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 F. 베이컨(1561-1626)은 “인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그 법칙을 사색하는 한에서만 그것의 상당 부분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뭔가를 할 수 있다.”
모든 지식은 경험인 ‘격물’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그 격물에는 ‘직접적 격물’뿐만 아니라 ‘간접적 격물’도 포함됩니다. ‘직접적 격물’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고, ‘간접적 격물’은 다른 이가 경험을 통해 남긴 기록을 접하는 간접적 경험 방식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동시에, 동시대 사회구성원 각자의 경험 및 사고 활동을 통한 사회적 지식 축적 역시 같은 속도로 늘어납니다. 사람들은 하루 24시간의 시간적 한계로,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보는’ 직접적 경험 또는 직접적 격물 방식으로 모든 지식을 다 추구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필요한 지식을 독서나 강의 등 간접적 격물 방식을 통해 얻으면 되고 또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적인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수 없는 지식들이 있습니다. 바로 ‘암묵지(Tacit knowledge)’에 속한 것들입니다.
지식은 그 내용을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형식지(Explicit knowledge)’와 ‘암묵지(Tacit knowledge)’로 나뉩니다.
《장자(외편)》 〈천도〉 편에서 윤편이라는 목수가 제나라 환공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바퀴통이 헐거우면 단단하지 못하고, 반대로 빡빡하면 들어가지 않는다. 헐겁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으로 터득하고 느낌으로 알뿐,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정확히 ‘암묵지(Tacit knowledge)’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손기술, 운동, 예능처럼 ‘몸(오감) 기억’을 필요로 하는 지식은 기본적으로 암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문자나 언어로 표현하고 또 의식으로 그것들을 기억하더라도 몸 감각이 그것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면 문자, 언어 그리고 의식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영은 직접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 지식이고, 바이올린 연주는 직접 활로 현을 켜 소리를 내는 것이 지식이지, 헤엄치는 방법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에 대한 머릿속 암기는 그것들에 대한 지식의 본령이 아닙니다.
◇부처가 꽃을 들자, 가섭이 말없이 미소 짓다
불교 선 수행법의 연원은 부처의 영산 설법입니다. 부처가 영산에서 설법할 때 ‘연꽃을 손에 들고 제자들에게 보여주자(拈華示衆염화시중)’ 제자 중 가섭이 ‘부처님 손안의 꽃을 보고 말없이 미소 짓습니다(拈華微笑염화미소)’. 그 순간 말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르침이 전해져(以心傳心이심전심)’, 가섭이 ‘자신의 마음속 불성을 본 순간 바로 깨달음을 얻습니다(見性成佛견성성불)’.
깊은 깨달음과 같은 ‘심오한 의식작용’이나 극한의 슬픔,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같은 ‘극한적인 감성 작용’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과 같은 ‘심오한 의식작용’은 화두, 참선과 같은 특별한 수단을 통해 수행자 스스로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지혜가 전달됩니다. 또 ‘극한적인 감성 작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라든지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같은 표현처럼,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 없는 ‘암묵지’라는 것을 직접 드러내는 방식으로 극한의 상태를 묘사하기도 합니다.
같은 부류는 대체로 서로 닮으니, 어찌 유독 사람에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인류 역사 내내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사고 활동에 의해 축적된 지식인 형식지를 통한 간접적 경험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시작하는’ 격물입니다. 간접적 경험의 대표적인 방식은 독서와 강의 청취입니다. 독서는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지식 습득 방식입니다. 아울러 그런 효율적인 수단인 만큼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 또 독서입니다.
강의 청취는 가장 손쉽게 해당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반면 손쉽게 습득되는 만큼 비판적 수용과 자기 생각이 배제되기 쉽습니다. 듣는 데 집중하다 보면 따져볼 여유 없이 강사의 말 따라가기에 급급하게 되고 또, 그 주장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직접적 경험을 통한 지식은 생생하고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이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시간과 수고 그리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 관건은 사실 지식 습득의 방법보다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개인 간 보유 지식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지식 습득의 방법이 아닌, 지식을 습득하는 개인의 태도 차이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식 습득에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모두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주어진 상황에 따라 현실에서 자신에게 적절한 지식 습득 방법을 선택할 여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태도에 있어 첫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개인 간 자질 차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서입니다.
맹자는 《맹자》〈고자장구상〉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체로 같은 부류의 것들은 모두 서로 닮으니 어찌 유독 사람에 있어서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마땅히 성인聖人도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BC106-BC43)는 《법률론》 〈제1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이라는 그 하나로 우리가 짐승보다 훌륭하고, 그 이성으로 우리는 추정을 하고 논증을 하고 반박을 하고 토론을 하고 무엇인가 작성하고 결론에 이르는데, 바로 그 이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다는 말일세. 비록 지식이 다르다 할지라도 배우는 능력만큼은 동등하다는 말일세.”
동서양 두 현자의 주장 모두 사람의 이성 능력에 개인 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 부족에 대해 ‘나는 원래 머리가 나빠’, ‘그 친구는 타고 났잖아’와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 합리화, 자기 핑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식 습득 태도에 있어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노력하는 자세에 대해서입니다. 《중용》 〈제20장〉에 실린 내용입니다.
“처음부터 배우지 않을지언정 일단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면 능숙해질 때까지 그만두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묻지 않을지언정 일단 묻기 시작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때까지 묻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일단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확실하게 파악될 때까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따지지 않을지언정 일단 따지기 시작했다면 명료해질 때까지 따지기를 그만두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행동에 나서지 않을지언정 일단 행동에 나섰다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재능 있는 이들이 한 번에 해낸다면 자신은 열 번을 하고 재능 있는 이들이 열 번에 해낸다면 자신은 천 번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리석은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현명해질 것이며, 유약한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 특별한 왕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꾸준한 노력만이 결과를 만들어 내고, 스스로 재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그것 또한 노력을 배가하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 자기 밭은 팽개쳐두고 남의 밭의 김을 매는 이들
세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맹자는 《맹자》 〈진심장구하〉 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의 병통은 자기 밭은 팽개쳐두고 남의 밭의 김을 매는 것이니,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중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일은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인생에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돌보는 데 쓰지 않고 다른 이들의 삶을 참견하는 데 허투루 사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부정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에. 그렇게 되면 정작 자신을 위해 써야 할 시간과 에너지에는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결핍을 주장합니다. ‘시간이 없어’, ‘난 너무 바빠’와 같은 언어습관으로.
자기 밭의 잡초는 팽개치고 남의 밭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자기 삶에 정면으로 맞닥트리기를 두려워해서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지려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거죠.
A. 스미스는 《도덕감정론》 〈제2장 칭찬받는 것과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함〉 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슴 속에 있는 반신반인(demigod)은 시인들이 말하는 반신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신의 혈통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혈통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반신반인의 판단이 칭찬할 가치가 있는 것과 비난받아 마땅한 것을 구별하는 정확한 감각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방향이 지워질 때에는, 그는 자기의 신의 혈통에 맞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불완전한 이성’을 지니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완전한 이성’을 향해 달려나가야 할 자발적 의무를 갖습니다. 창조론이든 진화론이든 다 그렇습니다. 조물주가 있어, 불완전한 이성적 존재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피조물 스스로의 의지로 완전한 이성인 조물주를 향하라는 의도이지 비이성적 존재인 미물로 전락하라는 의도일 수 없고, 인류 역사 전체를 두고 볼 때도 그것은 이성 완성을 향한 진화의 장도長途였지 그 반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이성’으로서의 인간은 마땅히 그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의 이성 향상에 매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