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 해장국집을 찾는다 뼈해장국을 시켜서 먹고 하늘을 보면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나를 비춘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의 뒤편에 그림자가 생긴다 뒤돌아보면 안 돼 뒤돌아서 그림자를 보는 순간 그림자가 너를 잡아먹을거야 젊은 시절 잘못을 뒤로 던지고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아침나절이 지나면 갈 곳 없는 이 그림자를 또 어디로 흘려보내야 할지 땅에서 흙덩이 하나를 주워 멀리 던져 본다 흙덩이는 가루가 되어 내 그림자를 덮어 준다 … 화자는 밤을 새워 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 새벽 식당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는 노동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새벽엔 “젊은 시절 잘못”이 기억에 떠오르며 그림자를 형성하는데, 화자는 그 그림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임을 알고는 “잘못을 뒤로 던지고/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하나 “아침나절이 지나면” 그림자는 자신을 따라올 터, “멀리 던져 본” 흙덩이가 “가루가 되어” 겨우 “내 그림자를 덮어”줄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5-07-16
내 어릴 적 맑은 날 밤하늘을 보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별 숲을 지나며 반짝반짝 손을 흔들거나 은하수 건너는 물소리가 잠방거렸는데 요즘은 눈 부릅뜨고 귀 기울여도 보이지 않는다 병든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 수 없다는 천국 법에 따라 하늘 문을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시인이 어릴 땐 맑은 영혼으로 죽은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늘로 오르는 그들의 영혼은 맑은 날 밤하늘에선 별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고. 하여 어릴 때의 시인은 자신에게 손 흔들며 하늘로 가는 영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 지금은 이런 영혼을 볼 수 없다는 것.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병든 영혼으로 세상을 떠나서 그렇다. 병든 영혼은 “하늘 문을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학평론가>
2025-07-15
종이가 누렇게 빛바래고 비로소 한마디를 쓴다. 강물이 불고 비로소 한마디를 쓴다. 결혼 행렬이 지나며 누군가 운다. 시장이 북적대고 한마디를 쓴다. 목관악기 소리 지루해지고 한마디를 쓴다. 누군가 애도한다 고상한 생활의 계절이 다한 것을. 시 한 줄이 공중에 걸려 있다. 거미줄이 이슬 방울 사로잡는다. … 베트남 현대 시인 휴틴의 시. 위의 시는 시라는 존재에 대해 쓴 시로 보인다. 시는 사실 어디에나 있지만 함부로 존재하진 않는다. 그것은 ‘비로소’ 써지는 것이기에. 강물이나 결혼행렬, 시장이나 목관악기에서 북적댐이나 지루함 끝에 울음 터져 나오듯 한 마디 써질 때 시는 존재한다. 그 ‘시 한 줄’은 공중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다. 그 거미줄에 누군가의 ‘이슬 방울’이 걸릴 때 거미줄은 비로소 시로 존재할 테다. <문학평론가>
2025-07-14
눈길에 꼬꾸라진 일곱 살 가영이가 겨우 몸을 일으켜 옷을 털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내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버스 정류장을 향해 절룩거리며 뛰어갑니다 복지관에 간 지적 장애인 엄마가 돌아올 시간인데 엄마의 보행기가 되어줘야 하는데 다발로 쏟아붓는 함박눈이 자꾸 가영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눈송이만 한 눈망울에 걱정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 ‘지적 장애인 엄마’의 보행기가 되어주어야 한다면서,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얼른 일어나 “피를 소매로 닦아내곤” “버스 정류장을 향해 절룩거리며 뛰어”가는 저 아이의 ‘어여쁜’ 모습은 숭고하면서도 어른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가. 아이가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나 걱정을 드러낼 때 그렇다. 그 마음은 눈물 그렁그렁한 순수함에서 솟아나기에 더욱 굳건하고 진실하다. <문학평론가>
2025-07-13
그곳에 문득 해가 지고 행인은 자신이 눈길 둔 곳이 노을이라는 걸 깨닫는다 천 가지 색 옅은 구름들이 피어나고 가슴 속으로 스며들며 천천히 어두워지고 어느새 곧은 나무들이 자라나 연약한 이파리들을 길러내고 떨리는 손가락처럼 바람이 불어나와 예리한 나무 그림자를 느리게 흔들다가 행인의 마른 눈을 감기우고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흘러나와 조용히 퍼지고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게 될 거라는 기억에 휩싸인다 깊어지는 어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다가 행인은 문득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을 깨닫는다 … 사랑의 노을에 다다른 자야말로 ‘사랑의 마음’을 잘 알지 않겠는가. 사랑은 사라질 때 가장 농도 짙은 감각으로 체험되기에. 위의 시에서 행인은 사랑을 막 떠나온 이일 터, 그의 마음은 천천히 어두워지지만 사랑은 “연약한 이파리”처럼 되살아난다. 나아가 사랑의 ‘기억’은 바람처럼 불어와 그의 “마른 눈을 감기”우고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를 퍼뜨리는데, 이 감각과 함께 그의 가슴은 깊은 통증을 느끼게 되리. <문학평론가>
2025-07-10
누군가 한참을 굴렸을 것이다/ 어젯밤 제법 눈이 휘날렸고/ 시무룩한 표정이 태어났다 나뭇가지 돌멩이 같은 것들이 감정을 갖고/ 푹 꽂혔다가 사라졌다/ 땅바닥에 꺼졌다 사라진 표정은 내일의 날씨가 되고/ 대기의 손짓이 되고/ 눈과 함께 흩어진 사람들이 있다 창밖에 수없이 떠다니는 피의 흔적들/ 눈은 붉고 날카롭다/ 이불처럼 땅을 덮는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와서 영원히 죽지 못하는 눈빛이 떠돌아서/ 푸른빛으로 쪼개지는 입술들/ 하아 입김을 불다가/ 사라졌다 네가 나의 절벽이 되는 삶 위에/ 재가 너의 향기가 되는 죽음 위에/ 눈사람이 서 있다 … 시인은 눈사람 자체가 아니라 눈사람이 녹는 모습에 더 시선을 둔다. 눈사람에 박혀 “감정을 갖”게 된“나뭇가지 돌멩이”는 눈이 녹으면서 땅바닥에 꺼지고는 사라졌다. 눈처럼 흩어질 눈사람. 사람들도 그렇게 사라질 터, 그래서 시인에게 눈은 죽은 이들의 “영원히 죽지 못하는 눈빛”이기에 “붉고 날카롭”게 보이는 “피의 흔적들”이다 하여, 시인에게 눈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너와 나의 절벽” 위에 서 있다. <문학평론가>
2025-07-09
달이 떠오른다 오만한 고뇌에 대한 달의 복수. 몽유병자들이 두 팔을 내밀어 운명인 듯 발을 따른다. 한낮의 무게에 지쳐 버린 투명한 존재 그들은 달빛에 귀 기울이며 거친 의식의 날개로 날아간다. 차갑고 희미하게 빛나며 아무런 약속도 없이 멀리서 나를 유혹하는 예술이 내 동의를 요구한다. 예술의 고통과 그 모든 징후의 매력을 내가 이겨 낼 수 있을까? 무겁게 느껴지는 사물을 달빛으로 빚을 수 있을까? …. 2010년에 작고한, 러시아의 여성 시인 아흐마둘리나의 시. 위의 시에 따르면, 예술가란 존재는 몽유병자인지 모른다. “한낮의 무게에 지쳐버린 투명한 존재”인 예술가는, “달빛에 귀 기울”이며 그 빛이 인도해주는 어딘가로 “두 팔을 내밀어/운명인 듯”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유혹하는” “모든 징후의 매력”을 “아무런 약속도 없이” 따라가는 예술의 길, “무겁게 느껴지는 사물을/달빛으로 빚”는 길이다. <문학평론가>
2025-07-08
나를 가장 많이 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중략) 어제 했던 약속도 어제라는 독약도 모두 삼키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매일 만나거나 죽어서도 만날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너무 많은 애인을 가져서 무겁습니다. 너무 많은 애인을 두어서 괴롭습니다. 아니 외롭습니다. 내가 나의, 애인이기 때문입니다. …. 위의 시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지나고 보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사랑의 막바지에 이르면 홀로 있음에 처하게 된다는 진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애인은 결국 ‘나’ 자신이며, 삶은 외롭다는 진실. 게다가 ‘나’는 여럿 존재해서, 애인은 괴로울 정도로 많다. 하나 “어제라는 독약”을 함께 삼킬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그가 ‘나’ 자신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삶을 가능케 하지 않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07-07
바다가 돌을 낳았다. 동그랗고 작은 새알 같은 돌이 파도 바깥으로 밀려들 듯 태어났다. 돌은 차가운 물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소리 내어 우는 법을 배웠다. 햇빛에 일렁이는 잔물결 따라 달빛에 그렁대는 바다를 보며 조금씩 자신을 키웠다.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떠나고 구름이 걷힌 날 고난을 이겨낸 돌은 단단한 얼굴로 내 앞에 밀려왔다. ….. 시인은 말 없는 사물로부터 내력을 읽어내고, 감동이나 깨달음을 얻는 이다. 그는 해변으로 밀려나온 “작은 새알 같은 돌”에서 “고난을 이겨낸” “단단한 얼굴”을 보고는, 그 돌이 살아온 삶을 읽어낸다. 그것은 고독을 견디는 삶, 밤낮으로 바다를 지켜보며 “소리 내어 우는 법”을 배우고, “조금씩 자신을 키”운 삶이었다. 그 시간을 견디고 맞이한 “구름이 걷힌 날”, 그 돌은 시인 앞에 단단한 모습을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5-07-06
두부가 있다지만 찰지기가 묵만 하겠어 게다가 도토리묵의 캄캄함이라니 그의 대답 기다리다 묵을 떠올린 나를 탓한들, 도토리를 주워다 가루를 만들어 묵을 쑤고 접시에 맛깔스럽게 담아 앞에 놓으면 말없이 그 묵 한 접시 다 비우고 있는 그를 떠올리고 있는 나를 탓한들, 해마다 도토리는 열리고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줄곧 묵을 쑤고 있을 나를 탓한들, 오늘도 묵, 묵부답 한 접시 ……. 묵을 보면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캄캄한’ 색도 그렇고, 묵묵부답 아무 말 않는 듯한 모습도 그렇다. 묵과 같은 마음이 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렇다. ‘그’를 떠올리는 마음도. “묵 한 접시 다 비우”곤 했던 그 역시 묵처럼 과묵한 이 아닌가. 그렇게 ‘그’에 대한 기다림과 떠올림 속에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세월을 보낼 것 같은 시인의 삶 역시 묵 같다. “줄곧 묵을 쑤고 있”는 삶을 살 테니까. <문학평론가>
2025-07-03
나는 절반쯤은 개다. 나는 절반쯤은 풀꽃이고, 나는 절반쯤은 비 올 때 타는 택시. 나는 절반쯤은 소음을 못 막는 창문이다. 나는 절반쯤은 커튼이며. 나는 절반쯤은 아무도 불지 않은 은빛 호각. 나는 절반쯤은 벽. 나는 절반쯤은 휴지다. 절반쯤 쓴 휴지다. 네 눈물을 닦느라 절반을 써버렸다. …..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다른 사물로 변하는 것이 ‘나’ 아닐까. 물론 절반 정도만. 다른 절반은 의식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절반인 사물이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 개가 되었다가 풀꽃도 되고, 소음을 막는 창문이 되거나 비오는 날 택시가 되는 ‘나’. 이 여러 사물로의 변신은 살면서 맺게 되는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네 눈물을 닦느라 절반을 써버”린 휴지가 되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5-07-02
그늘과 그림자는 마주 보았다 그것밖에 할 일이 없었지 헤어지지 말자고 누가 먼저 떠나지 말자고 밖이 보고 싶어도 참고 견디자고 밤이 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지라도 반짝이는 모든 것이 두려웠지 그래서 국경 너머로 달아나기도 했던 모르는 아이가 둘 사이에 들어와 휘젓고 짓밟았다 너와 나는 길들여졌지 방 안에서 …. 그림자는 그늘에 있고자 한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자신과 닮은 그늘이 편하기 때문. 그늘도 그림자가 편해서,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힘이 된다. 하여 둘은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하고, “반짝이는 모든 것이 두려웠”기에 “밖이 보고 싶어도 견”딘다. 하나 이 동거도 파국을 맞는데, “둘 사이에 들어”온 ‘모르는 아이’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위의 시는 시인 내면에서 벌어진 드라마를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5-07-01
새들이 무수히 불을 향해 날아든다 무수히 그들은 떨어지고 무수히 그들은 부딪치고 무수히 눈이 멀고 무수히 부서지며 무수히 그들은 죽어간다 등대지기는 이런 일을 차마 견딜 수가 없다네 새들을 그는 새들을 몹시 사랑하니까 그대 그가 말한다 어쩔 수가 없어 될대로 되라지! 그는 불을 모두 꺼버린다 멀리서 짐 실은 배 하나가 가라앉는다 섬에서 오던 배 새를 싣고 오던 배 섬에서 온 무수한 새들 물에 잠긴 무수한 새들 .. 위의 시는 어떤 슬픈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배를 인도하기 위한 등대가 있다. 이 등대 불빛에 새들이 날아든다. 불빛에 눈이 멀어 등대에 부딪친 새들은 “무수히 죽어”가고, 새를 사랑하는 등대지기는 등대 불빛을 꺼버린다. 그러자 “섬에서 오던 배”가 어디에 부딪쳐 가라앉는다. 그 배는 “섬에서 온” “새를 싣고 오던 배”여서, 새들도 수장된다. 선한 마음이 더 큰 비극을 가져올 때가 있다. 생각을 버리면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6-30
만지면 사랑과 불안이 손끝에 맺힌다 돌의 주파수는 침묵의 주파수다 깊은 안쪽 소용돌이에서 자라는 사랑 나는 이 돌에서 저 돌에게로 고백을 옮겨 담는 사람 어둠 속에서 나는 나의 유전자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가시들을 건져내고 있다 잡음이 많은 심장의 주파수 입을 벌리면 목젖에 걸린 가시가 어떤 방향을 가리킨다 새벽 세 시 내 몸은 가장 둥글게 구부러진다 밖으로 터져 나가지 못한 채 안으로 깊이 떨어지는 숨 점점 반죽 덩어리가 되어가는 몸 나는 어느 날 구(球)가 되어 가장 고독한 주파수 하나 몸 안에 가지게 될 것이다 … 누구나 마음 안에 침묵으로 이루어진 돌을 가지고 있을 테다. “만지면 사랑과 불안이 손끝에 맺”히는 ‘침묵-돌’. 그 속에는 사랑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시인은 돌 속의 사랑을 다른 이의 돌을 향해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 일은 “가장 몸이 둥근 차돌처럼 구부러지고, 숨이 “안으로 깊이 떨어지는” 시간인, 어둠 짙은 “새벽 세 시”에 이루어진다. 그 시간엔 “주파수 하나” 솟아나 사랑을 다른 돌에게 고백할 수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5-06-29
여의도 한강공원 세계불꽃축제에 갔었지 공중에서 터지는 불꽃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 청춘도 한때 저와 같았다 불화살이 되어 날아가는 새, 찢어진 날개 수천 번 날아가고 날아갔지만 흩어지는 깃털뿐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일인칭이 아닌 비인칭으로 사라졌고 (중략) 그래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뜨거웠던 때가 있었노라 가보지 못한 곳 하늘에 불을 질렀던 생 … 나이 들어 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청춘은 어떤 이미지로 떠오를까. ‘불꽃’ 아닐까. ‘불꽃축제’에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불꽃. ‘불화살’처럼 하늘로 솟구쳤으나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불타고 찢어져 청춘은 추락하지 않았던가. 하늘에서 불꽃이 지듯이. 그렇게 청춘의 새는 비상에 실패하고 사라졌을 터, 하나 시인은 “하늘에 불을 질렀던”, 그 “뜨거웠던 때”가 “영원히 기억”되리라며 불꽃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2025-06-25
필사의 힘으로 바위를 붙들고 나무가 산다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새의 어미가 산다 모르는 척, 백 번의 달이 뜨고 해가 뜨고 그것들을 지나가려고 바람이 산다 바람이 빈방에 와 있다 벽에 붙은 크고 작은 행성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 절벽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린 새를 잃은 어미 새의 삶이 그러할까. 그럼에도 삶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필사의 힘으로/바위를 붙들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저 나무의 모습을 보면. 해와 달은 이들의 삶을 매일 들여다보지만 “모르는 척” 무심하다. 하나 바람은 이들을 지나치지 않는다. 이들의 ‘빈방’ 앞을 서성이다가, ‘행성’의 빛을 방에 불어넣어준다. 희망이라는 빛을. <문학평론가>
2025-06-24
우리가 떠돌며 거쳐 가는 이 들판에서 나비들은 하얀색이고 푸른 색이다. 네 손을 잡도록 허락해 다오.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라. 그 시각에는 우리가 알았던 모든 것들이 재가 되리라. 저 무상한 나비를 마음에 새겨 두라. 나비가 꽃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네 손을 잡도록, 허락해다오. 너를 가슴에 품도록 허락해다오, 하늘에 새벽이 나타날 때까지. 내가 그르든 혹은 옳든,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라. ….. 1900년대 초중반에 활동한 미국의 여성 시인 빈센트 밀레이. 그녀는 매우 활동적인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 깊은 니힐리즘을 녹인 시-옮긴이 최승자의 시와 잘 어울리는-를 발표했다. 위의 시도 그렇다. 화자는 보통 저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여겨져 온 나비의 손을 잡고 마음에 새겨두고자 한다. 꽃에 매달린 나비의 아름다움을 따라 가기 위해서, 하여 “하루나 이틀 뒤에” 올 죽음의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서. <문학평론가>
2025-06-23
아직 나는 유년의 대륙을 찾지 못해 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 증오를 직업으로 삼은 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그리움은 쉽게 마모되고 희망은 마약인가. 가진 자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눈 부라리는 엄혹한 세상에서 나는 저주받은 시나 쓴다.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내 유년의 대륙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 가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다. …. 저주받은 시인. 현대 시인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시인은 이 운명의 전통을 살아가는 중이다. 가진 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계와는 화해할 수 없기에, 시인은 “증오를 직업으로 삼”고 “저주받은 시나” 쓰며 살아간다. “마모되”는 그리움을 품고 마약 같은 희망을 마시며. 하여, 그는 “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행복했던 유년이 있던 대륙으로. 그곳에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어 서 있고 싶다. <문학평론가>
2025-06-22
공중에 불꽃이 튑니다 수십 발의 비명소리 밤의 키보드는 발자국 위에 붉은 꽃잎을 찍어놓습니다. (중략) 지구 반대쪽의 우리는 겁에 질린 방관자 피 묻은 찢긴 새의 날개를 주섬주섬 챙겨 넣습니다. 횡경막 밑에 고여 있는 새의 울음을 훔칩니다. 시곗바늘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계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세계는 혼돈의 소용돌이 심장을 향해 과녁을 맞춥니다. 새벽이슬에 젖은 붉은 꽃잎이 뚝뚝 떨어집니다. 콘크리트 벽 속으로 장미꽃이 가시를 숨깁니다. (하략) …. 방금 전에 이스라엘과 이란이 미사일을 주고받는 뉴스를 보았다. 위의 시에서 말하듯 폭발음이 비명 같았다. 21세기에도 인류는 혼돈 속에 있고,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다행인지 우리는 ‘지구 반대쪽’에서 저 “붉은 꽃잎이 뚝뚝 떨어”지는 폭력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음을 방관하며 보고 있을 뿐. 하나 세계의 심장에 미사일의 과녁이 맞추어져 있고, 파국으로 가는 시간 위에 우리 역시 탑승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6-19
영등포에서 기차를 타고 옥천에 간다 옆자리에 꽁지머리 총각이 앉았다가 수원역에서 내리고 한참 빈자리로 가다가 빨간 머리 여자가 타고 내린 후 또 혼자다 너와 헤어지고 나서 문득문득 아려오던 명치 옆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고 또 비우며 같이, 또 따로 종착역까지 가는 여정이다 … 인생이란 혼자 가는 여행일까. 누군가와 같이 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혼자 가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때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기차를 타고 가다 혼자임을 자각하고는 ‘너’와의 헤어짐을 기억한다. 명치가 아려오는, 몸으로 인지되는 기억을. 하지만 빈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가 내린다는 현상을 시인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와의 만남과 헤어짐이, “같이, 또 따로” 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임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