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에게서 눈을 뺏어왔다 내 안에 있는 아홉 살 아이를 꼬드겨서 한 일이었다 마음은 그러라고 神이 내게 넣어준 것이었다 눈을 빼앗기고 사람이 된 눈사람이 집까지 쫓아왔다 같이 살자고 했다 ‘눈사람’은 누구일까? 그 ‘눈’은 雪의 의미만 아니라 目의 의미도 있겠다. 후자의 의미에서는 화자가 뺏어온 ‘눈’은 눈사람의 영혼이라고 할 테다. 그 영혼을 화자는 뺏어온 것인데, 그것은 화자 속에 있는 “아홉 살 아이”가 “꼬드겨서” 가능했다고. 그 아이는 신이 주신 순수함의 능력일 터, 누구에게나 신이 마음에 불어넣어준 ‘아이’가 있겠다. 눈사람은 그 아이를 따라 화자를 쫓아와 “같이 살자고” 한다. 사랑이다. 문학평론가
2024-12-12
멧돼지가 내려와 자꾸만 봉분을 허문다는 소식에 부모님 합장하기로 했다 천천히 무덤 열고 관 뚜껑 걷어내니 드디어 아버지가 보인다 누런 뼛조각 몇점 보인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유골 정수리에 손바닥 올리니 눈물 흐른다 아버님 어서 가요 어머님이랑 함께 모실게요 두분 오래 떨어져 힘드셨지요 필자도 할아버지 이장 때 본 뼛조각에서 아우라를 느낀 일이 있다. 시인은 합장하고자 관 뚜껑을 걷어내고 평생 함께 살아왔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뼛조각을 본 후, “차곡차곡 쌓아놓은 유골 정수리에/손바닥 올리”고 아버지를 느껴본다. 어머니와 떨어져 땅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외로움이 느껴졌으리라. 가족의 유골은 단순한 뼛조각이 아니다. 죽었으나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입 가진 유골이다. 문학평론가
2024-12-11
(전략) 베인 자리의 살은 겹겹의 층을 이루고 있고 몸의 끝으로 갈수록 혈관은 좁아지고 갈래는 더 많아진다 잔뿌리 같은 혈맥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상처를 가만히 누르면 피가 멈춘다 여기는 피가 나올 곳이 아니니 원래 가던 길로 가세요 헝겊으로 손가락을 감싸 쥐고 바닥에 눕는다 등 밑으로 우툴두툴한 선로가 가로놓여 있다 피가 굳어서 딱지가 되거나 벌려졌던 살이 미세하게 접합되어 가면 출구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터널은 동굴처럼 느껴진다 바늘귀를 찾는 실 끝처럼 멀리서 기차가 천천히 터널을 향해 다가온다 우리는 가끔 살을 베여 얼른 ‘지혈’하는 일을 겪곤 한다. 시인은 이 지혈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피를 마음에 숨겨둔 기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혈은 그 기억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막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출구를 찾지 못한 ‘피-기억’은 동굴 같은 터널을 돌아다닐 것이다. 시는 이 터널을 돌아다니는 피를 기차로 환유한다. 시인의 내면 깊숙한 터널을 돌아다니는 ‘기억-기차’로. 문학평론가
2024-12-10
나비가, 흰나비가 어깨를 친다 고개를 떨군 슬픔의 무게만큼 무겁게 코끝을 스치며 날개를 흔든다 걱정하지 마 봄햇살이 따뜻하게 감싸니깐 난 흰나비가 되었거든 구름 밖으로 날아갈 거니깐 굵은 못 꽝꽝 박은 목관 틈새를 뚫고 가볍게 어둠을 벗어날 테니깐 (중략) 미안해하지 마, 날 딛고 일어서는 널 지켜주고 싶네 삶에 끌려 욕심부린 날들은 무명지에 둘둘 말아서 화장터에서 함께 태워버리게나 재가 된 내 뼛가루는 가볍게 강물에 날려버리게나 항아리에 넣어 다시 땅에 묻지 말게나 미련 없이 털고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에 힘이 붙도록 내 이름조차 비워주게나 날 부디 잊게나, 잊어주게나 시인은 화장터에 있다. 어떤 지인이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그이의 육신이 사라지는 시간, 시인은 그의 영혼이 화한 나비의 말을 듣는다. 나비는 ‘죽은 이’의 영혼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비는 슬퍼하는 시인을 위로한다. “날 딛고 일어서”라고.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잊어달라고, “내 뼛가루”까지 “강물에 날려버”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야 “가볍게 어둠을 벗어날” 거라는 것.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게 하는 시다. 문학평론가
2024-12-09
벌써 일주일째 계속 엄마 생각뿐이다 잠깐 또 잠깐 멈춰 서서 삐걱거리는 바구니를 안고 옥상으로 서둘러 가셨지 난 아직 솔직한 인간이어서 소리 지르고 발버둥 쳤지 젖은 빨래는 남한테 맡기고 날 옥상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저 말없이 올라가 빨래를 너셨지 욕도 않고, 날 쳐다보지도 않고 빛나며 펄럭거리는 옷들은 바람에 높이 올라 빙빙 돌았지 울지 않을 텐데, 하지만 이제 늦어버렸지, 얼마나 거대한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보는 걸 하늘에 둥둥 더 있는 회색 머리 하늘 물에 푸른 가루를 푸시네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하다 요절한 헝가리의 국민 시인 어틸러의 시. 30대에 접어든 그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담았다. 시인이 아이 때 본, 엄마의 이미지가 선명한 한 장면이 펼쳐진다. “날 쳐다보지도 않고”옥상으로 올라가는 ‘엄마’, “날 옥상으로 데려가 달라고” 울면서 따라가는 아이. 그리고 시인은 “빛나며 펄럭거리는 옷들” 속에서 “빨래를 너”시는 엄마가 “얼마나 거대한 사람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2024-12-08
새를 잠들게 하려고 새장에 헝겊을 씌운다고 했다 검거나 짙은 회색의 헝겊을 (밤 대신 얇은 헝겊을) 밤 속에 하얀 가슴털이 자란다고 했다 솜처럼 부푼다고 했다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 기다린다고 했다 횃대에 발을 오그리고 어둠 속에서 꼿꼿이 발가락을 오그려붙이고 암전 꿈 없이 암전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최근 발표한 시. 시 제목과 시 본문에 사용된 괄호는 어떤 의미일까. 마음 안에 품은 말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겉으로 드러내기 힘든. “(밤 대신 얇은 헝겊을)” 씌우는 일은 새가 암전 속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까. “꿈 없이/암전” 속에서의 “꽃꼿이/발가락을 오그려붙이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 그것은 고통일지도 모르지만, 이때 “하얀 가슴털이” “솜처럼 부”풀 수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4-12-05
노을 비치는 돌담에 기대 널배 하나 서 있다 소금기에 전 몸은 붉어지지 않는다 석양에 물든 바다가 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몰골을 타고 들어오는 바다 냄새를 찾다 뻘에 박힌 장화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도 뻗히게 보냈으리라 머지않아 몸이 작아져 바다가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하늘만 보일 때 물도 뭍도 아닌 곳에 깊이 가라앉아 배였다는 것을 기억해 줄 누군가를 오래 기다릴 것이다 돌담까지 밀려오는 어둠에 숨어 널배 한 척 아직 서 있다 “돌담에 기대” 서 있는 ‘널배 하나’에서 시인은 노동의 고단함을 읽는다. “뻘에 박힌 장화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오늘 하루도 뻗히게 보냈”을 널배의 노동. 이 노동으로 몸은 바다의 소금기에 절지만, 널배는 저 석양 속 바다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반면 “머지않아 몸이 작아”지며, 결국 “물도 뭍도 아닌” 뻘에 깊이 가라앉을 널배의 삶. 자신이 “배였다는 것을 기억해 줄/누군가를 오래 기다”리면서. 문학평론가
2024-12-04
꽃은 하늘로 날고 싶어 얼굴 속으로 하루종일 햇빛을 모았네 뒤통수로는 비를 맞았네 툭하고 목을 끊어주길 하늘로 둥둥 떠오르게 누군가 목을 끊어주길 여름내 기다렸네 피고 또 피었네 가느다란 끝에서 숨을 쉬었네 꽃은 하늘로 날고 싶어 얼굴 속이 점점 깊어졌네 목구멍이 검게 타올랐네 툭하고 목을 끊어주길 하늘로 둥둥 떠오르게 누군가 목을 끊어주길 기다리고 기다렸네 꽃은 하늘로 날고 싶어 우리는 꽃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입장에서 평가하곤 한다. 정작 꽃의 입장은 어떨까? 위의 시는 꽃의 입장을 상상한다. 꽃이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것은 “하늘로 날고 싶어”서라는 것. 하여 꽃은 누군가 자신의 목을 끊어주길 기다리며 피어난다. 지기 위해 피어나는 꽃. 피어남은 비상에의 갈망으로 “하루종일 햇빛을 모”으면서, “얼굴 속이 점점 깊어”지고 “목구멍이 검게 타오”르는 고통을 짊어지는 삶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2-03
환희의 기억이 별반 없는 나는 주로 밤이면 내가 살아온 길을 신랄하게 아파했다 그런 날이면 아주 일찍 죽은 자들은 지금쯤 다시 살아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성의 있게 이름을 불러 보곤 했다 어머니, 누님 구자이모 아랑삼촌 명환이 문성이 따지고 보면 이건 나를 부르는 소리다 죽은 나를 돌려 세우고 살아났으면 무언가 새로 켜기를 기대하는 것 끄지 말고 켜기를 (중략) 나는 지속되고 싶은 게 아니라 두근거리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일찍 죽은 자들을 아프게 기억하면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정성껏 부른다. 이 행위는 결국 “나를 부르는” 일이다. 시인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삶 역시 죽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하여 죽은 이들의 재생을 위한 호명은 내가 “죽은 나를 돌려 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삶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 켜”는 삶, 단지 지속하는 삶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사는 삶이다. 문학평론가
2024-12-02
사람들이 칭찬한다 해도 그걸 믿을 이유가 없으니 누군가 그대를 칭송하면 모략을 기다리라. 자신을 믿으라, 모두가 그대를 도우리라 그대의 수고와 지혜를 양쪽에서 붙잡고서. 순진함은 닥쳐오는 모든 재앙의 담보이니 어디에 알맹이 없는 허튼 소리의 칭찬이 필요한가? 속아 넘어간 다른 이들처럼 나 또한 속았노라 그대는 유령을 따라 달리겠는가? 슬픔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정신을 단련하라 의심스러운 유혹에서는 귀머거리가 되라. 자신에게 몰두하고 심장의 본질을 얻으라, 거기에는 주위에 없는 진실이 있으니 아바이 꾸난바이올릐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카자흐스탄의 국민 시인. 주로 삶의 교훈을 전하는 시를 썼다. 위의 시는 21세기에 사는 우리 마음에도 새겨지는 현재성이 있다. “허튼 소리의 칭찬”에 속아 넘어가지 말 것. 순진함은 찬양할 가치가 아니라 “모든 재앙의 담보”이며, 오직 “자신에게 몰두하고 심장의 본질을 얻으라”는 것. 이때 비로소 타인은 그대를 속이려는 이가 아니라 돕는 존재가 되리라는 것. 문학평론가
2024-12-01
다 부서진 별들이 부엌 바닥에 수북하다 개수대 배수구에도 건조대 언저리에도 행주로 훔쳐 담으면 반짝거리는 분노 발뒤꿈치에 박혀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환멸 갇혀 사는 자의 감정이 페달 쓰레기통에 차곡차곡 넘쳐난다 가루가 된 별들이 거실로 흘러 들어간다 안방으로 화장실로 해무(海霧)처럼 전진한다 그래도 같이 살아요, 우리는 밥을 함께 먹는 짐승들이잖아요 밤하늘의 별은 부서지면 찔레꽃이 된다 집게발을 잘라내고 뒷덜미를 움켜잡으며 꽃가루 같은 별들이 새벽하늘을 갈아 끼운다꿈을 상징하곤 하는 “밤하늘의 별”들. 알다시피 생활에 치이다보면 그 별들은 부서져버리곤 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환멸에 갇혀 살 터, 하나 시인은 “가루가 된 별들이” 해무처럼 생활공간을 떠다니며 ‘전진’하고는 “찔레꽃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여 그는 부서진 별들의 가루-꽃가루-들이 새로이 “새벽하늘을 갈아 끼”우리라면서, 같이 사는 “우리는 밥을 함께 먹는 짐승들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28
한때 생각했다 의식의 한 줌을 빛으로 모아 춥고 덥고 주린 시간을 벗어난다면 생을 건너는 방법이 육신에 걸리지 않고 빛으로 건널 수 있다면 나, 여기 땅에 있다 바람, 눈, 햇빛 적당히 가려주는 집을 갖고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을 밥을 먹으며 나를 감출 옷을 두르고 세상에 산다 함께 있으나 함께 있지 않은 시간에 들면 길냥이처럼 홀로 있는 시간에 든다 “나를 벗는 시간”이 있다. “길냥이처럼 홀로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를 응시하는 시간. 이 시간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다. 위의 시의 시인이 “육신에 걸리지 않고/빛으로” “생을 건너”고자 했었다는 것을 상기하듯이. 그러나 지금은 “나를 감출 옷을 두르고”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을 밥을 먹으며” “여기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하는 시간. 문학평론가
2024-11-27
세면대 위에 칫솔이 놓여 있다 그곳은 칫솔의 자리가 아니다 버려진 사물의 자세는 티가 난다 아무 데나 누워 있는 거리를 닮아 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한다 흰 거품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거울 속에서 양치하는 나를 훔쳐보았다 자주 침을 뱉었다 목구멍 깊은 곳을 자꾸 건드려 헛구역질을 했다 구역질이 계속해서 구역질을 뱉어내고 있었다 사물이 죽는 방법은 간결했다 입 속에서 청결한 혀 냄새가 났다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이 있다. 시인에 따르면, 세면대는 칫솔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칫솔은 입속에 있어야 하는 사물이라는 것일까. 시인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목구멍 깊은 곳을 건드린다. 헛구역질이 나고, 이윽고 구역질을 한다. 무엇인가 쌓인 것을 토하듯이. 이 행위로써 칫솔이란 사물은 ‘간결’하게 죽어가면서 시인의 과거를 씻어준다. 하여 혀는 청결해질 것이며, 이제 시인은 새로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26
지상 깊은 곳에 드리워진 세상의 나무들은 지금껏 죽어간 아이들의 수와 일치한다 나는 이런 근거 없는 확신에 싸여 있는데 나무가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건 사람들 때문일까 사람들은, 왜 나무를 떠나지 못할까 대낮에 나무에 기대 울면서 나는 의문에 싸여 있는데 죽은 아이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던진 나무에 살아가는 세상 모든 것은 왜 스스로 붙잡힐까 오늘도 어디선가 산 채로 불타고 있을 나무들을 죽은 아이들은 대낮이 잿빛이 되도록 왜 거두지 않을까 어떤 의문은 유일한 답이 된다 시인은 나무들로부터 “죽어간 아이들”을 본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아이들은 “산 채로 불타” 죽어간다. 가자와 레바논. 시인은 그렇게 생명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무에 기대 울”고 있다. 그 나무들을 “죽은 아이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던진” 넋이라고 여기면서. 아이들은 그 나무들을 “대낮이 잿빛이 되도록” 거두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에 자신의 죽음을 증언한다. 문학평론가
2024-11-25
아침식사에 몰두하는 것은 형식에 몰두하는 것이다. 아침식사하고 산책을 떠올리는 것도 형식에 관해서이다.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티브이나 신문을 같은 목구멍 으로 넘길 때, 정보가 시작된다, 일감과 같은. 나는 형식에서 멀어진다. 하나이고 모두인 형식에서 밀려난다, 최종적으로 한밤에 묻는다, 여기가 어디인가. 자유인가 몰락을 달라 왼쪽과 오른쪽이 없는 나날들 형식이 있고 정보가 있다. 형식은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틀로, “아침식사에 몰두하는 것”이라든지 아침식사 후의 산책과 같은 것이다. 반면 정보는 삶을 어지럽히는 것, 해서 “형식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정보에 감염된 우리는 “하나이고 모두인 형식에서 밀려”나고 있다. 하여 그는 “여기가 어디인가” 묻고는, ‘자유냐 몰락이냐’의 선택 앞에 인류가 서 있음을 우리에게 각성시킨다. 문학평론가
2024-11-24
영화 두 개 보는데 육백 원 하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극장 동시 상영관 칼 싸움하는 영화 간판 밑에 쥐포 파는 할매 백 원도 비싸 반으로 나누어 파는데 연탄불 위에 구워지는 쥐포 반쪽은 자꾸만 작아지고 또 작아지고 아이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다 찬바람 부는 요술 사과 궤짝 위에 쥐포 열서너 마리 그것으로 할매는 이 추운 겨울의 서울특별시를 살아간다 이젠 옛날 얘기가 되었지만, 동시상영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입장료가 600원 하던 때면 상당히 오래전일 터, 하나 동시상영관 주위엔 언제나 아이에게 “쥐포 파는 할매”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지금도 “쥐포 열서너 마리”를 전 재산 삼아 “이 추운 겨울의/서울특별시를 살아”가고 있는 ‘할매’의 모습을 뒷골목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나이 들어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 삶의 모습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 문학평론가
2024-11-21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던 이 차후에는 산 기운 떨쳐낼 수 없으리 가슴속에 산맥이 들앉는 까닭에 바다 물밑에서 길을 찾아 기어 본 이 차후에는 그 숨결 잊을 수 없으리 몸 안에 바다 속살 출렁거리는 까닭에 사람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매었던 이 차후에는 그 신열 떨쳐낼 수 없으리 곳마다 그 사람, 미리 와 있는 까닭에 위의 시에 따르면,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맬 때 삶에서 깊은 경험을 하게 된다. ‘깊은 경험’이란 몸에 그 경험 대상이 들어박힐 때를 말한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을 땐 “가슴속에 산맥이 들앉”으며, “바다 물밑에서” 헤맸을 땐 몸 안에서 바다가 출렁거린다. “사람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맸을 땐? 몸에 일어나는 신열을 “떨쳐낼 수 없”다. 몸 안 ‘곳마다’ 그 사람이 미리 다녀간 흔적이 열을 발하고 있으므로. 문학평론가
2024-11-20
이십 리 신작로 먼지 길 걷다 보면 쉰여덟 해 떠난 고향마을 포내리 무릎까지 눈 내리고, 비바람 몰아쳐도 굽은 허리 질끈 묶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마침 지나가던 어머니 굽은 허리 펴며 나무처럼 웅얼거린다 나무도 어머니도 한 시대 굴곡과도 같아 지금까지 잘 지탱해 주었으므로 누군가에게 뜨겁게 손 내민 적 없었다 그래서 마을은 사람과 나무와 이제야 한 통속이 되어 나무는 뿌리로, 사람은 속이 깊은 흙으로 서서히 몸을 눕히는 것이었다 땅 위와 그 아래로 서서히 움직여보는 것이었다 고루한 역사는 나중에 아주 먼 날 그때 남은 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었다 나이 들었는지 “굽은 허리 질끈 묶고” 고향 마을을 언제나 지키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시인은 그 나무를 “굽은 허리 펴며 나무처럼 웅얼거리는”‘어머니’와 동일화한다. 그들은 ‘굽은 허리’처럼 “한 시대 굴곡”을 같이 살았다. 이제 고루한 역사를 뒤에 두고 “나무는 뿌리로,” 어머니는 “속이 깊은 흙으로/서서히 몸을 눕히”고 있다. 그와 함께 마을은 그들과 “한 통속이 되어”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9
만일 그대가 나무에 핀 꽃이라면, 나 나무 되리. 그대가 이슬이라면, 나는 꽃이 되리. 그대가 햇살이라면, 나는 이슬 되리 오직 우리의 존재가 하나 되기 위하여 소녀여, 만일 그대가 하늘이라면 나는 별이 되리라. 소녀여, 만일 그대가 지옥이라면(우리의 존재가 하나 되기 위하여) 나 저주를 받으리라. 페퇴피는 1849년 헝가리 독립 혁명에 참가하여 26살에 실종된 헝가리의 민족시인. 그는 민족의 자유를 열망하고 노래했지만 열렬한 연시도 썼다. 위의 시가 대표적이다. ‘그대’의 존재가 무엇이든, 그대를 받치는 존재가 되어 “우리의 존재가 하나”이게 하겠다는 시인. “그대가 하늘이라면” 별이 될 테고, 반대로 “그대가 지옥이라면” 지옥에 가기 위해 “저주를 받”겠다니. 이보다 사랑을 열렬히 표현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2024-11-18
창문 밖 하늘에는 여러 모양의 구름이 겹겹이 쌓여 가벼워 보이지는 않은 것이 잠시, 지상과의 인연을 생각하는 듯 벌레 한 마리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 숨죽이고 구름을 보는 듯 오후 시간 내내 창문에 붙어있다 그나 나는 시간이 구름에 묻어 지나가고 있음을 이제 이별의 시간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바람이 선뜻하다. “바람이 선뜻”한 것을 보니, 때는 가을, 그 가을 “하늘에는/여러 모양의 구름이 겹겹이 쌓여” 있는 바, 시인은 구름이 “지상과의 인연을 생각하”다가 그렇게 쌓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창문에 붙어” “숨죽이고 구름을 보”고 있는 ‘벌레 한 마리’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터, 청명한 가을 하늘의 흩어져가는 구름처럼 시간도 점점 흩어질 것임을, 즉 “이별의 시간”이 오고 있음을 시인은 ‘직감’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