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가 있다지만 찰지기가 묵만 하겠어 게다가 도토리묵의 캄캄함이라니 그의 대답 기다리다 묵을 떠올린 나를 탓한들, 도토리를 주워다 가루를 만들어 묵을 쑤고 접시에 맛깔스럽게 담아 앞에 놓으면 말없이 그 묵 한 접시 다 비우고 있는 그를 떠올리고 있는 나를 탓한들, 해마다 도토리는 열리고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줄곧 묵을 쑤고 있을 나를 탓한들, 오늘도 묵, 묵부답 한 접시 ……. 묵을 보면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캄캄한’ 색도 그렇고, 묵묵부답 아무 말 않는 듯한 모습도 그렇다. 묵과 같은 마음이 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렇다. ‘그’를 떠올리는 마음도. “묵 한 접시 다 비우”곤 했던 그 역시 묵처럼 과묵한 이 아닌가. 그렇게 ‘그’에 대한 기다림과 떠올림 속에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세월을 보낼 것 같은 시인의 삶 역시 묵 같다. “줄곧 묵을 쑤고 있”는 삶을 살 테니까. <문학평론가>
2025-07-03
나는 절반쯤은 개다. 나는 절반쯤은 풀꽃이고, 나는 절반쯤은 비 올 때 타는 택시. 나는 절반쯤은 소음을 못 막는 창문이다. 나는 절반쯤은 커튼이며. 나는 절반쯤은 아무도 불지 않은 은빛 호각. 나는 절반쯤은 벽. 나는 절반쯤은 휴지다. 절반쯤 쓴 휴지다. 네 눈물을 닦느라 절반을 써버렸다. …..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다른 사물로 변하는 것이 ‘나’ 아닐까. 물론 절반 정도만. 다른 절반은 의식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절반인 사물이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 개가 되었다가 풀꽃도 되고, 소음을 막는 창문이 되거나 비오는 날 택시가 되는 ‘나’. 이 여러 사물로의 변신은 살면서 맺게 되는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네 눈물을 닦느라 절반을 써버”린 휴지가 되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5-07-02
그늘과 그림자는 마주 보았다 그것밖에 할 일이 없었지 헤어지지 말자고 누가 먼저 떠나지 말자고 밖이 보고 싶어도 참고 견디자고 밤이 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지라도 반짝이는 모든 것이 두려웠지 그래서 국경 너머로 달아나기도 했던 모르는 아이가 둘 사이에 들어와 휘젓고 짓밟았다 너와 나는 길들여졌지 방 안에서 …. 그림자는 그늘에 있고자 한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자신과 닮은 그늘이 편하기 때문. 그늘도 그림자가 편해서,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힘이 된다. 하여 둘은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하고, “반짝이는 모든 것이 두려웠”기에 “밖이 보고 싶어도 견”딘다. 하나 이 동거도 파국을 맞는데, “둘 사이에 들어”온 ‘모르는 아이’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위의 시는 시인 내면에서 벌어진 드라마를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5-07-01
새들이 무수히 불을 향해 날아든다 무수히 그들은 떨어지고 무수히 그들은 부딪치고 무수히 눈이 멀고 무수히 부서지며 무수히 그들은 죽어간다 등대지기는 이런 일을 차마 견딜 수가 없다네 새들을 그는 새들을 몹시 사랑하니까 그대 그가 말한다 어쩔 수가 없어 될대로 되라지! 그는 불을 모두 꺼버린다 멀리서 짐 실은 배 하나가 가라앉는다 섬에서 오던 배 새를 싣고 오던 배 섬에서 온 무수한 새들 물에 잠긴 무수한 새들 .. 위의 시는 어떤 슬픈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배를 인도하기 위한 등대가 있다. 이 등대 불빛에 새들이 날아든다. 불빛에 눈이 멀어 등대에 부딪친 새들은 “무수히 죽어”가고, 새를 사랑하는 등대지기는 등대 불빛을 꺼버린다. 그러자 “섬에서 오던 배”가 어디에 부딪쳐 가라앉는다. 그 배는 “섬에서 온” “새를 싣고 오던 배”여서, 새들도 수장된다. 선한 마음이 더 큰 비극을 가져올 때가 있다. 생각을 버리면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6-30
만지면 사랑과 불안이 손끝에 맺힌다 돌의 주파수는 침묵의 주파수다 깊은 안쪽 소용돌이에서 자라는 사랑 나는 이 돌에서 저 돌에게로 고백을 옮겨 담는 사람 어둠 속에서 나는 나의 유전자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가시들을 건져내고 있다 잡음이 많은 심장의 주파수 입을 벌리면 목젖에 걸린 가시가 어떤 방향을 가리킨다 새벽 세 시 내 몸은 가장 둥글게 구부러진다 밖으로 터져 나가지 못한 채 안으로 깊이 떨어지는 숨 점점 반죽 덩어리가 되어가는 몸 나는 어느 날 구(球)가 되어 가장 고독한 주파수 하나 몸 안에 가지게 될 것이다 … 누구나 마음 안에 침묵으로 이루어진 돌을 가지고 있을 테다. “만지면 사랑과 불안이 손끝에 맺”히는 ‘침묵-돌’. 그 속에는 사랑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인은 돌 속의 사랑을 다른 이의 돌을 향해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 일은 “가장 몸이 둥근 차돌처럼 구부러지고, 숨이 “안으로 깊이 떨어지는” 시간인, 어둠 짙은 “새벽 세 시”에 이루어진다. 그 시간엔 “주파수 하나” 솟아나 사랑을 다른 돌에게 고백할 수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5-06-29
여의도 한강공원 세계불꽃축제에 갔었지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 청춘도 한때 저와 같았다 불화살이 되어 날아가는 새, 찢어진 날개 수천 번 날아가고 날아갔지만 흩어지는 깃털뿐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일인칭이 아닌 비인칭으로 사라졌고 (중략) 그래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뜨거웠던 때가 있었노라 가보지 못한 곳 하늘에 불을 질렀던 생 … 나이 들어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청춘은 어떤 이미지로 떠오를까. ‘불꽃’ 아닐까. ‘불꽃축제’에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불꽃. ‘불화살’처럼 하늘로 솟구쳤으나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불타고 찢어져 청춘은 추락하지 않았던가. 하늘에서 불꽃이 지듯이. 그렇게 청춘의 새는 비상에 실패하고 사라졌을 터, 하나 시인은 “하늘에 불을 질렀던”, 그 “뜨거웠던 때”가 “영원히 기억”되리라며 불꽃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2025-06-25
필사의 힘으로 바위를 붙들고 나무가 산다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의 어미가 산다 모르는 척, 백 번의 달이 뜨고 해가 뜨고 그것들을 지나가려고 바람이 산다 바람이 빈방에 와 있다 벽에 붙은 크고 작은 행성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 절벽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린 새를 잃은 어미 새의 삶이 그러할까. 그럼에도 삶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필사의 힘으로/바위를 붙들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저 나무의 모습을 보면. 해와 달은 이들의 삶을 매일 들여다보지만 “모르는 척” 무심하다. 하나 바람은 이들을 지나치지 않는다. 이들의 ‘빈방’ 앞을 서성이다가, ‘행성’의 빛을 방에 불어넣어준다. 희망이라는 빛을. <문학평론가>
2025-06-24
우리가 떠돌며 거쳐 가는 이 들판에서 나비들은 하얀색이고 푸른 색이다. 네 손을 잡도록 허락해 다오.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라. 그 시각에는 우리가 알았던 모든 것들이 재가 되리라. 저 무상한 나비를 마음에 새겨 두라. 나비가 꽃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네 손을 잡도록, 허락해다오. 너를 가슴에 품도록 허락해다오, 하늘에 새벽이 나타날 때까지. 내가 그르든 혹은 옳든,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라. ….. 1900년대 초중반에 활동한 미국의 여성 시인 빈센트 밀레이. 그녀는 매우 활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 깊은 니힐리즘을 녹인 시-옮긴이 최승자의 시와 잘 어울리는-를 발표했다. 위의 시도 그렇다. 화자는 보통 저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여겨져 온 나비의 손을 잡고 마음에 새겨두고자 한다. 꽃에 매달린 나비의 아름다움을 따라 가기 위해서, 하여 “하루나 이틀 뒤에” 올 죽음의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서. <문학평론가>
2025-06-23
아직 나는 유년의 대륙을 찾지 못해 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 증오를 직업으로 삼은 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그리움은 쉽게 마모되고 희망은 마약인가. 가진 자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눈 부라리는 엄혹한 세상에서 나는 저주받은 시나 쓴다.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내 유년의 대륙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 가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다. …. 저주받은 시인. 현대 시인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시인은 이 운명의 전통을 살아가는 중이다. 가진 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계와는 화해할 수 없기에, 시인은 “증오를 직업으로 삼”고 “저주받은 시나” 쓰며 살아간다. “마모되”는 그리움을 품고 마약 같은 희망을 마시며. 하여, 그는 “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행복했던 유년이 있던 대륙으로. 그곳에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어 서 있고 싶다. <문학평론가>
2025-06-22
공중에 불꽃이 튑니다 수십 발의 비명소리 밤의 키보드는 발자국 위에 붉은 꽃잎을 찍어놓습니다. (중략) 지구 반대쪽의 우리는 겁에 질린 방관자 피 묻은 찢긴 새의 날개를 주섬주섬 챙겨 넣습니다. 횡경막 밑에 고여 있는 새의 울음을 훔칩니다. 시곗바늘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계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세계는 혼돈의 소용돌이 심장을 향해 과녁을 맞춥니다. 새벽이슬에 젖은 붉은 꽃잎이 뚝뚝 떨어집니다. 콘크리트 벽 속으로 장미꽃이 가시를 숨깁니다. (하략) …. 방금 전에 이스라엘과 이란이 미사일을 주고받는 뉴스를 보았다. 위의 시에서 말하듯 폭발음이 비명 같았다. 21세기에도 인류는 혼돈 속에 있고,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다행인지 우리는 ‘지구 반대쪽’에서 저 “붉은 꽃잎이 뚝뚝 떨어”지는 폭력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음을 방관하며 보고 있을 뿐. 하나 세계의 심장에 미사일의 과녁이 맞추어져 있고, 파국으로 가는 시간 위에 우리 역시 탑승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6-19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옥천에 간다 옆자리에 꽁지머리 총각이 앉았다가 수원역에서 내리고 한참 빈자리로 가다가 빨간 머리 여자가 타고 내린 후 또 혼자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문득문득 아려오던 명치 옆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고 또 비우며 같이, 또 따로 종착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 인생이란 혼자 가는 여행일까. 누군가와 같이 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혼자 가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기차를 타고 가다 혼자임을 자각하고는 ‘너’와의 헤어짐을 기억한다. 명치가 아려오는, 몸으로 인지되는 기억을. 하지만 빈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가 내린다는 현상을 시인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같이, 또 따로” 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임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6-18
젊은 날 우리 한 사랑을 돌아보지 마오 눈 비비면 후드득 떨어지는 소금 같은 시절 뙤약볕 아래 물 새는 병을 쥐고 서서 뽑을 것처럼 머리채를 움켜쥐고 극치를 맞던 몸부림을 곱씹지 마오 (중략) 단 우리가 열일곱으로 돌아갈 것인가만 생각하오 이 세상 다 신어야 할 구두는 얼마나 많을 것인지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아침 이마에 내려앉은 슬픔의 그림자 따라 좋은 옷 한 벌 훔쳐 내달릴 수 있을 것인지 (하략) 성인이 된 이라면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을 터, 시인은 이 “사랑을 돌아보지” 말자고 한다. 점점 병에서 물은 빠져나가는데 “뙤약볕 아래”에 있게 했던, 그러다 극치의 몸부림을 치게 했던 첫사랑. 시인은 그 사랑을 돌아보는 대신 그 시절로 돌아가자고 한다. 첫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듯이. 지금도 “질식해 죽을 것만 같은 아침”을 맞이해야 하기에. 하나 그 회귀는 “슬픔의 그림자”를 따라가야 한다. <문학평론가>
2025-06-17
첫사랑은 가슴을 태우나 두 번째 사랑은 첫사랑을 쫒는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랑은 자물통 속에 떨고 있는 열쇠요 자물통 속에 떨고 있는 열쇠요 손에 든 가방이다. 첫 전쟁은 누구의 죄도 아니나 두 번째 전쟁은 누군가의 죄다. 그러나 세 번째 전쟁은 내 죄요 내 죄라고 누구나 말하지. 첫 기만은 동틀 무렵의 안개이나 두 번째 기만은 휘청거리는 술꾼이다. 그러나 세 번째 기만은 밤보다 어둡고 밤보다 어둡고, 전쟁보다도 무섭다. ….. 아꾸자바는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노래시’라는 장르를 새로 만든 러시아 시인. 위의 시에 따르면, 가슴만을 태운 첫 사랑을 지나 사랑이 세 번째까지 가게 되면, 그 사랑은 가방 속에 든 열쇠에 지나지 않게 된다. 세 번째 전쟁을 막지 못하면 그 전쟁의 죄는 내 죄가 된다. 기만이 세 번째까지 간다면, 그것은 전쟁보다 무섭고 밤보다 더 어두운 무엇이 된다고. 뭐든지 세 번째까지 가도록 허용하지 말자는 뜻일까. <문학평론가>
2025-06-16
한 톨의 빛은 밤을 머금고 출현한다 (중략) 경복궁역 나와서 광화문 동십자각 지나/ 송현공원 앞 헌재 방향으로/ 활처럼 불룩하게 휘어진 도로를 밟고/ 펑! 펑! 지구가 왜 이렇게 빨리 도느냐고 무지막지한 밀도 속으로 넘어가는/ 당신으로부터 나를 구분할 수 없다/ 전류가 흐르는 손을 쥐어 주며/ 다음번 사랑은 여기서 시작이라고 한 톨의 빛은 두 개의 밤에 필라멘트를 꽂고 어떤 상태가 아니라/ 너는 사태에 가깝다 미래의 가장 짧은 선분들/ 이토록 바짝 별들이 집결하는 ……. ‘다시 만난 세계’는 이번 ‘빛의 혁명’에서 새 세대의 운동가가 된 ‘소녀시대’의 노래 제목. 시인은 ‘헌법재판소’의 판정을 촉구하며 ‘헌재’ 앞으로 행진하는 시위에 참여한다. 이때 젊은이들이 합창한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을 것. 이 행진의 “무지막지한 밀도 속”에 빨려든 시인은 “다음번 사랑”이 “여기서 시작”할 것임을 감지한다. 필라멘트가 된 이들의 빛이, 밤을 밝혀 연결하는 “미래의 가장 짧은 선분들”임을. <문학평론가>
2025-06-15
누군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트릴 때 깨달음은 거기에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아,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 때 깨달음은 거기에 있다 티브이를 보다가 맞아! 하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올 때 깨달음은 거기에 있다 어느 한 구절을 읽다가 마음 깊은 곳에서 밑줄을 그을 때 깨달음은 거기에 있다 깨달음은 이처럼 사소하고도 수다한 것이다 이처럼 비루하고도 천박한 것이며 이처럼 낮으면서도 비근한 것이다 깨달음은 이처럼 적막할 까닭도 이처럼 충만할 이유도 없다 깨달음은 이처럼 신비롭지도 않으며 신비로움이 다함도 없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이루는 것이며 깨달음은 이처럼 시시각각으로 잊히는 것이다 …. 깨달음에 깨달음이 필요할까. 위의 시는 이런 깨달음을 준다. 깨달음은 심오한 도를 깨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함을 깨고 일상 속에서 솟아나는 것. 그래서 우리는 다양하게 깨달으며 살고 있다. “사소하고도 수다한 것”이며 “낮으면서도 비근한 것”인 깨달음. 우리는 이 깨달음을 지나쳐버리고 산다. 시인은 이 지나쳐버림도 긍정한다. “시시각각으로 이루는” 깨달음이니 “시시각각으로 잊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문학평론가>
2025-06-12
오십 년 된 집으로 이사했다/ 헉, 엄마 아빠보다 나이가 많다! 이사한 첫날 우리는 결심했다/ 잘 모시고 살자! 걸을 때도 살살/ 문 닫을 때도 살살/ 우리 모두 살살이가 되었다 집을 모시고 살았더니 선물도 받았다/ 낡은 창문에 걸리는 풍경화는 매일 바뀌었고/ 마당의 감나무는 가을이 되면 잘 익은 감을 주었다/ 나무 바닥 거실에 가만 앉아 있으면/ 숲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어르신은 잘 모시고 볼 일이다/ 집과 사이가 좋아지니/ 우리 사이도 좋아졌다 …… 집은 우리에게 장소를 마련해주지만 우리는 집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곤 한다. 반면 위의 시의 화자는 맑은 마음으로 집이 마련해준 장소를 성심껏 대한다. “오십년 된 집”을 어른처럼 모시며 ‘살살이가’ 될 정도로 ‘살살’ 대하니 집은 자신이 마련해줄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마련해주었다는 것. 감도 덤으로 말이다. 그렇게 “집과 사이가 좋아지니/우리 사이도 좋아졌다”니, 집은 정말 마음 좋은 어른이다! <문학평론가>
2025-06-11
쉬는 날이 온다. 정오쯤 일어나서 햅쌀을 안치고 거실 바닥 쓸고 화분에 물도 주고 하는 날 쓸모없는 나절을 꼭 보낸 다음 사랑하는 소리를 듣고 내는 날 노동한테 이겨먹기 위해 내가 제일 가엾다는 생각 하나로 누구 하나 미워할 필요 없이도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날 …… 노동자에게 쉬는 날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 살기 위해 해야 하는 노동이 삶에 죽음을 가져오는 세상. 그래도 노동자에게 쉬는 날이 있어, 그는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시간을 가진다. 집 청소도 하고 화분에 물을 주는 소소하고 ‘쓸모없는 나절’을 보내며 “노동한테 이겨먹”을 수 있는 시간을. 하여 “누구 하나 미워”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간신히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있는 쉬는 날. <문학평론가>
2025-06-10
나는 저녁 바람의 서늘함과 폭풍 속 검은 나무를 엿보고 싶었다. 내게 폭풍 속 검은 나무라 함은 구슬피 우는 벌레들과, 농부들의 투박한 발걸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다. 나는 나룻배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배가 땅에 닿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벌레들은 마치 겨울 나라 불의 아이들처럼 노래했지만, 거대하고 어두운 존재가 곧 그들의 화음을 부숴버렸다. 도시는 침수되어 내 앞에 차갑게 서 있었다. … 화가로 유명한 에곤 실레는 시도 썼다. 그의 시는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화가의 시각이 녹아들어 있어서, 그가 그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작의(作意)도 짐작할 수 있다. “폭풍 속 검은 나무를 엿보고” 표현하려는 것이 그의 작의라는 것을. 그 나무는 벌레들 울음과 종소리, 농부들의 발걸음과 나룻배 소리로 나타난다. 하나 곧 도시가 어둠의 폭풍우에 침수되어버리면서 부서질, 마지막으로 울리는 화음으로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6-09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마에 푸른 바다가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빛 그녀를 어디서 만났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 어디서 만났지요 분명히 몇 번 봤는데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어디서 만났을까 뇌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슴속을 파헤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간 상처를 헤집자 그녀가 딱지로 앉은 채 울고 있었다 꽃이 떨어진 눈동자에 바다가 뒷켠으로 빠지고 있었다 ….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사람이었음에도 망각하곤 한다. 위의 시가 말해주듯이. 그 사람이 상처와 연관된 이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눈이 마주친 ‘그녀’를 언제 만났던 것 같았지만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상처 속에 있었기 때문. 상처를 새 살이 덮듯이 그녀에 대한 기억을 무엇인가가 덮어버렸던 것. 시인은 상처를 헤집고 나서야 “딱지로 앉은 채 울고 있었”던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문학평론가>
2025-06-08
물안리는 앞 냇가가 있고 뒤 냇가도 있었다 어딜 가나 징검돌 사이로 송사리 떼가 올망졸망했다 어느 해였던가 조등弔燈 아래 퉁퉁 부은 눈망울들을 닮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채 낮은 발소리 물낯 비치는 옅은 그림자에도 해진 지느러미를 서로 툭툭, 쳐대곤 했다 가장家長 잃고 물결 헤집던 그해 여름 끝자락이었다 지익직 흑백 영화 한 편이었다 …. 냇물 속을 헤엄치는 송사리 떼의 ‘올망졸망’한 모습에서, 시인은 “조등 아래/퉁퉁 부은 눈망울들을” 떠올린다. ‘가장’이 돌아가시고, 시인을 포함한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눈을 붉히고 있었으리라. 냇물 위에 해가 지며 드리우는 옅은 그림자를 “툭툭, 쳐대”는 송사리들은 그 가장 없는 세상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아이들처럼 보인다. 깊은 슬픔의 그림자는, 이렇게 어느 때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문학평론가>
2025-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