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거미줄은이슬의 벤치가 아닐까?떠돌다 갈 곳이 없이, 쓸쓸히 앉아 있는가을 공원의 벤치거리줄은 이슬의,그런 공원의 벤치가 아닐까?흔하디흔한 거미줄, 그 사소한 존재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자상하고 따스한 존재감의 인식이다. 약육강식의 한 도구로서의 거미줄이 이슬이 잠시 머물러 제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게 하는 벤치로, `가을`이라는 시간과 `공원`이라는 확대된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짧은 한 편의 시 속에서 시인은 우주를 발견하고 거기에 재밌고 새로운 언어와 정서를 덧입히고 있다.시인
2014-03-03
이상과 이중섭이 윤동주 김정희가이항복 노천명 서정주 김달진이오늘은 겸재를 따라 인왕산에 가더라수성동 계곡에서 돌다리 건너더니느닷없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더라겸재의 화첩 속으로 들어가 버리더라저녁 늦게까지 제비다방 불 꺼지고부락은 텅 비어서 여름비가 채우고온 골목 오르골 소리 밤새도록 들리더라인왕산 아래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을 그림으로 글씨로 문장으로 그려낸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 뿐이랴. 서촌, 수성동 계곡의 진경산수를 그려낸 겸재 정선의 예술혼은 놀라운 것이다. 또한 그를 시로 문장으로 그려낸 이상, 윤동주, 노천명 서정주 김달진의 시정신이나 기막힌 언어들도 그럴 뿐 아니라, 이중섭의 한 폭 그림들에 담겨져 있는 서촌의 풍경과 그 평화경은 예나 지금이나 고요하고 아름다운 한 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4-02-28
갈기를 세운 바람이 머물다 가는 7부 능선비탈에 선 나무의 일대기를 읽는다눈길이 오래 머무는 곳은은사시나무의 백서다수사는 생략했다 간결하지만 깊은 문장꽃으로 잎으로 차마 못했던 말들을수피에 음각으로 새겨이다지 간곡하다나무 앞에서 부끄럽다농담처럼 보낸 시간들어깨를 툭 치고 가는 가랑잎마저 아프다잘 벼린 문장 한 줄은끝내 나를 비껴 갔다자연은 그냥 구경하고 관조하는 대상만은 아니다. 자연은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자기의 문장을 써 내리고 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는 의미없이 피어나고 스러져가는 것이 아니다. 엄격한 자연의 문법에 따라 저마다 최선의 문장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찌 인간의 문장으로 흉내조차 낼 수 있단 말인가.시인
2014-02-27
극명하게 찍어놓은마침표 뒤에못내잘 가시라는 추신 한 줄,마침내 서녘 하늘이 버얼겋게소인을 찍는다망자를 보내는 마지막 의식인 하관의 과정에는 고인의 관 위에 흙 한 줌을 내려놓는 의식이 있다. 요즘은 국화꽃잎 한 줌을 뿌리기도 하지만 한 줌 흙을 뿌리는 의미를 시인은 짧은 이 시에서 이승에서의 한 많은 한 생을 마치고 잘 가시라고 부치는 한 줄 추신이라고 말하고, 붉은 노을이 등성이를 물들이며 번지는 것을 소인을 찍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감동적이 표현이 아닐 수 없다.시인
2014-02-26
봄의 눈이 마구 내어 밀 듯 새내기들이 얼굴 내민 교정단정한 화단의 매화나무가 웃음을 한껏 매달고 있다갑작스런 추위와 마른 바람에도 등굣길 페달이 둥근 아침교문을 지나 언덕 오르기란 5교시 졸음보단 낫지만식사 후 배를 쓸어내리는 양지 바란 곳에겨우내 없었던 꽃그늘이 생겨까치 두 마리 총총 뛰어 다닌다갑자기 친해진 두 녀석에게 묻는다어째서그냥요 그냥 좋은 걸요녀석들의 미소가 포르르 가지 위로 날아가서매화꽃이 되었다그늘이 다 환하다아직은 시린 봄, 화단 구석에 환하게 불을 밝힌 매화나무 곁으로 갓 입학한 신입생 새내기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고 있는 교정의 봄을 그려내고 있는 이 시는 싱싱한 생명감으로 일렁거리는 작품이다. 겨우내 없었던 꽃그늘이 다시 생기고 까치들이 찾아들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어울려 미래를 열어가는 힘차고 희망찬 모습들이 이 땅 여기저기 배움터마다 활기차게 일렁이고 있으리라.시인
2014-02-25
동백나무 숲으로 뛰어드는 여우비에일제히 목을 놓는 꽃들의 환한 도열꽃받침 덩그런 자리 미열 아직 남았다못 지킨 언약처럼 필 때보다 질 때 붉은서로가 미루지 않고 유감없이 저무는 일덧 자란 그늘에 엎여 봄은 마냥 저만치다오면 가는 것이 숨 탄 것의 항다반사목숨껏 받든 나날 다 앗기고 스러졌다꽃으로 다녀갔구나,날 잃고 널 얻었는데입춘 지난 남녘에는 봄빛이 완연하다. 남해안의 여러 섬이나 해안에 산재해있는 동백나무 숲에는 붉은 빛이 번지고 있다. 아직은 차가운 기운이 아침 저녁으로 뻗쳐오고 있는데 자연의 순환은 어길 수 없는 진리다. 화르르 타오르다 후두둑 떨어져버릴 꽃들의 환한 도열을 생각하는 시인의 가슴 속에는 동백꽃보다 붉은 사랑의 빛이 스며 있음을 본다.시인
2014-02-24
들끓는 웃음소리가 넘치고도 높아이끌려 들 때와 빗겨날 때그 잠깐 동안에 교대되는 어떤 심사똑딱선이 바다의 전모가 아니듯표박에 든 배 심해에도 뜬다어시장 좌판을 사이에 두고 왁자한 흥정광어는 넙치의 별명이라 그것 말고 우럭 한 마리에조피볼락을 덤으로 얹으려는 흥정이사투리보다 가파르다, 죽은 물고기도 아니고활어를 자꾸만 끼워 넣으려는 이 행락이나는 조금 더 두근거려주었으면 바라지만한 생이 항구 밖으로 끌려 나가는지무적이 고삐 끌린 황소울음으로 운다누구도 주인이 아닐 때 안팎에서 떠도는풍문으로 숨구멍이나 틔우듯재래식 수다 말고 더 섞을 것이 없는 무료!삼천포 어시장 좌판에서 시인은 왁자한 흥정과 시끌벅적한 풍경 속에서 사람 사는 얘기의 한 면을 재미난 시어로 전해주고 있다. 광어 우럭 조피볼락이 꼼지락거리고 사투리가 즐비한 어판장에서 뜨겁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울려 재래식 수다에 끼여드는 시인의 모습이 환하게 보인다.시인
2014-02-21
초파일이었다. 찬송가를 부르는 두 사내 곁으로 비둘기와 스님들이 지나가고 사내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날아가는 새처럼 두 팔을 벌리고 역의 간판을 보는 것 같았다. 하늘은 비둘기 색, 어느 것도 날 수 없는 끝의 끝. 우리는 걸어 여기까지 오고, 날아서 다른 곳에 가야 한다. 부산 바람에 연등이 흔들린다. 노숙자들이 옷깃을 여민다. 소주를 턴다. 찬송가 악보가 날아가 연등 곁에 앉았다.더 갈 곳이 없이 어색해진 두 사람, 소개받은 돼지국밥 집이 저 건너에 있을까.바람이 광장에서 하늘로 건더기들을 쓸어 올린다. 광장이 텅 비었으면 좋겠는 날이 있다. 부산의 바람이 그 날 불었다.부산역 광장 뿐이겠는가. 수없이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역 광장에는 오갈데 없는 노숙인들이 세상과 사람들을 멀뚱하게 바라보며 더 지칠 일도 없고 더 기다릴 것도 없이 그냥 놓여있다. 그 앞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혹은 독경을 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시인
2014-02-20
내가 자금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나의 한쪽 눈을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사람들이 자금주를 소개시켜줄 나의 한쪽 눈을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나는 한쪽 눈을 배수진으로 치고다른 한쪽 눈을 내놓을 방법을 찾으려고화분에 물을 준다광장에 나간다전태일의 일기를 읽는다세상 살다보면 이리 저리 나를 퍼 줘버리는 때가 있다. 그래도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내 정체성, 실존적 자존을 지켜나가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시이다.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고 광장에 나가기도 하면서 진정한 자신을 키우고 격려하며 언젠가 자신을 위해 아니면 세상을 위해 한 번은 몸 내놓아야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리라.시인
2014-02-19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고향집의 평화경이 펼쳐진 작품이다. 어린 시절 추억이 채곡이 쌓인 고향집 풍경은 투명한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곳이다. 고단하고 힘든 현실에 살면서 우리 모두는 그리움의 붓으로 저마다의 고향집을,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그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시인
2014-02-18
꽃과 꽃 사이피어나는 꽃꽃과 꽃 사이에새로이 몸을 내는 꽃꽃과 꽃 사이에서 피어난꽃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꽃과 꽃 사이에서 피어난꽃 사이사이사이에서 피어나는 꽃그대와 나 사이 꽃꽃들은 그 자체로도 화려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꽃과 꽃 사이에서 어울려 피어날 때 더 아름답고 화려하다. 아름다운 조화를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빛깔과 향기가 각기 다른 꽃들이지만 어울려 피어있을 때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되는 것이다. 모습도 생각도 정신도 각기 다른 인간들도 서로 연합하고 어울릴 때 아름다운 관계와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시인
2014-02-17
산비탈 허허벌판에 자리잡고 앉은 폐차장수많은 차들이 닳아진 시간 앞에 목을 들이밀고 서 있다뉘엿뉘엿 지는 햇살이 안수기도처럼 눈이며 이마 볼때기에반짝 찍고 지나간다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던 지난날 하루하루 바퀴 속에는각기 다른 몸집과 얼굴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누가 누군지알 수 없는무서운 속력으로 질주하며 세상 어딘들 달려가고 달려왔던 바퀴들이 여기저기 방치된 페차장의 풍경 속에서 시인은 우리네 인생의 모습을 본다.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자신의 청춘을 다 사용해버리고 이제는 쓸쓸히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낡고 상한 몸과 마음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그 닳아진 시간들을 겸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인
2014-02-14
아버지가 쌀을 씻는다쌀 속에 검은 쌀벌레 바구미가 떴다어미 잃은 것들은 저렇듯 죽음에 가깝다맑은 물에 몇 번이고 씻다 보면쌀뜨물도 맑아진다석유곤로 위에서 냄비가 부르르 부르르 떨고 나면흰 쌀밥이 된다아버지는 밥을 푼다꾹꾹 눌러 도시락을 싼다빛나는 밥 알갱이를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죽어도 잊지는 않으리털이 숭숭 난 손으로 씻던그하. 얀쌀어머니 없이 성장기를 보낸 시인에게 어머니의 빈 자리를 대신해 주신 아버지에 대한 정성과 사랑을 떠올리며 눈물겨워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비단 이 시인의 아버지만은 아닐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대를 건너며 어린 것들을 챙기고 먹이며 싸안고 들쳐업고 건너온 아버지의 그 살가운 사랑과 희생을 이 시를 통해서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시인
2014-02-13
쪼그려 앉은 다리를 폈다 접었다 하다가 아예 무릎 꿇고 낫으로 반 뼘씩 잔디를 베며 땀에 절었다반나절거리도 안 된다더니 솔 그림자 길어지도록 일은 굻지 않는다무덤조차 없이 떠도는 혼백들에게 죄스런 낫질로 저녁놀 뭉개며 오는 땅거미까지 쳐내다 보니지친 숨 너머 혀끝으로 찍어내고 싶은 초저녁별이 돋는다거친 한 생을 살고 가신 고인의 무덤에 낫을 대며 시인은 그들의 삶을 떠올리며 미안해 하고 있다. 고작 명절이나 기일이 되어 찾아 벌초 성묘하고 내려가버려서 망자들에 대한 예우가 미안하고 죄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덤조차 남기지 못하고 떠난 혼백들에게는 더 죄송스러운 마음을 풀어내고 있다. 가만히 등성이 위로 떠오르는 초저녁별이 가슴에 와 박히는 시이다.시인
2014-02-12
꼬막 부려놓고어머니는 바가지에 물을 담아뻘배에 묻은 개흙을 씻어낸다내일 또 끌고 나갈 텐데뭐 하러 씻고 그래요?이놈아!이게 뻘배로 보이냐?너희 삼 형제 먹여 살린밥그릇이여, 밥그릇!밥그릇 잘 씻어놔야푸지게 담을 거 아니냐전남 벌교 뻘밭에 가면 시인이 말하는 이런 뻘배를 볼 수 있다. 평생을 개흙 묻은 바가지를 끌고 다니며 꼬막을 캐온 바닷가 사람들의 한 생이 눈물겹게 한 풍경으로 그려지는 감동적인 시다. 맞다. 삼형제를 먹여살리고 교육시킨 밥그릇인 것이다. 이 땅 어딘들 그런 밥 그릇이 없겠는가. 모양이 다를 뿐이지 우리를 키워낸 거룩한 어머니의 밥그릇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시인
2014-02-11
소위, `빈 자리`는 허전함이 아니라모든 것이다허전함은 본 모습참 나의 그림자다이기심이 짓는 헛제사밥그게 외로움이다빈 자리를 자세히 봐라거기 외로움이 있느냐거기에는 없는 것이 없다외롭지 않은 외로움도 있다밖도 안도 없고, 쌓으면 무겁고 허물 면 가볍다다투지 않고 가득한 곳`외로우니까 사람` 이라고?누가 외로운가? 그 놈을 잡아와봐라호박씨 백 날 까봐라사람은 사람을, 도깨비는 도깨비를 낳는다정호승 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는 시에 대한 강변을 하고 있다. 빈 자리는 허전함이나 외로움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것은 이기심이 지는 헛제사밥 같은 것이란다. 그것은 인간 탐욕의 관점이고, 위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 탐욕을 비워내고 보면 빈 자리를 지켜려는 인간의 본 모습을 찾을 수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외롭지 않는 외로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귀 기울여 봄직한 말이다.시인
2014-02-10
햇살과 놀다가 햇살 같은 찔레꽃 따서 먹다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내 그림자와 놀다가 햇살이 너무 밝아 인기척 없는 뒤란의 그늘과 장독대 사이의 고요에 깜짝 놀라서 여기 어디쯤이 의심스러운 가쁜 숨으로, 햇살들 끼리끼리 몸 비비는 오후를 훔쳐 보다천 년 너머 곰삭은 미소 하나 만났다종일 해 아래 생활하다가 집으로 가는 길은 또 다른 고운 생명들과 조우하고 그들과 함께하게 된다. 찔레꽃을 따먹기도 하고 뒤란의 장독대에 고요히 머문 적막의 시간들을 만나기도 하고 햇살이 끼리끼리 몸 비비며 쏟아지는 오후를 함께하게 된다. 천년이라는 시간. 어쩌면 영원의 시간들이 가만히 제각기 흘러가는 것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시인
2014-02-07
밭두둑의 흙은 강아지풀의 집이지요강아지풀은 흙 속에서 살지요밭두둑의 강아지풀은 흙의 대문이지요강아지풀을 여닫으며 흙은 숨 쉬지요흙의 대문 위에 이슬이 맺혀 있군요강아지풀, 모처럼 세수를 했나 보내요꽃대궁이 강아지꼬리를 닮았다해서 강아지풀이라고 부르는 거기에서 시인은 이 식물의 집이 흙이라고 말하고 있다. 흙은 만물을 함유하고 있다가 씨앗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식물로 키워낸다. 사람조차도 흙에 발을 대고 살아가고 있다. 흙을 발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의 발과 발가락은 흙에 뿌리를 내린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시인의 식물도 인간도 흙과 함께 하는 상생의 원리 같은 것을 발견하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4-02-06
기차에 무언가 두고 내렸다. 잠깐 잠이 들었고 일어나 보니 옆 좌석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다시 잠이 들었다 깨 보니 다른 누군가 타고 있었다. 다시 잠들었다 깼을 때 또 다른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기차는 멈춰 있었다. 나는 서둘러 가방과 우산을 챙겼다. 기차에서 내리자 겨울밤의 냉기가 밀려왔다. 사람들을 뒤따라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처음 보는 역이었다. 처음 보는 지명이었다. 모두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쌓인 눈 위로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차에 무언가 두고 내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뒤돌아보니 기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누군가 날 깨워주길 바랐다.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왜 가는지 목적과 과정에 대한 설정이 없다. 다만 떠밀려 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없고 대중과 그 대중이 모인 사회와 나라만 있는 것이다. 모두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나는, 우리는 왜? 어디로? 무얼하러? 그리 바쁜 사람들에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일까. 시인
2014-02-05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오래 바라본다이승과 저승 사이시들지 않는 건들거림모과 냄새 묻은 적멸(寂滅)이런 고요는 모란꽃 같다수련 잎 얼비치는 잠 속에서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다절대 평화, 고요한 경지에 몰입해 이승과 저승 사이의 시들지 않는 건들거림과 모과 냄새 묻은 적멸을 맞보는 시인의 정신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영원의 사유에 들어 무아의 경지에 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에 흐르는 고요 곁으로 모란꽃이 피고 수련 잎 비치는 잠 속으로 나비가 나는 절대 고요의 경지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시인
2014-02-04
열매는 그 다음 일잎보다 꽃을 먼저 내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니사과나무에게 겨울은 그런 것이었으니참으로 갸륵하다꽃이 피는 이유만으로꽃이 피는 이유만으로내 눈이 내 귀가 새삼 심장박동 소리가새롭다 내 몸이 내 맘이꽃이 피는 이유만으로 삼라만상이다 이유가 되고다 용서가 되니울고 울고 울다 지쳐 울던 새들도갈 것이라 왔다 봄도 사랑도봄이 오는데 새삼 무슨 이유인가갈려고 온다 봄은 눈물 멈추기도 전에봄이 오는 이유는 꽃을 피우고, 그 꽃을 떨어뜨리고 가을의 결실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데 시인은 가을의 결실을 얻기 위해 봄이 온다고 말하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꽃이 피는 그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고 말하는 시인의 시안이 깊고 융숭하다. 올봄 새삼 봄이 오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일이다.시인
2014-02-03
살포시 실바람이 타는 천 갈래 구름의 현악봄볕 좋은 물가에 앉아 귀에 고이는 소리 담는 게지소리는 발가락 적시고 무릎으로 허벅지로 굽은 등 짚고 척추 따라 정수리 거쳐 지그시 감은 눈동자 속으로 차가운 심장 한가운데 맴돌고 맴돌아 다시 목뼈 타고 백회열 뚫고 더욱더 위로 올라서 동토(凍土)가 품었던 햇살의 추억에 닿지 그 하늘 끝에 되돌려놓는 게지 자잘하고 소소한 파문 무궁무진의 허공 뒤덮는 게지파르르 파르르흐르고 오래 흘러서 오래도록 길게갓 피운 연두의 여운, 결코 멈추지 않는 게지새봄에 환하게 등을 켜는 연두 새순은 생명감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천상의 소리고 축복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와 우주에 새로운 기운과 호홉을 불어 넣어주는 생명의 원천이다. 자잘하게 소소한 파문으로 파르르 번지는 연두 물결에 가만히 젖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4-01-29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드러내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그것으로 말끔히 씻어 내려는 것이겠지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부끄러운 것도 숨길 것도 없어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겨울 숲의 나목들. 풍성한 성장(盛裝)을 벗고 차가운 겨울바람에 떨고 있다. 그러나 혼자서 외롭게 길고 긴, 엄한의 겨울밤을 건너가는 것은 아니다.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몸통에서 흙 속의 뿌리에 까지 그 빛을 밀어내려서 말끔히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 살아가더라도 서로 부둥켜 안고 서로 위로하며 가난한 우리네 이웃들의 삶의 향기를 겨울 나목들에서 찾을 수 있다.시인
2014-01-28
남편삼우제 지내고 산에서 막 내려온여인처럼헝클어진 머릿결 사이창백한 얼굴덩그러니, 몹시도 춥고 맑은 날서럽도록 환한겨울 달겨울달의 차갑고 서늘한 느낌을 남편을 보내고 삼우제를 지내고 산에서 막 내려온 아낙네의 창백한 얼굴에 비유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하고 싶다. 덩그러니 서럽도록 환한 겨울달빛에 젖노라면 살아온 날들이 시렵고 힘들었고 차가운 생의 굴곡과 냉엄함을 떠올린다. 그래서 더 서럽게 느껴지는 차가운 겨울달인지 모른다.시인
2014-01-27
아직도 울컥보고 싶어요어떻게든 만나서엄마의 커다란 젖가슴에이마를 파묻고엉엉울고 싶어요울컥절을 마치려는 이마바로 그 앞에파란 싹이울컥.어머니를 여읜 시인의 눈앞에 연두빛 새순, 파란 싹이 피어나고 있다. 어머니가 그리워 울컥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기도 하여, 가만히 삼키는 시인의 가슴은 그리움의 눈물로 젖어있다. 새봄 따사로운 햇살 타고 번지는 연두빛 새순들을 보면 이가 시리고, 먼저 가신 어머니가 몹시도 그리운 것은 비단 이 시인뿐이겠는가.시인
2014-01-24
원룸 주차장 벽면붉게 꽃이 피었다무슨 뜻일까까막눈 할머니멀거니 쳐다본다하교하는 학생들히죽히죽 웃는어깨 너머붉어 까마득한 그림SEX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서를 모티브로 삼아 시인은 정겨운 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왜 꽃은 붉게 피었을까하는 것도 재밌는 풍경의 한 자락이고 까막눈의 할머니가 멀죽이 바라보는 그림하며, 하교하는 어린 학생들이 히죽히죽 웃는 풍경들을 시인은 평화롭고 정겨운 그림의 제재로 삼아 한 폭의 재밌고 미소 머금게 하는 평화경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4-01-23
행복과 불행은 한 지붕 두 얼굴불행을 쫒아내면 행복도 따라간다두 가닥잘 꼬인 새끼줄마음 단단히 묶는 법맞다. 불행과 행복은 한 몸이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양극을 이루는 것이 공존해 있다. 행복도 불행도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리라. 아무리 좋은 조건 속에서 그것을 누리더라도 그의 마음이 불행하다고 느끼면 그것은 불행이다. 반면에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 살아가더라도 안분지족(安分知足)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시인
2014-01-22
손꼽아 숱한 나날을 응달 가녘 배돌았니?땅도 설고 물도 선 곳 현해탄 굽이 건너사추리 오므린 그대로 억지 살품 팔았었니?풀고 또 풀어낼수록 찍찍한 붕대같이뼈마다 뼈끝이 시린 천형의 쇠사슬 감고앙가슴 벌집이 됐니? 깊은 상처 쓰라린 날귀 닳고 이지러진 누이야, 나의 누이야호랑가시 차디찬 숲 헤쳐 나온 내 누이야!눈자위 마른 눈물 자국 아침놀이 닦아 줄까*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져 있는 `성노예 소녀상`가슴 아픈 현대사의 흔적이 혈흔으로 남아있다. 아름답고 청순한 소녀를 성노예로 전락시킨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정당시하고 엄정한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져 있고 미국에도 세워져 있어 최근 미국 내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 청원이 된 성노예소녀상. 그 깊은 상처에 다시 침을 뱉고 칼날을 휘두르는 아베정권을 천지신명이 그냥 놔 둘 것 같지 않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시인
2014-01-21
거기 강화도 펜션 맞지요?몇 년 전 제가 묵었는데요예약하고 싶은데요지금은 겨울입니다우리 민박집은 이제부터 겨울파도소리만 받습니다사람은 받지 않는그 섬에 가고 싶다몇 해 전 묵었던 강화도 바닷가 민박집에 다시 가보고 싶어서 전화한 시인에게 건네준 주인의 말은 곧 시인의 말이리라. 겨울파도소리만 받고 사람은 받지 않는다는 바닷가 그 집에 와 닿는 겨울 바람과 차가운 파도가 평화경을 이루고 있다. 고즈넉한 그 바닷가 민박집에 들어 밤새 밀려오고 쓸려나가는 겨울파도소리에 귀를 적시고 싶은 날이다. 시인
2014-01-20
참깨 이랑에 몇 포기들깨 무성하면들깨가 잡초들깨 고랑 비집고 고무락고무락참깨 올라오면참깨, 니가 잡초명분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려면 어떨까 쓰잘데없는 명분에 목숨 거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시인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들깨면 어떻고 참깨면 어떤가, 모두가 소중하고 의미있는 생명체다. 이름만 다를 뿐이지 모두가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 존재들이다. 우리네 인간들은 어떠한가. 명분에 얽매여 부질없는 것에 매달리는 우리가 아닌가 한 번 우리를 들여다 볼일이다.시인
201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