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한동훈 비대위, ‘통합의 리더십’ 명심하길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그저께(26일) 비대위원장 수락연설에서 4·10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선민후사(先民後私)를 실천하겠다. 지역구에도, 비례대표로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 자신이 앞장서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며, 총선승리의 과실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밝힌 것이다. 기득권(당중진, 친윤·영남권 의원)으로 분류되는 국민의힘 의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적쇄신을 예고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그간 정치권에선 한 위원장이 수도권 험지, 또는 비례대표 후순위로 출마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한 위원장은 이날 연설에서 ‘방탄 논란’으로 리더십 문제가 제기되는 이재명 대표를 압박하는 발언도 수차례 했다. 그는 “우리는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과 달라야 한다.불체포 특권 포기를 약속한 후보만 공천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약속을 어기는 분들은 즉시 출당 등 강력히 조처하겠다”고 했다. 앞서 ‘인요한 혁신위’도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를 당에 요구했었다.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에 대해서는 “대통령과 여당, 정부는 헌법과 법률의 범위 내에서 각자 할 일을 하는 기관이다. 거기서 수직·수평적 얘기가 나올 게 아니다”라며 동반자 관계임을 명확히 했다. 총선승리를 위해 용산과는 별도로, 당 사령탑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한 위원장의 이날 취임사는 대부분 수긍이 가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제1야당 대표와 운동권(1980년대 학번·60년대생) 특권세력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비판은 앞으로 진영간 갈등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당장 민주당에서 “어떻게 취임일성으로 야당 대표에게 모독과 독설부터 뱉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지금 국민의힘은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 외연확대 없이는 총선승리가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이준석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의원과의 연대는 물론, 민주당과의 대화의 길도 모색해야 한다. 국민들은 ‘통합의 정치’를 실현하는 한동훈 비대위를 기대하고 있다.

2023-12-27

수(手)개표의 부활

홍석봉 대구지사장 2002년 6월 지방선거 때 전자개표가 첫 도입됐다. 당시만 해도 신세계였다. 유권자가 투표한 투표지를 전자개표기(투표지 분류기)에 넣으면 광학센서가 기표 내용을 인식, 후보자별로 그 결과를 자동 집계했다. 기표 오류 투표지만 개표 요원이 수(手)개표했다.전자 투·개표는 1948년 제헌국회 선거 이후 50년 이상 눈에 익은 개표장 풍경을 확 바꿨다. 개표 요원들이 밤을 새며 분류·합산하던 작업을 기계가 대체했다. 자동 개표기의 등장이다. 2020년 21대 총선에선 다시 수개표를 했다. 당시 비례대표 등록 정당 수가 역대 최대인 38개, 투표용지 길이만 51.9cm에 달해 투표지 분류기의 처리 한계를 넘어섰다. 할 수 없이 수개표로 진행한 것이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내년 4월 총선부터 전수 수(手)개표를 도입키로 했다. 전자개표 뒤 사람이 투표용지를 전수 검사하는 방식이다. 전자개표기가 부정선거에 악용된다는 의혹을 불식하기 위해서다. 수개표가 시행되면 개표 과정의 투명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선거 결과의 지연 발표는 불가피하다. 21대 총선 직후 전자투개표에 대한 부정선거 의혹이 집중 제기됐다. 지난해 20대 대선과 지방선거에서도 부정선거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달 발생한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는 투개표 불신 우려를 키웠다. 독일과 프랑스 등 일찌감치 전자 투개표를 도입했던 선진국들도 수년 전부터 직접투표와 수개표로 바꿨다. 해킹 위험 때문이다.수개표는 인공지능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의 회귀다. 하지만 선거 부정 시비를 일소하고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강하다. ‘소쿠리 투표’ 소동 등 선거 부실 관리로 불신을 초래한 선관위의 책임이 크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27

대기업 독점구조 깬 ‘대구로택시’의 쾌거

거대 플랫폼기업의 독과점적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대구시가 만든 공공형 택시호출앱 대구로택시가 출시 1년만에 시장점유율 16%를 차지하는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자본력과 기술력을 겸비한 대기업의 독점적 시장구조 속에서 단시간에 이렇게 빨리 시장점유율을 잠식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대구형 택시앱인 대구로택시가 이렇게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대구시의 과감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카카오택시에 대응하기 위해 수수료를 낮추고 승객 호출료 무료, 마일리지 적용, 안심귀가 서비스 등 다양한 혜택을 할 수 있도록 대구시가 과감하게 지원한 것이다.특히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해 과도한 수수료를 받는 등 불공정한 행위에 대해 대구시가 약자인 택시기사를 대신해 직접 관련기관에 부당성을 알리는 노력도 했다.그 결과, 출시 1년도 안돼 월 호출 23만건을 넘었고, 누적 거래액이 590억원이나 됐다. 카카오택시를 통해 역외로 유출될 수 있었던 192억원을 지역시장으로 되돌아오게 한 것이다. 현재 대구로택시는 대구 전체택시의 82%가 가입했고 대구시민 51만명이 가입, 이용 중이다. 승객만족도 평가서도 95%가 긍정적이다.대구보다 먼저 공공형 택시앱을 만들어 출시한 부산의 동백택시, 인천 이음택시, 수원의 수원e택시보다 높은 이용률을 기록한 것은 대구시의 과감한 지원과 함께 시민들의 높은 호응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거대 플랫폼기업의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거래에 대해서는 정부도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대구로택시는 전국 택시호출 시장에서 유일하게 대기업 독점구조를 경쟁구조로 바꾼 첫 사례란 점에서 주목받을 만한 일이다.대기업이 지역시장에 누리는 독과점적 구조를 타파하고 지역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해당 지자체가 해야 할 본질적 역할이다. 거대 플랫폼기업이 가격을 내리고 공정한 경쟁에 나서게 하기 위해선 대구시의 지속적인 지원과 역할이 아직은 더 필요하다.

2023-12-27

크리스마스 기도

내년 크리스마스엔 나를 포함, 모두가 행복했으면. 세상 돌아가는 데 무심한 나도 크리스마스에는 저절로 들썩인다. 산타클로스, 오색찬란한 트리, 흥겨운 캐럴, 코미디 영화, 외식, 선물, 데이트 등 동화적인 축제 분위기가 사람을 괜히 들뜨게 한다. 밖에 나가고 싶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에 가고 싶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만30대의 마지막 성탄절에 약속 없이 집에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크리스마스이브 점심이다. 늦게 일어나서 고춧가루 팍팍 넣고 짜파게티 끓여 먹었다. 창문을 여니 간밤에 눈이 내렸다. 곱게 쌓인 눈을 보니 짜증부터 난다. 집단축제를 싫어하면서도 축제에 끼고 싶은 아웃사이더의 양가감정은, 낄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순간 비틀린 심술이 된다. 눈 대신 비나 실컷 와서 거리가 온통 질척거리면 좋겠다. 미세먼지가 가득하면 좋겠다. 건물 외벽을 통째로 성탄 특집 디지털 아트로 만들어 구경꾼이 넘쳐 나는 명동 백화점에 정전이나 되면 좋겠다. 그냥 다 망했으면 좋겠다.연휴의 나른함에 원고 마감을 깜박하고 있다가 급히 책상에 앉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나 홀로 집에서 보냈다. 30대를 돌아보니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같은 걸 해본 기억이 없다. 낚시를 가거나 혼자 포장마차에서 허파볶음에 소주를 마시거나 티브이 보다 쓰러져 잠들었다. 대학 강사가 되면서부터는 성적 입력하느라 자체 가택연금이었다. 20대 때는 나가 놀기라도 했는데, 그래봐야 같은 공기 마시는 것조차 짜증나는 친구들이랑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 들이부은 게 전부다. 오늘 저녁엔 뭐 할까. 그래도 성탄전야인데 소고기 구워서 와인이라도 마실까? 혼자라고 생각 말기, 힘들다고 울지 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몇 해 전 방영된 ‘공부의 배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종종 생각난다. 공부 열심히 하고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처음부터 저만치 뒤쳐진 채 출발한 흙수저라서 꿈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서울 명문대 국문학과에 다니는 선혜씨는 학업과 알바를 병행한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방세 치르고 공과금 내고 독서실 끊고 하면 생활비도 안 남는다. 근사한 외식이나 쇼핑은 사치다. 그런데도 그 빠듯한 용돈으로 엄마 선물부터 고른다. 착한 친구들은 이렇게 답답하도록 착하다. 자신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 많고 멋 부리고 싶은 20대에 포기부터 배운다. 그래서 아예 밖에 안 나간다. 나가면 보이고, 보면 사고 싶어지니까. 유진목의 시 ‘누란’은 떠올릴 때마다 눈물 난다. “엄마 엄마는 맛있는 것 다 먹었어? 가고 싶은 곳 다 갔어? 하고 싶은 것 다 했어? 나는 못했어”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심리적 문제, 취업 실패 등 여러 이유로 외출 없이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은둔 청년’이 서울에서만 13만 명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6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빈곤에 의해 비생산적 활동인 사교 모임, 여행, 외식, 문화생활 등을 금지당하고, 그저 ‘살아 있음’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비만 움켜 쥔 채 좁은 방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다. 무기력함이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 마침내 너무 많은 결핍들은 아예 결핍을 무화시켜서 주체로 하여금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욕망 불구의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만이 돈 안 드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슴 설레는 축제가 아니라 찬란한 빛에 더욱 짙어지는 유폐, 춥고 초라한 그늘의 감정일 뿐이다.한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가장 좋아한 복음성가에 이런 노랫말이 있다. “가난한 영혼 억눌린 영혼 지극히 작은 영혼까지 주의 사랑을 전하리라. 아름다운 그 사랑을…. 주님 사랑 그들에게 전하리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 사랑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 온 세상에 가득히.” 앞에서 몽니를 부렸지만 진심이 아니다. 주님 사랑은 됐고 축제의 흥겨움이나 온 세상이 함께 나누면 좋겠다. 수많은 선혜씨들은 왜 크리스마스의 들뜸까지 포기해야 하나. 그들은 가난한 영혼도 억눌린 영혼도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도 아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하루만이라도 돈 걱정, 사치라는 죄의식 다 집어던지고 즐겁게 보내면 좋겠는데, 산타할아버지 가능해요? 안 울면 소원 들어준다면서요. 안 울게. 제발, 제발 좀 모두 행복하게 해줘요.

2023-12-26

마음의 서랍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서랍은 조금씩 깊어진다. /언스플래쉬 2023년도 끝나간다. 올 해는 조금 특별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예기치 못한 과거를 마주했을 땐 쓸쓸함이 감돈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과 방문했던 미술관 앞을 우연히 지난다거나 이제는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나누었던 카페를 예기치 못하게 들리는 등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불쑥 겹쳐질 땐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마주한 듯 난처해진다.A는 여전히 시를 쓸까? 늘 퀭한 얼굴로 유령처럼 미끄러지듯이 걷던 사람이었다. 말을 걸기 전까진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서 처음엔 다가가기 참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늘 피곤한 얼굴로 다니던 거였다. 강의도 자주 빠져서 게으름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밤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읽으며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와 A는 대학 졸업 이후 더 가까워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마음도, 거리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따금 A의 안부가 궁금해지지만 연락은 하지 않는다.어떤 일은 그대로 묻어두어 침묵으로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서 나의 서랍 한 칸엔 미안한 사람들이 몇 있다. 미성숙함으로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 잘 지내고 있길 바라며, 그들의 건강을 조심스레 빌어본다.올 해의 나는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고 주기적인 상담도 받고 있다. 이런 변화를 소중한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알리며 조금 더 변화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스스로 마주하는 횟수도 점차 늘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미성숙한 것들, 강박에 가까운 것과 나의 취약점, 그리고 동시에 나의 장점 나만이 가진 특징, 나의 능력도 살펴보게 됐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다채롭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설렜다. 머릿속의 안개가 차차 걷히며 실체가 드러나는 기분이었고 그 실체는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았으며 그 실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미래를 그려나가야 하는지 기대 되기 시작했다.물론 그날그날의 사정에 따라 머릿속의 안개는 포악한 뭉게구름이 되기도 하고, 소나기가 되어 급작스레 온 몸을 젖게도 한다. 눅눅하고 축축한 기분이 들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금 비가 멈추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린다. 그 시간 동안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시간은 당연하다는 듯 흐르고 변화하니까.이 시간들이 반복되며 여유를 보관할 마음의 서랍이 칸칸이 생겼다. 이젠 과거를 상기하며 불편한 외로움을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있고, 지난 사람들의 안부를 죄책감 없이 빌어볼 수 있으며 나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지고, 좋고 싫음을 구분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리곤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정의도 다시금 바라보고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이해 받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해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 것, 서로 다른 생각 앞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 물론 내가 너무 다치지 않을 만큼 건강할 정도로만.설날과 추석, 일 년에 두 번 나는 본가로 향한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그리고 더 들어가서 영암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집에 가면 부엌 식탁 위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져 있다. 나를 기다리며 삼일 내내 장을 봤다는 엄마. 본가 왔을 때 많이 먹어두라며 툴툴거리는 아빠, 그리고 다섯 여섯 살 차이 나는 동생들까지 모여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우리 가족이 만난 한 시간 정도는 늘 평화롭다. 하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우리의 대화는 또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걸 인지할 때마다 나는 늘 커다랗게 자리한 화를 누르기 바쁘다. 하지만 곧 무력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이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는 걸 아니까. 사랑의 형태는 서툴고 어설프고 그래서 곧 깨어질 듯 불안정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를 내며 도망치지만, 이젠 이 또한 보통의 사랑의 형태임을 안다. 그러니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며 저 멀리 있는 사랑을 불러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음의 서랍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2023-12-26

아름다운 마무리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숱한 희비와 애환의 사연으로 점철된 2023년이 서서히 세월의 바톤을 넘겨주려 하고 있다. 새해가 시작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으니, 새삼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여겨짐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일까?개인별로 느껴지는 시간의 속도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어쩌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지나간 날들은 한순간처럼 짧게만 여겨지고 다가올 날들은 녹록하지 않으니, 지난 일 탓하지 말고 오는 일을 쫓는 것(往事不諫 來者可追)이 중요할 듯싶다.저물고 마무리되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서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피는 언덕이 아름답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즐겁게 퇴근하는 발걸음이 경쾌하다.또한 한 해를 성찰하고 정리하는 송년의 자리가 의미 있으며, 주어진 임기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모습에서 당당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이렇듯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잘되고 아름다워야 시작의 의미와 가치가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일의 끝맺음을 잘하여 좋은 결과를 거둔다는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강조하는 것일까?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게 되면 만감이 교차하여 달라지고 바뀌는 것들이 많아진다. 즉, 12월이 지나면 한 살 더 먹게 되어 한 학년이 올라가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어 고대하던 일들을 새롭게 시작하는 새날이 되기도 한다. 반면, 해를 거듭할수록 도전과 열정의 강건함이 수그러들고, 직장생활도 마무리되는 정년퇴임의 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듯이, 짧게는 한 해가 마무리되지만 길게는 오랜 일터의 삶을 마감해야만 하는 비장(悲壯)의 시간이기도 하다.‘또 한해가 가버린다고/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고마워하는 마음을/지니게 해주십시오//한 해 동안 받은/우정과 사랑의 선물들/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사랑하는 이들에게/띄우고 싶은 12월//…./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나를 키우는 모두가/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이해인 시 ‘송년의 시’ 중에서겨울과 12월은 만물이 완성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이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과 사물과의 만남의 기회는 줄어들고 헤어짐의 순간은 잦아들기만 하니 세월따라 강퍅해지는 마음 탓일까? 아니, 어쩌면 더 비우고 가볍고 단순해지려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것들은 마디마디 꺾이고 세월의 여울은 흐느끼듯 웅성이는데, 멀어지고 잊혀지며 보내야 하는 것들이 아집에 사로잡히는 마음뿐이랴. 매사에 인정과 감사함을 남겨 놓으면 훗날에 다시 웃으면서 만날 수 있으리라.남겨진 삶 동안 어쩌면 다시 못 올 계묘년이지만, 유난히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 했었기에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토끼의 숨가쁜 뜀박질이 용의 힘찬 비상을 기약하는 도움닫기가 되어, 새해 첫날의 설렘이 일년 내내 기쁨으로 열리길 믿어본다.

2023-12-26

팬이 만들어 가는 일본의 SF 문화

강지우 SF평론가 일본은 ‘오타쿠’의 나라로 불린다. 한 분야에 열과 성을 다해 파고드는 마니아가 많다는 뜻이다. SF도 예외는 아니다. 12월 초, 교토대 SF/환상문학 연구회가 주최하는 ‘교토SF페스티벌’이 온라인으로 열려 한국에서도 참가할 수 있었다. 300여 명의 참가자 중에는 장년층 여성도 눈에 띄었는데, SF 향유의 역사가 길어서인지 팬의 연령대가 우리나라보다 넓은 듯했다. 페스티벌에서는 작가나 평론가를 초청한 강연이 오후에 펼쳐지고, 밤에는 료칸 숙소를 통째로 빌려 방마다 주제(SF 초심자의 방, 공모전 준비 방 등)를 잡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요즘은 합숙 대신 디스코드 채팅을 활용한다. 올해 페스티벌에서 다룬 주제 중에는 해외 퀴어 SF의 약진과 SF 작품의 아이디어를 산업계에 컨설팅하는 ‘SF 프로토타이핑’이 특히 흥미로웠다. 아마추어 SF 비평, SF 번역 등 동인지를 홍보하는 참가자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팬 활동이라 내심 부러웠다.한국에서는 코로나 이후 명맥이 끊긴 SF컨벤션이 일본에서는 여럿 운영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행사는 무려 1962년부터 이어져 온 ‘일본 SF대회’로, 성운상 시상식이 열릴 정도로 대표성을 띈다. 매년 1천 명 이상 참가자가 몰리며 전성기에는 수천 명 이상이 운집했다고 한다. 일본SF작가클럽이 주최하는 ‘SF 카니발’은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일본 SF대상 시상식과 작가 사인회 등이 열린다. 올해는 황모과, 해도연 작가를 초청해 한일 SF 대담이 열리기도 했다.가을에 ‘교토SF페스티벌’이 열린다면, 봄에는 ‘SF세미나’와 ‘HAL-CON(하루콘)’이 열린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인공지능 컴퓨터 HAL에서 이름을 땄는데, HAL의 일본어 발음 ‘하루’는 행사가 열리는 봄을 뜻하기도 한다. 2007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콘(세계 최대 규모의 SF 컨벤션) 스태프들이 운영하고, 켄 리우, 래리 니븐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SF 작가도 초빙한다. 컨벤션 형태의 행사 외에 2001년부터 한 달에 한 번 ‘SF 팬 교류회’도 열리고 있다.이런 행사들에 참여해 보니 작가와 팬,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 없이 모두가 SF 팬이라는 정체성을 띠고 모여 즐겁게 어울린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SF 팬이었다가 작가, 평론가, 출판 편집자 등 SF 업계에서 일하게 된 이들도 많다. SF 팬덤이 SF 문화를 이끌어가는 양상이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특유의 마니아적 끈기와 열정이 깊고 견고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우리나라에도 PC통신 SF 동호회를 기점으로 SF 팬 커뮤니티가 여럿 있어 왔으나 그 활동이 이제는 많이 움츠러든 상황이다. 최근의 SF 붐은 SF 마니아가 늘어났다기보다는 기존 문학 향유층이 SF까지 섭렵하게 된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한다. 일본의 사례가 부럽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마니아 지향보다는 SF 애호층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SF 문화를 만들어 나가면 어떨까. 역사는 짧지만,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문화가 피어날 것이다.

2023-12-26

한동훈, ‘새 정치문화’ 보여달라

심충택 논설위원 어제(26일) 국민의힘 전국위 의결을 거쳐 공식 취임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그의 첫 ‘정치적 작품’인 비대위원 인선작업에 들어갔다.오는 29일까지 비대위원 임명 절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누가 비대위원이 되느냐에 따라 한 위원장의 당 쇄신 구상이 드러나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이 많다. 한 위원장은 성탄 연휴기간 주변인사들로부터 여성·청년 인재를 중심으로 폭넓게 추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현재 거론되는 인물들을 보면, 비대위가 젊음과 도덕성, 전문성으로 무장한 실력파로 구성될 것 같다. ‘한동훈 비대위’가 조만간 출범할 경우, 국민의힘은 전무후무한 정치적 에너지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운동권 중심의 ‘586 정당’이라는 퇴보적 이미지를 가진 민주당과는 대비되는 정당으로 재탄생하게 된다.‘한동훈 비대위 효과’는 그가 위원장으로 지명된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국 유권자 1천6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여론평판연구소의 차기 대통령감 적합도 조사에서 한 위원장이 45%를 차지해 민주당 이재명 대표(41%)를 4% 포인트 차로 따돌렸다. 그동안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각종 다자대결 조사에서 이 대표는 줄곧 선두를 유지해왔다. 한 위원장의 중도확장성이 입증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조사결과다. (자세한 조사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한동훈 비대위’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다. 내일(28일) 당장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검건희 여사 특검법안’을 단독처리한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2010~2012년 사이) 범죄를 조사할 이 특검법은 이미 올 2월 법원이 1심선고를 한 사건이다.1심에서 도이치모터스 회장 권오수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주가조작을 실제로 담당한 직원은 징역2년을 선고받았다. 김 여사는 이들에게 통장을 맡긴 91명의 전주(錢主) 중 1명에 불과하며, 유일하게 기소된 전주 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 위원장은 “선전·선동하기 좋게 만들어진 악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야당의 ‘제식구 감싸기’ 프레임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주목된다.‘인요한 혁신위’가 제안한 당 쇄신작업도 급하다. 국민은 지금 한 위원장이 어떤 혁신적인 정치문화를 선보일지 눈여겨 보고 있다. 한 위원장이 타깃으로 삼아야 할 혁신과제는 공천물갈이와 국회의원 특권 폐지, ‘중수청(중도층·수도권·청년층)’ 외연확대 등 산적해 있다.혁신과제 외에도 한 위원장만이 할 수 있는 숙제가 있다. 보수지지층 결집은 총선승리를 위한 필수과제다. 여당 스펙트럼을 넓히려면 어쨌든 이준석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의원과는 연대를 해야 한다. 이준석은 오늘(27일) 탈당한 후 1~2주 뒤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계획이다. 야당에게도 손을 내밀어 ‘대화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따른 반사이익만 기대하는 안이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동훈 비대위’는 그동안 뺄셈정치를 해온 ‘용산’과는 차별화의 길을 걸어야 성공할 수 있다.

2023-12-26

경북도의회 ‘과잉의전’ 출장, 비판받아 마땅

최근 중국 랴오닝성 인민대표대회를 방문한 경북도의회 친선교류단이 ‘과잉의전’ 논란에 휩싸였다. 경북도는 지난 10월 울산에서 열린 제14차 동북아시아지역자치단체연합(NEAR) 총회에서 랴오닝성과 우호교류의향서를 체결했으며, 이에앞서 경북도의회와 랴오닝성 인민대표대회는 지난 2019년 12월 교류협력의향서를 체결했었다. 랴오닝성 인민대표대회는 지난 2020년 3월 발생한 대구·경북지역 코로나 팬데믹 때 마스크와 방호복 등을 지원하기도 했다. 랴오닝성은 지린성, 헤이룽장성과 함께 중국 ‘동북3성’으로 불리며, 성도인 선양(瀋陽)시에는 한국 총영사관, KOTRA, 관광공사 지사 등 국내 공공기관과 1천여 개의 기업이 진출해 있다.경북도와 랴오닝성 지방의회 간의 교류는 환영할 일이다. 양국간 교민보호와 경제교류를 위해 지방의회 차원에서 조례제정 등 지원할 사안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친선교류단 수행원 규모가 비대해 ‘과잉의전’ 논란이 이는 점이다. 배한철 의장과 농수산·건설소방·교육위 위원장 등 도의원 9명으로 구성된 친선교류단 수행에는 사무처직원 9명과 통역 1명이 포함됐다. 의원마다 사무처 직원 1명씩 배정돼 사실상 비서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보통 지방의원 해외출장에는 규모가 크더라도 사무처 직원 3~4명이 동행하는게 관례다. 친선교류단의 출장비는 모두 2천500여 만원 정도이며, 1인당 약 130만원씩 소요됐다. 배 의장은 특히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업무차 해외 출장을 갈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동행해 눈총을 받고 있다는 소리도 나온다.국민권익위는 지난 8월 부당하게 지출된 지방의회 출장비는 반드시 환수하도록 조례에 명시하라고 권고하며, 앞으로 출장비 문제를 철저히 들여다볼 것이라고 발표했었다. 지방의원들의 출장경비는 모두 주민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다. 경북도의회는 이번 랴오닝성 교류단 규모의 비판여론을 거울삼아 앞으로는 자체적으로 국외출장 사전심사를 강화해야 한다.

2023-12-26

소멸위기의 봉화·영양, 양수발전소에 목맸다

정부의 제10차 전력수급 계획에 따라 건설 예정인 양수발전소 사업 공모에 전국 6개 기초자치단체가 나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산업통상부는 조만간 유치 경쟁을 벌이는 기초단체 중 3곳 정도를 양수발전소 사업대상지로 선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경북에서는 최오지로 꼽히는 봉화군과 영양군이 양수발전소 유치를 희망하고 범군민 결의대회를 벌이고 있다. 봉화군은 2019년 유치에 실패하고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다.봉화와 영양이 양수발전소 유치에 목을 매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국 최오지에 위치한 봉화와 영양군은 인구 감소 속도가 가파르고 고령화율이 40%에 이른다. 전국 200여 기초자치단체 중 소멸위험지수가 두 군데 모두 최상위권이다.영양군은 울릉도를 제외하면 전국 기초단체 중 인구가 가장 적다. 사망률이 출생률의 9배에 이른다. 두 지역은 이런 상황에서 지역소멸을 최소화할 대안으로 양수발전소 유치 말고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양수발전소는 전력수요가 많은 시간에 하부 저수지에 물을 내려보내면서 전력을 생산하고, 전력 수요가 적은 시간에는 상부 저수지로 물을 올리는 방식이다. 수질오염이나 소음이 적고 발전량을 조절하기 쉬워 재생에너지 출력의 변동성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봉화·영양군은 총사업비 2조원 규모 양수발전소가 건설되면 상주직원 등 인구가 늘고 지역발전기금 및 세수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또 고용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관광효과까지 기대한다. 현재 양수발전소가 있는 양양, 무주 등지 홍보관에는 연간 10만명 정도가 방문한다고 한다.봉화와 영양지역민은 양수발전소가 두 지역 발전을 가져올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하며 유치에 결사적이다. 양수발전소 유치에 대한 주민 수용성이 거의 100%에 가깝다. 지역소멸에 대한 주민의 위기감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이철우 경북지사도 지난 7월 산업통상부 장관을 찾아 두 지역에서 추진하는 양수발전소 유치를 적극 건의했다. 지역소멸 극복을 위해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는 두 지역의 염원이 성사되길 바란다.

2023-12-26

간병지옥에서의 脫出

우정구 논설위원 세계 각국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돌봄이 필요한 노년인구가 늘고 있다. 일찍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일본은 돌봄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지만 나이든 부모 간병을 둘러싼 사회 문제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간병을 하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작년 일본에서 출간된 ‘불효돌봄’이란 책의 저자는 “병들고 나이든 부모를 돌보는 데 자식이 착해야 할 필요가 없다”며 “부모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떠날 고민은 하지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는 주장을 폈다.우리말에 “긴 병에 효자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도 부모 간병 문제로 고민하는 가정이 급격히 늘고 있다. 간병비 부담은 물론이거니와 간병을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가족이나 형제간 갈등도 심각하다.부모 병 구완을 위해 간병인을 쓰다보니 간병비 지출을 감당못해 간병파탄 환자가 늘고 있다. 부모 간병 때문에 퇴직하는 간병퇴직, 가족간 불화로 빚어지는 간병지옥, 심지어 간병살인까지 벌어지는 비극적 상황도 목격된다. 집안에 간병할 사람이 생기면 온가족이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전전긍긍이다.하루 간병비 14∼15만원 주고도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달이면 400만원이 훨씬 넘으니 병을 오래 끌면 수천만원 부담도 금방이다. 간병비 때문에 한가정이 망할 참이다.정부가 간병 경감방안을 내놨다.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확대와 요양원 입원 중증환자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등이 그 내용이다. 막대한 예산이 따르는 문제라 쉽지는 않아 보이나 진작 손을 봐야 할 문제라는 데 이의는 없다. 간병지옥에서 탈출할 묘안이 나와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26

차기 CEO인선 중 화재 겹친 포스코 ‘뒤숭숭’

지난 23일 화재로 상당수 생산설비 가동이 중단됐던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하루 뒤 2·3·4고로를 재가동하며 정상가동에 들어갔지만, 포스코 그룹 내부분위기는 뒤숭숭하다. 포스코측이 “화재에 따른 설비 가동중단 시간이 짧았던 만큼 철강 제품 생산·수급에 큰 차질은 없다”고 밝혔지만, 정부에서는 방문규 산업부 장관이 직접 정부 서울청사와 포항제철소 간 긴급 영상회의까지 열고 “일시적 가동중단이라도 조선·자동차 등 수요 산업에 파급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원인 파악과 조속한 복구에 전력을 다해달라”고 강조했다. 포스코로서는 내년 초 최정우 회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지난주부터 후임 인선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라, 이번 화재가 미칠 후폭풍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최 회장은 현재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주변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된다”고 밝히며 사실상 3연임 도전을 시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포스코홀딩스는 지난 19일 열린 이사회에서 현직 회장의 의사 표명과 관계없이 차기 회장 선임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 최 회장이 연임 도전 의사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된다. 최 회장은 재임 기간에 이차전지 소재와 수소 분야 쪽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넓히고, 2021년에는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하는 등 뛰어난 경영역량을 보여 왔다.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포스코 회장들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직을 내놓는 수난을 겪었다. 문재인 정권 초인 2018년 7월 회장에 취임해 2021년 3월 연임에 성공한 최 회장도 현 정부와의 관계가 순탄하진 않다. 지난해 8월 태풍 힌남노 사태 당시에는 정부가 ‘최 회장 책임론’을 거론하기도 했다.포스코 ‘CEO후보추천위원회’는 늦어도 내년 2월 중순까지는 최종 후보 1인을 이사회에 추천한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이 후보추천위에서 최종 후보를 내놓을 때까지 거취에 대해 침묵을 지킬 것으로 보고 있다. ‘현 정부가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소문난 최 회장의 3연임 여부에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2023-12-25

TK 역대급 국비 확보, 지역경제 상승효과로

지난 21일 국회를 통과한 정부 예산안에서 대구시는 8조1천억원, 경북도는 11조5천억원의 국비를 확보했다. 역대급 세수 결손이라는 정부의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 대구와 경북은 역대 가장 많은 예산을 확보함으로써 지역 현안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게 돼 큰 다행이다.대구시와 경북도, 기초단체 그리고 정치권 등이 예산 확보에 공동 노력한 결과란 점에서 의미도 있다. 어렵게 확보한 우리지역의 예산을 해당 자치단체가 얼마나 내실있게 쓰고, 집행된 예산이 지역경기 진작과 경제발전으로 잘 이어지느냐는 하는 것은 지금부터 풀 지역의 과제다.특히 내년 예산에 반영된 일부 사업 가운데는 대구와 경북의 미래를 견인할 핵심사업들이 많이 포함돼 예산집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내년도 대구시 예산에는 대구경북신공항 건설 설계비 100억원이 반영돼 통합신공항 사업이 드디어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대구 미래 5대 신산업 분야에도 3천500억원의 예산이 배정됐고,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사업과 금호강 르네상스 프로젝트 관련예산도 포함됐다. 또 대구산업선 철도건설 등 사회간접투자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될 전망이다.경북은 지역 최대 현안의 하나인 영일만횡단대교 사업비 1천350억원이 노심초사 끝에 반영되는 쾌거를 얻었다. 또 국회예산 심의과정에서 쟁점이 됐던 소형모듈원자로 기술개발사업비와 SMR 제작지원센터 건립 등 원전관련 예산이 모두 반영됨으로써 경북의 에너지산업 백년대계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주요 SOC사업으로 포항∼영덕간 고속도로와 남부내륙철도사업이 포함됐다. 포항은 1조4천억원의 국비를 확보함으로써 신성장 혁신사업 육성에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특히 이차전지 산업의 글로벌초격차 경쟁력 확보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대구경북 신공항 건설이 구체화되는 내년에는 대구와 경북이 한반도 남부경제권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펼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년도 예산집행은 미래지향적인 동시에 지역경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2023-12-25

‘분산에너지’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대구시는 지난 19일 달성군에 위치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대경권연구센터 주차장과 옥상에 시민햇빛발전소 10~13호기 설치를 완료하고 준공식을 개최했다. 2021년 11월 국가물산업클러스터 내 입주기업 (주)그린텍건물 지붕에 설치한 대구시민햇빛발전소 9호기가 가동된 이래 무려 2년 만이다. 2008년 9월 수성못에 설치된 대구시민햇빛발전소 1호기부터 이번 13호기까지 발전용량을 모두 합치면 이제 1천100kW로 1MW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 발전용량은 2023년 대구시 1일 최대 전력수요량 7.25GW에 비해서는 너무나 적은 양이다. 대구시는 전력 수요량의 단지 15%만 지역 내에서 공급하고 있다.이렇듯 대구시와 같이 전력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심한 지역은 내년 6월부터 시행되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하 분산법)’에 의해 일정 규모 이상의 신규개발사업 시행자와 신축시설의 소유자는 ‘분산에너지’ 설치의무 비율이 100%로 적용된다. 이는 이미 전력자립률이 100% 이상인 경북, 울산 등에서는 설치 의무비율이 25%인 것에 비하면 매우 높은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다. 그리고 ‘분산법’에는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을 지정하여 해당 지역 내에서는 생산된 전력 등 지역에너지를 직접 판매할 수 있게 하여 지역에너지 자립을 유도하고 송전망 건설 최소화와 전력계통 안정성을 도모하고자 한다.정부는 현재와 같이 서해와 동해 등 해안가에 건설한 대규모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와 원자력 에너지원을 이용한 발전소에서 장거리 송전망을 통해 도시와 산업단지에 전력을 공급하는 중앙집중형 전력시스템의 운영은 낮은 주민수용성과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한계에 봉착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지역에서 생산하여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의 에너지 정책을 적극 도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분산에너지’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분산에너지’는 ‘분산법’ 시행령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중앙집중형 에너지 시설보다는 매우 작은 자가용전기설비, 발전설비(40E404 이하) 그리고 열에너지설비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CHP(열병합발전소), 태양광, 연료전지, ESS(에너지저장장치), VPP(가상발전소) 등 다양한 에너지 설비가 ‘분산에너지’로 설치될 수 있다. 그리고 ‘분산법’에는 ‘분산에너지’가 급속히 확대될 경우에 대비하여 배전망에 대한 관리 의무를 강화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전기를 사용하려는 사업자에게 ‘전력계통영향평가’ 실시의무도 부여하였다.많은 지역에서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들 지역 내 ‘분산에너지 사업자’는 자유로운 전력거래를 통해 발전과 판매(배전)사업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특화지역’으로 지정받은 지역의 에너지와 탄소중립관련 융합기술개발과 관련 산업의 비약적 성장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새해에는 대구경북에서 ‘분산에너지’ 제도의 활용으로 지역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구에서는 ‘누구나 햇빛발전 플랫폼 구축사업’의 활성화로 시민들의 햇빛발전소 건립 참여를 쉽게 할 필요가 있고, 경북에서는 ‘지역별 차등요금제’로 산업단지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2023-12-25

‘삼시두끼’

홍석봉 대구지사장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먹는 데 진심이었다. 식사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끼니를 잇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식사했느냐”고 묻는 것이 인사였다. 성경에도 기근 이야기가 여러 곳 나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마태복음 구절도 당시 끼니 해결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였는지를 잘 보여준다.우리나라는 천재지변이 많았다. 왜적의 침범도 잦았다. 그러다 보니 가뭄과 홍수, 전쟁으로 말미암은 기근이 빈번했다. 식량난은 인간에게는 재앙이다.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북한은 1995년 8월 가뭄과 흉년이 겹쳐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다.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 한국에서 15만t의 쌀을 무상 원조받았다. 지금도 북한은 굶어 죽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9살 때 탈북한 20대 후반의 한 탈북민은 남한에 와서 “삼시세끼 먹을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1960년 대만 해도 우리 주변에 끼니를 거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한 끝에 우리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선진국이 됐다. 지금은 각종 복지혜택과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돼 굶는 사람은 없다.우리네 식생활 습관이 크게 바뀌고 있다. ‘삼시세끼’는 옛말이 됐다. 요즘 한국인은 하루 평균 두 끼 정도 먹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젠 ‘삼시두끼’라고 해야 할 판이다. 심지어는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답한 이들도 있다. 체력 유지에 필요할 정도만 하는 식사가 됐다.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했을 터다. 끼니가 생활의 보조 수단이 된 것이다. ‘삼시세끼’는 한 종편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의 제목이 될 정도로 이젠 희화화됐다. 새삼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느끼게 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25

슬픈 크리스마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적, 종교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크리스마스를 매우 중요한 축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단지 ‘빨간 날’ 중 하나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날이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와 즐겁게 보내는 것은 물론이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인 만큼 평소 바쁘게 지내느라 잊고 살았던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크리스마스 정신’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아기 예수의 뜻을 기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환대하는 인류애를 되새기자는 것이다. 종교와 신앙의 차원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사람들과 선물을 교환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 주위에 소외된 이웃은 없는지 살피는 마음이 필요하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누군가가 취약계층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이나 물품을 기부했다는 훈훈한 소식을 접하곤 한다. 이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 정신을 실천하는 이름 없는 천사들이다.그런데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도 크리스마스 정신을 논하기 어려운 듯하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멀지 않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의 공포로 신음하고 있다. 이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전쟁을 멈추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이다.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크리스마스 정신은 무력하기만 하다.한국 사회의 상황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 장기화된 경제불황과 산업구조의 변화, 소비심리의 위축으로 인해 대다수 국민의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이 팍팍하니 이웃을 향하는 마음도 인색해지기 쉽다. 보도에 따르면 올해 연탄 기부량이 목표치인 삼백만 장에 백만 장 가까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기상이변으로 인한 한파의 습격까지 더해진 상황이다. 취약계층의 열악한 주거 형태와 난방비 부담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올겨울이 얼마나 힘겨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화의 결실은 소수가 누리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라는 피해는 특정 계층에게 더 가혹하게 돌아온다. 슬픈 겨울이고 슬픈 크리스마스다.이 칼럼이 나갈 시점이면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 크리스마스에만 발휘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겨울은 길고 봄이 찾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경제를 살리는 일은 책임 있는 분들의 몫이겠지만, 경제가 살아날 때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서로에 대한 환대와 호혜의 정신에서 나온다. '라면의 상식화'가 아닌, 크리스마스 정신이 상식화된 새해를 기대해 본다.

2023-12-25

2023 세모에

강길수 수필가 올해가 일 주간도 못 남았다. 다시, 세모(歲暮)다. 올해 끝날, 12월 캘린더 한 장을 넘기면 제야의 종소리를 타고 새해 2024년이 밝을 것이다.생각해보면, 시간은 인간사회처럼 다사다난한 게 아니라 그저 강물처럼 유장하게 흐를 뿐이다. 그런 시간을 사람은 책력을 만들어 구분하고,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다. 1년 동안의 해, 달의 운행, 월식, 일식, 절기, 기상변동 등을 적은 책이 책력이란다. 인간은 왜 책력을 만들까. 영적, 이성적 존재여서 그럴까.사람은 자연 속에 태어나 영향을 받고, 주면서 살다가 결국 그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인간이 자연과 상호작용과정에서 터득한 천문(天文)의 한 분야가 책력이자, 캘린더이리라. 하여, 사람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을 터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올해를 산 나도, 며칠 뒤 12월 캘린더를 넘긴다 생각하니 뭔가가 뒷등을 당기는 기분이다.2022년 2월, 러시아 침공으로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된다. 엎친 데 덮쳐 올해 하마스-이스라엘전쟁도 터졌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체제를 버렸음에도, 왜 서방과 척을 질까. 권력자들의 야욕을 이해할 수 없다. 따져 보면, 배다른 형제지간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아랍의 반목과 전쟁은 또 무엇일까. 인류의 집단지성 향상은, 과학기술 발전과 반비례한다는 말인가.우리 정치권은 왜 ‘좌우 대결’이란 헛된 프레임으로 역사상 가장 찬란히 이뤄낸 민족중흥의 복을 걷어차고, 쪼개기로 국민을 어둠으로 몰고 갈까. 한심하다. 우리 지성들과 언론들은 왜 부정선거, 여론조작, 통계조작 같은 사회 거악들의 본질적 문제들을 외면, 침묵하거나 빈 거짓된 말만 해댈까. 비겁하다! 설마 우리 사회에,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dystopia)가 스며든 게 아닐까. 무섭다. 오웰의 빅브라더가 이미, 우리 사회를 움켜쥐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드니 말이다.그 무엇이, 이 세모에 내 뒷등을 당길까. 올 한해를 곰곰이 돌아본다. 맞아, 그랬어. 그 말이 뒷등을 당겼던 거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 ‘입장 바꿔 생각하는 마음’ 말이다. 지난 한 해는 분명 나와 우리 집, 우리 사회와 우리나라, 나아가 지구촌도 역지사지를 더 잊은 한 해였다 싶다.‘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겨레의 삶에 연연히 흐르는 ‘품앗이 문화’를 말하리라. 아이들 어릴 때, 이 속담이 들어간 동요를 “옛말에도 있었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자!…”하고 씩씩하게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리 세상이 돈, 권력, 야만으로 탁해져도 겨레의 마음에서 이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콩 한 쪽도 나누는 마음은 바로 역지사지 정신’이니까.비록 나라 안팎 사정이 녹록지 않더라도, 2023년 세모에 나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콩 한 쪽도 나누는 품앗이 문화 곧, ‘역지사지의 삶’을 연연히 살아온 우리 겨레이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 국민은 2024 새해에도 부정, 비리, 조작, 야만적 폭거 같은 사회악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살아내리라 믿는다.

2023-12-25

하나의 낱말이 주는 청량감 하나의 문장이 주는 따뜻함

시의 언어가 주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한 권의 시를 낭독해보거나, 필사해보는 경험이 가장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의미를 찾아내고 요약하는 방식의 독서에 익숙해져 있어서 언어가 주는 청각적 울림이나, 시각적 새김에 대해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다. 하나의 시를 낭독을 해보거나 필사를 해보면, 그동안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을 쓰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어떤 시집이라도 좋겠지만, 이 겨울에는 이문재 시인의 시집 ‘혼자의 넓이’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은 창비에서 출판된 해당 시집의 표지이다. 가끔은 스치듯 지나가는 단어가 마음속에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 툭 떨어진 한 낱말이 일으킨 감정의 파문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누군가 쓴 글의 일부였던 그 단어는 그것이 본래 들어 있던 맥락으로부터 빠져나와 불의의 순간에 그것을 읽는 내 맥락 속으로 뛰어든다.가끔은 어떤 문장이 유독 머리에 맴돌아 그 짧은 문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고작 몇 개의 단어를 엮었을 뿐인 그 문장은 머릿속에 그림처럼 새겨져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분명 누군가 엮어두었을 그 문장은 나를 그 속으로 끌여들여서 그 속에서 헤매도록 만든다.책을 읽을 때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때, 또는 누군가의 SNS에 올라온 피드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문자가 울림이나 새겨진 이미지를 읽고, 그 문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다. 이 당연한 과정은 어른이 되어 문해력이 높아지게 되면 망각되어 버린다.어린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고 나서, 그 뒤에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조금 더 읽는 연습을 하게 된다면, 눈으로만 보고 소리를 상상하지 않아도 의미는 저절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단어를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부터, 그 소리의 울림을 상상하면서 읽는 것으로, 나아가 문자의 시각적 새김만을 눈으로 보고서 읽는 것으로의 변화는 음성을 표기할 수 있는 한글로 표기하는 한국어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변화일 것이다.그래서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 자체에는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안경에 묻은 티끌은 내가 그것에 신경을 쓸 때는 보이지만, 내가 그 안경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대상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글을 읽을 때 그 문자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의미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글을 읽는 방식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한다. 소리를 내는 것이나, 소리를 내지 않고 시각적 새김만으로 읽는 것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떤 단어를 소리 내어 낭독해보거나, 어떤 단어가 새겨져 있는 방식에 주목해보면, 어색한 느낌을 준다.가끔은 그래도 스치듯 울리는 단어들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시집이나 에세이집 속의 단어가, 누군가 손으로 쓴 삐뚤빼뚤한 편지 속 단어가, SNS에 누군가 남겨둔 단어가, 이유를 알 수 없게 갑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귓전에 생생한 울림을 남긴다. 눈 아래 멍울과도 같은 잔영을 남긴다.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나, 지식과 논리가 담겨 있는 인문 교양서와 달리, 시집이나 에세이집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공감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글을 계속 읽어오고 문해력이 늘어나면서, 그렇게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읽어버리고 있던 ‘읽기’라는 과정을 새삼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 말이다.사랑, 풀잎, 바람, 풍경…. 문득 마음속에 들어온 단어를 혀 위에 두고 굴리면, 왠지 새로운 감각으로 그 단어가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단어가 새겨져 있는 방식에 신경을 쓰면서 읽다 보면, 대체 어떻게 이런 새김으로 이런 단어가 되었을까 하는 낯선 느낌과 함께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조차 새삼스러워진다. 내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그 단어는 이리저리 부딪히며 청량감을 준다. 또한, 어떤 문장을 되뇌이다 보면, 그것이 연결되어있는 방식의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너무나 바쁜 우리에게 그런 낯선 언어 감각의 훈련조차 사치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세상에 그런 단어, 문장 하나쯤 있다는 것은 어딘지 든든한 일이지 않은가.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2-25

노래와 놀이 그리고 춤, 월월이청청

예부터 달이 유독 청청한 밤에는 달빛 아래에서 전통 가무를 즐겼다. 본래 전통 가무는 노래와 놀이 그리고 춤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모두 어우러져 행해졌다.주로 가장 생산성이 왕성하다고 평해지는 젊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원형·선형·나선형 등의 형태를 그리면서 집단으로 놀았는데, 보름날에 달을 닮은 춤을 춘다는 점에서 풍요와 다산을 축원하는 축제로서 행해졌다. 특정 지역이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전라도의 강강술래·안동의 놋다리밟기·포항과 영덕의 월월이청청이 가장 유명하다.월월이청청은 경상북도 대부분, 경상남도와 강원도 접경에서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포항과 영덕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포항은 ‘월월이청청’, 영덕은 ‘월워리청청’, 안동은 ‘얼얼이청청’, 구미는 ‘널널리청청’ 등으로 불렸다. 놀이 이름을 한자로 칭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사투리가 섞이면서 여러 형태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월월이청청은 하나의 춤이 아니라 마당놀이처럼 여러 춤이 이어져 행해진다. 포항에서는 월월이청청·달넘기·외따기·재밟기·대문열기·실꾸리 감기와 풀기·생금생금 생가락지 등이 전해지며, 영덕에서는 월월이청청·달넘세·절구세·대문열기·산지띠기·동애따기·재밟기·생금생금 생가락지·재바재바·실꾸리 감기와 풀기 등이 확인되었다.원형, 나선형, 단선형, 대선형, 교차형 등 춤의 형식은 다양하다. 원형무에 속하는 월월이청청은 도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개 오른쪽으로 먼저 돌기 시작한다. 춤을 추다가 방향을 바꾸거나 더러는 원을 좁혔다가 다시 넓게 펼치기도 한다. 느린 장단에서 점점 속도를 빨리하며 나중에는 옆 사람의 손을 놓치거나 댕기가 하늘로 솟구칠 정도로 활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달넘세, 실꾸리 감기와 풀기는 나선무에 속한다. 원의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타 넘거나 팔과 팔 사이를 통과하는 형태로 춤을 춘다.처음 나선형을 이루던 행렬은 점차 커지다가 마침내 다시 원형이 되거나 뭉쳐져 있던 형태가 풀리는 형태를 취한다. 달넘세의 “달 넘세 달 넘세 달이나 쿵쿵 달 넘세”라는 후렴구에서 알 수 있듯이 원형은 모두 이지러졌다가 다시 완전해지는 달의 형태 변화를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수적인 놀이에 속하는 단선무형은 산지띠기, 동애따기, 재밟기, 대문열기 등이 있다. 산지띠기는 어미 소에게서 송아지를 떼는 것이고, 동애따기는 동아(식물)를 따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일상생활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꼬리잡기와 닮은 놀이인데, 모두 떨어질 때까지 한 사람씩 떼어낸다. 재밟기의 ‘재’는 ‘지애’의 축약형으로, 지애는 기와의 사투리이다. 등을 구부린 채 앞사람을 잡은 형상이 마치 연달아 놓인 기와처럼 보인다. 가장 뒷사람부터 차례로 굽혀진 등을 밟고 지나가면서 느린 장단으로 노래를 부른다. 대문열기는 대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리거나 올리는 것으로 대문의 모양을 만들며, 한 사람씩 대문 안에 가두는 형태도 드러난다.연행에서의 노래는 선후창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즉흥성이 강한 편이다. 대개는 미혼 여성의 사랑을 노래한 경상도의 보편적인 서사민요의 내용을 담고 있다.월월이청청의 “토연토연 김토연아”는 토연이라는 처녀와 서울 선비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고, “생금생금 생가락지”는 정조를 의심받은 미혼의 여동생이 죽기 전에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는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재바재바”는 생금생금 생가락지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 노래한 것이고, 대문열기는 “서울이라 남도령아 대문 조금 열어주소”에서 알 수 있듯이 남도령이라는 미혼 남성이 살고 있는 집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미혼 여성들의 사랑이 노래의 서사로 쓰였다.강강술래는 미혼의 청춘남녀가 설·대보름·단오·백중·추석·중구 등 다양한 날에 개방적인 장소에서 행해진 놀이이고, 놋다리밟기는 혼인 여부를 가리지 않은 젊은 여성이 대보름에만 연행한 행사였다. 월월이청청은 담장이 있는 넓은 마당에서 설·대보름·이월 초하루·추석 등에 미혼 여성을 중심으로 연행되었다. 노래와 놀이와 춤이 함께 전승된 전통 가무는 다른 도구 없이 손만 마주 잡고 연행된 여성 중심의 집단유희이다. 이러한 전통 가무는 마을마다 전승되다가 일제강점기에 다른 대동놀이와 마찬가지로 축소 진행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 전승이 끊기다시피 사라졌다가 일부 마을에서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지금의 형태로 복원하였다.월월이청청과 같은 전통 가무는 예전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 즐기는 축제였다. 노래 또한 주고받는 형식으로 재미를 더했으며, 고난도의 동작이 없어서 배우기도 쉬웠다.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 문화의 매개체로 활용될 수 있으며, 학교에서는 또래 집단의 교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복원을 넘어서 현재의 젊은 층까지 즐길 수 있는 문화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2-25

한 해를 마무리하며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올해도 이제 1주일이 남았다. 한 장 남은 달력 위에 성질 급하게 새 달력을 걸어본다. 예쁜 그림과 사진이 있는 달력도 좋지만 큰 글씨에 빈 여백이 많은 달력을 구했다. 옛날엔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단오에는 부채를 주고받고 동지에는 달력을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새마을금고에서 나누어 주는 달력을 얻어다 쓴다. 요즈음 기억이 깜빡깜빡해서 중요한 모임이나 해야 할 일들이 있으면 그날에 큰 글씨로 표시해 두면 기억하기 좋기 때문이다.지나간 날들을 훑어보니 크고 진하게 표시한 기록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제삿날과 가족의 생일, 지인들의 자녀 혼사가 있고 행사와 모임도 표시했다. 그리고 나의 소소한 취미인 우표수집을 위해 그 발행 날짜엔 빨간 우체국 마크가 선명하다.갑자기 추위가 엄습한다. 이 추위는 북극에서 밀려온 한파가 주말까지 이어진다고 하는데, 전국 대부분이 최저 영하 15도 이하인 한파특보가 내려지고 경북 북동 산지에는 한파경보가 내려지는 등 올들어 가장 춥겠단다. 또한 전국이 대체로 맑겠지만 충청·전라 해안과 제주에는 폭설도 예상된다고 하니 빙판길 사고도 염려된다. ‘동짓날에 눈 오고 추우면 풍년이 든다.’했으니 이 추위도 즐겁게 견뎌야 하겠지. 그런데 강원 영동과 경상권 동부지방은 건조특보가 내려져 산불 등 화재 예방에도 총력을 기울인다니 이 좁은 나라의 동서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세찬 바람에 체감 온도가 클 텐데 외투 깃 세우고 모자도 쓰고 요즘 독감도 설친다고 하니 몸조심 잘하며 계묘년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하기를 빌어본다.며칠 후면 아기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 크리스마스이다. 대체공휴일처럼 일, 월요일 연휴이고 앞의 토요일까지 합치면 쉬는 날이 사흘이 된다. 벌써 교회나 성당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하고 이따금 들려오는 캐럴은 연말의 기분을 들뜨게 하고 거리에는 반짝이는 장식들이 가로수에 입혀져 겨울 축제를 예고하고 있다. 연말연시 인파가 몰리는 곳에는 안전관리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우리 주위에는 불우한 이웃들이 많다. 포스코 그룹은 올해도 이웃돕기 성금 100억원을 기탁하였는데, 그동안 누적액이 1천920억이라고 한다. 그리고 2천700 여벌의 방한 의류도 기부했고 연탄배달 봉사도 한다고 하는데, 이 대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한국 노인빈곤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불명예를 씻기가 부족할 테니 국민 모두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야겠다. 또한 결핵 발생률도 1위로 인구 10만명당 35.7명이고 사망률 또한 3위이다. 이에 대한결핵협회는 결핵퇴치기금을 모으기 위해 매년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 오고 있는데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아서 만화가 ‘앤서니 브라운의 동화 속으로’란 타이틀로 10종류 1시트에 3천원짜리를 발행했다. 구입이 아니라 기부이니 카드나 연하장을 보낼 때 붙여 보내면 그 작은 정성이 이러한 불명예를 씻어주는데 작으나마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을까 싶다.이번 동지는 애동지다.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팥죽은 안 쑤더라도 팥시루떡은 먹으며 모든 액을 물리쳐야지.

2023-12-21

태양의 부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다. 오늘을 고비로 밤은 조금씩 짧아지고 대신 낮이 그만큼 길어진다. 정확하게는 날마다 30초씩 일출이 빨라지고 일몰은 30초씩 늦어져서 낮의 길이가 1분씩 늘어나는 것이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서 태양을 돌고 있기 때문에 북위 38도에 걸쳐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위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옛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신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지동설이 나오기 전에는 낮이 가장 긴 하지(夏至)를 지나고부터 태양이 차츰 식어가다가 동지를 고비로 다시 회생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터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자연의 법칙이었고, 과학적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달라질 게 없는 삶의 조건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태양도 식어가다가 다시 타오르는 되풀이에 맞추어 해(年)와 절기(節氣)를 구분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생활을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특히나 농경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농작물을 심고 가꾸고 거둬들이는 일을 그 절기에 맞추어 실시했다.동지가 갖는 의미는 다른 절기에 비해 특별한 데가 있다. 실생활인 농경과는 관련이 없는 어떤 정신적이고 제의(祭儀)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중국 주(周)나라에서 동지를 설로 삼은 것도 이 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동짓날에 천지신과 조상의 영을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군신의 연례(宴禮)를 받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 가는 작은 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팥죽을 쑤어서 먼저 사당(祀堂)에 올리고 각 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담아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었다.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신앙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즉,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잎이 진 겨울나무 잔가지에 어느새 새봄을 기약하는 꽃눈과 잎눈이 맺혀있다. 동지를 지나도 봄이 오기까지는 몇 차례나 더 한파와 눈보라가 몰아칠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겨울이 너무 길고 혹독할 것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북녘의 동포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집집마다 쌓여있는 옷가지라도 보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것마저 막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겨울이 아무리 혹독할 지라도 낮이 길어지는 만큼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북녘 땅에도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는 말자.

2023-12-21

서울도 따라한 ‘대구 대형마트 휴업 평일변경’

대구시가 광역자치단체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2월부터 시행한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평일 전환’ 정책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는 내년 1월부터 관내 대형마트의 의무휴업일을 평일로 변경한다. 서초구와 관내 대형마트는 지난 20일 상생 협약식을 열고 대형마트의 의무휴업일을 현행 매달 둘째·넷째 주 일요일에서 둘째·넷째 주 월요일이나 수요일로 바꾸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충북 청주시도 지난 5월 10일부터 대형마트 의무휴업일을 수요일로 변경해 시행하고 있다. 부산에서는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변경 논의가 한창이다. 부산상공회의소는 부산시민의 64% 이상이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가 불필요하다는 인식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평일전환 건의서를 부산시와 16개 구·군에 전달했다. 대형마트 일요일 의무휴업은 골목상권 침해를 막기 위해 지난 2012년 전국적으로 도입됐다.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평일변경은 중소유통업계와 소비자들로부터도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유통학회가 ‘대구시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평일전환’에 대한 효과를 분석할 결과, 지난 2월부터 6개월간 전통시장의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32.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시장 등 중소 유통업계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의무휴업일을 평일로 바꿨는데도 전통시장 매출이 오히려 늘어나는 효과가 확인된 것이다.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유통학회가 대구시내 소비자 600명을 대상으로 휴업일 평일전환 만족도를 조사했더니 525명(87.5%)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모든 일요일에 쇼핑하기가 편해져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대구시의 대표적 규제혁신사례인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평일전환’ 정책을 서울시 자치구가 벤치마킹하면서 홍준표 대구시장의 시정 스타일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대형마트 등장으로 전국의 골목상권이 치명타를 당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대형마트들은 이에 대한 책임감을 강하게 가지고, 전통시장을 비롯한 중소유통업계와의 상생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2023-12-21

인천과 대구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는 인천과 함께 1981년 7월 직할시가 됐다. 그때만 해도 대구가 인구 규모와 면적이 월등히 앞섰다.대구는 서울과 부산에 이어 국내 3대 도시의 위상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젠 대구와 인천이 완전히 역전됐다.직할시 출범 당시 인천의 인구와 면적은 114만명 201㎢였고, 대구는 183만명 454㎢였다. 12월 현재 인천의 인구는 299만명, 대구는 240만명으로 60만명가량 차이가 난다. 면적은 대구시가 군위군 편입에 따라 1천499㎢로 7개 특별·광역시 중 최대 규모가 됐지만, 이전에는 인천이 1천66㎢로 가장 넓었다.1인당 지역내총생산은 2021년 말 현재 인천이 3천355만원, 대구 2천554만원으로 800만원가량 많다.2021년 말 기준 지역내총생산은 대구 61조원, 인천 98조원으로 대구는 인천의 61% 수준이다. 고령인구 비율도 대구는 19.2%로 인천의 16.2%에 비해 3% 높다. 이젠 모든 지표가 인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다. 이게 현재 대구의 모습이다.인천은 이 같은 성장세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난 2015년 현행 정부의 각종 공문서상 지자체 표기 순서인 ‘서울·부산·대구·인천’을 ‘서울·부산·인천·대구’로 바꿔달라고 건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채 각종 지표만으로 대구와 인천의 순서를 바꿀 수는 없었을 터이다. 이렇게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진 인천시가 획기적인 출산 지원책을 내놓았다. 2024년부터 인천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 만 18세가 될 때까지 총 1억원이 넘는 지원을 한다고 밝혔다.인천 지역 임산부와 아이들에게 그동안 부모 급여, 아동 수당, 교육비, 보육료, 급식비 등 7천200만원 수준이 지원됐다. 인천시는 여기에 아이 1명당 2천800만원을 더 얹어 주겠다고 했다. 인천의 인구 증가는 그동안 전입 인구가 전출 인구보다 많은 덕을 톡톡히 봤다. 그러나 이런 인구 증가 추세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해 특별한 지원책을 내놓은 것이다.재정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리띠를 조이는 등 ‘채무 0’를 선언한 대구는 인천의 형편을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대구·경북의 인구 감소 추세는 심각하다. 지난해 대구·경북의 출생아 수는 대구 1만 100명, 경북 1만 1천300명으로 1985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2055년 대구와 경북 인구는 각각 180만명, 220만명으로 급감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대구·경북의 지난해 혼인건수는 1990년의 40% 수준으로 줄었다. 올 3분기 합계출산율은 0.7명에 불과하다.인구 대책은 백약이 무효다. 수백조의 예산을 퍼부었지만 나아질 기미는 전혀 없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생활인구’라는 다소 황당한 개념까지 도입했겠나. 통근·쇼핑·관광 등 목적의 체류 인구도 지역 인구로 잡자고 한다. 지방의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3대 도시로 성장, 여유와 저력이 느껴지는 인천을 보면서 대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2023-12-21

솔로 이코노미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1인 가구수는 750만2천명 정도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수의 34.5%에 해당한다. 1990년 9% 수준과 비교하면 30년 사이 4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제는 1인 가구가 대세인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유럽연합의 국가들도 우리보다 먼저 1인가구 시대를 경험했다. 지금은 그에 맞는 시장경제도 형성됐다. 조금 지났지만 2018년 기준으로 유럽의 1인 가구 비율은 33.9%다. 스웨덴은 56%, 덴마크, 핀란드, 독일 등은 40%가 넘는다. 도시별로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경우 60%가 1인 가구다.우리나라도 지금과 같은 속도로 늘면 유럽국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1인 가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대략 간추리면 다음 3가지 정도라 할 수 있다.첫째, 저성장이다. 청년층이 취업난에 봉착하면서 연애와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면서 혼자 사는 젊은이가 늘어난 때문이다. 둘째는 이혼 및 여성들의 경제활동 증가를 꼽을 수 있다. 결혼을 미루고 혼자 사는 골드 미스터, 골드 미스 등의 증가다. 세 번째는 고령화다. 노인들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배우자를 잃고 나홀로 지내는 노령층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솔로 이코노미가 주목을 받고 있다. 주택, 식품, 가전 등 산업계 전반에 걸쳐 홀로 사는 싱글족을 겨냥한 제품들이 앞다퉈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혼밥, 혼술을 넘어 혼영(혼자 영화) 혼행(혼자 여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시장경제 흐름에 맞춘 기업의 마케팅 활동의 산물이다. 앞으로 1인가구 비율이 더 늘어나면 소비시장의 핵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높다.바야흐로 1인 가구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21

먼섬 특별법 통과, 울릉도 발전의 초석되길

울릉도와 독도의 정주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특별법이 20일 국회를 통과했다.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울릉도·독도 지원특별법과 더불어민주당 서삼석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토 외곽 먼섬 지원특별법을 병합한 ‘울릉도·흑산도 등 국토 외곽 먼섬 지원특별법’이 우여곡절 끝에 본회를 통과한 것이다. 울릉도·독도 지원특별법은 18대와 19대, 20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으나 상임위 단계에서 매번 고배를 마셨다. 이번 특별법 통과로 울릉도 등 육지에서 50km 이상 떨어진 섬 주민의 정주여건 개선에 정부가 직접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법안에 행정안전부는 5년마다 국토 외곽 먼섬의 종합발전 계획을 수립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안전한 정주 여건 조성 △주민소득 증대 △생활환경 개선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 △생필품의 원활한 유통 공급 등의 주민 지원사업을 펼칠 수 있게 했다.울릉도는 지금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울릉 주민의 90% 정도가 오징어 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생계를 받쳐줄 오징어가 잡히지 않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기후변화로 지난해 오징어 어획량은 1만t에도 못 미쳤다. 2012년 7만t과 비교하면 13% 수준이다. 울릉수협 소속 어선이 1990년 474척 있었으나 작년에는 138척으로 줄었다. 오징어가 잡히지 않아 울릉군이 오징어 축제 개최를 할지 말지를 고민할 정도라 하니 위기상황을 짐작하고도 남는다.게다가 정주 여건도 최악이다. 전국에서 가장 낮은 주택보급률과 교통, 의료, 복지, 교육, 통신 등 어느 하나 열악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론조사에서 주민의 66%가 기회가 되면 육지로 이주할 생각이라 한다. 인구소멸도 걱정이다. 1975년 3만명에 육박하던 섬 인구가 올해는 9천여 명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3천여 섬 가운데 해상영역이 가장 넓어 국경수비대로서 역할이 막중한데도 이곳은 인구가 떠나는 섬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김 의원의 말대로 특별법 마련이 “울릉의 획기적 발전과 도약의 계기”가 되어 주민 생활이 크게 향상됐으면 한다.

2023-12-21

경산시의회에 스며든 꼴불견

심한식 경북부 ‘꼴불견’꼴불견의 사전적인 의미는 “하는 짓이나 겉모습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우습고 거슬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우린 크고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목격했을 때 꼴불견이라고 표현한다.하지만, 정도를 벗어났지만,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행동도 포함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국회의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국민을 대표한다’이지만 과연 그들이 국민을 위해 대표하는 사례가 얼마나 될까.국민의 세금으로 개회된 국회 회기 중에 회의에 집중하기보다는 사적인 업무와 행동으로 질타받는 경우를 우린 자주 경험했다.그러나 당사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며 더 크게 목소리를 높인다.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마치 자신이 가진 보도(寶刀)처럼 휘둘러 놓고 남을 탓한다. 이때면 떠오르는 단어가 꼴불견이었다.국회의 이러한 모습이 어느새 지방 기초의회까지 감염시켰다.경산시의회는 20일 제250회 정례회 제2차 본회의를 열고 2024년도 본예산과 상정된 안건을 처리했다.방청석에 앉은 공직자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으나 시의원들 일부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옆 의원과 잡담을 나누거나 휴대폰 화면을 보는 등 시민의 대표라는 직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러한 행동은 지나간 회기 중에서도 자주 목격되었다.하지만, 이들은 행정사무 감사나 예산심의, 주요 안건 보고 등의 자리에서는 시의원이라는 갑옷을 자랑했다.또 상임위 활동 중 출석 이후에는 자리를 지키지 않는 시의원도 있는 등 정말 꼴불견의 행동이 판을 치고 있다.기고만장한 인물들이 많은 국회를 떠나서 서민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기초의회만이라도 회기에 집중하고 진정으로 지역민을 위하는 의원들이 되었으면 한다.선거철만 되면 허리가 굽혀지고 얼굴에 웃음을 짓는 선한 얼굴(?)이 아닌 낮은 자를 찾아가며 기초의원이라는 갑옷을 벗고 다정하게 손을 내밀 줄 아는 기초의원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까?경산시의회가 21일부터 제251회 임시회를 개회해 의사일정을 진행한다. 이번 임시회에서는 웃는 얼굴로 경산시의원들의 회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shs1127@kbmaeil.com

2023-12-20

입춘(立春)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첫 번째가 입춘(立春)이다. 태양의 황경이 315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2월 4일(음력 12월 25일)이 입춘이다.입춘은 24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음력 1월에 해당하며, 새해를 상징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의 기준이 되는 첫 번째 절기로 큰 의미가 있었다. 명리 사주에서는 입춘을 일 년의 시작점으로 보기에 2024년 2월 4일 이후에 태어나야 갑진년(甲辰年) 용띠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서양 점성술에는 춘분(春分)을 일 년의 시작점으로 본다. 태양의 황경이 0도이기 때문이다.입춘은 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명리학에서는 인월(寅月)에 해당한다. 인월은 절기로 입춘과 우수(雨水)를 포함한다.한자 인(寅)을 풀이하면 씨앗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새싹이 올라오는 형태다. 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을 트는 시기가 인월이며, 시작점이 입춘이다. 절기 중에서 설립(立)자로 시작하는 절기는 입춘, 입하(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이 있다.입춘은 만물의 움직임이 시작하는 시점으로, 봄을 의미하는 목(木) 기운이 태동하는 시기다. 날씨는 아직 춥지만, 입춘은 글자 그대로 ‘봄이 일어나는 시기’다. 이때 농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거름 준비하기와 종자 손질하기다. 건실한 종자를 찾고, 종자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땅에 영양분을 주는 것은 한 해 농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입춘은 봄의 시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항상 꽃샘추위를 동반한다. 이런 날씨를 반영하듯 ‘입춘에 장독 깨진다’는 속담이 있다. 이 무렵 추위가 매서워 장독이 얼어서 깨진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입춘이 되면 동풍이 불고, 얼음이 풀리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깨어난다고 한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에 보면 음력 1월인 정월에는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인(寅) 방향을 가리킨다. 봄의 시작이므로 오행으로는 목(木)에 해당하며, 덕(德)을 상징한다. 방위는 동쪽이다. 수(數)로는 8이고, 색으로는 청색이다.입춘 날에 천자는 상대부들을 거느리고 동쪽 교외에서 봄을 맞이하고, 사당을 수리하고 신위(神位)를 청소하며, 귀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복을 빌며, 희생물로는 수컷을 사용한다. 이달에는 벌목을 금지하고, 새 둥지를 부수거나 태(胎) 속의 새끼를 죽이지 못하게 하며, 어린 사슴을 잡지 못하게 하고, 부화 중인 알을 취하지 못하게 한다.계절에 맞는 정치를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바람으로 자연과 인간생활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1월 인월은 주역으로는 지천태(地天泰) 괘다. 땅인 곤괘는 위에 있고, 하늘인 건괘가 아래에 있다. 음(陰)은 가고, 양(陽)이 오니 길하고 형통하다는 뜻이 있다.천지가 교차하고 해와 달이 만나는 계절이라 만물이 형통하다. 그래서 지천태 괘가 나왔다면 모든 일에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 인월에 태어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전진하는 태도는 지천태의 장점이기도 하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인(寅)은 동물로 호랑이다. 호랑이는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 또한 먹이 사냥 때문에 이동이 많아 외지에 살며, 행동이 빠르고, 포부도 크다. 새해 첫 달이라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있다.성장기를 맞이한 만큼 난생처음이라는 말처럼 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있으나, 고난과 시련 앞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요구된다.옛날에는 입춘첩(立春帖)에‘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글귀를 써서 대문에 붙이고 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입춘을 기점으로 크게 길할 것이다. 양기를 바로 세움으로 해서 경사가 넘칠 것이다’라는 뜻이다. 입춘 날, 입춘 시(2024년 2월 4일 17시27분 이전에)에 입춘첩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속담도 있다. 음식으로는 파, 마늘, 달래, 부추, 무릇 등 다섯 가지 매운 나물 오신채(五辛菜)을 먹었다. 첫 절기에 맵고 쓴 오신채를 먹어 삶의 쓴맛을 미리 깨우치고 참을성을 키운다는 의미가 담겨있다.입춘은 한 해의 시작이므로 다른 절기보다는 점(占)에 관한 기록이 많다. 입춘이 음력설보다 빠르면 그해 봄은 춥다고 한다. 입춘이 음력 섣달에 갇혀 있는 형국에서 비롯된 속설이다. 입춘의 일진(日辰)에 따라 농사를 예측하기도 한다. 일진이 갑을(甲乙)이면 풍년이고, 병정(丙丁)이면 큰 가뭄이 일어난다. 임계(壬癸)면 큰 홍수가 일어난다. 또는 입춘 날에 맑고 바람이 없으면 풍년이 들고, 눈이나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고도 한다.입춘이 지나면 곧바로 설이다. 새해에는 덕담으로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 아닐까? 소외된 사람을 위해 많이 베풀면 그 보답도 좋지만 원한을 많이 쌓으면 돌아올 재앙도 깊을 것이다. 적게 베풀고 큰 보답을 바란다거나 원한을 쌓고서 후환이 없길 원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결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간 일을 살펴보면서 닥쳐올 일을 예측하게 되는 것이다.

2023-12-20

새벽을 열다

배문경 수필가 항구의 불빛이 환하다. 육지의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져 물결 위에 일렁인다. 어둠 속으로 출항한 배들은 다시 감청색 어둠을 뚫고 새벽 항구에 배를 정박시킨다. 그물에 걸려든 고기들이 항으로 쏟아져 내린다. 막 잡아 올린 생선의 비늘은 아직 바다의 푸른빛이 감돈다.경매인의 손에서 쩌렁쩌렁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낙찰을 보려고 몰려든 경매인들이 줄을 지어 쏟아진 고기 주위로 둥글게 말아 선다. 경매인이 입안에서 웅얼대는 소리를 그들은 잘도 알아듣는다. 겉옷을 열었다 닫았다하며 수신호를 보낸다. 추임새를 넣는 경매인들은 눈빛과 온몸으로 작업을 건다. 온갖 동작이 우습고 진지하다. 그들의 집중적인 의사표시는 원시 부족의 춤사위 같다. 언어 이전의 세계처럼 그들은 손가락과 표정으로 뜻을 전달한다.그들의 수신호가 아침을 연다. 가장 높은 값에 널브러진 고기들이 하나둘씩 다시 미끄럼을 타고 팔려 나간다.수런수런 넓은 어시장이 삽시간에 사고파는 사람들로 지도가 그려진다. 판매되는 물건에 따라 종류별로 지엽적인 모습을 갖추고 전체를 보면 큰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물에서 건져 올린 것에는 없는 것이 없다.제사상에 올릴 고기들은 끼리끼리 몰려있다. 조기며 열기며 돔들이 서로 이웃처럼 좌판에 드러누웠다. 뼈가 센 생선들이다. 바다를 종횡무진 얼마나 돌아다니면 저토록 센 뼈를 가질까. 그래서 제사상에 뽑혔나 보다.선조들은 온통 바다를 다닌 생선을 통해 바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굵직한 비늘을 치고 아가미를 통해 내장이 온전히 사라진 멀쩡해 보이는 생선을 담는 사람들. 누군가의 기일인 모양이다. 죽은 고기가 죽은 이들을 위해 상위에서 고요히 제값을 하게 되리라.바다의 포식자인 상어는 이미 냉동실에서 얼어 밖으로 나와도 뽀얀 표면을 지녔다. 검은 표피 속에 핑크빛 고운 살들이 무게를 재고 누웠다. 굵게 저며진 살은 꼬챙이에 끼워져 적당한 간을 맞추고 노릇하게 구워질 것이다. 산적의 대표인 돔배기는 포항과 인근 동해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소고기산적이니 삼색전이니 크고 작은 꼬챙이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바다를 가르며 다녔을 단단한 지느러미가 떠오른다.저들이 헤엄치던 바다는 지금껏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모든 물고기의 집이며 숙소이다. 물고기 특유의 비릿한 내음은 왠지 물고기들이 서식하던 곳의 냄새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바다에 살 때 그들은 살아 움직이느라 바빠서 냄새를 간직하기 힘들었으리라. 뭍에 오르며 숨이 끊어질 때 바다로 돌아가려고 애쓰느라 비릿한 냄새로 소리를 치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回歸) 본능이리라.어물전에서 제사에 쓸 고기를 샀다. 수산 시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갖가지 어물이 좁은 통로를 빼고 즐비하다. 바다에서 재수 없이 잡혀 온 고기는 얼마나 황망할까. 살아 꿈틀거리는 문어와 횟감이 된 생선들이 바다로 돌아가고자 발버둥을 친다. 몸부림 속에서 비늘이 벗겨 지기도 하고 상처를 입은 것들이 참혹하기도 하다. 싼값에 팔아야하니 주인의 표정은 밝지 않다.팔려나가는 고기들과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지자 어판장이 고요해진다. 언제 그렇게 시끌벅적했냐며 바닥에는 씨눈 달린 고기 한 마리 남아있지 않다. 동해 쪽에서 바다를 향해 햇살이 쏟아져 출렁거린다. 온전한 바다가 한 폭의 풍경이다. 하늘과 바다는 수평선을 놓고 하나가 된다. 바다와 육지도 철벅이는 아이들의 물장난에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포항 어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물에서 온 것과 육지에서 온 것으로 제사에 쓸 것을 쓸어 담는다. 시장은 삶에 필요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 물고기가 되어 유영하는 곳이다. 물 작업복에 장화를 신은 노역자들의 힘찬 걸음이 장바닥을 휘젓는다. 사람 냄새가 더욱 진해지는 어물전에서 내가 어물쩍거린다.

2023-12-20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2023년 대한민국 인구포럼에 참여했던 미국 위스콘신대 카렌 보겐슈나이더 교수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절망적이다’라 하였다.그가 희망이 섞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현재 우리가 가진 인구위기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사회적인 문제들이 속속 나타난다.이대로 가다가는 20년쯤 후는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가 총체적으로 가라앉지 않을까 싶다. 인구문제는 나라의 문제이면서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구는 얼핏 머리 숫자 문제처럼 보이지만, 보다 넓은 영역의 생활여건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내가 살기 힘든 곳에 아이들까지 낳아 고생시킬 부모는 없다. 살기 좋은 환경이 살아나려면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 할까.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이 거의 모두 서울로 달려갈 꿈을 꾼다. 몇 년을 머물러 살면서 공부하고 생활했던 지역에는 왜 관심이 없을까. 청년들이 말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일자리와 문화다. 경제력을 이어갈 일터가 부족하고 재미있고 신나게 즐길 문화텃밭이 척박하다는 것.일자리가 서울이라고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진짜 문제는 문화인 셈이다. 돈도 필요하지만 즐길 거리가 필수라는 것. 살기 좋은 도시를 공표하는 해외 자료들에도 문화적 배경이 경제적 여건보다 우선순위 앞자리를 차지한다.마을과 지역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와 자랑거리. 외지 사람들마저 마력처럼 끌어들이는 흥미와 매력.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만의 독특한 그 무엇. 평범해 보여도 스토리텔링의 힘이 번득이는 홍보와 마케팅. 지역이 가진 문화의 힘 덕에 살아나는 지역시민의 자긍심. 솟아오른 긍지는 지역을 자랑스럽게 만들어내고야 만다.문화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발굴하여 나누면서도 오늘의 감각에 맞추어 새롭게 다듬어야 한다. 문화콘텐츠를 멋지게 ‘현재화’할 때 어른들만이 아니라 자라나는 어린이들도 함께 즐기며 누리게 될 터이다. 담긴 의미를 그대로 두면서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새롭게 만드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 세상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도록 ‘글로벌화’하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역이 가진 소중하고 풍성한 이야기 소재들을 다시 돌아보아 오늘의 문화, 세계의 이야기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노력이 있었으면 한다. ‘옛것’으로서 문화를 넘어 오늘의 ‘일상’을 풍성하고 즐거우며 재미있게 만드는 문화의 텃밭을 가꾸어야 한다.문화가 살아나 지역민의 일상이 되면 지역의 자긍심이 올라가고 주변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 터이다.지역의 품격과 매력에 끌려 찾아올 관광객의 발걸음과 함께 경제적 발전은 지역의 안정적인 인구정책과 관리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지역소멸을 두려워하기 보다 문화와 이야기의 힘에 승부를 걸었으면 한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살펴 발굴하고 오늘의 트렌드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여 문화와 예술이 넘실대는 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2023-12-20

대구경북 중장년층 ‘나홀로 가구’ 많다니 걱정

동북지방통계청이 ‘대구경북 중장년층 1인가구 특성’을 분석한 결과, 중장년층(40~64세) 1인가구 비중이 대구는 39.8%, 경북은 37.3%로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20대 이하 1인가구가 증가하는 현상과 대조적이다. 2022년 기준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1인 가구는 750만2천가구로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34.5%를 차지했다.대구의 1인 가구는 32만6천866가구, 경북은 41만8천가구다. 대구경북을 비롯해 우리나라는 지금 1인 가구가 해가 바뀔 때마다 최고치를 갈아치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나홀로 가구’가 보편적 라이프스타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전국적인 현상과는 달리, 대구경북에서 유독 중장년층 1인가구 비중이 높다는 것은 독립해서 사는 청년층의 외지유출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10년간의 인구통계를 보면, 이 지역에서 수도권 등 타지역으로 유출된 인구(21만4천290명)중 20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중장년층 1인가구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는 상당히 좋지 않은 신호다. 한창 왕성하게 경제적 활동을 해야 할 중장년층 중 상당수가 동거 가족없이 혼자 산다는 것은 사회적 동력이 그만큼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중장년층 1인가구는 조만간 ‘독거노인’ 문제로 연결될 수 있어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 각종 통계를 보면, 1인 가구의 평균 연소득은 전체 가구 평균 연소득의 절반에 못 미칠 정도로 취약하다. 반면, 주거·생활비와 부채 부담은 많다.우리나라는 인구소멸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대부분 사회복지제도가 ‘다인(多人)가구’ 중심으로 되어 있다. 국민연금만 하더라도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 고령의 부모 등 부양가족이 있는 수급자에 한해 가족수당형태로 연금액을 추가 지급한다. 이제는 건강과 의료, 주거 안정성 같은 복지 시스템을 ‘나홀로 가구’가 소외되지 않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 혼자여도 안전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2023-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