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화재를 막기 위한 안간힘, 화재막이 풍수

지난 달 21일부터 영남지방에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하여 열흘 가량 전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유래 없는 재난을 겪었다. 가히 단군 이래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는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집과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타죽고, 국가문화유산을 간직한 천년 고찰이 속수무책으로 소실되는 장면을 보면서 모두가 공포에 떨었고, 대재앙 앞에 선 인간의 무기력함에 탄식을 쏟아내야 했다. 불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 다루면 한 순간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재앙이 되고 만다. 그래서 화마(火魔)라 했다. 그러기에 먼 옛날부터 조상들은 화재를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왔다. 서울 광화문 앞에는 돌로 조각한 해태 한 쌍이 있다. 이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다. 조선초 경복궁을 지을 때 풍수지리설에 의해 만들어 세운 것이다. 경복궁의 정남향인 관악산이 불꽃 형상이어서 궁궐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므로 관악산 꼭대기에 연못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넣어 두는 한편, 화기를 잡아먹는다는 전설상의 동물인 해태를 관악산을 향해 세워 둔 것이다. 불은 물로 다스려야 한다. 관악산의 모양이 불꽃 형상이니 꼭대기에 연못을 파고, 수신인 용을 만들어 넣는 한편, 대궐 앞에는 관악산을 향해 화기를 억누르는 해태상을 세움으로써 이중, 삼중의 방재 장치를 해 둔 것이다. 산꼭대기에 소금을 묻어 화기를 누르는 곳도 있다. 해인사가 내려다보이는 매화산 남산제일봉(1100m)에 소금단지 묻는 전통이 그러한 예이다. 불꽃 형상인 해인사 남쪽 남산제일봉의 화기가 사찰로 날아들어 불이 자주 난다는 풍수설에 따라 해인사에서는 1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단오에 맞춰 바닷물로 불기운을 잡는다는 뜻에 따라 소금단지를 묻어오고 있다. 해인사에서는 1695년부터 일곱 번의 화재가 났다. 특히 여섯 번째인 1817년 화재 때에는 팔만대장경이 들어 있는 장경판전을 제외한 모든 건축물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해인사에서 화재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소금은 바닷물을 증발시킨 후 남는 물질이다. 이는 곧 바닷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포항시 흥해읍 북송리는 화재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마을 남쪽 산꼭대기에 간수를 묻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정월 보름날 달이 뜰 무렵, 마을 앞산 정상에 묻혀 있는 간수병을 파내어 간수를 채워 넣는 의식을 행한다. 이러한 의식이 생긴 것은 다음과 같은 유래 때문이다. 조선 철종 때 마을에 큰 불이 나 가옥들이 전소되다시피 했는데, 한 풍수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마을 남쪽 동산이 ‘불 화(火)’자 형상이어서 마을에 불이 자주 나며, 불이 나면 반드시 연이어 세 번 난 뒤에야 그친다”고 했다. 주민들이 어떻게 하면 화재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묻자, 산 정상에 구덩이를 파고 간수를 묻어 화기(火氣)를 눌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대보름 날 저녁에 산으로 올라가 간수병에 간수를 채우고 달맞이를 하게 되었다 한다. 이 유래담에 의하면 마을에 자주 발생하는 화재의 원인을 마을 앞산에서 내뿜는 화기 때문으로 여기고, 그러한 화산(火山)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간수를 묻는다는 것이다. 마을의 화재를 막기 위해 간수나 바닷물을 병이나 단지에 묻는 의식은 포항시 송라면 광천리, 영덕군 남정리 등지에서도 발견된다. 북송리에서는 지난해 대보름날 묻은 간수병을 이듬해 대보름날 파 보는데, 병 속의 간수가 많이 줄었을 경우 지난 해 많이 가물었다고 인식하며, 앞으로 시절이 좋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런 해에는 마을 사람들이 특별히 행동을 조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간수 묻기가 방화(防火)와 함께 한해(旱害)를 막기 위한 기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화재와 가뭄은 다 불의 기운이 강한 데서 생기는 현상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풍수상 화기가 강한 곳에다 바닷물을 묻어 화기를 눌러야 한다는 의식이 반영된 모습이다. 박창원수필가 사람들은 바닷물이 화기를 누르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간수가 늘 차 있어야 한다고 보고, 해마다 정월 보름에 간수를 보충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간수는 소금에서 추출한 물이지만 엄연히 바닷물이다. 그러나 간수병에 들어가는 간수는 평범한 바닷물이 아니다. 그 물은 용의 신비스런 생명력을 간직한 신격화된 물이다. 따라서 간수는 살아 있는 용으로서, 비를 내려 마을에 풍요를 가져다주고 화재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신격의 의미가 있다. 그렇게 보면 간수병은 이 마을을 화재와 가뭄으로부터 지켜 주는 수호신 구실을 해온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신앙도, 현대의 과학화된 장비도 이번의 산불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산불이 번지면 산림에 인접한 어떤 마을도, 그 어떤 사찰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 50년 이상 땀흘려 가꾼 울창한 이 땅의 산림이 도리어 재앙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앞에서 우리는 혼란스럽다.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04-08

병란에 ‘솔 송(松)’ 자를 피하라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7년 동안 조선을 유린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백성들은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었고, 어디가 안전하다는 속설이 유언비어처럼 퍼지기도 했다. 그 중에도 특히 ‘솔 송(松)’자가 들어있는 곳이 안전하다는 설이 힘을 얻었는데, 포항지역의 경우 기북면 송을곡(松乙谷)과 죽장면 송내동(松內洞)이 대표적이다. 송을곡은 지금의 기북면 덕동마을의 옛 지명으로,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이 속설에 따라 자기 식솔들을 이 마을에 피란시켰다고 전해진다. 송을곡은 우리말 지명 ‘솔골’의 이두식 표기이다. ‘솔’의 뜻을 나타내는 부분인 ‘松’과 받침 ‘ㄹ’음을 표시하는 ‘乙’을 써서 ‘송을(松乙)’로 하고, ‘골’은 ‘谷’으로 표시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정문부가 고향으로 이사할 때 손서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堈)에게 재산 일체를 양여하면서 오늘날 여강이씨 중심의 덕동이 된 것이다. 송내동은 지금의 죽장면 입암리에 위치한 자연마을로 임진왜란 때 동봉(東峰) 권극립(權克立),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 등이 피란차 들어와 살았던 곳이다. 권극립 선생이 영천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은, 임진왜란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지명에 ‘솔 송(松)’자가 들어있는 곳이라는 속설을 믿었기 때문이라 하며, 그런 곳을 찾다보니 영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송내(松內)’라는 데가 있음을 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 나돌았다는 속설인 “난리가 났을 때 가장 안전한 피난처는 ‘솔 송(松)’자가 들어있는 곳”이란 말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다.‘솔 송’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전국적으로 꽤 많다.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松都)가 있는가 하면 청송(靑松) 같은 고을도 있고, 마을까지 거명하자면 부지기수다. 그 근거를 암시하는 말이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고전소설 임진록(壬辰錄)에 나온다. “이 때 왜장 소서가 바로 군사를 몰아 강원도로 향하더니 왜국에서 소서의 매씨(妹氏) 편지가 왔거늘, 하였으되 ‘제번(除煩)하고, ‘소나무 송(松) 자’가 있는 곳을 가지 말라. ‘송 자’ 있는 곳을 가면 대패할 것이니, 부디 가지 말라.’ 하였거늘, 청송(靑松)과 송도(松都)를 가지 않고 강원도로 들어가 강원 감사 이래(李來)와 평안 감사 이공태(李公太)를 버히고, 그 골 기생 월천(月川)은 천하의 절색이라 죽이지 않고 첩을 삼아서 주야로 연관정에 놀아 풍류로 세월을 보내더라.” 임진록에 의하면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의 매씨(여동생)가 오빠에게 편지를 보내 “‘솔 송(松)’가 있는 곳 가지 말라, ‘송 자’ 있는 곳을 가면 대패할 것이다.” 라고 했고, 소서행장은 매씨의 충고에 따라 청송이나 송도 같은 ‘솔 송’ 자가 들어 있는 곳을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고전소설이 그렇듯이 임진록도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면, 당시에 ‘솔 송’자가 있는 곳을 피하라는 참언(讖言)은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소문이 포항 지방까지 전해올 정도면 이 속설은 당시 조선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명에 ‘솔 송’자가 들어 있는 곳들이 과연 임지왜란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그러한 지명들을 다 조사해 보지 않아 알 수 없다. 어쨌든 송을곡이나 송내동은 왜병이 지나갔다는 기록이 없으니 무사했던 것 같다. 1990년경 죽장 송내동, 속칭 솔안마을로 필자를 안내했던 죽장 지역의 향토사가 권태한 선생은 ‘솔 송’자를 피하라는 참언의 ‘솔 송’자는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솔 송’자가 들어있는 사람은 바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라는 것이다. 이여송을 피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맞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왜군이 ‘솔 송’자가 들어 있는 지명만 피해 다니다가 ‘솔 송’자가 들어 있는 명나라 원군 이여송 장군을 만나 패했다는 것이다. 박창원수필가 ‘솔 송’을 지명이 아닌 인명에 연결시킨 경우에도 근거는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참서인 정감록(鄭鑑錄)에 “壬辰 島夷蠹國 可依松柏(임진년에 섬 오랑캐가 나라를 좀 먹으면 소나무와 잣나무에 의지할 것이요)”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松柏, 즉 소나무와 잣나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松柏은 나무가 아닌 사람, 즉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이여백(李如柏)을 상징한다. 이여백은 이여송의 동생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와서 벽제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정감록 같은 도참서에서도 ‘솔 송’ 자를 언급하고 있을 정도이니 임진란 당시 ‘솔 송’ 자와 관련된 유언비어는 널리 퍼져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참설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애매한 표현을 즐겨 쓰는 법이니,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특정 글자가 들어 있는 곳을 우회하여 갈 수 있을지언정 싸우자고 덤벼오는 적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03-12

포항 두무치 마을의 천제

동해안에는 아직도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동제가 전승되는 마을이 많다. 동제와 함께 하늘, 즉 천신(天神)께 제사를 지내는, 이른바 천제(天祭)를 지내는 곳이 있어 주목된다. 바로 포항시 북구 두무치 마을이다. 두무치는 현 포항시 북구 두호동의 옛 이름이다. 1980년대 이후 영일대해수욕장, 환호공원, 설머리물회지구 등의 개발과 맞물려 관광지로 변한 곳인데, 이곳에는 천제당(天祭堂)이라 부르는 신당이 있고, 매년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고 있다. 대체 두무치의 천제당은 어떤 모습이고, 제의는 어떻게 전승되고 있을까? 두무치 천제당의 연원과 관련해서는 ‘포항시사’(1987)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부터 두무치에는 천제당(天皇神位堂)을 비롯하여 용왕당, 골목당, 총각당, 소머리당이 있었다가 해방 전 일제 때 후자의 4당을 합쳐서 선황당(골목당 : 골매기당)으로 통합하여 천제당과 함께 두 제당을 형성하였다. 이후 종전과 같이 해마다 제관을 선임하고 봄과 가을 2회로 날을 받아서 풍어와 동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동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흥해고을 원이 참여하여 지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차 동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자 급기야 작년에 천제당을 신축하여 선황당을 합당하면서 종래 1년에 두 차례 택일하여 제사 지내던 것을 가을에 택일하던 음력 9월 2일날을 아예 동제일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원래 천제당인 천황신위당(天皇神位堂)과 함께 용왕당, 골목당, 총각당, 소머리당 등 4개의 신당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천제당을 제외한 4개의 신당을 하나로 통합, 선황당(仙皇堂)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현재 스페이스 워크로 가는 길옆에 선황당 터가 남아 있다. 그러다가 1986년에 천제당을 중건하면서 선황당을 이곳에 통합하여 운영해 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천신을 상징하는 천황후토신위(天皇后土神位)와 옛 선황당에서 모시던 골매기신을 상징하는 원두호동후토신합위(元斗湖洞后土神合位)를 모시고 있다. 통합 후에는 매년 9월 2일(음)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두무치 천제당의 정식 명칭인 ‘천황신위당’은 ‘천황의 신위를 모신 당’이란 뜻이다. ‘천황신위’의 ‘천황’은 ‘하느님’이란 뜻이다. ‘후토(后土)’는 원래 ‘토지의 신’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별 의미 없이 ‘신’이라는 의미로 쓰인 듯하다. 그러기에 ‘천황후토신위’는 ‘하느님 신위’이란 뜻으로 봐야 한다. 골매기신의 위패인 원두호동후토신합위(元斗湖洞后土神合位)의 ‘후토’도 그냥 ‘신’이란 뜻으로 쓰인 것으로 판단된다. ‘원(元)’은 ‘원래’란 뜻이다. 합위(合位)는 4분의 신위를 통합한 위패란 뜻이다. 그러니 원두호동후토신합위는 지금의 두호동이 아닌 옛 두호동의 통합신위란 뜻으로 1994년 천제당으로 통합하기 전 옛 선황당에서 모셔온 4위의 신을 의미한다. 두무치 천제당은 두무치 마을에서 약 300m 정도 떨어진 뒷산 언덕(두호동 산18-1)에 위치한다.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목조와가 형태의 당으로, 출입문이 따로 있으며, 이 문 처마에 天皇神位堂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천제당 내부 정면 벽에는 좌우에 감실이 있고, 감실 안에 신앙의 대상인 신격을 탱화와 위패로 모셔 놓았다. 옥황상제 형상을 하고 있는 천황은 흰 수염에 흰 눈썹을 한 노인 형상에 곤룡포를 입고 보관을 쓰고 있다. 천황 오른쪽에는 호랑이가 호위하고 있다. 탱화 앞에는 天皇后土神位라 적은 위패가 있다. 천황 탱화 바로 옆에는 같은 규격으로 그린 장수 형상을 한 탱화가 1점 걸려 있다. 장수 탱화는 가운데 화려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장수를 중심으로 5명의 호위무사가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장수의 형상은 사찰의 신중탱화에 등장하는, 흔히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고도 부르는 위태천(韋駄天)의 모습에 가깝다. 이 장수 형상의 탱화는 천황을 호위하는 장수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천황 탱화 오른쪽에는 마을신인 선황 탱화도 걸려 있다. 현재의 두무치 천제당은 천신인 천황후토신과 동신인 원두호동의 골매기신을 함께 모시는 공간이지만, 원래는 이 마을에 천제당 외에 용왕당, 골목당, 총각당, 소머리당 등 4개의 신당이 따로 있었다. 4개의 신당이 별도로 있을 때 천제당은 이들 4개 신당의 상당(上堂)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두무치 천제당은 포항 지역에서 천신의 위패와 탱화를 봉안한 유일한 사례다. 조선시대 천제당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흥해고을 원이 참여하여 지낸 경우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심한 가뭄이 닥쳤을 때 흥해군수 주관으로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창원 수필가 두무치 천제당 제의는 오랫동안 주민들이 직접 지내왔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와 제관 선정의 어려움 때문에 스님에게 위탁하면서 제의의 형식과 내용은 두무치 천제의 본래 모습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는 21세기 두무치 천제당 제의의 지속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지도 모른다. 제의는 9월 2일(음력) 새벽(0시)에 천제당에서 천황제와 선황제를 지낸 다음에 마을 축항으로 내려와 용왕제를 지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용왕제는 두호동 어민들의 해상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인데, 이 역시 스님이 주제하고 있다. 따라서 두무치 천제단 제의는 천황제를 비롯하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선황제, 해상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 등 3가지가 혼합된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02-23

경상북도 무형유산이 된 포항흥해농요

(메) “모시야 적삼 반적삼에 분통 같으나 저 젖 보소” (받) “많이야 보면 병이나 되고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 이 노래는 포항시 흥해읍 지역에서 전승되는, 이른바 흥해농요 ‘모심는소리’의 한 구절로 초여름 물이 질퍽한 논바닥에서 펼쳐지는 남녀 간의 사랑노래다. 모내기 논에서 일렬로 선 일꾼들이 모를 심을 때 한 쪽에서 선창으로 “모시야 적삼 반적삼에 분통 같으나 저 젖 보소”하고 메기면 다른 한 쪽에서 후창으로 “많이야 보면 병이나 되고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하고 받는다. 바로 이 포항흥해농요가 최근 경상북도 무형유산이 됐다. 경상북도는 지난해 12월 19일 포항흥해농요가 경상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음을 고시(제2024-503호)함으로써 흥해농요는 포항지역 전통민속예술로서는 처음으로 무형유산이 된 것이다. 흥해농요는 무엇이며, 어떤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농요란 농사에 관계되는 노래를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농경시대 농민들이 부르는 민요는 농삿일을 하는 과정에서 부르지는 않더라도 풍년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농한기에 휴식을 위해 놀면서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농민들이 부르는 대부분의 노래가 어떤 식으로든 농사와 연관되어 있다. 포항 흥해는 예로부터 농사가 아주 발달한 곳이다. 2018년 현재 흥해읍의 농경지 면적은 동해안 최대 규모이다. 이 중 벼농사 면적 역시 동해안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곡창지대이다. 저지대가 많고, 곡강천 상류의 대형 저수지에서 공급하는 풍부한 용수가 있기에 농사짓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 점은 농요가 발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들판에서 일을 할 때 농사꾼들은 힘을 쓰는 과정에서 동작을 맞추기 위해, 또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그 일에 맞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게 농요인데, 넓은 들을 가진 흥해에는 예부터 다양한 농요가 전승되어 왔다. 하지만 전국 대부분의 농촌이 그렇듯이 1970년대부터 농업의 기계화와 이농현상이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농요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농사 현장에서는 더 이상 노래가 불리지 않게 되었고, 가창자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거나 그들의 고령화와 함께 ‘전승 단절’이라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흥해농요는 1990년대초 농촌인 북송리와 어촌인 죽천리를 중심으로 학계의 채록이 이루어진 덕분에 다행히 음원이 보존되어 왔으며, 그 일부가 ‘포항지역 구전민요’(박창원, 1999)라는 책을 통해, ‘소리로 듣는 포항의 민요’(박창원, 2015)라는 음반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 자료에는 북송리의 소리꾼 김선이·최화식 선생의 노래가 실려 있다. 김선이(여, 1927년생) 선생은 구룡포에서 태어나 17세 때 혼인해 북송리에 정착했다.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나물캐는소리’, ‘시집살이소리’, ‘치이야칭칭나네’ 같은 여성들이 부르는 민요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노래를 부르는 분이다. 목소리가 맑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음정과 발음, 감정이입으로 사람들이 사랑을 받아 왔다. 현재 95세로 생존해 있는 흥해농요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흥해농요의 살아 있는 전설 김선이 선생. 흥해농요의 또 다른 가창자는 지난 1995년 작고한 최화식(남, 1923년생) 선생이다. 포항 신광면 출신으로 40대에 북송리에 정착했다. 허스키한 음성과 신명나는 소리로 주변의 사랑을 받았다. 북송리 풍물패 상쇠로서 풍물소리 반주에 맞춰 부른 ‘지신밟는소리’는 최고의 절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선이 선생과 남녀 교환창으로 부르는 ‘모심는소리’가 일품이며, ‘물푸는소리’, ‘풀써는소리’ 같은 희귀한 소리도 할 줄 안다. 그러다가 북송리 1세대 소리꾼인 김선이 선생의 지도를 받은 국악인 박현미 씨가 2018년에 흥해읍에 거주하는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사단법인 포항흥해농요보존회를 결성하여 소리의 보존 및 교육에 나서면서 흥해농요는 전승의 계기가 마련됐다. 흥해농요보존회는 발족 이후 전승자료집으로 ‘어절씨구 흥해야! 흥해의 민요’(2019),‘김선이의 흥해농요(CD)’(2020),‘다시 부르는 흥해농요(CD)’(2021),‘맥을 잇다, 박현미의 흥해농요(CD)’(2022)를 제작하고, 보전·전승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2회(2019, 2021) 개최하였으며, 2022년에 경상북도 무형유산 지정신청서를 제출한 이후 2023년 9월부터 몇 차례 심사를 거쳐 2024년 12월에 최종 지정을 받았다. 현재 흥해농요는 1990년대초 필자가 채록한 음원을 바탕으로 ‘보리타작소리’,‘모찌는소리’, ‘모심는소리’, ‘물푸는소리’, ‘논매는소리’, ‘망깨소리’, ‘지게목발소리’, ‘어사용’, ‘과부신세타령’, ‘치이야칭칭나네’, ‘지신밟는소리’ 등을 재현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박창원 수필가 그 중에서 ‘모찌는소리’나 ‘모심는소리’는 메김과 받음에서 끊김이 없는 연속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하다. 삶의 애환이 진하게 스며 있는 나머지 노래들에는 풍농 기원의 세시풍속이 나타나 있는 점, 그리고 흥해의 지명과 사투리 등 지역의 문화적 요소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적·민속적·학술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흥해농요는 포항흥해농요보존회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흥해읍행정복지센터 강당에서 개최하는 ‘흥해농요교실 무료강좌’를 통해 전승의 맥을 잇고 있다. 앞으로 흥해농요는 흥해 지역뿐만 아니라 포항지역 전체 민요의 채록과 정리, 전승교육, 공연 등을 통해 포항을 대표하는 무형유산으로서의 알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