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열두 컷 편지를 가졌다 그것은 열두 잎을 가진 나무의 이야기 (중략) 살구나무가 좋아 저녁으로 사람들이 고인다고 아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 내가 화분마다 물을 준다 고장 난 시계태엽을 돌리고 저녁도 없이 밤을 부른다 어둠이 발등에 차린 밥상, 물컹한 가지 조림을 먹고 찬물을 마신다 찬물은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식탁 끝이, 언제부터 절벽이었나 생각할 때 멀리서 달려오는 편지가 내게 팔베개를 한다 별을 그리면 손바닥만 하게 커지는 그 저녁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나무라 불러야 하나 열두 컷 그림 속에서 잎사귀만 한 아이가 손을 흔든다 …. ‘살구나무’를 좋아하는 아이는 나무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 그림에 ‘나’는 물을 준다. “고장 난 시계태엽을 돌”려 꿈의 밤을 다시 불러오려고. 현실의 밤은 찬물 같다. 그 밤에 앉는 식탁 끝은 절벽이 되었다. 하여, 시인은 나무 그림 속 아이로부터 “멀리서 달려오는 편지가” “우리 속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해주길 기다린다. “열두 잎을 가진 나무의 이야기”를 담은, “별을 그리면 손바닥만 하게 커지는” 편지를. <문학평론가>
2025-10-01
할머니 제사는 매년 돌아오지만 엄마 배 속에서 죽은 오빠는 돌아오지 못한다 달력 속 음력은 늘 작은 글씨 죽은 사람은 물결로 떠오르고 산 사람은 땅에서 씨를 뿌린다 생일이 매년 바뀌는 사람과 살고 있는 나도 음력 뒤에 오는 봄이 좋아진다 오곡밥과 고사리, 무, 건취, 곤드레, 표고 이것들은 모두 달의 뿌리에서 나온 것 밖에 눈이 온다 음력 눈이다 물이 많은 눈이다 ….. 제사는 대개 음력에 맞추어 지낸다. 달력에 음력 날짜는 마치 숨기려는 듯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데, 그것은 음력이 죽은 이를 부르기 때문 아닐까. 음력을 따르는 세계에서 “죽은 사람은 물결로 떠오”른다. 음력은 달의 운행 주기에 따른 역법, 태양이 빛을 내려준다면, 달은 이와 대조적으로 물을 연상시키기 때문이겠다. 음력에 맞춰 지내는 명절날 먹는 ‘오곡밥’과 나물들도 “달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문학평론가>
2025-09-30
떠난 것들이 왜 내게는 남아 있는지 몰라서 강릉 바다 앞에 선다 무엇이 이리 막막한 걸까요? 어머니, 아버지! 이토록 그을은 그리움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요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묻는다 모르는 것 투성이가 그을음이었다 그을음 자욱한 물음은 바다에서 산으로 메아리를 울린다 나는 바다의 창문을 열고 내다본다 육이오 때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남몰래 밝혔던 등불이 내 상처 위에 남아 있다 그것이었다구요? 그리움의 그림자를 보라구요? 막막한 그것이라구요? ……. 윤후명은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시로 먼저 등단했다. 위의 시는 말년에 다다른 시인이 부모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절절하게 토로한다. 시인은 그 그리움을 그을었다고 말하는데, 그을음은 “모르는 것 투성이”로 인해 생긴 것, 그는 자신의 그리움이 무엇 때문인지 막막한 것이다. 하나 그리움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리움의 그림자인 그을음이라고 한다. “남몰래 밝혔던” 등불에 의한 상처인 그 그을음이. <문학평론가>
나는 내 시에 갇힐 때면 문을 열었네 그러면 해가 찾아와 놀다 가곤 했는데 자식의 화를 다 들어주는 어머니처럼 둘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놀았네 나는 내 꿈에 갇힐 때면 문을 열었네 그러면 달이 찾아와 놀다 가곤 했는데 어머니의 한을 다 들어주는 자식처럼 둘이서 식사하고 계절을 마시며 놀았네 일 년 동안 햇빛과 달빛이지만 꽃잎에 상처 있어도 꽃의 향기는 짙어 저 풍경을 관조하려는 마음을 표현하는 시는 해와 달의 뜻을 담는 그릇이었네 …. 꿈꾸는 시인도 시나 꿈에 갇힐 때가 있다. 시인은 그럴 때면 시와 꿈의 문을 연다고 한다. 문을 열어 자연 자체가 주는 선물을 받아들인다고. 낮에는 햇빛을, 밤에는 달빛을. 그리고 어머니와 대화하듯이 이 빛들과 논다고 한다. 무릇 시 쓰기나 꿈꾸기에 집착하게 되면 도리어 자유를 잃어버리는 법, 저 빛들을 자연스레 시에 받아들이면 시의 향기는 꽃처럼 짙어질 것이며 시는 “해와 달의 뜻”도 담을 수 있겠다. <문학평론가>
2025-09-25
네 인생을 뜻대로 바꿨다고 하자. 그리고 몸이란 단순히 밤의 한 부분 이상이라고-멍으로 봉인됐지만. 일어나보니 너의 그림자가 검은 늑대로 바뀌었다고 하자. 남자는 아름답고 사라졌고. 그래서 대신 칼을 벽에다 대지. 파고 또 파서 빛의 동전이 나타날 때까지 그리고 그 안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마침내 행복 안으로. 반대편에 눈이 시선을 돌려주며- 기다리고 있어. ……. 오션 브엉은 베트남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1988년 생 시인. “인생을 뜻대로 바”꾼다며 사라진 남자. 이제 그의 몸은 공기로 된 토르소로 남아 있다. 검은 늑대 같은 그림자의 형체로 된. 화자는 그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벽을 “빛의/동전이 나타날 때까지” 칼로 “파고 또” 판다. 빛의 구멍 안을 보기 위해서. ‘마침내’ 저 반대편의 ‘행복’이 화자에게 “시선을 돌려주며-” 기다리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9-24
모든 것들, 모든 곳들, 오래된 잉크병, 서랍 속에 넣어둔 지우개, 길모퉁이 지린내, 보도블럭 사이에 핀 식물, 수북이 쌓인 나뭇잎, 계단- 커피 쏟은 자국, 不在한 시간들에 빛나는 거 1827년 템스 보고서: 130개 이상의 공용하수구, 쓰레기장과 거름더미에서 흘러나온 오수. 병원 쓰레기-도살장 쓰레기. 염료-납-비누원료. 제약 공장 및 각종 제작소에서 나온 폐기물. 동물사체 ….. 모든 시의 제목이 밑에 달려 있는 이 시인의 ‘북극점 수정본’이라는 시집에 실린 시. 시인은 이 시집 서두에서 “멜로디가 먼저이고, 이념이 그 다음에 온다”고 말한다. “근원적 멜로디”가 심연에서 울리면, 그 후에 그 멜로디(시의 본문)를 이념(제목)으로 응축하게 된다는 것. 시간이 부재한 이 시대의 지워지는 감각과 버려진 사물들, 죽음을 낳는 근대에서 유래한 그것들은 ‘멜랑콜리’의 멜로디를 울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5-09-23
나는 익숙한 풍경에다 모니터를 걸었습니다. 모니터는 작고 오래되었지만 자신의 기능을 아는 듯합니다. 게다가 나이도 들었으니 최고로 성공한 모니터입니다. 그러나 최신도 아닌 기기는 우리 집에 필요 없는데! 나는 지나다가 붙잡혀 온 고물에게 그 자신의 역사를 가르쳐줄 시간과 공간이 없을뿐더러 일을 하러 가야 합니다. ……. 제목대로 ‘낯설게 하기’를 실현한 시가 아닐까. 하지만 이 ‘낯설게 하기’를 다시 비꼬는 시다. ‘낯설게 하기’란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론에서 문학성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뽑은 개념으로, ‘익숙한 풍경’에 걸어놓은 저 ‘모니터’가 ‘낯설게 하기’ 장치 아니겠는가. 하나 시인은 “최신도 아닌” 그 기기가 더 이상 자기에겐 필요 없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일을 하러 가야” 해서 그 장치를 응용할 시공간적 여유가 없다고. <문학평론가>
2025-09-22
어느 날은 컹컹 짓고 어느 날은 냐옹 울기도 하는 횡단보도 절뚝이는 다리로 나를 따라 집까지 온다 병원 같은 게 입원실 간이침대 옆 쪼그려 앉은 그림자 같은 게 쉽게 부서지는 게 부서지고도 반짝이는 게 공병 같은 게 나와 함께다 함께 먹고 함께 잠든다 함께 꿈속을 거닌다 지옥의 숲을 산책하듯이 … 횡단보도가 시인을 따라온다. ‘횡단보도’란 그 길 위에 있던 버려진 것들의 제유다. 가령 유기견이나 유기묘의 울음소리와 같은, 또는 병들어 “쪼그려 앉은 그림자 같은” 것도. 그러니까 “쉽게 부서지는/공병 같은” 것들이 시인을 따라와 함께 먹고 잠든다”는 것. 한데 그것들은 “부서지고도 반짝”여서 시인의 꿈속까지 따라와 함께 거닌다. 비록 이 시인의 시속일 그 꿈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지옥의 숲’이지만. <문학평론가>
2025-09-21
고개 살짝 들어 봐요 머리카락도 좀 올려 봐요 웃어보세요 움직이지 말고요 당신의 지친 두 발을 감추고 정강이를 버리고 한 몸통의 울음을 자르고 반사광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표정은 용서에 알맞다 (중략) 엄마가 앵글 속으로 얼굴을 구겨 넣는다 칠 벗겨진 꽃 브로치를 달고 멈춰 버린 시간 당신이 아니라 내가 흔들린다 반셔터를 눌러 당신을 붙잡아 둔다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더 이상 자르지 않아도 되는, 영정이 웃고 있다 … ‘엄마’의 영정 사진을 찍는 장면을 보며 흔들리는 시인의 마음을 말해주는 시. 시의 말미에서 웃고 있는 영정의 클로즈업으로 급전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영정 사진을 찍는 ‘엄마’는 흔들리는 마음으로 삶을 정리해볼 터, 시인은 그로부터 “한 몸통의 울음을 자르”며 고통을 준 이들을 용서하는 엄마의 마음을 추측해본다. 그리고 이젠 “흔들리지 않는”, “더 이상 자르지 않아도 되는” 영정 속의 ‘엄마’의 웃는 모습. <문학평론가>
2025-09-18
그렇게도 당신은 레몬을 기디라고 있었다 슬프고 희고 밝은 죽음의 자리에서 내 손에서 받은 한 개의 레몬을 당신의 고운 이가 우드득 깨물었다 황옥빛 향기가 감돈다 그 몇 방울 하늘의 것인 레몬즙은 번쩍 당신의 의식을 정상으로 했다 당신의 푸르고 맑은 눈이 희미하게 웃는다 내 손을 잡은 당신의 힘의 건강함이여 당신의 목구멍에 거센 바람 소리는 있지만 이런 생명의 벼랑 끝에서 지에코는 원래의 지에코가 되고 생애의 사랑을 한순간에 기울였다 (하략) ….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일본 시인 고타로. 그는 정신분열증으로 사망한 아내 지에코를 그리워하는 시집 ‘지에코초’(1942)를 발간한 바 있다. 위의 시는 그 시집에 실린 시. 병상의 지에코는 죽기 직전의 이상처럼 레몬을 먹고 싶어 했다는데, 그녀가 레몬을 깨물었을 땐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와 “맑은 눈이 희미하게 웃”었다고 한다. “생명의 벼랑 끝에서” 사랑을 기울이는 ‘원래의 지에코’로 돌아온 순간이었다고. <문학평론가>
2025-09-17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아픈 균형을 본다. 그것은 앞으로 구부러졌다가 부러지지 않고 슬쩍 뒤를 밀어내면서 위로 위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찔함은 그 앞이 퍽 가파른 기울기를 가졌다는 데에 있지 않다. 제일 높은 계단이 스무 걸음이나 위에 있어서도 아니다. 늙은 몸이 무게를 딛고 그에 거기에 닿을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나는 제일 높은 계간 위까지 몸 밀어 올리는 시간을 세어보았다. 그 위에는 더없이 파란 창공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의 일이다. ….. 계단을 올라가는 노인이 ‘아픈 균형’을 잡고 있다. 마치 부러질 듯 구부러지면서도 “슬쩍 뒤를 밀어내면서” 위쪽으로 기울며 ‘몸 밀어’ 올라가는 노인의 자세. 시인은 그 모습에서 노인이 자신의 무게를 딛고 “가장 높은 계단”에 기어코 닿으리라는 사실에 아찔함을 느낀다. 시인 역시 ‘몸 밀어’ 올라가고 있는 계단의 끝은 어디를 의미할까? 삶의 무게를 덜어낸 죽음? “그 위에는 더없이 파란 창공이 펼쳐져 있”을? <문학평론가>
2025-09-16
물이 닿는 모든 자리가 깨끗해지진 않는다 지하철도 지하로만 다니지 않고 잔뜩 취한사람 옆에서 꽤 오래 문이 열려 있던 냉장고 냄새와 비슷한 냄새를 맡는다 이 감정은 상온에 보관해야 한다 바닥으로 더 들어가는 바닥과 빗물 작은 웅덩이를 피해 걷는 사람들 앞서가는 뒷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줄눈같이 살아남아 물때가 낀다 분홍색 형광펜을 제 몸에 그은 듯 죄다 중요한 사람들 중요하지 않은 게 없어서 더욱 중요해지려는 미끌거림들 ……………. 비오는 거리에 물이 닿아도 더러워지는 작은 물웅덩이(‘포트홀’). 시인은 이 웅덩이가 제공하는 풍경을 기록하려 한다. 취객 몸에서 풍기는 “오래 문이 열려있던/냉장고 냄새를 맡”으며 생기는 감정을 “상온에 보관해야” 하듯이. 그 풍경은 빗물이 “바닥으로 더 들어가는” “웅덩이를 피해” 걸어가는 이들의 뒷모습이다. 이들이 자신들 몸에 “분홍색 형광펜을” 그으며 “더욱 중요해지려”고 ‘미끌거’리고 있는 삶의 풍경. <문학평론가>
2025-09-15
끝난 것 같은데 끝나지 않은 사람 서는 대신 누워버린 사람 누워서 종일을 걷는 사람 아무리 걸어도 빨간불인 사람 그릇에 떨어진 동전의 힘으로 사는 건지 모르는 사람 아직 지지 않은 사람 지치지 않는 사람 몸과 고무가 하나지만 여름에는 고무다리가 옥수수 잎처럼 더 자라는 사람 (중략) 배달 오토바이처럼 한번씩 바닥에 뒤집혔다가도 끝내, 끝내지 않는 사람 …… 예전엔 다리 잃은 장애인이 고무다리를 붙이고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엎드려 시장이나 역 주변을 돌며 구걸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던 바, 시인은 이 장애인 걸인으로부터 어떤 숭고한 생명력을 보았던 듯싶다. 그 장애인의 모습을 보면 “끝난 것 같”지만, 그는 결코 “끝내지 않고”, 세상이나 운명에 “지지 않”으며, 그것도 “누워서 종일을” 걸어도 “지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인은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9-14
처마 및 기어들어 빗방울만 바라보며 책가방 움켜쥐고 혼자 떨고 서 있는데 우산 든 여학생 미소 풀꽃처럼 다가온다 받을까 망설이다 데리러 곧 온다고 수줍어 낯 붉히며 차마 받지 못하는데 굵어진 빗줄기 사이로 작아지는 뒷모습 소나기 삼 형제도 거짓말을 하는 걸까 밤 깊은 빗길 속에 속옷조차 젖어들 녘 부를 이 없는 이 마음 누구에게 전할까 … 위의 시는 자유시의 질감으로 읽히는 연시조다. 마지막 행이 전통적인 시조의 종장처럼 여운을 남기긴 한다. 나이 지긋한 시조 시인이 풋풋한 소년 시절을 떠올리는 시로, 시가 연출한 장면이 예뻐서 여기 올린다. 풀꽃 같은 미소를 띠고 우산을 들고 다가온 여학생의 호의에 ‘감히’ 응하지 못하고, 결국 비를 쫄딱 맞으며 길을 걸어야 했던 소년의 우스우면서도 귀여운 모습이 독자의 옛날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2025-09-11
내가 약탈했던 시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노라 모든 나라의, 모든 시대의 시인들이여 나는 오로지 당신들의 단어들, 당신들의 문체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방식이었다, 형제들이여 그것은 당신들에게 바치는 커다란 존경인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여기, 우리 사이에 사람을 이끄는 끈 자체인 단어들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다 이어져 있기 때문이니라 고맙다. ….. 미롱은 캐나다 퀘벡주 출신 시인. 1996년 그가 죽었을 때 최초로 퀘벡 작가를 위한 국장이 열렸다고. 위의 시에 따르면, 모든 나라의 단어들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다 이어져 있”다. 필자가 지금 불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위의 시를 읽고 있듯이. 하여 시인은 모든 나라와 시대의 시인들의 단어들과 문체들을 ‘약탈’하여 ‘다른 방식’으로 가지는 이다. 하나 그것은 그들에 대한 ‘커다란 존경’의 행위라는 것. <문학평론가>
2025-09-10
아직 오지 않는 흰 구름을 기다립니다 내가 타야 할 기차입니다 오기만 한다면 단숨에 그리로 갈 것이기에 구름의 발을 믿습니다 이곳은 별들의 무덤입니다 조각난 별들이 퍼즐처럼 맞춰 달라 보챕니다 제 자리로 가서 반짝이고 싶다 합니다 죄의 값보다 무서운 돈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덤불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바람 한줄기 잠시 머무는 역에 이르렀습니다 하얗고 곧은 사람들이 사는 은사시나무 마을에서 흰 구름이 떠났다고 합니다 별의 눈이 되어 거기에서 만날 우리 … 위의 시에 따르면 우리는 “죄의 값보다 무서운 돈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별들의 무덤”인 ‘덤불’에서 살고 있다. 시인은 이 숨 막히는 곳에서 빠져나와 “하얗고 곧은 사람들이 사는 은사시나무 마을”로 가려고 한다. 그 마을에서 떠난 ‘흰 구름’을 타고 ‘거기’로 갈 수 있으리라 믿기에. 지금 시인이 도달한 곳은 “바람 한줄기 잠시 머무는 역”, 여기서 그는 저 마을에서 ‘별의 눈’이 될 수 있으리라 희망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9-09
엄마가 죽었을 대 엄마의 말씨가 남았다 이내, 이내 이내가 어미의 시간처럼 돌아왔다 밥 짓는 손끝에서 아궁이 불꽃처럼 말이 피어올랐다 그 말은 내 귀에 박히고 내 입에서 다시 불러졌다 나는 엄마의 사라진 시간을 아로새긴다 불꽃처럼, 이내 …. 위의 시를 읽고 뜻을 알고 있다고 여겼던 ‘이내’를 사전에서 찾아봐야 했다. ‘곧’이라는 시간적 의미만이 아니라 ‘가까이’라는 공간적 의미도 있는 오묘한 말이었다. 이 시에서 ‘죽은’ ‘엄마’가 자주 입에 올렸던 ‘이내’는 “아궁이 불꽃처럼” 피어오르며 “어미의 시간처럼 돌아”와 시인의 말이 된다. “엄마의 사라진 시간”이 시인에게 ‘불꽃처럼’ 아로새겨진 것, 이로써 ‘엄마’는 시인과 같이 사는 ‘이내’의 존재가 된다. <문학평론가>
2025-09-07
정이랑 “벗어 봐요” 지나가는 나에게 속삭이던 너, 못 들은 척 했었지 겹겹이 입고 있다가 때가 되면 벗을 줄 아는 너, 맨몸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는구나 허공을 떠받치고 있는 가지들이 눈부시구나 몇 날 며칠을 혼자 서 있어야 껴입은 욕심을 버릴 수 있겠니, 모든 걸 떨쳐버리고 오롯이 바람 한 점만 걸칠 수 있겠니, 이 시간 이후부터 나의 자화상을 너로 삼기로 했다 …. 겨울이 되어 옷 벗은 나무. 시인이 이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은 나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나무의 꼿꼿함 때문이다. 물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혼의 문제다. 자신의 맨 영혼을 세상에 드러냈을 때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오롯이 바람 한 점만 걸칠 수 있”는 영혼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잎 떨군 가지처럼 “허공을 떠받치”며 자유에 도달한 영혼, 시인은 이 나무의 영혼이 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알을 깨고 나온 누에의 몸털처럼 갓 우화한 어린 날개의 깃털처럼 대숲을 빠져나온 바람처럼 자유롭게 한바탕 울음을 쏟은 구름처럼 홀가분하게 별들의 소리가 선명해지는 자정의 몽유처럼 꿈꾸며 노닐자 육신의 틀을 벗은 혼령처럼 입자의 틀을 벗은 파동처럼 시공의 틀을 벗은 양자처럼 달을 품은 백학의 날개처럼 춤추며 노닐자. … ‘소요유’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를 뜻하는 장자의 말. 위의 시는 이 ‘소요유’ 사상을 시적 이미지로 제시한다. 갓 태어난 이들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돌아가자는, 바람을 타고 날개를 흔들며 날아가는 백학처럼 “춤추며 노닐자”는 시인의 제안은 눈물 날 정도로 마음에 박힌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갇혀 살아가고 있기에. 하나 시의 도움으로 ‘소요유’의 마음만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2025-09-04
레스토랑에서/ 나와 함께/ 수프를 먹은 건/ 새들입니다 투명한 부리를 훔치며/ 일어서더니/ 차례차례/ 박쥐우산을 펼쳐/ 석양 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홰 위에서 홀로/ 비 소식을 듣는 건/ 나입니다 웨이터가 / 새장 문을 열고/ 발자국을 모두/ 어둠 쪽으로 쓸어냅니다 ….. 일본의 현역시인 루리코의 시. 직접 꾼 꿈을 환상적인 시로 변환하여 발표했다고. 위의 시도 꿈과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시인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새들이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친 새들은 석양 속으로 들어간다. 시인도 조류가 된 걸까, “홰 위에서” “비 소식을 듣는”다니. 발자국을 “어둠 쪽으로 쓸어”내는 웨이터는 ‘시간’의 화신일까. 의미 해석의 정답은 없어서, 여러 가지로 읽어볼 수 있는 재미를 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5-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