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고전으로 세상읽기 ④ 치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근본적으로 깨달아야

“‘격물(格物)’은 ‘단지 하나의 사물에 다가가 그 한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궁구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곧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해 얻음으로써 나의 지식이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격물이 ‘사물 하나 하나’(예, 철수네 집 대나무, 영희네 집 대나무)에 다가가 그 사물들의 이치를 직접 살피는 것’이라면, 치지는 ‘자신의 생각을 통해 그 각각의 사물을 관통하는 하나(‘대나무’라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지식 축적과 함께 이성의 힘을 키우는 구체적 방법인 ‘생각하기’의 ‘치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알아보는 순서는 첫째, ‘생각- 생각하는 존재, 인간’, 둘째, ‘추리- 생각은 추리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이성의 날’입니다. ◇사고실험을 통해 발견된 생각 상대성 이론은 실험실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특허국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버는 돈은 저녁때나 일요일에 선술집에 들러 썼으며 한가로운 산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 데 보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가끔씩 쉬는 시간이 생길 때면 사무실 책상 서랍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서는 뭔가 갈겨쓰곤 했습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그 서랍을 자신의 ‘이론 물리학과’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풀릴 듯하면서도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뭔가가 있어서 답답했다. 그날 밤도 여전히 그걸 알아내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는 매우 흥분되어 있었다. ”고 했습니다. 이후 그는 대여섯 주 만에 38장의 논문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그 논문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시작이었습니다. 상대성이론(Theory of relativity)은 실험실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머릿속 ‘생각’에서 탄생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짬이 날 때마다 그리고 자신의 집 침대에서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결론이 날 때까지 끝까지 파고든 끝에 마침내 찾아낸 것이 ‘E=mc²’입니다. 머릿속 ‘생각’으로 하는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을 통한 자연과학의 위대한 발견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많은 원리와 이론들이 순수한 ‘생각’인 사고실험에서 시작되거나 사고실험을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인문학, 사회과학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이 실험실이 아닌 ‘사고실험’, 즉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유의 출발인 공자와 플라톤의 주장들이 ‘생각’으로부터 나왔고, 중세 주희의 신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생각’에서 나왔고, 근대를 선도한 홉스, 로크, 루소의 자유주의 사상들이 당연히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주희는 ‘대학’의 ‘경문1장’ 해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지(知至)는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상태는 어떤 의문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답이 나올 때까지 그 이상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거기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물론 그 ‘생각’에는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핵심은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료를 찾아봐야 할지, 무엇을 먼저 알아봐야 할지 등에 대한 답도 모두 스스로의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생각은 인간의 본질적인 행위 작가인 한 지인은 오래전 자신이 쓴 글을 읽고 한 번씩 놀랄 때가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흥미로운 관점을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멋진 표현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아무리 봐도 자신이 쓴 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런 특별한 관점, 그런 멋진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글을 쓸 때 그는 그 이상의 새로운 관점, 그 이상의 멋진 표현을 또 생각해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일단 글쓰기에 들어가면 작가는 해당 주제에 자신의 에너지와 모든 생각을 집중합니다. 운동하면서도 그 주제를 떠올리고, 식사하면서도 그 주제를 새기고, TV를 시청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여전히 그 주제로 꽉 차 있습니다. 들리는 것, 보이는 것, 느끼는 것,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그 주제로 연결됩니다. 당연히 평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기발한 아이디어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고, 또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과정에서 놀라운 아이디어 확장이 일어납니다. 글 쓰는 것만이 아닌 다른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심코 지나칠 때와 집중적으로 ‘생각’할 때의 결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 ‘다방’ 편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어리석은 이라 할지라도 생각을 하게 되면 성인(聖人)이 된다.” 오늘날의 일상적 표현으로 바꾸어보면, ‘일류대를 졸업하고 초일류 회사에 들어간 이라 할지라도 오랫동안 시키는 일만 하면서 깊이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간판밖에 내세울 것 없는 일류 바보가 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쌓여 지혜를 갖춘 현명한 이가 된다’ 정도 내용이 되겠습니다. 어떤 다른 것도 아닌, ‘생각’하는 습관 여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지혜로운 이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어리석은 이로 퇴보시키기도 합니다. 그대가 이 꽃을 보았을 때 꽃은 비로소 그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었으니 사실 ‘생각’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대한 발견이나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한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행위입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인간적’입니다. 시인 김춘수는 시 ‘꽃’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이하 생략) 시인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그냥 의미 없는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시인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꽃’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관심, 사람의 생각이 무의미를 의미로 바꿉니다. 주희의 성리학과 대립해 ‘마음(心·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왕양명도 일찍이 ‘꽃’으로 생각의 의미를 나타냈습니다. ‘전습록’ ‘황성증의 기록’ 편에서 한 사람이 왕양명에게 묻습니다. “선생께서는 천하에 마음 밖의 사물이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깊은 산 속에서 저 홀로 피고 지는 꽃은 제 마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왕양명이 답합니다. “그대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이 꽃은 그대 마음과 같이 그냥 적막 그 자체였다. 그대가 이 꽃을 보았을 때 꽃은 비로소 그 모습을 환하게 드러내었으니, 곧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산속에 그냥 저 혼자 피고 지는 꽃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인식되었을 때 비로소 꽃은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으로 존재합니다. 앞의, 시인이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비로소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의 생각이 무엇인가를 향할 때 그것은 존재하고, 인간이 생각을 거두면 그 존재 역시 거두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하는 인간’ 또는 ‘인간의 생각’이 없다면 이 세상에 존재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지혜가 있는 사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은 무의미를 의미로 바꾼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새롭게 내놓은 자신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으로 표현합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천문학 관점을 바꾼 것처럼, 자신은 사물에 대한 사람의 인식 관점을 기존의 ‘사물 중심(객관)’에서 ‘인간 중심(주관)’으로 전환시키는 ‘사고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사물은 사람의 오감(五感)에 닿아 저절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성’과 ‘지성(또는 오성, Verstand)’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감성’과 ‘지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사물 자체가 실제 존재하더라도 인식될 수 없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동기 작가(경영학 박사) 신동기인문경영연구소 대표 칸트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감성’은 인간에게 선험적(Transcendental)으로 주어진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개의 주관적 직관 형식’으로 대상 사물의 ‘현상(現象·사물 자체가 아닌 사물의 바깥 모양·Erscheinung)’을 수용합니다. 이어 ‘지성’은 이 수용된 ‘현상’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12가지의 범주를 적용해, 그 현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감각 경험적 인식의 ‘개념화’ 과정에서 ‘지성’은 ‘판단’을 합니다. ‘사물 현상의 개념화를 위한 사고 형식’인 12가지 ‘범주’는 ①양과 관련된 3가지, ②질과 관련된 3가지, ③관계와 관련된 3가지 그리고 ④양태와 관련된 3가지, 총 12가지입니다.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들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 본인의 주장대로, 칸트에게 있어 사람의 ‘인식’은 언제나 ‘감성’을 통해 수용된 ‘현상’과 ‘지성’을 통해 판단된 ‘개념’, 이 둘의 종합을 거쳐 완성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무의미를 의미로 바꿉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없다면 만물은 그냥 적막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이 ‘생각’하기를 게을리한다면 이때 역시 만물은 그 존재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사람이 치열하게 궁구해, 끝 모를 심연 저 깊은 곳까지 그 생각이 이를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자신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2025-02-09

고전으로 세상읽기 ③ 세상의 이치 어떻게 잘 알 수 있을까

서양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 F. 베이컨(1561-1626)은 “인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그 법칙을 사색하는 한에서만 그것의 상당 부분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뭔가를 할 수 있다.” 모든 지식은 경험인 ‘격물’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그 격물에는 ‘직접적 격물’뿐만 아니라 ‘간접적 격물’도 포함됩니다. ‘직접적 격물’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고, ‘간접적 격물’은 다른 이가 경험을 통해 남긴 기록을 접하는 간접적 경험 방식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지식은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동시에, 동시대 사회구성원 각자의 경험 및 사고 활동을 통한 사회적 지식 축적 역시 같은 속도로 늘어납니다. 사람들은 하루 24시간의 시간적 한계로, ‘자신이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보는’ 직접적 경험 또는 직접적 격물 방식으로 모든 지식을 다 추구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필요한 지식을 독서나 강의 등 간접적 격물 방식을 통해 얻으면 되고 또 대부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직접적인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얻을수 없는 지식들이 있습니다. 바로 ‘암묵지(Tacit knowledge)’에 속한 것들입니다. 지식은 그 내용을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형식지(Explicit knowledge)’와 ‘암묵지(Tacit knowledge)’로 나뉩니다. 《장자(외편)》 〈천도〉 편에서 윤편이라는 목수가 제나라 환공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바퀴통이 헐거우면 단단하지 못하고, 반대로 빡빡하면 들어가지 않는다. 헐겁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으로 터득하고 느낌으로 알뿐,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정확히 ‘암묵지(Tacit knowledge)’ 개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손기술, 운동, 예능처럼 ‘몸(오감) 기억’을 필요로 하는 지식은 기본적으로 암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문자나 언어로 표현하고 또 의식으로 그것들을 기억하더라도 몸 감각이 그것들을 기억해내지 못하면 문자, 언어 그리고 의식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영은 직접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이 지식이고, 바이올린 연주는 직접 활로 현을 켜 소리를 내는 것이 지식이지, 헤엄치는 방법 그리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방법에 대한 머릿속 암기는 그것들에 대한 지식의 본령이 아닙니다. ◇부처가 꽃을 들자, 가섭이 말없이 미소 짓다 불교 선 수행법의 연원은 부처의 영산 설법입니다. 부처가 영산에서 설법할 때 ‘연꽃을 손에 들고 제자들에게 보여주자(拈華示衆염화시중)’ 제자 중 가섭이 ‘부처님 손안의 꽃을 보고 말없이 미소 짓습니다(拈華微笑염화미소)’. 그 순간 말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르침이 전해져(以心傳心이심전심)’, 가섭이 ‘자신의 마음속 불성을 본 순간 바로 깨달음을 얻습니다(見性成佛견성성불)’. 깊은 깨달음과 같은 ‘심오한 의식작용’이나 극한의 슬픔,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같은 ‘극한적인 감성 작용’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과 같은 ‘심오한 의식작용’은 화두, 참선과 같은 특별한 수단을 통해 수행자 스스로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지혜가 전달됩니다. 또 ‘극한적인 감성 작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라든지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같은 표현처럼,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 없는 ‘암묵지’라는 것을 직접 드러내는 방식으로 극한의 상태를 묘사하기도 합니다. 같은 부류는 대체로 서로 닮으니, 어찌 유독 사람에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인류 역사 내내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사고 활동에 의해 축적된 지식인 형식지를 통한 간접적 경험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시작하는’ 격물입니다. 간접적 경험의 대표적인 방식은 독서와 강의 청취입니다. 독서는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지식 습득 방식입니다. 아울러 그런 효율적인 수단인 만큼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 또 독서입니다. 강의 청취는 가장 손쉽게 해당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반면 손쉽게 습득되는 만큼 비판적 수용과 자기 생각이 배제되기 쉽습니다. 듣는 데 집중하다 보면 따져볼 여유 없이 강사의 말 따라가기에 급급하게 되고 또, 그 주장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직접적 경험을 통한 지식은 생생하고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이 유지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시간과 수고 그리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 관건은 사실 지식 습득의 방법보다 지식을 습득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개인 간 보유 지식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지식 습득의 방법이 아닌, 지식을 습득하는 개인의 태도 차이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식 습득에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모두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 주어진 상황에 따라 현실에서 자신에게 적절한 지식 습득 방법을 선택할 여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태도에 있어 첫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개인 간 자질 차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대해서입니다. 맹자는 《맹자》〈고자장구상〉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체로 같은 부류의 것들은 모두 서로 닮으니 어찌 유독 사람에 있어서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마땅히 성인聖人도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BC106-BC43)는 《법률론》 〈제1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이라는 그 하나로 우리가 짐승보다 훌륭하고, 그 이성으로 우리는 추정을 하고 논증을 하고 반박을 하고 토론을 하고 무엇인가 작성하고 결론에 이르는데, 바로 그 이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있다는 말일세. 비록 지식이 다르다 할지라도 배우는 능력만큼은 동등하다는 말일세.” 동서양 두 현자의 주장 모두 사람의 이성 능력에 개인 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 부족에 대해 ‘나는 원래 머리가 나빠’, ‘그 친구는 타고 났잖아’와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 합리화, 자기 핑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동기 작가(경영학 박사) 신동기인문경영연구소 대표 지식 습득 태도에 있어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노력하는 자세에 대해서입니다. 《중용》 〈제20장〉에 실린 내용입니다. “처음부터 배우지 않을지언정 일단 무엇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면 능숙해질 때까지 그만두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묻지 않을지언정 일단 묻기 시작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때까지 묻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일단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확실하게 파악될 때까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따지지 않을지언정 일단 따지기 시작했다면 명료해질 때까지 따지기를 그만두지 않아야 할 것이며, 처음부터 행동에 나서지 않을지언정 일단 행동에 나섰다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재능 있는 이들이 한 번에 해낸다면 자신은 열 번을 하고 재능 있는 이들이 열 번에 해낸다면 자신은 천 번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리석은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현명해질 것이며, 유약한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 특별한 왕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꾸준한 노력만이 결과를 만들어 내고, 스스로 재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그것 또한 노력을 배가하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 자기 밭은 팽개쳐두고 남의 밭의 김을 매는 이들 세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맹자는 《맹자》 〈진심장구하〉 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의 병통은 자기 밭은 팽개쳐두고 남의 밭의 김을 매는 것이니,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중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일은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인생에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돌보는 데 쓰지 않고 다른 이들의 삶을 참견하는 데 허투루 사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부정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에. 그렇게 되면 정작 자신을 위해 써야 할 시간과 에너지에는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 결핍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결핍을 주장합니다. ‘시간이 없어’, ‘난 너무 바빠’와 같은 언어습관으로. 자기 밭의 잡초는 팽개치고 남의 밭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자기 삶에 정면으로 맞닥트리기를 두려워해서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지려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거죠. A. 스미스는 《도덕감정론》 〈제2장 칭찬받는 것과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함〉 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슴 속에 있는 반신반인(demigod)은 시인들이 말하는 반신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신의 혈통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혈통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반신반인의 판단이 칭찬할 가치가 있는 것과 비난받아 마땅한 것을 구별하는 정확한 감각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방향이 지워질 때에는, 그는 자기의 신의 혈통에 맞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불완전한 이성’을 지니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나 ‘완전한 이성’을 향해 달려나가야 할 자발적 의무를 갖습니다. 창조론이든 진화론이든 다 그렇습니다. 조물주가 있어, 불완전한 이성적 존재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피조물 스스로의 의지로 완전한 이성인 조물주를 향하라는 의도이지 비이성적 존재인 미물로 전락하라는 의도일 수 없고, 인류 역사 전체를 두고 볼 때도 그것은 이성 완성을 향한 진화의 장도長途였지 그 반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이성’으로서의 인간은 마땅히 그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의 이성 향상에 매진해야 합니다.

2025-01-12

고전으로 세상읽기 ② 격물(格物), 사물의 이치를 파고 들다

인간의 이성 능력 향상에 있어 그 출발인 ‘경험’ 또는 ‘사실 관찰’을 뜻하는 ‘격물(格物)이 있습니다. 격물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네가지 단계로 인식이 넓어져야 합니다. 먼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사물)가 필요하고 ‘어떻게 잘 알 수 있는가?’(태도) 이성은 왜 윤리와 지식이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이름을 이해하라(정명)고 고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안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 ‘사람의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주희는 ‘주자어류’ 〈대학이경하〉 편에서 “격물에서의 물(物)은 사물(事物)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사물’의 사전적 의미는 ‘일과 물건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사’는 ‘일 사(事)’라는 한자 의미 그대로 능동적 작용인 ‘인간의 행위’를 말하고, ‘물’은 한자 의미 그대로 수동적 대상인 ‘자연적 물질’을 말합니다. 율곡 이이는 ‘성학집요’ 〈궁리〉 편에서 “자연과 사람의 이치는 당연히 모두 파고들어야 한다. 다만 자연은 그 범위가 매우 넓어 간략히 말하고, 사람에게 있는 이치는 긴요하고 절실해 상세히 말한다 - 중략- 가까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유추해 끝까지 확장해 나가면 ‘한 자연의 세밀한 부분’이나 ‘한 사람의 작은 행위’까지 그 이치를 통찰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물에 다가가 그 사물의 이치를 파고드는 ‘격물’은 다름 아닌 ‘사람에 대한 이치’와 ‘자연에 대한 이치’, 즉 학문의 범주로 말하면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대상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흔히 단순한 앎, 지식, 과학, 지혜 차원으로 단계를 나눠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앎’은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은 간접적인 배움이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갖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를 말합니다. 이런 지식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보편성과 객관성을 확보하고 체계를 갖추면 ‘과학’이 됩니다. 지혜는 ‘이치에 맞게 적절하게 일을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을 의미하며, 때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지식이나 과학의 범주를 넘어선 질문에 대한 해법 제시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과학은 대상에 따라 크게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는 ‘자연과학’만을, ‘넓은 의미’로는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모두를, 또 때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만을 ‘과학’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과학의 범주가 들쑥날쑥한 것은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라는 ‘과학’의 정의에 사실은 ‘자연과학’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둘은, 둘 중에서도 특히 ‘인문과학’은 이 정의와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사실의 관찰과 실험에 의한 합리성과 실증성 확보에 ‘자연과학’은 전형적으로 충실하지만, 뒤의 ‘인문과학’ 쪽으로 갈수록 그 충실도는 크게 떨어집니다. 세 분야 사이에 그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자연과학’의 대상인 ‘자연’은 물질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인과관계에 있어 기계적인 반면, ‘인문과학’의 주요 대상인 ‘인간’은 의지적이고 심지어 때로는 창조적이기까지 해 규칙화할 수 없고 객관화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문과학’을 보통 ‘인문과학’이라 하지 않고 흔히 그냥 ‘인문학’이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집단인 사회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중간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연구 대상인 사람들의 사회적 행위가 반드시 사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자연인 물질도 함께 개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경제학’과 같은 경우, 사람들의 행위가 연구의 중심이기도 하지만 그 행위가 재화와 관계되는 만큼 당연히 물질인 재화도 함께 연구 대상이 됩니다. 학문 범주 설정에 있어서의 모호함은 ‘자연’의 속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 측면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인문학’ 입장에서도 발생합니다. ‘인간’의 속성과 문화 등에 대한 지식을 다룰 때 직접적으로는 인간과 인간의 문화만이 그 대상이지만 넓게 보면 사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 역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신들의 의지와 창조의 대상으로 삼는 ‘자연’도 관련이 전혀 없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문학’의 영역을 따질 때 좁은 의미로는 그 범주가 ‘인문과학’에 한정되지만, 넓은 의미로는 ‘사회과학’, 심지어 ‘자연과학’까지 포함되기도 합니다.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살피는 ‘격물’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이치’, 즉 ‘인문과학’과 ‘자연에 대한 이치’, 즉 ‘자연과학’의 기본 지식들입니다. 그리고 둘의 혼합이라 할 수 있는 ‘사회과학’의 기본 지식 역시 격물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사물에 다가가 그 이치를 살피는’ 격물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먼저 민주 국가의 주인 된 자로서 ‘시민 역할을 올바로 하기 위한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 핵심 가치들에 대한 개념적·역사적 명확한 지식, ‘권리와 의무의 균형’에 대한 체화된 지식과 같은 것들이 그것들입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와 같은, 남북 간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구분 및 각각의 장단점, 경제체제(자본주의 vs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정치체제(민주주의 vs 전체주의)의 구별에 대한 내용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정치는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환경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그 정치 환경은 결국 주권자인 시민들 스스로가 정합니다. 따라서 21세기 우리나라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핵심 개념들과 남북 간 대치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이 땅에서 주권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 그리고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일들입니다. 정치와 관련된 지식들은 주로 ‘사회과학’에 해당되고, 그 원리나 역사적 배경은 철학, 역사 등의 ‘인문학’이 담당합니다. 두 번째로 ‘자신과 가족 부양을 위한 경제 능력 확보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21c 보편적 경제 환경은 시장경제(Market economy)입니다. 시장경제에서는 누구나 모두 상인입니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시장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팔아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영위합니다. 재능은 그것이 기술이든 지식이든 경쟁력 또는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을 때 비로소 시장에서 거래됩니다. 따라서 현대인은 모두 생계를 위해 자신의 재능과 관련된 전문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전문가로서의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포기해야 하거나 심한 경우 생계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전문지식은 생계와 관련된 재능의 분야에 따라 그 주요 영역이 ‘자연과학’이거나 ‘사회과학’ 또는 ‘인문학’일 수 있습니다. 한 사회 속 사람들의 욕구와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또 삶의 수준이 생존 지향에서 가치·의미 지향적으로 바뀌어 가면서 생계 관련 전문지식의 영역은 ‘자연과학’에서 ‘사회과학’으로, 그리고 또 ‘인문학’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신동기 작가(경영학 박사) 신동기인문경영연구소 대표 세 번째로 문화 또는 인간의 근원과 관련된 지식 또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오로지 황금만을 향해 달리지도 않습니다. 아름다움, 공감, 염치, 자존감, 인정, 공존, 명예, 자기희생, 자기만의 삶의 의미와 같은, 다른 동물들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정신적 가치 추구는 그 가치 추구 자체로 본인 스스로 행복해지고 또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때로는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거나 인간 합리성의 한계를 보완함으로써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정신적 가치와 관련된 지식 또는 지혜는 주로 인문학이 제공합니다. 인문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원리와 근본을 돌아보게 하고, 자연과학·사회과학에 새로운 관점, 긴 호흡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동물 아닌 인간답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두루 건강할 때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각자 자신만의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적 시민’이 되어야 하고, ‘자립 능력을 갖춘 경제인’이 되어야 하고,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교양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성’과 ‘자립 능력’, ‘교양’은 ‘무엇인가를 아는 것’, ‘격물格物’로부터 시작됩니다.

2025-01-05

국민의 행복증진이 정치의 목적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지혜가 필요할 때 의외로 답은 고전에 숨어 있습니다. 선조들의 빛나는 통찰과 지혜는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정곡을 찌릅니다. 세상살아가는 이치는 어찌보면 동일한 것이기 때문일까요? 오랫동안 인문학 스타강사로 활동했던 신동기 박사의 고전으로 알아보는 세상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생각의 높이가 커져야 사회가 발전합니다. 세상을 향한 깊은 통찰을 담은 고전에서 삶의 실마리를 푸는 단초를 발견하기를 기대합니다. 고전은 우리에게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자세를 요구합니다. ‘옛것을 익혀 거기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바로 공자의 그 온고이지신입니다. 정치론은 윤리 수준에 머물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서에 속하는 ‘맹자’에서는 정치를 현실적·논리적으로 다루고, 공자 역시 ‘논어’에서 정치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민주주의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맹자는 ‘맹자’ 〈진심장구하〉 편에서 말합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이 그다음이고, 임금이 마지막이다.” 나라의 주인은 결국 백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맹자는 백성들의 뜻을 좇는 것이 정치라 말하고 있습니다. “걸·주 임금이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백성을 잃은 것은 바로 백성들의 마음을 잃었다는 것이다. 천하를 얻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백성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곧 백성을 얻은 것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백성이 바라는 것을 백성과 함께 행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 맹자 당시는 신분제 왕정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신분제 사회라 할지라도 양심 있는 지식인이라면 시대·상황 불구하고 ‘사실’과 ‘논리’를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 안에 스며있는 올바른 이성’에 근거하는 자연법 사상에서 처럼, ‘정치’를 ‘그 땅에 몸을 붙이고 사는 백성이 주인이다’라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통하는 개념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공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맹자’〈만장장구하〉 편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벼슬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가난 때문이기도 하며, 결혼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봉양 때문이기도 하다.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벼슬을 하는 자는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물 것이며, 높은 급여를 사양하고 낮은 급여에 머물러야 한다.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물고 높은 급여를 사양하고 낮은 급여에 머무르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바로 문지기나 야경꾼과 같은 직책을 맡는 것이다.” 공직을 맡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원칙적으로 이 말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장차관·지방자치단체장 등과 같은 고위직, 검·판사 등의 판관, 국회의원·광역 혹은 기초의회 의원과 같은 공직에는 맞는 말입니다. 국가 살림을 맡으면서 수많은 이들의 삶을 돌보고, 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신의 위치에서 인간의 선악을 재단하고, 한 사회의 대원칙을 정하는 것과 같은 일은 숭고하면서도 사람들 중 극히 일부만이 갖는 매우 특별한 명예입니다. 돈을 벌 욕심이면 마땅히 자기 사업에 나서야 할 일이고, 먹고 살기 위해 공직을 선택했다면 그냥 낮은 자리에 만족해야 합니다. 고위직의 재량권이나 판관직의 재량 및 판결권을 선물로 거래하거나 전관예우로 장사하고, 나라의 규칙을 정하고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개재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국가 시스템을 교란하고 국가자산 횡령, 국민복지를 훼손하는 중대 범죄입니다. ‘국가로부터 주어진 지위를 팔아 사익을 취한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나라를 파는 반국가적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학》〈전문10장〉에서 맹헌자라는 인물이 말합니다. “수레를 타는 대부는 닭이나 돼지 키우는 데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한여름 대사 때 얼음을 쓸 수 있는 경대부는 소나 양을 키우는 데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 (畜馬乘 不察於雞豚 伐冰之家 不畜牛羊) 높은 공직을 맡는 것은 비즈니스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높은 뜻을 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 번째, 국민의 단결에 대해서입니다. 정치인들은 국가 위기 시 흔히 국민의 일치단결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국민의 일치단결은 요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서 저절로 되든지 안되든지 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맹자’ 〈양혜왕장구상〉에서 양혜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영대를 만들 계획을 세워 일에 착수하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하루가 안되어 영대가 완성되었구나. 계획할 때 너무 서둘지 말라 하였거늘 백성들이 나서서 하루 만에 일을 마쳤도다’ 하였습니다. ·중략 ·문왕이 백성들의 노고로 누대를 세우고 연못을 만들었는데 백성들이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여 누대를 영대라 하고 연못을 영소라 부르며, 왕이 사슴·물고기·자라 키우는 것을 즐겁게 여겼으니, 옛사람은 백성과 함께 즐겼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일치단결’은 그 일이 ‘옳고’, 기본적으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 나옵니다. 주왕조의 기틀을 다진 문왕은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누각을 세우고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누각과 연못을 서둘러 만들었고 그 규모가 작다고들 했습니다. 자기 것을 자기가 만드는 데 그 누가 기쁜 마음으로 나서지 않고, 그 누가 만들기를서둘지 않겠습니까? 네 번째, 일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입니다. 증자가 《중용》 〈제20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은 미리 대비하면 제대로 이루어지고 대비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말할 것을 미리 정해 놓으면 차질이 없고, 일할 것을 미리 정해 놓으면 곤란할 일이 없고, 움직일 것을 미리 정해 놓으면 골치 아플 일이 없고, 방법을 미리 정해 놓으면 궁지에 몰릴 일이 없다.” 사람이 일반 동물과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이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성’의 핵심은 ‘논리와 사실’에 입각한 ‘추리’ 능력입니다. 자연은 인과관계가 선명합니다. 사회는 어느정도 인과관계적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이 예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과관계를 이용해 자연과 사회의 변화를 합리적으로 예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 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으면, 가까운 날에 반드시 근심할 일이 생긴다.” 합리적인 예측을 통해 미리 대비하는 것이 일을 잘 하기 위한 상책입니다. 물론 합리적인 예측 이전에 먼저 그렇게 예측하려고 평소 신경을 쓰고 노력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필자 신동기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산업리스(주) 및 동사 일본 현지법인인 KDB Lease (Japan) Co., Ltd.에서 리스금융, 국제금융을 담당하였다. 팀장 퇴직 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청계서당 연수과정(2년)을 수료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인문학 범주화(15가지 주제)를 시도해 기업·정부기관·대학·방송 등에서 강의해 왔다. 2008-16년 신구대학교 글로벌경영과 겸임교수, 2019-20년 건국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로 〈신동기의 인문학 15개 주제〉를 강의하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2023 독서경영 우수직장 인증 사업』 기획위원 및 심사위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부모의 인성 공부》《아주 낯익은 지식들로 시작하는 인문학 공부》《오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공저)《울림》《SNS인문학》(공저)《이 정도는 알아야 할 정치의 상식》《오래된 책들의 생각》《생각여행》《네 글자의 힘》《독서의 이유》《해피노믹스》《인문경영으로 리드하라》《회사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깨는 인문학적 생각들》《인문학으로 스펙하라》《미래사회 리더의 경영 키워드》《직장인이여 나 자신에게 열광하라》가 있다. 그 외 다수의 오디오북과 《진순신의 삼국지 이야기》《나는 사람에게 투자한다》 등 18종의 번역서가 있다.

202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