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히말라야`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다
이번 겨울에 흰 눈에 덮인 산 등산으로는 마지막일 것 같아 설 연휴기간에 필자는 경남 함양에 있는 남덕유산을 등산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림산악회원들과 함께 출발해 함양에 도착하니 오전 9시 반이었다. 언제나처럼 등산에 대한 기본 주의사항, 특히 겨울 등산에서 준비하거나 유념해야할 사항을 전해 듣고는 장비를 꼼꼼히 챙겨 등산길에 나섰다. 무룡산·삿갓봉 거쳐 남덕유 이르는 주능선 길이만 20㎞ 넘어
눈 덮인 구상나무·주목,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 등 설경 장관
올 겨울은 날씨가 이상기온을 보여 포근한 편이다. 그러나 1월초에 한 두 차례 강추위와 강풍이 있어 겨울등산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해왔다. 눈이 내려 얼어있는 산은 정말 난코스다.
올해 들어 다녀온 세 곳은 무리를 했다. 그래서 다녀온 직후에는 “이번 주말에는 못가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주말이 닥치면 마음이 변해 등산을 다녀왔다. 산이 눈앞에 어른거릴 적마다 필자는 이탈리아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말을 생각해본다.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또 새롭게 느끼고 싶다`는 이 말은 따지고 보면 두려움 속에서 경외하는 자연에 대한 믿음과 정열이 남아있는 명언이다.
메스너는 히말라야의 8천m 이상 고봉을 의미하는 14좌를 최초로 모두 정복한 사람이다. 특히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을 홀로 무산소 등정한 최초의 사람으로 유명한데, 1970년 낭가파르밧을 시작으로 1986년 로체에 오르면서 8천m 이상 고봉을 모두 등정한 산악인이다.
그 후에 등반 경험을 바탕으로 20권이나 되는 저술을 남겨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산악문학상을 3번이나 수상한 산악인으로 죽음의 지대에서 “왜 사람은 산을 오르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다.
왜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가? 물음에 대한 답이 최근에 나온 `낭가파르밧`이란 영화 속에 있다. 이 영화는 전설의 산악인 메스너에 관한 내용으로 `벌거숭이`란 뜻을 갖고 있는 낭가파르밧을 등정하는 고난을 하나하나 헤쳐 나가는 영화로 진한 감동을 준다.
그는 영하 40도의 추위, 시속 80km의 강풍과 심장을 터트릴 듯한 희박한 산소만이 존재하는 산에서 많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산을 올라 인간의 의지를 세상에 증명한 자이다.
산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만큼 산악인들은 자연을 섬기며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한발자국이라도 산에 가까이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서두에 산악인의 전설 메스너를 말하는 것은 국내에 있는 높이 1천m 정도의 산에 오르는 등산도 힘겨운데, 8천m 이상이나 되는 험산을 그것도 겨울에 올랐다는 것은 정말 위대함을 느끼고 감동하기 때문이다.
남덕유산은 행정구역으로 전북 무주군,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 거창군 등 2개도 4개 군에 걸쳐 있으며, 북덕유에서 무룡산(1천491m)과 삿갓봉을 거쳐 남덕유에 이르는 주능선의 길이만 20㎞가 넘는 거대한 산이다.
남덕유산 코스는 4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는 영각사에서 출발해 중봉을 거쳐 남덕유산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코스로 4시간 정도 걸리고, 2코스는 육십령고개에서 시작해 할미봉, 남덕유산을 거쳐 영각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5시간 걸린다.
제3코스는 거창군 북상면의 명천리 버스 종점에서 출발해 삿갓골재, 월성재를 거쳐 남덕유산에 올랐다가 영각사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제4코스는 주능선을 타는 코스로 영각사에서 출발해 남덕유 정상 - 월성재 - 삿갓골재 - 무룡산 - 동엽령 -향적봉에 올랐다가 백련사로 내려오는 코스로 7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 중에서 우리 일행들은 4코스 가운데 영각사 - 남덕유산 - 월성재 - 삿갓봉 - 삿갓골재로 해서 황점 통제소로 내려오는 코스로 잡았다.
전체 거리는 12km에 소요시간은 6시간 정도다.
남덕유산 등산은 영각사 뒤편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영각사는 합천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헌강왕 2년(876년) 심광 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조선조까지 몇 번 중수를 거치고 190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창됐고,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다시 사찰을 중건한 아담한 절이다.
남덕유산의 눈꽃 풍경이 빼어남은 이미 소문이 나 있는 상태다. 그래서 설경을 기대하고 찾아온 등산이지만 어제 내린 비로 첫 산행 길부터 잔설은 보이지 않는다. 해발 600미터가 되는 초입부터 부드러운 산길을 따라 부지런히 걷는다.
계곡의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이리저리 살펴봐도 나무위에 피어있는 눈꽃은 보이질 않는다. 등산로가 정비되어 있긴 하나 너덜지대를 지나 영각재 못미쳐부터 1시간가량 가파른 길이 계속된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한 계단씩 밟고 위로 올라선다. 대체적으로 계단이 있는 곳은 가파르거나 오르내림이 가파른 곳에 설치돼 있다. 계단을 딛고 올라서고 바위지대가 다소 험로다.
영각재에 오르고 나면 저 멀리 북덕유의 능선이 보이는데 여기서 가까이 남덕유산의 정상 까지는 800m 정도 남았다. 산 정봉에 오르는 길은 또 다시 철제 계단으로 이어지는데 좁은 통로라 내려오는 사람과 겹치면 한사람이 기다려야 한다.
조심조심 올라 드디어 남덕유산(1천507m) 정상에 섰다. 출발지점에서 3.4km 지점이지만 계단이 길고 많아서인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 산은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어머니의 산)이라 하여 `덕유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또한 `작은 히말라야`라고 불릴 만큼 설경을 자랑하는 산이다. 이 산은 남덕유산과 북덕유산으로 나누어지는데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향적봉(1천614m)은 북덕유산에 있다.
덕유산에는 늦봄이면 20㎞의 능선과 등산로에 무더기로 피어나는 철쭉 군락이 볼 만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구천동계곡에 피서객들로 가득 차고,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 겨울에는 눈에 덮인 구상나무와 주목,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가 장관을 이루는 사계절 풍광이 좋은 곳이다.
정상에 올라서니 날씨가 변했다. 하늘엔 구름이 벗겨지고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실 정도다. 주변 풍경을 살펴보니 저 멀리 북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이 우뚝서있다. 안내판을 보니 여기서 향적봉까지 거리는 15km로 나와 있다.
정상에서는 힘들게 올라온 등산객들이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멀리 펼쳐지는 남덕유산의 풍경을 보면서 좋아라한다. 필자도 사진 몇 판을 찍었다. 멀리 향적봉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겨울날씨가 봄같이 따뜻함을 느낀다. 자연의 운치를 마음에 담으면서 잠시 점심식사를 한 후에 다시 하산을 한다.
한참 내려가니 중간 중간 급경사가 있어 조심조심 내려선다. 응달쪽에 남아있는 잔설이 얼어붙어있어 엉금엉금 기기도 한다.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지는데 빙판이다 보니 신경이 쓰인다.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났다. 직진을 하면 서봉으로 가는 길이고 우회전을 하면 삿갓봉 쪽으로 능선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 삿갓골재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빙판진 응달구간을 지나다 보니 반시간 가량이 더 걸린다.
일행은 삿갓봉을 향해 백두대간의 능선을 타고 걷는다. 양지쪽 햇살을 받는 곳에서는 마치 봄 등산 같은 기분이 든다. 한 시간 남짓 걸려 월성재에 도착해 잠시 머물고서는 다시 삿갓봉을 향해 걸음을 시작한다.
능선을 걸으면서 멀리 산들과 산골짜기를 보니 군데군데 흰색이 드러나 잔설이 쌓인 것을 볼 수는 있지만 요즘같이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면 산 빛은 곧 초록으로 변하리라.
능선을 타고 계속 직진해 삿갓봉에 도착했다. 산이 삿갓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남덕유에서 북덕유로 가는 길목에 있어 산 행군을 하는 전문가들이 한 번씩 거쳐 가는 봉이다. 필자와 동행했던 타지에서 온 등산객들이 다른 길로 가고 삿갓봉까지 온 등산인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삿갓봉을 지나서 대피소에 도착했다. 삿갓재 대피소는 궂은 날씨의 겨울 등산에 대비해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지어놓은 건물로 주변 지대가 평평한 곳에 있어 휴식장소로도 알맞다.
여기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황적마을까지는 4.2km다. 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던 일행들은 다시 일어나 마지막 코스로 향한다. 조금 가다보니 하산길 계단을 만난다.
등산 초보자들에게는 겨울 등산이 어려운데, 이곳 남덕유산은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하면서 등산로를 따라 소나무 숲길을 걷고 하산 길을 걷는다. 평탄한 등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 종점인 황점마을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반이 다 됐는데, 꼬박 7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정리를 하고 차에 올라 이번 등산을 생각해본다. 실은 겨울의 멋진 설경을 보려 눈꽃 풍경이 장관을 이루는 남덕유산에 왔건만 전날 한차례 비가 내렸고, 또한 포근한 날씨로 인해 설경을 구경하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깝다.
하지만 남덕유산이 품고 있는 어머니 같이 따뜻한 마음과 장장 30km 길게 펼쳐지는 산 능선들을 바라보면서 오밀조밀하게 와 닿는 자연풍경으로 위안을 받았으니 다행이다. 게다가 산행하는 내내 겨울 속에서 봄 햇살을 가슴에 안았으니 이것도 자연이 주는 산행의 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