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포항 민속문화 이야기
(메) “모시야 적삼 반적삼에 분통 같으나 저 젖 보소”
(받) “많이야 보면 병이나 되고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
이 노래는 포항시 흥해읍 지역에서 전승되는, 이른바 흥해농요 ‘모심는소리’의 한 구절로 초여름 물이 질퍽한 논바닥에서 펼쳐지는 남녀 간의 사랑노래다.
모내기 논에서 일렬로 선 일꾼들이 모를 심을 때 한 쪽에서 선창으로 “모시야 적삼 반적삼에 분통 같으나 저 젖 보소”하고 메기면 다른 한 쪽에서 후창으로 “많이야 보면 병이나 되고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하고 받는다.
바로 이 포항흥해농요가 최근 경상북도 무형유산이 됐다. 경상북도는 지난해 12월 19일 포항흥해농요가 경상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음을 고시(제2024-503호)함으로써 흥해농요는 포항지역 전통민속예술로서는 처음으로 무형유산이 된 것이다. 흥해농요는 무엇이며, 어떤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농요란 농사에 관계되는 노래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농경시대 농민들이 부르는 민요는 농삿일을 하는 과정에서 부르지는 않더라도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농한기에 휴식을 위해 놀면서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농민들이 부르는 대부분의 노래가 어떤 식으로든 농사와 연관되어 있다.
포항 흥해는 예로부터 농사가 아주 발달한 곳이다. 2018년 현재 흥해읍의 농경지 면적은 동해안 최대 규모이다. 이 중 벼농사 면적 역시 동해안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곡창지대이다.
저지대가 많고, 곡강천 상류의 대형 저수지에서 공급하는 풍부한 용수가 있기에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 점은 농요가 발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들판에서 일을 할 때 농사꾼들은 힘을 쓰는 과정에서 동작을 맞추기 위해, 또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 일에 맞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게 농요인데, 넓은 들을 가진 흥해에는 예부터 다양한 농요가 전승되어 왔다.
하지만 전국 대부분의 농촌이 그렇듯이 1970년대부터 농업의 기계화와 이농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농요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농사 현장에서는 더 이상 노래가 불리지 않게 되었고, 가창자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거나 그들의 고령화와 함께 ‘전승 단절’이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흥해농요는 1990년대초 농촌인 북송리와 어촌인 죽천리를 중심으로 학계의 채록이 이루어진 덕분에 다행히 음원이 보존되어 왔으며, 그 일부가 ‘포항지역 구전민요’(박창원, 1999)라는 책을 통해, ‘소리로 듣는 포항의 민요’(박창원, 2015)라는 음반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 자료에는 북송리의 소리꾼 김선이·최화식 선생의 노래가 실려 있다.
김선이(여, 1927년생) 선생은 구룡포에서 태어나 17세 때 혼인해 북송리에 정착했다.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나물캐는소리’, ‘시집살이소리’, ‘치이야칭칭나네’ 같은 여성들이 부르는 민요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노래를 부르는 분이다. 목소리가 맑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음정과 발음, 감정이입으로 사람들이 사랑을 받아 왔다. 현재 95세로 생존해 있는 흥해농요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흥해농요의 또 다른 가창자는 지난 1995년 작고한 최화식(남, 1923년생) 선생이다.
포항 신광면 출신으로 40대에 북송리에 정착했다. 허스키한 음성과 신명나는 소리로 주변의 사랑을 받았다. 북송리 풍물패 상쇠로서 풍물소리 반주에 맞춰 부른 ‘지신밟는소리’는 최고의 절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선이 선생과 남녀 교환창으로 부르는 ‘모심는소리’가 일품이며, ‘물푸는소리’, ‘풀써는소리’ 같은 희귀한 소리도 할 줄 안다.
그러다가 북송리 1세대 소리꾼인 김선이 선생의 지도를 받은 국악인 박현미 씨가 2018년에 흥해읍에 거주하는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사단법인 포항흥해농요보존회를 결성하여 소리의 보존 및 교육에 나서면서 흥해농요는 전승의 계기가 마련됐다.
흥해농요보존회는 발족 이후 전승자료집으로 ‘어절씨구 흥해야! 흥해의 민요’(2019),‘김선이의 흥해농요(CD)’(2020),‘다시 부르는 흥해농요(CD)’(2021),‘맥을 잇다, 박현미의 흥해농요(CD)’(2022)를 제작하고, 보전·전승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2회(2019, 2021) 개최하였으며, 2022년에 경상북도 무형유산 지정신청서를 제출한 이후 2023년 9월부터 몇 차례 심사를 거쳐 2024년 12월에 최종 지정을 받았다.
현재 흥해농요는 1990년대초 필자가 채록한 음원을 바탕으로 ‘보리타작소리’,‘모찌는소리’, ‘모심는소리’, ‘물푸는소리’, ‘논매는소리’, ‘망깨소리’, ‘지게목발소리’, ‘어사용’, ‘과부신세타령’, ‘치이야칭칭나네’, ‘지신밟는소리’ 등을 재현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그 중에서 ‘모찌는소리’나 ‘모심는소리’는 메김과 받음에서 끊김이 없는 연속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삶의 애환이 진하게 스며 있는 나머지 노래들에는 풍농 기원의 세시풍속이 나타나 있는 점, 그리고 흥해의 지명과 사투리 등 지역의 문화적 요소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민속적·학술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흥해농요는 포항흥해농요보존회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흥해읍행정복지센터 강당에서 개최하는 ‘흥해농요교실 무료강좌’를 통해 전승의 맥을 잇고 있다.
앞으로 흥해농요는 흥해 지역뿐만 아니라 포항지역 전체 민요의 채록과 정리, 전승교육, 공연 등을 통해 포항을 대표하는 무형유산으로서의 알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