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은 셀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잃어버린 것을 자꾸만 다르게 기억하는구나 몇 사람이 모였지만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몇 사람이 모여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아무것도 기다릴 수 없는 계절이 온다 당신을 빨리 감기 했으면서 다 봤다고 말했다 그래서 늘 문밖엔 장면들이 도착해 있다 …… 꽃이 활짝 핀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웠던 시절. 그 시절은 지나갔으나 그 시절 함께 했던 이들 몇이 모였다. 하나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우리들. 이젠 아름다움을, 그 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기다릴 수 없는 계절”을 맞이하고 있는. 잃어버린 시절은 “다르게 기억”된다. 그것은 “셀 수 없는 것”이기에. “빨리 감기”로 영화 장면 보듯 떠올려지는 그 시절, “늘 문밖”에 도착해 있는 당신의 장면들에 대한 기억처럼. <문학평론가>
2025-11-19
그 골목은 벗겨진 담쟁이 줄기처럼 늘어져 있었다 산비탈에는 또르륵 또르륵 고라니가 뱉어낸 울음이 굴러다녔다 골목의 기울기로 저녁의 질감을 읽어내던 달빛은 가끔 탱자나무 가시에 걸려 오래 머물렀다 담쟁이 줄기를 묶어 제기를 차면 너풀너풀 땅거미가 내려오던 저녁 이동하는 궤도를 따라 땅거미가 번식하는 기형의 골목 저 사슴 보여? 너는 고라니를 사슴이라 했고 나를 부를 때 다른 이름을 불러도 내가 대답했다 탱자꽃이나 달빛이나 애써 구분하지 않아도 그 골목은 길게 잘 자랐다 …….. 뒷골목이 점차 사라지는 시대. 나이 든 이라면 미로같이 뒤엉킨 골목길에서 유년을 보낸 이가 적지 않을 테다. 필자도 그랬다. 이 시를 읽으며 “벗겨진 담쟁이 줄기처럼 늘어져 있”던 유년의 골목을 떠올렸다. “땅거미가 번식하는 기형의 골목”이라는 표현도 당시 골목의 인상을 잘 이미지화시켰다. 어떤 정확한 명칭이 필요 없던, “구분하지 않아도” “길게 자 자랐”던 골목. 이젠 ‘오래된 안녕’이 되어버린 유년. <문학평론가>
2025-11-18
꽃은 벼랑에 매달려 핀다 새는 벼랑에서 한 걸음, 더 간 곳에 있다 꽃과 새는 서로 연민한다 떨어진 꽃자리 새는 앉지 않는다 새가 진 자리 꽃 또한 터 잡지 아니한다 …. 벼랑에 ‘매달려’ 존재해야 하는 존재자들이 있다. 위 시의 꽃과 새가 그렇다. 하나 그 매달린 이들은 이웃이 되곤 한다. 이들은 서로의 곤궁함과 눈물을 이해한다. 하여 서로를 연민한다. 연민은 존중을 낳는다. 결국 고생하다 삶을 마친 이들이 ‘진 자리’를 탐하지 않는 것으로 이 존중은 표현된다. 새가 “떨어진 꽃자리”에 앉지 않고 꽃이 “새가 진 자리”에 “터 잡지 아니”하듯이. 힘든 이들의 존재론을 보여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5-11-17
넌 아주 단순한 글을/ 쓰고 싶어,/ 사랑에 대해/ 고통에 대해/ 당신이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글을 읽는 내내/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일 수 있도록,/ 내 글은 나만의 유일한 것이지만/ 당신의 마음으로 들어갈 테고/ 그리하여 결국/ 당신은 생각하겠지,/ 아니, 깨닫게 되겠지,/ 그동안 내내/ 당신 자신이/ 그 단어들을 배열하고 있었음을,/ 그동안 내내/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 2019년 타계한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 제목에서 시인은 “단순한 글을 쓰고 싶”다고 밝혔는데, 이 시 역시 단순하게 진술되어 있다. 하나 시의 힘에 대해 명료하게 전달하면서 “가슴으로 느”껴지는 발견을 주는 시. 시는 시인의 “유일한 것”이지만, 그것은 독자의 마음으로 들어가 독자 자신이 시의 단어들을 배열하도록 이끈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읽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1-16
눈(眼)이 눈물을 덮어주지 않으면 흐르는 눈물은 보살핌 하나 없이, 영원히 흐르기만 할 것이다. 가죽이 상처를 덮어주지 않으면 아픔은 보살핌 하나 없이, 영원히 아프기만 할 것이다. 목숨이 세월을 덮어주지 않으면 세월은 보살핌 하나 없이, 영원히 있어야만 할 것이다. 내 생성(生成)의 거룩한 바늘들을 다 털어 모다 다 털어 덮어주리라, 덮어야 할 것들을 …. 소설가로 잘 알려진 천승세의 시. 위의 시는 한 인간의 세계 사랑을 보여주는데, 무엇보다 시적 발상이 뛰어나다. 눈이 눈물을 덮어주기에 흐르는 눈물은 멈출 수 있었다니. 가죽이 상처를 덮어주었기에 상처는 아물 수 있었으며, 목숨이 세월을 덮어주었기에 세월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니. 작가는 다짐한다. “내 생성의 거룩한 비늘들을 다 털어” 아픈 것들을 덮어 보살피겠다고. 그 비늘들이란 문학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5-11-13
백수는 사랑을 하고 사랑은 백지를 탐하게 하고 백지 안에는 사랑을 꾸며 써야 하고 그럼에도 은유하지 않고 사랑의 시를 쓰고 (이것은 과연 감탄할 기백인가 알량한 고집인가) 시는 이렇게나 믿을 만한 것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배반을 하게 되고 배반은 한평생 백수처럼 할 짓이 못되고 할 짓이 없으면 혼자임을 구걸하고 구걸은 울부짖는 혼자가 되고 혼자는 요컨대 백수임이 틀림없고 그러다가 백수가 백수가 아니게 되면 (이 시는 짧게 끝나야 한다) 사랑을 시인하게 되고 …. 1996년생 시인의 시로 MZ세대의 감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 아닌가 한다. 이 젊은 ‘백수’는 시를 왜 쓰게 되었는가. 누군가를 사랑해서다. 그 누군가에게 보낼 사랑의 시를 쓰고 싶어 백지를 탐하게 되고, 하나 이 사랑의 시가 꾸밈이 아닌지 의심하여 시를 배반하지만 배반은 혼자-백수-로 돌아오게 하고, 백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국 다시 시를 붙잡고 “사랑을 시인하게 되”는 역설의 연쇄를 담고 있는 시. <문학평론가>
2025-11-12
퇴근도 아닌 출근길 2호선 지하철에서 모르는 옆 좌석의 여자가 내 어깨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귀찮아 몇 번이고 그녀의 머리를 바로 세워 놓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내 어깨에 머리를 떨구고 잔다 바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여러 번 남의 어깨를 빌려 잠든 적이 있었다 빌리고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았고 빌린 어깨를 갚지도 않았다 오늘 바로 이 여자에게 그간 빌렸던 어깨를 갚는 날인가 보다 …… 누구나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이가 졸음에 겨워 내 어깨에 자꾸 머리를 기대는 경험을 해보았을 테다. 하나 사실 나 역시 타인에게 머리를 기댄 적이 있을 터, 그처럼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우리 자신도 모르는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던 것. 고맙다는 인사도 건네지 않고 도움을 갚지도 않은 채로. 그러니 우리가 알게 모르게 도움 받았듯이, 타인에게 소소한 도움을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시의 전언. <문학평론가>
2025-11-11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한여름의 밤 스치는 신선함 속에서, 나는 보았다 도로 위에 쥐포처럼 납작이 깔려 죽은 고양이 한 마리를 도로 위에 핏자국을 길게 흘리고 죽은 고양이 한 마리를 목각인형처럼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다 짓이겨져 나온 고양이의 핏발 선 눈앞에 한참을 서 있다 고양이를 들고 걸었다 사람이 볼 수도 해칠 수도 없는 수풀을 향해 사람이 떠들 수도 놀릴 수도 없는 수풀을 향해 축 늘어진 고양이를 들고 걸었다 비척이는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손을 씻는데 차가운 수돗물에 하늘하늘 씻겨 나가는 고양이의 피는 물줄기를 연붉은빛으로 물들이며 씻겨 나가는 고양이의 피는 나의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 따뜻했더랬다 …… 사람에게 놀림만 받다가 영문도 모른 채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 그 고양이의 눈은 사람을 증오라도 하듯 핏발이 서 있다. 죽음 이후에도 방치되어 있는 고양이의 주검. 시인은 고양이 시신을 사람들이 닿지 않는 수풀에 묻어준다. 사람 세상에서 떨어져 평안을 얻으라고. 집에 돌아와 손에 묻은 고양이의 피를 씻으며 시인은 이 피 역시 사람 피처럼 따듯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 피에도 생명이 담겨 있었기에. <문학평론가>
2025-11-10
꽃 내음들이 우리를/ 잠시나마 운명의 주인으로 만든다. 어느 오후, 반쯤 열린 대문이/ 푸르른 하늘과 해를 들어오라 유혹하고/ 왠지 기쁨의 정조./ 창문으로 날아드는 한 마리 새와/ 어떤 예상치 않은 순간. 고독과 침묵 속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 셋./ 방문, 인간, 신비. 시간과 기억들은/ 지름길로 오지 않고,/ 빛과 바람을 타고 온다./ 우리는 조용한 바다 위로/ 미소 지으며 걸어간다. 그 집은 달콤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아름답다./ 그리고 한순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리. …. 195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페인 시인 히메네스의 시. 시에 따르면 “어떤 예상치 않은 순간”, 가령 ‘꽃 내음’이 자연의 문을 여는 때가 있다. 이 열린 문으로 하늘과 해가 들어오고, 창문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든다. “우리를/ 잠시나마 운명의 주인으로 만”드는 이 순간엔, 우리는 바다 위를 조용히 “미소지으며 걸어”가며 “빛과 바람을 타고” 오는 “시간과 기억들”을 맞이하고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1-09
오늘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해 중얼거리며 거울을 보내 분 뚜껑을 열고 조용히 나를 지우기 시작하네 오늘 하루 걷고 먹고 말한 모든 것이 나를 지워가던 일 귀갓길에서 모란의 몰락을 보았네 오늘은 아주 조금 나를 걷어낸 것으로 족해 거울 앞에서 얼룩진 부분부터 지우네 저녁은 지워지지 않네 …. “사람이 되기 위해” “거울을 보”며 분칠로 “나를 지우”며 살아가는 삶. 현대인의 삶. 시의 화자에게는 일상 속에서 “걷고 먹고/말한 모든” 행위는 “나를 지우”면서 이루어진다. 그래야 ‘사람’이라는 이 세상 세인의 보편 표상을 보이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나 그것은 “귀갓길에서” 본 모란처럼 몰락하는 삶이다. ‘오늘’의 사회생활에서 묻게 된 얼룩을 아무리 지워도, 모란이 드러낸 몰락의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2025-11-05
주사기 바늘이 눈 흰자위를 찔렀을 때 흰 꽃받침 아래 작고 붉은 꽃이 피었다. 다음 날 한 친구의 급작스런 부고를 전해 들었다. 자살이었다. 오래전 옛 친구의 예기치 않은 전화. 목소리가 예전 그대로여서 늙음을 잠시 잊고 청년으로 돌아간 듯 수다 떨었다. 그렇건만 뒤늦게 전해들었다. 그 친구 폐암 진단받고 주변 정리하다 전화했단 얘기. 꽃가지 꺾어 선물로 주고받을 때 그 사람 눈에 오래오래 살아남아 있길 바라거늘, 꽃 꺾어 화병에 꽂는 건 생존을 잇는 게 아니라 자연스런 가장 완벽한 소멸을 목격코자 하는 것. 죽음은···. 시는···. 시간에서 시간을 떼어내는 일. …. 누구나 친구의 죽음을 자주 전해 듣는 때가 올 테다. 자신이 먼저 죽지 않는다면. 이때가 오면 죽음이란 “시간에서 시간을 떼어내는 일”이라는 인상적인 구절을 비로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시인은 죽음과 시를 연결한다. 시도 시간에서 시간을 떼어내니까. 그에게는 오래 살아남길 바라며 화병에 꽂은 꽃-시-은 생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가장 완벽한 소멸”을 보여주는 죽음의 ‘화관’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1-03
우리가 처음으로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강했는지, 열정에 얼마나 취했는지, 좁은 침대에 하루 종일 또 밤새도록 누워서, 거기서 잠자고, 거기서 먹으며: 여름이었지요, (중략) 하지만 우린 한편으로는 길을 잃었지요,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침대는 뗏목 같았어요; 우리가 우리 본성과 멀리 떨어져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표류하는 것 같았어요. (···.) 그러자 그 둥그런 것들이 닫혔어요. 서서히 밤이 서늘해졌지요. 버드나무 길게 늘어진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졌어요. 우리 각자 안에서 깊은 고립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해 또 후회 없음에 대해 우린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요. 우리는 다시 예술가가 되었어요, 여보. 우리는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요. …………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의 시. 여름은 열정의 삶을 상징하는 계절이나, 그 계절엔 도취에 빠져 길을 잃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운 침대는 뗏목처럼 표류하기도 한다는 것. 하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푸른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해 떨어”지면, “깊은 고립이 시작”된다. 가을엔 이제 서로의 고립 속에서 “여행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고, “다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1-02
떠나고 싶다 생각을 했다 아픈 누나가 준 카메라를 들고 가 마지막 사진은 행복하게 즐겁게 라떼를 마시면서 저녁을 맞았다 갈아 온 원두에 물을 부었다 (중략) 커피숍에 들러 야외의 소리들과 맞담배를 피우며 어두워지고 싶었다 수고했다고 처진 등을 다독이면서 들숨 한 번 크게 쉬고 오래된 여관에 들고 싶었다 …… 낮의 삶이 있고 저녁의 삶이 있다. 낮은 활동하는 삶의 시간, 저녁은 어둠 속에 잠기기 전에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 아마 시인은 “아픈 누나”를 보내면서 그녀가 준 카메라로 “행복하게 즐”거운 삶의 마지막을 찍었을 터, 그러고는 들른 저녁의 커피숍에서 황혼에 물들어가는 야외와 “맞담배를 피우”고 있다. 어둠에 잠기는 삶에게 “수고했다고 처진 등을 다독이면서”, “오래된 여관에 들”어 잠들기를 희망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10-30
엄마는 사과껍질을 누구보다도 길게 깎았다 사과껍질을 안 끊어지게 길게 깎으면 복이 들어온다고 했다 엄마는 긴 사과껍질 똬리를 틀며 자식들의 길이 끊긴 데 없이 한없이 이어지길 바랐다 엄마는 사과껍질을 안 끊어지게 아주 길게 깎았지만 정작 자신의 목숨은 짧게 뚝 끊어졌다 아버지만 엄마가 깎은 긴 사과껍질이었다 한 번도 안 끊어지고 정년퇴임까지 무거운 우체부 가방을 메고 다니셨다 …. 이 시를 읽고 필자의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사과 껍질을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깎으셨던 엄마. 현재 할머니 나이인 엄마들은 모두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위 시 내용은 슬프다. 그 사과껍질처럼 “자신들의 길이 끊긴 데 없이” 이어지길 바란 ‘엄마’는 정작 일찍 돌아가셨다니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염원은 빛을 보긴 했다고. 아버지는 ‘정년퇴임까지’ 직장에서 잘리지 않고 오래 사셨다고 하니. <문학평론가>
2025-10-28
쓸쓸을 만난다. 골목어귀 끝에 쓸쓸이 서 있다. 쓸쓸을 따라간다. 쓸쓸의 손을 잡으면 환한 불이 켜질 줄 알았다. 쓸쓸을 끌어안을수록 더 쓸쓸의 몸이 된다. 서로의 몸속을 들어간다는 건 더 깊은 쓸쓸을 만나는 일이다. 산을 오른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쓸쓸이 달라붙는다. 쓸쓸의 계곡을 건너고 쓸쓸의 들을 걷게 한다. 더 쓸쓸한 사람을 찾고 더 쓸쓸한 전화번호를 펼치고 결국은 번호를 누른다. 쓸쓸한 인사가 물소리에 묻힌다. 꽃으로 피는 시기는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피는 시기를 알지 못한다. 꽃으로 피려고 버둥거릴수록 빠르게 진다. 빨리 걸어도 보고 숨이 차도록 책을 읽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쓸쓸을 만난다. 다시 피려고 온몸이 쓸쓸이다. …. 쓸쓸한 이에게 그래도 기댈 이가 아니면 쓸쓸 자체 아닐까. 쓸쓸은 쓸쓸한 사람의 마음을 잘 알 테니. 하여 시인은 “쓸쓸의 손을 잡으”려 하지만 정작 “쓸쓸을 끌어안을수록” 더 깊은 쓸쓸에 빠진다. 하나 쓸쓸이 달라붙을수록 “더 쓸쓸한 사람을 찾”게 되는 쓸쓸함, 그것은 “꽃으로 피려고 버둥거릴수록 빠르게” 지는 삶에서 온다. “피는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다시 피려고 하는 몸짓이 “온몸이 쓸쓸”로 만들기에. <문학평론가>
2025-10-27
매일 해가 지고요 매일 해가 뜨지요 닭 세 마리가 한 조로 갇힌 신식 철창 사육장입니다 영양 사료가 여덟 개 라인에 배식됩니다 숲 속엔 죄다 걷지 못한 나무들 야윈 발목에선 소독약 냄새가 진동합니다 오늘이 지나면 오늘이듯 삼파장 전구에 불을 켭니다 이만 오천 마리 부리들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부르다 만 노래를 이어 부를까 암탉이 무정무정 신음합니다 숲이 산란하는 시간입니다 ……. 위의 시의 사육장에서는 전구에 불을 켜면 ‘이만 오천 마리’ 암탉들이 배식된 ‘영양 사료’를 먹고는 “무정무정 신음”하며 ‘산란’한다. 오늘만 있는 매일, 낳기만 하며 살고 있는 닭들. 시는 이 닭들을 “야윈 발목에” 소독약 뿌려진 “걷지 못한 나무들”로 비유한다. 사육장은 그 나무들이 서 있는 숲이고. 이 숲은 현대인의 삶을 보여주는 비유 같다. 닭 세 마리 갇힌 ‘신식 철창 사육장’이 아파트를 떠올리게 하니까. <문학평론가>
2025-10-26
만화에서 투명인간을 그리는 건/ 골칫거리였지./ 작가들은 점선을 찍어 해결을 봤어/ 들창코를 종이에 바짝 붙인 우리, 오직 우리만 알아볼 수 있게,/ 투명인간들이 존재하는 공간과/ 우리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유리, 점선으로 된 윤곽을 가진/ 투명인간,/ 그가 바로 날 기다리고 있다. 식탁 당신의 자리에/ 부재의 형상,/ 내 맞은편에 앉아/ 평소처럼 토스트와 달걀을 먹거나/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하늘이 살짝 무겁게 내려앉은/ 진입로 앞까지 앞서 걷는. 그 형상이 장차 당신이라는 걸,/ 우리 둘 다 안다./ 당신은 여기 없으면서 여기 있을 거라는 걸,/ 더 이상 거기 없는 고리에/ 모자를 걸 듯, 그런 몸의 기억으로. ….. 캐나다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애트우드의 시.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투명인간’을 호출하여 흥미롭게 드러낸 시다. 만화 속 인물들은 알지 못하지만 독자는 알아볼 수 있도록, 작가가 점선으로 윤곽을 표시해 드러낸 투명인간. 현실 속 우리 역시 서로 점선 윤곽으로 나타나는 투명인간이라는 것. ‘부재의 형상’으로, “여기 없으면서 여기 있”는 존재로, 살아 있는 몸이 아니라 몸의 기억으로 여기 있는 ‘당신’처럼. <문학평론가>
2025-10-23
(전략) 내가 거울 밖에서 나를 쳐다보며 우는 여자를 가여워하지 않는 건 떠나겠다는 것 내가 전화기를 끄고 전화기를 던지는 것 내가 계단이 없는 곳에서 계단을 내려가는 듯 춤을 추는 것 내가 이 음악이 무거워서 견딜 수 없는 듯 허우적거리는 것 겨울 속 편두통 내가 떠나겠다는 것 물속에 잠긴 공주는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거울 밖으로 거품을 내뿜으며 춤을 추는 것 내가 이 거울을 떠나겠다는 것 …… ‘거울’은 이상의 시 ‘거울’ 이래로 주체를 문제시하는 상징적인 제재가 되었다. 위의 시에선 거울 속의 ‘나’가 주체다. ‘나’는 거울을 떠나려 한다. 거울 속 “나를 쳐다보는 우는/여자를” “떠나겠다는 것”, 그녀의 반사상으로서의 틀이 물속에 빠진 자의 무게처럼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서 부패해가기보다는, “거품을 내뿜으며/춤을 추”면서 ‘나’는 거울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한다. 이 ‘나’는 무의식 아니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10-22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의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 사과 한 알이 자라는 데에는 낮의 햇빛과 밤의 달과 별, 그리고 대지의 양분이 필요하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주의 모든 기운들이 들어와 숨 쉬고 불타고 속삭이고 있는 것, 하늘의 구름도 이에 동참하여 사과 속에 들어와 노닌다. 또 한 가지, 사과를 키우는 우리 인간의 “땀과 사랑”도 사과 속엔 들어와 있다. 이로써 사과를 키우며 우주의 기운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은 사과 속에서 영생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0-21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나무 화분 안에 갇힌 한 마리 새처럼 어둠 속에서 날개 터는 작은 소리 들었다 큰 화분으로 옮겨주면 날개 접고 노래 부를 수 있을까 화분과 한 몸처럼 붙어 모종 삽날로 흙덩이를 파낸다 제 뿌리를 맴돌며 시간을 쌓고 있었다 뿌리가 뿌리를 껴안은 것 같지만 서로 밀어내고 있었다 품을 수 없는 어둠이 싱크홀처럼 자라고 있었다 화분을 깨트리고 나서야 나무는 자유로워졌다 아니 새는 몸이 가벼워졌다 함부로 뻗은 생각을 쳐내자 이제 뿌리가 가지런해졌다 새는 날기를 멈추고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발을 멀리 놓겠지 ….. ‘나무’는 시인의 마음을 비유할 터, 뒤엉켜 있어 서로 밀어내고 있는 화분 속의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나무”의 뿌리처럼 시인의 마음에도 여러 모순적인 생각들이 뒤엉킨 상태겠다. 시인은 나무-생각-를 가두고 있는 화분-틀-을 깨트리자 나무는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화분에 갇혔던 새-정신-도 몸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고. 하여, 이제 새는 날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나무-되기’를 통해 “다른 세계를 찾”으려 한다. <문학평론가>
2025-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