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틀이 자발적으로 윤곽을 잡게 되었습니다 별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당신 눈동자가 흔들린 거라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위의 시는 말해준다. “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당신 눈 속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할 때라고. 보이지 않던 당신 눈의 빛이 보일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에 움튼 사랑이 만든 새로운 눈 때문일 터, 하여 그 눈엔 “세상의 여러 틀”이 새로 “윤곽을 잡”으며 나타난다. 세상의 이 윤곽에서는 하늘의 별과 당신 눈동자가 서로 조응하며 바람에 함께 흔들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0-16
어느 조그만 배에 키 작은 부인 하나 키 작은 뱃사람 하나가 조그만 노를 잡고 있다 그들은 여행을 떠나려 한다 고요한 어느 냇가 위에서 덧없는 어느 하늘 아래에서 그리고 어느 섬에서 잠들려 한다 오늘은 바로 일요일 허벅지를 서로 포개고 키스를 주고 또 받고 즐기기에 좋은 날 아름다운 삶은 바로 이런 것 물가의 저 일요일 키 작은 선원을 부러워하며 행복에 젖은 사람들.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의 시. 이 시는 아름다움과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뱃사람과 부인이 조그만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둘은 서로 키스하며 “허벅지를 포개고” 잠들 터, 일요일의 한가함이 주는 사랑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이 간명한 시를 읽고 이상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 둘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기에. 저런 행복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으로. 문학평론가
2024-10-15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기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2018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배영옥 시인.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시를 미리 써두었다. 지인들이 참석하겠지만 “나만 없을” 장례식. 슬퍼하던 그들이 떠나면 “검은 부재의 바람”만 불어올 장례식장. “잿빛 비둘기만” 날아오르다가 그들도 사라질, 결국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그곳엔 “주인공인 나만 홀로/슬”퍼할 터, 죽음은 우리를 더욱 고독의 운명으로 빠뜨리리라는 슬픈 진실을 이 시는 말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10-14
그가 평생을 사용한 일인용 흔들의자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고 나면 몸을 뒤척이지 않아도 발 구르지 않아도 의자는 그의 옅은 호흡에 맞춰 조그만 긍정의 속도로 삐걱대는 어깨를 가누고 고개를 내밀며 다가가 그에게 속삭인다. 다만 두려워 말라, 멈추지 않는 기울기와 끄덕이는 황혼에 관한 그의 낡고 비낀 꿈에게도 절룩여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요즘 사는 것이 지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위의 시를 읽고 저런 위로를 해주는 흔들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에 등장하는 ‘그’는, 아마 ‘황혼’과 어울리는 나이 지긋한 사람일 테다. 이젠 호흡도 옅어지고 꿈도 낡았으니. 하나 그가 평생 앉아왔던 흔들의자는 그에게 “다만 두려워 말라”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여준다. 이 ‘조그만 긍정’이 그가 삶을 계속 살아갈 커다란 힘이 되어 주리라. 문학평론가
2024-10-13
슬픔의 밥솥에 밥을 안친다 슬픔은 껍질을 벗기면 가라앉는 마늘처럼 알싸하고 달았으니 밥을 먹고 슬픔은 설거지를 한다 우리의 밥은 당신의 집보다 아름답다 슬픔도 집은 필요하니까요 새는 공중에도 잠시 집을 짓는다 멀리 날고 있는 것이 새인지 벌레인지 중요하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응원이 필요한 치어(稚魚)리더 여기 있습니다 회사가 없는 사회인은 이자가 많아서 걸린다 방 안에 눈물이 고인다. 슬픔이 물든 밥을 먹는 사람들. “회사가 없는 사회인”이 그러한 이들이다. 슬픔은 돈과 연결된다. 돈이 없으면 빌려야 하고, 빌리면 이자를 내야 한다. 그때부턴 이자를 갚기 위해 삶을 살아야 한다. 슬픔은 삶을 설거지해주어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 이 말은, 벌레도 멀리 날기에 새를 부러워할 필요 없다는 ‘응원’의 거짓말임을 시인도 알고 있다. 그래서 눈물이 방 안에 고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문학평론가
2024-10-10
석등의 신열이 밖으로 붉게 번지고 연화문 돌이끼는 묵언을 물고 얼룩이 졌다 한 자락 바람의 보시로 젖몸살 앓았을 꽃망울,? 우듬지 끝까지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한평생 그 향기 팔지 않았으나 끝내 지키지 못한 꽃 입술 터질 듯 부푼 살 내음의 통증으로 어쩌자고 홍매 그렇게 피고, 법당 앞 화강석 석등에 불이 켜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주지 스님 잰걸음보다 더 재게 해가 덜컥 넘어갔다 석등의 ‘신열’이 석양과 함께 절의 대기를 아프게 물들인다. 그 열병을 대기에 옮기는 바람의 ‘보시’를 받으면서, 홍매 역시 “터질 듯 부푼 살 내음의 통증”을 “꽃 입술” 벌려 터뜨린다. 홍매는 “젖몸살 앓”으며 “우듬지 끝까지 시리고 아”픈 삶을 살아왔던 것, 결국 “향기 팔지 않았으나” “꽃 입술”은 “끝내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아픔을 발설한다. 이 ‘발설’이 개화일 터, 이 개화는 시를 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4-10-09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탐험할 엄두도 못 내는 또 하나의 우주. 이상한 잿빛의 거리가 맥박 치는 인간 마음의 대륙을 우리의 창백한 지성으로부터 멀리한다. 먼저 간 이들은 육지에 아직 닿지 않았다. 콩고나 아마존보다 더 어두운 충만과 욕구의 슬픈 마음의 강이 흐르는 내부의 신비를 남자도 여자도 아는 이 없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D. H. 로렌스의 위의 시에 따르면, 두세 뼘 넓이의 가슴 속 세계, 즉 마음 역시 하늘 위의 우주처럼 거대하다. 인류가 우주를 아직 “탐험할 엄두도 못 내는” 것처럼, 이 마음 역시 “우리의 창백한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내부의 신비”로운 대륙이다. 하지만 “이상한 잿빛의 거리가” 서서히 어둠 속에서, “충만과 욕구의 슬픈 마음의 강이 흐르는” “인간 마음의 대륙”의 맥박을 드러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0-07
역사책은 참 이상하다. 왕과 장군의 이름만 나온다. 워털루 전쟁 대목에서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졌다”라고만 돼 있다. 어디 나폴레옹이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역사책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졸병 전사자 명단은 없다. ‘삼국지’를 봐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제갈량한테 대패(大敗)하다”라고 되어 있다. 어디 조조와 제갈량만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낸 고 마광수 교수의 시. 마 교수 세계관의 근저를 보여주는 위의 시는, 책에 기록된 ‘위대’하고 ‘고상’한 세계에 진실이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전쟁만 해도 장군이나 왕이 싸운 것처럼 책에 쓰여 있으나 사실은 “졸병들이 싸”우지 않았나. 하지만 역사책에는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졸병 전사자 명단은 없”다. 이에 문학은 고상함을 벗어버리고 저 ‘졸병-하층’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문학평론가
2024-10-06
바람이 말라가 마른 바람이 쓸고 가면 빈 얼굴만 남지 얼굴에 적막이 걸리지 맥박은 흐려지지 창문에 머무는 흰 고요 입술을 떠난 입김이 체온을 그리워하듯 죽은 새가 떠도는 북극 마지막 하늘 고요가 오래 머물면 얼굴은 멀어지지 입김이 되어 흘러나오지 고요가 영혼을 데려가지 적막, 고요, 고독을 극한적으로 시화한 시. 말라버린 삶이 있다. 불어오는 바람도 말라있다. 그 바람을 맞은 얼굴은 빈 얼굴만 남아 적막만 걸린다. “고요가 오래 머물”자, 얼굴마저 “입술을 떠난 입김”처럼, 몸을 떠나 “체온을 그리워하”며 떠돈다. “고요가 영혼을 데려”간 것, 그 ‘영혼-얼굴’은 “죽은 새가 떠도는 북극”까지 떠돌아다니고, 그곳엔 “마지막 하늘”이 걸려 있을 뿐. 그리고 “맥박은 흐려”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03
햇볕 아래 뜨겁게 달궈지던 바위들이 가만히 들어 앉아 등을 내 보이고 있다 나도 건너 편 산에게 내 굽은 등을 곱다시 내보이며 산을 오른다 등 뒤의 바위들이 제 나이만큼의 돋보기를 꺼내들고 내 등의 단면을 유심히 읽고 있다 꼼짝없이 들키고 만 내 살아온 날들 살아갈 날들 환히 다 들여다보이는 늦가을 가랑잎 손금같은 내 안의 굽은 등고선 산을 오르는 시인의 눈앞에 바위의 등이 ‘등고선’을 이루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 자연의 진솔한 모습에 시인도 자신의 ‘굽은 등’을 내보인다. 시인은 자신의 등을 바위들이 “유심히 읽고 있”음을 느끼지만, 사실 바위의 시선은 시인 자신의 시선이다. 시인 눈앞의 등고선은 이미 시인의 내면에 형성된 등고선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 등고선은 ‘손금’처럼 시인이 “살아온 날들”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01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풀씨가 뒤를 따랐고 나무가 길을 내었다. 들꽃들이 달려가자 벌 나비가 뒤를 쫓았다.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산새가 누군가를 부른다. 다람쥐 가족이 기어들었다. 노루가 돌아다보았다. 돼지가 고목에 몸을 비빈다. 풀섶을 헤치며 약초꾼이 나타났다.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해가 비추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뜬다. 여전히 풀꽃은 나무들과 길을 떠난다. 저들과 하염없이 걷는다. 엄마가 막내랑 토방에 앉아 강낭콩을 까고 있는 오두막이 나올 때까지. 길은 사람만 내는 것이 아니다. 자연 자체가 낸 길이 있는 것. 그 길로 바람이 지나가면, 풀씨와 들꽃들, 벌 나비가 바람 뒤를 따른다. 산새, 다람쥐 가족, 노루, 돼지와 같은 동물들과 약초꾼까지 바람을 따라 그 길로 들어온다. 하나 시인은 그 길의 존재를 과거형으로 회상하듯 말한다. 그 길은 시인이 엄마와 함께 살았던 고향 오두막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 현재엔 그 오솔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9-29
사랑, 사랑이라 되뇌건만 어찌 사랑이 실체더냐 심장으로 아니면 전심을 타고 울려오는 것 전기의 전율처럼 찌릿하며 내리쏟는 태양의 그 짙은 빛을 어디 감히 똑바로 바라볼 것인가 찬란히 피어나는 저 꽃들의 속삭임을 들어라 그것이 사랑 아니더냐 (하략) 사랑은 발견될 수 없다. 사랑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럼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 몸을 가진 물체가 아니라 전기처럼, 빛처럼 존재한다. 사랑의 빛은 찬란해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으나, 우리는 사랑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사랑으로 감전되었을 때 느끼는 전율로서 알 수는 있다. 사랑의 전율은 ‘삶-꽃’을 피어나게 하며, 그렇게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속삭이듯 전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9-26
(전략) 날이 흐리고 눈이 흩날리는 시간은 케이크 위의 설탕 과자처럼 부서질 것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고 어디에나 이를 수 있겠지만 오늘밤 붙박인 사람들은 작은 손을 모은다 물에 잠긴 수도원을 서성이는 발걸음은 무의미하다 최선을 다한 기도처럼 차가운 창밖을 부지런히 성의껏 달리는 흰 눈송이들 잿빛 세상을 다독이려는 듯이 눈발이 굵어진다 시인들은 눈 오는 풍경을 자기의 비전으로 곧잘 그리곤 한다. 위의 시처럼 말이다. 세상은 잿빛이다. 이 “세상을 다독이려는 듯이” 눈발은 “부지런히/성의껏 달리”며 굵어지고 있다. 하나 이 눈 내리는 풍경은 슬픔을 품고 있다. 저 땅에 떨어지는 눈들은 어느새 녹을 것이며, 하여 “눈이 흩날리는 시간은” “설탕 과자처럼 부서질 것”이기 때문이다. “붙박인 사람들”의 “최선을 다한 기도”가 ‘무의미하’게 되듯이. 문학평론가
2024-09-24
나는 물 위에 글을 쓰기로 맹세했다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짊어지기로 맹세했다 그의 육중한 바위를.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열(熱)과 불꽃을 견디고 눈이 먼 안공(眼孔)들에서 마지막 깃털을, 풀과 거울을 위해 흙먼지의 시를 쓰는 그 깃털을 찾으며.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살리라 맹세했다 아도니스는 현재 파리에 거주하는 시리아 출신의 시인. 시시포스는 산 정상에 올리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평생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상의 인물. 시인도 그러한 형벌을 받았다. 그가 “열과 불꽃을 견디”며 쓰는 시는 물 위에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시 쓰기가 헛되더라도 펜의 깃털을 찾는 운명을 받아들일 것임을 맹세한다. “시시포스와 함께 살리라”는 맹세를. 문학평론가
2024-09-23
걸어가는 양이 십 도쯤 기울어진 박스 리어카 할아버지 횡단보도도 아닌데 버스 택시를 비집고 길을 빠르게 건넌다 바퀴에 무게를 싣고 가벼워진 날갯죽지 속도를 낼수록 몸의 기울기는 도마 위 통통 잘려 나가는 무편처럼 어슷어슷 몸의 관절은 끊어졌다 이어지는 무성영화처럼 석양빛도 슬픈 기울기로 어스름해지는 저녁 하늘을 나는 돌부처의 모가지처럼 건너는 발은 없고 굽은 등이 바퀴로 굴러간다 가끔 박스 폐지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힘겹게 끌고 다니는 노인을 볼 때가 있다. 시인은 그 노인의 존재를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그 노인의 ‘무성영화처럼’ “끊어졌다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면서 “하늘을 나는 돌부처”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노년에까지 삶에 충실한 노인의 모습에서 어떤 숭고함을 느끼고는 “가벼워진 날갯죽지”를 발견한 것, 하여 시인에게 노인은 발 없는 부처로 보였던 것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9-22
오죽하면 내 어깨에 누우랴마는 몸이 아프면 내리는 눈발도 아파 보이는 때가 있다 이제 그렇지는 않고 고운 눈에게는 고운 눈의 삶을 돌려준다 그 대신 내가 아플 때 당신도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신도 돌려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발자국 들어내고 싶네 이런 사랑뿐이라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 사랑하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 눈 쓰는 자루와 비 쓰는 자루가 달라서 함께할 수 없는 자리 끝내,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고 둘이 될 수 없는 길 기어이 멈추지도 않는다 ‘당신’은 누굴까. 제목을 따라 시가 아니겠는가. “내가 아플 때” 아파하는 ‘당신’, 시. 그럴 때면 “고운 눈에게는 고운 눈의 삶을 돌려”주듯이, 시도 시 자체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그것이 시에 대해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라는 것, 시인과 시는 합치될 수 없기에. 하지만 시인과 당신은 둘이 될 수도 없어서, 시인은 “끝내, 결코” 시가 있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9-19
빗소리가 만들어주는 공간. 빗소리가 들리므로 열리는, 저 공간이 살아나는, 그러므로 따라서 갈 수 있나. 할 수 있을까. 빗소리를 따라 한다면, 비를 따라 한다면, 어떻게? 비의 이음새처럼. 비의 물갈퀴라는 듯이, 비의 지느러미라는 듯이. 그 공간. 내내 있으면 문득 비에게 우엉을 주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데. 우엉밭에서 우엉을 캐다가 비에게 건네고 싶어. 이 공간. 빗소리가 계속 공간을 만드는데. 우엉을 건네나, 비에 씻긴. 이 빗소리에서 저 빗소리까지의 공간감. 거기서 나는 생겨나나. 생겨날 때 나는 건네는 것, 건네지는 것이라고. 그 공간과 빗소리와. 한옥에 살아본 사람은 빗소리가 주는 감각의 기억을 갖고 있을 터, 위의 시는 그 빗소리가 가져오는 어떤 변화를 섬세하게 말해준다. 빗소리에 새로 공간이 열리고 살아난다는 것을. 시인은 나아가 빗소리를 어떻게 따라갈 것인지, “비의 지느러미”가 될 것인지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새로 생겨난다는 것을 느끼면서. 빗소리에 자신을 “건네”고 자신이 “건네지는” 가운데 ‘우엉’처럼 변화하고 있는 ‘나’를. 문학평론가
2024-09-18
열매, 꽃, 잎사귀, 나뭇가지 여기 있어요, 그리고, 그대만을 향해 뛰는 나의 가슴 여기 있어요.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이 가슴 찢지 말아요, 하찮은 선물 그리도 아름다운 두 눈으로 반겨주어요. 나 왔어요, 아직도 이슬에 젖어 있어요, 이마에 맺힌 이슬 아침 바람에 얼어요. 그대 발치에 누워, 지친 이 몸 달래줄 귀하디귀한 그 순간들 꿈꾸게 해주어요. 그대 어린 젖가슴에 나의 머리 묻게 해주어요 그대의 지난번 입맞춤 소리 아직도 울리고 있는 이 머릿속 달콤한 폭풍 가라앉게 해주어요, 그대 누웠으니 내 잠시 잠들 수 있게 해주어요.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의 시. 현대엔 써지기 힘든, 절절하게 구애를 표현한 시다. 이슬 얼 정도로 찬 바람 부는 아침에 ‘그대’에게 달려온 화자. “지난번 입맞춤”을 잊지 못하기에. 그의 머릿속은 그 키스의 기억이 일으키는 “달콤한 폭풍”으로 폭발 직전이다. 이 격렬함을 달랠 수 있는 건 그대밖에 없으니, 그는 자신의 “가슴 찢지 말”기를, 추위에 떠는 자신을 달래주기를 ‘그대’에게 빌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9-12
얘기를 끝내자마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햇살 너머 북한산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이 말을 할 때까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이 세상’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북한산’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일 테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도 그러한 ‘것’일 터, 그러한 책을 읽거나 저 사람 없는 북한산을 쳐다보는 일은 그러한 ‘것’들과 우정을 나누는 일,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그 “돌이 말을 할 때까지” 마주하는 일처럼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4-09-11
기타가 천장에 누워 있고 술병이 제 그림자 껴안고 벽에 붙어 있다 앉아 있는 열 명과 서 있는 한 명이 의자와 식탁과 피아노가 시를 읽는다 옅은 불빛이 가만히 노래한다 누군가는 야간 비행을 읽고 12개의 그림이 한 액자에 담겨 있듯 우리의 생각을 장밋빛 영상으로 서로에게 담는 저녁이다 사물들이 숨 쉬는 공간이 있다. 저 ‘Book Bar’가 그런 곳. “천장에 누워 있”는 기타나 “제 그림자 껴안”은 술병을 보라. “의자와 식탁과 피아노가” 사람처럼 “시를 읽”고 있다. 사물들만이 아니다. 불빛도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공간에서는 “우리의 생각”은 서로에게 비추어진다. ‘장밋빛 영상’을 통해. 메마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지만, 저러한 공간이 있어서 그래도 우리는 삶의 원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4-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