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아이 이현승 소년의 손에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고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려 소년의 소매를 적시고 있다 우리는 거리에서 노래하고 거리에서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마시고 거리에서 사랑을 하고 잠을 자고 그리고 거리에서 죽는다 서로의 몸속을 보여줄 만큼 거리는 이제 아주 사적인 공간이므로 투명인간들이 활보하는 거리에서 소년은 눈물을 훔친다 책상에 앉은 채 소변을 보았던, 그러고는 곧 학교를 떠났던 그 소년처럼 길에서 우는 아이 얼음 조각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 이 길 위에서 사라질 아이 ……… 통상 가면을 쓴 ‘군중 속의 고독’이 논해진다. 한데 위의 시는 이와 달리 거리의 군중은 ‘투명인간들’이라고 말한다. 거리는 “사랑을 하고 잠을 자”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루어지는 곳이기에.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려 울고 있는 아이는 어떤 투명한 슬픔을 보여준다. 그것은 “책상에 앉은 채 소변을” 봐서 학교를 떠나야했던 소년의 슬픔처럼,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사라져야 하는 존재자의 비애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2026-01-01
반소매 아래 하얗고 가는 팔을 가진, 네이비 블루진 아래 탱탱한 허벅지를 가진, 물고 싶은 송곳니와 물리고 싶은 목을 가진 젊은 영혼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심야 독립 영화 상영관 앞에서 탑골 공원까지, 동대문 상가에서 대학로까지, 남산에서 한강대교까지 나는 무엇을 갈망하는지 몰라서 피에 탐닉한다. 피에 물든 달을 꿈꾼다. 검붉은 노래와 울음과 시를 입 안 가득 머금고, 겁에 질려 말을 잊은 골목길 모퉁이에서 앞머리 늘어뜨린 창백한 얼굴로, 텅 빈 눈과 깨물어 붉어진 입술로 우두커니 선다. 갈 곳을 잊은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 위 시의 젊은 흡혈귀는 도시를 살고 있는 젊은이의 전형적인 모습이겠다. “무엇을 갈망하는지 몰라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텅 빈 눈”으로 ‘우두커니’ 서는 젊은이. 하나 갈망 자체만은 강렬해서, 그 흡혈귀 청년은 이 갈망으로 인해 “갈 곳을 잊”고 그림자를 잃어버린 자신의 운명에 대해 “겁에 질려 말을 잊”게 되는 것, 이 비극적 운명이 그를 “검붉은 노래와 울음과 시를 입 안 가득 머금”은 시인이 되게 할 테다. <문학평론가>
2025-12-30
바람아 기억하는가 한때 나는 날개를 갖고 있었네 허공을 날며 사랑을 나누다 절정의 순간 몸이 터져 죽어버리는 수개미의 날개를 그러나 어느 날, 내 날갯짓의 에너지였던 사랑은 태양의 지평선을 따라 사라지고 난 지금 암흑의 대지에 갇혀 떠나간 사랑에 대해 쓰네 이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진 날개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생의 나머지를 견디네 …… 우리도 이카루스와 같은 경험을 해본 일이 있을 테다.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면. 사랑은 “절정의 순간 몸이 터져 죽어버리”더라도 우리를 날게 해주고, 태양을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 사랑이 지평선을 넘어가는 태양을 따라 사라지고, “암흑의 대지에 갇혀”버린 현재는 더 슬프다. 날개는 쓸모없어지고, 비상의 기억만을 “조금씩 뜯어먹으며” “떠나간 사랑에 대해 쓰”면서 나머지 생을 견디는 삶이니. <문학평론가>
2025-12-28
동네 산책길 자그마한 풀잎 하나가 발등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넵니다 기우뚱, 중심을 잃기라도 하면 까르르 웃느라 잎사귀가 뒤집힙니다 이름조차 모르는 나에게 수줍게 말을 거는 작고 여린 것들 어찌 보면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세상에서 동거하는 처지인데 이름조차 모르는 내가 무심합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조용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 시인에게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물들은 말을 건네는 존재자다. 위의 시에서의 자그마한 풀잎도 그러하다. 화자는 홀로 사는 외로운 사람인 것 같다. 저 웃기 잘하는 풀잎도 외롭게 세상에 존재하기에, 화자의 외로움을 안다는 듯 말을 건네는 것일 터, 이에 화자는 더 나아가 깨닫는다. 풀잎의 말 건넴엔 “먼발치에서” 화자를 바라보는 존재자의 “조용한 마음”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그 존재자란 신 아닐까. <문학평론가>
2025-12-25
뗏목에서 그물 깁는 할아버지 옆에서 싸리나무 낚싯대로 복어를 낚던 아이가 할아버지가 잠시 조는 사이 잘피에 걸터앉은 해마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은빛 물고기 떼 헤치고 나아가는 물개의 헤엄이 그리는 곡선처럼 날렵하고 아리따운 단발머리 처녀가 짝다리 총각과의 혼인을 반대하는 어미 때문에 농약을 마셨다 전주 이씨 일가의 쟁기질 써레질을 도맡아 하던 아재가 메콩강 상류를 누비는 카누처럼 단단하고 순박한 외팔이 아재가 가랑비 오는 날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바닷가 언덕 포구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 안타까운 죽음들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이들의 죽음. 망각에 저항하는 시는 위의 시처럼 이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복어를 낚던 아이가” “해마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물속에 빠진 일, “짝다리 총각과의 혼인”이 ‘어미’ 때문에 좌절하여 “농약을 마신” 처녀의 죽음, 양반집 일을 도맡았던 “외팔이 아재가” “목을 매”단 일 등을 위의 시는 기록한다. 이 죽음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문학평론가>
2025-12-23
오래 전부터 가장 메마른 땅을 가로질러 나를 실어 가는 이상한 배 위에서 얼굴들은 고통을 받고 말들은 메아리가 없다 불면이 깊숙이 파고들어 폭풍우는 거대하고 푸르다, 오래 전부터 난 내 水深을 의심했다. 지나친 재난을 확신했다. 이 세상의 水路나 입구가 그리웠다 가로질러 가듯이, 눈을 감고 난 스며든다, 오래 전부터 그렇게 건넌 고장은 죽어 간다 그리하여 사나운 키가 이끄는 대로 내버려둔다 오래 전부터 모든 희망과는 반대로 난 항구를 희망한다 ; 난 알고 있다, 내 잠 밖에서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별에게는 고통과 힘과 쓰라린 살갗의 경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 프랑스 현대 시인 장 주브의 시. 시인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배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상한 배를 타고 삶을 항해했다는 것, 자신의 “수심을 의심”하며 “재난을 확신”하고는, “사나운 키가 이끄는 대로” “희망과는 반대로 난 항구”를 향해 나아갔다는 것이다. 하나 그는 “단 하나의 별”이 남아 있다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위해서는 고통과 경련을 겪을 각오를 한다. 그 별은 ‘시’를 의미할 테다. <문학평론가>
2025-12-22
사람들은 현실에서 현실에서 행동하듯 행동하지 않아. 사람들은 더 느릿하고 대기의 수동적인 변화들을 기록하지. 아니면 스스로를 초록색 페르시아 개 그리고 새로 바꾸기도 하고. 누가 그러는 걸 보면 너는 알게 되지 세상은 억지로 짜 맞춘 거란 걸. 진부한 세상인 거지. 사람들은 가난해. ….. 미국의 현대 시인 크릴리는 위의 시에서 현실의 삶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억지로 짜 맞춘 거” 같은 진부한 세상의 현실. 이 현실에서 사람들은 “현실에서 행동하듯/행동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사실 “대기의 수동적인 변화를” 느릿하게 기록한다든지 스스로를 개로 “새로 바꾸기도” 하며 이 바쁜 현실을 비현실적인 행동으로 몰래 보내고 있는 것. 삶을 가난하게 하는 현실의 진부함을 이겨내기 위해. <문학평론가>
2025-12-21
당신, 날 버렸지요 불빛 하나 없는 쓸쓸한 빈집에서 홀로 쓰러졌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슬픈 짐승이 되었지요 달이 뜨면 언어의 심장을 파먹으며 허기를 달래다 다시 아침을 맞아야 하는 생을 동정했어요 슬픔은 상처에서 온다지요 상처밖에 없는 나는 빈털터리, 텅 빈 늦가을 같아요 ….. 한국 최초 서정시는 실연에서 비롯됐다. 실연은 서정시의 변함없는 주제. 위의 시는 실연당한 이의 마음이 도달한 극한을 보여준다. “쓸쓸한 빈집에서” “슬픈 짐승이 되어”가는 이. 그는 밤마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언어의 심장을 파먹으며” 글을 쓴다. 하나 고통스러운 아침은 다시 오고, 이러한 나날이 반복되면, 상처에서 오는 슬픔도 없어진다. 그 자신이 상처만 남은, 늦가을 같은 빈털터리가 되기에. <문학평론가>
2025-12-18
바다는 날마다 원고를 고친다 해변엔 마감이 없다 겹쳐 쓴 어제를 지우고 남길 것만 남기는 파도 제멋대로였던 문장은 퇴고할수록 매끈해진다 운율을 살려 행을 바꿔주는 바람 발자국의 궤도를 따라 끝내 우리는 둥근 행성이 된다 ……….. 시인이 자연의 움직임을 투시하고 시를 쓴다면, 자연도 시 쓰기에 가담하는 주체 아닐까. 자연도 시인 아닐까. 위의 시에서 바다는 시를 쓰고 있다. 마감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시 쓰기. 파도는 “겹쳐 쓴 어제를 지우”며 퇴고하고, 바람은 “운율을 살려 행을 바꿔”준다. 바다가 찍어주는 “발자국의 궤도를 따라”가며 ‘몽돌’처럼 둥글어지는 우리는 ‘끝내’ “둥근 행성이” 되고, 이렇게 자연의 시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문학평론가>
2025-12-17
밤새 투명 유리창으로 무장한 당신의 가슴을 두드리던 눈송이들 금세 쫓기듯 백담 계곡을 지나 미시령 쪽으로 연이어 넘어가고 미처 넘어가지 못한 얼음의 시간들이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며 용대리 황태덕장 주변을 검은 까마귀 떼로 떠돌고 있다 물기 젖은 침엽수 이파리마다 수정의 고드름이 피어나는 겨울 오후 제 힘으로 어쩌지 못할 거대한 눈보라의 풍경을 저 문밖에 세워두고 거기에 저항하거나 포기할 수 없기에 파괴될 수 없는 절대의 윤리. 뼛속까지 말라붙은 기억의 육질마다 황금빛 속살이 차오르고 있다 ……….. 문밖에 눈보라 휘날리고, 이를 응시하는 시인은 “파괴될 수 없는 절대의 윤리”를 생각한다. 그 생각은 눈송이들이 그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유인되었다. “얼었다 풀렸다를 반복하”는 “얼음의 시간들”이 떠올려진 것. “까마귀 떼로 떠돌고 있”는 시간들이니, 그것은 죽음과 관련된 기억일 테다. 그 죽음에 대해 절대의 윤리를 드러내는 눈보라는 시인의 “말라붙은 기억의 육질”을 “황금빛 속살”로 채우기 시작한다. <문학평론가>
2025-12-16
흰 눈이 내 꿈을 덮으며 읽어 내릴 때 길 위에 잘 있어, 라고 쓰면 밤새 네가 다녀간 것 같다. 이파리가 줄기에게 고요한 것은 말이 없어도 끄덕이게 되는 마음, 쌓이다가 만 입술을 허문 말, 마음의 뒤편은 늘 멍빛으로 젖어 있다. …. ‘너’와 작별하고, 그리운 네가 꿈에 나타난다. 그 꿈을 눈이 덮어 읽을 때, 시인은 길 위에 “잘 있”으라는 글을 쓴다. 그러면 “밤새 네가 다녀간 것” 같고, 멍든 “마음의 뒤편은” 푸른색으로 젖어든다. 이 아픈 마음은 “이파리가 줄기에 고요한” 수국의 모습 같다. 아픔이 쌓여서 “입술을 허”물었기에 말이 없는 이파리. 작별을 경험한 이들은 고요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문학평론가>
2025-12-15
조국의 시간들은 달콤하리 - 태양은 따스한 빛을 내리비추는 땅! 초원을 지나가는 산들바람은 우리의 인생, 바람 한 점 없는 정적은 죽음, 가장 부드러운 미풍은 우리의 사랑일지라. 어머니의 얼굴 아래 잠이 깰 때, 우리는 뜨거운 키스로 삶을 노래하고 어머니를 안으려 두 팔을 내밀 때도, 어머니를 올려보며 두 눈이 웃을 때도 그러하리니. 조국을 위해 죽는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가 - 나의 땅 위에는 태양이 따스한 빛을 비추나니 ; 죽음은 조국과 어머니가 없고 사랑을 못 가진 자에게 미풍과도 같은 것. …… 리살은 19세기 후반 스페인 치하의 필리핀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 1896년 스페인 당국에 의해 35살 나이에 처형당했다. 위의 시는 죽음을 불사한 그의 조국애를 보여준다. 조국을 위한 죽음은 조국 없는 이에게는 미풍과 같다. 조국은 어머니 같아 조국 없는 이는 “사랑을 못 가진 자”인 것. 하나 여전히 “나의 땅 위에” “태양은 따스한 빛을 비추”고, 이 땅을 되찾기 위한 죽음은 산들바람이 되는 일이라는 것. <문학평론가>
2025-12-14
호두가 어구똥지게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감자가 덕지덕지 몸에다 흙을 처바르고 있는 것, 다 자기 자신이 물집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다 터뜨리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운명 앞에서 좌우지간 버텨보는 물집들 딱딱한 딱지가 되어 눌어붙을 때까지 生이 상처 덩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그래서, 나도 물집이다 불로 구워 만든 물집이다 나도 아프다 ……….. 우리는 터져버리면 ‘생’이 무너져버릴지 모르는 상처를 품고 살지 않는가. 시인은 더 나아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 상처-물집-라고 말한다. 생 자체가 ‘상처 덩어리’라는 것. 하여 그 물집이 터지면 생 자체도 사라질 수 있는 것, 상처가 우리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우리는 물집이 터지지 않도록 호두처럼 딱딱한 껍질을 뒤집어쓰거나 감자처럼 흙을 처바른다. 상처가 딱지가 되어 아물 수 있을 때까지. <문학평론가>
2025-12-11
밤의 감촉인/ 어둠을 만져보았어/ 내게 먼 해안이 생겼어 도톨도톨한 흑백 건반은/ 저녁부터 비를 되풀이하고 있어 희고 검은 손가락이/ 가늘어지면서 건드리는/ 빗방울은 블루/ 비와 물방울을 이해한다면/ 나는 투명해지는 거지 창문으로만 보이는 겨울비 때문에/ 뒤척이는 눈물 대신/ 나의 해안은 자꾸 길어진다네 이상한 하루였어/ 물이 나면서/ 내가 물,/ 무엇이든 서로가 되는 날이었어/ 서로를 포옹하는 날이었어 ………. 아름다운 몽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시. 이 몽상은 화자가 “밤의 감촉인/어둠을 만져보”면서 시작된다. “먼 해안이 생”기고, 그 해안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긴 손가락 같은 빗방울이 어둠의 건반을 누르며 연주하는 ‘블루’의 음악을 듣고 “비와 물방울을 이해”하게 된 “나는 투명해”진다. 그 음악을 들으며 눈물 흘리는 ‘나’도 물방울이 되기 때문. 게다가 이 길어지는 해안선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서로가 되”기에. <문학평론가>
2025-12-10
속에서 불꽃을 피우나 겉으론 한줌 연기를 날리는 굴뚝 같은 세찬 물살에도 굽히지 않고 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은 속을 텅 비우고도 꼿꼿하게 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 같은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 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붉은 꽃을 피우고도 질 때는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 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 …… 등단한 지 60년을 맞이한 천양희 시인이 쓴 시인론. 위의 시가 말하는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굽히지 않는 존재, 세상 물살에 거슬러 올라 꼿꼿하고 홀로 푸를 수 있는, 나아가 스스로 유배를 내려 황무지를 찾아가는 존재.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꽃 때문일 테다. 외면으로는 연기만 날리는 것처럼 보이는 뜨거운 내면. 내면을 태워 붉은 꽃-시-을 피우고, 모가지를 떨어뜨리는 동백 같은 ‘시인’. <문학평론가>
2025-12-09
버스 창가에 앉은 어린 딸이 내게 기댄 채 잠들었다 저를 모두 올려놓고 돌처럼 고요한 아이 버스는 정체되고 나는 새잎을 올려둔 고목같이 경건해진다 우리가 겹치기까지 멀고 먼 시간을 생각하면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우린 잠깐 이토록 눈부시다 …. 아름답고 눈부신, 그리고 눈물겨운 장면이다. 아이 가진 부모는 시가 보여주는 일을 자주 겪었을 테다. 버스나 기차 안에서 아이가 “저를 모두 올려놓고” 잠드는 일.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시인은 이 일이 지닌, “새잎을 올려둔 고목같이 경건해”지게 하는 의미를 붙잡고 드러낸다. “멀고 먼 시간” 동안 우연과 우연이 겹치며 함께 존재하게 된 아빠와 딸이 지금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는 그 눈부신 의미를. <문학평론가>
2025-12-08
나의 시선은 한계선에 닿는다 거기 풀 속 물의 경주는 갈대밭에 이르러 거품으로 피어난다. (중략) 이 물을 누가 나에게 주어 갈증을 풀까? 나는 들어가고, 나는 마신다 이 짚 문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은 아마도 신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공기로 가득한 풀 속에 무릎을 꿇는다. 만일 내가 땅속에 눕는다면, 나는 날아갈텐데. 이 장소에서 땅은 파여 있다 땅은 물을 누워 있는 풀들의 수조 속에 받아놓는다 나는 오랫동안 거기서 목을 축인다 이어 이 짚 장벽에 몸을 기댄다 아, 누가 나에게 이 작은 골자기 같은 무덤을 만들어주나! 나는 안쪽에 무한의 그림자가 반짝이는 것을 본다. …… 2021년 작고한 프랑스 시인 필리프 자코테. 위의 시는 산문과 시가 섞인 작품의 후반부를 옮겨온 것이다. 시인의 시선에 들어온 갈대밭 속의 물. 그 물은 그에게 신성의 의미를 갖는다. 갈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의 육신이라기보다는 영혼, 그 영혼은 신의 초대로 짚 문을 열고 들어가 “풀들의 수조”에 “땅이 받아놓”은 물로 “오랫동안 목을 축”인다. 그러자 저 “안쪽에 무한의 그림자가 반짝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12-07
내가 쓰고 싶었던 건 못 쓰고 그 곁 느티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아래에서 멍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사람이 보였다 그는 아프다 그의 생을 모르지만 그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 나는 느티가 그의 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소라는 고양이를 키운다 그와 고양이는 나무 둘레를 매일 돌고 가지는 어느덧 푸르렀다 모두는 나무 그림자 속에서 출렁인다 못 받는 공 사랑할 수 없는 사랑···.여기 아닌 것 알 수 없는 둘레를 돌다가 먼 하루가 끝날 것 같았다 ….. 느티나무 둘레를 그의 고양이와 함께 도는 ‘그’,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왜 나무 둘레를 도는 걸까. 나무는 푸르른 가지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 그림자 속에서 출렁일 수 있기 때문 아닐까. 하여 ‘그’는 ‘느티’를 “멍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자신의 나무로 삼아서, 나무 그림자의 물결 위에 마음을 태워 “여기 아닌 것 알 수 없는 둘레를” 항해하며 마음을 치유하려 하는 것이겠다. <문학평론가>
2025-12-04
코트를 꺼내 입고 거리를 나섰다. 바깥 주머니에서 영수증이 나왔다. 구겨진 가게가 나왔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상점도 나왔다. 낯선 사람들의 이름만 있는 종이를 찡그린 손. 잉크를 떨어뜨리듯 걸었다. 번져가기만 할 뿐 도무지 결집되지 않는 오후, 쓸모 있는 것을 찾는 안주머니에서 닻이 나온다. 흉터처럼 흉측하여 보는 것만으로 아파오는… 바람이 인파를 지우는 사이, 역 출구는 전면 폐쇄됐고 거치대엔 낡고 인장이 낮은 자전거가 묶인 채 담배 연기를 받아냈다. ……….. 우리 삶의 닻은 어디 있는가. 모든 것이 “번져가기만 할 뿐” “결집되지 않는” 삶에서. 시인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상점”만이 서 있고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만 이루어지는 거리를 걸으며 표류한다. 출구는 폐쇄되고 어디론가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는 자전거는 묶여 있는 상황. 하여 지금 쓸모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그래도 지탱해주고 있는 닻인 것, 그 닻이 “보는 것만으로 아파오는” 흉터처럼 흉측할지라도. <문학평론가>
2025-12-03
껍데기만 남은 노인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휴대폰을 주물럭거린다 그의 아내의 손인 양 주물럭주물럭 전동차는 역마다 쉬어가는데 노인은 손을 놓지 않는다 죽은 아내의 문자라도 보려는가 생전의 웃음을 보려는가 전동차는 찰카닥찰카닥 섰다 가고 노인은 아내의 모습이 휴대폰 창에서 흔들릴 때마다 꽉 쥔다 옆구리를 쿡 찌르기도 하고 얼굴을 만져보기도 하고 가슴에 꼭 안아보기도 한다 종로3가에서 노인이 내린다 전동차는 텅 빈 노인석을 공손히 들고 한 발짝 한 발짝 떠난다 …. 노인이 아내의 손을 만지고 있는 양, “휴대폰을 주물럭거”리는 것을 보면 그 폰에는 죽은 아내의 사진이 담겨 있나보다. 이제 휴대폰 안에 모든 걸 저장하는 시대이니까, 저 노인도 이 시대의 삶의 양식 안에 있는 것이다. 애도와 그리움은 이 시대에 걸맞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하나 “아내의 모습이 창에서 흔들릴 때마다 꽉”쥐며 “가슴에 꼭 안아보기도” 하는 모습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동일한 사랑을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5-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