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녁 바람의 서늘함과 폭풍 속 검은 나무를 엿보고 싶었다. 내게 폭풍 속 검은 나무라 함은 구슬피 우는 벌레들과, 농부들의 투박한 발걸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다. 나는 나룻배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배가 땅에 닿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벌레들은 마치 겨울 나라 불의 아이들처럼 노래했지만, 거대하고 어두운 존재가 곧 그들의 화음을 부숴버렸다. 도시는 침수되어 내 앞에 차갑게 서 있었다. … 화가로 유명한 에곤 실레는 시도 썼다. 그의 시는 위의 시가 보여주듯이 화가의 시각이 녹아들어 있어서, 그가 그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작의(作意)도 짐작할 수 있다. “폭풍 속 검은 나무를 엿보고” 표현하려는 것이 그의 작의라는 것을. 그 나무는 벌레들 울음과 종소리, 농부들의 발걸음과 나룻배 소리로 나타난다. 하나 곧 도시가 어둠의 폭풍우에 침수되어버리면서 부서질, 마지막으로 울리는 화음으로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6-09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마에 푸른 바다가 출렁거렸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빛 그녀를 어디서 만났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 어디서 만났지요 분명히 몇 번 봤는데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어디서 만났을까 뇌를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슴속을 파헤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간 상처를 헤집자 그녀가 딱지로 앉은 채 울고 있었다 꽃이 떨어진 눈동자에 바다가 뒷켠으로 빠지고 있었다 ….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사람이었음에도 망각하곤 한다. 위의 시가 말해주듯이. 그 사람이 상처와 연관된 이였기 때문이다. 시인은 눈이 마주친 ‘그녀’를 언제 만났던 것 같았지만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녀는 상처 속에 있었기 때문. 상처를 새 살이 덮듯이 그녀에 대한 기억을 무엇인가가 덮어버렸던 것. 시인은 상처를 헤집고 나서야 “딱지로 앉은 채 울고 있었”던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문학평론가>
2025-06-08
물안리는 앞 냇가가 있고 뒤 냇가도 있었다 어딜 가나 징검돌 사이로 송사리 떼가 올망졸망했다 어느 해였던가 조등弔燈 아래 퉁퉁 부은 눈망울들을 닮았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채 낮은 발소리 물낯 비치는 옅은 그림자에도 해진 지느러미를 서로 툭툭, 쳐대곤 했다 가장家長 잃고 물결 헤집던 그해 여름 끝자락이었다 지익직 흑백 영화 한 편이었다 …. 냇물 속을 헤엄치는 송사리 떼의 ‘올망졸망’한 모습에서, 시인은 “조등 아래/퉁퉁 부은 눈망울들을” 떠올린다. ‘가장’이 돌아가시고, 시인을 포함한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눈을 붉히고 있었으리라. 냇물 위에 해가 지며 드리우는 옅은 그림자를 “툭툭, 쳐대”는 송사리들은 그 가장 없는 세상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아이들처럼 보인다. 깊은 슬픔의 그림자는, 이렇게 어느 때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문학평론가>
2025-06-04
구정물이 다 내게로 와서 오늘 나는 걸레 모르는 남자들이 나를 넘어갔지 물과 진흙과 발자국의 감정을 알 것도 같고 그 깊이만큼 내려가 있는 것도 같고 너덜너덜한 조각을 이어 붙여 어떤 예술가는 날개를 만들고 어떤 엄마는 집 주소를 만들지만 나는 다 떨어진 구름처럼 언제든 흩어지거나 버려질 운명을 타고난 것도 같고 인간적이라는 말은 우리 집 고양이만 알고 내가 알고 있는 신들은 모두 지붕 위의 대나무처럼 과거만 알아서 나는 내가 사람인 것도 잊고 잠만 자는 것 같고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이 어두운 것은 …… 이 시인은 바닥까지 내려갔던 삶을 살았던 때가 있었던 듯하다. “물과 진흙과 발자국의 감정을 알” 수 있었던 삶. 예술가는 그러한 삶의 “너덜너덜한 조각을 이어 붙여 날개를 만들”지만, 시인은 “구름처럼 언제든 흩어지거나 버려질” 뿐이었다고. 신은 미래를 밝혀주지 않았으며, 하여 그에게 남은 “어두운 것”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고. 하나 그 얼룩이 시를 쓰게 만드는 동기가 되어주지 않았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06-03
어제 본 고양이가 납작해졌어 담장 위 교교한 눈빛만 남겨 놓고 최선을 다해 고양이처럼 뛰어내리던 분명 어제는 고양이라 불리던 고양이 (중략) 납작한 생각에 빠진 고양이의 부동자세 침잠하는 고양이의 뒷모습은 슬프구나 내게 없던 나뭇잎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 흩날리는 기분이구나 어제 나를 지나친 고양이가 저리도 납작한 몸짓으로 나를 할퀸다 한때 고양이였던 고양이의 납작한 이야기가 야옹야옹, 다시 부풀어오른다 ………. 도로에서 그만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 그 시신 위에 차들이 지나가서, 납작해져버린 모습을 우리는 가끔 보곤 한다. 한데 “어제 본 고양이가” 그러한 모습으로 눈앞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위의 시의 시인은 그 모습으로부터 고양이가 ‘부동자세’로 생각에 침잠하는 모습을 본다. 그 자세는 동물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에게 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저 납작해진 시신이 “다시 부불어오”르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5-06-02
그렇게 잃어진 것에 대하여 두 번 다시 그렇게는 돌아오지 않은 그 길었던 어린 날의 오후에 대해 뭔가 말을 하기 위하여 많은 생각에 잠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리라 – 왜 그럴까? (중략) 그 무렵 우리가 겪는 일은 마치 사물이나 동물의 그것과 흡사했다 우리는 인간의 세계처럼 그들의 세계를 살았고 사방이 형상으로 넘쳐흘렀었다 우리는 외로운 목동처럼 아득히 먼 곳을 가슴 무겁게 안은 채 먼 곳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교감하는 듯이 지냈다. 그리고는 긴 새 실오라기처럼 천천히 끊임없는 영상 속으로 끌려 들어갔었다. 지금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 어지러운 그 영상 속으로. …… 우리는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에 빠져들곤 한다.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슬퍼하면서. 릴케의 위의 시는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인간이 “사물이나 동물”과 흡사할 수 있었던, 나아가 관념이 아니라 ‘형상’으로 가득 찬 세계를 살 수 있었던 어린 시절. 그 시절을 기억한다는 것은 “먼 곳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지금으로선 “너무 어지러운 영상 속으로” 천천히 “끌려 들어”가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2025-06-01
한 사람만 누워서 가고 나머지는 앉아서 간다 (중략) 한 사람만 빼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돌아오는 길 곡절 없이 구불텅 자갈길도 없이 구름 꽃상여 만장 달고 은하수에 흘러들 불귀객은 밤하늘에 닻을 깊게 내리고 남겨둔 것들 깔깔하고 까슬거려 치가 떨리면 밧줄 끊고 강에 내리 꽂히는 물별로 반짝이려나 한 사람을 하얗게 뿌리고 잔설 덮인 소나무 발잔등에 하얗게 뿌리고 덤으로 다보록한 무덤 하나 얻었으니 이번 생이 적자는 아니었구먼, 저녁놀 하혈하는 선산을 덜커덩덜커덩 내려온다 ….. 저 세상으로 가게 된 이의 마지막 이승 길을 동행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위의 시는 그 경험을 시화한 다. 한 사람만 하차시키고 나머지는 돌아오는, 그 한 사람에게만 ‘막차’인 장지로 가는 열차. 이 열차에 동행한 시인은, 이승의 밧줄 끊은 그 ‘불귀객’이 “은하수에 흘러들”어 “강에 내리 꽃이는 물별로 반짝”이기를 기원한다. 그래도 “다보록한 무덤 하나 얻었으니/이번 생이 적자는 아니었”다고 그를 위로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05-28
태극기 흔드는 소리 촛불 켜는 소리 버스 종점 눈 쌓이는 소리 어젯밤 꿈이 수상하다 (중략) 열 맞춰 계단 오르는 달동네 소리 수십 번의 응찰 끝에 처음으로 성공한 낙찰자는 명도 된 달을 손에 꼭 쥐고 아홉수를 넘겼다 달이 우는 소리로 불로 소득을 챙긴 시간 경매사가 수상하다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기를, 날개 없는 것들이 모여 수상하기를, 벼랑 위로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있기를, 뜨는 해의 기침 소리는 수상하지 않기를 … 대로엔 낮엔 태극기가, 밤엔 촛불이 켜지는 우리 시대는 ‘수상함’의 시대다. 어제 꾸었던 꿈은 어떤 것이었나. 수상하다. 수상함이 가득한 장소는 ‘아홉수를’ 겨우 넘긴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도달한 곳인 달동네다. 그 동네의 “날개 없는” 이들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기를”, “하늘을 나는 양탄자가 있기를” 벼랑 위에서 수상함 가득한 마음으로 꿈꾼다. 그래서 “수상하지 않”는 하루를 시작할 수 있기를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5-27
새를 쫓는다 까치가 내려앉아 이쪽을 바라본다 언덕 위에서 굽어본다 비탈 아래 줄에 묶여 새의 눈을 쏘아본다 날아오르듯이 허리를 말아 끝을 당긴다 손에서 놓여난 적 있다 플라스틱 손잡이가 아스팔트에 끌리는 사나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대로 몸이 얼어붙드라 거친 숨을 긁으면서 반경을 힘껏 뛰어오른다 새를 쫒는다 시를 쫓았다 …… 줄에 묶인 개가 까치를 보고 “날아오르듯이/허리를 말아 끝을 당”기는 안쓰러운 모습에서, 시인은 “시를 쫓”는 자의 운명을 읽는다. 새를 쫓지만 지상에 묶여 있는 자인 ‘시인’의 운명. 그는 거친 숨으로 땅을 긁어댈 수밖에 없다. 한편, “손에서 놓”이게 되어 아스팔트 위를 달리게 된 개가 손잡이 끌리는 소리에 놀라는 것처럼, 시인도 그를 묶은 줄에서 해방될 때 현대문명에 쓸리며 몸이 얼어붙게 되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2025-05-26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 적 있다 밤의 우주를 걸어 다니는 눈빛이었다 선천적인 맹인은 소리나 냄새 촉감으로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엘리베이터나 혹은 거리에서 일 초도 그녀에게 얼굴이 될 수 없는 사람 그녀가 아파트 공원 트랙을 돌고 있다 나를 스쳐 갈 때 몸을 비끼는 옷깃 소리, 뒤꿈치를 들던 숨소리, 먼 곳을 바라보는 발자국 소리들이 흘러내렸다 살짝 바람이 불어 젖내 흐르는 사월의 냄새가 머릿결에서 미끄러져 트랙을 따라 감겼다 풀리곤 했다 또렷한 지팡이 소리를 내며 그녀가 멀어진다 그녀의 걸음은 언제나 모퉁이를 돌아가는 구름의 보폭인 듯 금빛 치어 떼를 몰고 오는 달빛인 듯 옮겨 다녔다 ….. 물리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이는 정신적으로 우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위의 시의 ‘선천적인 맹인’처럼. 그녀는 “우주를 걸어 다니는 눈빛”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정신적 눈빛은 어디서 발원할까. 일반인보다 더 발달된 “소리나 냄새 촉감”의 감각에 따른 꿈을 통해서. 이 감각들이 검은 우주 속에 별빛을 심어놓고, 꿈의 물결을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꿈꾸는 존재, 하여 구름처럼, 달빛처럼 걸음을 옮겨 다닌다. <문학평론가>
2025-05-25
모른다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악마일지) 이 폭풍 공격 맹렬한 포격, 아픔의, 공기가 센티미터 단위 땅이 인치 단위로 찢겨나가고 뒤집히는데 이전 공격으로 평평해진 그것이 말이지 그러니 왜 이 격분, 고통의, 만일 그것이 신호고 고통이 참모한테 보내진 신호라면 모두 발을 흘려주었는데 마지막 파괴 명령을 따라서 말이지 그런데 왜 이 발작 감기 오한 메스꺼움 울부짖음, 낮고 어두운 하늘 아래 화형대에 들러붙은 …. 헤르베르트는 폴란드 현대 시인이다. 위의 시는 현대의 전쟁을 고발한다. 시인은 2차 대전을 소년 시절에 겪었기에 위의 시의 말들은 실제 체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하나 모든 현대전을, 공포에 떨며 더듬거리는 어투로 고발하고 있는 시라 하겠다. “공기가 센티미터 단위”로 “땅이 인치 단위로 찢겨나가”는 전쟁. 이 전쟁을 마주한 이들은 모두 “화형대에 들러붙”어 다가오는 죽음에 울부짖게 될 것이라는 것···. <문학평론가>
2025-05-22
ai는 사람의 머리에 칩을 삽입한다 그 순간, 인간은 상품이 된다 이를 666 바코드라 부르며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큐 300이 넘는 자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지배받는 계급을 거부한 이들은 금지된 출산을 감행한다 ai위원회는 인간에게 가격을 매긴다 팔릴 수 있는 인간만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머리에 칩을 거부한 사람들은 겨울에도 열매 맺는 사과나무 몇 그루를 들고 에덴을 향해 떠난다 ….. 소위 인공지능 시대다. 생각하는 기계가 우리들의 생각과 일을 대신해줄 것이라고, 하나 여전히 인간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 세상. 능력 없는 인간들은 일자리를 가지지 못하고,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는, 머리 좋은 극소수 사람들만 일자리를 얻을 터, 팔리지 못하는 인간들은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하여 “머리에 칩을 거부한 사람들은” 새로운 에덴을 찾아 이 시대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05-21
울고 있으면 따뜻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흐린 발소리로 나를 다녀간다 불의 검은 뼈를 뽑아 나의 영혼을 꺾어 버렸다 심야버스가 지나간다 상처가 보였다 뒤돌아보면 처음이란 언제나 캄캄하다 꽃이 피면 나는 꽃을 보내지 않겠다 이것은 결심에 가깝다 단순한 것을 첫눈이라 부르게 되었다 … 대개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깊은 통증을 가져온다. 울어야 따뜻해질 수 있는 기억. 첫사랑은 “불의 검은 뼈”가 뽑혀나가는, “나의 영혼을 꺾어 버”린 사건이기 때문. 삶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는 사랑의 상처. 그 기억은 “언제나 캄캄”한 어둠에 둘러싸여 있다. 하여 시인은 꽃이 피더라도 첫사랑에 꽃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다만 첫사랑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밤에 내리는 첫눈이 보여주는 단순함과 같은. <문학평론가>
2025-05-20
대나무는 자신의 가장 외곽에 있다 끝이다 싶은 곳에 끝을 끄을고 한 마디를 더 뽑아올리는 게 대나무다 끝은 대나무의 생장점 그는 뱀처럼 허물을 벗으며 제 몸을 얻는다 뱀의 혀처럼 갈라지고 갈라져서 새잎을 뽑아낸다 만약 생장이 다하였다면 거기에 마디가 있을 것이다 마디는 최종점이자 시작점, 공중을 차지하가 위해 그는 마디와 마디 사이를 비워놓는다 그 사이에 꽉 찬 공란을 젖처럼 빨며 뻗어간다 풀인가 나무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신이 자신의 첨단이 된 자들을 보라 … 시인은 사물에 대한 사색과 관찰을 통해 삶의 통찰을 얻곤 한다. 위의 시는 대나무로부터 “자신이 자신의 첨단이” 되는 법을 읽어낸다. 끝에서 “한 마다를 더 뽑아올”리고는 “뱀의 혀처럼 갈라”져서 “새잎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대나무는 첨단을 살아간다는 것. 나아가 대나무는 정말 끝에 다다랐을 땐 새로운 마디를 시작한다. 마디와 마디 사이 “공란을 젖처럼 빨”면서. 시인이 전범으로 삼아야 할 대나무의 삶. <문학평론가>
2025-05-19
나의 손은 머리보다 구체적으로 하루를 기억한다 (중략) 오늘 하루, 내 손이 닿지 못한 것 참 많다 물기 거두어진 엄마의 얼굴과 사과 같은 아이의 얼굴 바람이 만지는 대로 일렁이는 나무 햇빛이 눌러주는 대로 빛나던 이파리와 이슬이 앉았다 떠난 풀잎 뱀이 쓸고 간 부드러운 흙무더기도 닿을 수 없는 허공을 눈으로 더듬으며 밤길을 휘젖는데 담장을 삐져나온 장미 가시가 손을 찌른다 붉어진 손끝에 하루가 자란다 … 시인은 ‘머리’보다 촉각에 따라 마음에 기억을 새긴다고 한다. 하니 반성도 만지지 못한 것에 따라 이루어진다. 오늘 만지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엄마의 얼굴, 아이의 얼굴, 나무와 이파리, 흙무더기···. 모두 생명과 관계있는 것들. 생명의 기억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는 시인에게 앞길은 어둡기만 해서 더듬거리며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인을 나무라듯 그의 손을 찌른 장미가시가, 그의 하루를 반성으로 성장시킨다. <문학평론가>
2025-05-18
나는 남을 좇는 것도, 남을 이끄는 것도 싫다 복종은 어떠냐고? 싫다! 게다가 당치 않은 소리-남을 지배하다니! 스스로 공포를 조장하는 자가 아니면 어찌 남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남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 자만이 남을 이끌 수도 있으니 스스로 나 자신을 이끌어가는 것조차 나는 싫다! 숲과-바다의 생물들처럼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길을 잃고 헤매며 사랑스러운 미로 속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에 빠져들다 마침내는 저 멀리로부터 집으로 유혹당하는 것을 나는 사랑한다. 나를 나 자신에게 유혹하는 것을 나는 사랑한다. … 철학자 니체는 시인이기도 했다. 위의 시는 그가 자유를 사랑한 시인이었음을 보여준다. 공포를 조장하는 권력에 대한 철저한 거부, 그것은 지배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니체는 자기가 자신을 지배하여 이끄는 것도 거부한다. 천천히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그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 하여 그에겐 미로가 사랑스럽다. 이 미로 안에서야말로 “저 멀리로부터 집으로 유혹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5-05-15
검은 얼굴의 아이가 있어 조류를 타고 해변까지 밀려온 대륙의 아이가 있어 뿔뿔이 흘러가는 하늘에 흰 수리는 원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어 거듭 얼굴이 풀어져 뭍으로 오르려는 눈꺼풀이 흩어져 반복의 역사는 번복되는 아이들로 가득해 창창한 것은 검은 눈물로 적셔지는 땅도 있어 (중략) 국경을 물고 가는 새야 하늘을 균일하게 나누면 새들로부터 망명한 낙원이 있을까 한참을 뛰어가도 숨이 차지 않는 해변이 있어 검은 얼굴의 아이가 부르던 난민의 노래가 밀려 나가는 ….. 시리아 내전을 피하려는 난민을 태우고 유럽을 향해 바다를 떠돌다 난파된 보트, 그 보트에 타고 있던 세 살 아이의 시신이 터키 해변까지 밀려와 발견된 일이 있다. 어른이 만든 참혹한 세상에 희생당한 무구한 죽음. 목숨을 빼앗긴 ‘검은 얼굴의 아이’ 위로 아이의 시신을 먹으려고 비행하는 수리는 이 세상의 폭력을 상징한다. 시인은 아이가 저승에서라도 수리로부터 벗어난 낙원으로 망명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문학평론가>
2025-05-14
내가 모 심는 이 땅은 한때 오야까마의 땅이었고 천 년 전에는 하천이었을 것이나 신라의 포구였다가 고구려의 것이 되고 오래 백제의 것이었을 텐데 어느 양반이 내 땅이라고 소리쳤을 테고 곡식을 심어 거둔 백성이 아마도 천 년은 훨씬 넘을 텐데 나라가 바뀌고 일뽄새 달라지고 주인이 수백 번 바뀌어도 땅은 그 자리 그곳에 남아 있다 변하지 않는다 땅의 주인은 땅이다 …. 이 지구의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인간은 땅을 함부로 대하며 소유해왔다. 이 땅 위에서 인간은 나라를 세우고 전쟁을 벌이며 농사를 지어 목숨을 연장해왔다. 목숨을 제공해주는 땅을 제 것으로 가지려는 욕심이 살육의 전쟁을 일으키고 땅을 갈취하는 인간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 하나 위의 시는 선언한다. 이러한 역사의 변화 속에서도 땅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다고. “땅의 주인은 땅이”기에. <문학평론가>
2025-05-13
엄마가 아파트 문 앞에 정물처럼 서 있다 열쇠 번호가 생각이 안 나 못 들어갔다고 한다 평생을 살았던 집 왜 엄마는 갑자기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텅, 텅, 잠깐씩 어디선가 문 닫히는 소리 들리고 고요한 세상의 정적 속에서 엄마는 얼마나, 이 세상이 막막했을까 …….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기억은 이젠 비밀번호다. 아파트 문 비밀번호, 핸드폰, 은행 비밀번호…. 그 번호를 잊은 ‘엄마’는 “평생을 살았던” 자신의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어디선가 문 닫히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세상, 엄마는 “정물처럼 서”서 막막해한다. 그 막막함은 이 세상이 번호로 닫혀 있는 관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노년은 이 관문을 열 수 없다는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2025-05-12
다리 하나를 잃은 의자가 한 달째 골목길에 서 있다 눈을 맞고 겨울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차들은 사람을 대하듯 조심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불구(不具) 밀양 표충사 처마 아래 이른 봄볕을 쬐던 누런 고양이 다리 하나를 잃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듯 저물도록 기울어져 있다 … 우리는 사물들을 쓰다 버리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동물, 사람으로까지 확장되곤 한다. 저 다리 하나 잃고 골목길에 버려진 의자가 배제된 자를 상징하는 듯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다. “사람을 대하듯 조심”하며 차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하여 그 의자는 “다리 하나를 잃”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전이되고, “저물도록 기울어”지는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맞아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이 보인다…. <문학평론가>
202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