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강아지가 단풍잎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단풍잎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강아지 주변을 맴돌았고, 강아지는 잎사귀가 장난감인 듯, 꼬리를 흔들며 뛰어올랐다. 그 작은 생명이 온 마음을 다해 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미소가 번졌다.
그것도 잠시,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인이 키우던 개가 생각났다. 개의 이름은 나미로 11살이었는데 사람 나이로는 78세였다. 나미는 지인이 키우던 두 번째 개였다. 한 번 상실의 아픔을 겪고는 두 번 다시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들어온, 작은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미는 그녀의 친척이 키우던 개였다. 친척이 병에 걸려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녀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다시 반려견과 살게 되어 너무 좋았단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이가 많은 나미와 얼마 못 가서 이별하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생을 마감할 것이므로, 자신의 품에 있을 때 많이 사랑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말로 나미를 정성껏 돌봐주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해 주었다. 나미도 진심을 느꼈는지, 그녀의 곁에서 한없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세상에 지쳐 돌아오면 조용히 다가와 손을 핥아 주었고, 그녀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믿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그녀 집에 온지 2년 하고 반년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나미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했는데, 수의사 선생님께서 나미가 구강암에 걸렸다고 했단다. 친척도 몰랐던 이야기여서 그녀는 많이 놀라고 당황스럽고 슬펐다.
병원에서는 나미가 항암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기적을 바라며 항암 주사를 맞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나미가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안타깝게도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생겼다. 항암 주사를 맞는 개들에게는 2개에서 3개씩 부작용이 올 수 있단다. 그런데 나미에게는 개가 걸릴 수 있는 모든 부작용이 와버렸던 것이다.
나미는 점점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잘 먹던 사료도 안 먹고 좋아하던 소시지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나미를 지켜보던 그녀의 시간은 외로움과 아픔의 순간들로 가득 차올랐다. 그 작은 몸이 항암 치료의 부작용에 힘겨워하던 모습은 그녀를 절망감에 물들게 했다. 나미의 삶이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그녀는 눈물로 하루를 적셨다.
나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날,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단다. 이제 그만 고통 없는 곳으로 가라고, 먼저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말을 마치자마자 나미는 눈을 감았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 안 구석구석에는 나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미가 좋아하던 담요는 아직 소파 위에 있었고, 간식 그릇은 부엌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쉽게 흔적을 지울 수가 없단다. 아니, 지우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추억들이 햇살처럼 쏟아져 내릴 때가 있단다. 기뻤던 순간, 슬펐던 순간이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선택할 여지가 없이, 무방비로 떠오르는 순간이 있기에 아직은 흔적을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나미를 돌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흔적들은 그녀에게 단순한 기억 이상의 것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 나름대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이 내 옆에 머무르는 시간이 아니라, 그 존재가 내 삶에 남긴 흔적과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미가 남긴 흔적들은 지금도 그녀의 삶을 감싸고 있다. 그녀의 인생길에 허방이 많을지라도 추억이 응축된 사랑의 흔적들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녀가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되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