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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명품백 수수 논란’ 덮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정면충돌이 일단 봉합수순에 들어갔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자중지란이 몰고 올 후폭풍을 두 사람 모두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근본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불씨는 살아있다. 근본문제는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논란과 김경율 비대위원에 대한 후속조치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지난 23일 충남 서천 화재 현장을 둘러보고 상경하는 기차에서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지만, 김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이나 김경율 비대위원 거취 문제 등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못했다. 기차에 두 사람 외에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실 참모 여러 명이 있었기 때문에 민감한 정치 얘기가 오갈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김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해서는 윤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해법을 내놓는 것이 맞다. 영부인 문제가 총선쟁점으로 굳어진 상황에서 대통령실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후폭풍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야권과 진보진영 언론들은 더 집요하게 이 쟁점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김건희 여사가 명품백 수수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이 넘어갈 경우 문제의 동영상을 본 유권자들이 총선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물론 ‘몰카 손목시계’를 차고 스파이 같은 행위를 한 재미목사에게 당하긴 했지만, 김 여사가 미끼인 가방을 즉시 돌려주지 않고 받는 동영상 모습은 지울 수 없는 팩트다.한 위원장으로서도 김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해 마냥 침묵을 지킬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예민한 총선변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4·10총선의 사령탑인 한 위원장을 지원하고 자율성을 존중해줘야 한다. 만약 국민의힘이 이번 총선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면, 명품백 논란은 선거 이후에도 내내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에 족쇄가 될 것이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머리를 맞대고 하루라도 빨리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2024-01-24

교육발전특구 지정에 역량 집중해야

오는 3월 교육발전특구 시범지역 지정을 앞두고 전국의 각 지자체마다 지구 선정을 받기 위한 준비 작업에 한창이다. 지역의 교육혁신을 통해 지방소멸을 막겠다는 취지의 교육발전특구 시범사업에는 경북에서는 포항시와 안동시 등 9개 시군이 특구 지정 신청에 나서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경북도와 도교육청, 9개 시군 등이 모여 교육발전특구 시범사업 선정을 위한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정부의 교육발전특구는 지자체와 교육청, 대학, 지역기업, 지역공공기관 등이 협력해 지역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지역의 교육을 혁신해 지역의 성장과 인구소멸의 문제에 대응하자는 취지로 만든 정책이다. 지방에서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유아부터 대학까지 연계해 사교육 없이 공교육만으로 지역주민들이 원하는 다양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역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이 지역에 정주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해마다 수도권으로 많은 젊은이가 빠져나가면서 소멸위기에 처한 지방도시의 문제를 교육의 힘으로 극복하자는 것인데, 전국 지자체가 어떤 아이디어로 대응할지 궁금하다.포항의 경우 시와 교육청, 포스코교육재단, 포스텍, 한동대, 포항대, 선린대, 포스코퓨처엠, 에코프로 등 13개 기관이 참여해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있다. 기관 간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포항만의 특색있는 교육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다.정부의 교육특구 정책의 큰 흐름은 교육시스템 전반에 걸쳐 지역에 자율권을 부여하는 데 있다. 지역에서 특색있는 교육시스템과 학교를 자율적으로 만들어 지역에서 성장한 인재가 수도권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교육개혁과 인재양성, 정주여건 개선 등을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지역단위의 집합적 교육모델 개발이 필요하다. 각계의 의견을 잘 모아 경북에서 많은 지자체가 교육발전특구에 지정되었으면 한다. 지정지역에 최대 100억원의 특별교부금이 지원되는 것과는 별개로 지역의 교육수준이 한단계 높아지는 부차적 효과도 크다. 각 지역마다 역량을 총집결해주길 바란다.

2024-01-24

보물찾기

피귀자 수필가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예외의 것들이 필요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점들이 구석구석 많이 박혀 있어야 이야기가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지듯 시장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의 손맛과 할머니의 푸근함과 아버지의 비틀걸음도 들어있다.그 중에서도 떠나고 없는 어른들과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울 때 푸근한 정을 느끼고 싶을 때, 만남이 그리울 때 시장엘 간다. 만남은 함께 자라며 흐르는 강물 같기에.목요장은 도심 속 시장이다. 상주하는 많은 가게가 있는 큰 시장으로 장날이 되면 주변의 골짜기에서 가꾼 많지 않은 푸성귀와 과일과 곡식들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 골목도 여러 군데 있다. 그곳은 어릴 적 시장의 모습 같아서 꼭 들르는 곳이다.가을이 무르익자 울긋불긋 더 풍성하고 활기가 넘치는 골목에 어떤 할머니가 대추를 사라고 손짓을 했다. 큰 상자에 담긴 굵고 실한 것을 점찍어 둔 것이 있었음에도 주름진 손과 간절한 눈빛에 이끌려 담아오게 되었다. 아뿔사! 집에 와서 검은 봉지를 열었더니 덜 영글고 벌레 먹어 떨어진 작고 꼭지 없는 대추의 모습에 놀라고 말았다. 한 알 한 알 주워 말렸는지 연하고 진하게 색깔도 다양하고 너무나 쪼글쪼글 상처투성이인 대추는 아무리 후하게 골라 봐도 먹을 것이 반도 되지 않았다.처음부터 탐탁지 않았지만 위쪽에 그나마 꼭지 달린 몇 알을 얹어 놓아 검은 봉지 속사정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당장 물리러 가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엎드려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과 그릇을 앞에 놓고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며 오죽하면 그렇게 팔겠느냐고. 화살의 방향을 1도만 바꿔도 목적지가 완전히 달라지듯 생각의 각도를 1도만 바꾸면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도 달라질 수 있다고 달래며.신뢰를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누가 정직한지 진실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잘 드러난다. 쭉정이와 알곡을 갈라놓는다. 무엇이 거품이고 무엇이 실체인지도 가려주고, 희미했던 진실과 거짓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할머니라는 단어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편안하고 따뜻한 손, 푸근한 어루만짐, 무조건적인 사랑 등 누구에게나 아련한 기억이 깃들어 있는 그런 할머니를 그렸는데 대추 할머니 때문에 다른 사람도 경계하게 될까 겁나지만 때로는 가만히 있어도 덤을 얹어주는 아저씨와 두 소쿠리 사면 군말 없이 깎아주는 아지매도 있기에 상쇄되고도 남지 않는가. 거의 모든 사과가 퍼석해질 시기에 아삭아삭 새콤달콤한 사과를 사서 기분 좋은 날이 있다. 싱싱한 도라지와 연근과 파르스름한 현미 햅찹쌀에 도톰한 다시마, 새파란 멸치 등 찾는 것이 펼쳐져 있을 때의 기쁨은 또 어떤가.생각지도 않았던 귀한 산나물이나 말랑한 찰옥수수, 갓 따온 첫 홍시를 사는 기쁨을 얻는 곳도 시장이다. 포근한 이불을 파는 아저씨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말과 온몸에서 발산하는 기쁨의 에너지가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니 발길이 향하게 된다. 어려운 일도 의외로 쉽게 풀어가는 창의적인 인물들은 자신의 일을 얼마나 놀이처럼 즐기고 있는지를 누누이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은 그 일이 주는 즐거움이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보상인 것이다.외딴섬이라고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다 속의 한 공간이고, 또 다른 외딴섬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과 자연과 우주도 서로 얽히지 않은 것은 없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서로 서로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면서 성장하고 소멸한다.물건을 받기 전 미리 돈을 지불했는데 안 받았다고 우기던 아주머니,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도 사과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쁜 일보다는 즐거운 일이 더 많고 볼거리와 흥겨움이, 활기가 넘치는 시장이 거기 있어 오늘도 간다. 많이 파시라는 사랑의 말을 얹어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그 곳, 어린 시절 숨겨둔 보물찾기하듯 싱싱하고 귀한 보물을 찾으러. 어느 새 발걸음이 빨라진다.

2024-01-24

소행성 L2001의 사멸 <상>

프랑스의 철학자 뤼시앙 골드만이 “소설은 타락한 세상에서 진실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말한 게 벌써 100여 년 전이다. 하지만, 이 은유적 어법에 담긴 내밀한 뜻은 아직 온전해 해석되지 못했다. 포항에서 내과 의사로 일하는 김강(52)은 7년 전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쉽지 않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며 성실함을 보여준 그가 올해 본지에 짤막하지만 완결성을 지닌 엽편 소설을 연재하게 된다. ‘소소한설(小笑寒說)’이란 타이틀처럼 때로는 따뜻한 웃음, 때론 냉철한 비판의식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설 속에 담긴 진실의 의미’를 선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 주소행성 L2001이 사멸했다. ‘장렬히’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사멸의 순간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멸 직후의 순간을 목격한 이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그것의 사멸은 ‘장렬’하지 못했다 여길 수 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소행성 L2001은 잠시 꿈틀거리다, 꽈배기처럼 휜 경로를 보이다 스윽 하고 으스러졌다고 한다.‘생일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난 후 불붙은 성냥을 어떻게 해? 후~ 불거나 흔들어서 불을 끄잖아. 그리고는 개수대의 수전 아래 흐르는 물에 갔다 대지. 그러면 피식 하고 짧은 소리가 나고. 그렇게 식어버리고 결국 으스러지고 마는 성냥, 성냥 머리 같았어.’누군가 이렇게 댓글을 달았는데 비교적 잘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케이크가 놓인 테이블에서 수전까지 옮겨가는 동안 성냥에서 피어올랐을 연기 같은 것을 소행성 L2001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 연기 덕분에 소행성 L2001이 소행성이 아니라 혜성으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또 그렇게 되어가던 중이었다.연기가 아니었다면 소행성 L2001은 아텐 소행성군을 이루는 지름 150km 정도의 중간크기를 가진 중형의 소행성에 불과했을 것이다. 소행성 L2001은 특이한 점이 없는 다른 소행성처럼 천체물리학자나 동호인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통은 과학자의 이름을 붙이는데 그저 알파벳 L을 붙이고 싶다는 최초 발견자의 의견을 소천체명명위원회가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만이 소행성 L2001이 가진 유일한 개성이었고, 실제 소행성들을 설명하는 책자나 안내서에도 소행성 L2001이라는 이름 뒤 다음의 한 문장만이 인쇄되어 있을 뿐이었다.‘최초 발견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명한 몇 안 되는 천체’.소행성 L2001이 천체물리학자 뿐만 아니라 동호인, 일반인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연기 때문이었다. 3개월 전 아텐 소행성계를 살피던 동호인 한 명이 연기를 내고 있는 소행성을 관측했다. 소행성이 연기를 만들고 연기가 다시 꼬리가 되는 것은 곧 소행성이 아니라 혜성으로 성격과 분류, 명칭이 바뀌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동호인에게는 나름 의미가 큰 관측이었다. 동호인은 곧 학계에 사실 확인을 문의했고 소행성 L2001은 곧 천체물리학계에서 주목하는 천체가 되었다. 하지만 넓은 의미의 천체물리학계-동호인과 학계를 아우른-에 한해서였다. 동호인들에게는 당연히 의미가 있는 발견이며 자랑거리가 되고 학자들에게는 논문은 누가 쓸 것이며 교신저자는 누구로 할 것인지, 발견자를 논문 저자 중 한 명으로 넣어줄 것인지 등등 한바탕 소란 거리가 되겠지만 어린 왕자가 방문했던 소행성, 몇십 년 마다 돌아온다는 혜성 정도 떠올리는 일반인에게 소행성이냐 혜성이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행성 L2001은 일반인에게도 의미를 가진 천체가 되었다. 한 독립 천체연구가가 중앙일간지에 보낸 메일 덕분이었다.‘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지구와 가까이 있는 아텐 소행성계의 소행성이 혜성으로 성격을 바꾼 것은 전례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지 천체물리학적 발견의 문제가 아니며 지구, 지구인의 생존과 관련된 사항일 수 있습니다. 소행성 혹은 혜성 L2001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있을 때 연기의 꼬리는 지구를 향하게 됩니다. 꼬리는 가스와 이온으로 형성되는데 이들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꼬리를 이루는 성분들은 처음에는 소행성을 이루던 물질이었기 때문에 소행성의 질량은 점차 감소하게 될 것이며 기존의 궤도 또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언제 어느 위치에서 태양 혹은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아 어떤 궤도를 만들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종국에는 어딘가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 어딘가가 지구라면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될 것입니다.’(계속)

2024-01-24

‘영부인 명품백논란’이 국가적 의제인가?

심충택 논설위원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주 같은 날 총선 공약으로 ‘저출생 관련 대책’을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정책 대결에 나섰다. 여야의 저출생 공약대결이 서로 ‘받고 더’ 식의 카드게임 양상을 보이긴 하지만, 정쟁이 아닌 정책 대결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지난 주말 “민주당이 지금도 ‘김건희 나빠요’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저는 솔직히 관심도 없다. 제발 사법부에 가져가라. 선명한 정책 경쟁을 하자”며 여야의 공약대결 기류에 합류했다.여야가 4·10 총선을 명실상부한 정책대결의 장으로 만들려면 우선 곪은 정쟁요인부터 터뜨려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그동안 여권이 쉬쉬해오던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을 쟁점화한 것은 긍정적이다. 여당이 먼저 영부인 명품백 의혹을 이슈화함으로써 민주당으로선 김이 빠지게 생겼다. 민주당은 현재 ‘김건희 리스크’를 총선득표에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시점을 계산하며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 대장동 뇌물 의혹 특검법) 재의결에 당력을 쏟고 있다.예민한 이 쟁점을 드리블해야 하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쉽지 않은 숙제가 생겼다. 그는 “김 여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 기획한 함정 몰카”라고 명품백 논란을 일축하면서도, “국민이 걱정할만한 부분이 있다”는 입장을 지난주 밝혔다. 명품백 논란을 털고 가야 한다는 당내 일부 인사들의 주장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대통령실은 한 위원장의 이러한 언행에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한 위원장을 만나 사퇴를 요구하는 위험한 행위도 했다.대통령실과 여권 일각에선 ‘한 위원장이 야당 프레임에 휘말리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고 있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한다. 군중심리는 선동과 공작에 취약하고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김경율 비대위원이 프랑스혁명을 촉발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거론한 것에 대해 대통령실과 친윤 인사들이 펄쩍 뛰고 있는데, 어리석은 행동이다.민주당이 4월10일 총선일에 임박해 쌍특검법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이슈를 들고 나오지 않을 것 같은가.설 민심을 고려해 영부인의 입장 표명은 빠를수록 좋다. 당사자가 정직하게 수수경위를 설명하고, 사과할 부분이 있으면 사과하고, 처분받을 부분이 있으면 처분을 받겠다고 하면 된다.명품백 의혹은 절대 윤석열 대통령의 통치권 문제가 아니다. 이 이슈를 그대로 놔둘 경우, 여권 내부 갈등이 어디까지 갈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명품백 수수 의혹을 사과하는 순간 민주당이 들개처럼 물어뜯을 것’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사과 안하면 들개들이 안 달려들겠는가. 당사자가 먼저 사과를 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하면, 오히려 좌파진영의 정치공작 효과를 줄일 수 있다.이번 총선에서도 나라 전체가 가짜뉴스나 정치공작성 이슈에 함몰돼선 안 된다.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의혹이 과연 국가적 의제인가. 여야가 서로 정책대결에 치중하면서 민생 살리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2024-01-23

사통팔달, 경북의 철도교통 시대

경북도는 도내에서 현재 진행 중인 6개의 각종 철도사업이 올해 중 차질없이 마무리 된다고 밝혔다. 또 여기에 소요될 국비 8천425억원도 확보했다고 했다.올해 개통될 도내 철도는 4개 일반철도와 2개 광역철도다. 4개 일반철도사업으로는 동해중부선(포항∼삼척), 중앙선 복선철도(도담∼영천), 동해선 전철(포항∼동해), 중부내륙선(이천∼문경) 등이고, 지방자치단체 추진의 2개 광역철도 사업으로는 대구권 광역철도(구미∼경산)와 대구도시철도 1호선 하양 연장 사업 등이다. 특히 대구광역권 전철사업은 구미∼대구∼경산 61.9㎞를 잇는 사업으로 개통이 되면 대구와 인근 경북권은 40분대 생활권으로 연결된다. 지역간 연계성이 높아지고 출퇴근 등 교통난 해소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또 대구 도시철도 1호선이 하양으로 연장되면 대구가톨릭대와 대구대, 경일대 등 5만여 학생들의 통학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1호선은 장차 영천까지 연결될 예정으로 있어 대구와 경산, 영천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당연히 기여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또 포항∼삼척을 잇는 동해중부선과 포항과 동해를 잇는 동해선 전철이 개통이 되면 동해안 일대 개발이 상승세를 탈 것으로 전망이 된다. 3시간30분 정도 걸리던 포항에서 삼척까지의 거리가 55분대로 짧아져 관광객 증가와 더불어 동해안의 관광산업이 크게 진작될 가능성도 높다. 철도건설 사업은 막혀 있던 지역간을 연결해 줌으로써 도로건설만큼 사회간접투자로서 가치가 높다.경북도는 도내 전역에서 누구나 쉽게 철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이는데 노력을 더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광역철도를 중심으로 지역경제가 활력을 찾고 지역균형발전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지역이 겪고 있는 지방소멸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는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경북도의 철도사업이 속속 완공되면서 본격화되는 경북의 철도교통시대가 지역발전을 앞당기는 동력이 되길 바란다.

2024-01-23

‘미니초등학교’ 급증, 저출생대책 시간이 없다

저출생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한 학년 10명 이하의 소규모 초등학교가 농어촌, 도시를 가리지 않고 급증하고 있다. 경북도에는 전교생이 60명 안 되는 초등학교가 207개교(전체 473개교)에 이르고, 대구(전체 232개교)에도 서촌초등(31명), 동곡초등(56명), 반송초등(52명) 3개 학교가 ‘미니학교’다. 전국적으로는 비수도권을 중심으로 초등학교 5곳 중 1곳이 전교생이 60명이하, 10곳 중 1곳은 30명 이하다.‘2023 교육통계 연보’에 따르면, 지난해 분교장을 제외한 전국 초등학교 6천175곳 중 23.1%(1천424곳)가 전교생이 60명 이하로 파악됐다.지역별로는 전남이 212개교로 가장 많았고, 경북이 207개교로 뒤를 이었다.문제는 출산율이 가파르게 진행되면서 전국적으로 미니 초등학교 수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점이다.전국의 전교생 60명 이하 초등학교 비율은 2008년 16.5%, 2013년 20.1%로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 23.1%를 기록했다. 소규모 학교는 학년이 다른 학생끼리 모아 수업할 수밖에 없어 교육의 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결국 면 단위 학교소멸의 주요원인이 되고 있다.초등학교 소멸 추세로 보면, ‘한국이 인구소멸 1호 국가가 될 것’이라는 해외 전문가의 경고가 더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2023년 0.72명을 기록했다. 2024년 0.68명, 2025년 0.65명, 2026년 0.59명으로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이런 상황에서 최근 여야가 출산·육아휴직 확대와 배우자 출산휴가 연장, 육아휴직 급여 지원 등 ‘저출생 공약’을 각각 발표한 점은 긍정적이다.인구소멸을 막는 데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시간도 촉박하다.저출생 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부처를 신설하고 육아휴직 등을 눈치 보지 않고 쓸 수 있게 하는 방안 등은 여야가 비슷하다.공약 중에서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면, 여야가 만나서 협상을 통해 즉각 입법화할 필요가 있다.

2024-01-23

교사와 정치인

우정구 논설위원 어느날 수녀와 정치인이 강물에 빠졌다. 119 구조대가 달려와 얼른 정치인부터 구조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한 구경꾼이 물었다. “어째서 정치인부터 먼저 구하게 된거죠?” 119 구조대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도 모르세요. 정치인은 놔두면 강물이 더러워지잖아요”.인터넷 상에 떠도는 정치인 관련 유머의 한 토막이지만 우리나라 정치인의 신뢰는 한마디로 바닥이다. 최근 한국교육연구원이 전국 초중고생 1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각 직업군 중 정치인이 꼴찌를 했다.이 조사에서 정치인을 신뢰한다는 답변은 23.4%에 그쳐 가짜뉴스로 논란을 빚는 유튜브 등 인터넷 매체보다 신뢰가 낮았다.또 우리나라 정치가 국민의견을 반영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긍정적 답변이 겨우 13.5%다. 일반적으로 국민의 정치 신뢰가 낮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학생조차도 신뢰를 않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정치 선진국인 미국도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정치인에 대한 직업 신뢰가 최하위로 나타났다고 하니 정치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민적 신뢰를 얻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 정도쯤 되면 정치인 스스로가 대오각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SNS상에 떠도는 정치인에 대한 각종 풍자물에서 정치인을 존경한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정치인을 부패하거나 무능한 직업군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총선을 앞두고 정치인에 대한 신뢰 조사와 상관없이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사람은 줄을 섰다.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신뢰받는 직업군을 살펴봤더니 교사였다. 정치인과 대조되는 직업군이어서 눈길이 더 갔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1-23

R&D 예산 삭감 유감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2024년도 RD(연구개발) 예산이 전년도 대비 약 16.6%(5조2천억원) 감액된 것에 과학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공계 연구자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삭감된 연구비 때문에 연구과제 수행이 어렵게 되었다거나, 고용 중인 연구원을 해고하게 되었다는 고충 토로와 성토가 이어진다.정부출연연구소들은 예산 부족으로 연구원 채용계획을 줄이거나 없애고, 이는 이공계 석·박사들의 고용 불안을 심화시킨다. 대학에서는 원래도 넉넉하지 않았던 대학원생 인건비를 더욱 줄이는 연구실이 많다. 인건비가 줄어들자 생활비를 벌충하기 위해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연구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질 것은 당연하다.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일 과학기술인 간담회에 참석해 RD 예산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겠다고 밝혔다. 5조가 넘는 예산을 일방적으로 줄여 놓고, 반발에 못 이겨 고작 6천억 원을 증액한 뒤에 나온 말이라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인들을 대하는 현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하며 내놓은 핑계는 이른바 ‘이권 카르텔’의 존재다. 이것이 정권의 기조인 ‘노동조합 때리기’, ‘시민단체 때리기’에서 이어진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문제는 정부가 그 이권 카르텔의 정체를 명확하게 짚어내지도 못하면서, 과학기술인들을 ‘예산을 낭비하고 사적으로 전용하는 부패한 집단’으로 치부해 버렸다는 점이다.어떤 집단이든 규범을 어기고 일탈을 저지르는 사례는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례들이 집단 전체의 도덕적 해이로 발전한 상태인지, 아니면 개별적 처벌로 충분히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판단하는 일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후자의 경우를 전자의 경우로 섣불리 규정해 버리면, 정상적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대다수 구성원들의 모티베이션을 심각하게 저해하게 된다.그렇지 않아도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이 의대로, 또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소명 의식을 갖고 연구자의 길을 선택한 이들을 이렇게 모욕해 놓고 미래 먹거리나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은 에너지와 명령만 주어지면 작동하는 로봇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지만, 예산을 결정하는 높은 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다. 설령 RD 예산을 삭감 이전 수준으로 돌려놓는다 해도, 가장 든든한 ‘파트롱(후원자)’이어야만 하는 국가와 정부에게 배신당한 과학기술인들의 트라우마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인공지능·첨단 바이오·퀀텀(양자) 등 특정 분야를 ‘3대 미래기술’이라 호명하고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계획 또한 우려스럽다. 해당 분야에만 예산과 지원이 몰리고 다른 분야들은 고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한 학술 생태계를 위해서는 학문의 다양성이 필수적이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예산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고 싶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2024-01-23

기업혁신 실패를 넘어 성공하는 길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기업의 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기업경쟁력과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혁신을 도입하고 다양한 활동을 한다. 제조기업의 혁신의 원리는 최소의 원가로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여 고객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최소의 생산원가로 가기 위해서는 생산라인의 생산제 조건을 보고 조건이 안 맞는 모든 문제를 찾아 개선하는 것이다. 혁신성공의 정의는 한 기업에 혁신기법을 도입하여 모방과 창조를 거쳐 자사에 맞게 진화 발전시키고, 일하는 사고와 일하는 방법에 내재화 되어 제품생산방식과 경영전반에 녹아 기업 문화화 된 것을 말한다. 국내 기업의 통계를 보면, 6시그마, TPM, TPS 등 다양한 혁신의 기법을 선택해서 적용하고 있지만 성공한 기업은 한자리 수준이다. 그럼, 혁신이 부분 성공이나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일까.혁신의 기법을 도입할 때는 일의 속성, 설비 특성, 생산 프로세스 특징에 맞는 것을 선택해서 자사에 맞게 진화 발전시켜 최적화해가야 한다. 선진 기업이 도입하여 성공했다고 해서 유행따라 도입하면 실패한다. 그리고 단순히 혁신 기법을 잘 선택했다고 순탄한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문제를 푸는 기법의 적합성과 전 조직이 공감하고 참여하여 개선하는 일하는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기본 조건이다. 기업혁신이 실패하지 않는 조건은 첫째, 조직과 개인의 성장비전 설정이다. 직장생활이 삶의 반을 차지하는 데, 일로서 성장하고 꿈을 이루게 하는 조직이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꿈이 없는 조직은 혁신은 물론 일도 개선도 할 수 없다. 두번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과 목표 설정이다. 경영 목표가 명확하고 전략이 공감된다면 실행력은 커지는 것이다. 셋째, 최고 Top의 스폰서십과 지속적인 지원을 얻는 것이다. 혁신은 철저하게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속성이 있기에 경영자의 관심은 물론 혁신이 경영 속에 녹아 기업 체질화로 가야 한다. 넷째, 생산프로세스 특징과 일의 흐름에 맞게 진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를 푸는 기법은 일의 속성과 생산제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진화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일하는 방법론으로써 현업에서 멀어진다. 다섯째, 운영제도의 시스템화 및 인사와 연계하는 일이다. 즉, 경영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혁신활동의 지속성과 인사와 연계하여 제도화 하고 동기부여를 강화시키는 일이다. 여섯째, 평가와 보상이다. 기업 문화와 세대 특성에 맞는 인증과 포상 등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필자가 P사에서 혁신 일을 20여 년 해오면서 혁신경영의 방법론은 수없이 진화 발전해 왔다. 2005년 6시그마 경영을 도입하고 3년 반 만에 부즈 알렌 해밀턴이란 세계적 전문회사의 진단을 받고 그에 따라 자사에 맞는 TPS를 도입하였고, 필요에 따라 TPM을 추가 도입하여 통합하고 진화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도 현업과 경영층의 깊이 있는 의견을 수렴하여 또 다른 진화된 모습을 준비하고 있다. 스마트 제철소를 향한 필요 요건이 변화되고 있고 이에 맞는 혁신의 기법도 스마트 기술을 적용하는 등 한단계 높은 기법이 필요한 것이다. 혁신성공은 사회적 기술발전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진화 발전하지 않으면 필요 가치 창성에서 멀어져 소멸한다.

2024-01-23

숨탄 것과 동거

눈 내린 아침 너구리의 방문을 받았다. 녀석은 바깥 아궁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비집고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눈 마당을 산책하는 중이었고 녀석은 내 발자국 소리에 부스럭거렸다. 기척을 듣고 다가가니 눈 덮인 뒷산을 내려왔는지 기력은 쇠잔해 보였고 털은 젖어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엉덩이를 돌려 앉는 시늉만 할 뿐 자리를 떠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 짐승의 형편이 오죽할까 싶었다. 급한 대로 아끼는 강아지 사료를 한 그릇 부어 근처에 놓아주고 돌아섰다. 허기가 가시고 나면 목마른 것쯤이야 마당 가득 쌓인 눈을 먹으면 해결될 터였다.처마를 지탱하는 철골 구조물 틈새엔 박새 부부가 산다. 아침이 되어 먼저 일어난 한 녀석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더니 작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눈 덮인 세상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사냥을 나가기에 적당한지 어떤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잠시 박새 부부는 좁은 구조물 틈새를 벗어나 사이좋게 날아올랐다. 아침을 거르는 것보단 눈 속에서라도 먹잇감을 찾기로 한 것 같았다. 지켜보는 내내 기특한 맘이 가시지 않았다.산속, 마당 넓은 집에 살다 보면 온갖 숨탄 것들을 대하게 된다. 대낮 닭장 앞에서 잘 생긴 삵과 마주치기도 하고 뜰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마당을 가로지르는 담비 가족을 보기도 한다. 개울을 벗어나 집안을 기웃거리는 수달을 구슬려 돌려보낸 일도 있다. 평상으로 쓰는 너럭바위 곁에서 햇볕을 즐기는 뱀도 만난다. 꽃나무에 터 잡고 사는 딱새도 있고 수시로 날아와 제 안부를 전하고 가는 직박구리 한 쌍은 오래 보이지 않으면 궁금하다. 툭하면 뒷마당을 순회하는 꿩 무리며 뜀박질하는 고라니, 뒷산 뻐꾸기 울면 희한하게 알아듣고 마당귀에선 뻐꾹채 꽃 핀다. 천지가 잠든 밤이면 여운 가득 끌어안은 부엉이 소리가 먼 마을까지 기별을 보낸다.어떤 뜻밖의 방문객을 맞든 이제 더는 놀라지 않는다. 원래 그들의 영역이었던 곳에 허락도 없이 둥지를 튼 건 나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이방인이다. 나는 이기적인 동물이라 그들이 나를 밀어내더라도 나갈 생각 같은 건 없다. 되도록 주인 티를 내지 않고 그들과 섞여서 살고 싶다. 뒷산 은사시 나무에 몸빛이 노랗고 예쁜 꾀꼬리가 날아와 고운 소리로 불러주는 노래를 오래도록 듣고 싶다. 귀하고 사랑스러운 담비 가족을 내 집 마당에서 더 자주 만나고 싶다. 이런 생각마저 욕심인 걸 알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게 사람 맘이다.눈 내린 이튿날 가장 먼저 바깥 아궁이부터 살펴보았다. 빈 사료 그릇만 남겨두고 손님 너구리는 언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개밥을 먹은 산짐승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다가 금방 안쓰러운 맘이 들었다. 녀석이 앉았던 자리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온기라곤 없었다. 서둘러 떠난 걸 보면 포근한 안식처는 아니었던가 보았다. 녀석이 숨어들었을 뒷산을 올려다보니 날이 푹해서 눈은 이미 다 녹고 없었다. 녀석은 어쩌다 겨울잠 자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홀로 민가에 내려와 떨고 있었을까. 뒷산에 녀석이 먹을 것들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봄이 올 때까지 잘 견뎌 주었으면 했다.아침상에 어머니가 자주 해 주시던 감자탕을 올렸다. 뼈다귀를 들고 정신없이 뜯다가 물휴지에 손이 가려는 걸 겨우 참는다. 얼른 행주에 손을 닦는다. 쓰레기 하나를 줄인 셈이다. 빈 그릇 가득한 뼈다귀를 살짝 헹궈 마당을 지키는 개한테 가져다준다. 음식 쓰레기가 특식으로 변했다. 코를 박고 먹는다. 식탁에서 짓는 죄를 조금 덜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볍다. 밀가루를 풀어 설거지를 한다. 세제로 부신 것보다 더 개운하다. 마트에 근무하는 친구가 봉지가 뜯어져 판매할 수 없는 것을 나눠 준 것이다. 생태에 관심이 많은 그 친구로 인해 우리 집엔 설거지용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는다. 어릴 적에 손님이 오기로 한 날이면 촘촘한 타일 부뚜막을 밀가루 묻힌 행주로 깨끗이 닦아내는 건 늘 내 몫이었다. 세제 대신 밀가루 설거지를 하면서 푸른 지구별을 위한 작은 마음 하나를 보탠다는 생각에 더없이 뿌듯하다.아흔 고개를 넘는 어머니에게 일회용품은 소용에 닿지 않는 물건이었다. 필요한 만큼 그때그때 음식을 만들고 넉넉하다 싶으면 낮은 담장 너머로 이웃과 나누었다. 냉장고란 게 집안에 들어온 후에도 일회용 비닐에 음식을 담거나 하지 않으신다. 전기와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 세탁기 보다 손빨래를 즐기는 어머니는 평생토록 간소한 삶을 이어오셨다. 전기와 물과 기름을 누구보다 아끼고 낭비를 무서워하는 어머니는 아픈 지구별의 이마를 언제나 짚어주고 계셨다. 박월수 수필가 오늘도 산골 마당엔 딱새가 놀고 직박구리가 다녀갔다. 내 눈이 미치지 않는 뒷마당 귀퉁이에 배고픈 산짐승이 내려와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앞 거랑 보 아래선 흰 두루미들이 모임이라도 하는지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새 그득하다.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면 내 욕심을 내려놓고 숨탄 것들을 배려하는 맘이 먼저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정갈하고 간소하게 살아야겠다. 나는 보일러 온도를 낮추고 도톰한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수필가 박월수

2024-01-23

분열과 융합의 사건에 대해서

불을 사용하던 인간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서 불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인간들은 문명의 씨앗과도 같은 불을 빼앗기고서 어둠 속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를 애처롭게 지켜보던 프로메테우스는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준다. 이것을 계기로 프로메테우스는 카프카스의 바위산 정상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게 되고, 제우스에 의해 질병과 재앙의 고통이 인간들에게 내려진다. 인간은 신에게서 불을 얻음과 동시에 그에 따른 재앙과 고통을 받게 된다.영화 ‘오펜하이머’는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한 영화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에서 거대한 화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1945년 7월 16일 앨라모고도의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인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읊조린다.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하고 거대한 전쟁인 세계2차대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개발된 무기는 비록 전쟁의 불을 꺼뜨렸지만 그것이 가져올 파괴력을 인지하게 되면서 커다란 근심을 떠안게 된다. 물과 불, 죽음과 파괴, 전쟁과 평화, 신으로부터 불을 얻은 인간이 직면하게 된 재앙이 충돌한다.불을 처음 발견한 인간에게 있어서 불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후 불을 다루게 된 인간은 빠르게 번식했으며 지구 곳곳으로 영역을 넓혀가게 된다. 이를 이용하여 문명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숱한 멸망과 재앙의 과정을 겪게 된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디뎠던 오펜하이머는 전쟁의 종식과 함께 종식을 막기 위해 헌신한다. 이런 면에서 오펜하이머는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고 그 간극이 극과 극을 달린다.영화 속에서도 오펜하이머가 겪는 여정은 이와 다르지 않다. 양자역학의 성립에 기여했던 닐스 보어는 영화 속에서 케임브리지의 한 강연장에서 “아인슈타인이 열어놓은 문을 통해 우리는 모두가 받아들이기 힘든 에너지와 역설의 세계로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세계의 최전선에서 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이라는 “우주의 본질적인 힘을 이용”해 폭탄을 만든다. 바로 핵폭탄이다.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 참여한 원자폭탄 개발이 진행된다. 1946년까지 극비리에 진행된 계획은 약 13만명의 고용인원과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인 약 20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오펜하이머는 핵분열을 위해 모든 인력과 역량들을 융합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중 한명이 헝가리 태생의 에드워드 텔러였는데, 그는 핵융합의 프로젝트 안에서 끊임없이 핵분열의 수소폭탄 개발을 주장한다.영화는 ‘분열’과 ‘융합’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컬러와 흑백으로 이어지는 화면 전환은 현재진행과 과거로 나뉘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대표적인 영화구조인 레이어가 쌓여간다. 그의 전작인 ‘덩케르크’ ‘인셉션’에서 레이어가 플롯의 깊이와 풍성함에서 사용되었다면, ‘오펜하이머’에서는 플롯의 모순과 역설, 대립과 충돌의 기능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성공적으로 투하된 이후 오펜하이머는 핵통제주의자이자 반(反) 수소폭탄의 아버지가 된다. 모순과 역설, 분열과 융합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존재가 오펜하이머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 핵무기는 7만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도 개발된다. 전쟁의 종식을 위해 인간의 손에 쥐어진 핵폭탄은 인류 전멸이라는 재앙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핵폭탄의 개발은 과학자의 일이었고, 그것의 사용은 정치인의 몫이었다. 전쟁과 평화는 과학과 정치의 역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주)Engine42 대표 김규형

2024-01-23

투자 권하는 사회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나는 주식 투자자다. 시작은 2016년 여름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였다.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무게감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연봉에 주식 공부를 했다. 학업을 이어가는 와중에 틈틈이 공부하며 소소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2020년 코로나19 국면에서 이른바 ‘동학개미운동’이 불었고, 내가 다시 투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생겼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각 국가가 돈 푸는 장면을 목격하며 ‘양적완화’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양적완화란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경기를 살리는 정책을 말한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미국은 제로 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으로 경제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 우리나라도 금리를 낮추고 코로나 지원금을 국민에게 주었다. 실물경기는 죽어가는데 주식시장이 활활 타오르는 현상에 일부는 의구심을 표했지만, 사실 이것은 경제원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자산가치의 상승이란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2022년 통화량의 증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금리는 급등했고 자산가치는 하락했다. 최근 20년 통화량 그래프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금방 알게 되는 진실. 현금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깨닫자, 결국 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지난 1월 17일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거래소를 찾아서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와 거래세 완화 등을 발표했다. 과도한 세금을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만드는 주범으로 지적하고 자본 시장을 통한 국민 자산 형성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공매도 폐지, 대주주 양도세 상향 등 주식 투자자들을 위한다는 정책까지 고려하면, 서민의 자산 형성을 돕겠다는 말에 담긴 진심은 어느 정도 사실일지 모른다. 대통령은 증권시장이 국민과 기업이 상생하는 장이며 금융을 통해 기업과 노동자가 상생할 수 있다는 말도 그럴듯하다.그런데 대통령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날에 한국 시장은 2% 넘게 하락했다. 새해 들어 일본 시장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한국 시장은 급락했다. 대통령의 주가 부양 정책에도 한국 시장이 오히려 역행하는 것은, 뒤집어 말해 대통령이 언급한 정책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무엇이 문제일까?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기획재정부에 있는 경제 전문가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거나 외면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나는 선생으로서 삶에 충실해도 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별 무리가 없다면, 굳이 투자자가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투자를 권하는 대통령의 말을 듣건대 그런 삶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모든 국민을 투자자로 만드는 지금 이 길이, 아니 근본적으로 돈을 풀어서 경제를 살리는 방법이 올바른 것인지 의문이다.

2024-01-22

장미꽃 미라

강길수 수필가 장미꽃이 미라가 되었다. 산채로 얼어 마른 미라다. 지난 십이월 중순까지 스테인리스 울타리를 부여잡고 봄이 시샘이라도 할 만큼 많이 피어있던 장미꽃이다.해(年)가 바뀌는 동안 몇 차례 혹한에 맞섰던 장미 나무는 식솔들이 강제로 얼어 죽임당한 채 몸만 살아남았다. 떠나보내기 아파, 미라가 된 식구들을 부여잡고 된바람에 떨고 섰다. 추위를 버티던 장미꽃 앞 녹지의 쑥들도 시나브로 시퍼렇게 얼굴이 얼더니 미라가 되고 있다. 둘러보면 이뿐만이 아니다. 기후 변화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산채로 얼어 죽는 나뭇잎과 풀들이 많다.식물들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즉각 반응하는 존재다. 지난 12월 장미꽃은 두어 차례 한파가 지나가도 중순까지 꿋꿋이 이겨내 사람을 놀라게 했었다. 연말연시 추위는 심하지 않다고 느꼈었는데, 그 새 얼어버렸다. 첫 추위에 동상(凍傷)이라도 입은 걸까. 식물의 생장이 예전과 다르게 변하는 현상은 지구가 ‘온난화’를 넘어 ‘가열화’ 단계에 있다는 징표란 생각이 가슴을 후벼판다.2015년 12월 12일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된 ‘파리기후변화협약(파리협정)’은 산업화 이전대비 ‘지구 평균 기온 상승 2℃ 이하 유지’를 장기목표로 세웠다. 이를 위해 ‘기온 상승 1.5℃ 이하 제한’도 채택했다. 유로뉴스(Euronews)에 따르면, 2023년 지구 평균 기온은 14.98°C로 2016년보다 0.17°C 높았다. 또, 1991∼2020년 평균보다 0.60°C 높았고, 산업화 이전인 1850-1900년보다 1.48°C 높았다. 이는 파리협정의 제한치 1.5°C를 불과 0.02°C 앞두고 있다.어쩌면 우리 인간들은 ‘불 때는 냄비 안의 개구리’인지도 모른다. 지구온난화를 알면서도 강 건너 불 보듯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니까. 물이 시나브로 더워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냄비 안의 안락에 빠져, 뛰쳐나올 생각을 못 하다가 결국 열에 죽고 마는 개구리의 운명…. 이처럼 인간도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 현상을 외면하다가 어느 한계의 날, 갑자기 파국적 현실을 만날지도 모른다.산채로 얼어 미라가 된 장미꽃은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 사람이 버리는 오염물로 나빠지는 자연환경이 어떤 한계를 넘으면 생명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또, 모든 생명을 부양하는 지구는 환경오염을 더 못 견딜 지경이 되면 자기 리셋을 한다는 사실도 함께 선포하는 것이리라.온 지구촌이 물 한 방울, 휴지 한 장, 전기 한 등, 기름 한 방울 등 일상 모든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자원을 아껴야 한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 요청 사태 다음 해인 1998년에 벌어졌던 ‘아나바다운동’같이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삶을 살아내야만 할 시대다.장미꽃 미라를 조심스레 손으로 만져본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꽃잎이 바삭바삭 부서져 까칠하게 내린다. 이런 마음이 들었다. ‘장미야 미안해! 공동 운명체인 너와 자연을 제대로 모르는 우리 인간들이 참 미련해서…’.

2024-01-22

주말 골목 여행

산책하기 좋은 연남동 골목 풍경. 1월 말. 창문 밖 폭설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쏜살같이 흐르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신년부터 시간에 쫓기며 조급하게 지냈고, 덩달아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외부 자극에 쉽게 흔들리고 말았다. 출근하는 평일엔 무력하게 흔들렸지만 주말이 찾아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바로 조용한 골목 어귀에서 오래된 흔적들을 찾는 일, 마음의 여유를 느끼지 못할 땐 연남동의 골목으로 향한다.연남동은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동네다. 조선 초기의 3대 이궁이었던 연희궁이 있던 지역으로 조선 세종 당시 서쪽 모악에 수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라 한다. 현재 지리적으론 사람이 많이 붐비는 홍익대학교 거리와 가까워 경의선 숲길 쪽은 늘 시끄럽고 혼잡한 편이다.하지만 연남동의 묘미는 경의선 숲길 안쪽으로 들어가 골목 곳곳에 숨은 보물 같은 가게들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지하의 작은 식당들, 간판 없는 카페, 생일 책이 있는 동네서점, 공방, 잡화 상점 등.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그림자 같은 가게들이 골목 곳곳에 숨어 있다.좁은 골목을 누비는 동안엔 마치 모험을 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대로변처럼 한 눈에 보이지 않는데다 그 길을 가봐야만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골목을 쏘다니며 담벼락에 새겨진 낡은 시간의 흔적을 살펴 걷기도 하고, 벽 너머 오랜 시간 살아왔을 사람들이 가꾸는 생활을 조심스레 엿보기도 한다.분명 전에 왔던 곳임에도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커다란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뚜벅뚜벅 걸어 나가다 보면 빠르게 흐르던 시간이 느리게 감기며 마음의 무게가 가벼워진다.골목을 지키는 존재는 조용하고도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다. 불필요하게 과장되어 있다거나 지나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오랜 시간 그 자리 그대로 풍경을 착실히 유지하고 있다.또한 골목은 어딘가 믿음직하다. 비행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눈 감아 주기도 하고, 연인들에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한적한 모퉁이를 내어주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비밀을 감싸 안으며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골목에게선 배울 수 있는 삶의 자세가 많다.학부 시절 사진 관련 교양 강의를 들은 적 있다. 강의에선 골목 사진을 찍을 때, 골목 모퉁이 사진을 찍어야 잘 찍은 사진이라 배웠다. 골목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어야만 사진을 보는 사람이 그곳에 어떤 게 있을지 상상할 수 있어 호기심을 불러온다는 거였다.최근 나의 일상도 그랬던 듯싶다. 쉽게 가늠할 수 있는 넓은 대로변 속에서 목표와 결과만 추구하며 달렸으나 쉽게 무너졌고 길을 잃었다. 하지만 현재 나에게 필요한 건 천천히 골목을 누비며 길을 파악하고 숨은 재미와 의미를 찾는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연남동의 골목은 생각보다 더 좁아서,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경의선 철길에 다다른다. 경의선은 서울역-능곡-일산-문산-장단군-개성시-사리원시-평양-신의주까지 이어지던 철도로, 1905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목적으로 부설되었다고 한다.이후 1950년 남북 분단으로 인해 운행이 종료되었고, 2009년이 되어서야 용산-문산까지 운행을 시작하며 경의중앙선으로 바뀌었다. 경의선이 다니던 철길은 현재 땡땡거리, 책거리, 전망테크, 기찻길 옆 예술마을 등 각각의 테마를 지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길 따라 볼거리가 있어 좋다.철길을 따라 출판사별로 큐레이션한 작은 서점도 방문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이곳도 아기자기한 작은 상점들이 많아 골목길 산책과 더불어 여행을 오는 듯한 경험과 새로운 재미를 준다.연남동 곳곳의 이런 힘과 여유로움이 숨어 있다. 잦은 공사로 땅이 고르지 못하고, 좁고, 고생스럽지만 언제 어느 때나 조용하고 여유로운 마음의 여유를 주는 곳. 동맥처럼 선명히 퍼진 골목길과 그 속에서 언제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존재들 속에서, 이번 주말에도 여행을 즐기려 한다.

2024-01-22

릴케의 전집

가장 좋은 저출산 대책은 사랑을 장려하는 일이 아닐까. /언스플래쉬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김건홍, ‘릴케의 전집’)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는 너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된다”고 말했다. 관계가 자아의 성숙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다. ‘나’라는 인격체는 타자와 교감하고 상응할 때, 타자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성장할 수 있다. 위 시는 사랑의 힘이 한 사람을 살리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가장 좋은 저출산 대책은 사랑을 장려하는 일이 아닐까. 이 시를 읽으면 연애하고 싶어진다. 결혼하고 싶어진다.천장이 낮은 집에 키가 작은 목수가 살고 있다. 키 작은 목수는 자신의 키에 맞춰 협소한 공간에서 살아간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천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천장이 높아봤자 목수는 자기 키만 한 물건밖에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타거나 줄에 매달리는 방식의 작업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목수가 자기한계를 인정하고 운명을 받아들일수록 천장이 낮은 집은 자폐적 고립의 세계로 점차 봉쇄되어 간다.목수에게는 애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한다. ‘죽은 나무’는 목수가 매일 만지는 것이고, 목수의 삶은 죽은 나무에 예속되어 있다. 연인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어주는 것뿐이다.그런데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목수가 필요로 할 망치나 톱 대신 엉뚱하게도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온다. 유용성만을 추구해온 목수의 보수적 세계관을 연인은 책이라는 ‘무용한’ 선물을 통해 새롭게 전환시키려 하는 것이다. ‘죽은 나무’로 상징되는 물질의 세계에 고립되었던 목수는 대뜸 ‘릴케 전집’이라는 정신의 연장을 받아들게 된다.연인이 책을 들고 목수의 집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책장을 만들려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는 목수의 고백이 힌트를 준다. 목수는 책이, 책으로 함의된 정신성의 세계가 낯설고 어색하지만 익숙해지려는 노력을 조금씩 해나가는 중이다. 사랑이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타자의 본질적인 이질성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수는 이제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는 연인을 위해 지붕을 높일 게 분명하다. 세계와 불화하던 한 존재가 마침내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존재의 근원적 한계인 죽음마저 두렵지 않게 한다. 목수가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볼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린”다. 시인은 오후의 눈부신 햇빛에 무덤들이 하얗게 지워지는 풍경을 감각적 비유로 묘사하고 있다.“목수는 연인이 가져 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한”다. 이 과감한 행동이 시를 읽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한다. 책은 꼭 읽는 데만 그 효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냄비받침이 될 수도 있고, 파리채나 망치로 쓸 수도 있다. 하물며 키스를 위한 계단이라니, 얼마나 유용하고 낭만적인가? 목수의 연인은 책을 사랑하지만 책에 함몰된 고리타분한 인간이 아니다. 목수가 책 더미를 밟고 올라 입술을 내미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 걸 보면 알 수 있다.그것도 무려 릴케의 전집을 말이다. 둘이 키스를 나누자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난”다. 평생 ‘죽은 나무’를 만지고 살던 목수에게서 살아 있는 나무의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연인의 사랑이 ‘죽은 나무’의 우울에 갇혀 지내던 한 사람을 살렸다. 목수는 나무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것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리라.

2024-01-22

교토(京都)의 두 얼굴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에서는 196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년 대하역사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송하고 있는데요. 일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유명한 인물들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는 합니다.2023년에는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2022년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주역이었던 13인의 사무라이, 2021년에는 올해부터 일본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이 될 시부사와 에이이치, 2020년에는 전설적인 하극상의 주인공 아케치 미츠히데가 드라마의 주역이었습니다.올해는 시대를 훌쩍 건너 뛰어 헤이안 시대(794~1185)에 활동했던 여성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光る君へ’-빛나는 그대에게 혹은, 히카루(노)기미(히카루 겐지)에게라는 중의적 의미를 가짐-를 방영하고 있습니다.무라사키 시키부는 일본 고전문학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源氏物語(겐지모노가타리)’를 쓴 여성 작가로서, 이 작품은 주인공인 히카루 겐지를 통해 사랑과 권력, 욕망과 허무 등을 200자 원고지 5000매가 넘는 분량으로 담아낸 고전입니다. 이 작품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헤이안 시대는 귀족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이며, 헤이안(平安)이라는 이름처럼 일본 역사에서 드물게 평화롭고도 안정되었던 시기로 알려져 있지요.많은 역사학자들은 헤이안 시대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일본인의 무의식이 형성되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평화롭고 귀족적인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이 바로 ‘겐지모노가타리’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겐지모노가타리’는 헤이안궁을 주무대로 한 그 시대 최고 권력자들의 이야기인 만큼 작품에 등장하는 교토의 모습은 세련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교토는 간무 천황이 천도를 한 794년부터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간 1869년까지 무려 1천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일본의 수도였습니다. 헤이안 시대 교토의 이름은 헤이안쿄(平安京)였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헤이안쿄는 당시 세계적 대도시였던 당나라의 장안(長安)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입니다. 북쪽 중앙에는 헤이안궁이 자리 잡았고, 헤이안궁으로부터는 폭 85m에 길이 3.8㎞의 주작대로가 도시의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었지요.오늘날 과거의 헤이안쿄 지역이었던 곳에는 헤이안 시대의 건물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바둑판 모양의 거리만은 그 시절 그대로입니다. 라쇼몽(羅生門)은 주작대로의 남쪽 끝에 위치하여 헤이안쿄의 정문 구실을 했던 곳인데요.흥미롭게도 무라사키 시키부에 버금갈 만한 근대의 천재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는 ‘라쇼몽’(1915)에서 귀족문화가 꽃 핀 통념화된 헤이안쿄와는 거리가 먼 교토의 모습을 소설로 남겼습니다.이 작품에서 라쇼몽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서 너구리나 여우, 혹은 거두는 사람이 없는 시신이나 머무는 곳입니다. 이 라쇼몽에 주인으로부터 그만두라는 말을 들어 ‘아사(餓死)할 것이냐’, ‘도둑이 될 것이냐’의 두 가지 선택지만을 남겨 놓은 한 사내가 하룻밤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사내는 시체의 머리칼을 뽑고 있는 노파를 발견하고는, 정의감에 불타올라 그 노파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로부터 자신이 뽑고 있는 머리칼의 주인인 여자는 살아 생전에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팔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노파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 시체에서 머리칼을 뽑는 자신이나 뱀을 생선이라 속여 판 여인이나, 모두 살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하소연하는군요. 이 말을 듣고 사내는 더 이상 “굶어 죽을 것인지 도둑이 될 것인지 망설이지 않”습니다. 방금 전의 정의감에 불타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노파의 옷을 벗겨 들고서는 라쇼몽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내는 굶어죽는 대신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가기로 한 것이겠지요.‘라쇼몽’은 ‘겐지모노가타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짧은 소설이지만, 이상과 현실, 윤리와 욕망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갈등을 인상적으로 담아낸 또 하나의 명작입니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헤이안 시대 교토의 모습은 매우 대비적인데요.이러한 차이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전성기의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반해, ‘라쇼몽’이 몰락해 가는 헤이안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한때 헤이안쿄의 현관 역할을 하던 라쇼몽이 폭풍우로 붕괴된 이후, 현재에는 그 터에 과거의 흔적을 알리는 비석 하나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에 비해 헤이안궁은 사라졌지만, 교토 천도 1천100주년을 기념하며 1895년에 만들어진 헤이안 신궁이 과거 헤이안궁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습니다.헤이안 신궁은 헤이안궁을 8분의5 크기로 줄여 복원한 매우 화려한 건축물로 유명하죠. 드라마 ‘光る君へ’의 많은 부분도 바로 이 헤이안 신궁에서 촬영되고 있다고 하는군요. ‘겐지모노가타리’와 ‘라쇼몽’에 그려진 헤이안쿄의 두 가지 상반된 얼굴은 오늘의 교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1-22

박목월이 경상도를 기억하는 방법

박목월 시인. 청록파(靑鹿派)는 1939~1940년 잡지 ‘문장’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등장한 시인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세 사람을 말한다. 청록파는 해방 이후 1946년에 간행된 이들 세 사람이 각자의 시들을 모아서 낸 시집‘청록집’에서 유래되었는데, 청록파는 우리나라 서정시의 산맥을 우뚝 세웠다. 세 시인은 우리말의 특징을 잘 살려 자연을 소재로 자연의 심성과 순수한 인간성을 표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되 각각의 개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조지훈은 전통에 대한 향수를, 박두진은 자연을 통한 구원과 치유를, 박목월은 자연의 풍경을 묘사하거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향토적인 정서를 표현한다고 얘기한다. 이들 셋 중 가장 자연에 가까운 이는 박목월이다. ‘청록집’이라는 시집 이름도 사실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 정지용이 ‘문장’지에 박목월을 추천하면서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라 할 만하다.”며 목월의 시를 한국시의 전형이라고 극찬했다.청록파의 세 시인에게는 경상도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박목월은 경북 경주 출신이고, 조지훈은 경북 영양 사람이다. 박두진은 경기도 출생이지만 한때 경주와 밀양에서 유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럼에도 경상도 방언을 즐겨 시어로 채택한 이는 단연 박목월이다. 방언을 시어로 채택해 맛깔난 시를 쓴 시인으로는 경상도의 박목월과 전라도의 미당 서정주를 꼽는다. 목월과 미당은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두 공간의 토박이 방언으로 고향의 토속성을 아름답게 되살려 성공한 시인들이다. 미당의 시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다.박목월은 유독 많은 방언 어휘나 방언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억센 경상도식 사투리의 악센트가 텍스트 바깥으로 튕겨 나오는 듯하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외치던 소리가 시가 되었듯 박목월의 시편에서 들리는 사투리는 경상도 사람의 말소리 그대로다. 애틋한 그리움이나 한의 정취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시인의 의도임이 분명하다. 박목월은 방언을 시 작품에 적절히 끼얹어 경상도식 탁성인 토박이 방언으로 고향의 토속적 정경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아배요 아배요/내 눈이 티눈인 걸/아배도 알지러요./등잔불도 없는 제상에/축문이 당한기요./눌러눌러/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가이소./윤사월 보릿고개/아배도 알지러요./간고등어 한손이믄/아배 소원 풀어드리련만/저승길 배고플라요/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묵고 가이소./니 정성이 엄첩다./이승 저승 다 다녀도/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망령도 감응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니 정성 느껴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만술 아비의 축문’슬픈 서사 ‘만술 아비의 축문’은 가난하고 글눈 먼 기층민들의 삶을 향토적인 언어의 색조로 절절하게 노래한다. 거친 방언의 언어문법으로 직조해 내어 울림도가 더 크다. 소리내어 읽어보라. 눈앞에 펼쳐지는 부자간의 애틋한 대화에 귀 기울여 보라. 아버지 제사상 앞에 꿇어앉은 만술 아비의 슬프고 아픈 넋두리에 감응하는 죽은 ‘아배’의 대답에도 이슬 같은 눈물이 배어있다. 박목월은 변방 언어인 방언을 과감하게 시의 중심부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방언의 사용자인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부각시켜 향토적 서정을 형상화해내고 있다.‘내 눈이 티눈’은 ‘까막눈’, 곧 글자를 읽지 못하는 무식함을 은유하는 경상도식 속담이요, ‘엄첩다’는 ‘제법이다, 기대 이상이다.’로 풀이할 수 있는 방언인데 이 시어를 표준어로 바꾼다면 시의 극적 요소와 시적 자아의 정체성은 사라질 것이다. 방언을 절묘하게 배치한 방언시의 묘미를 박목월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4-01-22

도서관의 무한 변신

홍석봉 대구지사장 시카고도서관은 진로, 결혼, 퇴직 등 시민들의 생애주기와 라이프스타일에 따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한다. 이 도서관은 모든 연령대 시민들이 궁금한 것을 묻고, 고민의 해답을 찾는 것이 목표다. 심지어 노숙자를 위한 공간이나 방과후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도서관이 지혜의 보고에서 벗어나 생활의 보고로 바뀌고 있는 듯 하다.요즘 공공 도서관은 인터넷 카페, 북카페, 디지털라운지, 3D VR 체험존을 갖춰 연령층에 맞게 욕구를 충족해준다. 각종 콘서트와 명사 특강 등 인문과 예술 및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들의 감성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악기, 숲, 미술작품 등을 갖춘 이색 도서관도 곳곳에 있다. 도서관의 변신은 끝이 없다.대구중앙도서관은 2023년 7월 재개관과 동시에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도서관은 1919년 개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이 오는 3월부터 전국 처음으로 ‘늘봄형 도서관 학교’를 운영한다. 공공도서관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 돌봄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돌봄 서비스에는 학생들의 독서습관 형성과 학습능력 향상은 기본이다. 여기에 학부모의 양육과 사교육 부담을 줄이기 위한 교과와 연계한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자연 속 그림책 놀이 연극, 교과연계 통합독서, 어린이 토털공예, K-팝 댄스 등 프로그램을 전문가들과 함께 진행한다.도서관이 단순히 책 읽는 공간이 아닌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를 거듭하며 교육 돌봄 서비스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책을 통한 삶의 지혜뿐 아니라 소통과 공감 능력을 키워주는 만능 도우미로 무한 변신이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1-22

여기서는 거기서와 많은 것이 다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김포공항으로 한국을 떠나기까지 무척이나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겨울이 되자 밀린 일들을 어떻게든 소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2월까지도 정말 복잡하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 했는데, 1월이 되어서도 2023년 13월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학술대회를 하나 치러내야 했다. 탈북작가들 연구에 관한 것인데, 나는 몇 년 동안 이 일에 어떻게든 매달려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지명, 도명학, 김정애, 설송아, 김유경 같은 작가며 시인들이 그렇게 귀해 보일 수 없었다. 한반도 같은 현실에서는 이 작가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한다는 느낌만으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되는 것이다.‘K 학술 사업’이라는 게 있어, ‘개설 한국현대소설사’라는 것을, 동영상을 여덟개를 찍어야 하는데, 겨우 두 개를 준비해 놓고는 여행 이후로 일정들을 다 미뤄 놓아야 했다. 한국현대소설사라는 것도, ‘개설’밖에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식사, 모방사와는 다른 종류의 것을 써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던 것이, 이번에도 과연 내실은 없이 시간만 채우는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을 해야 했다.13월 초에는 나 말고 세상도 어지럽기만 했다. ‘아포유’나 ‘아메리카고조선’ 같은 유튜버들은 텔레비전 방송사들이나 여타 유튜브 방송이 송출한 동영상들을 정밀 분석하며 과연 사태의 진상은 어떠냐를 두고 보름이 넘도록 화제를 이어갔다. 여행을 준비하는 틈틈에도 사태의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다른 것은 시간적으로도 여행 기간에 절대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정말 잠시라도 한국에서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직항으로는 비행기삯도 비싸기는 비싸지만 차라리 경유해서 가는 편이 떠나는 절차로서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도 같다.다행히 미국 비자는 지지난 해인가 ESTA 비자를 받아놓은 것이 있어 큰 수고는 덜었다.늘 그렇듯 촉급하게 서두르는 것도 싫어 이번에는 세 시간쯤 여유를 두고 김포공항으로 향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전철역에 다 가서야 여권을 빠뜨린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을, 몇 번을 이곳저곳 뒤진 끝에 드디어 찾기는 찾았다.김포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여행가방에는 허영자 선생의 시선집 한 권만 달랑 들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문학이론서의 한국어 번역본 감수할 것 복사본뿐.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서 나흘째. 생각한다. 여기서는 거기서와 많은 것이 다르다. 풍경도, 사람들 살아가는 것도, 사고방식도, 주제도. ABC마트 옆에 딸린 카페에서 아이스카라멜 마키아토를 하나 시켜놓고 앉았다. 커피 맛만은 다르지 않은 것 같은 것은 다만 착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나는 이런 곳에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을, 다만 우연으로 바다 건너에서 모든 문제들 속에서 살아온 것이었을 뿐인지도. 돌아가서, 그냥 매이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시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갓 먼지처럼 바람 속으로 와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내 생각과 느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한 번 ‘상대성’의 진리를 가슴에 새겨 본다.

2024-01-22

중대재해법, ‘바다낚시 명소’도 문닫게 한다

바다낚시 명소인 포항영일만항 북방파제가 중대재해법으로 인해 뜨거운 감자 신세가 됐다.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은 지난해 9월 포항시에 ‘영일만항 북방파제를 폐쇄할 예정’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국민생명보호’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중대재해처벌법 때문이다.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법은 하청 업체를 포함해 사업장에서 근로자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할 경우 경영진에게는 1년 이상 징역,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법률 내용 중 형사처벌 근거가 되는 경영진 과실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의도를 가진 ‘고의 과실’이나 ‘중대한 과실’이 아니더라도 재해만 발생하면 대부분 과실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산재 발생 가능성이 큰 사업장의 CEO들은 매일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근무해야 한다는 게 산업계 반응이다. 행정기관과 길이 500m 이상인 대형 방파제도 이 법 적용을 받는다.포항시 입장에서는 북방파제 낚시명소에 연간 관광객 20만명이 찾아오는데다, 그동안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 친수관광지로 조성했기 때문에 해수청의 방파제 폐쇄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영일만 바다 중간에 있는 북방파제와 육지를 오가는 포항낚시어선협회와 인근 용한리 상인 반발도 심했다.포항사회의 분위기가 심상찮자 최근 해수청은 포항시에 ‘북방파제를 위탁 관리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포항시가 조례제정을 통해 동빈내항을 위탁관리하고 있는 선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항시가 펄쩍 뛰었다. 포항시장 역시 중대재해법의 희생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일만항 북방파제는 감성돔, 뱅어돔, 전갱이 등 고급어종이 많이 잡혀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다. 이곳이 중대재해법으로 인해 폐쇄될 위기에 처한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현장을 무시한 국회의원들의 법제정 때문이다. 오는 25일부터는 그동안 법 적용에서 제외됐던 50인미만 사업장도 중대재해법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 모든 사업장이 이제 ‘영일만 북방파제 신세’가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

2024-01-22

에코프로의 지방출신 인재경영 주목

지역의 젊은이가 해마다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가운데 비수도권 출신의 인재경영을 통해 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대기업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포항에서 이차전지사업을 벌이는 에코프로는 임직원 10명 중 9명이 비수도권 출신이다. 시가총액 30위 내 기업 가운데 지역인재 비율이 90%에 달하는 기업은 에코프로가 유일하다.1998년 설립된 에코프로는 한 명의 여직원을 둔 벤처기업으로 출발해 지금은 3천400명을 고용하고 시가총액 60조원, 매출 6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작년 말 기준 에코프로의 직원 3천362명 중 지방에 주소지를 둔 직원이 3천17명(89.7%)로 밝혀졌고, 수도권에 주소를 둔 직원은 345명(10.3%)에 불과했다. 또 지방에 소재한 대학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원이 2천867명으로 전체의 85.3%다. 우수한 인재확보를 위해 서울에 본사를 둔 많은 대기업과는 전혀 다른 인재활용 모델이다. 비수도권 출신 인재중심으로 경영을 해도 기업의 성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다. 지금 지방도시 대부분은 인구소멸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지역출신 젊은이가 매년 수 만명씩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들면서 수도권은 집값이 폭등하고 취업난이 가중되고 있는 반면 지방은 청년인구가 줄어 경제력이 노쇠하고 있다. 도시가 노령화되고 인구감소로 소멸을 걱정한다.에코프로의 지방인재 경영은 이런 지방소멸의 문제에 대응할 대안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방에도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면 젊은이가 지역에 정착해 인구소멸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뜻이다. 지방정부는 에코프로와 같은 대기업을 많이 유치하는데 전략을 집중해야 한다. 수도권의 인구집중은 청년층의 결혼과 출산율을 늦춰 저출산율을 더욱 심화시킨다. 서울의 합계출산율(0.59명)이 이를 입증한다. 지방으로 기업과 인재가 모여드는 선순환 구조로 바꾸는 것이 지방소멸을 막는 해법이다. 에코프로의 지방출신 인재경영에서 시사점을 찾아야 한다.

2024-01-22

“법으로도 죽여보고, 펜으로도 죽여보고…”

김진국 고문 자기가 잘해 이기는 선거는 별로 없다. 경쟁상대가 실수해 당선되는 후보가 많다. 지난 대통령선거를 봐도 누가 더 비호감인가를 다투는 선거였다. 그러니 실수를 안 하는 게 중요하다. 말 한마디가 전체 판도를 뒤집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입단속을 한다.4월 총선 결과는 어떨 것 같으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수도권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한쪽으로 쏠린다. 조그만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곳이 많다. 그런데 전체 의석의 절반이 몰려 있다. 작은 실수 하나가 바람 방향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 바람 방향은 늘 바뀐다. 가장 큰 변수는 실수로 만든 악재(惡材)다.슬픈 일이지만 지금 민심을 움직이는 변수도 이런 악재다. 지금 드러난 최대 악재는 ‘영부인 리스크’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명품 가방’도 그중 하나다. 그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게 ‘이재명 리스크’다. ‘응급의료 헬기’가 특히 아프다.선거에는 언제나 악재가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런 악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다. 악재도 잘 대처하면 오히려 호재(好材)가 되는 일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장인의 좌익 전력을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라는 말로 뒤집어버렸다. 사상 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에서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기회로 만들었다.거꾸로 악재를 덮고, 만회하려다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사실을 인정하고 진심을 드러내 마음을 얻을 수도 있고, 거짓으로 거짓을 덮으려다 점점 더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성경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면 반전(反轉)이 없다. 노 전 대통령도 사실을 인정했기에 뒤집기가 가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2년 뒤 당선됐다.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테러당한 건 큰 사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대처가 잘못돼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테러의 배후에 현 집권 여당이 있다는 틀을 짜놓고 몰아간다. 민주당은 “백범 김구, 몽양 여운형 선생 이후 초유의 암살 미수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너무 성급하다.더구나 이 대표가 응급헬기로 서울대병원으로 간 것이 악재가 됐다. 한국은 ‘특권’을 정말 싫어하는 사회다. 조그만 차별도 못 참는다. 보통 사람은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받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대표는 응급실을 쇼핑하는 모양을 보여줬다. ‘피해자’가 순식간에 ‘특권층’이 됐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들이 그대로 보여준다.민주당은 이것을 다시 반전시키려고 무리한다. 일반 국민은 이번 사건에서 백범이나 몽양이 아니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커트 칼 테러를 떠올린다. 민주당은 “경찰은 무엇이 두려워 정치테러 범죄의 진상을 축소하고, 은폐하느냐”고 주장했다. 혹시라도 다른 배후가 있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억지로 몰아가면 역풍만 일으킨다. 민주당은 ‘당대표정치테러대책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다.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단정했다. 사건 직후 문자로 사건 보고를 한 대테러종합상황실 공무원을 고발했다. 소방본부 보고 문서에 ‘목 부위 1.5센티미터 열상’이라고 적혀있는데 ‘1센티미터’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무슨 큰 차이인지…. 피의자의 당적과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따지다 직접 공개했다. 공공장소인 현장을 물청소한것, 피습 당시 입었던 와이셔츠가 수술 폐기물과 함께 버려진 것도 은폐라고 의혹을 제기했으나 해프닝으로 끝났다.이재명 대표는 당무 복귀 직후 “법으로도 죽여보고, 펜으로도 죽여보고, 그래도 안 되니 칼로 죽이려고 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주어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윤석열 정부를 지목한 말이다. 자신의 사법 리스크도 이번 테러와 연결해 정치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응급헬기 비난 여론을 포함해 자기 잘못으로 야기된 여론도 ‘펜으로도 죽여보려는’ 정권의 의도라고몰아간다. 열성 지지자라면 몰라도 일반 민심은 따라가기 힘든 비약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1-21

야누스의 눈을 가진 우리

이희정 시인 혼자서 색종이를 접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을 좋아하던 엄마가 미웠다 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 엄마를 접었는데 마귀할멈이 보였다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었다시샘은 천사의 날개를 잃어버린 아이였다접혀진 색종이의 뒷면이 궁금했다엄마의 뒷모습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표면은 거짓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인은주, ‘시샘의 뒷면’ 전문 (가히 창간호)사랑도 분석이 될까? 사랑에는 창조적인 모습과 파괴적인 모습이 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많은 일에 두 모습이 모두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가진 화살은 똑같은 화살이 아니다. 금과 납으로 만든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종류의 화살이 있다.여기 사랑 안에 상처받은 아이가 산다. 짐작건대, 내향적인 아이는 엄마를 좋아하지만, 바깥으로 바쁜 외향성의 엄마와 사랑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다. 종종 아이는 심리라는 내면의 집에 혼자 거주한다. 동물학자 로렌츠의 흰 기러기 실험에 따르면, 새끼는 어미가 일정한 크기로 보여야 안심한다. 맨 처음 자신에게 각인된 어미의 크기가 있어서, 그 크기보다 작게 보이거나 크게 보이면 새끼들은 불안해한다. 새끼 오리들이 어미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모습, 그 사소한 장면에 자연의 오묘한 법칙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펼치는 삶의 장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의 눈에 엄마는 크고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접는 색종이의 접힌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자주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는 종이접기를 한다. 기다리는 견딤이 반복되는 아이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욕구나 욕망은 해소되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집중이 커지고 충동성이 높아진다. 해서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엄마를 접었는데 / 마귀할멈”이 보이고, “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사랑과 증오는 다르지 않다. 사랑이 없으면 증오가 없고, 증오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인은주 시인의 ‘시샘의 뒷면’은 호주의 M.L. 스테드먼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The Light Between Oceans’의 한 장면을 불러오게도 한다. 영화의 주 배경인 바다가 있는 풍경의 등대는 ‘야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서 문의 수호신이다. 문은 생명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영어에서 1월, January가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아이를 잃은 한 모성이 보상으로 타인의 아이를 취하는 죄를 범한다. 끝과 시작의 경계에 있음을 뜻하는 ‘타인의 아이를 훔쳐 기른다’라는 행위의 양면성을 야누스의 등대를 통해 상징하고 있다.이렇듯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어머니가 있다. 자녀를 중심에 놓고 사는 어머니와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중심에 두는 어머니, 친모 같은 계모, 계모 같은 친모 등 종종 사회 일각에서 충격을 주는 신데렐라형 계모의 유형들이 있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 또한 등대가 비추는 측면에 왜곡해 인식하기도 한다. 인은주 시인의 시적 자아는 야누스의 등대처럼 자신의 깊은 심연과 반대쪽의 그늘까지도 비추고 있다. 우리의 눈은 밖을 향해 있다. 외부는 잘 보지만 스스로는 보지 못하기에.그녀가 접는 종이접기의 시간은 시인의 창작공간과 같은 위치임을 짐작하게 한다. 문명화된 “표면이 거짓이란 걸”을 견딜 만큼 강해질 때까지, 우리의 눈이 에덴동산에 충분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면 어떨까.“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

2024-01-21

영양군, 인구소멸위기를 국책사업으로 이겨내다

오도창 영양군수 지난 2023년 영양군의 사망자 수(281명)는 출생자 수(29명)의 10배나 된다. 한때 인구 7만791명(1973년)을 기록했으나 어느새 전국 최고수준의 인구감소율 77.4%를 기록하며 해가 거듭될수록 인구감소는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심리적 인구 마지노선인 1만6천명 선이 붕괴되면서 이제는 지자체 존립에도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주 산업인 농업은 고령화 여파로 일손 구하기가 더 힘든 실정이 되었고 다른 산업을 유치하기에는 교통 인프라를 비롯한 지역 기반의 열악함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어쩌면 일자리·소득·인구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대규모 국책사업 밖에 없다는 엄중한 현실을 군민들도 인정하며 양수발전소가 반드시 유치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양수발전소는 남는 전력을 이용해 펌프로 고지대 저수지에 물을 퍼 올려 저장한 다음 필요한 시기에 물을 이용해 발전하는 시설이다. 저수지를 만들면 해당 지역 마을 주민이 이주할 수도 있고 발전소 건설 과정에 환경파괴가 일어나는 등 피해가 있어 양수발전소는 대표적인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시설로 꼽힌다. 하지만, 이미 과거에 몇 차례 국책사업 유치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지역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새로운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영양군민 모두가 뼈저리게 실감하며 양수발전소 유치가 지역을 살릴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과거 예천에서 근무했던 시절 예천군이 양수발전소로 지역과 상생하며 주민들이 많은 수혜를 받는 것을 눈여겨보며 언제가 영양군에도 양수발전소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머리속에 염두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영양군수로 취임하며 지난 2020년 7월 양수발전소 영양군 유치 계획을 수립하는 등 선제적으로 유치를 준비했다.언제 발표될지 모를 정부 계획을 기다리기에는 여유가 없어 최적의 입지 조건을 찾아 발품을 팔며 관내 곳곳을 수차례 답사에 나섰다. 아쉽게도 적합한 후보지를 찾지는 못하였으나 우리의 이런 노력을 지켜본 한국수력원자력(주)에서 정밀 검증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대용량의 부지를 발굴하게 되었다.그리고 2023년 1월,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발표되며 본격적인 유치활동을 위한 사전 활동에 돌입했다. 지난해 4월 24일 드디어 한수원(주) 측에서는 영양군에 사업 추진의사를 타진해 왔고 본격적인 유치활동에 나섰다.그 소식을 가장 먼저 사업대상지 주민들과 군민들에게 전했다. 민간 주도의 유치위원회는 유치활동에 속도를 높였다. 결의대회부터 범군민 서명운동(서명률 86.47%)과 주민여론조사(찬성률 96.9%)를 통해 양수발전소 유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우리는 9개월의 대장정을 끝으로 유치 확정이라는 해피엔딩을 이뤄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선제적인 대응과 천혜의 입지조건 그리고 최고의 주민 수용성까지 모든 것이 더해져 소중한 결실을 거뒀다. 무덥고 추운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치활동과 관련된 행사 때면 어김없이 참여하는 군민들의 노력과 고생이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발전소 건립에 따른 150여 명의 정규 일자리 창출과 936억 원의 각종 지역발전 지원금이 우리 지역의 정주여건을 개선할 것이다. 순수 1조 6천억 원 규모의 건설비 투입은 지역 중장비, 숙박시설, 식당 등의 우선 이용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며 매년 14억 원의 지방 세수도 확보하여 지역 살림살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이처럼 양수발전소 유치로 영양군은 미래를 향한 도약을 다시금 준비하고 있다. 유치 확정으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조기에 양수발전소를 건립해 지역에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차질 없는 준비로 한수원과 협업을 통해 당초 일정보다 2년을 앞당겨 조기 준공을 계획하고 있다.올해 신년 사자성어는 ‘휴수동행(携手同行)’으로 정했다. 그간 유치 과정 중 겪었던 모든 경험과 특히 우리가 보여준 화합은 인구소멸위기에서 벗어날 미래로 가는 초석이 될 것이며 올 한 해 어려움이 있더라도 손을 맞잡고 함께 간다면 영양군의 희망찬 내일에 좌절은 없을 것이다. ‘함께 더 멀리’ 갈 수 있는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는 새로운 항해를 이어나갈 것이다.

2024-01-21

개딸 전체주의와 용산 전체주의 대결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한국 정치에서 전체주의 비판이 수시로 등장한다. 전체주의(totalitariannism)는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반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다. 2차 대전 전후 많은 인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나치즘이나 파시즘은 대표적 전체주의이다. 레닌이나 스탈린 역시 공산 혁명이란 허구적 전체주의 이념으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다. 우익 독재나 좌익 독재의 이면에는 전체주의라는 반민주적 악마가 숨어 있다.오늘날 21세기 흔히 ‘이데올로기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라 정치판에는 아직도 상대를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인 민주당을 전체주의세력으로 규정한 바 있다. 최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개딸 전체주의’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야당 역시 윤석열 정부를 향해 검찰 독재정권이라 부르며 ‘용산전체주의’라고 받아치고 있다. 이 나라 양 극단 정치의 바탕에는 상호 포용키 어려운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자주 회자되는 개딸 전체주의부터 살펴보자. ‘개딸’은 ‘개혁의 딸’을 줄인 말인데 그 어감이 매우 좋지 않다. 우리 가정에 개가 반려견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일원이 된지 오래지만 개판이나 개떡처럼 접두어 ‘개’는 아직도 추잡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 딸은 지난 대선부터 이재명 후보를 적극 지지하는 여성 열성당원을 지칭한다. 이들은 당내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이낙연 지지자들을 ‘수박’으로 불렀다. 이들은 수박의 초록색 겉과 붉은 속이 다르듯 상대를 비난 비판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들은 지금도 반명이나 비명 세력을 수구 보수적 사이비 수박 세력으로 간주한다. 민주당을 탈당한 이낙연 전 대표도 개딸로부터 2년간 수모를 당했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어느 민주당 집회에 잠시 참관한 적이 있다. 그들은 이재명 당 대표가 등단, 발언하자마자 ‘옳습니다.’를 외쳤다. 이들은 이재명 대표의 언행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이에 반하는 세력을 용인치 않는다. 정치인들은 이런 열광적 지지그룹이 필요하지만 사당화 등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야당은 이에 대해 윤석열 정부를 ‘용산 전체주의’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용산 대통령실은 여당과 정부 권력의 중핵축이다. 정부 출범 이후 집권당에 대해 용산은 항상 우위를 점했다. 당정관계를 수직적 구조라고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권 출범 시부터 이준석 전 대표는 징계를 당하고, 당대표 후보 안철수, 유승민, 나경원은 모두 후보를 포기하였다. 여론상 최하위였던 김기현 후보만이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 최근에는 검찰 출신 한동훈 법무장관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전격 취임하였다. 이를 두고 용산 대통령실의 입김이 작용치 않았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집권 여당의 당 조직이나 인사에서부터 정책 결정에 이르기까지 용산의 힘이 작동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국회 청문회를 무시한 인사권 남용, 김건희 특검법에 이르기까지 법률안에 대한 계속된 거부권 행사는 용산 대통령실의 위세를 잘드러낸 것이다. 이를 야당은 윤석열 정부를 상명하복의 ‘용산 전체주의’라 비난하고 있다.여야의 이러한 상대를 향한 비판과 비난은 극한 대결의 정치로 연결된다. 전체주의는 상대를 적대화, 악마화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여야는 겉으로 민생과 실용정치를 내세우면서도 상대를 전체주의 사슬로 매도하여 정쟁만 유발한다. 미국에서 1960년대 상대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이는 맥카시적 수법이 이 땅에 재현된 셈이다.상대를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치 않고 저주의 대상으로 삼는 곳에서 상생 정치는 살아날 수 없다. 물론 이곳에 당내의 민주주의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더욱이 4·10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자당의 승리만을 위한 이념적 팬덤 정치는 더욱 갈등정치만 조장한다. 정치인이 선도하고, 언론이 방조하고, 시민 사회마저 갈라진 상황에서 민생이나 상생 정치는 결코 회생될 수 없다.강서 보선 패배 후 대통령은 이념보다 민생 우선의 정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재명 대표의 백주의 테러 사건도 진보당 강성희 의원의 돌출사건도 모두 한국적 갈등 정치가 초래한 비극이다. 이론적으로는 양극정치에서 중도층이나 무당층이 캐스팅 보트를 쥐면 양극 대립은 막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적 정치 풍토에서 건전한 중도층은 독자적 정치 세력을 형성할 수 없다. 결국 선거의 막판에는 중도층이 좌우로 편향되기 때문이다.최근 제3의 중도 정치를 표방하면서 여러 개의 신당이 창당되고 있다. 이들이 과연 양극 정치 해소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기대난망이다. 제3의 빅텐트는 치기도 어렵고, 치더라도 선거용 임시 천막일 뿐이다. 정체성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타협이나 상생의 정치가 자리하려면 우선 상대를 전체주의로 몰아가는 이념정치부터 걷어 치워야 한다.

2024-01-21

신체증상장애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가슴이 답답하다”, “열이 치밀어 오른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숨이 차다”, “속이 미식거리고 토할 것 같다”, “배에 가스가 차고 속이 더부럭하거나 속이 쓰리고 소화가 안 된다”, “입이 쓰고 입맛이 없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 같다”, “머리가 무겁고 아프다”, “어지럽다”, “몸에 통증이 있다”, “쉽게 피로하다” 등의 증상으로 병·의원에 가서 이 검사, 저 검사 다 받았지만 “특별한 이상이 없다” 거나 ‘신경성’ 또는 ‘스트레스성’이라는 말을 들었나요?그렇다면 이는 ‘신체증상장애(Somatic Symptom Disorder)’일 가능성이 높다. 신체증상장애 환자들은 한 가지 이상의 신체 증상으로 고통스럽거나 일상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지만, 신체증상의 원인을 찾기 위해 시행한 검사에서는 이상소견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신체증상장애를 가진 분들은 본인은 아픈데 검사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거나 검사소견에 비해 증상의 호소가 심하다는 말을 들으니 답답한 마음이다.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자의 신체증상이 꾀병 또는 엄살로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니 억울하기도 하다. 그래서 신체증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의사를 신뢰할 수 없게 돼 용한 의사를 찾으러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는 소위 ‘닥터쇼핑(Doctor shopping, 의사 순례)’을 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또한, “뭐라도 원인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비싸다는 검사도 마다하지 않고 한다.신체증상장애의 유병률은 5~7%로 추정된다. 이렇듯 신체증상장애는 흔하지만 신체증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장애의 특징이기 때문에 신체증상장애를 가진 분들은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보다는 내과, 신경과, 마취통증의학과, 이비인후과 등 타과 진료만을 찾는 경우가 많다.신체증상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신체증상들을 과도하게 위협적이고 위험하게 생각하고 정상적인 신체감각조차 재앙적으로 해석하고, 어떠한 신체적 활동이 신체에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공포감으로 신체적 활동을 과하게 회피하고, 신체적 증상에 대한 반복적인 검사와 의학적 도움과 안심에 대한 반복적 추구 행동 등을 한다.신체증상장애의 원인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환경적 요인 등 다양하다. 생물학적 원인으로는 신체감각에 대한 과민함, 통증 역치의 저하가 대표적이다. 즉 이전에 불편함이나 통증으로 느끼지 않았던 자극들이 통증 역치가 낮아지면서 불편함이나 통증으로 느끼게 된다. 또한, 생물학적 요인으로 자율신경기능 이상이 원인이다. 자율신경은 인체 전반에 분포하여 인체의 기능을 조절하는데 자율신경기능 이상이 오면 다양한 신체증상이 발생하게 된다. 심리적 원인으로는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부정적 감정, 우울, 불안, 분노(화), 질투 등의 힘든 감정을 자신이나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사회환경적 관점에서 우리나라가 서구 사회보다 신체증상장애 비율이 더 높다. 서구 사회에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경향이 높은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을 “어른답지 못하다”며 참고 억누르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배경과 ‘우울, 불안’ 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 ‘정신질환자’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여성들은 신체증상을 남성보다 더 많이 호소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신체증상장애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다.또한 우울장애, 범불안장애, 공황장애 등 다른 정신과적 장애에서도 신체 증상이 흔히 동반된다. 그러나 우울장애에서는 하루 중 대부분 그리고 매일 지속되는 우울한 기분 또는 일상 활동에 대해 흥미나 즐거움 상실 등의 핵심 우울 증상들이 있다는 점에서 신체증상장애와 구별된다. 범불안장애에서는 주요 초점이 대개 신체 증상이 아니고 다양한 사건, 상황, 활동에 대한 걱정이다. 공황장애에서 신체 증상들은 급격한 공황발작 삽화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지만 신체증상장애에서는 신체증상에 대한 생각과 불안이 지속적이다.신체증상장애의 예방을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고 부정적 감정을 잘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울고 싶을 때 무조건 참기보다 오히려 잘 우는 것이 좋다. 또한 산책, 운동, 명상, 이완요법 등이 도움이 되고, 과식, 술, 담배, 커피 등을 절제하는 것이 좋다.신체증상장애는 조기에 치료를 받지 않으면 나아질 듯 하다가 사소한 자극으로 악화되는 만성적 경과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대부분 신체증상장애 환자들은 진단을 받지 못하고 여러 병원 돌아다니거나 심지어 비의학적인 방법을 하면서 조기 치료의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신체증상장애를 가진 사람 중 제대로 진단받고 치료받는 환자는 3%에 불과하다고 한다.신체증상장애의 치료는 전문적인 정신과적 치료를 조기에 그리고 꾸준히 받으면 여러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고 증상을 경감시킬 수 있고 치료될 수 있다. 우리가 소를 잃었으면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소를 잃고 소와 관계없는 곳을 고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듯이 건강을 잃어 병을 얻었으면 그 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그에 맞는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2024-01-21

이순신의 협상 리더십, 노량해전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주말을 맞이해 가족과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최근 개봉한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 영화 ‘명량’, ‘한산: 용의 출연’을 보고 감동하여서인지 후속작인 이 작품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노량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이었으며 왜선 200여 척을 파괴하고, 왜군 2만여 명을 전사시킨 최대의 해전이었다.이 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장군은 왜적의 총에 맞아 전사하는 아픔이 있는 해전이다. 이 해전의 특징은 임진왜란 발발 후 7년이 지난 1598년 11월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힘을 합쳐 일본으로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했다는 것에서 더욱 가치가 있는 해전이다.명랑해전은 결단력 있는 강인한 리더십으로 12척의 배로 133여 척을 왜선을 격퇴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며, 한산도 대첩은 ‘학익진’ 등 적재적소에 창의력의 진수를 보여 주며 대승을 거두어 도요토미의 수륙병진 전략을 무력화시켰던 동시에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 전기를 만들어냈고, 노량해전은 명나라 장수 진린이란 장수의 마음을 사로잡아 함께 왜군을 물리침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기업에서 혁신적인 도전 과제를 추진할 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필자는 이순신 장군에게 그 해법이 있다고 했다. 이는 첫째, 최악의 상황에서도 변화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대응하는 장군의 준비된 모습, 둘째,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는 휴먼 네트워크, 셋째, 우리의 민족문화 유산이 된 이순신 장군의 기록 정신을 배우면 된다고 했다.이순신 장군이 백전백승의 승리를 위해서 노력한 강인한 리더십도 훌륭하지만, 노량해전에서 보여 준 진린과의 협상 리더십은 더욱 값지고 빛이 났다. 그의 정신을 들여다 보면, 첫째,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배려정신이다. 1598년 7월 16일 진린의 본대가 고금도 진영에 도착했을 때 성대한 환영연회를 베풀어 주었고, 빼앗은 왜선과 왜적의 수급을 모두 진린에게 주어 감동을 주었다.둘째, 결코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 정신이다. 전쟁이 마무리된 시점에 “왜군을 공격하지 말자”라는 진린의 의견에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나가 싸울 것을 강조하였으며, 항상 앞장서서 싸우는 이순신 장군의 기개에 진린의 마음이 바뀌었다.셋째, 될 때까지 끈질기게 설득하는 담대한 정신이다. 장군은 이번 전투에서 승리해야 명나라의 해양 방어가 튼튼해지고, 개인에게도 개선장군의 명예가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결국 진린의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 탁월한 생각이 탁월한 현실을 창출하는 것이다. 23전 23승 전승의 원동력은 바로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생각과 탁월한 리더십이 아닐까 생각한다.리더는 협상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자신의 대안에 대한 상대의 인식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정확히 파악해 내 편으로 만들어 신뢰와 지지를 얻어내고, 최종 결과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목표를 이루어내는 능력을 배양해야겠다.

2024-01-21

동물농장의 딜레마는 극복할 수 있다

유영희 작가 지난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흉기로 습격당했다. 범인 김모씨는 작년 4월부터 범행을 준비하면서 작성한 ‘남기는 말’에 의하면, 총선에서 이 대표가 공천권을 행사하면 좌경 세력에게 국회가 넘어가고,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좌파 세력에게 넘어가게 될까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범행을 기획했다고 한다.자기와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무찔러야 할 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대표 한 사람이 죽으면 자기가 원하는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은 범인 김모씨 한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보수만 그런 것도 아니다. 김모씨와 반대되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은 여당 대표가 사라지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사람들이 이런 비합리적인 신념을 갖는 것은 평소 한쪽 편향의 뉴스만 보기 때문이다. 김모씨는 월간조선을 32년간 구독했고 평소에도 보수 유투브를 시청했다고 한다. 그 사람뿐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한쪽 편향적인 뉴스만 보고, 나와 의견이 다른 매체를 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많은 사람이 자기 구미에 맞는 뉴스만 편식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절대시하고 상대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운다.저술가 홍일립은, 국가 운영의 토대인 헌법과 법률에 동의하지 않았으면서도 국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국가의 비천한 기원을 망각했거나 아니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정당하지 않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국민이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인다. ‘동물농장’을 쓴 조지 오웰의 관점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동물농장의 나폴레옹 돼지 일당은, 농장의 동물을 동원해 그들을 학대하는 인간 농장주를 몰아낸 후 자기들이 다른 동물을 착취한다. 나폴레옹 일당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다른 동물이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물주의를 표방하는 동물 일곱 계명을 만들고 모두에게 외우게 했을 때 말, 오리, 염소, 양 등은 암기하지 못했다. 돼지들이 일곱 계명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수정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 당나귀 벤자민은 침묵했다.홍일립은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사실 복원’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딜레마-국가는 정당한가’에서 특정 정치가나 이념을 신격화하지 말고 객관적 사실을 복원하여 이성적으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민이 무지하다면, 사실을 복원하여 자기 신념의 정당성을 판단하자는 홍일립의 주장은 실현되기 어렵다. 자기가 좋아하는 뉴스만 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사실 복원에 힘을 보탤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일립은 사실 복원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도덕적 작업이라고 했을 것이다.그래도 희망은 있다. 동물농장은 수십 년 전 일이고, 당나귀 벤자민은 혼자였지만 지금은 신념의 정당성을 판단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 또한 신념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기의 신념을 절대시하지 않고 사실 복원에 힘쓰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더디더라도 내일은 사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2024-01-21

사람을 보낸다는 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고 가는 것이 인생사 필연의 불가피한 과업이라 하지만, 심성이 여린 사람에게 이것은 극한의 과제일 수 있다.어느 시인은 나에게 오는 사람은 그 하나가 아니라, 온 우주가 온다고 기막히게 노래했지만, 그것은 축복일 경우에 한한다. 내게 오는 그나 그녀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재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그러하다!“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 (去者不追 來者不拒)”는 옛말이 있다.멋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할 사람은 많지 않다.떠나려는 사람은 한사코 막고자 하고, 마음에 없는 사람이 들이닥칠라치면 끝까지 거부하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때문이다. 하되, 삶의 근간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좋은 이치나 결말은 없다!한 주일 전, 불귀의 객이 된 사람 하나를 보내는 자리에 함께했다. 강원도 양양 어느 촌구석에서 마지막 자리를 한 것이다. 아침 7시가 되기도 전 캄캄한 새벽녘에 다섯 사람이 승용차 편으로 고속도로를 달린다. 여섯 시간 가까운 여정을 동행한 것은 겨울비와 진눈깨비였다. 마른 날씨보다 우리의 심사를 달래주는 천상의 진객(珍客)이 고마웠던 하루!그를 추억하는 가족과 우리와 그의 또 다른 지인들이 모여서 끓인 한겨울의 얼큰한 섞어찌개가 눈과 비와 눈물과 서정으로 끓어 넘친 하루를 새삼 돌이킨다. 산골(散骨) 자리 전에 맞은 곰치국과 차가운 소주 한 잔은 먼 길 달려온 우리를 위한 소박한 잔칫상! 그래, 다시 올 수 없는 길 떠나는 이를 위한 술 한 잔 어찌 아끼겠는가?!길지 않은 생을 투박하고 정직한 육체노동으로 일관한 그이의 웃는 얼굴이 벽면에 붙어있고, 그 앞에 정갈한 제상(祭床) 준비돼 있다. 그를 추모하는 글 읽노라니, 돌연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종잡을 수 없다. 그렇다! 사람은 타자의 운명이 아니라, 근본 제 운명의 가혹한 손길에 말문과 숨길이 막히는 법이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나니.눈과 비가 잦은 올해, 우리의 장엄한 강원도의 깊은 산골엔 곳곳에 짙은 눈이 흔적을 남기고, 그곳 어디선가 고라니와 멧돼지의 숨길마저 느껴지는 것 같다. 삶은 근본 죽음을 매개로 성립하나니, 가고 옴은 근본 정해진 이치 아니던가.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은 없다(無往不復)’는 주역 ‘계사편’의 말씀은 얼마나 따사로운 위로인지!그날 홀린 사람처럼 온종일 꾸역꾸역 무엇을 입으로 자꾸만 처넣는 낯선 자아를 보면서 이건 또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람 하나 보낸다는 일은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길을 언젠가 모든 우리가 따를 것은 명약관화한 것! 시간의 빠르고 늦은 차이를 뺀다면, 그 본질은 불변 아니던가!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새삼 확인하면서, 13시간이 넘는 여로(旅路)를 마치고 돌아온 촌집의 적막은 새삼 깊고 너른 것이어서 쉽게 잠들지 못하였던 바다. 하되, 삶이란 본디 불가사의한 것 아니더냐! 이튿날 큰소리로 외친다. “편히 쉬시게. 다시 만날 그날까지!”

2024-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