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먹고 조금 싸며 살겠다고 직장을 뛰쳐나간 동료가 있었지 회사를 나간 그는 끝내 다른 회사에서 마늘만 먹고 있다는데 참는 자에게 복은 온다고 오래도록 참았지만 여전히 마늘만 먹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하며 정해진 시간에 지문을 찍고 맘껏 숲을 누비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사람 되긴 영 그른 건지 사람이 될지 안 될지 모르면서 마늘만 먹고 그런데 동굴을 뛰쳐나간 호랑이는 어떻게 되었대? … 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 우리는 곰의 후손일까 호랑이의 후손일까. 한국 민담이나 민화에 호랑이가 자주 나오는 걸 보면, 인간되기를 거부하고 동굴을 뛰쳐나간 호랑이의 후손 아닐까. 21세기 한국에서 호랑이의 후손들은 동굴 속에서 마늘을 먹으며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사람 되길 기다리며, “정해진 시간에 지문을 찍”으며. 하나 동굴을 뛰쳐나가 “맘껏 숲을 누비고 싶은” 마음은 더욱 들끓고 있는. <문학평론가>
2025-08-03
목덜미 쪽으로도 등줄기 쪽으로도 닿을 수 없는 제2흉추 자리 부근에 그대가 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아무리 팔을 비틀어도 닿지 않는, 그 자리가 시려올 때마다 나는 벽에 시대어 선더 내 심장의 뒤쪽 …. ‘그대’는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다. 그대의 존재는 그의 몸속, “제2흉추 자리 부근”에 있다. 시인의 마음 중추에 자리 잡고 있는 것. 하나 그대는 그대에 대한 기억 또는 그리움이 만든 존재, 정작 그대는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먼 그대’이기에 그대는 시인의 흉추에 자리하기 된 것, 그대 있는 그 자리가 시리다. 하지만, 목욕할 때 경험하겠지만, 아무리 “팔을 비틀어도/닿지 않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7-31
바람이 들락대는/ 허공에 산다 일생 창자를 녹여/ 실로 엮은 집 밤이면/ 별들이 줄을 내리는/ 어둠 한 채 쿵쿵 심장을 두드리는/ 오지 않는/ 너의 발소리 불룩한 그리움을 입다심하는/ 수인번호 선명한/ 나의 집 …… 시인에게는, 그가 죄수가 되어 갇혀 사는 또 다른 집이 있다. 마음의 집이 그것. 거미의 집과 닮아 있는 집. 하여 그의 마음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을 터, 거미집에서처럼 “바람이 들락대”며 “별이 줄을 내”리고 있다. 그는 그 집에서 “오지 않는/너의 발소리”를 ‘쿵쿵’ 뛰는 심장 소리로 들으며 그리움에 사로잡혀 산다. 그 집은 바로 그 그리움이 실을 자아내어 만든 것 아닐까, 거미가 “창자를 녹여” 집을 엮듯이. <문학평론가>
2025-07-29
어찌 당신은 비쟈 마을로 놀러 오지 않나요? 빈랑나무 위 햇빛을 보면, 빛이 고개를 들고 누구의 발인지 옥처럼 파랗고 대나무 잎은 밭을 가린다. 바람은 바람길로, 구름은 구름길로 물길은 슬픈데, 옥수수꽃은 활짝 달빛 아래 나루에 머문, 저 배는 오늘 밤 제때 저 달을 실어 갈 수 있을까? 먼 길을 온 손님의 꿈속에서도 먼 길이지 너의 옷이 너무 희어, 볼 수가 없고 여기 안개가 짙어 흐릿하니 누구의 사랑이 더 진한지 알 수 있을까? … 얼마 전 ‘한막뜨’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1940년 한센 병으로 28살에 요절한 시인으로 베트남의 국민시인이라고. 한국에서의 김소월이나 윤동주의 위상을 지닌 시인인 듯하다. 위의 시는 그의 대표시로 노래로도 만들어져 베트남인의 오랜 사랑을 받았다고. 달빛 아래 안개 낀 마을 풍경의 몽롱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통해 사랑하는 마음에 깔린 불안과 방황, 황홀과 초조를 동시에 보여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5-07-28
아파트가 세상인 세상에서 계단 오르기만 한 운동이 어디 있냐지만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은 있을 때 흘려듣는 말이기도 해서 아직은 건강하니까 다만 계단은 오르기만 하는 거라고 이 나이에 내려가기로 치면 무릎이 절단난다고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은 없을 때 사무치는 말이기도 해서 뭘 더 챙기겠다고 뭘 더 올라가 보겠다고 … 정말 “흘려듣는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 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어 본 사람은 그 말이 얼마나 “없을 때 사무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 몸도 그렇다. 몸이 건강할 때에는 몸의 소중함을 모른다. 하나 건강을 잃게 된 이는 ‘자신의 몸에 잘할 걸’이라는 회한에 사무칠 테다. 하여 “아파트가 세상인 세상”에서라도 시인은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계단 오르기”를 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7-27
오늘을 오늘처럼 사는 처세술서 한 권쯤 갈아 마셔야 가늘게 산다 마르지 않은 수많은 어제들 말리느라 건조해져 어제조차 건너올 수 없다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이제부터 당신은 모르는 사람 어제를 닮은 키 큰 플라타너스 마른 잎사귀를 한 걸음 밟는다 부스러기 섬들 다시 돋아나는데 펄펄 우는 폭우에 펄쳐질 나는 무지갯빛 우산, 아직 펑펑 젖은 무덤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 사람은 오는데 사랑은 없고 … 독특한 제목이다.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다니. 시의 마지막 행이 제목의 의미를 말해준다. 비는 그쳤지만 우산은 펴들고 있듯이, 사랑이 끝났는데 ‘무지갯빛’ 사랑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폭우처럼 시인에게 쏟아졌던 사랑에 여전히 그가 젖어 있기에. 하나 “젖은 무덤”처럼 사랑은 죽어 있는 것이다. 그에게 오고 있는 당신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을 말리는 삶은 “건조해져 어제조차 건너올 수 없”기에. <문학평론가>
2025-07-24
잠들기 위해 숫자를 센다 열아홉, 스물 스물아홉 다음도 다시, 스물 스물에 묶여 있는 입에서 밤이 조금씩 덜컹거려도 끝내 입은 안 닫히고, 내가 포장한 선물의 포장을 헤치듯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풀면 일시에 지난 시간이 검은 모래로 되살아난다 모두가 자기 말만 하는 모래밭에서 나는 옆으로 걷기만 하고,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도 나는 옆으로 걸어야 한다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입 주변이 하얗게 일어날 때까지 … 어릴 적 잠을 청하기 위해 숫자를 세곤 했다. 이 시의 화자는 어른인데도 숫자를 세며 잠을 청한다. 불면 때문이리라. 어린 아이와는 달리 좀처럼 그는 자지 못한다. “밤이 조금씩 덜컹거리”기라도 하면 “검은 모래로 되살아”나는 지난 시간 때문에 입이 닫히지 않아서다. “모두가 자기 말만 하는 모래밭”세상에서, 모래를 게워내는 게처럼 “옆으로 걸어야” 하는 삶은, 온통 검은 모래의 기억들로만 채워지기에. <문학평론가>
2025-07-23
봄은 생강나무꽃으로만 오는 것은 아니어서 어디서 본 듯한 노부부의 어깨에 노랗게 내려앉는 저 봄 우거진 숲을 쓸쓸히 지나왔겠거니 뒤돌아보는 눈빛이 따듯해서 하마터면 울 뻔했다 무량한 눈빛이 메마른 가지에서 붐빈다 다정한 은빛 머리카락처럼 순정한 목련꽃도 피었다 봄이다 … 신생의 계절인 봄. 봄이 오면 노란 생강나무꽃이 가장 먼저 피겠지만, 봄은 “노부부의 어깨”에도 노랗게 내려앉는다. 노부부에게도 봄엔 신생이 일어나는 것. 하나 그 신생은 발랄하진 않다. 뒤돌아보는 노부부의 무량하고 따뜻한 눈빛에서 쓸쓸함도 느껴지기 때문. 하여 시인은 “하마터면 울 뻔했다”고 한다. 봄은 노란 꽃만이 아니라 노부부의 “은빛 머리카락처럼” 하얀 꽃으로도 온다. 순정한 목련꽃의 봄도 있다. <문학평론가>
2025-07-22
자, 들어 봐, 내가 죽을 때 누가 우는 거 별로야, 그냥 처분 절차나 밟아, 난 한세상 잘 살았어, 혹여 한가락 하는 인간이 있었다고 해도, 나한텐 못 당해, 난 예닐곱 명분의 인생을 살았거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아, 그러니 추도사는 하지 마, 제발, 정 하고 싶으면 그는 경마 도박을 했고 대단한 꾼이었다고만 해 줘. 다음 차례는 당신이야,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거든, 그럴 수도 있단 얘기야. ….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부코스키. 그는 술꾼의 삶을 철저하게 살았다. 위의 시는 자신의 임종을 상정한 그의 유언시. 유언은 제발 추도사 하지 말고 잊어달라는 것. 자신은 “한세상 잘 살았”으니 추모할 게 없다는 것. “정 하고 싶으면” 경마에 “대단한 꾼이었다고만 해” 달라는 것.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으니 시인의 죽음도 당신이 맞을 죽음처럼 특별하지 않다는 것. 호쾌한 유언시다. <문학평론가>
2025-07-21
물방울을 만난 개미가 관통하지 않고 멈칫 돌아서 간다 조용한 슬픔의 나라 억센 비바람 치는 겨울을 직시하지도 않고 숙인 얼굴로 삐뚤삐뚤 돌아서 간다 비틀거리며 간다 마음의 불빛을 붙들고서 그 빛 세상의 무엇도 하나 비추지 않고 단지 저를 태울 뿐인데 흐릿하게 흐릿하게 가지 않은 직선을 깊은 꿈에서나 보는 그런 마음인데, 이런 … 개미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 “조용한 슬픔의 나라”인 물방울을 만나게 될 테다. 이 만남 앞에서 개미는 얼굴 숙여 “직시하지도 않”은 채로 “삐뚤삐뚤 돌아서” 갈 터, 개미는 슬픔 덩어리를 운명처럼 마주하지만 그 물방울을 뚫고 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세상의 무엇도/하나 비추지 않고//단지 저를 태울 뿐인” “마음의 불빛을 붙들고서” 직선으로 나아가는 삶을 마음 깊이 꿈꾸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5-07-20
걸어다닐 수 있겠지/ 겨울 갈대숲을 황량한 곳/ 정신이 깨끗한 손가락으로 턱을 괴는 곳 가끔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삶이 진창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의 어깨 위에서 알려줄 수 있겠지 (중략) 내가 새라면/ 단 한번의 날갯짓으로/ 검은 비 떨어지는 창공으로 날아올라/ 추락을 살 수 있겠지 겨울 갈대숲/ 발자국 위에서 볼 수 있겠지/ 멀리/ 날아가는 한 마리 새 …. 이 세상이 ‘겨울 갈대숲’처럼 ‘황량한 곳’이라면. 바닥이 진흙탕이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진창’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시인은 “정신이 깨끗한” 새가 되고 싶을 테다. “사랑하는 이의 어깨 위에서” 삶의 슬픔을 알려주는 새. 하나 시는 결국 “검은 비 떨어지는” 이 세상에서의 새의 비상이란 추락을 산다는 것임을 말한다. 새의 발자국-이 찍힌 겨울 갈대숲에서 새의 슬픈 삶을 시인이 볼 수 있으리라 예상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07-17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 해장국집을 찾는다 뼈해장국을 시켜서 먹고 하늘을 보면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나를 비춘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나의 뒤편에 그림자가 생긴다 뒤돌아보면 안 돼 뒤돌아서 그림자를 보는 순간 그림자가 너를 잡아먹을거야 젊은 시절 잘못을 뒤로 던지고 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아침나절이 지나면 갈 곳 없는 이 그림자를 또 어디로 흘려보내야 할지 땅에서 흙덩이 하나를 주워 멀리 던져 본다 흙덩이는 가루가 되어 내 그림자를 덮어 준다 … 화자는 밤을 새워 일을 하는 일용직 노동자, 새벽 식당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는 노동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새벽엔 “젊은 시절 잘못”이 기억에 떠오르며 그림자를 형성하는데, 화자는 그 그림자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임을 알고는 “잘못을 뒤로 던지고/그림자를 밟고 서 있다”. 하나 “아침나절이 지나면” 그림자는 자신을 따라올 터, “멀리 던져 본” 흙덩이가 “가루가 되어” 겨우 “내 그림자를 덮어”줄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5-07-16
내 어릴 적 맑은 날 밤하늘을 보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별 숲을 지나며 반짝반짝 손을 흔들거나 은하수 건너는 물소리가 잠방거렸는데 요즘은 눈 부릅뜨고 귀 기울여도 보이지 않는다 병든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 수 없다는 천국 법에 따라 하늘 문을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시인이 어릴 땐 맑은 영혼으로 죽은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늘로 오르는 그들의 영혼은 맑은 날 밤하늘에선 별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고. 하여 어릴 때의 시인은 자신에게 손 흔들며 하늘로 가는 영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하나 지금은 이런 영혼을 볼 수 없다는 것.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병든 영혼으로 세상을 떠나서 그렇다. 병든 영혼은 “하늘 문을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학평론가>
2025-07-15
종이가 누렇게 빛바래고 비로소 한마디를 쓴다. 강물이 불고 비로소 한마디를 쓴다. 결혼 행렬이 지나며 누군가 운다. 시장이 북적대고 한마디를 쓴다. 목관악기 소리 지루해지고 한마디를 쓴다. 누군가 애도한다 고상한 생활의 계절이 다한 것을. 시 한 줄이 공중에 걸려 있다. 거미줄이 이슬 방울 사로잡는다. … 베트남 현대 시인 휴틴의 시. 위의 시는 시라는 존재에 대해 쓴 시로 보인다. 시는 사실 어디에나 있지만 함부로 존재하진 않는다. 그것은 ‘비로소’ 써지는 것이기에. 강물이나 결혼행렬, 시장이나 목관악기에서 북적댐이나 지루함 끝에 울음 터져 나오듯 한 마디 써질 때 시는 존재한다. 그 ‘시 한 줄’은 공중에 거미줄처럼 쳐져 있다. 그 거미줄에 누군가의 ‘이슬 방울’이 걸릴 때 거미줄은 비로소 시로 존재할 테다. <문학평론가>
2025-07-14
눈길에 꼬꾸라진 일곱 살 가영이가 겨우 몸을 일으켜 옷을 털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아내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버스 정류장을 향해 절룩거리며 뛰어갑니다 복지관에 간 지적 장애인 엄마가 돌아올 시간인데 엄마의 보행기가 되어줘야 하는데 다발로 쏟아붓는 함박눈이 자꾸 가영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눈송이만 한 눈망울에 걱정이 그렁그렁 맺혔습니다 …. ‘지적 장애인 엄마’의 보행기가 되어주어야 한다면서,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얼른 일어나 “피를 소매로 닦아내곤” “버스 정류장을 향해 절룩거리며 뛰어”가는 저 아이의 ‘어여쁜’ 모습은 숭고하면서도 어른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가. 아이가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울 때가 있다. 특히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나 걱정을 드러낼 때 그렇다. 그 마음은 눈물 그렁그렁한 순수함에서 솟아나기에 더욱 굳건하고 진실하다. <문학평론가>
2025-07-13
그곳에 문득 해가 지고 행인은 자신이 눈길 둔 곳이 노을이라는 걸 깨닫는다 천 가지 색 옅은 구름들이 피어나고 가슴 속으로 스며들며 천천히 어두워지고 어느새 곧은 나무들이 자라나 연약한 이파리들을 길러내고 떨리는 손가락처럼 바람이 불어나와 예리한 나무 그림자를 느리게 흔들다가 행인의 마른 눈을 감기우고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흘러나와 조용히 퍼지고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게 될 거라는 기억에 휩싸인다 깊어지는 어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서 있다가 행인은 문득 가슴 깊은 곳의 통증을 깨닫는다 … 사랑의 노을에 다다른 자야말로 ‘사랑의 마음’을 잘 알지 않겠는가. 사랑은 사라질 때 가장 농도 짙은 감각으로 체험되기에. 위의 시에서 행인은 사랑을 막 떠나온 이일 터, 그의 마음은 천천히 어두워지지만 사랑은 “연약한 이파리”처럼 되살아난다. 나아가 사랑의 ‘기억’은 바람처럼 불어와 그의 “마른 눈을 감기”우고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를 퍼뜨리는데, 이 감각과 함께 그의 가슴은 깊은 통증을 느끼게 되리. <문학평론가>
2025-07-10
누군가 한참을 굴렸을 것이다/ 어젯밤 제법 눈이 휘날렸고/ 시무룩한 표정이 태어났다 나뭇가지 돌멩이 같은 것들이 감정을 갖고/ 푹 꽂혔다가 사라졌다/ 땅바닥에 꺼졌다 사라진 표정은 내일의 날씨가 되고/ 대기의 손짓이 되고/ 눈과 함께 흩어진 사람들이 있다 창밖에 수없이 떠다니는 피의 흔적들/ 눈은 붉고 날카롭다/ 이불처럼 땅을 덮는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와서 영원히 죽지 못하는 눈빛이 떠돌아서/ 푸른빛으로 쪼개지는 입술들/ 하아 입김을 불다가/ 사라졌다 네가 나의 절벽이 되는 삶 위에/ 재가 너의 향기가 되는 죽음 위에/ 눈사람이 서 있다 … 시인은 눈사람 자체가 아니라 눈사람이 녹는 모습에 더 시선을 둔다. 눈사람에 박혀 “감정을 갖”게 된“나뭇가지 돌멩이”는 눈이 녹으면서 땅바닥에 꺼지고는 사라졌다. 눈처럼 흩어질 눈사람. 사람들도 그렇게 사라질 터, 그래서 시인에게 눈은 죽은 이들의 “영원히 죽지 못하는 눈빛”이기에 “붉고 날카롭”게 보이는 “피의 흔적들”이다 하여, 시인에게 눈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너와 나의 절벽” 위에 서 있다. <문학평론가>
2025-07-09
달이 떠오른다 오만한 고뇌에 대한 달의 복수. 몽유병자들이 두 팔을 내밀어 운명인 듯 발을 따른다. 한낮의 무게에 지쳐 버린 투명한 존재 그들은 달빛에 귀 기울이며 거친 의식의 날개로 날아간다. 차갑고 희미하게 빛나며 아무런 약속도 없이 멀리서 나를 유혹하는 예술이 내 동의를 요구한다. 예술의 고통과 그 모든 징후의 매력을 내가 이겨 낼 수 있을까? 무겁게 느껴지는 사물을 달빛으로 빚을 수 있을까? …. 2010년에 작고한, 러시아의 여성 시인 아흐마둘리나의 시. 위의 시에 따르면, 예술가란 존재는 몽유병자인지 모른다. “한낮의 무게에 지쳐버린 투명한 존재”인 예술가는, “달빛에 귀 기울”이며 그 빛이 인도해주는 어딘가로 “두 팔을 내밀어/운명인 듯” 날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를 유혹하는” “모든 징후의 매력”을 “아무런 약속도 없이” 따라가는 예술의 길, “무겁게 느껴지는 사물을/달빛으로 빚”는 길이다. <문학평론가>
2025-07-08
나를 가장 많이 울리고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하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중략) 어제 했던 약속도 어제라는 독약도 모두 삼키는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매일 만나거나 죽어서도 만날 이가 나의, 애인입니다. 너무 많은 애인을 가져서 무겁습니다. 너무 많은 애인을 두어서 괴롭습니다. 아니 외롭습니다. 내가 나의, 애인이기 때문입니다. …. 위의 시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지나고 보면 타인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사랑의 막바지에 이르면 홀로 있음에 처하게 된다는 진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애인은 결국 ‘나’ 자신이며, 삶은 외롭다는 진실. 게다가 ‘나’는 여럿 존재해서, 애인은 괴로울 정도로 많다. 하나 “어제라는 독약”을 함께 삼킬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그가 ‘나’ 자신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삶을 가능케 하지 않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07-07
바다가 돌을 낳았다. 동그랗고 작은 새알 같은 돌이 파도 바깥으로 밀려들 듯 태어났다. 돌은 차가운 물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소리 내어 우는 법을 배웠다. 햇빛에 일렁이는 잔물결 따라 달빛에 그렁대는 바다를 보며 조금씩 자신을 키웠다.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떠나고 구름이 걷힌 날 고난을 이겨낸 돌은 단단한 얼굴로 내 앞에 밀려왔다. ….. 시인은 말 없는 사물로부터 내력을 읽어내고, 감동이나 깨달음을 얻는 이다. 그는 해변으로 밀려나온 “작은 새알 같은 돌”에서 “고난을 이겨낸” “단단한 얼굴”을 보고는, 그 돌이 살아온 삶을 읽어낸다. 그것은 고독을 견디는 삶, 밤낮으로 바다를 지켜보며 “소리 내어 우는 법”을 배우고, “조금씩 자신을 키”운 삶이었다. 그 시간을 견디고 맞이한 “구름이 걷힌 날”, 그 돌은 시인 앞에 단단한 모습을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5-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