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며 쓸개를 꺼내 꿈도 꺼내고 추억도 꺼내 먼지와 소음으로 뒤범범이 된 술집과 거리에 늘어놓고는 지나가는 사람들 다 불러모아 약장수처럼 한바탕 너스레를 떨다가 철지난 유행가 가락도 섞어서 저물면 주섬주섬 주워담아 넣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새빨간 저녁노을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 그것이 지금 노을이 내게 들려주는 말이리 - 신경림 시집 `낙타`(창비·2008)신경림 시인의 근작 시집 `낙타`를 읽었다. 나는 이 시집에서 표제 시 `낙타`를 비롯한 삶과 죽음의 근원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제1부의 여러 시편들에 깊이 매료되어 그 시들을 읽고 또 읽었다. 한계적 존재인 우리네 이쪽의 삶과 또 조만간 누구나 건너가야 할 저쪽의 삶에 대한 신경림 시인의 시적 탐색은 소중한 작업이다. 신경림 시인은 시 `낙타`에서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그렇게 저쪽으로 담담하게 걸어가겠다고 한다. 또`고목을 보며`에서는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고목의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을 통해 비극적 황홀에 젖기도 한다. 사람이 죽는 것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돌아갔다`라고 한다. 여기에 왔다가 다시 저기로 되돌아가는 길이 우리네 삶이다. 신경림 시인은 돌아가는 길(歸路)을 “약장수처럼 한바탕 너스레를 떨다가 철지난 유행가 가락도 섞어서” 그렇게 웃으며 노래하면서 가려고 한다. 이는 “저물면 주섬주섬 주워담아 넣고 돌아오는 버스 안”과 같은 우리네 삶이 그래도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 삶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큰 긍정의 자세에서 기인한다. 원한 맺힌 것 없이 웃으며 노래하며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일이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다. 그 발걸음으로 얻으려면 지금 여기의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18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 박성우 시집 `가뜬한 잠`(창비·2007)물도 잠을 자는가? 만약에 잠을 잔다면 강물도 베개를 베고 자는가? 박성우 시인은 그렇다고 말한다. 시인이 그걸 시골 마을에서 직접 보았다는데 어쩔 것인가. 어느 여름날 밤, 고향에 내려간 시인이 잠이 오지 않아 마을 앞의 강가로 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앉아 밤이 이슥토록 마을 앞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의 화폭에 새겨진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바로 시 `물의 베개`가 되었다.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인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를 나는 왜 보지 못했던가. 여름날 밤, 내 고향 마을 앞 동창천에서 수도 없이 봐 왔던 이 그림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는 위 시 4연에 열거된 것처럼 우리네 살림살이가 그대로 수놓아져 있다. 고된 농사일로 관절을 상한 늙은 농부의 신음 소리와 자식 대학등록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중년 부부의 대화도, 술에 찌든 서방을 탓하는 젊은 베트남 새댁의 서툰 악다구니와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의 숨소리도 수놓아져 있을 테다. 나는 박성우 시인의 둘째 시집 `가뜬한 잠`을 읽으며 그가 언어로 짜 올린 이러한 감동적인 큰 그림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12
시골 성당 젊은 신부 아름다운 그 시절 가난과 깊은 정이 평생에 그리운데 어이해 십자가 지고 명동언덕 올라섰나 불화살 최루탄이 발 앞에 날아와도 하느님 모습 닮은 인간이 존엄해 자유와 민주의 횃불 환하게 밝힌 이 - 구중서의 김수환 추기경 평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책만드는집·2009)회보 `한국작가회의` 제61호 표지에서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이 쓴 시조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구중서 선생은 일찍이 70~80년대 한국문학의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의 논리와 영역을 개척하고 그 텃밭을 일궈온 분이다. 대학교 정년을 다 마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선생이 틈틈이 격조 높은 수필과 시조를 쓰면서 한국문학이라는 큰 산맥에 흙 한 줌 더 보태는 이 일은 참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2009년 2월16일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善終)하셨다. 종교 간의 벽을 뛰어넘어 추기경의 선종을 안타까워하는 애도의 물결이 전 국민의 가슴에 넘쳐흘렀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자유와 민주의 횃불 환하게 밝힌 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우리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등불이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삶처럼 추기경께서 “십자가 지고 명동언덕 올라”섰던 그 이유가 “하느님 모습 닮은 인간이 존엄해”라는 저 평범한 말씀이 독자의 마음에 감동의 눈물을 맺히게 한다. 그렇다. 그 무엇보다 인간이 존엄하다. 이걸 지켜내고 그 마음자리를 넓혀가는 것이 종교의 신성한 업무이리라.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추기경의 말씀인 듯한 평전의 제목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라는 이 깊고 큰 의미를 우리는 늘 되새기며 실천해나가야 할 일이다.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불면의 좋은 시간`(책만드는집·2009)은 구중서 선생의 첫 시집인데, 40년의 문단 생활의 예지가 오롯이 녹아있고, 선생이 직접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이 함께 담겨 있어 시집을 읽는 독자의 기쁨은 더욱 크다. 해설이종암·시인
2009-08-10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차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송수권 시선집 `여승`(모아드림·2002)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한 송수권 시인. 그의 등단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한 `山門에 기대어`는 한국문단과 독자들에게 오래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으로 비유된 죽은 누이(실제는 남동생이었다고 함)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한을 유장하고 처연한 가락에 실어 놓은 송수권의 노래는 가히 절창이었다. 송수권 선생이 내일 제11회 `푸른시인학교` 초청 시인으로 포항에 온다고 한다. 어서 달려가 그의 노래를 듣고 비교적 선생의 최근작인 `시골길 또는 술통`이라는 시를 읽는다. 무척 재미가 있다. 시 속의 저 시골길, 197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시골길이 꼭 이랬다. 학교가 있고 버스가 다니던 명대 마을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가득 실은 커다란 짐자전거가 이웃 마을인 사깔, 북지, 그리고 우리 동네 길명의 신작로로 들락날락 했다. 짐칸엔 두 말들이 하얀 플라스틱 술통이, 자전거 바퀴 양옆에도 쇠고리에 술통을 매달고 비포장도로에 자전거가 씩씩 달려가던 그 풍광이 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살아 숨쉬는, 생명력 넘치는 시를 만나면 괜히 즐겁다. 시골길도 술을 마신 것 같고, 이 시를 읽는 나도 詩도 술을 마신 것만 같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는 마지막 행이 기막힌 표현이다. 주모의 치마 속은 아주아주 무서운 곳이다. 해설이종암·시인
2009-08-06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가장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 `2009현대문학 수상 시집`(현대문학, 2008)다른 사람이 쓴 좋은 시를 베껴 옮겨 적은 내 공책에서 조용미 시인의 시를 찾아 읽는다. `魚飛山`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 `검은 담즙` `소나무` `물소리를 듣는다-묵계리` `겨울 논` `門을 열다`와 같은 시를 읽으며 조용미의 시는 벼랑의 삶에서 생(生)과 사(死)의 긴 고랑을 깁는 환(幻)의 노래라는 생각을 했다. 위 시에서 나는 소리(音)라는 말, 거처(居處)라는 말은 알겠는데, `소리의 거처`는 잘 모르겠다. 검은 빛이라는 말은 알지만서도,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조용미의 시 `소리의 거처`는 어렵다. 시적 의미의 해독이 분명하지 않는데도 이 시는 거듭 나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자꾸 읽는다. 분명치 않은 시의 의미가 거문고 소리처럼 내 몸을 통과한다. 내 몸에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이 쌓이는 것만 같다. 좀 더 있으면 제월당의 月자가 옆으로 누운 이유도, 소리의 거처도, 소리에 관여하는 검은빛도 이해할 것만 같다. 뻥이다. 어이쿠, 얼른 저 물소리 뒤로 숨어야겠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04
기도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저기 홀로 서서 제자리 지키는 나무들처럼 기도는 땅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저기 흙 속에 입술 내밀고 일어서는 초록들처럼 땅에다 이마를 겸허히 묻고 숨을 죽인 바위돌처럼 기도는 간절한 발걸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깊고 편안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저녁별처럼 - 문정희 시집 `나는 문이다`(뿔·2007)문정희의 시는 언제나 대담하고 거침없다. 그의 시가 가진 어법은 솔직하고 단도직입의 그것이다. 그의 시는 여성인 시인이 세상을 향해 언제나 큰 소리로 내뱉고 싶었던 `내 몸의 말`로 만들어진다. “응”이라는 글자를 남녀의 성 행위로 비유한 `응`, “밥을 나와 함께/가장 많이 먹은 남자/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를 노래한 `남편`, 부처의 얼굴을 잃고 자연의 돌로 돌아가는 군위 인각사 앞마당 석불을 노래한`돌아가는 길`, “키 큰 남자를 보면/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라고 하는 `키 큰 남자를 보면` 등의 시편들이 내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이다. 위 시 `저녁별처럼`은 `기도`에 관한 노래다. 문정희가 부르는 이 노래는 째째하게 교회나 성당, 절간 같은 어느 한 장소에 얽매여 있지 않다. 특정 종교의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면서도 그 장소 모두에 발을 대고 있음이다. 진정한 기도는 그러한 것이리라. “땅에다/이마를 겸허히 묻고/숨을 죽인 바위돌처럼”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懺悔)하고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노력을 다하는 `기도`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깊고 편안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몸이 바로 새 세계를 여는 문(門)이 되는 것이리니. 아, 그러고 보니 시집 제목이 `나는 문이다`로 되어있다. 이 뭐꼬?.해설이종암·시인
2009-08-03
일주문 두리기둥처럼 거침없이 위로 솟구친 향나무 한 그루. 이종문 시인이 그대는 왜 여기 우두커니 서 있는가 물으니, 내가 왜 여기 우두커니 서 있는지 그대가 궁금해 하라고 여기 우두커니 서 있다고 대답한 바로 그 나무다. 괜히 자옥산 기슭 옥산서원 뜰에 우두커니 서서 이종문을 궁금하게 한 멋대가리 있는 향나무에게 다가서서, 거친 살결을 짚으며 오늘은 내가 묻는다. 그대, 이 추운 겨울날 여기 우두커니 서서 무얼 하시는가 했더니, 그냥 심심해서 하늘에 대고 글씨를 쓰고 있다며, 이렇게 한 획 그어올리는 데 한 사백년쯤 걸렸다며, 지금도 그어올리는 중이니 말 같은 거 걸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대가 쓰고 있는 글자 대체 무슨 자냐고 했더니 안 그래도 추운데 이종문보다 더 귀찮은 놈이 왔다며, 뚫을 곤자(ㅣ)도 모르는 놈이 시인이랍시고 돌아다니느냐며. - 계간지 `문학마당`(2006년 봄호)대구 시단에 50~60대 시인들의 모임인 `시오리`가 있다. 여러 시인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 작은 문학 단체에 찐빵의 앙코같은 존재인 김선굉 시인이 있다. 그는 고스톱도 잘하고 우스개 소리도 욕도 잘한다. 또 나만 보면 “우리 종암이 꼬치 많이 컸나 한번 보자.”며 손을 내미는 재미있는 시인이다. 그가 쓴 시들도 시인을 닮아 무척 재미가 있다. 이 시도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우두커니 나무`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김선굉 시인이 그냥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다.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 마당에 서 있는 키가 큰 향나무는 이제 그 이름이 `우두커니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나무는 “멋대가리 있는 향나무”이다. 한문학자이자 시조 시인 이종문을 무척 궁금하게 한 나무이고, 또 김선굉을 두고 “뚫을 곤자(ㅣ)도 모르는 놈이 시인이랍시고 돌아다니느냐며.” 따끔하게 훈계를 하는 그런 멋진 나무다. 서예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5개월 남짓 된, 붓글씨에 아직 미숙아인 이종암 시인이 조만간 그를 찾아가 또 한 수 가르침을 배울 것 같다. 회재 이언적 선생과 친구이기도 했을 그는 이제 많이 바쁘고 귀찮게 되었다. 지금도 그는 올곧은 “뚫을 곤자(ㅣ)” 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겠지. 그 글쓰기는 언제 다 완성될까? 한갓 사물인 나무와 소통(疏通)하는 시인도, 그 시인의 가슴속에 자리한 `우두커니 나무`도 참 멋대가리가 있는 존재이긴 마찬가지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7-20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나에게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 오탁번 시집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2002)무더운 여름 날씨다. 삼계탕이니 보신탕 같은 영양식이 절로 생각나는 철이다. 어느 말복날, 오탁번 시인이 충북 제천의 고향 마을에 내려가 동네 사람들과 같이 가마솥에 개 한 마리를 푹 삼고 술추렴을 한 모양이다. 그 체험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 재미난 시 `엘레지`이다. 구신(狗腎 )이라는 개의 자지(좆)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 `엘레지`라는 걸 시인이 몰랐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과 반성이 이 시의 창작 모티프가 되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에서 보는 농부의 거침없는 말과 대학 교수의 당황한 속내가 참 해학적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인시인은 놀라면서도 절망한다. 비가(悲歌) 혹은 만가(輓歌)를 뜻하는 외래어 `엘레지(elegie)`는 알고 있으면서도 순우리말인 `엘레지`를 몰랐다니. 시골 농부도 알고 있는 것을 그것도 30년 동안이나 일류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쳤다는 교수가 몰랐다니. 이 놀라움과 반성은 “그날 밤 꿈에서” “가마솥에서 익는/나의 엘레지를 보”는 것으로 변용된다. 오탁번의 시는 재미있다. 위 시 `엘레지`를 비롯하여 `앞으로는 안 하고 뒤로 했다`라는 시속의 남녀 음담을 비련의 가족사로 환치시킨 `굴비`, “엄마가 동생공장공장장”이라는 동시 `엄마` 등등의 시들은 해학과 천진난만한 동심의 빛으로 그려져 있다. 무더운 여름날 읽은 오탁번의 시 `엘레지`, 보신탕 한 그릇 족히 먹은 듯하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7-13
지금 꼭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고 싶은데 너는 내 곁에 없다. 사랑은 동아줄을 타고 너를 찾아 하늘로 간다. 하늘 위에는 가도 가도 하늘이 있고 억만 개의 별이 있고 너는 없다. 네 그림자도 없고 발자국도 없다. 이제야 알겠구나 그것이 사랑인 것을, - 김춘수 시집 `쉰한 편의 悲歌`(현대문학·2002)대여(大餘) 김춘수 시인. 그가 우리들 곁을 떠난 지가 벌써 5년이 다 되어 간다. 김춘수 시인이 떠난 후 대여(大餘)라는 말의 뜻처럼 한국 시단에는 큰 여백이 생겨난 것만 같다. 사물(事物)의 본질 인식을 위해 자신의 언어를 가파른 벼랑으로 끝없이 몰고 갔던 `꽃`의 시인 김춘수. 우리 시사(詩史)는 그를 모더니즘 시인이라 부른다. 그런 그가 모더니즘 혹은 `무의미의 시`라는 긴 길을 에돌아 우리 삶의 직접성에다 자신의 언어를 부려놓고 있다. 그것은 쉰다섯 해를 시인과 삶을 함께 했던 아내의 죽음(1999년) 때문이었다. 부인과 사별(死別) 후 시인은 2년 만에 새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2001)를 펴냈다. 평소 그의 시작(詩作)에 비하면 놀라울 창작열이었다. 지금 여기에 없는 아내(=천사)를 찾아가는 시인의 간절함과 그 천사가 자기 옆자리로 찾아드는 미세한 기미를 애절하게 붙든 언어의 흔적이 시집의 내용물이다. 89편을 2년 만에 펴낸 것은 여든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의 대단한 시적 열정과 아내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아내를 만나는 작은 기미를 시인은 `an event`라고 명명했다. 사건이라는 이 `an event`라는 제목의 시는 유고 시집 `달개비꽃`(현대문학·2004)에도 똑 같은 제목으로 새롭게 그려졌다. 시집 `거울 속의 천사`이후 또 1년 만에 발간한 시집이 `쉰한 편의 悲歌`(현대문학·2002)였다. 인생 말년에 릴케가 `두이노의 비가`를 남겼다면 김춘수는 `쉰 한 편의 悲歌`를 세상에 내놓았다. 대여 김춘수 시인 말년의 시편들은 전부 그의 아내가 쓰게 한 것은 아닐까. 우리 곁을 떠나간 시인은 천상에서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아내를 만났을까?해설이종암·시인
2009-07-08
그대 자리 온기는 그대로인데 손 내밀어 보면 그대는 없고 점, 점,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따뜻했던 날들의 추억 그대는 지워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차마 지울 수 없구나 해 설핏 기울고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날아올랐지만 떨칠 수 없는 그대 생각 - 김인호 야생화 포토포엠 `꽃 앞에 무릎을 꿇다`(눈빛·2009)다음 카페 `섬진강`의 주인장 김인호 시인이 최근 펴낸 세번째 시집 `꽃 앞에 무릎을 꿇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시집 안쪽에 “꽃의 말을 전합니다”라는 고운 말씀을 보태어 보내준 김인호 야생화 포토포엠 `꽃 앞에 무릎을 꿇다`, 그 제목의 의미가 참으로 간절하게 와 닿는다. 시집의 편재는 일반 시집들에 비해 특별나다. 야생화클럽 운영위원이기도 한 김인호 시인이 수년 동안 수행자처럼 우리나라 야생화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직접 찍은 사진 위에, 혹은 옆에 시인이 직접 쓴 시가 놓여있다. 시집 속에는 컬러로 인쇄된 68 송이의 야생화와 그 꽃을 노래한 68편의 창작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 개별 꽃들에 대한 설명도 첨부되어 있어 꽃과 사귀는데 좋은 공부가 되고, 일급의 사진 솜씨로 꾸며져 있어 시집이 참 예쁘고 곱다. 당신은 `두루미천남성`이라는 야생화를 아는가? 5~6월에 꽃을 피우는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이 야생화는 꽃이 피었을 때 그 전체 모양이 마치 두루미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이어서 그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김인호 시인이 노래한 시 `두루미천남성`은 슬프기 그지없다. “그대 자리 온기는 그대로인데/손 내밀어 보면 그대는 없고”라는 시의 첫 구절에서 보듯 날개를 펼친 두루미처럼 떠나 가버린 사람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노래다. “나는 차마 지울 수 없구나”와 “날아올랐지만 떨칠 수 없는 그대 생각”의 시구에서 나는 첫사랑의 상처를 평생 안고 가는 이의 내면의 무늬를 본다. 또 무릎을 꿇고 동그란 눈을 뜨며 들꽃과 대화를 나누는 시인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와 소주잔을 기울였던 게 언제였던가? 그립다. 해설이종암·시인
2009-07-07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 현대문학 2004년 9월호시의 첫 행에서 보듯 시인은 호수와 오리를 보고 있는 제3의 화자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시가 진행되면서 그 시적 화자는 오리와 동일 인물로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래서 이 시의 실제적 화자는 오리다. 이 오리의 상대는 그가 머물고 살았던 호수다. 오리와 호수, 이 둘의 상관관계는 가학(加虐)과 피학(被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오리인 `내`가 호수에 머물며 사는 동안 호수인 `너`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끝내 그 호수를 떠나게 되었다는 게 시 `오리`의 전체 내용이다. `너`라는 처소에 머물다 떠나버린 `내`가 그 때 너와 나의 어긋난 관계에 대한 회억(回憶), 여기에는 지난 삶의 행위에 대한 시적 화자의 후회와 반성의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이윤학 시인의 시적 특장인 진정성과 묘사의 시작 태도가 두드러진다. 시인은 섣불리 독자에게 무얼 전달하려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객관적으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그려낸 풍경 위에 시인 자신의 솔직한 삶을 가만히 얹어놓고 있다. 이를테면 풍경의 내면화다. 당신의 넓은 마음에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와 “내 날개는/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라는 시인의 금이 간 내면의 저 말이 가슴 아프게 한다. 호수를 떠난 오리의 몸에는 호수의 물결이, 호수에는 헤엄쳐 다니던 오리의 몸짓이 오래 남아 아프게 할 것이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6-29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 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 (문전석로반성사)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 시문집 `가림세고(嘉林世稿)``옥봉집(玉峰集)`은 조선 선조 때 옥천 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조원의 소실(小室)이 된 숙원이씨 이옥봉의 시집이다. 조원·조희일·조석형 3대(代)의 시문(詩文)을 묶은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유교적 가부장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서출(庶出)로 더구나 여자로 태어난 것 때문에 시를 마음껏 써보지 못하고, 또 시 창작으로 남편과 영원히 헤어져 살아야 했고 끝내 자신이 쓴 시를 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류 시인 이옥봉. 그가 남긴 32편의 한시는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다림과 그리움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칠언 절구의 `몽혼(夢魂)`도 기다림과 그리움의 노래다. 임을 만나기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니 꿈속의 넋을 빌리는 가정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애절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꿈속의 넋인 몽혼(夢魂)이 그리움에 목메어 하도 찾아 달려가 당신 사는 문 앞의 돌길이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는 저 여인의 깊은 한(妾恨多)을 어찌할꼬? 시적 화자가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가 너무 애틋하고 절절하다. 비운의 모습으로 끝나버린 여인 이옥봉의 삶과 그 한이 안타깝고 애절타. 내 전생(前生) 또 그 전생의 삶에서 이러한 여인을 남겨 두지는 않았는지? 그녀의 다른 시 오언 절구 `규정(閨情)`이라는 작품도 애절한 기다림과 그리움의 노래다. “有約來何晩(돌아온다 언약해놓고 어찌 이리 늦나요.)/庭梅慾謝時(뜰에 핀 매화는 벌써 시들려 하는데)/忽聞枝上鵲(문득 가지 위의 까치소리 듣고서)/虛畵鏡中眉(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려요.)” 이 시의 화자는 까치 우는 소리에 새로 화장을 하며 임을 기다린 게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부질없는 것인 줄 알면서 또 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는 저 여인의 마음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6-25
밤마다이 산 저 산울음의 그네를 타는소쩍새 한 마리섬진강변 외딴집백 살 먹은 먹감나무를 찾아왔다저도 외롭긴 외로웠을 것이다.- 이원규 시집 ‘옛 애인의 집’(솔·2003) 빨치산의 자식 이원규 시인. 입산, 환속, 노동해방문학, 지리산, 생명평화결사 삼보일배 등의 이력을 가진 이원규 시인은 언제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진보진영 문학 단체의 실무와 언론사 기자로 활동하던 10년간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는 홀연히, 표표히 지리산의 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중고 오토바이 한 대로 지리산 자락에서 새 삶을 꾸린지 6년 만에 펴낸 시집이 ‘옛 애인의 집’이다. “밤새 너무 많이 울어서 두 눈이 먼 사람이 있다”(‘부엉이’ 전문)의 부엉이도 그렇고 위 시 “밤마다/이 산 저 산/울음의 그네를 타는//소쩍새 한 마리”는 시인 자신의 등가물일 테다. 그는 이 생에서 ‘외로움의 울음’ 때문에 늘 ‘길 위’를 서성이며, “세상 처처 곳곳 옛 애인의 집처럼 기웃거리며 들고나는”(박남준)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삶 앞에서 정직하고 용감한 시인이다. “길이라면 어차피/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다”(뼈에 새긴 그 이름)라는 그의 진술처럼 자기 앞에 맞닥뜨린 길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걸어가는 것 또한 삶을 바르게 사는 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원규형! 처처가 형의 집일 테지만 이제 그만 외로움의 울음을 끝내고, 형의 작은 집 하나 장만하면 어떨까요?해설이종암·시인
2009-06-16
一片花飛減却春 꽃잎 하나 날아도 봄이 줄어드는데일편화비감각춘風飄萬點正愁人 어찌 보리, 바람에 우수수 지는 모양!풍표만점정수인且看欲盡花經眼 눈 앞을 스쳐 사라져 가는 꽃들 바라보면서차간욕진화경안莫厭傷多酒入脣 지나치기 쉬운 술 입술 들어옴 마다 마시랴.막염상다주입순江上小堂巢翡翠 강가의 작은 정자(翡翠) 비취 깃들고강상소당소비취苑邊高塚臥麒麟 어원(御苑) 곁 높은 무덤 뒹구는 기린(麒麟)!원변고총와기린細推物理須行樂 이 세상 모름지기 즐겨야 하리니세추물리수행낙何用浮名絆此身 뜬 이름으로 이 몸 매어 무엇 하리?하용부명반차신- 이원섭 역해 ‘두보시선’(현암사·2006) 우리는 중국의 시를 말할 때는 으레 당(唐)나라를 제일로 들고, 당시(唐詩)를 말할 때면 이백과 두보를 거론하는 것을 당연지사로 알고 있다. 호방한 풍류의 기상이 넘치는 이백의 시가 도교적 색채가 짙다면 사실주의적 현실 인식을 중심으로 하는 두보의 시는 유교적이다. 그런데 757년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은 당나라의 정치 현실은 물론 두보(44세)의 삶을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이러한 현실적 삶의 파탄이 두보 시의 내용과 빛깔을 어둡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시 ‘곡강이수(曲江二首)’는 좌습유라는 벼슬을 하면서 장안(長安)에 있을 때 쓴 작품이다. 삶의 처지가 비교적 순탄할 때 쓴 시여서 ‘곡강이수(曲江二首)’ 모두 봄날의 꽃과 술을 중심 제재로 하고 있는 호탕한 낭만적 서정시이다. 고희(古稀)라는 말의 출처로 널리 알려진 ‘곡강(曲江)2’보다 나는 “꽃잎 하나 날아도 봄이 줄어드는데(一片花飛減却春)”라고 봄날이 떠나가는 아픔을 노래한 ‘곡강(曲江)1’이 더 좋다. 꽃잎이 점점 떨어지고 봄날이 다 간다. 시인이여, 어찌 술을 마시지 않으랴. 떠나는 봄날의 아무 마당에서고 자리를 펴 술을 마시자. “뜬 이름으로 이 몸 매어 무엇 하리?(何用浮名絆此身)”라는 문장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봄날이 가는데 우리 술을 마시자.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삶 또한 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저 꽃잎처럼인데.해설이종암·시인
2009-05-21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 오늘 가득하다 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滿開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 통신망을 갖게 되지 光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카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게 사랑을 採蜜하고 싶은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알詩(세계사·1997)봄을 이끌고 오는 꽃들의 행진 맨 앞에 하얀 매화와 노오란 산수유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 남쪽 포항에는 그 꽃들이 엊그제 막 지나갔는데, 그들은 지금 한반도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서울까지는 갔는가 몰라. 정진규의 ‘산수유-알1’는 서울 한복판 수유리 시인의 집 뜨락에 노오란 꽃숭어리들로 만개한 산수유와 그 꽃에 노오랗게 취해 잉잉거리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 꿀벌떼들의 풍광, 또 거기에 그대로 교접(交接)된 정진규 시인의 몸과 마음이 펼쳐놓는 한바탕 사랑의 잔치 마당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 모양이 가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이다. 시인은 꽃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왕복으로 드나드는 꿀벌을 보면서 ‘사랑의 光케이블’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라고 자신의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노오랗게 채밀(採蜜)할 사랑을 갖고자 한다. 꽃이 사랑이요, 사랑이 생명이다. 그건 알의 본래적 모습 바로 그것이다. 정진규 시인의 연작시집 ‘몸詩’(세계사·1994)와 ‘알詩’(세계사·1997)는 지난 90년대 우리 시단에 생명(생태)과 몸(육체)의 문제를 분명하게 각인시켜놓은 중요한 시집이었다. 시집 속에 수록된 시편들의 형태가 대부분 산문시인데, 그 줄글이 갖는 리듬감이 또한 놀랍다. 평범한 운문시의 율격을 훌쩍 뛰어넘는다. 지금 다시 소리 내어 시를 낭독해보라. 시의 리듬을 따라 일어서는 사랑의 꽃 사태를 만날 테니.해설이종암·시인
2009-03-26
수유리라고는 하지만 도봉산이 바로 咫尺이라고는 하지만 서울 한복판인데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 훌륭하다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벌떼들, 꿀벌떼들, 우리집 뜨락에 어제 오늘 가득하다 잔치잔치 벌였다 한 그루 활짝 핀, 그래, 滿開의 산수유, 노오란 꽃숭어리들에 꽃숭어리들마다에 노오랗게 취해! 진종일 환하다 나도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두근거렸다 잉잉거렸다 이건 노동이랄 수만은 없다 꽃이다! 열려 있는 것을 마다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사전을 뒤적거려 보니 꿀벌들은 꿀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往復한다고 했다 그래, 왕복이다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 그래, 무엇이든 왕복일 수 있어야지 사랑을 하면 그런 특수 통신망을 갖게 되지 光케이블을 갖게 되지 그건 아직도 유효해! 한 가닥 염장 미역으로 새카맣게 웅크려 있던 사랑아, 다시 노오랗게 사랑을 採蜜하고 싶은 사람아, 그건 아직도 유효해!- 알詩(세계사·1997) 봄을 이끌고 오는 꽃들의 행진 맨 앞에 하얀 매화와 노오란 산수유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 남쪽 포항에는 그 꽃들이 엊그제 막 지나갔는데, 그들은 지금 한반도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서울까지는 갔는가 몰라. 정진규의 ‘산수유-알1’는 서울 한복판 수유리 시인의 집 뜨락에 노오란 꽃숭어리들로 만개한 산수유와 그 꽃에 노오랗게 취해 잉잉거리며 잔치를 벌이고 있는 꿀벌떼들의 풍광, 또 거기에 그대로 교접(交接)된 정진규 시인의 몸과 마음이 펼쳐놓는 한바탕 사랑의 잔치 마당을 펼쳐 보이고 있다. 그 모양이 가히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이다. 시인은 꽃을 찾아 11킬로미터 이상 왕복으로 드나드는 꿀벌을 보면서 ‘사랑의 光케이블’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의 사랑도 일찍이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찾아 왕복했던가 너를 드나들었던가”라고 자신의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노오랗게 채밀(採蜜)할 사랑을 갖고자 한다. 꽃이 사랑이요, 사랑이 생명이다. 그건 알의 본래적 모습 바로 그것이다. 정진규 시인의 연작시집 ‘몸詩’(세계사·1994)와 ‘알詩’(세계사·1997)는 지난 90년대 우리 시단에 생명(생태)과 몸(육체)의 문제를 분명하게 각인시켜놓은 중요한 시집이었다. 시집 속에 수록된 시편들의 형태가 대부분 산문시인데, 그 줄글이 갖는 리듬감이 또한 놀랍다. 평범한 운문시의 율격을 훌쩍 뛰어넘는다. 지금 다시 소리 내어 시를 낭독해보라. 시의 리듬을 따라 일어서는 사랑의 꽃 사태를 만날 테니.해설이종암·시인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 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 놀아요 선생님(창비·2007) 남호섭의 새 동시집 ‘놀아요 선생님’은 ‘타임캡슐 속의 필통’(창비·1995)이 나온 지 12년 만에 발간되었다. 12년이라니, 그동안 남호섭의 시집을 애타게 기다려온 독자에게 좀 심했다 싶다. 그래도 그는 시집 앞머리에서 어느 시인이 19년 만에 좋은 시집을 발간한 것을 상기하며 시집 내는 일을 부끄러워했다. 동시를 쓰는 남호섭 시인은 지금 경남 산청 지리산 자락에 있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 교사다. 이번 동시집 ‘놀아요 선생님’은 지리산 자락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그 아래서 씩씩하게 뛰놀고 구김살 없이 공부하는 아이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얻어진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위 동시 ‘봄비 그친 뒤’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소리 내어 한 번 읽으면 그 빛깔과 내용이 단번에 다 들어온다. 비 갠 날 아침에 하얗게, 빨리 달려가 산을 씻겨주는 저 고마운 산안개를 나는 남호섭 시인으로 읽는다. 각각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연 속 대안학교를 찾아온 아이들에게 우리말(시)과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노고에 나는 두 손을 모은다. 한때 나는 남호섭 시인과 같은 직장 같은 문학 단체에서 활동을 한 적 있다.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그때가 무척 그립다. 가을 들녘에 핀 코스모스 같이 단아한 남호섭 형! 그가 보내준 시집으로 짐작건대 그곳의 삶이 참 좋아 보인다. 이 봄꽃 다 피고 지기 전에 지리산 아래로 훌쩍 한 번 달려가야겠다. 그곳에 가서 나도 말갛게 세수를 해야지. 해설이종암·시인
2009-03-23
대형할인점 조현명모든 날의 은혜를 받아드는 날마음의 성소를 찾아라수치에 따라 달라지는 자본의 은혜를 구매하라구매하라성소에서 구매하라고르고 찾는 눈빛 기도와구매욕을 돋우는 찬양의 은혜스러움으로너는 성소에서 나를 만나고은혜를 나누며기뻐하고 기뻐하며 나의 이름을 전하라끊이지 말고 성소를 찾아라네 마음은 새의 심장처럼 가벼워 파닥파닥 뛸 것이니네가 끝내 모든 것을 소유할 것이다네 주머니가 채워져 있는 동안에만네 주머니가 채워져 있는 동안에만자본주의의 속성을 시에서 엿본다. 경전에 종교적 윤리를 바탕두듯 자본주의 물질성은 소유를 낙으로 여긴다. 하나의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행복이고 기쁨이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전파하는 그 이면에는 이익추구의 무서운 정신이 경전처럼 버티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성소다./해설 하재영·시인
2007-02-08
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행운은- 고작한 뼘 길이라는 생각누군가 이제는 아주 끝장이라고한 그루 삶의밑동이며 가지를 잘라 내던졌을 때행운은 거기에서 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거라는 생각잎이 나고 싹이 나는 걸발견하는 거라는 생각그리하여 울며 울며 그 나무를 다시 삶의 둑에 옮겨 심는 거라는 생각행운은, 토막이라는 생각행운은- 집집마다수반 위에 올려놓은 토막이라는 생각 사람은 늘 행운이 따라주길 바란다. 행운과 불운은 상두마차로 사람에게 찾아온다고 한다. 만남과 헤어짐. 태어남과 죽음. 토막토막의 행운이 사람의 앞길에 계속 놓여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권 한 장의 행문처럼 말이다. 해설 하재영·시인
2006-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