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핫 플레이스’, 호미곶에 관해서 떠도는 풍문 중에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이곳을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일곱 차례나 답사하기는 쉽지 않은데, 순전히 발품을 팔아 다녀야 했던 당시에 일곱 번이나 이곳에 왔다고? 사이버 공간 곳곳에 기정사실처럼 설명하고 있는 기사 하나를 예로 들면 이렇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는 호미곶과 죽변 두 곳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동해로 튀어나왔는지를 재려고 죽변과 장기 사이를 일곱 차례나 오갔다고 한다. 그 결과가 대동여지도에 정확히 반영되어 호미곶이 더 튀어 나오게 그려졌음은 물론이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포항 호미곶과 울진 죽변 중 어느 곳이 동쪽으로 더 튀어나왔는지를 알아보려고 죽변과 장기 사이를 무려 일곱 번이나 왕래했으며, 호미곶이 더 튀어나왔음을 확인하고는 지도에 반영했다는 것이다.
죽변에서 호미곶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일곱 번이나? 그리고 수백 리 떨어진 두 곳 중 어디가 더 튀어나왔는지를 어떻게 측정하지? 등등의 의문이 들지만 ‘의지의 한국인’ 김정호라는 사람 앞에서 의심은 묻히고 만다.
사실처럼 떠도는 이 이야기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1967년에 발간된 포항의 향토사학자 박일천의 ‘일월향지(日月鄕誌)’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 책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라는 꼭지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김정호는 조선 철종 때의 사람으로 자는 호는 고산자(古山子)이고 예산인이며 출생과 사망은 상세하지 않다. 어릴 때부터 뜻을 세워 힘써 공부하여 천문지리에 통달하고 여러 차례 잡학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급제하지 못하였다. 후에 느낀 바가 있어 응시를 포기하고 독학으로 공부한 지리학을 후진에게 가르치고 편의를 제공하고자 순조 말년 5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청구선표도(靑丘線表圖)라는 우리나라 지리원도(地理原圖)를 제작하여 나라에 바치니 순조가 표창하였다.
후에 30여 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며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것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대동지지(大東地志) 전 23권 15책인데, 이를 천하에 공포하니 사계가 극찬하였다. 대원군 섭정시에 쇄국정책을 시행하자 이 저술이 국가기밀을 누설한 것이라 하며 판각을 압수하여 불태우고 김정호를 체포하여 투옥하니 옥사하였다. 김정호의 유적을 살펴보면, 죽변갑(竹邊岬)과 장기갑(長鬐岬)에서 여러 날 체류하며 죽변갑과 장기갑 중에서 어느 갑이 더 돌출하였는가 살피면서 장기 죽변 사이를 7회나 걸어서 오고갔다 한다.“
‘일월향지’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면서 장기갑(현 호미곶)과 죽변 중 어디가 동해 쪽으로 더 튀어나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장기와 죽변 사이를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일월향지’의 저자 박일천은 어디에 근거하여 자신의 책에다 이렇게 썼을까?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때 있었던 김정호의 활약상은 육당 최남선이 처음 꺼냈다.
최남선은 1925년 동아일보에 ‘고산자를 회(懷)함’이라는 글에서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으며,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올랐고, 수십 년을 떠돌아다녔다고 적었다.
아마도 최남선은 김정호 개인의 노력을 부각시키려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했던 듯한데, 이후 이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어린이잡지를 통해 더 극적인 내용으로 각색되었고, 이것이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초등학교 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 실리면서 김정호에 대한 상식으로 굳어졌다. 그 과정에서 대동여지도를 본 대원군이 나라의 비밀을 누설한다며 지도판을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옥에 가둬 죽게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김정호의 이야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의 과정은 최한기가 쓴 ‘청구도제’, 신헌이 쓴 ‘대동방여도서’에 “오랜 세월 동안 자료를 찾고 수집·열람하였다,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증거로 삼고 여러 지도를 서로 대조하며 여러 지리지 등을 참고하였다.”는 등의 기록에 전하는데, 어디에도 직접 답사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당연히 몇몇 부족한 곳은 직접 답사를 했겠지만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했던 김정호가 전 국토를 답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960년대말 포항의 향토사학자 박일천은 최남선이 퍼뜨려 교과서에까지 실린 김정호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일월향지’에다 적었다.
다만 여기서는 ‘백두산 일곱 번 등정설’이 ‘장기갑 일곱 번 답사설’로 바뀌었으며, 장기갑과 죽변갑 중 어디가 더 튀어나왔는지를 확인할 목적으로 장기와 죽변 사이를 일곱 번이나 답사했다는 자신의 상상력까지 보태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확대·재생산 과정을 거쳐 사실처럼 인식됐고, 조선 중엽 격암 남사고가 이곳을 호미등이라 함으로써 오늘날 호미곶으로 부르는 단초가 됐다는 설과 함께 호미곶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역사를 기술할 때 아무리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라도 합리적인 의심을 해 봐야 하고,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 왜곡이라는 우를 범하게 되고, 이를 바로 잡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