 호는 자아의 표상이요, 새로운 인격의 탄생으로 평생을 거울삼아야 한다고 여겼다.닉네임의 시대다. SNS 상 동호인 모임 등에는 닉네임으로 소통한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을 감추려는 목적에서다. 반면 호는 자신을 드러낸다. 호는 그 사람의 성격이나 취미, 인생관 등을 바탕으로 짓는다. 호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06

대구마라톤, 대구를 세계에 알릴 명품대회로

대구시는 내년 4월 7일 개최될 대구국제마라톤대회가 세계육상연맹(WA)으로부터 국제 공인코스로 인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로써 내년 대구국제마라톤대회의 기록은 세계 기록으로 공식 인정된다.대구시는 지난 4월 대구국제마라톤대회를 2011년 선정된 ‘국제육상도시 대구’의 위상에 맞게 세계 최고 수준의 대회로 육성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내년 대회 우승상금을 올해보다 4배가 많은 16만달러로 책정했다. 세계적 권위의 보스턴대회 우승상금(15만달러)보다 더 많다. 1위에서 10위까지 주는 총상금도 보스턴(72만4천달러)보다 많은 86만달러로 책정했다.그동안 대구 도심을 세 바퀴 도는 루프코스에서 내년 대회는 대구스타디움을 출발해 대구 전역을 한 바퀴 도는 순환코스로 바꿨다.국제마라톤대회는 유럽 등 세계 각 도시들이 마스터즈 건각들이 몰려드는 대회로 육성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하루 반나절밖에 안되는 짧은 행사지만 해외의 많은 관광객을 불러올 수 있는 최고의 도시마케팅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또 중계방송을 통해 도시의 구석구석이 소개돼 관광 효과도 적지 않다.뉴욕마라톤은 매년 4억달러 이상의 경제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대구마라톤은 상금과 참가 규모면에서 세계적이다. 세계적 유명 선수만 잘 유치한다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국제대회로 승격될 수 있다.세계육상연맹 관계자가 “내년 선보일 코스가 대구 명소를 잘 볼 수 있는 구간으로 구성돼 도시브랜드를 국내외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대구시는 계획대로 세계적 명품대회로 커갈 수 있게 만반의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대구의 품격을 높이는 동시에 대구대회를 세계적 마라톤대회 반열에 올려 놓겠다”고 했다.도시의 품격은 경제와 문화, 예술, 스포츠 등 각분야에서 제몫을 다할 때 높아질 수 있다. 대구 국제마라톤을 계기로 대구의 국제화뿐 아니라 도시브랜드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호기로 삼아야 한다. 대회를 준비하는 행사 관계자의 분발이 필요하다.

2023-12-06

‘배터리 산업’의 최전방으로 부상하는 포항

전기차 폐배터리를 재활용하기 위한 제조시설·기업·연구기관이 들어설 ‘전기차 배터리 자원순환 클러스터’가 포항시 블루밸리국가산업단지에 2025년까지 조성된다. 지난 5일 환경부 주관으로 착공식을 가진 클러스터는 1만7천㎡규모이며, 폐배터리를 분쇄해 만드는 블랙파우더(리튬과 니켈 등이 포함된 검은 분말) 제조시설, 연구지원단지, 배터리 재활용 기업이 입주할 기업집적단지로 구성된다. 클러스터는 국가 차원의 기술개발 지원, 배터리 성능 및 안전성 평가, 자원순환 체계 관리 등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현재 전기차 폐배터리는 폐차 업체를 통해 전국 4개 권역의 수거센터로 들어온다. 지난 2021년부터 대기환경보전법 개정으로 전기차 폐배터리를 지방자치단체에 반납할 의무가 없어지면서 민간 기업에서 폐배터리 재활용 처리를 하고 있다. 이와관련, 환경부는 최근 “폐배터리 재활용은 운반·재활용(분쇄)과정에서 유해화학물질이 누출될 수 있어 안전 및 환경보호 측면에서 폐기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재 연간 배출되는 폐배터리 수는 약 1천개 정도로 그 수가 많지는 않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가 50만 대를 돌파했고, 2030년에는 전기차 폐차로 나오는 배터리만 전국적으로 10만개를 훨씬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폐배터리 재활용산업은 대표적인 친환경 경제모델이지만, 리튬·니켈·코발트·망간 등을 추출할 수 있어 경제성이 아주 높다. 특히 최근처럼 국제 희귀자원 가격이 급등할 시기에는 그 가치가 더 높아진다. 경북도와 포항시는 지난 2019년 배터리 리사이클링 규제자유특구를 통해 전국 자치단체 최초로 사용후 배터리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2021년에는 순수 지방비로만 ‘이차전지 종합관리센터’를 준공해 배터리 재사용·재활용 산업을 선도해 왔다. 정부가 이번에 전기차 폐배터리 클러스터를 블루밸리국가산단에 조성하는 이유도 포항이 가진 튼튼한 배터리산업 인프라와의 시너지효과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23-12-06

김장김치

윤명희 수필가 달력만 쳐다보고 있다. 배추농사만 짓지 않았다면, 올해는 남이 해 놓은 것을 사서 먹고 싶다. 절임배추를 사서 한다면 밤에라도 어찌 해 보겠는데, 절이는 일까지 하자니 마음이 부대낀다. 아파트에서 절이는 일도 쉽지 않지만, 내겐 시간이 없다.남편이 텃밭에 배추를 100포기나 심었다. 한 포기가 얼마나 큰지 아름이다. 그 배추를 친구가 50포기나 사갔다. ‘김장을 50포기씩이나 한다고? 두 식구에? 아들, 딸도 안 가져간다며?’ 나는 친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친구는 친정엄마의 숙제를 한다고 했다. ‘돌아가신 엄마 숙제? 그걸 왜?’ 되묻는 내게 그녀는 처음엔 하지 않으려고 해봤다고 한다. 숙제란 것이 하지 않으면 마음에 항상 불편함이 따라다닌다.솜씨 좋은 그녀의 엄마는 해마다 김장을 해서 자식들에게 보냈다. 받아먹은 입들이 엄마김치가 최고라고 하는 말에 행복해 했다. 엄마의 행복이 친구에게는 숙제였다. 엄마와 가까이 사는 그녀는 김장철이 돌아오면 다른 일정을 잡을 수 없었다. 날씨가 따뜻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추워도 안 된다. 김장하기 적당한 엄마만의 날씨에 따라 진행되기에 혹여 약속이 겹칠까 해마다 김장철만 되면 불안했다.연로해진 엄마는 큰 집이 불편해서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좁은 공간에서 김장하기가 힘이 들어 맏딸인 친구 집에서 김장을 해야 했다. 친구는 자기 김장 하는 김에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매번 동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났다. ‘난 이제 맏딸 그만 하고 싶어.’라고 한 번도 말로 내 뱉지 못하고 표정으로만 보인 날이 몇 번인가 있었다.엄마가 아팠다. 아파도 김장철은 어김없이 왔다. 항암치료를 하고, 방에 누워만 있던 엄마가 김장을 하겠다고 일어났다. ‘당신 몸도 못 추스르면서 뭘 하겠다고?’ 친구는 말문이 막혔다. 친구가 승강기가 없는 4층으로 이사를 했기에 많은 양의 김장은 엄두를 낼 수 없었다.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엄마를 거역할 수 없었다. 배추장수 아저씨는 1층 입구에 한 무더기 내려놓고 가버렸다. 4층을 오르내리며 날라야 하는 것은 친구의 몫이었다. 김장을 하기도 전에 이미 파김치가 되었다. 배추를 절여놓고, 시장에 갔다. 양념 재료들을 양 손에 들고, 계단에서 몇 번을 쉬어가며 집에 올라갔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 벙거지 모자를 쓴 엄마를 보는 순간,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엄마가 못 하면 그만이지, 왜 나한테 하라고 그래! 내가 맏이로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왜 매번 양보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줘야 하느냐고!”말문이 열린 그녀는 엄마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맏이의 서러움을 토해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던 엄마는 당신이 자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김장김치뿐이라 했다. 한바탕의 눈물바람 뒤에 김장이 마무리되고, 동생들에게 택배 부치는 것까지 끝이 났다. 엄마는 남은 양념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었다.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도 전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한동안 친구는 김장을 하지 않았다. 해방된 느낌이었다.여동생과 통화할 때였다. 동생은 엄마의 김치 이야기를 했다. 삐뚤빼뚤하게 쓴 엄마의 글씨가 택배박스에 붙어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의아했다. 엄마의 글씨? 택배는 김장을 다 해 놓으면 남편이 보냈는데 엄마의 글씨라고? 동생은 그 김치가 마지막이었다고 했다.남은 양념을 가져가도 되겠냐고 했던 그날, 둘째 딸에게 조금 덜 넣은 것 같았나보다. 아픈 몸으로 배추를 사서 절여 버물려 박스를 만들고 택배를 부치고. 엄마는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자매는 전화기를 붙들고 눈물을 훔쳤다.이제 친구는 김장할 때마다 돌아가신 엄마와 함께 한다. 겨우내 나눠먹으며 추억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엄마와 김장을 했던 기억이 아스라해 마음이 저리다. 10포기만 할까 했던 마음에 몇 포기 더 얹어본다.

2023-12-06

소한(小寒)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23번째가 소한(小寒)이다. 태양 황경이 285도에 위치하며, 2024년 1월 6일(음력 11월 25일)이 소한이다.소한은 양력으로 1월 6일부터 19일까지다. 이때 우리나라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기간이다. 한겨울의 극심한 추위가 지속되며, 한랭한 기운으로 인해 날씨는 맑으나 기온이 가장 낮다. 음력으로는 12월에 접어들지만, 음력 11월부터 축적된 음기운이 가장 왕성한 때다. 정초한파(正初寒波)는 이 무렵의 추위를 묘사한다.소한의 한자 뜻을 보면 ‘작은 추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소한이 대한보다 더 추운 경향이 있다. 속담으로 ‘소한이 대한 집에 몸 녹이러 간다’ 또는 ‘소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있어도 대한에 얼어 죽은 사람은 없다’ 등이 있다. 그만큼 대한보다 더 매서운 추위라고 말한다.양력으로 보면 소한은 새로운 해가 시작되며, 가장 먼저 오는 절기다. 추위가 절정인 관계로 감기와 몸살에 주의해야 한다. 이 시기에는 따뜻한 기운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먹거리가 건강에 좋다. 따뜻한 생강차나 단호박 같은 음식도 괜찮다. 옛날에는 도미를 먹었지만, 지금은 추운 겨울철에 제 맛인 과메기를 많이 찾는다. 제주도 귤도 제철 과일로 각광을 받는다. 비타민C가 풍부하여 감기 예방과 기침에도 효능이 있기 때문이다.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안영(?~BC 500)은 5척도 안된 키에 응구첩대(應口輒對)와 외교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안영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다. 접견 의식이 끝나자, 초영왕이 귀한 합환귤(合歡橘)을 안영에게 내놓았다. 안영이 껍질째 귤을 먹었다. 초영왕은 제나라 사람들은 귤을 먹어보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껍질도 벗기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영은 왕께서 벗겨 먹으라는 분부가 없는데 어찌 맘대로 껍질을 벗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외교에서는 단순히 높은 지식뿐 아니라, 뛰어난 임기응변과 순발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일화다.또한 남귤북지(南橘北枳)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귤은 회수 이남에는 귤이지만, 회수 이북에서는 탱자(枳)가 된다. 그것은 토질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란 환경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중국 명대 말기 풍몽룡(1574∼1646)이 지은 연의소설 ‘동주열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에 보면 계동(季冬), 즉 12월이 되면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축(丑)의 방향(동북쪽)을 가리킨다. 축(丑)은 한자로 풀이하면 ‘묶여 있다(끈 뉴紐)’는 뜻도 있다. 양기가 위에 머무르면서 아직 내려오지 않고, 만물은 묶여 아직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이달의 수는 6이고, 맛은 짠맛이며, 냄새는 썩은 내다. 우물에 제사를 지내고, 제물로는 신장(腎臟)을 먼저 올린다. 이달에는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까치가 집을 지으며, 장끼가 까투리를 찾아 울어 재끼고, 닭이 꼬꼬댁거리며 알을 낳는다. 색은 검은색이다. 천자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말을 탄다. 계절에 합당한 행위가 자연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또는 동기상응설(同氣相應說)이 그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었다.명리에서는 축토(丑土)는 ‘서리가 내린 땅’이며, 물상으로는 ‘묵묵히 전진하는 소’의 형상이다. 소한은 겨울 중 가장 추울 때다. 겨울에 출생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강한 물 수(水)의 음기운을 타고났기에 대체로 거두고 수렴하는 기운이 강한 편이다. 물의 속성처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를 한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축(丑)은 동물로는 누런 소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의 땅이므로 소가 휴식하는 기간이다. 동토지만 생명의 씨앗을 품고 길러내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기다림에 탁월한 특성을 갖추고 있기에 대기만성형이다. 그 힘을 발산할 때는 혁명적인 저력이 있어 개혁가의 기질도 있다. 그렇지만 부지런하고 여유 있는 동물이기에 묵묵히 노력하는 끈기가 있는 것이 장점이다.이달은 축월(丑月)에 접어드는 시기다. 과거에는 ‘썩은 달’이라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달이기 때문이다. 축월에는 정리해야 하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기이기에 마무리해야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축월이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마디에 위치하기 때문이다.소한은 축월(丑月)의 시작이며, 겨울 터널의 끝을 향한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이 있고, 추위가 극에 달하면 따뜻함이 멀지 않는 것이다. 명리학에서 역(易)의 의미는 극(極)에 이르면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곤란을 당하여도 절처봉생(絶處逢生)하는 마음으로 긍정과 희망을 가져본다.

2023-12-06

기다림의 시간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암기’가 아니라 ‘사고(Thinking)’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편이기에,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생각을 알고 싶은 까닭이다. 2010년대 초반 초보 강사 시절에는 엉뚱한 답이라도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는 학생이 많았고, 얼마쯤 시간이 지나서는 모르겠다거나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이후에는 질문을 하면 시선을 피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학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나와 눈이 마주치면 혹시라도 질문을 받을까 두려워 고개를 숙이거나, 질문을 받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학생들을 혼내기도 달래기도 했지만,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더 이상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번 학기가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않기로 한 첫 학기였다. 처음에는 괜한 신경전을 벌이지 않고 정해진 시간만큼 강의만 하고 나오니 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불편했다. 선생으로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깊어진 까닭이다.지난주 수업 시간에 소설 분석이란 줄거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어로 서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란 설명을 했다. 지난주 소설의 서사를 잘 보여주는 ‘침묵의 카르텔’을 소개하다가, 문득 강의실 상황이 적절한 예시인 것을 알았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으면서 누군가의 말하기를 막고 있는 상황을 ‘침묵의 카르텔’로 설명하자, 순간 학생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사실 나는 아직도 학생들이 왜 웃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모두가 알면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선생이 말했기 때문에 터진 웃음이라고 짐작할 뿐이다.흥미롭게도 그 잠깐의 웃음 이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많은 학생이 입을 열지 않았지만, 평상시 주위의 눈치를 보던 몇 명의 학생이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발언하는 학생이 하나, 둘 더 늘었다. 그들은 다소 서툴렀지만, 천천히 자기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이후 소극적인 학생이 늘고 학생들의 학력 저하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고등학교 시절 좋지 못한 성적은 자신감 부족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코로나 사태가 만든 단절은 타인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어느 학생의 말처럼, 이제 대학에서 타인과 소통하고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지도 모른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르치는 일은 이전부터 대학 교육의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좀 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라는 점에서 다르다.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이전에 억눌려 있는 학생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들도 자기의 의견을 당당히 말하고 싶다. 다만 어떤 상황들이 켜켜이 쌓여서 말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작은 웃음이 반복되고, 조급하지 않게 학생들의 말을 기다려 줄 때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2023-12-05

매듭달의 길목에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벌써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매듭달이다.앞만 보고 달려온 듯한 올해도 이제 마지막 달력 한 장만 남긴 채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숱한 사연과 애환의 편린이 아스라히 부침하며 또 한 세월의 매듭을 짓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연초에 계획하고 목표로 했던 일들의 성취 여부와 공과를 가늠하며 안도하거나 착잡함에 젖어 들게 된다. 또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을 준비와 새로운 희망, 기대 따위로 다소 설레여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연말은 이래저래 분주하면서도 차분한 나날들이다.한 해를 짐짓 돌아보면, 쇠털같이 많은 나날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숱한 일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밀물처럼 다가왔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면서 일상이 굴러온 것 같다. 그러면서 잊힐 것은 잊히고 거를 것은 거르며 밀어낼 것은 밀어내 겹겹이 매듭을 지으면서 저마다의 삶의 내면을 채워왔을 것이다.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物有本末), 일에는 처음과 끝맺음이 있듯이(事有終始) 무엇이든지 시작과 마무리가 있어야 하나의 매듭이 지어지게 된다. 즉, 작게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잘록하거나 도드라진 형상으로 매듭이 생기기도 하고, 하루나 한 달, 일년처럼 시간의 흐름을 마디처럼 구분해 매듭짓기도 한다. 그렇기에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을 매듭달이라고도 한다.매듭은 어쩌면 처음 시작이나 첫 만남보다도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시도하고 벌여 놓고는 마무리를 못한다거나 흐지부지 유야무야 돼버리고 만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또한 인연에서 비롯되는 만남의 매듭을 소홀히 하거나 건성으로 대하게 된다면 관계의 지속이나 친분의 유지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일에 대한 결말과 만남의 끝매듭이 중요함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하여 끝맺음이 좋아진다는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강조하고 되새기는 것 아닐까.한 해의 좋은 매듭을 맺기 위해서는 초지일관의 마음으로 꾸준히 실천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사람들을 두루 만나 교류하며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다독이고 존중하여 원만한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격의없이 우호적인 사이로 지내다가도 사소한 의견대립이나 다툼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며 평생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돌아서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이란 예측 불가능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따스함을 찾게 되는 계절, 일에 대한 적절한 매듭과 만남의 끝맺음에 대한 적실성으로 믿음과 반가움의 온기를 나누는 연말이었으면 한다. 주변을 살피고 챙기며 상처 받고 소외되는 사람 사이의 섬을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3-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