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죽었다 잠에서 깨어 그것을 들었다 풀이 가늘게 자랐다 슬픔은 더 얇아질 수 없어서 그림자로 남았다 더 얇아질 수 없는 옷을 걸친 물체들이 12월을 지나고 있다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고 있다 계절도, 그 계절 속의 한 월(月)도 삶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12월도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위의 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죽음의 소식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물체들’을 통해서. 가령 가늘게 자라는 풀을 통해서. 그렇게 물체들이 입은 얇은 옷을 투시함으로써. 그 얇은 옷은 “더 얇아질 수 없”는 슬픔이기에. 슬픔을 입은 물체들은 죽은 12월 안을 지나가며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9-09
방에는 개와 나 ? 우리 둘뿐이다. 마당에는 사나운 폭풍이 무겁게 울부짖는다. 개는 앞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개를 바라본다. (중략) 나는 알고 있다. 우리 둘은 똑같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똑같이 떨리는 불꽃이 타오르며 빛난다. 죽음이 날아와 자신의 차가운 넓은 날개를 퍼덕거리면… 끝장이다! 우리네 가슴속마다 어떤 불길이 타는지 누가 알까? 아니야! 지금 시선을 주고받는 것은 동물도 인간도 아니야…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두 쌍의 동일한 눈이다. 동물과 인간도, 이 두 쌍의 눈에도, 동일한 생명이 서로를 의지하며, 겁먹은 채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호 이반 투르게네프의 시. 개와 인간이 “똑같다”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는가. 개는 말을 못하지만, 인간처럼 생명을, 삶의 의지를 갖고 있다. 시에 따르면 창밖에 불어오는 사나운 폭풍우로 죽음이 “넓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다가오고 있을 때, ‘나’와 개는 “동일한 생명”으로 존재함이 드러난다. 이때엔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별 의미 없다. “서로를 의지하며” “겁먹은 채 서로에게 다가”갈 뿐이기에. 문학평론가
2024-09-08
오래전부터/ 운동 삼아 걷기를 하는데 갓밝이 무렵 오늘따라/ 천근만근이다 어제 종일 비 온 뒤라/ 상대 습도가 높은 때문인가 천근만근, 이 무게는/ 도대체 무엇일까?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체중계 눈금을 읽으니 그끄저께 그저께/ 몸무게랑 같다 눈이 저울이던 어머니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체중계가 어찌/ 천근만근을 알 수 있으랴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기계가 우리 몸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가. 체중계는 같은 몸무게를 보여주지만, 어느 때는 ‘천근만근’이지 않는가. 시인은 자신의 몸이 왜 ‘천근만근’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천근만근’은 몸의 감각이기에 의식으론 원인을 알 수 없는 것. 하나 “눈이 저울이던 어머니”는 시인의 ‘천근만근’을, 그 원인을 알아챘을 테다. 의식 과잉인 현대인과 달리, 그녀는 몸과 하나인 직관을 갖고 있었기에. 문학평론가
2024-09-05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견딥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듯 밤을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마음도 마음 아닌 것도 모두 잠들지 못하는 밤 그건 뭐였을가요? 봄에는 직장을 잃고 가을에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구직도 구애도 구원도 없는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건넙니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여 가끔 눈부셨던 그건 뭐였을까요?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진 위의 시에 따르면,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견”딜 때, “개처럼 더 단순한 진심”이 된다. 사랑을 잃고 직장을 잃고, 이젠 “구직도 구애도 구원도”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감지할 때, 그런 진심을 갖게 될 터, 이때 우리가 밤을,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 이 어둠 자체를 대면할 때야말로 “눈물처럼 빛나”던 그것이 기억에 떠오르고,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리라. 문학평론가
2024-09-04
다정해서 좋구나 뒷산 스님 혼자 기거하는 샛길은 은행잎이 샛노랗게 묻어두었다 아마도 스님은 출타 중인가 보다 나는 무밭에 나가 무 하나 뽑아 무생체를 만들고 옅은 커피 한 잔 듣고 테크에 나와 앉아 커피를 마시네 고양이는 종이상자 안에서 잠을 자고 햇살 받은 고양이 등이 하릴없이 따스하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뤄두고 오늘은 밤나무 숲에 들어가 벌레 숨어든 밤송이나 주워 와야겠다 저런 “다정해서 좋”은 ‘소일’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다. 내일에 대한 어떤 걱정도 하지 않고 지금 다가온 감각을 만끽하는 소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어느새 마음에 걱정거리만 가득 찬 삶을 살게 되어서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종이상자 안에서 잠자는 고양이처럼 ‘소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버린 것. “밤송이나 주워 와야겠”다는 마음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4-09-03
사랑이 망할 때마다/ 녹지 않는 눈이 내려 하늘의 살을 덮고/ 오래 잔다 꿈속에선 아무 잘못이 없어/ 이마를 내놓고 놀고 하늘에선, 내가 나를 포기하는 속도와 상관없이/ 눈이 계속 내리고 그럼 꼭 사면될 수 있을 것 같아/ 즐겁게 맞고 눈이 그치면 돌아가야겠지만/ 돌아갈 곳이 없이 눈은 그치지 않는 그런 꿈/ 그런 밤은/ 영영 밤이고 어느 날 다시 궁금해지겠지 가망이 없어 사랑이 망하는 걸까/ 사랑이 망해서 날 망치는 걸까 위의 시에 따르면, 사랑이 망하면 마음에는 “녹지 않는 눈이 내”리며 하염없이 쌓이기만 한다. 사랑이 망한 시인은 이 눈-‘하늘의 살’-을 덮고 잘 터, “나를 포기하는 속도와 상관없이” 내려주는 눈은 그래도 자신을 망치고 있는 시인을 사면해준다. 돌아갈 곳 없는 시인을 덮어주는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리는 밤, 하나 이 눈은 잠 속의 꿈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며, 그 눈을 덮고 자는 건 “영영 밤”을 사는 일과 같다. 문학평론가
2024-09-02
연탄은 제 몸에 왜 저리도 많은 구멍을 뼈아프게 내야 잘 타는지 내가 연탄처럼 속이 새까맣게 타들며 온몸에 구멍이 난 채 밤 지새워 누군가를 데워보지 않았을 때는 몰랐네 19공탄 구멍 뚫린 몸끼리 진저리 치도록 함께 불타다가 벌겋게 달궈진 집게에 짚여 올라오면서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던 불타는 응집력 어둠이 투창처럼 완고하던 한겨울 마당 숭숭, 내가 구멍 뚫린 심장이 되어 죽은 듯이 드러누워서야 다 보았네 위의 시는, 연탄이 보여주듯이 구멍이 많아야 잘 탈 수 있다는 아픈 깨달음을 말해준다. 구멍이 많다는 건 상처가 많다는 것, 상처가 있어야 다른 이를 데울 수 있다. 상처를 통해 타인과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응집력의 불이 “누군가를/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연탄이 필요하듯, 시대가 추울수록 심장엔 구멍이 뚫리는 법, 하지만 뚫린 심장은 우리를 잘 타게 해주고 타인과 함께 불탈 수 있게 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9-01
가슴에 칼을 맞고 거리에 사람 하나 쓰러져 죽어 있었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네. 가로등이 어찌나 떨던지! 어머니 길가의 조그마한 가로등이 어찌나 떨던지요! 때는 새벽이었네. 아무도 냉혹한 공기를 향해 부릅뜬 눈을 차마 마주볼 수 없었네. 가슴에 칼을 맞고 거리에 사람 하나 죽어 있었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네. “거리에 사람 하나 쓰러져 죽어 있”다. 위의 시는 죽어가는 그 사람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 하여 그는 죽음까지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맞아야 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런데 어떤 사물이 죽어가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존재감조차 없던 가로등이, 이 비참한 죽음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면서. 거리의 무심하고 냉혹한 사람들과는 달리, 저기 버려진 사물-가로등-이 인간적인 감정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8-29
눈 비비는 골목이었어요거무스레 나서고 있는 잔잔한 기침들 꽃잎이 시린 볼을 감싸고 있었지요길게 늘어선 눈빛 어디로 향하는 갈구일까 싶어휘어진 팔자걸음마다 낙화 된 시든 이파리어쩌면 새벽의 반대편 노을의 색감을 보는 듯이 길은 어느 길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지만이른 길을 나서는 수많은 걸음들목적지 알 수 없는골목이 잠을 깨는 아침이다. 계절은 늦가을인 듯하다. 이파리가 낙화가 되었다니 말이다. 날씨도 쌀쌀하다. 골목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잔기침 소리가 들리고 “꽃잎이 시린 볼을 감싸고 있”다. 날도 저물고 있다. 한 해가 겨울을 향해 저물고 있듯이. 시인은 이 스산한 골목길 풍경에서 삶의 운명을 본다. 우리 삶은 골목을 지나가는 이들처럼 “어느 길로 가는 길이지” 모르면서 노을의 색감에 물들어간다는 운명을. 문학평론가
2024-08-27
술 취한 바닥이 이마에 붙었다 머리카락이 거꾸로 섰다 쾌청하다는 말로 삿대질을 했다 빙빙 혈관이 겹쳐지고(중략)있잖아 생일날 아득해져서 악다구니가 되더라초록을 잡초라고 우겼다 초록 물결이 차가워서 호호 불어주었다 내가 나를 안아도 춥구나조명에 간격이 생기고 내가 내 머리카락을 잘랐다 복병처럼 비명을 쥐어짜고 있었다엎어져서 처분만 기다리는 줄 아무도 몰랐다 내가 생소해서 검은 밥처럼 굴러갔다바닥은 바닥으로 넘쳐났다.스무 살 생일은 비성인과 성인의 경계선이 되는 날이다. 위의 시의 시인은 그날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다. 스무 살 그땐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갔으며, 그해 생일엔 악다구니가 되어 “비명을 쥐어”짰다는 것. 그에게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생소해서 검은 밥처럼 굴러”가는 것처럼 어두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위의 시를 읽고 나니, 바로 그러한 낯섦이 스무 살에 걸맞은 심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4-08-26
삼십 년 전 구로 3공단에서 납땜 경력 쌓은편집도 하고 경리도 보는 출판사 관리팀장앞세우고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 빌딩지하 케이터링 업체 네댓 줄로 식판을 들고줄을 선다 양도 많고 값이 싸니까(중략)굴뚝이 디지털이 되었다 하더라도밥과 국그릇에 스파게티만 가득 담은 청년과노동에서 손을 뗐어도 한참 되었을 노인이몰래 비닐봉지에 닭튀김을 꾹꾹 담는 것 사이에산업화 시대와 디지털 산업 시대 사이에 어떤차이가 있나 식권 열 장 카드로 사면 칠만 원현찰로 사면 열한 장 칠만 원 사십 년 전보다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유리빌딩 지하의 점심에는노동과 임금 수준과 체계에는 아직도 금일 저녁야근을 할 건지 말 건지 질문이 담겨 있다야근자에게는 저녁 식권 한 장이 주어진다삼십 년 전 노동자와 현재 노동자 처지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시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다. 둘 다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의 보수를 받고 있어서,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야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한다. 야근하면 저녁 식권이 주어져서 저녁 비용을 줄일 수 있기에. 공장이 빌딩으로, “굴뚝이 디지털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밥값을 줄이기 위해 저녁의 삶을 포기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8-25
강물에서 멱을 감다가난 곧잘 모래 위에서 뒹굴곤 했다뜨겁게 달구어져머리카락이며 옷이며 신발이며물기만 있으면 달라붙던 작은 알갱이들그때쯤이면 달착지근한 냄새가근처에 있던 어머니의 떡함지로부터 풍겨왔다어머니의 손끝에선 밤과 낮이 찧어지고긍지와 수난이, 희망과 오해가 빻아져서색색깔의 꿀떡, 바람떡, 시루떡으로 빚어지곤 햇다몰래몰래 집어먹던 떡에 모래 알갱이들이 함께 씹혔다모래들은 다리가 되고 빌딩이 되었다가다시 부스러져 내리고허파 가득 채워지는 바람의 부피입안에서 서걱이는 모래의 시간들강변에서 멱을 감던 시절, “물기만 있으면 달라붙던 작은 알갱이들”은 시인에게 점착된 행복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삶을 부드럽게 기억으로 감싸며 달라붙는 시간. 아버지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어머니-자연’의 시간. 이 시간에는 “근처에 있던 어머니의 떡함지로부터 풍겨”오는 “달착지근한 냄새가” 난다. 떡함지 같은 그 시간에는 어머니와 같이 가난한 이들의 “긍지와 수난이, 희망과 오해가 빻아져” 있다…. 문학평론가
2024-08-22
교도소로 납품되는 형벌들죄가 돈이 되는구나큰 죄가 큰 돈이 되는구나죄를 짓는 종사자들시를 짓다니! 멍청이 같으니라고오래된 한탄 속에노을이 목을 베러 온다노을을 목에 감는다국적란에 붉은 선을 아름답게 긋는 화가시비詩碑의 전문을 긁어 백비를 만드는 시인재생되는 돌의 질감배경에 깔고 천천히 나는나를 그린다죄를 짓는 이들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는 곧 어둠이 닥칠 것을 예고하는 노을이 창밖 하늘에 깔리고 있다. 이에 시인은, 노을이 자신의 목을 베기 전에, 아예 “노을을 목에 감”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고 한다. 하나, 그 목에 건 노을빛은, 화가가 국적란에 아름답게 그은 ‘붉은 선’과 같은 것. ‘있는 그대로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국적이니, 명예니 하는 모든 인위적인 것들을 지우기 위한 붉은 선. 문학평론가
2024-08-21
사랑을 잃으면 밤이 찾아온다아침 햇살은 아직 빛나건만하늘을 떠 가는 배 모양 구름은 보이지않고구름이 있던 자리에는햇빛의 영광마저 사라진다산마루에 감돌던 광휘도 사라지고눈에 맺히는 경치는 아름답지 않네사랑을 잃으면 보이는 모든 것이활기를 잃고 처량하다사랑은 인생을 화사하게, 단단하게 바꾸고사랑은 떠날 때 슬픔을, 그늘을 남기고유령처럼 윤기 없는 시간은 느릿하게 지나간다슬픔에 빠졌을 때 위안이 되는 생각은 우리 모두 죽는다는 것아, 사랑을 잃으면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윌콕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여성 시인. 이 시에서 그녀는 “사랑을 잃으면” 어떤 일이 벌어나는지 절절하게 읊는다. 낮도 밤처럼 어둡고, “보이는 모든 것이/활기를 잃고 처량”하게 되며, 삶의 시간은 “유령처럼 윤기 없”고 “느릿하게 지나간다”는 것. 사랑을 잃어본 자는 이 구절이 정말이라는 것을 잘 알 테다.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위안은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뿐이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4-08-20
눈물은 심장에 맺히는 것이었다거기 고이는 것이었다그러므로 동맥을 타고 올라온 모든 눈물은피눈물이다(중략)바다는 잠자지 않고더욱이 바다는 꿈꾸지 않고다만 내디딜 뿐살 뿐이다더 이상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둥글어질 수도 없지만, 그렇지만 바다는 오늘도 좀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외로이 둥글어진다중심을 한사코 파 내려가면거기 아직도 바스러지는 심장이 있다바다에서 눈물을 보고 듣는 시인. 그 눈물의 연원은 심장에 있다. 심장에서 “동맥을 타고 올라”오는 눈물. 그래서 그 눈물은 피눈물이다. 그 바다의 눈물은 우리 마음에서도 뿜어지지 않겠는가. 누구나 마음 한편에 바다를 두고 있을 테니까. 그 바다는 “꿈꾸지 않고/다만 내디딜 뿐”인 마음이다. 마음의 “중심을 한사코 파 내려가면” 도달하는 “바스라지는 심장”의 마음. 그 마음에서 피눈물이 솟아나고 있지 않은가. 문학평론가
2024-08-19
큰 바윗덩이를겹겹 뿌리로 감싸 안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본다그 근처 나무들은 저 홀로 쑥쑥 자유로운데저 막무가내를 어쩌나천형처럼 피하지도 않고어쩌다 서로 말문이 트였는지힘줄이 되고 얼개가 되어전신을 다해 바치는한 뿌리의 지극저 갸륵한 한 나무의 가호가오늘의 경전이다송영희 시인에게 경전은 매일 매일 다르다. ‘오늘의 경전’은 어떻게 발견하게 된 소나무 한 그루. 그 소나무는 “저 홀로 쑥쑥 자유로운” “그 근처 나무들”과는 달리, 마치 천형처럼 “큰 바윗덩이를/겹겹 뿌리로 감싸 안”고 있다. 소나무는 자신의 짐이 된 바위를 힘줄처럼, 얼개처럼 받아들이며, “전신을 다해” 바위에 자신을 바치는 지극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 오늘은 시인에게 그 모습이 신의 가호처럼 다가온다. 문학평론가
2024-08-18
갓길로 등 굽은 노인이 걸어오는데요어떤 슬픔은 녹이 슬어다시 펼 수가 없습니다먼 곳에서부터 달라붙는 죽음을쿡쿡 누르며 걸어오는 지팡이둘이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합니다서로의 그림자를 밟던 걸음이개나리와 손잡고 피어나는 봄날한 줄로 그어 놓은 공중의 길당신은 버스 창가에 앉아지상을 보고 있네요풀숲 위로 손 하나가 날아오릅니다손바닥을 접었다 펼칠 때마다웃는 얼굴이 뭉텅뭉텅 지워집니다손이 마치 지우개 같습니다악수란 그런 것이겠지요- ‘나비’후반부‘상가 다녀오는 길’에 어떤 등 굽은 노인을 보면서, 시인은 그 노인에게 달라붙으려 하는 죽음”을 포착한다. 그 노인에게 슬픔은 오래 달라붙어 있어서 녹이 슨 정도, 노인은 겨우 지팡이로 지하에서 올라오는 죽음을 “쿡쿡 누르”고 있다. 지팡이만이 그의 ‘오래된 친구’인 것. 봄날 피어나는 개나리는 저 죽어가는 노인과 대조되는데, 마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저승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는 나비처럼 보인다. 문학평론가
2024-08-15
모든 새집은 단칸방이다.새집도 월세가 있고 전세도 있을 것이며화려한 집도 있을 것이며 소박한 집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세상의 모든 새집은 단칸방이다이것은 새가 생겨난 이후 변화가 없다새집은 단칸방으로 완벽한 평등을 이루었다평등은 진화가 없는 개념으로 세상의 죽음 이후완벽한 평등을 새집에서 보았다세상의 모든 새집은 평등의 단칸방이다그리고 그 평등을 거부하는 새를 본 적이 없다새들은 날개의 크기가 달라도새집의 크기는 날개를 접은 새의 크기로완벽하다새는 욕심이 없나? 모든 새집이 단칸방인 것을 보면. 새들은 각자 “날개의 크기가” 다르더라도, 딱 “날개를 접은 새의 크기로” 새집을 짓는다. 그래서 “모든 새집은 평등”하다. 이 평등함은 “새가 생겨난 이후 변화가 없”는데, 시인은 “평등은 진화가 없는 개념”이라면서 이 새집이 “완벽한 평등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빈곤의 평등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는 단견이다. 새들은 ‘빈곤’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문학평론가
2024-08-13
(전략)나는 하나의 이파리가 되어 허공을 떠다닌다.저녁노을은 추억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오래된 책이다.책장을 넘기면 먼 곳으로부터 북소리가 들린다.하늘을 날아다니던 붉은 마차가 산을 넘어가자죽음의 빛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본다.결국 나는 허공을 떠도는 시간의 흔적이고물방울인 내가 언젠가는 강으로 들어갈 것이다.침묵의 아름다움이 슬픔의 방향이었고시간은 그 슬픔을 데리고 떠나는 새로운 소식이었고결코 백발이 되지 않는다.이별과 이별은 만나서 새로운 시간을 만든다.물을 마시던 다친 새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밤의 따뜻함이 그 종착역이었다.‘해-붉은 마차’가 산을 넘어가며 나타나는 노을은 ‘밤-죽음’이 올 것임을 알려준다. 그래서 노을은 죽음의 빛이겠는데, 그 빛은 “물방울인 내가 언젠가는 강으로 들어갈” “시간의 흔적”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노을은 아름답지 않은가. 죽음, 그 침묵은 아름다워서, 죽음이 가져올 슬픔의 방향은 아름다움을 향해 있다. 죽음을 통해 “이별과 이별”이 만나고 “새로운 시간”은 형성되는 것, 하여 종착역인 밤은 따듯하다. 문학평론가
2024-08-12
기차가 또 나를 지나갔다철길에 엎드려있던 마음이우두커니 지나간 기차를 본다다리를 절룩이며달빛이 일어서고 있다크고 작은 별들이 쏟아지고온갖 기억들이 맨발로 걸어온다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내 기억의 끝은 늘 맨발이었다백 년을 걸어도 돌아보면 벌판이었다(중략)뭉큰 돋아나는 기억을 싣고어디 가닿는 데도 없이 기차는 또 달린다철로 옆에서 지나가는 기차를 ‘우두커니’ 보며 어떤 아련함을 느끼곤 했다. 위의 시는 이 아련함의 정체를 말해준다. ‘나’를 지나치고는 사라지는 기차는 잊고 있었던 기억을 “뭉큰 돋아나”게 한다는 것. 이때 “기억들이 맨발로 걸어”오고, 절룩이는 달빛이 맨발의 기억을 비춘다. 기차가 주는 아련함은 이 기억으로부터 오는 것, 시인에게 다가온 기억은 무엇인가.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하여 늘 벌판이었던 삶…. 문학평론가
2024-08-11